ilman의 세계여행(1)

러시아(1)/ 북유럽 여행

ilman 2023. 2. 6. 11:51

*. 모스크바(Moskva) 이야기 

                                                                                                                      ( -그림출처: 네이버)

국토면적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러시아(Rusia)는 한반도의 77배나 큰 나라다.
그 러시아에는 인구 1억 4천6백70만여 명이 산다. 수도 모스크바에는 1,211만여 명, 옛날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는 5,000만여 명이 사는 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이 세계 33위(20,590\$)에 비해 62위(11,041\$)로 한국보다 못 사는 나라였다.

내가 방문했을 2001년에는 GDP가 220\$의 아주 가난한 나라였다.

초등학교 시절 해방을 맞은 내 나이 또래에게는 반공 교육의 대상이었던 소련, 그 무서운 큰 나라의 수도 모스크바에 와서(2001년) 우리가 처음 느낀 것은 가난과 초라함이었다.

모스크바(영어로 모스코바)의 관문이라는 공항 시설은 천장은 낮고 낡고 침침한데다가 퀴퀴한 냄새마저 났다.

그 음침한 분위기 속에 세월아 너 가라 식의 느린 느릿한 무성의한 입국 수속은 시차(時差)에 지친 우리들을 더욱 짜증나게 하였다.

그 사이 들려 본 화장실의 불결함이란. 검은 휴지에다 망가진 시설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물은 흙탕물이다.
그런 실제 모습을 보러 왔으면서도 속절없는 불평이 맴돌고 있었다. 누가 그 비싼 돈 드려서 러시아가 얼마나 못 사는 나라인가 보러 여기까지 왔나?

서울의 2배라는 모스크바 시내에 들어서니 길 양옆에 아파트가 보인다. 1층은 상가로 된 같은 모양의 소련식 아파트다.

거리는 비교적 깨끗하였다. 이른 새벽이면 청소부가 거리의 오물을 차도로 쓸어 내고, 그것을 공기 청소차 몇 대가 치우고 지나가면 바로 그 뒤에서 살수차(撒水車)가 물을 뿌려서 저렇게 거리가 깨끗하다 한다.

차의 정체(停滯)는 서울을 뺨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낡은 중고 자동차가 길을 메우고 있었고, 도중도중 고장 난 차가 길을 막고 서 있다. 그 정체 된 거리에서 건장한 청년들이 차 사이를 오가며 꽃을 팔고 있다.

길가 건물 옥상 곳곳에 선 '대우(大宇)'와  'LG'의 입간판이 우리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하는데, 모스크바 대학 박사과정에 다닌다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 모스크바 사람들은 한국이 일본보다 더 잘 사는 나라라고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듣기 싫지 않은 이야기였다.

  정체가 심한 곳에는 어김없이 늙거나 병든 이가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동냥을 하다가 그대로 지나치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설을 퍼붓는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을 보다가 시내에 즐비한 고색창연한 제정 러시아의 우람한 건물들을 마주치게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부자로 살던 사람이, 살던 바로 그 집에서 열심히 가난을 살고 있는 나라가 러시아라고-.

국민소득 11,041불의 나라. 상위 층 10%에 하위 층 70%로 중산층(中産層)이 거의 없는 나라로, 1998년 IMF를 맞은 나라다.  내가 방문했던 2001년에는 의사 교수의 월급이 월 100불(13만 원 정도)이고, 교통순경의 수입이 30불로 박봉을 보충하기 위해서 적당히 서로 뜯어먹고 사는 나라가 러시아였다.

한적한 도로를 질주하다 보면 반대편 차가 헤드라이트르로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 준다. 그러면 얼마 안 가서 만나게 되는 커브 길에 어김없이 러시아 경찰이 함정 단속을 하고 있다.

권총 차고 오가는 차를 붙들어 노상강도 노릇을 하던 10여 년 전 한국 경찰의 모습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당시에도 저렇게 자행되고 있었다. 그다음에 간 북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한 번도 만나 볼 수 없던 경찰들을 수 없이 볼 수 있는 나라가 러시아였다.

  거리에서 유심히 살펴보면 차가 지나갈 때 손짓하는 사람이 있고 그러다 함께 타고 가는 사람이 눈에 뜨인다.

노랑 색깔의 영업차는 너무 비싸고 드물어서 자가용을 세워 흥정하여 타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허용되는 나라가 러시아인 모양이다.

길가는 사람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장을 하고서도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비닐 속에는 우리가 가방에 넣고 다니는 일상 용품이 들어 있다 한다. 가방을 살 수 없는 여유가 주원인이라지만, 러시아 상점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물건을 사고 나서 물건을 넣을 봉지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생긴 빠겟뜨 문화(봉지 문화)의 모습이었다.

왼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오른손에 맥주나 콜라, 보드카 병을 들고,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며 거리를 산책하는 사람들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러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병문화(甁文化)'라 하던데 지금도 그런지 궁금하다.

과거에 세상을 지배하였고, 원자탄을 가진 나라로 인공위성(人工衛星)을 세계에서 제일 먼저 쏘아 세상을 놀래게 한 그 저력은 어디로 가고, 소련은 이렇게 사분오열되어 러시아가 왜 이 모양으로 못 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생각해 보라. 소유의 개념 없이 일을 해야 하고, 일의 양과 질에 관계없이 똑같이 월급을 준다면 누가 힘써 일하겠는가.
공산주의란 모든 생산 수단이 자기 것이 아닌 사회의 공유가 되는 사회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똑같은 보수를 받는다는 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이다.

통제 사회에서 자유 사회로, 단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우리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바뀐 요즈음 세상에 통하는 이론일까.

아무리 과거에는 꿀 같이 달콤한 이론이었다 하더라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러시아 여인들은 그 미를 앞세워 성(性)을 팔러 작은 나라 한국을 찾아와서 서울과 대도시 밤거리를 배회하는 고달픈 신세로 전락한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옛날보다는 적어졌지만 요즈음에도 거리의 러시아 여인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히프/ 모스크바 서커스

  러시아 여인이 아름답다는 말은 이곳에 오기 오래전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파란 눈, 오뚝한 코, 새하얀 피부, 작은 얼굴, 날씬한 몸매에 어딘지 모르게 숨겨진 동양적인 모습의 알맞은 키. 러시아 여성들은 세계 남성들이 동경하고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성이었다.

  러시아 여인은 왜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울까?

내가 알기에는 옛날 한 동네 사는 총각 처녀끼리 결혼하는 것보다 예로부터 피가 섞이지 않은 아주 먼 동네 사람들끼리 결혼한 분의 자녀들이 인물 좋고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1238년에 몽고의 침입과 오랜 지배는 동서양이 피를 섞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때문에 트기가 예쁘다고 하듯이 그래서 러시아 여인들이 이렇게 예쁘다는 것이다. 우생학적으로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들 여인 중에서도 오늘 가서 본 서커스에 출연한 여인들은 선택된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방년 18세 내외의 처녀들이다. 거기에 운동으로 몸매를 가꾼 처녀들이고, 공연 중 모두가 히프를 드러낼 수 있는 한 드러낸 차림의 모습이었으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남정네들에게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의 눈요기라. 여독(旅毒)을 강 건너 보내 놓고 우리는 숨소리를 죽이고 서커스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까워 금하는 사진 촬영을 체면 불고하고 몰래카메라 하다가 시집가면 미워진다는 늙다리 러시아 여인에게 들켜 버리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중단하고 말았다.

서커스는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스스로 자랑할 정도로 러시아인들은 서커스를 좋아한다.

'국민이 좋아하는 것은 국민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의 주인은 국민이다 ’라고 레닌(Lenin)이 말한 것을 보아도 그 역사가 퍽 깊다.

단원들은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대를 있어 가면서, 저와 같은 기술과 예술에다가 여체의 미를 더하였으니, 아름다움을 탐하는 이 노(老) 시인의 휘둥그레진 눈을 누가 있어 노안의 주책이라는 차원으로 나무랄 수 있겠는가.

 

*. 붉은 광장/ 크렘린

  드디어 나는 모스크바의 심장과 같은 붉은 광장에 서 있다. 이곳은 러시아 역사의 살아 있는 현장이 되는 곳이다.

'붉은 광장'이란 말은 메이데이나 혁명 기념일에 걸린 붉은 현수막과 사람들이 들고 나온 붉은 구소련의 깃발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 러시아어인 '크라스나야'란 말은 '붉다와 아름답다'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그래 그런가. 이 붉은 광장은 크렘린과, 레닌 묘, 수많은 탑들, 성바실리 사원, 굼백화점 등에 둘려 싸여 있어 음침하리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처음 가본 우리들의 눈에는 아름다움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중 우리들의 눈을 끄는 것은 건물로는 이 러시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성바실리 사원 성당이다.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이 건물을 지어 놓고 보니 너무나 아름답고 멋있어서, 다시는 이런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성당을 설계한 자의 눈을 뽑아 버렸다는 비화 맺혀 있는 이야기 탓일까.

그런 유미주의 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도 그 붉은 모습의 양파 모양의 8개의 지붕들은 우리의 넋을 뺏을 만하였다.

'굼 백화점'을 가는데 어디선가 종이 울리고 있다. 이곳에 오면서 본 '삼위일체 종각'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였다. 탑의 사방에 대형 시계가 부착되어 있어 매시간마다 15분에 한 번씩 울려 준다고 하는-.

크렘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구원의 문' 위의 맨 꼭대기에 있는 루비 별은 크기가 3.75m나 된다는데 그 안에 5,000 볼트의 전구가 있어 풍향 따라 360도로 회전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 대포 왕 중의 왕/ 크렘린

   크렘린 근처에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대포의 왕'과 1733~35년에 만들었다는 '종'이 제정러시아의 강성했던 시절을 보여주고 있다.

대포의 길이만도 5.34m이고 무게는 40t. 그 앞에 놓인 대포알의 지름은 105cm 무게가 1t이나 된다. 종의 무게가 200t에 높이가 6.14m로 그 주조 공장의 화재로 한쪽이 깨어져서 전시되고 있다. 이 대포와 이 종들은 한 번 사격도 해보지 못하고, 울려 보지도 못한 채 왕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 성당인가 무덤인가/ 우스펜스키 사원

  저기 보이는 금빛 노란 돔은 무슨 사원일까?
거대한 사원 위의 비잔틴 문화의 양파 모양의 돔을 장식하고 있는 색깔이 노란 것은 보이는 것처럼 모두가 순금이다.

나폴레옹 군이 후퇴할 때 뺏은 금 300Kg과 은 5톤으로 사원 위의 양파 모양 돔을 장식을 한 것이다.

이 성당이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는 크렘린 최고의 건물인 '우스펜스키 사원'이다.

  성당 내부의 벽들에 당시 화가 1,000여 명이 장식했다는 ‘이콘' 화는 그 잔형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각 벽에는 모스크바 최초의 주교였던 '뾰뜨르의 관’을 위시해서 유명했던 주교들과 신부들의 관들이 놓여 있다. 쇠로 된 관이었다. 
우리나라 성당에 들어서 느껴지던 성스러웠던 마음과는 달리 이름처럼 성모승천 사원은 무덤에 온 듯 음침하다. 이곳은 성당인가 무덤인가?

  
*. 세계 3대 미술관에서/ 에르미타쥬 박물관  

(그림출처 :아브리브출판사 /'상트페터르부르크롸 근교')

러시아 여행에서 모스크바 다음에 들려야 하는 곳이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다. 우리들의 귀에 익은 레닌그라드를 원래 이름대로 다시 고쳐 원래대로 부르는 이름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젖줄 네바 강 델타 지역에 형성된 자유 섬, 크고 작은 101개의 섬과 65개 이상의 강과 양안(兩岸)을 500여 개의 다리가 연결해 주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북방의 수도(水都)'라는 애칭으로 불려 왔다.

핀란드 만에 있는 스웨덴에게 빼앗겼던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 땅에 맨 처음 관심을 둔 이는 러시아의 세종대왕이라고 할 수 있는 표트르 대제였다.

문화가 발달한 '유럽으로의 열린 창'을 건설하기 위하여 여기에 요새와 계획도시를 건설하고 모스크바에서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리하여 18C 말기까지만 해도 인구 22만의 한촌(寒村)이 제정러시아 200년 동안 수도로 있으면서 지금과 같은 인구 470만의 세계적인 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도시는 보수적인 고전적인 낭만적인 도시로 알려져 왔다.

흔히 모스크바를 ‘러시아의 심장'이라 하고 상트페테르스브르크는 ‘러시아의 머리'라고 일컫는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유리한 여기서, 서구주의 운동의 선두를 달려왔고 따라서 고도로 발달한 학술, 문학, 음악, 연극, 발레 등의 중심지로 문화의 도시, 예술의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는 만리장성을 보아야 하듯이, 이집트에 가서는 피라미드 스핑크스를 보고 와야 하듯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에르미타쥬 박물관이다.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의 3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박물관은 역대 황제들의 처소인 겨울 궁전이라는 ‘동궁(冬宮)'과 4개의 건물이 낭하로 연결되어 있다.

 400여 개에 이르는 방과 홀의 전시품을 다 보기 위하여서는 14마일(40 리)을 걸어야 한다. 에카테리나 대제가 베를린 상인에게서 샀다는 유럽의 세계적인 대가의 작품 225점을 위시해서, 회화, 조각으로부터 장식과 응용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무려 3백만 점에 이른다. 이것을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관' 등으로 고대 미술품을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미술에 식견 있는 사람이 있어 이를 다 보려고 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하나의 전시품을 보는데 1분을 잡고 하루에 8시간씩 박물관에 매일 들른다 해도 15년이나 걸려야 전 소장품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1층에서 3층까지 1시간 반에 후딱 보고 나왔다. 이것이 투어의 매력인가 투어의 서운함인가.

내 비록 미술에 조예가 없고 미술에 손방이라 하더라도, 저기 걸린 웬만한 그림 하나의 값으로는 궁색을 떨지 않고도, 평생을 아내와 함께 원하는 곳의 어디나 세계를 돌며 자고 먹고 마실 수 있는 가치 있는 고가의 예술품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래서 귀에 익은 그 소장품을 캠코더에 담아 올 때의 감격이란. 그때마다 가보(家寶) 하나를 여기서 마련하는구나 하였다.

해외여행 중 서양 미술에 접할 때마다 귀국하면 최소한도 미술 감상만이라도 할 수 있는 식견(識見)은 길러야지-, 하다가도 돌아와서는 흐지부지하곤 하였는데 여기 세계 명화들의 원화(原畵) 앞에 서니 또다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되는구나.

후진국에 갈 때마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도 촬영을 금지당하는 것이다.
바다 건너 저 하늘을 날아 이 먼 이국땅에 이것을 보러 찾아온 관광객에게 어째서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 캠코더 촬영까지를 왜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 ‘꽃을 가진 성모'와 라파엘로의 ‘성모상', 미켈란젤로, 스페인의 루벤스의 ‘무지개가 걸린 풍경', 렘브란트의 ‘천사와 성가족'을 만나고, 프랑스의 세잔, 고호 등을 만나 도둑 촬영의 스릴로 행복하였다.

 거기에 3층 복도에 걸려 있는 김흥수 화백의 ‘승무'라는 작품이 우리의 발길을 한참이나 머물게 하였다.

 

*.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증명서/ 표트르 바브로크 성당 

122.5m나 되는 높이의 표트르 바브로크 성당은 1703년에 지었다.
이곳에는 제정러시아의 최후의 비극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와 세 딸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 
  그보다 더 유명한 신화 같은 전설이 바브로크 성당과 연관되어 저해 오고 있다.


이 성당에 불행하게도 화재가 두 번이나 났다.

그래서 그 꼭대기의 피뢰침이 떨어져 나가는 등 윗부분이 많이 망가져서 수리를 하여야만 했다.

건축술이 발달하지 못한 17,18C 당시에는 그물이나 치고 수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는 생명을 건 모험이기 때문에 누구나 꺼리는 일이었는데 데리킨이라는 건축가가 표트르 대제에게 조건부로 자기가 하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이 사람 같이 유명한 술꾼이었다.

"신이 책임지고 수리하겠사오니, 완성되거든 평생 동안 아무 데서나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게만 하여 주소서."

수리는 완성되고 왕은 약속하였던 대로 증서를 주어 전국 어디서나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증서를 발부하여 주었다.

(그림출처 :아브리브출판사 /'상트페터르부르크 근교')

소원대로 마음대로 술을 마시며 다니던 어느 날, 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증서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표트르 대제를 찾아가서 분실 사유를 고하니,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도록 목에다 문신을 하여 주었다. 그로부터 러시아인들은 손가락으로 목을 툭툭 치는 것이 술 마시러 가자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만약 데리킨처럼 그런 증서를 가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만 원어치만 술 먹자고 '일만(一萬, ilman)'이라 호(號)하는 궁색을 떨지도 않았을 터이고, 길가 좌판에 죽치고 쭈그리고 앉아 막걸리나 퍼먹는 대신에, 카페나 고급 양주 집으로 다니면서 여성 편력도 원 없이 심심찮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이대로가 오히려 행복인 것 같다.

 

  *,세계 5대 성당의 하나/ '이삭 성당'  

그림출처 :아브리브출판사 /'상트페터르부르크 근교'

  양파를 거꾸로 놓은 듯한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당이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에서 제일 높다는 건물이 바로 '이삭 성당'이다.

19C에 41년 동안 50만 명 노동자를 동원하여 지어 놓은 성당이었다.

모래가 쌓여 형성된 네바 강 삼각주에 세워 있기 때문에 지반이 아주 약하여서 이를 보완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성당 밑을 가로 세로로 철 490톤과 주철 990톤, 구리 70톤과 은 30톤의 청동으로 2만 5천여 개 기둥을 만들어 저렇게 우람하게 박아 놓았다. 이렇게 하여 길이가 111m 폭이 98m로 세계 5대 성당의 하나 '이삭 성당''을 지었다. 이 성당은 1만 4,000여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커서 제정러시아 교회가 얼마나 그 권위가 막강했던가를 과시하는 듯하였다.

 

*. 여름 궁전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 페떼르브르그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0Km를 달려 핀란드만을 끼고 형성된 작은 도시 '페테르호프의 여름 궁전'에 이르니, 갑자기 애국가가 그 무서웠던 소련 적성 국가 이국 하늘에서 울려 퍼진다. 우리들이 가는 길목을 지키고 기다리고 있던 약삭빠른 거리의 악사들이었다.

이들끼리는 서로 약속을 했는지, 더 가서는 '아리랑'을 그다음 장소에서는 '봉선화'를 연주하여 마음 약한 우리들의 손을 주머니로 향하게 한다.

마지막까지 그냥 지나치기에 마음이 찔려 1달러를 주었더니 자기들 옆에 와서 사진 찍고 가라고 나팔을 부는 자세를 취해 준다.

  우리나라에서의 세종대왕 정도로 러시아에서 유명한 표트르대제가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에게 승리한 기념으로 짓고, 여기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표트르의 궁전'을 보통 여름 궁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을 찾는 외국 관광객만도 하루 평균 1,000여 명이 넘는다 한다.

이 여름궁전의 광대한 부지에는 대궁전을 중심으로 20여 개의 작은 궁전과 크고 작은 대리석 석상과 분수 등 이 있고, 수목 사이에 안배된 7개의 공원이 있어 러시아의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들른 분수공원은 주로 보리수나무와 연못을 이용하여 영국식으로 만든 '상공원(上公園)'과, 해안에 프랑스식으로 이루어진 '하공원(下公園)'으로 나누어져 있어, 장난분수, 요술분수, 대분수 등에서 갖가지 모양으로 요란하게 물을 뿜어 올리고 있다.

18C초 건설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서 수압을 이용하여 분수를 움직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 저수지에서 수영장으로 물을 끌어 16m 경사진 아래 공원의 분수에다 물을 공급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중 장관은 '삼손분수(Samson噴水)'라는 대분수(大噴水)였다. 도금한 많은 동상과 화병과 접시 등에서 수많은 분수가 한데 어울려 높이 물줄기를 뿜어 올리고 있는데, 그 아래 연못 가운데에는 사자의 턱을 찢어 여는 모습이 있다. 바로 삼손분수였다.

강력한 한 줄기의 굵은 물줄기가 그 벌려진 사자의 턱을 나와 20m까지 시원하게 치솟아 올라간다. 표트르대제는 삼손이 자기를 닮았다고 늘 주장하였다 한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색 벽과 흰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는 건물이 있다. 이것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여름 궁전 '표트르 대궁전'이다.

  

*. 해외여행 가서 부부 싸움하는 바보

  이상하게도 우리 부부는 해외여행 중에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젊어서는 퇴근 후에 돈 떨어져서야,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 작은 집' 찾아 어슬렁어슬렁 돌아오던 내가, 그래서 깊은 밤에만 늘 만나 오던 아내와, 해외여행 나와서 온종일 며칠씩 함께 지내다 보니 아내는 옛날의 내 마누라가 아니다. 2, 30년을 함께 살아오며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아내가 아니었다.

한평생 콧소리 섞인 애교 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했다 해서, 술 안 마시고 돌아오는 날이 거의 없다 해서, 서로 다툴 때 다음 다시 태어나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던 아내의 말이 정말이었나?

왜서일까? 여행할 때마다 비디오 촬영 한답시고 버스 맨 앞자리에 혼자 앉아 가는 비정한 이 남정네 때문에 함께 간 사람들에게 체면을 구겨서인가. 아니면, 아파트로 이사 와서 벌써 10년째 네 방, 내 방하고 따로 자서 정이 멀어져서인가.

  특히 기념품 상점에서 시비가 오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부부들은 모양 좋고 사이좋게 잘도 붙어 다니지만 우리 부부는 언제나 항상 제 각각이다.

그러다가도 내가 무언가를 사려고만 하면 어느 틈에 쏜살같이 달려와서 훼방을 놓는 바람에, 아무리 싸우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벼르고 왔건만 속이 왈칵 뒤집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귀국 길에 우리 부부는 늘 싸웠다.

내가 '다시는-' 하면은 이에 질세라 자기도 '나도-' 하면서 맞받아 돼 치며 도끼눈을 부라리곤 하였다.

그래서 해외여행 떠날 때 우리 자식들의 배웅 인사말도 '싸우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하는 식이다.

그래서 싸움의 주원인이 달러 때문이라고 애꿎은 달러에게 죄를 물어 공평하게 똑같이 나누어 각자 챙겨 가지고 떠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그 효험을 약간은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투어 비용만도 무려 1초에 4원이 넘는 북유럽 여행이라. 비싼 돈 치르고 간 해외여행에서 부부 싸움질은 얼마나 큰 낭비인가 해서 단단히 마음에 다짐하고 떠나왔다. '아내 회갑 기념 여행이니 정말 싸우지 말아야지-.' 하고,

다음은 인터넷에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내게 " ilman(필자)이 생각하는 바보는 어떤 경우냐." 물어 온 것에 대한 나의 답장이었다.

 

1. 아내 자식 자랑하다 병신이 되고 싶다는 남자.

2. 죽도록 일하고도 월급/공무원 연금을 아내에게 다 빼앗기는 남자.

3. 그 돈으로 옷 사주고 밥 사줄 때 감격해하는 남자.

4. 아내보다 빨리 죽어야 행복하다는 남자.

5. 자식에게 목돈 뺏기고도 후회 안 하는 남자.(아직 미정) 

6. 비싼 돈 내고 해외여행 가서 부부 싸움하는 남자.

7. 그래서 나는 바보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대표적인 보기 ♂→ il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