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스웨덴(Sweden) 여행/ 스톡홀름 (Stockholm)

ilman 2023. 2. 6. 12:25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도시/ 스톡홀름 (Stockholm)   

 어제저녁 핀란드를 떠나온 호화 여객선 실야라인이 아침에 멈춘 곳이 스웨덴인데, 입국 수속도 밟지 않고 신기하게 그대로 나왔다. 거기가 바로 스톡홀름(Stockholm)이었다.

북유럽의 나라들은 국가 간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사는 나라이라서인가, 관광객의 진을 빼고 출입국 시키는 러시아와 비교하면 이런 선진국의 자부심이 자못 부럽기만 하다.

 스웨덴(Sweden)은 유럽에서 4번째로 큰 나라다.

한국보다 2.4배나 큰, 길고 가는 나라이다. 인구는 한국의  1/9밖에 안 되는 1,027만 명(2015)으로 인구 밀도가 아주 낮다. 전 국토의 절반이 삼림지대로, 호수만도 9만 6천여 개나 된다. 경작지가 10%뿐이지만 나라에서 지원하는 발달된 농업 기술로 하여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의 질을 누리고 사는 선진국으로 2,000년 IMD평가로 세계 국가 경쟁력 9위였다.

1810년대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것을 최후로 오늘까지 중립을 지켜 왔기 때문에, 6.25 사변 덕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일본처럼,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의 덕을 본 나라다. 싸움에 휩쓸리지 않아서 전쟁 중 호황을 누리어 선진국에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Stockholm)은 '물 위의 아름다움'이란 이름 그대로 발트해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곳의 14개 섬에, 53개의 다리가 하나의 스톡홀름으로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스톡홀름은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섬보다 아름다운 곳이 있던가. 바다와 뭍의 어울림, 그 해안선 등등-.
  스톡홀름(Stockholm) 주변에는 2만 4천 개나 되는 아름다운 크고 작은 섬이 있다. 거기에다가 중세 옛 모습을 간직하기 위하여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건물들은 바다에 둘려 싸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한데 어울려 환상적인 스톡홀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자연 풍광에다 고풍스러운 모습을 더하여 스톡홀름은 북구의 베네치아(Venezia)로, 문화적인 면으로 ‘북구의 파리’로 애칭 되고 있다.

스톡홀름은 바다로 둘려 싸인 도시이기 때문에 시내 어디에서나 요트와 수영과 낚시를 즐길 수가 있다.

 스톡홀름(Stockholm)의 어원은 무엇일까?

13세기 초에는 많은 외국의 무역선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하여 통나무로 울타리를 쌓았다.
‘스톡(Stock) '이란 통나무요 ‘홀름(Holm)'이란 섬이란 뜻이어서 ’통나무 섬'이란 뜻으로 스톡홀름이라 한 것이다.

'바사호 박물관'에 가는 도중 크고 작은 많은 공원 중에 귀에 익은 '노벨 공원'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지나는 이곳은 옛날 노벨이 노닐던 곳이요, 세계적인 여우 잉그렛 버그만이 자라던 도시와 나라요 , 그 거리였다.

 저기 보이는 돛대는 있으나 돛이 없는 커다란 하얀 군함(軍艦)은 호텔이다. 물의 도시답게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쓰이는 배가 물 위에 떠서 관광객을 저렇게 우아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침몰하여 더 유명해진 전함/ 오슬로 바사(Vasa)호

  스웨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시대는 '바사 (Vasa)  왕조'였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싸워 스웨덴의 발트해 지배를 완성시킨 왕이 바로 북방의 사자 왕이라는 '구스타프 2세'였다.  

 왕은 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배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국력을 기울여 건조를 시작한 지 3년만인 1628년 8월 드디어 진수식(進水式)을 하는 날이었다.

'바사(Vasa) 호'는 길이 47.70m에 64문의 대포를 적재한 1,300톤 규모의 당시로는 세계 최대 전함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전함 바사 (Vasa) 호는 독일과의 30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진수식에서 불행하게도 100m도 못 가서 전쟁의 문 앞도 가보지 못한 채 선원 150명과 해군 300여 명과 함께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너무 많이 실은 대포와 포탄의 무게에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후 수심 30m인 발트해에서 대포는 일부 건져낼 수 있었으나 당시의 기술로는 그 커다란 전함을 예인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난 후 해양 고고학(海洋考古學)을 전공하던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이란 학생이 바사 호에 대하여 교수의 강의를 듣고 바사 호를 예인(曳引)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이 꿈이 현실화되어 드디어 안데스 (Anders Franzen) 의 불굴의 집념은 1956년 물속 깊이서 잠들어 있던 바사 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유럽 각국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1961년에 스웨덴은 국력을 기울여 목조 전함 바사 호를 침몰 후 333년만에 인양하게 되었다.

목조 전함은 세월을 잊은 듯이 멀쩡하였다. 단단한 1천 그루의 참나무로 제조하였고 ,발트해에는 소금기가 없어서 나무를 갉아먹는 박테리아가 서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굴 당시의 스웨덴 왕은 우리나라 경주를 다녀갈 정도로 고고학(考古學)에 깊은 관심이 있는 왕이었다.

예인 후 20년 동안 보수를 끝내고 드디어 1990년 지금의 7층으로 된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한 '바사 박물관 (Vasa varvet)'이 개관되어 인류 고고학의 개가를 이루게 되었다.

바사 (Vasa )란 구스타프 2세의 아버지로 덴마크와 싸워 스웨덴을 독립시켰던 구스타프 바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시 전함은 4척이 있었지만 그 임무를 수행한 전함보다, 침몰하였기 때문에 중세의 조선기술을 고스란히 보전하게 되었고, 현존하는 배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말해 주는 스톡홀름의 제일가는 자랑거리가 되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모든 것에 양면성(兩面性)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제작 과정과 그 예인(曳引) 작업 자체가 인간 의지의 승리였다. 전함 바사 호는 전함이라기보다 선체 후미의 황금빛 화려한 180여 개의 예술적인 조각 하나 하나와 더불어 중세 선박 미술사를 말하여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와 같았다.          

 

*. '신(神)의 손'/ 밀레스 조각공원(Millesgarden)

 스웨덴의 세계적인 조각가 카를 밀레스(lidingo)는 19C 초 사람으로 파리로 가서 로댕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올가라는 초상화 화가와 결혼하여 파리에서 아이 없이 살았다.
뒤늦게 귀국하여 발트 해가 보이는 '리딩고(lidingo) 섬'의 언덕 위 자기 집에다가 그의 조각은 물론, 그가 평생 수집한 것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그가 죽을 때 자택과 함께 나라에 기증하였다.

 그래 그런가 조각 작품마다 그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하고, 밀레스(Milles)가  작품을 제작하다가 우리를 마중 나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한다.

작품 내용은 주로 '북유럽의 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그중 푸른 하늘을 향하여 뻗은 그의 대표작 ‘신의 손'이 밀레스의 손 같이 느껴진다.

밀레스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렇게 생전에 살던 집에서 사랑하던 시민과 나와 같은 외국 관광객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유럽 여행에서 스웨덴은, 핀란드가 그러했듯이 노르웨이의 그 유명하다는 피오르드(fjord)를 보러 가는 도중에 잠깐 들르는 중간 기착지 정도로 일정이 잡혀 있다.  

 그래서 스웨덴 관광은 오전에 바사 박물관 관광에다 오후에 밀레스의 조각 공원을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스톡홀름의 발생지라는 감라스탄(Gamla Stan)이란 구 시가지도 주마간산(走馬看山)도 못 되는 주차 간(走車看) 감라스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북구를 떠날 때부터 벼르던 내일 가기로 된 노르웨이 3일의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을 다시 설레게 하였다.

커다란 커피 잔이 지붕 위에 있는 찻집이 딸린 신기한 전차를 보면서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호텔로 향하였다.

 

*.  스웨덴 인들의 생활상/ 스톡홀름

  요람(搖籃)에서 무덤까지의 사회 보장 제도를 자랑한다는 스웨덴 인의 생활상은 어떠한가.

 스웨덴은 유럽 대부분이 나라가 그렇듯이 부부가 같이 맞벌이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다.

한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1년 4개월 동안 자식 양육 휴가를 받는다.

그동안도 물론 100% 월급을 받고, 거기다가 한국 돈으로 약 10만 원 정도의 양육비를 16살 될 때까지 정부로부터 받는다.   만약 병이 든다면 받고 있던 월급의 80% 정도를 받으며 집에서 쉴 수도 있다.

직장인은 누구나 주 40시간 일하고 일 년에 5주 휴가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주 5일제 근무로 토요일은 휴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9년인 의무교육 기간에는 학비는 물론 점심과 교과서 등이 무상으로 지급되고, 2/3가 진학하는 대학교도 학비가 무료다.

그러나 4년제 종합대학은 한 개의 도시에 한 개뿐이라서 대학 문이 우리나라 같이 좁은 편이다.

사립 대학교도 있지만 2년제나 전문대학이고 수업료를 받는다. 그러나 국가 보조를 받기 때문에 금액이 그리 많지는 않다.

스웨덴 보통 부부가 버는 돈은 4인 가정 가족 기준으로 우리나라 돈 400만 원 정도를 받으며(이하 2001년 기준) 남자가 여자보다 약간 많다.

  여기서 세금이 30%, 아파트 월세 60만 원(전세는 없다) 음식값을 제하고 나면 월급이 자로 잰 듯이 딱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스웨덴 인은 은행에 현금을 예치해 놓은 사람이 드물다. 돈이 있어야 자식 교육도 시키고, 아프면 병원도 가야 하고, 노후도 자기가 스스로 준비해야만 하는 우리들 나라와 달리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달 조금씩은 저축하여야 한다. 6개월이나 계속되는 겨울이 오면 가족과 함께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지로 햇볕을 쬐러 여행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몇 달씩 흑야(黑夜)가 계속되는 이곳 사람들의 낙(樂)이 햇볕 쬐러 가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정년퇴직하고 받는 돈은 25세부터 일하였으면 월급의 80%를 받는다. 일한 기간이 그보다 짧은 사람은 물론 그보다 적게 받는다.
그러나 연금에 전적으로 의탁하기에는 부족하여 각자가 보험에 들거나 증권 투자 등을 통해 노후를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여유로운 노년을 보낼 수가 있다.

  이 나라는 30년대 이후에 산업이 발달해서 유럽에서 다섯 번째 부자 나라였으나, 1990대 오일 파동에 침체기를 맞아 주춤하였다. 그 침체기에 빈부의 격차가 벌어져서 현재에 이르렀다.

누구나 여름이 오면 공원에 나와 일광욕을 즐기지만 그 고마운 햇볕도 두려워졌다. 오존층 파괴로 인하여 피부가 약한 서구 사람들에게 피부암이 걸릴 확률이 높아서였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햇볕을 함부로 쪼이지 말라고 정부가 경종을 내린 지 오래되었다.

  흔히 스웨덴을 ‘사회복지와 성 개방의 대명사’로 후리 섹스 나라라고 불려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의식 구조나 문화가 동양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알려진 말이다. 그 속에는 철저한 질서가 있으니 말이다.

이 나라 부모들은 자식들이 13~14세만 되어도 자유로운 이성 교제를 허락하여,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데리고 집에 와서 함께 자도 인정해 줄 정도다.

처녀 총각이 사랑하게 되면 집을 얻어 함께 산다. 그러다가 평생의 반려자라 생각되면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정은 여자 편에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 후 둘 중에 하나가 한 눈 팔아 잘못을 저지르면 그 책임을 져야 하고 즉시 이혼을 하게 된다.

결혼 전에는 조심하다가 결혼 후에는 자유로워지는(?) 우리나라 남정네의 경우와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혼은 교회에서 한다. 그러나 종교가 다른 사람은 교회에서의 결혼이 불가능하므로 그런 사람들은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 결혼식은 신혼부부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결혼식이다.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에 결혼식이 있는데 길면 3분, 짧으면 1분밖에 안 되는 간단한 결혼식이다.                                         -사진출처: 내가 이용한 롯데관광 "시청청사"

그래서인가 이 나라에는 이혼율이 높다.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높아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좋으나 싫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사람들이 드물다.

이혼하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으면 1주일씩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가 있다. 만약 재혼하면 배 다른 형제끼리 어울려 복잡한 가정에서 살게 되기도 한다.

  차창 밖에 이상한 사람이 지나간다. 덥지 않은 초여름에 팬티만 입고 시내를 경보(競步)로 가는 사람이었다.

결혼하면 짓궂은 신랑 친구들이 신랑을 다는 그런 문화가 여기도 있는 모양이다.

대부분의 가정이 적어도 한 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고 국민 70%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1998년 현재 우리나라 교민은 865명이다.

  이상은 30대 중반의 긴 머리 처녀 한국 현지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녀는 발랑 까진 가이드처럼 능숙한 언변의 가이드가 아니었지만, 다양하고 심도 있는 안내로 우리들에게 신빙성을 주는, 교양과 품위를 가춘 조용한 여성이었다. (이상은 2001년 기준) 

                    

                                  -다음 최종회 ' 노르웨이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