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노르웨이(Norway) 여행/ 북유럽

ilman 2023. 2. 6. 20:58

노르웨이(Norway) 여행


*. 우리는 피오르드를 보러 간다/ 노르웨이 산하 
 스톡홀름(Stockholm)을 떠나올 때 끼었던 짙은 안개는 사라지고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마냥 아름답기 만한 하늘을 건너 노르웨이를 향한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초록빛 산야와 호수를 굽어보며 40여분 달려 드디어 나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Oslo)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 수도 오슬로의 시내 관광은 마지막 날로 미루고 우리는 피오르드(Pored)로 유명한 게이랑거로 향한다.
가다가 처음 들른 곳이 스키 점프 장, 파란 인조 잔디 점프대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이 겨울 나라 젊은이들과 그 시설을 부럽게 지켜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르웨이 산야에 강을 따라 난 길을 차가 달린다. 차창 밖의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 떼들이 보이는 초원이 하얀 눈 덮인 산으로 변하고 있었다.
 캐나다가 자연만 보고 다니다가 인가를 찾아가는 여행이었다면, 노르웨이에는 어디고 자연과 더불어 인가가 있다.
그 집은 초원 속에 묻혀 있었고, 자연과 인공이 한데 어울려 있다. 우리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라고 노래하던 그 자연이요 그런 집들이었다.
 찌는 듯한 여름 서울을 떠나 오슬로에 오니 6월 초여름이었는데, 우리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곳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다. 우리는 몇 시간 만에 여름을 뛰어 넘어서 겨울 나라를 찾아온 것이다.
길가에 눈 깊이를 재어 보기 위해 박아 놓은 기둥 사이로 차가 달린다. 여기가 '달스니바'라고 불리는 빙하(氷河) 지역이다.
정상이 가까울수록 길가에 쌓인 눈은 그 사이를 달리는 우리의 이층 관광버스 높이만큼 눈이 쌓여 있는데 그 단면에다가 짓궂은 관광객이 붉은 색깔로 무언가를 써 놓았다.
온 산에 눈이 덮여 있고 거기에 흰 구름이 끼어 설산(雪山)인지 구름인지 모르는 하늘 아래 만년설이 쌓인 그  사잇길로 차는 힘들게 붕붕- 오르고 있다.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는 노르웨이 최고 지점이라는 1,495m '달수바 전망대'를 지났는가. 차는 깎아지른 천길 낭떠러지 험준한 두메산골 트롤스티겐(trollstigen)이라는 좁은 길을 지나가고 있다.
꼬불꼬불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에 차가 천길 절벽으로 곤두박질하는 듯하다가도 용케도 이를 피해 가는 곡예 운전에 '아하!' '어유-!' 감탄하면서 우리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안도(安堵)의 박수였다.
 갑자기 아내가 구박을 한다. 비디오 촬영을 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고.
그러나 카메라를 대면 차가 금방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다시 대면 또 오른쪽으로 굽어져서 어떻게 꾸불꾸불한 이 길의 버스 속에서 저 멀리 눈 아래로 보이는 예이랑거의 모습을 담아 찍을 사이가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기만으로도 벅찬 찬란한 이 아름다운 감흥을 어찌 손으로 흩어 버릴 수 있겠는가.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날이 오늘이구나!' 하였다.
캐나다 로키에서 내가 보고 온 것이 우러러보는 경치였다면 노르웨이 여행은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그 속에 우리가 함께 하는 그런 여행이었다.
이젠 다 내려왔는가 하는 곳에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조용한 교회가 있다.
우리네 교회와 달리 뜰에는 수많은 비석이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살다 간 무덤을 지키고 서 있다. 북구의 모든 교회가 그랬다. '교회=무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 밖 지붕 귀퉁이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외로이 앉아 알을 품고 있다.
망원으로 잡기에 너무 멀어 캠코더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갈매기 한 마리가 무엄하게도 두 번씩이나 나에게 찍을 듯이 덤벼든다. 암놈을 지켜 주고 있던 수놈인 모양이다. 이런 나를 여행객들의 카메라가 열심히 찍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우리 아들 생각이 난다.
 결혼을 20여 일 앞둔 녀석이다. 이제 내 보호를 떠나 훨훨 날아갈 놈이다. 30년이 넘도록 내가 저 수놈 갈매기처럼 지켜 준 막내아들놈이다.
결혼식을 고회 장로(長老)인 장인은 기독교식으로 하자하고, 불교(佛敎) 신자인 어머니는 남들처럼 우리 신랑 편에서 주관하자 해서 그 틈바구니에서 고민하고 있는 아들과 새아기가 생각난다.
 그래서 그 절충안으로 주례 없는 결혼식의 시안(試案)을 만들어주고 다녀올 동안 결정해라 하고 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 아, 지상의 천국 노르웨이 산하여!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산 이가 죽어서 갈 수 있다는 나라. 영혼이 축복받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은총과 축복의 나라가 천국(天國)이란다. 그곳이 지상에 있다면 북유럽이고 그중에서도 노르웨이 같았다.
노르웨이의 여행은 버스, 기차, 유람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중에도 버스 여행이 주가 된다. 그 차 타는 시간이 하루에 항상 6시간이 넘었다.
  차창을 향해 눈을 돌리면, 어디에나 우리가 서울에서 잃어버리고 살던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을 만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노래 속에서 걸어 나와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그 진한 초록빛 초원에 묻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다.
100m 이상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자주 볼 수 있어서다. 세상의 모든 맑은 공기, 청정한 자연이 여기로 모두 피난 온 것 같다.
이렇게 노르웨이는 수천 개의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연 하나하나는 그대로 이 나라의 관광자원이 되어 자연에 목마른 여행객들의 마음을 적시어 주고 있다.
우리가 러시아에서 보고 온 것이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힘이었다면, 노르웨이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신이 만든 장엄한 자연 그대로의 세계였다.
  산에 오르면 눈 덮인 겨울이 있고, 그 산록(山麓)은 다투어 꽃 피는 봄인데, 수도 오슬로는 6월 초여름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순서대로만 살아온 우리가 단 하루 동안에 가을만 빼고 세 계절을 다 만날 수 있던 곳이 노르웨이었다.
차를 달리다 보면 스키를 다녀오는 차가 지나가고, 명승지 곳곳마다에 캠핑 차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3일 동안 내내 달려도 길옆에서 소리 내며 흐르는 강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강에 낚시를 드리우면 나 같은 낚시꾼의 소원이던 팔뚝만 한 연어를 초심자라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곳이었다.
 캐나다에 여행하면서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다가 외경(畏敬)과 경탄(驚歎)을 더해도 모자라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극찬하고 다녔으나, 그것은 찾아가 본 경치였는데, 노르웨이는 시선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모두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닌 곳이 없었다.
 젊어서 울릉도에 갔을 때 울릉도에 우연히 왔다가 울릉도가 너무 아름다워 이렇게 눌러살게 되었다는 할아버지를 만난 일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회사 일로 50여 개국을 다니다가 노르웨이에 매력에 취해 노르웨이를 60여 번이나 방문하고 그 멋에 반해서 가족과 함께 와서 눌러 산다는 한국인 교포의 말을 들어보자.(홈페이지 참조:www. norway114.com)
"여기 오시기 전에 유럽이나 미국 등 전 세계의 아름답다고 알려진 곳을 미리 다 돌아보고 오세요. 이곳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다른 나라의 여행은 시시하게 되니까요. 로마나 파리를 먼저 보고, 유럽의 다른 도시를 나중에 가서 느끼는 실망과 같으니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물과 공기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오염이 없는 나라, 그리고 남한 4배의 국토 면적에 450만 인구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면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친절을 사는 나라가 노르웨이랍니다."
노르웨이에서 느낀 감흥을 어떻게 설명할까. 시(詩) 는 설명할 수 없는 생략된 예술이라 하여도, 잠시 시심(詩心)을 빌려 보자.

 파란 하늘, 흰 구름을 꼭 닮은 만년설에
녹아내리는 폭포수와 산록의 초원 집들
여기에
하나 더하면
맑은 공기뿐이었어
                             -노르웨이 여행

 노르웨이(Norway) 는 지구상 가장 북방에 있는 나라 중 하나다. 6.25 사변 때에는 우리나라에 병원선(病院船)을 보내 주어 의료 지원을 하여준 고마운 나라다. 지금의 중앙 병원의 전신은 메디컬센터였는데 그것을 건립 운영하다가 우리나라에 그 시설 전체를 이양해주기도 한 잊지 못할 Korea의 우방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다. 문화가 같기 때문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북유럽도 마찬가지.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다섯 나라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주변에서, 비슷한 종족들이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경제적으로도 비슷한 수준으로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잘 사는 나라로 지금은 노르웨이를 꼽는다.
 1인당 GDP로 본 잘 사는 나라의 서열이 노르웨이(42,364\$)가 1위 룩셈부르크(69,800%) 다음 제2위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면적이 2,586㎢로  강화도(302.4㎢)보다 아주 작은 나라요, 노르웨이보다 125배나 작은 나라이니 노르웨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다.
  북구 나라 중 가장 국가 통일이 늦은 나라가 노르웨이였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우리나라가 을사 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맺던 1905년에야 겨우 독립한 나라다.
 독립을 할 때 노르웨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은 평야 지대나 옥토 지대 등 기름진 곳은 다 자기네가 차지하고, 당시로는 가장  쓸모없었던 서쪽 산악 지대를 노르웨이에 넘겨주었다.
  그런데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듯이 이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줄이야. 그 산악 지대에서 나오는 총수출액의 14%나 차지한다는 임산(林山)과 석탄 수출은 물론, 산악 지대의 급경사에서 소리 내며 흐르는 강을 이용한 풍부한 수력 발전은 그 양이 연간 800억 Kwhr라, 오히려 스웨덴과 덴마크에 수출하는 자원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1968년에 북해(北海)에서 발견된 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 다음 가는 세계 2위 석유 수출국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부자 나라가 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산유국 대열에 들면서 국민 1인당 GDP가 10만 불에 육박하는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부한 전력과 석유 자원들은 공업국 노르웨이로 이어졌다.
그뿐인가, 백야(白夜)와 피오르드나 빙하 등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은 누구나 와보고 싶어 하는 관광국 노르웨이가 되게 하였다. 선조 바이킹(Viking)의 후예인 장신(長身), 장두(長頭), 금발, 벽안(碧眼)을 지닌 이들은 조선(造船)에서도, 어업(漁業)에서도, 그리고 해양 업(海洋業)에서도 세계 제일의 국가를 만들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험준한 지형, 냉혹한 기후, 빈약한(?) 천연자원이 이렇게 뒤바뀌어 신의 축복을 받은 땅 노르웨이가 된 것이다.
  그런 노르웨이 국토에서 고작 450만 사람들이 우리 남한(南韓)의 4배나 큰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서로 아옹다옹 다툴 일이 있겠는가. 서로 속일 일이 있겠는가. 더 이상 부러워할 나라가 있겠는가.

그래서인가 언제 어디를 가던 노르웨이 국기가 나부낀다. 국가가 개인의 자랑이고 자부심이 되기 때문이다.
  내 나이는 생존이 문제였던 일제 강점기(日帝强占期)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때엔  2차 대전을 피해 시골로 소개(疏開)를 갔다가 해방을 맞았다.  6.25 동란 중에는 먹을 것 다 못 먹으며 고생하고 살았다. 6. 25 때에는 그 좋다는 인천중학에 다니다가 미군기지로 증발되는 바람에 신흥초교 강당에 칸을 막은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거기서 졸업을 하였다.
4.19까지 독재 정치 아래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인 후진국(後進國) 백성으로 가난을 살던 중에도 가난한 가정에서 군사 독재 시절에는 울분을 참으면서, 소나무처럼 꾸불꾸불 살아왔다. 이렇게 잡초처럼 살아온 이 초라한 이방인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노르웨이가 추구하는 슬로건이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개인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는 안정 생활의 나라 건설! "
요람에서 무덤까지- , 나라가 그 책임을 진다는 이 나라에서 사회 보장에 대한 그 지출은 국민 총생산의 11%에 달한다.

그중 지출액의 50% 이상이 연금(年金)이다.
 자녀 교육, 병, 신체장애, 업무상 상해, 실업수당, 양로연금, 아동복지 등을 전부 국가가 책임지는 나라다.
그러나 그보다 더 여유로운 노후를 위한 준비는 각자가 알아서 더 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 아기다기고기다리던 피오르드(fjord) 유람/ 밀포드 사운드 
  어제 넘어온 ‘달바스바' 빙하 지역은 겨울이었더니 피오르드로 유명한 여기 예이랑거에는 봄이 와서 이름 모를 북구의 봄꽃이 활짝 피어 이국적인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북유럽 여행에서 보고 싶었던 자연현상으로는 백야(白夜), 빙하(氷河), 오로라(auora), 피오르드(fyord)가 있다.
그중 러시아에서부터 보아 온 밤 11시경까지 책을 읽을 수 있는 백야(白夜)는 신기한 일이 아니게 되었고, 여기 와서 보니 오로라는 현지인도 잘 모르는 북극지방에나 가서야 볼 수 있는 겨울의 이야기였다.
 오로라(Aurora)란 북극 지방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밤에 빛깔이 붉어서 먼 곳에서 바라보면 불이 난 것 같아 보이는 현상이다. 이것을 극광(極光)이라고 하는 것으로 북극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고, 동양에서 적기(赤氣)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색깔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로라(Aurora)는 라틴어로는 '새벽'이라는 뜻인데 이것도 오로라란 새벽녘의 하늘 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은 드디어 세계인이 보고 싶어 부러워하는 노르웨이 피오르드(fyord)를 페리 호를 타고 선상(船上) 유람하는 날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서둘러 영화 타이타닉의 연인처럼 선두에 자리 잡았더니 너무 쌀쌀하다.
촬영하는 손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곱아서 소매를 늘려 손을 덮었더니 고맙게도 아내가 장갑을 구하여 가져다준다. 그래서 늙어 재산이 늙은 아내라 하는 것인가. 강인가 바다인가 하는 푸른 물에 잠겨 있는 천하 절경 속으로 배는 미끄러지듯이 서서히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피오르드의 세계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어 나가고 있다.
버스 수십 대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우리가 탄 유람선 페리 호도 이 우람한 자연 속에서는 하나의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불과할 뿐이었다.
수심 100여 m 가 넘는다는 짙푸른 강물(?)이 흐르는 앞을 산이 막아서고, 거기를 돌아서면 다시 수백 미터가 넘는 천인단애한 절벽이 막아서는데, 그 위에 쌓인 눈 녹은 수많은 폭포수가 바람에 하얗게 눈처럼 흩날리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금수강산보다 야성적이고 남성적인 거대한 모습들이었다.
바닷가에는 조그마한 집들이 있고 그 앞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민일까 여행 온 사람들일까?
'만약 어젯밤 비가 내리고 오늘 같이 맑은 해가 떠 주었다면, 찬란한 무지개가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어울려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일곱 가지의 영롱한 색깔이 어떠한 것인가의 참모습을 보여 주어 평생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준다던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청아한 여성의 한국어 안내 방송이 여기에 한국인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배는 이렇게 1시간을 헬리실트까지 간다.


 V자의 계곡들이 빙하에 U로 깎여
바다가 침입하여 피오르드가 되었다네.
이제야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의

참뜻을 알겠네요.
                                -피오르드(fjord)
  피오르드(fjord)란 협만(峽灣) 즉 좁은 만(灣)을 말한다. 북극 가까운 지방에서 높은 산에 쌓이고, 쌓인 눈이 그 무게에 의하여 거대한 얼음덩이가 된다. 얼음 두께가 30m 이상에 달하면 무게와 경사로 인하여 골짜기로 서서히 흘러내리는 빙하(氷河)가 된다. 이 거대한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V자형의 양안(兩岸)을 U자 형으로 깎는다. 여기에 바닷물이 침입하면 피오르드의 세계가 된다.
그래서 이 피오르드는 바닥에 모래가 없고, 깊이가 100m 이상 깊어 해수욕장으로는 부적당하나, 폭포수를 이용하여 수력발전소를 세울 수 있고, 큰 선박이 드나들 수 있어 항만과 선박 공장 건설에 이용되고 있지만 그보다 그 웅대한 장관으로 하여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관광자원(觀光資源)이 되고 있다.
이런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해안선의 총연장 길이는 지구의 둘레의 반에 해당하는 2만 km에 달한다. 

*. 마차 타고 찾아간 청색 빙하/ 부리스탈(Briksdal) 빙하

  게이랑거(Geiranger) 피오르드의 선상(船上) 관람을 끝내고  '부리스타일(Briksdal) 빙하'를 보러 가는 우리들의 마음은 허전하기만 하였다.
우리가 직접 본 피오르드는 관광 수첩을 통해 꿈꾸어 오던 모습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준비해간 경탄을 하나도 써먹지 못한 채 뭔가 나타나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만 선상 유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U자 형이라는 피오르드는 바다 같은 보이지 않는 푸른 강의 바닥의 세계로 겉보기에는 하나의 깊은 푸른 강물일 뿐이어서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뭐가 이래' 하는 실망이 더 컸다. 그래서 인생은 사는 것보다 꿈꾸는 편이 더 낫다고 하였던가. 그래서 '욕망은 꽃피우나 소유는 시들게 한다. '고 하였나 보다. 
피오르드(fyord)의 세계는 머리로 보는 것이지 눈으로만 보면 단순항 평범한 경치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국립공원 '요스테달의 부릭스탈(Brilsdal)'에 와서는 마차를 타고 청색 빙하(氷河)를 보러 간다. 말만큼이나 큰 노르웨이 처녀 아르바이트 학생 마부가 이끄는 4인 승 마차다.
 커다란 포니(pony)가 노르웨이 처녀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힘겹게 폭포를 지나 꼬불꼬불 길을 돌아 그리고 걸어 6~7분 만에 드디어 우리가 도착한 곳이 '푸른빛이 감도는 청색 '부리스탈(Briksdal)' 빙하였다.
  오뉴월 한여름에 빙하 앞에 서다니, 우리는 지울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여기서 다시 하나 더하는구나 하였다. 이 빙하가 '요스테달스브페(Jostedalsbreen) 빙하'의 일부였다.
 캐나다 로키산에서 본 '콜롬비아 아이스 필드'는 바퀴가 어른 키만 한 시가 5억이라는 특수 설상차(雪上車)로 올라갔었다. 거기서 본 경치는 눈 덮인 평원이었는데, 운치 있게 마차를 타고 올라와서 본 이 빙하는 파란 빛깔이 은은히 감도는 눈의 언덕이요 눈의 산이다.
 이 빙하는 넓이가 468평방 km에 걸쳐 뻗어 있는데, 얼음 두께가 10m에서 500m 전후나 된다. 가장 높은 곳은 2,038m나 되어 유럽에서 두 번째 가는 크기라 한다.
이런 빙하가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골짜기 밑이나 측벽을 깎고 그곳에 바닷물이 침입한 것이 우리가 보고 온 피오르드였다.
이런 빙하가 지금도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려 빙하의 끝 설선(雪線)에 이르면 녹아서 호수가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노르웨이 땅이 1년에 1cm씩 넓어진다고도 한다.
마차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니 처녀 학생 마부가 증명서 하나를 건네어 준다. 등반 기념으로 주는 팸플릿이 있어 보니 마차 사진에 그의 사인까지 들어 있다.
4th day of june 2001 you travelled by traditional pony and trap right up to the Brisked Glacier, deep into the heart of a scenic wonderland. On this ride you have been drawn by a Fording, blond-maned, stocky and sure footed. This good natured pony is Norway's oldest breed.-coachman Alone.
 이 경우 팁을 주어야 하나 안 줘도 되나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가 '에라 1달러 벌자. 1초에 4원이나 하는 북구 여행이 아닌가' 하였는데 지금까지 걸린다.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것인데-.  

 *. 산악 열차에 낭만을 싣고/ 포름↔ 미르달  
                           -그림 출처: 롯데관광 ' 송네 피오르드'
  그 이름이 한국의 어느 고장을 생각하게 하는 송달(Socal)을 떠나 송네(songle)에서 배를 또 탔다.
연장 185km로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속네 피오르드(signe fjord)'를 다시 구경하나 했더니 섭섭하게도 협만(峽灣)을 건너는 것으로 끝이다. 열차를 타고 노르웨이의 산악 여행(山岳旅行)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굴을 지난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길다는 굴을 지난다. 24km이니 60리나 되는 굴로 이를 통과하는데 30분도 더 걸렸다. 바위산을 뚫어서 벽도 울퉁불퉁한 자연석 그대로다. 도중에 파란 불이 대낮 같이 환하게 켜진 곳이 있는데 차가 쉬어 갈 수 있게 한 곳이다.
이러한 긴 굴들을 부지기수로 지나간다. 땅굴을 두더지처럼 제일 잘 파는 자들이 북한 정부가 아니던가. 북한 위정자들이  땅굴 파는 법을 배워 간 곳이 바로 이 노르웨이에서란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행기로 모스크바에 갔다. 자동차로 러시아 국경을 넘어 핀란드 헬싱키에 입국하였고, 초호화 유람선을 타고 스웨덴 스톡홀름에 갔다. 마차 타고 가서 청색 빙하를 보았는데 이제는 기차 여행이라. 그러고 보니 난생처음 최고로 하는 호강이 북구 여행이로구나 하였다.
  기차 여행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안전하고 빠르고 편하다. 덜커덩 덜커덩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주는 상쾌한 소리와 적당히 흔들리는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으면 ‘빼-액-' 하는 증기 기관차의 소리가 추억 속에 들려오고 내뿜는 수증기가 보이는 듯하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또한 어떠하던가.
  국내 여행도 그러했거늘 하물며 외국 열차 여행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르웨이의 산악 열차라니. 그래서 카메라에 캠코더에다 망원경까지 주렁주렁 목에 건 내 요란한 모습을 굴을 지날 때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비렁뱅이 차림이다.
 포름(Flam)에서 탄 열차는 20km 거리의 미르달(Myrdal)까지 1시간 반의 왕복 크로스 관광이다.
포름라인은 1923년부터 철도 공사를 시작하여 20여 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경사가 심한 6km의 절벽 중간에는 험준하고 눈이 많은 산악이라 다리를 놓는 대신 터널과 방설망(防雪網)을 20여 개나 설치하여 놓았다.
이 많은 터널은 산악 지방이라 모두 수작업으로 뚫었는데 1m 뚫는데 1개월이나 걸리는 곳도 있었다고 하니 이러한 노력이 관광 대국으로도 그 부()를 축적하여 국민에게 나누어주는 복지국가가 된 것이리라. 포름 철도 여행은 노르웨이 자연 중 가장 야성적인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이었다.
여름인데도 흰 모자를 쓴 듯한 만년설이 쌓인 산봉우리를 수 없이 지난다. 그것이 녹아 하얗게 바람에 흩날려 웅장한 폭포가 되어 깊은 계곡 사이를 요란히 흐르는 강물 위로 떨어진다.
거기에 어울려 통나무집들이 토지를 조성하여 농사와 가축을 기르는 모습들은 우리를 더욱 감동하게 한다.
 기차가 93m의 '소스 폭포'에서 멈추어 선다. 경치도 보고 쉬면서 사진들을 찍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선가 음악이 울려 퍼지고, 음악 소리에 따라 저 멀리 폭포 중간에 붉은 옷을 입은 마녀(魔女)가 나타나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다.
목적지 미르달(Myrdal)에서 우리처럼 돌아오지 말고 그냥 그대로 계속 달려가면 우리의 다음 목적지 오슬로(Oslo)까지 갈 수도 있다.

  *. 외국 식당에서 꼭 주의해야 할 일들
  여행 10일째 노르웨이 자연 관광을 끝으로 오슬로(Oslo) 시내 관광이다.
점심으로 오랜만에 일식집에서 도시락을 먹었는데 여행 어느 곳에서 먹던 것보다 꿀맛이다. 우리 한국과 문화가 비슷한  일식(日食)에다가 연어 회(鳶魚膾)까지 곁들였으니 말이다.
북유럽 사람들의 단순한 식탁에 비해 우리 동양의 음식 문화는 그들의 문명만큼이나 우리가 더 발달한 것을 깨닫겠다.
그동안 우리가 여행 중에 먹어 온 양식(洋食)이란 빵과 치즈와 우유와 야채와 과일 고기 계란에다 수프가 전부이다.
모두가 남이 만들어다가 파는 것을 사다 먹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가정주부가 직접 굽고, 복고, 졸이고, 끓이고, 찌고, 삶고, 무치고, 담그고, 비비고, 싸 먹는 한식(韓式)은 얼마나 다양하고 화려하던가. 거기에다 싱싱한 회(膾)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Korea다.
 해외 여행하다가 한식(韓食)을 접할 때마다 특식이라 하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한국은 삼천리강토가 다 음식점이라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오히려 다양한 음식 문화를 이룩하게 된 것 같다.
 전라도 여행을 떠날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지던가.
한국 여자 중에 남성들이 제일 좋아하는 여인들이 호남 여인이라 하는 말 중에는 전라도 여인네들이 음식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부심이 큰 몫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행하다 보면 외국인과 어울려 식사를 함께 하게 된다. 그들은 우리네와 달리 식탁 예의를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꼭 주의하고 배워야 할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식탁의 예절을 구체적으로 배운 적이나 있었던가.
 
-식당에 들어갈 때는 꼭 모자를 벗어야 한다.
-핸드백 등은 식탁 위에다 두지 말고 의자 위에 두자.
-손목의 윗부분을 식탁에 올려놓되, 팔꿈치를 식탁에 올려놓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이니 주의하자.
-식사 중에 트림을 하는 것은 아주 실례가 되는 일이다. 내장인 위에서 괴어 생긴 가스라 불쾌하게 생각하고 야만인으로 오인받기 쉽기 때문이다.
-식사 중 얼굴이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은 실례가 된다. 서양 사람들은 이를 불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식사 전에 미리 고기를 잘게 썰어 놓지 말고, 먹으면서 조금씩 썰어서 먹어야 한다.
-음식물을 입에 넣은 체 음료수를 마시는 것은 예절 바른 태도가 아니다.
-식사하고 난 후 그릇은 웨이터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두어야 한다.
-무릎 위의 냅킨으로는 입가를 살짝 닦아 입가를 깨끗이 하여 주고 식사가 모두 끝나면 냅킨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이상은 노르웨이 교포 홈피 www.norway114.com 참조)
*. 북유럽 나라들은 왜 잘 사는 거지? A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북유럽-' 하면,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다가 내가 가보지 못한 아이슬란드를 더한 5개국을 말한다.
이 나라들은 생활수준이나 문화 수준이 거의 같고 우리 대한민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인류의 꿈이고 이상인데, 이들 나라 평균 수명이 남자는 75세이고 여자는 81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2001년 당시)
 내가 북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알고 싶었고, 여행 중에도 계속 묻고 다니던 이야기가 있었다. 북유럽 나라들은 왜 잘 사는가, 어떻게 해서 잘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인구 밀도가 적은 나라이어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면, 그런 정도의 지식은 책을 통하여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데 그걸 알자고 비싼 돈 들여 여기까지 오겠는가.
  그러나 내가 발견한 그 첫 번째 해답이 싱겁게도 역시 큰 땅에 적은 국민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잘 사는 나라 노르웨이는 한반도의 1.6배 국토에 한국 국민의 1/16밖에 안 되는 450만의 국민이 사는 나라다. 여기에 우리 남북한 7,500만을 풀어놓아 보라. 국민소득 3만 5천 달라가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되는 것이 있다. 왜 북유럽 국가의 국민이 그렇게 적을까 하는 것이다.
북유럽은 지구상에 가장 북쪽에 있는 코가 큰 코쟁이들이 사는 나라들이다.
코가 큰 것은 추운 지방에서 공기를 들여 마실 때 그 공기를 덥게 하여 허파에 보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오줌을 더 참을 수 있다는 이치와 같다.
그 추위를 막기 위하여 집들은 모두 3 중창을 하였다. 산간으로 갈수록 집들은 뾰족한 지붕이었다. 큰 눈이 지붕에 쌓이는 것을 막으려는 지혜였다. 그 춥다는 모스크의 왕궁에는 카펫 문화가 발달하여 있었는데 우리네 같이 바닥에 깔기 위함이 아니라 벽에 걸어 외풍을 막기 위함이었다.
북구에는 겨울의 이러한 혹독한 추위에다가 6개월이나 되는 그 무서운 흑야(黑夜)가 있다.
난방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그래서 이곳을 버리고 살기 좋은 남쪽 땅을 향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이 저축을 하는 가장 주된 목적이 겨울에 스페인, 그리스 등의 따뜻한 나라로 가서 햇볕을 마음껏 쬐고 오려고 떠나는 여행을 위하여서다.
북구를 다니다 보면 모든 음식점 앞에는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북구 사람들은 누구나 태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추진력은 고차 문명(高次文明)의 저차 문명(低次文明)에 대한 도전(挑戰)과 대응(對應)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보는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이론으로도 국민이 적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시선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랭하고 메마른 땅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찾아 헤매는 바이킹(Viking)을 탄생시킨 것이다.
바이킹(Viking)들은 용감하게 싸워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살기 위해서는 세계 어디든 용감하게 찾아가야 한다는 도전과 대응의 정신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여름에 떠나가서 풍랑이 심해지는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왔지만, 일부 족장(族長)이 부족들을 이끌고 해외 진출한 경우도 많았다.
  바이킹이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 버스보다 수십 년이나 더 빨리 발견하였다거나, 인류 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젠 같은 탐험가의 조국이 노르웨이라는 것들은 도전과 대응 정신의 일환이었다.
 게다가 지구에서 가장 북쪽의 추운 이 나라들은 고도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유럽 강대국들의 선망하는 도전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구가 적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구가 적게 된 이유 중에 다른 하나로 페스트(pessed)를 꼽을 수도 있겠다. 14C 흑사병(黑死病)이라고도 하는 무서운 병은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유럽 인구의 태반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다. 
 
*. 북유럽 나라들은 왜 잘 사는 거지(B)
  한국 등 동양 여러 나라는 왜 유럽보다도 인구가 많아졌을까?
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북구의 적은 인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주는 지름길이 된다.
답은 간단하다. 한 마디로 가문의 계승자로서의 아들을 생산하여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유교적인 전통 의식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전래하여 왔다는 칠거지악(七去之惡)에는 아내를 내쫓는데 7가지 이유가 있다.
①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②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③ 부정(不貞)한 행위, ④ 질투, ⑤ 나병, 간질 등의 유전병,⑥ 말이 많은 것, ⑦ 훔치는 것
 옛날에는 우리들 가정에서는 대(代)를 잇기 위해서 아들을 꼭 낳아야만 했다.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는 양자라도 꼭 자식으로 꼭 두어야 했다. 그 순수한 혈통을 위해서 아내에게 부정(不貞)을 막아야 했고, 고질에 해당하는 병이 없어야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세상에서는 축첩제(蓄妾制)의 유지가 필요하였고 그래서 여자의 질투(嫉妬)를 막아야만 했다. 그래서 칠거지악(七去之惡)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동양의 옛날 아내들은 남편에게 봉사(?)하는 일보다 시집에 봉사하는, 이른바 부모에게 대한 효(孝)와 아들을 낳아 대(代)를 이어주는 일이 생명같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딸만 있는 집에서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양에는 인구가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콩에 가서 들은 이야기로는 홍콩 주부들은 아들보다 딸을 원하였고, 자기보다 자식들이 더 낫다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생각도 우리네와 달랐다.
새끼를 하늘을 날 수 있을 때까지 키우다가, 떠나보내는 새들처럼 18세가 지나면 가정을 떠나 독립해 가는 자식들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것이 우리들이 반드시 도달하고 싶어 하는 미래를 살고 있는 선진국 사람들의 의식 구조였다. 이렇게 대(代)를 잇겠는다는 의식이 유럽에는 동양보다 아주 적었다. 우리들처럼 자식을 노후 보험처럼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가 낳은 자식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들도 나같이 늙어 흰머리 나이 되면, 구부정한 몸으로 부부가 서로 손을 꼭 잡고, 여유가 생기는 대로 선량한 미소를 깊은 주름살 띠며 이렇게 여행을 다니는 것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북유럽 나라는 왜 잘 사는 거지? 하는 답은 이 이외에 여러 가지로 더 말할 수 있다.
1, 2차 세계 대전에 휩쓸리지 않아서 오히려 그 덕으로 잘 사는 나라에 진입하였다던지. 옛날에는 버림받던 자연이 지금은 그 천혜의 자원이나 관광자원이 되었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놀래게 하는 것이 있다. 노르웨이가 추구하는 사회보장을 위한 슬로건이다.
  "개인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는 생활 안정"  

*,  삶과 죽음을 해석한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 pakr)/ 오슬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Oslo)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pakr)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는 무례하게도 교통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우리를 후문으로부터 몰아넣는다.
미술이 아무리 공간예술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감상의 순서가 있는 법인데 이게 무언가.  목적지에 와서도 다음 일정이 바쁘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세계인이 선망하는 다시는 못 올 곳의 이방인(異邦人)이 되어 목적지에 와서도 시간에 쫓겨 다니다니-. 어찌 대충 보고만 그냥 가리-. 어이 대충 찍고 갈 수 있을까.
수학여행 온 학생처럼, 졸졸 가이드와 따라 벌써 구경을 끝낸 함께 간 점잖은 우리 교장 선생님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도, 나는 눈에 닿는 것 하나 빠짐없이 캠코더에 담았다. 그리곤 마음에 없는 미안한 표정을 애써 몇 번이나 지었다.
  비디오 촬영에서 제일 애로가 배터리라. 이러한 날을 위하여 종일 촬영하여도 남는 특수 배터리를 어렵게 구하여 왔는데 그 무게가 천근이라. 그걸 메고 와서 자기들 시키는 대로 하였다고 칭찬이나 받으려고 내가 왔나?
먼 이국땅에서 하늘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이런 것 보려고 바람처럼 달려온 내가 말이다.

  짠물이라는 그 인천이 내 고향인데-. 여행에서는 많이 보고 많이 듣는 것, 거기에다 영상에 담는 것이 재산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원형 17m나 되는 260톤 화강암 기둥에 조각하여 놓은 121명의 남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뒤엉켜 하늘로 다투어 올라가려는 모습으로 인간의 본성을 상징화하였다는 '모노리텐'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조각품도 촬영하였다.
 이 조각품은 작자가 제작한 석고 모델을 3명의 석공이 14년간이나 공들여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서 조각도 종합예술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고도 이 공원의 완공을 못 보고 '비겔란' 조각가는 죽었다니 그러면 인생은 시간 예술이란 말인가.
그 밑에 주위 빙 둘러 세 겹으로 방금 태어난 아가에서부터 우리와 같이 늙은 부부의 모양과 더 늙어 죽을 때까지의 벌거벗은 인생 삶의 조각들 앞에 서면, 하나의 조각상을 보는데서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지나간 현재와 다가온 현재와 다가올 구체적인 현재를 비겔란의 눈과 손으로 해석해 놓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비겔란은 이 작품에 대한 일체의 설명을 거부하였다 한다.

작품은 개인의 것이지만 제 각기 다른 창조적 감상을 존중해서이다. 입구 정면에 있는 어린이들의 다양한 표정과 인간의 일생을 58개의 청동상으로 장식한 다리와 동물들을 투조(透彫)한 이색적인 철제 정문도 촬영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서 우리 집 가보 하나를 마련하는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이 거대한 공원은 비겔란이란 한 예술가의 집념으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원 조성에 필요한 많은 시간과 그 엄청난 비용을 위해서 오슬로 회화 계의 지원과 기업가나 개인들의 기부금과 성금에다 20C초에는 작은 지방 도시였던 오슬로 시 당국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고, 그보다 많은 시민들의 열렬한 지원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있어 이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pakr) 건설이 가능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