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隨筆)☎

2009년 9월에 만난 사람들

ilman 2013. 5. 22. 06:53

2009년 9월에 만난 사람들

 

  낯선 사람과 가장 많이 만난 달이 어제 보낸 9월 같다.
그중에 한 분이 김제에서 삼보컴퓨터를 한다는 분이다.
나의 여행 중 행복의 하나는 물건을 잃지 않고 끝마치는 여행이다. 건망증이 있어 물건을 잘 잃기 때문이다.
옛날에 산행 갔다가 잃은 MP3 대신 그보다 더 좋은 삼성 MP3를 구입해서 지니고 다니던 것이 없어져서 그걸 집에서 며칠째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 따라 인천 송도의 '도시 세계축전'에 다녀오는 길에 낯선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혹시 내변산에 가신 적이 있으십니까? 거기 월명사에서 MP3를 하나 주웠는데요. 핸드폰에 문자로 주소를 써 보내시면 택배로 보내 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마운 분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분실을 고려해서 그 케이스에 휴대폰 번호를 명기하여 놓아서 이런 반가운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 그걸 집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보답을 위해서 내가 쓰고 있는 국립공원 산행기중 '내변산 연재물'이 실린 책에 휴대용 간편 카메라 다리를 넣어 보냈다.
  그보다 열흘 전인가. '인천 비엔나 여성 미술'에 갔다가 차이나타운에서 산 부채를 대전에 가다가 잃었더니 전화가 왔다.
전철에서 부채를 주웠는데 서울역 어느 상점에 두고 갈 테니 찾아가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럴 필요 없이 제가 드리는 선물로 생각하고 그냥 가지세요."
이태백의 한시가 쓰여 있는 큰 부채였는데 거기에도 내 휴대폰 전화와 ID를 써넣은 것이다. 처음 휴대하고 나가서  하루도 못 간수하고 잃은 것이다.

   다음은 낯선 사람들과 만나 식사를 대접한 이야기 중의 일부다.
전철을 타고 다니다가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이 맞으면 식사나 술을 함께 하는 경험을 나는 많이 가지고 있다.
초면의 낯선 사람과 술 한 잔을 놓고 심금을 터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만남의 기쁨과 신선한 이별의 아쉬움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 분과는 아내와 함께 큰 병으로 고생하며  사는 이야기였고, 다른 한 분은 아내를 먼저 보내고 외롭게 사는 이야기였다.
 "혼자 살면서 가장 불편한 것 중에 하나는 아침저녁을 해먹게 되는 것이지만 점심은 굶을 때가 많아요. 귀찮아서지요, 그보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이 더 답답해요. 선생님과 자주 만났으면 좋겠네요."
이런 경우 나는 정중히 거절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하죠? 저는 시간 여유가 많지 않은 사람이니요. 오늘 같이 그렇게 만나 뵙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오랜 세월동안 다른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연(緣)을 맺어 우리로 살기에는 할 말도 없지만 그보다 서로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도 다음번에는 식사 대접을 같이 하여야겠다는 분과는 한번 더 만나는 기회가 있기도 하였다.
  한번은 "형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며 반색하는 안부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 이름이 찍힌 것을 보니 분명 아는 사람 같은데 기억이 없다. 그런 나를 위해서 얼마 전에 자전거를 끌고 갔다가 서로 만난 경위를 설명해 준다.
형님이 아우를 못 알아보았으니 이 분과는 또 한 번의 만남을 가져야겠다.

  추석을 4일 앞둔 저녁 모임을 갔다가 전철 타고 귀가하는 길인데 노인 석에 앉은 한 뚱보처녀가 왜 자기가 뚱보가 되었는가를 설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김밥을 열심히 먹고 있다. 반바지에 드러난 그의 허벅지는 작지 않은 나의 2배나 되었다. 그러더니 급히 일어선다. 40대의 한 소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얼큰한 김에 이 소경과 술을 한 잔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니 거절한다.
술은 몸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먹는 음식이다. 어떻게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어찌 술을 마시고 제집을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집에 가다가 한 잔 걸치기로 한 1만원을 술대접 대신이라고 넌지시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완강히 거절하던 그가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다음은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제 아내도 저와 같이 앞을 못 봐요. 7,000만 원짜리 반 지하 연립주택에서 전세로 살고 있어서 장애자 연금도 못 받고 있어요. 4,000만 원 이하인 가정만 받은데 그것도 자식이 고등학교 졸업 이전까지만이지요.

  자기의 잘못 하나도 없이 장애로 태어나서 그 책임을 오로지 자신이 지며 숙명을 살아가는 이런 불행한 장애자들을 나라가 돕는다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그것이 이런 분들을 위해서 더욱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장애자 중에  장애자를 둘만 들라면 시각장애자와 언어장애자라 할 수 있겠다. 어느 쪽이 더 불행한 부류일까.'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란 말로 보면 '귀는 백 냥 속의 일부'일 것이니 앞 못 보는 분보다 듣지 못하고 말 못 하는 언어장애자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된다.
벙어리는 소리는 못 들어도 볼 수는 있고, 의사 표시를 손으로 할 수도 있다. TV도 자막방송까지 하는 세상이고 보니 소경의 불행은 생각 이상이리라.
우리들이 얻는 정보의 80%는 눈을 통하여 얻는다 하지 않던가.
눈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눈은 동굴 속 같은 위치에, 위로는 머리뼈가 아래로는 코뼈가, 밖으로는 광대뼈가, 앞으로는 눈두덩으로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넘어져도 코가 깨지거나 눈두덩이 터져도 눈이 상처받은 일이 드문 것이다.
나는 이상이 없어도 적어도 2달에 한 번은 안과를 찾는다.
124살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는 프랑스의 장칼망 노파나, 실낙원을 쓴 밀튼도 노년에는 실명하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음은 섭섭한 만남의 이야기다.
내가 사는 일산(一山)에는 구일산(舊一山)이 있어 거기서 5일 장이 열린다.
장은 예로부터 서민의 애환이 어려 있는 곳이다.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 만남의 장소요, 놀이의 광장이었다.
그곳에 가면 지금은 소 시장은 없어졌지만 개 시장은 있다. 지금도 호루라기를 부르며 튀기는 강냉이 장수도 있고, 포장을 치고 장터 국밥 등 먹거리를 파는 사람도 있다. 가끔 엿장수 각설이도 만나게 되는 곳이 장터다. 그러한 옛날의 고향 냄새를 맡으며 현대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 면에서도 나는 일산에 사는 것을 행복해하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장을 찾은 세월이 벌써 10년을 훨씬 넘었다.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가는 '문산집'이란 주막집이 있다.
거기서 순댓국이나 돼지 머리를 막걸리의 안주로 먹다가 그 고기를 남겨서 주인이 버린 개들의 장이 열리는 곳에 가서 그걸 나누어 주는 재미로 일산 장을 찾아오곤 했다.
장사하던 장꾼들이 술 고프면 1,000원을 들고 와서 소주 한 컵을 단숨에 들이키면 주모가 돼지고기 한 점을 준다. 그러면 그걸 씹으며 입을 손으로 씻고 가는 곳이 문산 집이었다.
그 문산집의 주모는 곱상한 60대 후반 나이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웬 건장한 노인이 그 시중을 들고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주모가 새로 맞은 남편이라 한다.
혼자 다니는 장터라서 나는 거기 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 술이나 식사 대접을 하며 살아왔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빈약한 지갑이나마 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운치 있는 일인가.
이 문주산집을 소재로 장터란 시(詩)도 지은 적이 있고 그것이 실린 나의 첫 수필집을 주모에게 주기도 한 사이였다.

 그러던 문산집을 그 늙은 신랑에게 섭섭한 푸대접을 받고 발을 끊게 된 것이다.
 옛날 같으면 앉을자리도 없이 붐비던 곳이지만 요즈음은 장날이라도 빈자리가 더 많았다. 살기가 어려워져서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막걸릿집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막걸리와 안주를 시켜 놓고 무료해서 새로 구입한 휴대폰 TV로 해외입양아가 다 커서 유창한 영어로 부모 찾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남의 둥지에 알을 까놓고 새끼를 다른 새를 통하여 키우는 뻐꾸기를 생각하며 시상(詩想)을 한창 가다듬고 있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 사는 누구지요?
제 소리를 잃어버린 다 큰 양이 슬피 운다.
제 성(姓)과
이름은 무어냐고요?
뻐꾹, 뻑국 울부짖는다.
           -뻐꾹새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막걸리 한 병을 더 시켰더니 술병을 가져오면서 그 늙은 신랑으로부터 볼멘소리가 터진다.
  "오늘이 장날이란 말이에요"
 그동안 나의 생각에는 손님이 드문 음식점에는 나 같은 여유작작한 사람이 앉아 있는다는 것은 장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그런 집에 가서는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즐겁게 축하하면서 일어나곤 하였다.
그게 이 늙은 신랑에게는 그 반대로 비친 모양이다.
나도 부아가 나서 볼멘소리를 하고 나오고 말았다.
  "10여 년 넘게 찾아온 단골입니다. 앞으로 저는 절대로 이곳에 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일산 장에 대한 정이 멀어져서 찾기를 즐겨하던 장터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기도 하다.
1일/6일이 문산, 금촌장, 2일/7일이 강화나 김포장, 3일/8일이 일산장이니까.

그 후 10여 년이 지났을까? 장에 가서 우연히 문산집 앞을 지나다가 보니 옛날의 그 늙은 신랑이 안 보인다.
물어보니 종업원이 말해 준다.

 "오래 전에 넘어져서 다쳗서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 수필* (隨筆)☎'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짝짝이 신발  (0) 2013.05.22
'국립 공원' 상재 하던 달  (0) 2013.05.22
자전거 여행/ 옥천  (0) 2013.05.11
청련사와 백련사/ 고려산  (0) 2013.05.04
나의 가난했던 학창 시절  (0) 201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