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ilman의 모교 인천고등학교 교지에 문인 선배의 글을 싣고 싶다 해서 보낸 글입니다.
다음은 지금은 없어진 제 홈페이지 주소입니다. 없어지기 전에는 후루에 2 ~3백명이 찾던 그리운 주소입니다. blog.chosun.com/ilman031 시인 ․ 수필가 인천고 55회 성철용 나의 가난했던 학창시절 어렸을 적 나는 바다가 보이는 인천시(仁川市) 송현(松峴)동 수도국산 아래 약우물 터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쌍우물이 있는 동네였지만 그 물보다 수돗물을 사먹던 시절이었다. 고2 무렵 나는 북청물장수처럼 물 지개를 지고 물 길러 갈 때가 기다려지는 가장 행복한 때였다. 수돗가에 가면 거기서 자주 만나던 나보다 한 살 적은 여고생이 있어서였다. 살아가면서 가끔 나는 당시의 그 문학소녀를 생각하면서 나의 애송시 장꼭토(프랑스)의 시를 암송하면서 그리워하곤 한다.
두 마리 비둘기가 귀여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했답니다. 그 다음은 말할 수 없어요.
내가 지금 시인(詩人)으로 작가(作家)로서 노후를 살게 된 것이 그 소녀의 영향 같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시절, 그 당시에도 우리 집은 남보다 너무 가난하였다. 당시 조혼풍습에 따라 13살에 3살 위인 어머니와 결혼하신 우리 부모님은 초등학교 문턱도 가보지 못하고 대처(大處)를 사시는 옛날분이어서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모 생각을 하면 지금도 나는 눈물이 앞선다.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체육시간이었다. 옛날에는 미 군복 내복 ‘독구리’를 염색하여 입던 시절이었는데, 형에게 물려받은 그 옷은 누덕누덕 기워 입은 것이어서 남들에게 창피하여 그랬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음악에, 운동에 문외한으로 살아왔다. 대학입학원서를 낼 때 담임선생님은 내가 납부금을 납부하지 못하였다 하여 대학교 입학원서를 써주지 않았다. ‘5급 보통고시’나 보겠다고 속절없는 약속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울면서 교문을 나서다가 대돈 빚을 내어 왔다는 납부금을 가지고 온 형을 부둥켜안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그날이 원서 마감 날의 오후인데 인천서 서울까지 왕복하 차비(지금의 5천원)가 없어서 동인천역(東仁川驛)을 맴돌고 있었다. 마침 자기 동생의 입학원서를 접수하러 가는 인고(仁高) 선배가 있어 부탁하여 겨우 접수를 할 수가 있었다. 9:1이었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에 자랑스레 합격하고도 요번에는 그 입학금 때문에 고생도 컸지만, 입학식에도 갈 차비가 없도록 우리 집은 가난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입학식에서 배웠다는 교가를 나는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입학하여서는 4년 내내 고학으로 대학을 마쳤다. 학창시절 초등학교 때는 개성(開城)으로, 고등학교 때는 경주(慶州), 대학 시절에는 제주도(濟州道)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한 번도 따라 가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였을까. 정년퇴직한 후 여행 작가가 되어 그동안 국내외를 원 없이 다니면서 많은 글을 쓰고 있다. 8월에는 작년에 모 월간잡지에 2년에 걸쳐서 연재하던 ‘국립공원 산행 Photo에세이’ 집이 출간 되었다. 나는 이를 내 모교 인고도서관에 기증하여 우리 후배들에게 보도록 할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가난하였지만 고학이라도 할 수 있는 수도권인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다 40대 초반 서울 돈암동에 45평의 2층집에 이사 왔던 어느 날 밤, 문득 ‘내가 가난을 벗어났구나!’ 하는 즐거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 밤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당시에는 제일 비쌌던 맥주를 사다가 혼자서 밤새 눈시울을 적시며 마시던 일이 새롭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난은 세상에 가장 넘기 어려운 고개 그 고개를 넘었더니, 드디어 넘어섰더니 가난도 재산(財産)이더라. 꿈꾸던 행복(幸福)이더라. 지금 우리 부모님 산소는 가난하지 않다. 우리 형제들이 어느 정도 가난에서 벗어났다 생각할 무렵, 제일 먼저 부모님 묘소에 석물(石物)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식들의 마음의 표적이요, 가난했던 우리 자식들의 한풀이이기도 하였다. 성묘를 가면 새파란 잔디 위에 우람차고 멋있게 서 있는 비석(碑石)과 상석(床石)과 망주석(望柱石)이 반갑게 우릴 맞는다. 나도 죽으면 그 망부석 옆에 묻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지켜 드리고 싶다. 그리고 죽기 전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비석에다가 아니면 마음속에라도 이런 비명(碑銘)을 새겨 두고 쉽다 . 내가 죽거든 육신(肉身)을 골라 필요한 이에게 주고 훨훨 태워 구름이 되게 하라. 나머질랑 예쁜 꽃병에 담아 우리 아버지 무덤가 망주석(望柱石) 옆에 묻어 달라. 나, 행복(幸福)과 불행(不幸)의 귀퉁이에서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을 살다 가노라. 묻는 이 있거든 말하여 다오. 내가 왔다 갔다고, ilman도 다녀갔다고. -나 죽거든 졸업하고 인천(仁川)을 떠나 서울에서 고학(苦學)하다 보니 학창시절에도 나의 중고교(中高校) 친구끼리 어울려 살기에도 나는 너무 가난하였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만날 수 있지 않던가. 그래서 오랫동안 멀리 살던 친구들이 그리워, 정년퇴직한 어느 해 겨울 부평에서 열리는 ‘55회 인고 동창회’를 처음 다녀오면서 이런 글을 쓰며 옛날을 그리워하였다. 벼르다 찾아 가본 고교동창회(高校同窓會)에서 꼭 같은 나이를 살아온 우리 속에 묻히니 잊고 살던 옛날이 하나하나 살아있더라. 별빛 앗아 간 태풍 같은 세월이 머리에 흰 눈을 뿌리며 깊게 할퀴고 간 낯선 얼굴 속에는 돌려주는 옛날이 묻어 있더라. 납부금(納付金) 가져 오라 쫓아 보내던 담임선생님도 그 가난했던 우리들 아버지의 이야기도 이제는 궁상을 털고 사라져 간 그리움들…. 우리들은 그때 없던 자식(子息)들도 떠난 자리에서 절주(節酒)로 마셔야 하는 나이로 망년회(忘年會)에 서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되찾은 젊디젊던 시절을 안고 반짝이던 그 별을 밟고 늙은 마누라로 돌아간다. 다음 만나며 카드를 긁어서라도 술 한 잔 사고 싶구나. 우리들 인고(仁高) 55회 친구들께 -동창회에서 배다리에 있던 인천고등학교 이전의 나의 인천중학교 학창시절은 신흥초등학교 강당이었다. 홍여문 근처 인천중학교[지금의 제물포고] 부지가 미군의 기지로 쓰이던 때라서 신흥초등학교 강당을 빌어 막은 교실에서였다. 그때 우리가 졸업한 직후 제물포고를 세운 길 영희 교장선생님이 오른 손을 높이 들고 항상 하시던 훈화가 생각난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공부다.’하는 말씀이었다. 이를 시(詩)로 엮어 우리 인천고등학교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살다 보니, 나이 들며 살아가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돈 버는 길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공부더라. 누구나 배우고, 벌어야 살 수 있는 세상에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나'이지만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많지' 않던가. 학교에는 공부하는 학생과 안하는 학생이 살고 있더라. 공부 하는 학생은 '공부 선수' 같더라. 운동은 남보다 먼저 정상에 올라야 하지만 정상 근처에만 가도 편히 살게 하는 공부는 돈 잘 버는 남편에게 100가지 허물을 가려 주듯이 공부 잘하는 학생에겐 10 가지 잘못도 덮어 주더라. 공짜로 먹고, 자고, 용돈에 학비까지-. 세상에 가장 쉬운 것이 공부 아니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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