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옥천 성묘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 충북 옥천(沃川)에 모신 우리 조부모, 부모님 성묘를 가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다.
‘자전거 여행!’ 하면 자전거(自轉車)를 타고 집에서 떠나 목적지를 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정석이겠지만 미수(米壽)가 가까운 내 나이에 어찌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겠는가. 고양시 일산에서 충청북도 옥천까지는 건강한 젊은 자전거 메니아도 힘든 먼 곳이기에 하는 말이다.
게다가 옛날과 시절이 달라져 원거리 자전거 여행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 동안 자전거 여행을 위해서 준비하여 베란다에 고이 모셔 두었던 20kg의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전철(電鐵)을 타러 갔다.
백석역에 내려 고양버스터미널에서 대전(大田) 행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서다. 짐에서 떠나올 때 혹시나 버스 기사가 시비를 걸어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두 말 없이 트렁크 문을 활짝 열어준다.
대전(大田)에 도착하여 환승한 옥천(沃川)까지 가는 시외버스에서는 다행히 두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어 편히 갈 수가 있었다.
옥천 읍내에서 하차하여 성묘를 하러 자전거를 타고 산에 오르려고 하였더니 갑자기 닥쳐온 무더위가 무리를 하지 말라고 말리는 듯하여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렇게 대중교통을 주로 하여 갈 바에야 무엇 하러 번잡하게 자전거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느냐고 묻는 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오늘 나의 자전거 여행의 목적은 대중교통과 접목한 자전거 여행의 편리와 불편의 이모저모를 점검해 보기 위해서라고-.
나는 아직 나의 힘이 남이 있을 때 한국의 곳곳의 아름다움을 찾아 무엇이 어떻게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곳 그 이름에는 어떤 아름다운 전설이 전하여 오는가를 찾아 정리하여 글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싶은 꿈이 있다.
나는 한반도의 수 많은 섬에 가서 섬의 곳곳을 시간의 제약 없이 둘러보고 싶다.
산기슭의 사찰을 찾아 일주문서 십리도 넘는 길의 오가는 시간을 절약하고 싶다.
다시 오기 어려운 부근의 명승지를 생략하지 말고 남보다 더 많이 둘러보는 방법이 무엇인가 생각하다 보니 자전거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낯선 도시의 곳곳의 명승지를 대중교통을 타고 가서 자전거로 그 곳곳을 누비며 그 고장을 탐구하고 싶다.
이런 일은 승용차나 택시를 이용해서도 불가능한 세계로 대중교통인 버스나 전철이나 기차의 좌석까지 자전거를 들고 탈 수 있어냐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가 돌아가시자 우리는 대전 대덕군 구즉면 선산에 모셨다.
그리고 우리 5 남매의 마음을 모아 상석(床石)과 비석(碑石)과 망주석(望柱石)까지 세우며 생전에 못다한 효를 다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10여 년쯤 지나다 보니, 어느 자식 하나가 가면 다른 형제들은 생략하더니, 어떤 해는 불효스럽게도 성묘를 한 사람도 다녀 오지 않는 해가 자주 속절없이 그냥 지나가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솔직히 말해서 충남 대덕군 구즉면 둔곡리는 수도권에서는 대중버스를 이용하여서는 당일로 오가기 힘든 곳이고, 자가용 승용차는 한 대만 가도 통행료, 기름 값 등을 합해서 거금이 드는데다가 그곳 산직이 집을 찾아 수십만 원을 주고 와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조부모남 묘소는 충남 논산(論山)에 있고, 부모 묘소는 충남 대전 대덕군(大德(郡)이라서 두곳을 매년 다닌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2년 전에 큰맘 먹고 나의 생전(生前)에 꼭 하고 가겠다는 결심한 대로 옥천 종중 납골묘 한 자리를 구하여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그 납골묘에 여분이 있어 우리 형제 내외의 납골함까지 만들어 놓고 비석까지 새겨 놓았으니 우리는 종중 묘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여 죽어서도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며 편히 잠들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묘에 이르러 택시를 보내 놓고 간단하나마 제수를 차려 놓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독축(讀祝) 대신 '어버이 날'을 맞아 쓴 나의 졸시(拙詩)를 낭솧해 드렸다.
어버이 가실 제 부름마저 거두시니
어머니, 아버지! 어디서 불러볼까
불러도
대답 없으신
아
버지!
어머니!
헌작(獻爵)한 술은 무덤에 뿌리지 않고 모아서 멀리 버렸다.
요즈음 기승을 부린다는 산 돼지가 막걸리 냄새에 묘을 파헤친다는 말을 들어서다.
그리곤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한 잔 두 잔 마시며 한참을 보냈다.
승용차를 이용하여 왔을 때는 운전으로 음복(飮福)을 할 수 없었고, 택시를 이용했을 때는 차편 때문에 5분도 되기 전에 묘소를 떠나야 했다.
이렇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전거 덕분이라 생각하였다.
자전거를 타고 옥천읍을 향했다. 산이라서 산소에서 읍내까지는 페달을 거의 밟지 않아도 되는 내림길이라서 삽상한 바람을 헤치며 하산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계획한 대로 읍내의 '정지용 문학관'이나,' 육영수여사 생가'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벌써 늦은 4시를 넘은 시간이라서 정지용 시인이 걸었을 옥천읍 구경이나 하자 하고 라이딩하여 가다 보니 ‘향수 공원(鄕愁公園)’이 있다.
옥천읍(沃川邑)에서는 어디 가든지 정지용(鄭芝溶) 시인이 살아 있다.
옥천역(沃川驛)의 '정지용 시비'나 구내의' 향수'라는 시를 위시해서 다리 입구에도 길거리에도 온통 정지용 일색이다.
그 정지용(鄭芝容)이란 분은 어떤 분이신가.
나의 대학 시절은 6.25 직후 무렵이어서 당시 문학도들은 판금(販禁)된 6.25 당시 월북한 '상허 이태준', '정지용', '임화' 등 문인들의 서적을 구하러 동대문과 청계천의 헌 책방을 뒤지고 다니곤 했을 때였다.
당시에는 그 이름도 '정 X용', '이 X준'으로 표기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잠심값을 생략하고 구한 '정지용 시집', '정지용 문학 독본'과 '상허 문학독본'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 중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그의 시(詩) 나오는 '실개천이 흐르는' 청석교 근처의 촌가의 가난한 한약방하는 아버지의 4대 독자의 장남으로 내어났다.
어머니가 못(池)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용(龍)을 태몽으로 꾸고 태어 났다 하여 아명을 '지용(池龍)'이라 했는데 그의 이름 '芝溶'은 그 음을 딴 것이다.
<향수>에서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는 지용이 가장 좋아하던 '계용' 누이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지용은 항상 고독하고 슬픈 소년으로 자라다가 12세에 아내 송재숙과 결혼을 하고 10명이 넘는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 4명만이 남고 다 죽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유리창'이라는 작품이 그 슬픔의 표현의 하나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더니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홍사용과 월탄 박종화, 모란이 피기까지를 쓴 김영랑 등의 선배가 있었고 상허 이태준이 1년 후배여서 재학시절부터 함께 '요람' 동인지를 만들며 문학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해방 전에는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교원으로,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시인이었다.
'떠나가는 배'를 쓴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의 동인으로도 활동하였고, 카도릭 신자로 1933년 '카도릭청년' 지 편집을 맡았을 당시 이상(李箱)을 참여시켜 작품을 발표하게 하기도 하였다.
지용은 진정한 한국의 현대시(現代詩)를 시작한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으로 청록파(靑鹿破) 시인인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을 '文章(문장)'지에 추천해준 당시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때 '文章(문장)'지는 시(詩)에 정지용 , 소설(小說)에 이태준, 시조(時調)에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이 추천해 주고 있었다.
가는 길은 기차 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옥천역은 KTX열차가 서지를 않아서 한 정거장인 대전까지는 무궁화호로, 대전에서는 서울역을 지나 행신(幸信)까지 가는 KTX열차를 환승하여 타고 간다.
KTX열차에는 다행히 칸마다 가방을 얹어 놓는 시설이 있어 자전거는 접어서 그곳에 묶어 둘 수 있었다.
올 때 고양고속버스를 타고 옥천까지는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에 30분 이상을 걸려서 오던 곳을, 기차로는 1시간 30분으로 집에까지 돌아가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었는가. 경로우대로 할인을 받고 보니 1만 7천원으로 올 때 버스 요금과 비슷하지 않은가.
헛고생 한 것 같지만 이렇게 방황은 지름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11년 전 루사 태풍이 불 때 나는 대원사에서 화엄사까지 지리산을 단독 종주(單獨縱走)하였다. 종주를 마치면서 나는 국내 어떤 산이라도 홀로 종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작년에는 그 위험하다는 필리핀의 5박 6일 단독 배낭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 오면서 '영어(英語)에 손방인 나 같은 사람도 세계 어떤 나라라도 홀로 배낭 여행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마찬 가지로 그동안 망설여만 오던 자전거 여행을 요번 옥천 자전거 여행을 마치면서 앞으로 나는 국내 어떤 곳이라도 자전거 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나의 자전거 여행의 보람이었다.
옥천군에서는 '옥천 자전거여행 코스'를 개발하여 소개하고 있다. 언젠가 '옥천의 '향수의 고장', 충절의 고장' 옥천의
나의 행복한 국토 순례가 나의 애마(愛馬) 'Strida'와 함께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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