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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있는 돈 이야기

ilman 2013. 4. 18. 11:45

                                                                                              

 

 
재미 있는 돈 이야기

*왜 엽전이라 하였을까

  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엽전(葉錢)’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 최초로 전국적으로 쓰이던 개수화폐[個數貨幣]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당시 민간에서는 한 닢, 두 닢으로 헤아린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왜 잎 '엽(葉)', 돈 '전(錢)' '엽전(葉錢)'이란 말을 썼을까. 옛날 엽전을 만들 때 거푸집(주물 모형)에 쇳물을 부었다가 떼어낸 주형(鑄型)의 모습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과 같이 보인다 해서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18세기 당시에 유통하던 옆전의  생김새를 노래로 부르던 사설시조 한 수가 전하여 온다.

떳떳 ‘常(상)’ 평할 ‘平(평)’ 통할 ‘通(통)’ 보배 ‘寶(보)’ 자(字)
구멍은 네모지고 四面(사면)이 둥글어서 땍데굴 굴러 간 곳마다 반기는구나.
어떻다 조그만 金(금)조각을
頭瘡(두창)이 다투거니 나는 아니 좋아라.
                                  *頭瘡(두창): 어린이들이 걸리기 쉬운 전염병
시조 초장(初章)에서 상평통보의 뜻풀이를 하고 누구나 이것만 있으면 반상(班常)의 구별 없이 떳떳하고 평등하게 널리 통용할 수 있는 보배라 하였다.
중장(中章) 첫구에서는 엽전의 실제 모양이 가운데는 구멍이 네모지고 네 면이 둥글다고 하였는데 중장 둘째 구에서는 상평통보가 둥글기 때문에 아무데나 땍대구루루 굴러다니면서 누구나 반기는 대상이 된다 함을 노래하다가
종장에 가서는 아무나 차지할 수 없는 이 쇠 조각을 두고 사람들이 머리가 터지도록 다투게 되기 때문에 자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반어법(反語法)으로 일부러 능청을 부리고 있다.
  이 상평통보는 이조 숙종4년(1678년)에 주조해서 약 2세기 동안이나 쓰였다.
'상평통보'보다 더 오래 전 고려 때 '해동통보'를 만들 때 의천(義天)이 엽전을 만들어 쓰자고 왕에게 건의한 내용도 위 시조와 같은 내용이다.
" 엽전이 밖은 둥글고 안은 네모 난 것을 일컬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뜨고 모난 것은 땅을 본뜬 것입니다. 만물을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 없어지지 않게 하는 이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에 귀한 돈으로 금화(金貨)와 은화(銀貨)가 있다. 금(金)은 태양을, 은(銀)은 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런 금은 같은 귀한 것들을 본뜬 돈들은 둘레에 깔쭉깔쭉한 톱니바퀴 모양이 있다. 당시에는 금화, 은화를 갈아 가지려는 얌체족 때문이었는데 이를 후대에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50원 동전은 톱니가 109개, 백원짜리에는 109개, 오백원 짜리에는 120개 톱니가 있다.
 지폐(紙幣)는 원 뜻이 종이로 만든 지폐지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돈은 100% 면섬유다. 면으로 된 돈은 종이보다 질기고 강하여 잘 찢어지지 않고 잘 더러워지지도 않는다.너무 더러워져서 쓸 수 없는 지폐를 거두어서 폐기 처리하는 곳이 한국은행이다.한 해 동안에 폐기하는 돈이 무려 5t 트럭으로 200대 분이나 된다 한다. 한국은행에서는 못쓰게 된 돈을 잘게 부수어 건물 바닥재나 차량용 방진재(防塵材) 등으로 재활동 된다.(조선일보 'Nie여행' 참고)
 
*.'돈'과 '원'의 어원
  '돈'의 어원은 한자어인 금전(金錢)이나 화폐(貨幣)에 대한 우리말로서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돌고 도는 회전성'을 두고 한 말 같다. 물론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로 그렇다는 말이다.
지금 화폐단위는 일본은 '원(圓)'의 약자. 중국은 '元'(위엔)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순 한글 '원'으로 쓰고 영어로는 'Won'으로 표기하고 있다.
구한말에는 '圓(원)'으로 쓰다가 해방 후인 1953년부터는 돈다는 뜻의 '환'으로 쓰이던 것이다.
지금의 '원'은 순 한글 이름으로 둥글 圓(원)에서 소리와 뜻을 취한 것으로 동전 모양이 둥그레한 데서 따온 말이다.

*. 한번 '돈'이면 영원한 '돈'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란 말처럼 한 번 돈이면 영원한 것이 돈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은행권은 4종(천원, 오천원, 만원, 오만원)과 주화는 6종(일원, 오원, 십원, 오십 원, 백원, 오백원) 등 모두 10종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옛날 돈을 가지고 와서 물건을 사려고 한다면 팔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 마디로 팔아야 한다.
한번 돈이면 영원히 돈으로 통용되는 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조폐공사에서 발행하다가 중지된 돈도 깨끗하기 만하다면 명목 가치보다 실질 가치가 배 이상이다.
그래서 예부터 써온 돈 106가지는 물론 기념 주화까지 다 쓸 수 있는 것이고 은행에 가져가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은행원의 입이 함박꽃처럼 딱 벌어질 것이다.
1925년에 나온 위 그림의 10원 짜리돈은 싯가로 187만원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말이다.

*.돈 속의 초상화
해방을 전후해서 한동안 우리가 보던 지폐 도안에는 모자를 쓰고 있는 수염이 하얗게 더부룩 노인의 얼굴이 있었다.
운양 김윤식(1835년~1922년)이란 분의 초상화로 그 지폐는 1915년부터 1947년까지 계속 쓰였다.
운양은 청일 전쟁 때에 대원군의 측근으로 외무대신과 대제학을 거쳐 합방 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지위와 은사금 5만양을 받았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용직과 함께 일본 정부에 '조선독립의 청원서'를 제출하여 작위를 박탈당한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그 분은 구한말에 손꼽히는 문장가요 선비로서, 의료시설이 미비하던 당시에 87세까지 장수 하신 분이기도 하다.
광복 후 지폐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가 1950~195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956년에 나온 500환 지폐에는 미화(美貨) 달러처럼 그림의 위치가 중앙에 있었다. 이를 보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크게 화를 냈다.
돈을 반으로 접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 때문에 얼굴이 꺾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왼쪽에 놓았다가 후에는 위치를 오른쪽으로 다시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오른손잡이여서 오른 쪽을 먼저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화폐의 초상화에는 왕, 대통령이나 유명한 장군이나 학자 사진 같은 역사적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1962년 5월에 나온 100환짜리 지폐에는 평범한 모자(母子)가 등장한다. 색동옷을 입은 2살 아들을 안고 있는 엄마가 저금통장을 바라보고 웃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델은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냉면전문 '흥남집'을 경영하는 당시 23세의 권기순 여사로 당시 조폐공사를 퇴직한 직원의 아내였다.
권 여인은 덕수궁에서 찍은 이 돈 모델 덕분으로 2층까지 발 디딜 틈이 없는 오장동 3대 냉면집의 하나가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그 모자상 돈은 25일 밖에 쓰이지 않았다. 화폐 계획 때문이었다. 이 돈을 나도 하나 갖고 있다. 우리도 늙으면 팔아서 해외여행 가자고 아내가 시집올 때 갖고 온 것이다.

옛날 엽전 대신 오늘날 같이 다양한 종류의 동전으로 발행할 때에는 네모로 뚫린 구멍 대신에 우리나라의 상징 물인 무궁화, 거북선, 다보탑, 벼이삭, 이순신 장군, 학 등의 각각 문양으로 "1원, 5원 및 10원[:1966년], 50원[:1972년], 100원[: 1970년], 500원[:1982년]"짜리가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어 오고 있다.
십 원짜리 동전 속에 있는 다보탑에 불상을 넣어서 노태우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하였다는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떠돌던 시절이 있었다.
알고 보니 다보탑 속에 있던 것은 불상이 아니라 석사자상(石獅子像)을 오인한 것이었다.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작아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차관(借款)을 가능하게 한 거북선 도안
 거북선 주화에는 재미있는 일화(逸話)가 있다.
1971년 9월에 정주영 당시 현대 그룹 회장이 현대 조선소의 설립을 위한 차관을 빌리러 영국에 갔을 때 영국 바클레이 은행 관계자들이 정중하게 정 회장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들의 무엇을 믿고 차관(借款)을 줄 수 있을까요?"
그 때 정 회장은 주머니에서 거북선이 도안되어 있는 주화를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만든 거북선입니다. 이 철갑선을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받은 차관이 오늘날 세계 1, 2위의 조선(造船) 한국을 이룩하게 한 것이다.
1960년부터는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세종 대왕의 용안을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시라.
세종은 1397년에 나시어 1450년까지 사셨으니 분명 54세에 돌아가셨는데 화폐 그림은 7~80대의 노인의 얼굴인 것을.
그래서 요즈음은 그 얼굴보다는 젊게 바뀌었지만 그래도 60대 이상의 얼굴이니 세종이 살아 계시다면 서운해 할 일이다.
1,000원 짜리 이황 선생의 도안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1,000원 짜리 지폐에, 5,000원 짜리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초상으로 된 지폐가 나오자 이황 선생의 진보(進寶) 이씨 종중에서는 노발대발하여 조폐공사에 몰려갔다.
우리 퇴계 할아버지가 덕수(德水) 이씨 율곡보다 무엇이 부족하여서 5000원이 아닌 1,000원 짜리 모델이 되었는가 하며 분노했다.
이분들을 껄껄 웃으며 돌아가게 한 조폐공사 담당자의 재치 있는 한 마디가 지금까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우리도 퇴계 선생이 학문으로나 연치(年齒)로나 율곡 선생의 윗분임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5,000원 아닌 1,000원의 모델로 퇴계 선생님을 모신 것은 훌륭한 분은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퇴계 이황의 초상화가 여윈 모습인 것은 잔병이 많고 성품이 깔끔했었다는 고증을 반영한 이유태 화백의 생각에서였다.

*. 화폐 모델들의 모자 이야기 
  
도안에 있는 인물들은 한결 같이 모자를 쓰고 있는데 종류가 각각이어서 그 쓰임으로 옛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다.
10,000원권 세종대왕이 쓰고 있는 것은 익선관이다.
익선관(翼善冠)이란 임금이 평상복을 갖추고 정무를 볼 때 쓰던 관이다.
5,000원권 율곡이 쓰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쓰던 정자관(程子冠)이다. 말총으로 짜거나 떠서 만든 유생들이 쓰던 관으로, 위가 터지고 세 봉우리가 지게 2층으로 되어 있는 것이 선비들의 기개를 상징하는 것 같다.
1,000원권 이황은 돌잡이가 쓰는 복건(복巾)을 쓰고 있다.
복건이란 유생들이 쓰던 쓰개로 검은 헝겊으로 만들되 위는 둥글고 삐죽하며 뒤에 넓은 자락이 길게 늘어지고 양 옆에 끈이 있어서 뒤로 돌라매게 되어 있는 것이다.
500원권 이순신이 쓰고 있는 모자는 사모(紗帽)로 벼슬아치의 예모다. ‘사모 바람에 거드럭거린다.’에서 사모는 권세를 뜻한다. 1972년에 나온 5천원권의 율곡의 얼굴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돈의 모습과는 달리 코가 높은 서양사람 얼굴이다.
72년 무렵의 우리나라에는 화폐 인쇄용 철판 조각 기술이 없어서 조각가 김정숙씨가 세운 동상 얼굴을 원본으로 영국 조폐기관에 맡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론 따라 지금의 모양으로 1983년에 이종상 화백이 바꾸었다.

*. 시각장애자들은 만원, 천원을 어떻게 구별할까
 시각장애자들은 지폐의 명목상의 가치를 어떻게 구별할까.
시각장애자등을 위한 조폐공사의 배려는 어떤 것이었을까.
종이 표면에는 솜털이 있고, 만지면 손끝에 느껴지는 요철이 있다.
은행권(지폐)의 좌 하단을 자세히 만져 보면 점자처럼 볼록한 둥근 부호로 갯수가 표시 되어 있다.
1천원권에는 하나, 5천원권에는 둘, 1만원권은 셋이 있다.
만원권에는 특별히 은선(銀線)이 있는데 위치가 일정하지 않다. 일정하면 빳빳한 신권인 경우에는 묶어 놓았을 때 한곳이 불룩하여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지폐를 들어 밝은 빛에 비추어 보면 숨은 그림이 나타난다. 위폐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만약 위폐 범들이 복사한다면 까만 줄로 나타난다.

*. 화폐의 인물 중 가장 오래 산 이황

 인생을 바람직하게 사는 것이 오복(五福)을 고루 갖추고 사는 것이다.
오복 중에서도 제일 첫째가 '수(壽)'다.
역사상 한국인을 대표하는 왕은 세종대왕이고, 학자로는 율곡 이이와 퇴계 선생이고, 장군으로는 이순신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화폐에 등장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박정희 장군의 뜻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분들은 몇 살까지 사셨는가.
가장 오래 산 분부터 차례대로 쓰면 이황 70세(1501-1570), 세종대왕 54세(1397-1450), 이이 49세(1536-1584), 이순인 44세(1545-1598)로, 병약하다는 이황이 가장 오래 사셨다.
그러니까 건강하다고 몸을 혹사할 일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폐의 인물은 전부가 이씨이니 이씨 아닌 타성(他姓)의 우리들은 억울하다.
위 모든 분들이 이씨(李氏)나 그의 어머니 사임다이니 이씨 천하(李氏天下)가 아닌가.


                                                                              -'지적재산권 200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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