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4은 오사카 성을 다 다녀온 사람이어서 이번 '일본 크루즈 여행'에서는 오사카 성을 생략하였지만 그냥 지나치기 섭해서 옛날에 오사카를 다녀와서 써 놓은 나의 오사카 성 여행기로 대신한다.
불행하게도 10여 년 전의 여행기라서 사진이 없어져서 유감이다.
*. 성(城) 이야기
성(城)은 성곽(城郭)을 말하는 것이다.
성곽은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안쪽의 성을 성(城)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밖의 성을 곽(郭) 또는 외성(外城)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성(城)은 크게 산성 (山城)과 읍성 (邑城)으로 나눈다.
산성(山城)은 적으로부터 유사시 방어와 도피를 위한 것으로 북한산성, 남한산성 등이 있고, 읍성(邑城)은 지방의 행정, 경제, 군사의 중심지로 낙양읍성, 해미읍성 등이 있다.
성곽은 성벽과 성황으로 나뉜다. 성황(城隍)이란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 城隍'의 '隍(황)' 자는 해자 '隍(황)'이다.
해자(垓字)란 성 밖으로 돌려 호(壕)를 파서 적군이 성벽에 접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물을 채워 두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 성은 전쟁이 발발하면 성 밖에 사는 사람까지 다 성내에 들어와서 함께 적들과 싸우면서 생사를 함께 하게 된다.
임란 3대 대첩으로 유명한 진주성(晋州城)은 1593년 왜놈의 재침 시에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쳐서 임란, 정유 난 통틀어 최대의 피해를 입은 곳이다.
그러나 일본의 성(城)은 평지에 있는 평성(平城)으로 무사들만이 산다.
우리들은 그 일본의 성 중에 二條城(니조조)와 大阪城(오사카성)을 보게 된다.
*. 국보 二條城(니조조)
니조 성은 교토 시 츄쿄구에 있는 성으로 1603년에 에도[東京]에다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계의 초대 장군 德川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이 교토 수호와 교토의 관저로 지은 성이다. 건물은 3대 장군 이에 미쯔가 1626년에 완성하였다.
이 二條城(니조조)은 1867년 15대 마지막 쇼군(장군) 요시노부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면서 쇼군시대 막을 내린 곳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정문 입구에 이궁(離宮, 리큐)이라 쓰여 있는 것은 1884년(메이지 17년) 황궁에서 분리된 궁궐이라 해서 바뀐 이름으로 2003년으로 이 성 축성 4백 주년을 맞는 유서 깊은 성이다.
긴 해자를 지나 東大手門(하카시 오오테몬)을 거쳐서 성내에 들어가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열심히 듣고 있다.
'세계유산 二條城(니조조)'의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시설로 보당을 누르면 '일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 각국어로 설명해 주는 시설이었다.( 그림 분실)
그 설명을 그림을 통하여 설명하고 자 한다.
궁전 규모: 총면적 275,000m²
건축변적: 7,300 제곱 m²
원내 문화재: 국보 니노마루 궁전(6동)
니노마루궁전벽화: 300여 점 중 중요문화재(미술공예) 954점
동대수문 등: 중요문화재(건조물)
니노마루 정원: 특별 명승지
이 二條城(니조조)은 일본의 대표적인 평성(平城)으로 동서로약 500m, 남북으로 400m의 성벽을 쌓고, 그 둘레에는 폭 13m, 성벽 높이 17m의 성벽을 해자(垓子)가 둘러싸고 있다.
건설 초창기에는 二의丸御殿 (니혼마루고덴)뿐으로 당시에는 소규모였는데 1626년 중요문화재인 本丸(혼마루)을 더 지으면서 지금처럼 큰 규모가 되었다.
本丸(혼마루)는 3대 쇼군 이에미쓰의 명으로 5층의 천수각을 지었는데 벼락과 대 화재로 그 터만 남아 있는 것을 교토 궁전의 재궁을 옮겨 놓은 것이 지금의 本丸(혼마루) 건물이다.
이 本丸(혼마루)는 가을 9월에만 공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문에서 가까운 국보인 '二의丸御殿 (니혼마루고덴)'만 관람하게 된다. 二の丸御殿(니노마루고덴)으로 들어서는 웅장한 唐門(카라몬)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기념사진을 찍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당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고 니노마루고텐을 들어가는 멋진 현관(玄關) 문이 보이는데 그 현관의 무늬가 唐門(카라몬)보다 더 멋졌다. 거기서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인과 더불어 기념사진 한 장 찍느라고 현관 좌측에 있는 특별명승지 니노마루 정원을 지나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일본 전통 정원 조성기법에 의거하여 연못의 중앙에 돌을 좌우로 하여 학과 거북 모양의 돌을 배치한 지천회유식이라는 정원이었다.
二の丸御殿(니노마루고덴)의 건물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죽 이어진 5개의 건물로 복도를 따라가며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 총건평이 3,300 m²의 건물에 800 여개 다다미가 깔린 총 33개의 방이 있다.
각 방에는 벽화가 있는데 카노파가 직접 손으로 그린 것이지만 그 원화 일부가 모사품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이러한 건물들은 모모야마 시대의 전형적인 사무라이 주택양식(쇼인즈쿠리) 건물이다.
6개의 건물은 현관부터 遠侍(도오자무라이, 방문자 접수처) -式臺(시까이, 무가 은폐실) -代廣間(오오히로마, 지방무관과의 접견소로 가장 화려함) -黑書院(구로쇼인, 친인척 및 무관들의 대면소) -白書院(히로쇼인, 장군의 침실) 건물들로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二の丸御殿(니노마루고덴)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우구이수바리'라는 마루이다.
만약의 반역에 대비하려고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면 새소리가 나는 시설을 만들어 놓고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 호위 무사로 하여금 이에 대처할 수 있게 하여 놓았다. 이 마루는 '나이팅게일 바닥'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二の丸御殿(니노마루고덴)의 실내에서는 카메라 촬영을 일체 금하여서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방의 모습을 촬영할 수가 없었다.
대개의 방은 다다미 방이었고 벽화로 그린 그림은 낙락장송의 소나무 그림 위주였는데 유난히 우람하였다.
어떤 방에는 실물 크기의 마네킹으로 사무라이의 각종 모임 모습이 있기도 하였다.
현관 마차를 대는 곳, 하인 숙소, 접견 실인데 그중 오히로마(공식 접견실)가 그중 화려한데 천정이 볼 만하였다.
이 방은 위에서 말한 15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제후들을 모아놓고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함으로써 도쿠가와막부의 막을 내린 역사적인 장소였다.
-사진 출처: 오사카, 고배, 교토 JUST, Go306p
*. 오사카 이야기
오사카는 '정치의 도시 東京(도쿄), 역사의 도시 京都(교토)에 비하여, 경제의 도시 大阪(오사카)'라고 불리는 약 884만명 의 인구가 사는 일본 제2의 도시다.
한국 제1의 상업도시인 부산과 마찬가지의 항구도시로 오사카는 물의 도시라서 '일본의 베니스'란 애칭을 갖고 있다.
道頓堀川(도톤보리가와)는 서울의 한강처럼 이 오사카 남쪽의 번화가를 동서로 흐르며 야경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오사카성을 쌓은 임진왜란의 원흉이며 과대망상자인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나게 되는데 도대체 어떤 작자인가. ,
-나는 태양의 아들이다.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을 때 태양이 태내(胎內)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명한 관상가는 '나를 평하여 햇빛이 미치는 곳, 조림(照臨) 하지 않을 곳이 없다. 장년에 반드시 팔방의 끝에까지 인덕을 베풀고, 온천하에 위명(威名)을 떨치게 된다.' 는데 그것을 어찌 의심하랴.
-동아시아 속의 한일 2 천년사(요시노 마코토 지음)186P
도요도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本能寺(혼노사)의 변(變)으로 노부나가가 살해된 뒤 그의 후계자로서 전국을 통일하였다.
히데요시는 그동안 축척된 막강한 국력으로 16만 대군으로 아무 준비도 없었던 조선 침략에 나선다.
침략의 명분은 '명(明)으로 가려고 하니 그 길을 빌어 달라'는 가도입명(假途入明)이었지만, 히데요시의 원래 요구는 정명항도(征明嚮導)로 '명을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안내하라'는 억지였다.
당시 우리나라 사정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요구였다.
1592년 4월 12일 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끈 16만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성(城)을 점거하더니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며 겨우 20일만인 5월 2일 수도 한성이 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나는 일언이폐지하고 그 당시의 만행을 당시에 만들어 놓은 귀무덤[耳塚]으로 다시금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고발하고 싶다.
*. 오사카성(城)
오사카의 심벌 오사카성(城)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에 혼간지 절터에 축성한 호화로운 성곽이다.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를 거점으로 하여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일본 국내를 통일하였습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히데요시의 중신이었던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오사카성을 함락하고 도요토미 일족을 멸망시켰습니다.
그 후 전쟁과 낙뢰 등으로 소실된 것을 오사카 시민의 기부금으로 3번째의 천수각이 재건된 것입니다.
1945년에는 미군의 공습에 의하여 후시미 망루 등 성내의 옛 건조물이 다소 소실되었으나 이후 오사카 성터가 국가특별사적으로 지정되고, 성내의 당시의 건조물 13채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유명한 성입니다.
오사카성은 그 일대를 1931년 총면적이 106.7ha에 이르는 광대한 공원으로 개설되었습니다.
그래서 봄에는 약 600여 그루의 벚나무와 1,250여 그루의 매화가 만발하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계절마다 각기 다른 아름다운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오사카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垓字)는 폭이 70∼90m, 성벽 높이가 20m를 넘는데 그 화강암 성벽은 총길이가 12km에 달하며 거기 사용된 돌만도 50∼100만 개나 됩니다.
오사카성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성벽돌이 눈을 놀라게 하는데 성내에서 가장 큰 거석은 사쿠라몬 문안의 네모진 빈터에 놓여있는 거대한 다코이시 거석으로 면적 59.43㎡, 평균 두께 90cm, 무게는 약 130톤으로 저걸 어떻게 옮겨 왔는지 의심이 솟아납니다. 도꾸가와 히데요시가 성을 쌓을 때 전국의 다이묘들이 바친 충성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참조: 오사카시 홈페이지 http://www.osakacastle.net/
*. 8층의 오사카 성(城)
오사카 성(城) 관람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까지 가서 내려오면서 구경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8층: 지상 50m의 천수각에서 오스카 성과 오사카시를 일망 하는 전망대
7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
6층: 오사카여름전투 병풍도(도꾸가와 히데요시를 멸망시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
5층: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시대 물품과 자료(촬영금지)
4층: 황금다실 모형,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시절의 오스카성 모형 전시
3층: 도요토미, 도꾸가와 오스카성 모형 전시
2층: 오스카성의 역사와 복제품과 페널 전시
1층: 오스카성의 전설과 불가사의 영상실, 기념품 매점
*, 호젠지사(法善寺)
우리는 안내인 따라 난바역에서 걸어서 4분 도톤보리에 위치한 작은 절을 찾아간다.
제2차 대전 때 다 파괴되고 부동존(不動尊)만 남아 있는 걸 보존하여 만든 사찰이다.
길이 80m, 폭 3m의 좁은 돌길 따라 좌우에 선술집을 지나니 코너에 이끼 낀 호젠지(‘法善寺) 불상이 기다렸단 듯이 나타난다. 예날 제2차 대전 시 공양물이 없었던 참배객이 이 부동존(不動尊)에게 물을 끼얹으며 소원을 빌던 것이 시초였다고 전하여 온다.
맞추어 한 신자가 새전(賽錢) 통에 동전을 넣고 옆에 흐르고 있는 물을 둥근 구기로 떠서 이끼로 덮힌 초록의 이 환상적인 불상에 끼얹으며 소원을 읊조리며 합장기도 하고 있다.
우리는 그 근처에서 우리를 굽어 보고 있는 오사카 타워를 향한다.
*. 오사카 사카타워 시내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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