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장가계(長家界)와 원가계 (猿家界)2

ilman 2024. 5. 18. 19:31
원가계 (猿家界)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듯이 아름다움도 함께 몰려 사는 것일까. 세계의 문장가들을 보아도 같은 세대에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갑천하 계림
(桂林)이, 하노이의 하롱베이 (Ha Long bay)의 그 멋진 수천 수만의 봉우리가 그렇더니 여기 장가계의 풍광 또한 아름다움이 오밀조밀 가까이 몰려 있다.
장가계 삼림공원(森林公園)경내에 들어와서 20여분 가면 만나게 되는 이정표에 황석채(黃石寨), 금편계(金鞭溪), 학자색(鶴子寨) ,삭도(索道)의 갈림 길이 있는 것을 보면 무릉원(武陵源)이란 이름으로 한데 모여 어울려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여행사들이 장가계(長家界) 여행에 원가계(猿家界)가 따로 있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무릉원 중의 하나가 원가계(猿家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가계 경치를 태산의 웅장함〔泰山之雄〕과 계림의 빼어남〔桂林之秀 〕과 황산의 기이함〔黃山之奇〕과 화산의 험준함〔華山之險) 〕을 한데 모아 놓은 산이라고 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달에게 물었다.             (猿人問月)
문을 열고 보는 산이                     (開門見山)
천하 제일교인가.                          (天下第一橋)
하늘이 스스로 만든 다리인가       .(天生橋)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천하제일교
(天下第一橋)'는 300m의 바위 둘이 길이 20m, 넓이 2m의 자연석을 받치고 있는 천연적인 다리인데 그 아래는 천길 절벽으로. 그 다리 위를 거닐면 구름 위 오작교(烏鵲橋)를 거니는 듯할 터인데, 관광객의 안전을 위함인가 출입금지다.
그 다리 끝에 정자 두 채가 있는데 거기서 다시 또 위로 오르는 층계는 천국을 오르는 계단 같다.
그런데 이건 무언가. 이 다리 입구 난간에 수백 개 수천 개가 넘는 잠을 쇠가 굳게 잠겨 있는 것은?.

사랑하는 우리 이름으로
잠을 쇠를 굳게 잠그고
그 열쇠를 멀리 버리자.
우리들 사랑 깊이까지-.
그 열쇠
찾고 나서야
이별이 가능하다니-.
                           -잠을쇠                        

나도 아내에게 비록 지키지 못할 언약이나마 여기서만이라도 하여 주고 싶다.
'자기가 건강하다고 아내가 아파도 무관심 하고, 형제보다 자기를 괄시한다고, 둘째 며느리로 시집 와서 큰 며느리 역할 시킨다고, 남한테는 잘하면서 자기한테는 고약하다고, 술만 먹고 다닌다고, 잔소리 대학 잔소리과 전교 수석 졸업생이라고 자기를 거시기 한다고, 죽어서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 늘 푸념하는 아내에게 원가계 절승 앞에서, 굳게 언약하는 수많은 굳게 잠긴 잠을 쇠 약속 앞에서 시 한 수를 아내에게 바치고 싶어진다. 

다음 세상 또 있다면
다시 부부(婦夫) 되고 싶다
아내는 내가 되고, 당신은 남편 되어
녹발(綠髮)이
백발(白髮)이 되도록
우리로 살고 싶다.

잔소리 않는 아내
당신에게 되어주고
아내만 위해 사는 나의 남편 당신 되어
저 세상
부부(婦夫)가 되어
지금처럼 살고 싶다.
                            -부부(婦夫) 
천하제1교(天下第一橋) 거기서 조금 내려온 곳에 미혼대가 있다.
혹(惑)할 '미(迷)'. 넋 '혼(魂)'이니 '미혼대(迷魂臺)는 넋을 잃을 정도로 혹(惑)하는 곳이라는데, 우리는 천자산과 어필봉에서, 원가계 '천하제일교'에서도 넋을 벌써 잃었는데 여기서 또 무엇을 잃으란 말인가.
미혼대란 반어법으로 그 잃은 넋을 여기서 찾아가라는 곳이 바로 미혼대(迷魂臺)인 모양이다. 공불이색(空不異色)요 색불이공(色不異空)인 불가의 화두(話頭)처럼-.

 우리는 백룡(白龍) 엘리베이터를 타고 산정 호수 '보봉호(寶峰湖)'를 간다.
백룡엘리베이터는 3대가 동시에 수직으로 327m를 내려오는데 171m까지는 절벽에 붙인 수직 강철 구조물을 이용하여 유리창을 통하여 수려한 밖을 내보며 내려오다가, 다음 156m는 컴컴한 동굴 속을 고속으로 내려오는 세계에서 제일 높고 크고 속도가 빠르다는 관광 전용 엘리베이터다.

*. 황석채(黃獅寨)에 오르지 않고 장가계를 말하지 말라
  황석채(黃獅寨)는 장가계 절경 중에 절경이어서 늦으면 오르내리는데 기다린다고 서둘러 식사하고 호텔을 나섰다. 
황석채 가는 길은 어제 지문을 찍고 들어갔던 국립삼림공원으로 가다가 곧장 가면 금편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간다. 여기도 힘든 코스가 있는지 가마꾼들이 달려 든다. 조금 오르니 엘리베이터 승강장이었다. 이 엘리베이터는 특이하게도 세 개의 노란승강기가 동시에 산정을 오르내리는 것이다.
 '황석채 (黃獅寨)에 오르지 않고 장가계를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장가계의 명승지가 아무리 가까이 모여 있다 하지만 크게,' 장가계 국가삼림공원', '천자산 자연보호구', '삭계욕 자연보호구' 셋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는 드넓은 장가계의 경치를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듯이 황석채에서는 한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황석채는 '장가계 5경구'에 속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무릉원이라는 장가계 일원의 면적이 264제곱 km로 미 개발된 5대 경구를 모두 합한다면 500 제곱km라니 이 얼마나 부러운 이야기인가.
  장가계는 일년에 200일 이상이 비가 오는 날씨라. 우리나라 지리산 천왕봉에서 3대에 덕을 쌓지 않으면 못 본다는 일출처럼, 장가계 날씨도 행운이 아니고서는 오늘보다 선명한 경치를 기대할 수가 없다 한다.
동양의 그랜드캐년이라는 이 장가계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고 찍었으나 일행을 뒤따라 뛰어가면서 2~3 분 이내로 찍은 사진이라서 마음에 드는 것은 몇 컷뿐이다. 정밀한 촬영을 해야하는 파노라마 촬영은 더욱 어려웠다.
일언이폐지하고 보시라, 황석채에서 본 장가계의 위용을-.
 '북경(北京)은 발로 하는 관광이요, 서안(西安)은 귀로 하는 관광이다. 계림(桂林)은 눈으로 하는 관광'이라면, '장가계는 몸과 발과 눈'으로 하는 여행이라 한다.
그러니 장가계는 아주 늙기 전 다리 힘에 조금이라도 자신이 있을 때 와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관광이란 말이다.
 <SRC="HTTP: S www.donginji.or.kr Users I J SIJIN upload 황석채%2015-(1).JPG?>아까워라! 세월의 탓이로다. 그 아름다운 이미지가 다 사라져 버렸구나.

  고등학교 시절 동양사를 배웠는데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는 사 년 동안 천하를 다투다가 유방이 장양(張良), 소하(蕭何), 한신(韓信)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항우를 꺼꾸러트리고 장안에 도읍하니 이가 곧 한(漢) 고조(高祖)이다."
 그러나 유방은 한나라를 건설한 후 개국 공신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더니 한신(韓信) 장군을 미앙궁(未央宮)에서 죽여 버렸다.
이때에 한신은 자기 신세를 토사구팽(兎死狗烹)으로 비유하면서 생을 마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보다 앞서 전략가 장량
(張良)은 유방이 공신들을 주살(誅殺)할 것을 선견지명으로 알고 미리 치사(致仕)하고 숨어 버린 곳이 장씨들의 집성촌인 장가계였다.
그래서 '수요산문' 어디엔가 장량의 무덤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서 도를 닦다가 위험에 빠져 사경을 헤맬 때 구해준 이가 스승인 황 석공(黃石公)이라 하여 황석채(黃石寨)라 이름 하였다 한다. '寨(채)'는 도를 닦으며 산에서 살 때 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살았다는 뜻이다(山居以木柵).
황석공(黃石公)은 젊은 장양에게 태공병서(太公兵書)를 물려주어 책사(策士) 장자방(張子房)으로 하여금 한(漢) 나라 건설에 크게 기여 하게 하였던 분이다.
  황석채를 달리 말해서 누런 바위가 겹겹으로 울타리를 형성한 것처럼 보인다 하여 '황석채(黃石寨)"라 이름 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황석채를 황석봉(黃石峰) 또는 황사채(黃獅寨)라고도 하는데 '황사채(黃獅寨)'란 석양이 정상의 바위를 비출 때 모습이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 하여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 금강산이 계절마다 이름이 다르듯이 황석채도 한 가지 이름으로 명산을 다 말할 수 없다 해서 이렇게 이름이 많은가 보다.

  한눈으로 봉삼천 수팔백리(峯三天 水八百里)라는 장가계 절경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는 해발 1,300m의 황석채에는 장가계에서 제일 크고 멋지다는 전망대가 있다.
날라 갈 듯한 여섯 개의 지붕이 있다 해서 육기각(六奇閣)이라고 하는데 '육(六)'이란 하늘, 산, 물, 나무, 사람과 동물을 상징한다. 동물 중에는 특히 원숭이와 뱀이 많다.
뱀 중에는 독사가 많다는데, 한 번 물리면 다섯 발자국 이내에 죽는다는 오보사(五步蛇), 일곱 발자국에 죽는다는 칠보사(七五步蛇)도 있다니 장가계 원가계에 와서는 숲속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을 일이다.

'장가계 정상에 오른 이는 신선이다'라는 글을 보니 아아, 우리도 신선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로구나. 이 황석채에서 유명한 구경할 곳은 대략 20여 곳 되지만
그 중 딸 '摘(적)', 별 '聖(성)', 별을 딸 수 있다는 적성대(摘星臺)가 있고, 쌍문이 있어 손님을 맞는다는 쌍문영빈(雙門迎賓) 바위도 있다.
다섯 손가락을 활짜 펼쳐 놓은 듯한 오지봉(五指峰), 연인끼리 정답게 이마를 마주 대고 있는 정인봉(情人峰)의 모습이 다정하다,

*. 산정호수 보봉호(寶峰湖)의 선상 유
 요산요수(樂山樂水)라더니 유네스코가 말하는 세계 자연유산인 장가계, 원가계를 둘러보고 물을 찾아 ' 보봉호'를 가고 있으니, 우리도 군자(君者)요 인자(仁者)인가 보다.
  보봉호(寶峰湖)는 전기를 얻고 양어장도 겸하기 위해서 해발 430m 위에 뚝을 막아 만들어 놓은 인공 산정 호수인데, 호수 가운데에 금강산 삼일포
(三日浦)처럼 작은 섬 하나가 있다.
평균 수심 72m, 폭으로 가장 좁은 곳이 10여 m, 넓은 곳이 150m로 산 위에서 멀리 조망하여 보면 파란 비취 하나가 기암절벽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 하여 보배 '보(寶)', 보봉호(寶峰湖)라 한 것 같다. 그래서 이 호수의 유람은 물과 산이 한데 어우른 유람(遊覽)이다.
  90년대부터 말레시아 상인이 이를 관광지로 개발하여 임대 경영하하고 있는 호수였다.
산정의 호수라서인가 이 호수 속에는 '애기물고기'가 보호어종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데, 큰 것은 무려 75kg이나 된다.
입은 메기를, 몸은 악어를 닮았는데 우는 소리가 아기 우는 소리와 흡사하여 으스름 달밤에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몸을 오싹하게 한다고 한다.
오름길 20분, 내리막길을 15분 정도로 오르내리다 보니 드디어 선착장이 보인다.
  유람선의 동력은 전기여서 40여분 동안 천천히 조용히 호수를 일주하였다. 해가 막 진 후여서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유람선이었다. 이 호수에서 10여m 가장 좁다는 곳을 빠져 나가니 왼쪽의 배에서 붉은 전통의상을 입은 토가족 여인이 나와 청아한 목소리로 토가족 노래를 부른다.
 노르웨이에서 산악열차를 탔을 때 이런 모습이 있더니 이를 모방한 것 같다. 모방도 창조라고 퍽 좋아보인다.
다음 모퉁이를 돌아드니 요번엔 청색 전통의상을 입은 토가족 총각이 노래를 불러 우리의 흥취를 돋우어 준다. 이 배가 마지막이 아니라면 깊숙한 호숫가에 내려서 토가족의 민속춤을 보련만 너무 늦어 이들이 철수한 지 오랜가 보다.
장가계에서 오래 살아온 토가족은 옛날에는 산적(山賊)이 그들의 조상이었다가 산간 생활이라서 중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살아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관광 수입이 주 자원이 되었다 한다.
토가족의 생활상은 장가계 시에 있는 ‘수화산관’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는데 일정에 잡히지 않아서 못 가보았지만 그토가족들에겐 이런 풍습이 있다고 한다.

*언어는 있으나 문자는 없다.

* 여자가 구애를 할 때는 남자의 발등을 세 번 밟는다. 남자는 여자의 발굽을 두 번 가볍게 찬다.
* 최고의 신붓감이란 발이 작아야 하고, 수(繡)를 잘 놓아야 하며, 시집가는 여자는 잘 울어서 눈이 부어야 좋고 훌륭한 신부라고-.
* 음식은 짜고 향료가 짙은 음식을 좋아하고, 처마에 걸어 말린 돼지고기를 별미로 친다.

 호수를 둘러보니 선녀바위, 두꺼비 바위, 공작새 바위 등이 전설을 말하고 있는데 뚝을 막은 지 십년을 넘은 곳이니 어찌 이런 이야기가 전설 축에 들랴. 전설이란 민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문자로 정착하는 것안데.
우리는 배에서 내려 수직으로 된 절벽에 나선형으로 만들어 놓은 환상적인 길을 걸어 내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막 나오다가 그 호텔 로비에서 아내의 불자 친구 이무련 내외를 만나 사진 한 장으로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였다.
아내의 친구 남편은 사업가요, 우리 아내 남편은 무명의 시인이다. 아내에게 "전 대통령, 전 회장은 있어도 전 시인(詩人), 전 작가(作家)란 말이 있는가. 그래서 '생전부귀(生前富貴)요, 사후문장(死後文章)'이라 하는 거야." 했더니 아내가 씁쓸히 웃으며 말하더라. "그래도 나는 '생전부귀(生前富貴)'가 좋은데-."
  우리들의 관광은 28명이 함께 다녔다. 비록 6일 동안이기는 하지만 같은 호텔에서 숙식을 하고 같은 버스를 타고 온종일 함께 관광을 해야 하는 게 해외여행이다.  그중 걷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거나, 보행에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불행하게도 조금이라도 걷는 경우에는 포기를 하는 그런 일행들이 많았다. 게다가 거시기를 좋아하고 이용하려는 가이드를 만났으니 나는 혼자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 초중등학교의 동창생 내외들이어서 그분들은 자기끼리만 어울리는 바람에 아내와 나는 외톨일 수밖에 없었는데, 천만 다행으로 칠순 기념 여행을 온 이건형 여류수필가와 갑장 남편인 변부석 사장이 있어 우리는 항상 함께 하였다. 게다가 부군이 술을 즐겨하셔서 나에게는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위 사진(분실)은 금년에 칠순을 맞은 부부에게 주기로 한 황석채 기념사진이요, 축시 한 편이다.

*. 만나서 안타까운 사람도 있었다.
이 곳 오기 전에 들렸던 항구 도시 샤먼(廈門)에서 쇼핑센터를 방문하였을 때 거리에서 만난 장애자에게 돈 1,000원을 건네고 사진 한 장을 찍으려 하였더니 피한다.
  잔인하게도 두 다리가 완전히 절단 되어 바퀴 달린 썰매를 양 지팡이로 움직이는데 하늘은 무심하게도 그 손목 하나마저 잘라 놓았다.
'대지(大地)'를 쓴 펄벅 여사가 소아마비인 딸을 고치고자 전 세계를 전전하다가 실패하고 한 말이 기억난다.
"불행이란 시간이 가도 고쳐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 후 펄벅 여사는 자기의 자식에게 대한 작은 사랑을 큰 사랑으로 바꾸어서,그 일예로 파주에 펄벅재단을 만들어 한국 전쟁 고아 구제에 온 힘을 바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