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隨筆)☎

마지막 생일 잔치/ 박재하 장인

ilman 2022. 3. 11. 09:52
마지막 생일잔치  

박재하 翁(기미년 음. 3월 16일 생)

 오늘은 우리 장인 어른 84세의 생신 날이다.
요번이 마지막 생신 잔치가 될지도 모른다 해서 군인간 큰손자(박해준)와 중국 유학간 손녀를 제외한 가족이 모두 모였다.
현관 신발을 정리하고 있는 둘째 처남 아들에게 물어 보니 전부 27켤레라 한다.
 그 동안 아침마다 빠짐없이 뒷산 북한산을 오르시고, 평생 동안 술을 달고 사시면서도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셨는데, 요즈음은 담배도 끊으시고 힘이 예전 같지 않다 하시며 그렇게 좋아하시던 약주도 드시지 못하신다.
 두어 달 전인가, 그 동안 건강을 자랑하시며 사시던 장인 어른이 갑자기 몸이 마르고 기침을 자주 하시고, 가래가 끓어 동네 병원을 찾아갔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 해서 간 S병원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다.
 "폐암입니다. 말기예요. 폐에 달걀 만한 큰 혹이 있어요. 앞으로 6개월 아니면 1년이 남았습니다.
연세와 건강 상태로 보아 치료보다 편안히 모시고 맛있는 것 사 드리는 것이 좋을꺼예요."
장인 모르게 장모님이 듣고 오신 말이었다.

 시집가면 딸들은 친정어머니의 절대적인 신봉자가 된다.
그래 그런가, 아내도 내가 술을 마시는 데에 아주 관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술시중을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고맙게도 계절에 맞추어 어김없이 포도주, 매실주, 마늘주를 담가, 언제나 집에 술이 그득하게 된 것도 오로지 술꾼 장인을 둔 덕분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인이 없더라는 말은 우리 장인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아버님은 법이 없어도 사실 분이셨다.
옛날에 쓴 나의 "자화상"이란 시조의 초장 중장은 생각해 보니 장인 어른을 두고 지은 것 같다.

   법 없어도 살 사람, 법 있어야만살 사람
   술 없이는 못 살 사람, 술 있어야 살 사람
   언제나
   귀퉁이에서
   뒷북치고 사는 사람


 병원을 다녀오신 후부터 자식들이 왜 자주 찾아 와서 점심하자고 하는지, 늘 답답하시다고 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작은 아들이 강화를 일주하고 온 것이나, 금년 생일에는 자식들 거의 모두가 왜 모이게 되었는지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
 옛날처럼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요즈음 갑자기 기력이 쇠하여 진 것은 늙고 나이 많이 들면 모두 그러려니, 자식들도 그래서 그러려니 생각하시는 낙천적인 착한 성품이시기 때문인 것 같다.
생신 날이 오면,처음에는 모시고 있는 큰아들 내외가 오랫동안 생신 잔치를 집에서 차리다가, 음식점에서 식구들을 부르더니, 요번에는 둘째 처남 댁에서 불렀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근무하느라 집을 떠나 살던 둘째 아들이 그 한(恨)을 조금이라도 줄이겠다고 해서 차리는 모양이다.
첫째네는 회(膾)를 푸짐하게 떠오고, 셋째네는 갖가지 요리와 야채 등을 준비하고, 둘째는 마음 먹고 크게 차렸다. 해외에서 근무하다 모은 그 귀한 술도 아낌없이 세 병이나 따는 바람에 사위 둘은 원님 덕에 나발 불고 왔다.
 딸들이나 직장 있는 손자 손녀들은 용돈을 드린 모양이다.
며느리들이 정성껏 차린 음식상과 작년에 결혼한 큰딸 아들 내외가 사온 케이크 앞에서, 며칠 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작은 딸 아들 내외와, 재롱둥이 증손녀들과 함께, 여대생이 된 세째 아들의 딸인 손녀가 부는 풀룻에 맞추어 생일축가를 함께 불렀다. 이를 둘째 아들이 비디오로 하나도 빠짐없이 녹화하는 모습은, 오늘 이 잔치가 우리들 아버지며 아버님의 마지막 생신잔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우리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우리들에게도 큰 잘못이 있다. 그래도 살 만하다는 자식들이 1년마다 건강 진단하시는 것을 말기 폐암까지 되도록 왜 이리 소홀하였는가. 우리 자식들 마음 속에는 '살 만큼 사셨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셔야지-' 하는 갸륵한(?) 순서 주의로 불효가 되는 생각을 해오지는 않았는가.
 나이 70이 가까워 오는 나의 눈에는, 오늘 모습의 하나하나는 머지 않아 다가올 나의 미래 같다.
요즘 들어 장모님이 장인 어른을 더욱 극진히 모시는 것을 보며 내가 장인이 된 나의 내일을 생각해 보곤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을 보려거든 그 사람의 후반생(後半生)을 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나도 후반생(後半生)이라. 이 명언을 지키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건강도 채크하며, 보람되게 살아가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멋있게 사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겠다.
  우리도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어딘가 자주 다녀야겠다.
그리고 부모님 돌아가신 후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란 말처럼, 어쩌면 다시 불러보지 못할 아버님 어머님이란 호칭을 자주 불러 보아야겠다.
창밖에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내일은 우리 남매들과 함께 미루다 만 성묘를 서둘러 다녀와야겠다.
                                                                         -2002년 4월 28일(음 3월 16일) 큰사위 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