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南漢山城) 도립공원
*. 병자호란 이야기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 중에 살아가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든다면 선조 22년(1592년 4월)부터 인조 15년(1638년 1월)까지 46년 동안을 살았던 백성들일 것이다.
그 사이에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어야 하였으니 그 고통이 오죽히였을까.
그때 우리를 괴롭힌 작자들은 남(南)으로 왜놈들이요, 북(北)으로는 여진족들이다.
여진족(女眞族)이란 명칭은 시대마다 달라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숙신(肅愼), 수(隨) 나라와 당(唐) 시대에는 말갈(靺鞨), 송(宋) 나라 때는 여진(女眞), 청(凊) 나라 때에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일컫던 민족이다.
고려 때만 해도 우리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활, 말, 모피 등을 조공하고 의류, 식량, 농기구, 그릇 등을 수입해 가던 무리들이었다. 명(明) 나라가 임진왜란 시의 조선 파병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여진족의 추장 누루하치가 심양(瀋陽)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금(後金)(후에 淸으로 개명)이라 하고 나아가 중국을 통일한 민족이다.
그 금(金) 나라가 1차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서 우리나라와 형제 지국(兄弟之國)의 관계를 강제로 맺고 가더니,
여기에서 한술 더 떠서 군신 지국(君臣之國)의 관계를 요구하며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조차 없는 지나친 요구를 해오다가 20만 대군을 끌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특별히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쟁 후 더 많은 고생을 하게 된 한 많은 굴욕적인 ‘청(凊)의 요구 11개 사항’이다.
1. 청(淸)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할 것,
3.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4. 청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는 지체 없이 원군을 파견할 것,
5. 가도(假島)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6. 청 황제나 황후, 태자 생일 등의 경조사에 사신의 파견은 명나라에 하던 구례대로 할 것.
7. 압록강을 건넌 후 납북자 중 도망자가 있으면 즉시 되돌려 보낼 것.
8.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9. 조선은 성(城)과 그 담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11. 조선은 다음 해인 1639년부터 해마다 조공 물을 보낼 것
이런 강압적, 굴욕적인 조약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이 9년 간이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고, 무고한 백성 50만여 명이 개 끌려가듯이 잡혀가서 그들에게 온갖 만행을 당했다.
들어보지 않았는가. 우리나라 부녀자들이 그들의 성(性) 노리개가 되었다가 돌아온 여인이 화냥년(←還鄕女)이라는 어원이 되었다는 것을-. 이러한 모욕적인 조약은 일본과 싸우다가 일본에게 패한 청일전쟁(淸日戰爭, 1996년)까지 계속되었다.
*. 남한산성(남한산城) 산행
남한산성은 서울에 지하철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가보고 이번에 두 번째로 왔다.
3호선 종점이었던 수서역에서 분당선을 바꿔 타고 복정역에서 내려서 다시 8호선을 갈아타니 산성 다음 역이 남한산성입구역이다. 밖에 나오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전혀 다른 세상에 되어 있는데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란 시구처럼 변함없는 남한산성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역에서 6번 버스를 타면 남한산성의 중심인 ‘종로(鐘路’)로 간다지만, 걸어서 10분이면 ‘남한산성 유원지’라고 하여 남문 쪽을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가는 길에 먹음직한 음식점이 있어 점심식사를 하고 보니 12시가 넘어서야 등산을 시작한다.
중국에 가면 산동성(山東省)이 있다. 태항산(泰行山)의 동쪽에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성남시도 마찬가지로 남한산성 남쪽에 있는 도시라서 성남(城南)이라 부르는 것이다.
산에 오르다 보니 그 시설에 투자한 것이 여유가 만만한 것이 '강부자'(강남 부자)가 많이 산다는 분당과 판교 신도시가 있어서 이렇게 좋은 시설 투자를 한 것 같다.
약수터 시설, 신발의 먼지를 터는 에어 건과 유난히 많은 돌탑, 그리고 걷고 싶은 맨발 공원 등.
유원지를 막 벗어나니 등산로가 시작되는데 거기서 산성약수터까지 1km 사이에 ‘시조가 있는 산책 등산로’가 있는데 그 간판에 등산에 대한 말도 있다.
-등산 효과: 생활의 활기가 생기고 노화의 지연/ 스트레스 해소와 긴장완화/ 근력강화
그렇다. 옛말에 '補藥三貼不如秋日登山‘(보약 삼 첩 불여 추일 등산)'이라. 보약 세 첩이 가을 등산만 같지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나이 들어도 술을 그렇게 퍼 마시면서도 친구들보다는 내가 비교적 젊게 사는 것은 오로지 등산 때문인 것 같다. 산책 등산로는 좌우에 석물을 세우고 거기에 비명 대신 시조를 음각하여 놓았는데 그중 다음 시조가 그중 멋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의 산이시다
뜰에 서면 뜰이 가득, 방에 앉으면 방이 가득
아버지! 불러만 봐도 높고 푸른 산이시다.
-정완영 시조시인
내가 본 거기 있는 10수의 작품은 병자호란을 노래한 시를 주로 모은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4수를 빼고는 시조가 아닌 한시(漢詩) 번역 등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시조 중에 이 산에는 꼭 있어야 할 병자호란 당시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면서 쓴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자 漢江水야 '로 시작하는 김상헌의 우국 시조는 내가 못 본 것인가 빠진 것일까.
*. 남문(南門) 이야기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左翼門(좌익문,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戰勝門, 북문) 같은 4대문이 있다. 이 중 남문은 남한산성 유원지에서 2km 지점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는 문으로 성 내에서는 가장 크고 웅장한 남한산성의 중심 문이다.
북한산의 대서문(大西門) 같은 문으로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남문은 유일하게도 '至和門'(지화문)이란 현판이 남아 있는 문으로 그 앞에다가 성남시에서는 ‘남문 앞 역사 터’를 꾸며 놓았다. 성남시가 보호수로 지정한 수령 350년가량의 느티나무가 5 그루가 있는데 이는 비가 올 때 경사진 성곽 주변의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함도 있지만, 적들로부터 시각적으로 이 문을 차폐하려는 목적으로 식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다.
‘무궁화공원’을 지나니 8각 정자가 있다. ‘영춘정(迎春亭)’이었다. 원래는 남문 아래 있던 것을 서울과 경기지방 일대를 관망할 수 있는 현 지점으로 옮긴 정자다. 경치 좋은 곳에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과 방이 없이 마루만 있는 것이 정자(亭子)이니 사방을 어찌 아니 관망하랴. 그러나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만 그 사이로 성남시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이야기
거기서 400m 지점에 암문(暗門)이 있고 그 위에 이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2층 누각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 유형문화재 제1호)가 있다.
장대(將臺)란 장군이 성(城)이나 보(堡)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서장대) 이외에도 동서남북으로 4개의 장대(將臺)가 가 더 있는데 나머지는 터만 남아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장대는 수어장대 한 곳뿐이다. 북한산에 동장대(東將臺)와 같은 것이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摠戎廳)에서 맡았다가 수어청(守禦廳)이 5영(營)을 관활하였다.
남장대(南將臺)에서 전영장(前營將)이, 북장대에서 중영장, 동장대에는 후영장 등이, 서장대[守禦將臺]에서는 우영장이 진(陣)을 치고 맡았는데, 현재는 서장대[守禦將臺]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수어장대가 있는 이곳이 이 산의 주산인 청량산(淸凉山, 482.6m) 정상이다.
남한산성은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에 연주봉(467.6m), 동에 망월봉(502m)과 벌봉(521.1m, 일명 남한산), 남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산성은 평상시에는 곡식과 무기를 저장하는 군창(軍倉)으로 쓰이다가, 전쟁이 나면 주민 모두를 이끌고 산성에 들어와 농성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수어장대 바로 밑에 청량당(淸凉堂)이란 당우가 있는데 여기에는 비화 맺혀 있는 슬픈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였다. 동남쪽 부분을 책임진 이희(李晦)가 공사경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으로 죽음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부인 송 씨와 소실이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이 회가 죽은 후 횡령 사건을 다시 조사해 보니 횡령한 사실이 전혀 없이 일가족이 무고하게 참변을 당한 것이 밝혀져서 그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서장대 옆에 청량당이란 사당을 짓고 초상을 안치해 주었다.
그 수어장대 좌측에 커다란 매바위가 있는데 거기에도 이 회(李晦)의 죽음과 관계된 전설이 돌에 깊이 음각되어 전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 회가 완벽한 시공과 지세의 험악으로 기일 내에 완공하지 못하여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절명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이 회를 응시하다 갑자기 없어졌다. 사람들이 매가 앉아 있던 곳에 가보니 돌에 매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하였다.
매바위 바로 앞에 ‘무망루(無忘樓)’란 누각이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던 이 편액을 시(市)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밖에다가 만들어 놓은 누각이었다. 없을 '無'(무), 잊을 '忘'(망)이란 글자처럼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함께, 8년간이나 억울하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孝宗)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수어장대 뒤에 가 보면 원형극장 같은 곳이 있다. 이곳이 남한산성 내에 있다는 45개의 우물 중에 하나로 당시 병사들이 식수로 쓰던 샘터다. 이런 우물 외에도 성내에는 45개의 연못을 두어 유고시를 대비하게 하였다.
*. 서문(西門) 이야기
수어장대에서 서문 가는 중간에 병암(屛岩)이란 바위가 있다.
-정조 때 산성 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이곳 주민들이 자진하여 보수하였으므로 당시 부윤(府尹) 서명응이 백성들을 찬양하는 글을 이 암석에 기록한 것이다.
남한산성의 매력은 꾸불꾸불한 성을 끼고 오르내리다가 네 성문을 만나는 기쁨이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조용한 평범한 누각인데 성문을 내려가서 성문 밖에 나서서 우러러보면 성벽과 어울린 모습이 우람하고 아름답다. 성문이나 암문(暗門)을 나서 보면 북한산성과는 달리 널찍한 밖에서 순례하는 넓은 길이 있다.
그 성문 부근에는 전설 어린 유적지가 있는 법이다. 그 유적지의 하나가 수어장대 바로 아래에 있는 ‘국청사(國淸寺)’였다. 남한산성에는 축성 전부터 망월사, 옥정사가 있었으나, 이 산성을 지키는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천주사, 국청사, 개원사, 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 등 9개의 사찰을 당시에 지었다. 그러나 이 절들은 아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의하여 폭파되고 오늘날까지 남은 곳은 장경사 하나뿐이었다. 그 8개 절 중 현대 와서 복원한 절이 망월사, 개원사요 국청사뿐아다.
국청사(國淸寺)는 인조 3년(1625년) 각성 대사에 의하여 창건된 절이다.
각성 대사(覺性大師)는 임란 때 불타버린 화엄사를 재건한 대사로, 병자호란 때는 8 도총섭 절제 중군 주장( 8道總攝節制中軍主將)으로 임명받아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고 9개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사찰들을 중심으로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軍器)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중의 하나가 국청사이다.
그러나 일본 강압기 시절에 일본군에게 방화 소진된 것을 다시 중건 중수 한 절이다.
북문을 가는 길에 ‘매탄처’ 터가 있다.
-매탄처(埋炭處)란 병자년 혹독한 추위에서 전쟁을 치른 후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숯을 묻어 두었던 곳이다. 천주사부터 북장대까지 숯을 가마니에 담아서 묻은 곳이 94개소에 24.192석이었다고 한다. 그 북장대(北將臺) 터를 지난다.
-북장대(北將臺)는 남한산성이 준공된 후에 수어청(守禦廳)을 둔 곳 중에 하나다.
수어청에는 전후 중좌 우익(前後中左右翼)의 5 영(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중영장(中營將)이 배치돼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북장대가 있던 곳이다.
북문(北門)은 일명 ‘전승문(全승門’)인데 날이 저물어 가고 있어 부득이 하산해야겠다.
내일은 만사 제폐하고 다시 남한산성을 다시 찾아 나머지 곳을 두루 순례하기로 하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행궁으로 하산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행궁은 남한산성이 준공된 후에 수어청(守禦廳)을 둔 곳 중에 하나다. 수어청에는 전후 중좌 우익(前後中左右翼)의 5 영(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중영장(中營將)이 배치돼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북장대가 있던 곳이다.
*. 행궁(行宮) 가는 길
행궁 가는 길 북문에서 100m 지점의 이정표에 ' 0.3km 숭열전'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서 붉은 홍살문을 지난 양지바른 곳에 사당 하나가 나타난다. ‘숭열전(崇烈殿)’이었다.
이곳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위패와 성 축성 당시 총책임자였던 이서를 배향하는 사당이었다. 왜 남한산성에 백제의 온조대왕이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였더니 이 지역이 백제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리왕에게 세자(世子) 자리를 양보한 온조대왕은 10명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는 ‘십제(十濟)’ 를 세웠다가 형 비루의 신하까지 합쳐서 백(百) 명 신하의 도움(濟)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국명을 ‘백제(百濟)’라 하였다는 그 온조왕 말이다.
드디어 인조 왕의 피눈물이 어린 행궁에 들어섰다. 북한산 대남문에서 북한동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에 우람한 축대 위에 행궁 터만이 남아 있는데(2016년 현재 복원 중) 남한산성에서도 이를 복원하고 있었다.
-행궁(行宮)이란 일명 이궁(離宮)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임금이 왕궁 밖에 거둥 할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을 말하는데 피서나 피한(避寒) 또는 승경지에 짓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유사시에 피신하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47일간이나 이 행궁에서 적과 싸우다가 1만 7천 명의 군량미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인조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삼전도 이 자리에 청 태종은 높이 395cm, 폭 140cm의 비에 전면은 몽고 문과 후면에는 한문으로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하여 삼전도 한비(三田渡汗碑, 사적 101호)를 우리나라에게 세우게 하여 부끄러운 역사적인 유물로 남게 되었다.
그 삼전도가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289-3이라니 기회 있으면 찾아가서 옛날을 함께 울어보고 싶다.
*. 남한산성 '종로(鐘路)' 답사
어제 남한산성 산행은 '산성유원지→남문→수어장대→북문→숭렬전→행궁'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하산하였더니
오늘은 남한산성 입구역에서 6번 버스를 타고 종로(鐘路)를 들머리로 나머지를 둘러볼 생각이다.
남한산성의 ‘종로(鐘路)’란 남한초등학교 근처의 로터리 버스 종점을 말하는 곳으로 옛날 ‘종각’ 이 있었다는 자리다.
옛날 같으면 버스를 타고 남문으로 종로에 올 수도 있었지만, 산성터널이 생기는 바람에 남문 갈 사람들은 성벽 앞 갈림길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
종로 마을에서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할 곳이 산성 로터리에서 동문(東門) 쪽으로 가다가 우측에 있는 '남한산성 역사관'이다. 남한산성의 안내도는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이나 관리소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역사관이라서 더욱 그렇다.
이곳에는 수많은 유적지가 종로에 몰려 있는데, 남한산성초등학교, 파출소, 교회, 음식점 등 거의 모두가 약속한 듯이 한옥의 기와집들이어서 유적지와 구별이 안 된다. 그래서 이 산성의 올바른 순례를 위해서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지도는 필수품이었다.
역사관에는 남한산성의 연혁, 병자호란에 대한 기록, 여러 역사서와, 척화파(斥和派)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 분 삼학사(三學士)의 필적, 남한산성의 항전(抗戰, 김 내 그림) 모습과 남한산성의 모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사관을 나와 보니 바로 동문 쪽으로 해공 신익희(申翼熙)의 동상이 멋지게 서있다.
나의 대학 학창 시절 자유당 말기 독재자 이승만 정권에 맞서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뇌일혈로 급사한 정치가다.
그 해공 선생이 자랑스러운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남한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분이기에 그 동상을 여기에 모셔 놓은 것이다.
그 동상에는 '民主爲到 同等樂域'(민주주의의 길은 동등하게 즐거운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음식점 사이에 커다란 비석이 있는 것이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순교자 현양비(殉敎者顯揚碑)'였다.
현양(顯揚)이란 '세상에 높이 들어내는 것'을 말함이니, 천주교 박해에 맞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순교자 넋을 기리는 뜻이리라.그 아래 '순교 정신을 기리며'란 글이 세월을 넘어 순교자들의 거룩한 생애가 속절없이 살아온 나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다.
-인조 때(1626년) 개축공사 이후 광주 유수의 치소와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잊을 수 없는 박해 터가 되었다. 신유박해(1801년)에는 최초의 순교자 하느님의 종 한 덕운 토마스가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명단이 현양비 뒤에 음각되어 있는데 참수형, 교수형 아니면 옥사자들이었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과 함께 건립되어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는 연무관(演武館, 경기 유형문화재 제6호)은 널찍한 터전에 있는데 그 주위에 400년 이상의 고목이 옛날을 말하여 주는 듯 즐비하다.
다시 역사관에 이르니 그 뒤에 이정표가 있다. ' ↑ 0.5km 개원사/ ↑ 남단사지/ ↑ 남장 대지'
절 앞에 가서 실망하게 되는 것은 신도를 제외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할 때나, 출입금지의 글로 앞길을 막을 때다.
자기 신자들 이외의 사람의 출입을 싫어한다면 묻고 싶다.
'그런 절이 왜 이 세상, 이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가?' 개원사도 그랬다. 일주문을 지나 있는 멋진 사천왕문은 쪽문만 열어놓았는데 그 문에 가급적 절에 들어오지 말라는 글의 내용이 암암리에 나그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있다. 나도 먼 일산에서 서울을 지나 찾아온 손님의 하나가 아닌가.
-개원사는 임진왜란에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지키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인 승군을 총지휘했던 본영 사찰이다. 인조 2년(1624년)에 창건되어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370년간이나 수도 서울을 지켜온 호국사찰이다.
이 사찰 주위에 있는 군기 고지(軍機庫祉), 누각지(樓閣祉), 종각지(鐘閣祉) 등이 주춧돌, 석계(石階), 박석(薄石) 등이 남아 있어 이 개원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하여 준다. 천왕문을 막 넘어 좌측 기슭에 '승장 조수전'이라는 다른 곳에서 못 보던 당우를 보니 호국불교 사찰 개원사임을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정문을 나오니 ‘남단사‘란 표석이 서 있다.
-남단사는 성 수축 당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군막 사찰(軍幕寺刹)이었는데 일제가 조선인의 무기 및 화약 수거 때 폭파해 버리는 바람에 그 터만 남아 있는 곳이다.
남단사에서 남장 대지를 향하는 길은 운치 있게도 낙엽에 묻혀서 짐작으로 길을 찾아야 할 지경이더니 드디어 성의 여장(女裝, 성가퀴)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어제의 '남문→북문'에 이어 성터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남한산성에 백제의 온조왕을 모신 사당 숭렬전(崇烈殿)이 있는 것은 이 성이 백제의 온조왕 성이라는 유추를 하게 한다. 신라 때의 한산주(漢山州)에 있었다는 주장성, 일명 일장 성(日長城)이나 세종실록에 나오는 일장 산성(日長山城)은 곧 남한산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토성이었는데 광해군 13년(1621년)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여 2년 5개월만인 인조 4년(1625년)에 완공되었다. 완공 후 1년만인 인조 5년에 침입한 금(金, 후의 淸)의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으로 형제 지국(兄弟之國)의 평화조약을 맺은 후부터였다.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목으로 병선(兵船)과 군마(軍馬)와 병력 등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해오자 배 청열(排淸熱)이 높아지면서 우리 조정에서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온 사신마저 만나주지도 받지도 않았다.
이에 격분한 청 태조 누루하치가 인조 14년(1636년) 12월 1일 12만 대군을 이끌고 9일 압록강을 넘어 10여 일만에 서울 근교에 육박한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두 왕자를 비롯한 비빈 종실(妃嬪宗室) 등을 우선 강화도로 보내고 그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청군이 그 앞을 막는 바람에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자, 청군은 20만으로 성을 포위하고 말았다. 이때 성안의 군사는 1만 3,000 명으로 성안에는 겨우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뿐이었다. 전국에서 원군이 남한산성을 향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청군에게 격파당하고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었다.
포위된 지 45일이 되니 식량의 부족과 엄동설한의 추위에 장병들은 기력을 잃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어 왕자들이 청군에 잡혔다는 전갈이 왔다.
당시 궁녀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성 일기'에는 그 당시의 촉박한 사항을 세세히 기록이 보인다.
-이십사일의 대우(大雨)가 내리니, 성첩(城堞) 지킨 군사를 다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상감께서 세자로 더불어 뜰 가운데 서서 하늘께 빌어 가로사되, "금일 이에 이르기에는 우리 부자가 득죄함이니, 일성 군민(一城軍民 )이 무슨 죄 있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하옵건대 만민을 살려주옵소서." 군신들이 들어가시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시더니, 미구(未久)에 비 그치고, 일기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城中人)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이십오일의 극한(極寒)하다. 묘당[조정]이 적진의 사신 보내기를 청하오니, 상이 갈오사되. 아국이 매양 화친으로써 적에게 속으니, 이제 또 사신을 보내어 욕될 줄 알되, 모든 의논이 이러하니 이때 세시라. 술, 고기를 보내고 은합에 실과를 담아 써 후정(厚情)을 뵌 후, 인하여 접담(接譚)하여 기색을 살피리라." 하시다.
-이십육일에 이경직, 김신국이 술, 고기 은합을 가지고 적진에 가니, 적장이 갈오되, "군중이 날마다 소를 잡고 보물이 뫼같이 쌓였으니, 이것을 무엇에 쓰리오. 네 나라 군신이 돌구멍에서 굶은 지 오래니, 가히 스스로 씀직하도다." 하고 드디어 받지 아니하고 도로 보내니라.
-이십칠일에 날마다 성중의 구완하러 오는 군사를 바라되, 일인도 오는 이 없고, 강원감사 조정호가 본도군(本道軍)이 다 모이지 못하였기로 써 양근에 퇴진하여 후에 오는 군사를 기다리고, 먼저 영장 권정길로 하여금 영병(領兵)을 하여 검단산성에 이르러 봉화를 들어 서로 응하다. 당시에 척화파(斥和派)였던 윤집, 정온도 당시의 슬픔을 글로 노래하고 있다.
성루에 올라보니 천지는 끝없는데
변경 밖 오랑캐 군이 한눈에 들어오네
장부의 큰 뜻을 이제 어디에 쓰리
영웅의 마음으로 칼 어루만지며 저녁 바람을 맞네
-윤집 세상 살기가 어찌나 험준한지
한 달 동안 달무리진 산성 가운데 있구나
이 한 몸 아까울 것 없으나
임금님께선 어찌 그리도 곤궁하실까
바깥에서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군사 끊기고
조정에선 나라 팔자는 흉한 소리 많도다.
늙은 신하는 무슨 일을 하려고
허리 아래 서릿발같이 날카로운 칼을 찼는가.
-이조 참판 정온
산성에 갇힌 지 45여 일이 지난 1월 30일, 겨우 2달도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드디어 항복을 결단하고 만백성의 호곡(號哭) 소리 속에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가서 곤룡포를 벗고 진흙 바닥에 엎드려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항복을 고하며 그 치욕적인 성하지맹(城下之盟)의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 남장 대지(南將臺祉) 암문(暗門) 이야기
이런 비화가 어린 '남장 대지(南將臺祉)'도 그 주춧돌만 덩그렇게 남아서 이제는 나그네의 쉼터 의자의 역할이나 하고 있다. 이곳이 오영(五營) 중 후 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병을 지휘하던 타운루(唾雲樓)가 있던 남장대 터라는 것을 표지석이 말하여 주고 있을 뿐이다.
이정표를 보니 어제 들렸던 남문(南門)은 0.6km라서 1.1km의 동문(東門)을 향하려는데 시선을 빼앗는 곳이 있다.
치성(雉城)이었다. 치성(雉城)이란 성벽에 바짝 다가붙거나 성벽을 오르는 적을 사각(斜角)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다른 성벽보다 바깥으로 네모 모양으로 내어 쌓은 것이다. 이때 네모가 아니고 반원형이면 곡성(曲城)이라고 한다.
남장대 터에서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암문으로 나가 볼 일이다. 암문(暗門)이란 이 문을 통하여 적이 모르는 사이에 나가서 적을 뒤로부터 공격하거나, 상황이 불리할 경우에는 적이 모르게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적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위치에 다락집 없이 만들어 놓은 문이다.
남한산성에는 이런 암문이 16개나 더 있다. 그 암문을 통하여 나가보니 거기 아직 복구되지 않은 옹성(甕城)이 있고 제2옹성에 대한 표지석이 이 옹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옹성(甕城)은 둘레가 327.9m이며 87개의 여장(女裝)이 있었다.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 동서남 방향으로 3개씩 9개의 포루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다.
암문을 나오니 그 옹성도 보이고 담 아래로 성터를 끼고도는 더 운치 있는 등산로가 성 밖으로 열려있다. 다시 제3 남 옹성 직전의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들어서니 '한흥사' 가는 이정표가 있는 곳부터는 동문까지 내림 길인데 성이 복원되지 않은 채로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성이 아예 무너진 곳도 있다.
거기서 준비해 간 점식 식사를 하다 보니 건너편 산으로 아스팔트가 올라가고 있고 그 끝에 오른쪽에 하얀 탑을 세워둔 절이 있다. 이 남한산성 성내에 있었다는 9개 사찰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망월사(望月寺)였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 정할 때 한양의 '장의사'를 허물고, 불상과 금자 화엄경, 금정 하나를 옮겨 놓았다는 망월사지만 그것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1990년에 복원하여 놓은 사찰이었다.
*. 벌봉 가는 길
찻길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좌익문(左翼門)이라고도 하는 동문(東門)이 눈에 들어온다. 동문 아래로 난 찻길을 건너기 전이 수구문이었다.
-남한산성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어서 대부분의 물이 이 수구문(일명 水門)을 통하여 나간다.
통행시간이 지나 동문이 닫혔을 때에는 이 문을 통하여 출입하기도 한 비밀문이다.
성안에서 사망한 자가 있으면 4대 문으로는 통과할 수 없었고 이 문으로만 성 밖으로 나갔으므로 주민들은 이 수문을 수구문(水口門)이라 부르고 있다.
동문(東門)을 지난다. 이로써 나는 어제에 이어 남한산성의 동, 서, 남, 북의 문을 다 견학한 셈이다.
동문에서 아스팔트 길로 계속 오르면 망월사이지만 그 길을 버리고 1.9km의 벌봉을 향하여 성을 끼고 난 멋진 통나무 오름길을 오르고 있다. 가파른 통나무 길이 끝난 곳에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에 송암정(松岩亭)이란 정자가 있었다는 곳이다.
- 황진이(黃眞伊)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들과 기생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건장한 남자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의 심오한 불도의 설법으로 응답하였다. 이에 감명받은 무리 중 기생 한 명이 자괴(自愧)함을 느끼고 이곳에서 투신자살하였다. 그로부터 달밤에는 어디서인가 노랫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는 곳이다.
정조가 이곳에서 고사(枯死)한 소나무를 보고 벼슬을 내리며 옥관자를 붙여 주도록 하였다 하여 ‘대부 송’이라 불려졌다 한다.
성터 길을 끼고 벌봉을 향하다 보니 등산로 치고는 제법 큰길이 있어 성터 길을 버리고 길을 따라가다 보니 아스팔트 길이 나타나더니 뜻밖에도 멋진 일주문(一柱門)이 있다. 이것 봐라 하였더니 성내에 9개 절의 하나인 장경사(長慶寺)였다. 장경사(長慶寺)는 개원사, 망월사와 마찬가지로 승군을 지휘하던 국방 호국사찰로서 갑오경장(1894년)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명으로 산성을 쌓거나 방어하는 승군이 머물던 사찰이었다.
다시 산성 길에서 만난 것이 '장경사 신지 옹성(長慶寺信地饔城)'이었다.
옹성(饔城)이란 큰 성문을 옹호하여 외적의 직충(直衝)을 막으려고 성문 밖에 쌓은 성이다. 그 모양이 반달 같으면 월성(月城), 네모꼴 모양이면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 장경사 신지 옹성(長慶寺信地饔城)은 그 둘레가 150.9m로 여장(女墻)이 40개가 있고 끝머리에 대포혈(大砲穴) 2개소가 있다. 이 옹성은 암문을 통하여 안 밖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5개 옹성 중 가장 작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었다.
여행의 기쁨 중에 하나는 새로운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옛날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행복이다. 내가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의 하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요번에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하는 호기심의 연속이 여행이다.
'요번에 또 보게 되는 것이 '군 포지'(軍鋪祉, 사적 57호)였다
-군포(軍鋪)란 궁성 밖의 수라 군이 머물러 있던 곳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哨所) 건물을 말한다.
옛날 이 남한산성에는 그 군포가 125군데가 있는데 지금은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아 여기 있는 것은 자료에 의하여 모조 초석을 설치하여 놓은 것이다.
*. 동장대(東將臺) 터에서 여장(女墻) 이야기
터만 남은 동장대(東將臺)는 해발 504.1m에 있었다. 이곳이 병자호란 때 전영장(前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 을지 휘하던 곳인데 거기 여장(女墻) 에 대하여 설명하는 입간판이 있다.
여장(女墻) 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성가퀴를 말한다. 전쟁 시 이에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하여 총이니 활을 쏠 수 있게 길이 4.2m, 높이 1.3m 내외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주로 벽돌을 사용하여 쌓는다.
여장에는 흔히 근총안(近銃眼) 1개와 그 좌우에 원총안(遠銃眼) 2개를 만든다. 그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성가퀴[타구]가 있다. 일명 ‘남한산’이라고 하는 벌봉은 동장대에서 0.6 km 밖에 있는데, 아취형 성문을 나오면 외성으로 향한 또 하나의 암문이 있다. 이 일대가 외성인 봉암성(蜂巖城)이다.
- 이 성은 숙종 12년(1685년) 부윤 윤지선이 쌓은 둘레가 2.71km다. 봉암에서 한봉에 걸쳐 축조되어서 두 암문을 통하여 출입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암문이 4, 군포가 15 개소 있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호란 당시에 청군이 본성보다 높은 암봉인 벌봉(蜂峰)에 올라서 성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본성의 보강 차원에서 축조한 것이다.
벌봉 이정표에서는 '벌봉암문'이 이곳의 정상인 것처럼 쓰여 있지만 거기서 나무숲 사이의 바위가 그 정상이니 올라가 볼 일이다.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동장대로 와서 북문 쪽으로 가다가 이정표에서 하산을 시작하다 보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좌측으로 가면 망월사 길이요, 우측 길이 현절사(顯節祠) 가는 길이다. 병자호란 당시 항복하지 말고 사수하자하던 (斥和派) 중 삼학사((三學士))인 홍익한, 윤집, 오달재와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호란이 끝나고 인질로 심양에 잡혀 갔다가 순절(殉節)한 만고 충신 삼학사(三學士)와 김상헌과 정온을 모신 사당이란 말이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 산천(古國 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나는 그 현절사 앞에서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이 고국을 떠나며 지은 우국 시조를 읊으면서 선인들의 호국을 위해 바친 거룩한 넋을 더듬어 보며 남한산성의 두 번째 날을 접는다.
개원사의 저녁 종소리가 이십팔수(二十八宿)을 울리는 저녁이었다.
-2008.12.04(내 나이 73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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