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천하(甲天下)/ 중국 계림(桂林) 2021 수정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草芥)로구나!'
6.25 동란 때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몰려오는 중공군을 이렇게 노래 부르던 우리는 중국 계림(桂林)에 어젯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손녀일지도 모르는 중국 처녀에게 발 마사지로 노독(路毒)을 풀었다. 인생 유상(人生有常)이었다.
계림 플라자(桂林觀光酒店)에서 일어나 호텔식을 하고 드디어 밖을 나섰다.
여행은 밤에 도착하여야 다음날 관광의 멋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계림 관광 길에 나서니,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뿌연 안갯속에 [ 이국적 풍치를 돋워 중국 관광의 절정이라는 계림 이강의 선상 유람을 향한 마음을 설레게 한다.
(唐宋八大家) 중의 한 분인 소동파(蘇東坡)는 '願生高麗國見金剛山(원생 고려 국견 금강산)'이라 하여 고려 국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듯이, 세계인이 가보고 싶어 열망하는 계림(桂林)에 우리가 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금강산은 1만 2천 봉인데 계림 봉우리는 무려 10만여 봉. 그중 3만여 봉이 우리가 가기로 한 이강 저 아래에 몰려 있다 한다.
우리나라 진안에 가면 만나 보게 되는 말귀 같이 생긴 마이산(馬耳山) 같은 모습이 수백 배가 모여 있는 곳이 계림이라 한다. 3억 년 전 무렵에는 계림 지대는 바다여서, 바다이었을 때 석회질 부분이 물에 녹아 버리고, 남은 바위 봉우리가 지각의 융기 작용에 의해 솟아올라 저렇듯 능선이 없는 봉우리가 산속 아닌 평야에 여기 불끈 저기 불끈 기암 기봉의 모양이 되었다 한다.
산이 봉우리요 봉우리가 그대로 산이었다.
예부터 '계림에서 와서는 경치 자랑은 하지 말라.' 하였다. 그래서 계림 산수 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 하였고 이곳 그림이 그대로 중국 산수화(山水畵)의 대종을 이루었다고 한다.
계림 관광은 사계절 중 어느 때 찾아와도 제 각각 멋이 있다.
봄철 아침 안갯속에 비치는 햇살을 뚫고 배를 타고 내려가다 마주치는 평야에 치솟은 봉우리와 그 뒤의 봉우리들은 수천 년 전의 세상 속을 찾아드는 것 같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강바람 속에 펼쳐지는 맑은 날의 초록빛의 봉우리들과 물에 비췬 봉우리 또 봉우리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고, 겨울 눈 덮인 안갯속에 펼쳐지는 보일 듯 말 듯한 첩첩한 기암 기봉을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강이나 강가에 있으면서도 심산유곡에 들어선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갑천하(甲天下), 품 천하(品天下) 계림의 풍광은 가을 경치가 제격이라 한다.
시내 가로수로, 이강 가에 무성한 계수나무 꽃이 하양, 노랑, 빨강으로 어우러져 흐드러지게 피는 때라 꽃향기가 천리만리 풍겨 나온다. 이 꽃으로 빚은 술이 이 고장 특산물인 계림의 명주 삼화주(三花酒)다.
2,000년 전 이곳을 찾은 진시황이 계수나무 숲의 고장이라 하여 계림이라 하였다 한다.
우리가 서울을 떠나올 때는 32년 만에 내린 큰 눈을 보고 왔는데, 이곳은 남쪽이라 자목련과 노란 유채 꽃이 만발한 것을 보니 막 시작되는 이른 봄이었다.
( 그림 )
이강 선상 관람은 상비산(象鼻山)으로부터 시작된다. 상비산은 이강과 도화강(桃花江)이 합류되는 곳으로 도심에 있는 공원이다. 강으로 면한 바위 모양이 코끼리가 코로 이강의 물을 먹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 하여 코끼리 상(象), 코 비, 상비산(象鼻山)이라 이름하였다.
그 상비산 정상에는 높이 13.5m의 보현보살 탑(普賢菩薩塔)이 보인다.
선착장 바로 앞에 대나무로 엮은 긴 뗏목 같은 배 위에 두 마리 가마우지가 묶인 체 조용히 앉아 있다. 머리가 유난히 꺼칠한 놈이다.
가마우지는 길들인 고기잡이 새로, 밤이면 불을 밝히고 가마우지가 물고기 잡는 모습을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얼마의 돈을 받는다. 우리나라 백령도 두무진(頭武鎭)에서고 볼 수 있는 새다.
강심(江心)에 땅이 보이는 부근에는 수천 마리의 오리를 한가로이 방목을 하고 있고, 모래 채취를 하는 모습, 해초를 채취하는 모습, 강가에서 남녀가 빨래하는 모습 등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실망을 더해 가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안개는 강가에 끼어서 산하(山河)를 가리다가도 시간이 되면 경치를 되돌려 주는 그런 안개가 아니라, 계속되는 찌푸린 흐린 날씨의 운무였다. 더구나 요즈음은 겨울철 갈수기(渴水期)라, 계림 최고의 경치라는 양삭까지의 6시가 아닌 3시간뿐인 선상 유람이라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관음 동굴 부근에서 볼 수 있는 네 겹 다섯 겹 이상으로 보인다는 중국이 자랑하는 천하 절경의 모습은 겨우 봉우리 뒤에 봉우리일 뿐 계림 산수의 비경은 우리에게 을 천하(乙天下) 정도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이드는 조선족이면서도 중국을 ‘우리나라, 우리나라’ 하고 되풀이할 정도로 우직한 사람인 데다가,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거기다가 과묵까지 하여 물어보면 대답하는 정도의 사람을 만났으니-.
그러나 계림의 이런 경치는 좋은 날씨에 속한다는 그 사람의 말로써 위안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계림의 산하를 보러 국내외 관광객이 연 800만이나 모여든다는 이 명승지에 와서 실망은 다음날 날씨가 드는 틈을 타서 모든 일정을 폐하고 되짚어서, 이번에는 버스로 다시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이란 이국적, 목가적(牧歌的), 자연애와 동경 적이라던데, 낭만 아닌 실망으로 ‘계림 산수 촬영 정선(桂林山水撮影 精選, 이하 사진 원본 자료')'이란 사진 책자를 사서 보는 것으로 감탄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 먹어 여행은 온 곳을 다시 올 수 없는 건데-, 찾아올 여유가 없는 건데- 하면서.
갑천하(甲天下) 품 천하(品天下)의 이강에 배 띄니
달려오는 저 풍경 산인가 봉우린가
계림선 자랑 말라던 이 경친가 저 경친가.
물아래 잠긴 봉들 봉 뒤에 또 봉우리
능선은 어디 가고 봉들만 서 있는가
흐릿한 날씨 탓했더니 겨울 모습이라데.
-2001년 2월 19일 중국 계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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