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서안(西安)/ 역대 수도 장안(長安) 일원

ilman 2021. 7. 4. 12:00

중국 서안(西安)/ 진시황 이야기 

중국에 관광 여행 가서는 북경은 발로하고, 서안은 귀로 하고, 계림은 눈으로 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북경에서는 유물을, 서안에서는 유구한 역사를, 계림에서는 경치를 보고 오라는 말이다.

서안에는 그만큼 역사적으로 유명한 궁궐과 사원 등 둘러볼 곳이 많았다. 오늘 우리는 서안 성곽과 대안탑(大雁塔)을 보기로 되어 있다.

서안(西安/Xi An)은 1,120여 년 동안 서주(西周), (秦), 서한(西漢), 당(唐) 등, 역대로 열두 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불려졌던 도시로 낙양, 북경과 더불어 중국 3대 역사적인 고도의 하나다.

기름진 땅과 온난한 기후, 적절한 강우량과 풍부한 생산물 등으로 하여, 현재  846만(2010) 인구가 살고 있는 '천리에 뻗친 황금 도시(a gold city stretching a thousand li)'라고 불리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시발점이 바로 이 서안인 것이다.

함양(咸陽) 공항에서 서안 성곽으로 가는 길은 언덕 하나 없는 끝없는 벌판이었다.

길가에 있는 집들은 모두가 후락한 모습들. 이집트 피라미드를 찾아갈 때 도중에 만났던 집보다는 그 초라함은 덜했지만 가난과 궁색히 질질 흐르는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토담집들이었다.

들판 사이사이에는 우리가 경주에서 보던 이름 모를 왕릉만한 옛날 귀족들의 무덤이 있었는데, 무덤마다 굴이 숭숭 뚫려 있다. 저것이 가난한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살던 곳이었다는 말을 듣고 보면 사람의 삶이란 모질고 질긴 덧없는 길인 것 같다.

 

*철옹성 성곽/ 서안

서안 성곽은 지금까지 전해 오는 중국에 있는 완벽한 성벽이다.

명나라 초에 당나라 때의 황성(皇城)에 기초하여 구축한 여의도만한 땅을 네모로 하여 밖으로 외성인 곽(郭)을 쌓고 안으로 내성인 성(城)을 쌓았다. 13km로 이어진 성벽 위에 서면 말 그대로 완벽(完璧)한 성이 무엇인가를 절로 깨닫게 된다.

성벽 바로 앞에 6m의 해자(垓字)로 판 강이 성벽을 둘러싸고 돌고 있어, 그보다 긴 나무가 아니면 적들이 감히 건너올 수 없다. 더구나 무거운 갑옷을 입은 장병들이 수영으로 건너온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건너왔다 해도 그 성벽을 도저히 기어 올라올 수 없게끔 높이가 12m나 된다.

성벽에는 6,000여 개의 화살 구멍이 성밖을 향하여 있다. 성벽에 다가선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활의 사정거리에 해당하는 곳마다 성벽보다 밖으로 쌓은 반원형이나 네모의 곡성(曲城)과 치성(雉城)이 있어 좌우로 활을 쏘아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막게 하였다.

영화나 사극에서 성을 공략할 때처럼 나무로 성문을 부수지 못하게끔 성문을 이중으로 하였다. 두 번째 성문은 정사각형의 옹성(壅城)으로 되어 있어서 사면 성 바로 위의 화살을 피해 가며 성문을 부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철옹성(鐵甕城)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였다.

성벽 위에 서면 쭉 뻗어 나간 2차선 고속도로에 선 듯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삼림(三林)의 하나/ 비림(碑林) 

중국에서 경치를 논할 때 빼놓지 않고 말하는 삼림(三林)이 있다. 계림(桂林), 석림(石林), 비림(碑林) 세 곳이다.

비림(碑林)에는 한나라 때부터 수? 당? 송 대에 이르는 역대 명필들의 친필 석각(石刻) 등 총 1,095개의 비석이 이곳에 모여 있다. 글자 그대로 비석의 숲 비림(碑林)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중국 서예와 문학예술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으로, 하나하나가 고대 중국 예술을 넘어서는 세계적 문화유산들이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당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개성석경 114기.

거기에 새겨놓은 65만 252자를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땅과 인구의 나라가 아니면 이룩할 수 없는 위대한 세계의 문화를 접한 감동과 전율을 느끼게 된다.

비림 박물관 한 구석에서는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탁본을 떠서 이를 관광객에게 고가로 팔고 있었다.

그중 조조가 관운장을 얻으려고 극진한 예우를 주고 있을 때 유비를 찾으면 돌아가겠다는 충성의 시를 대나무 잎에 상징적으로 쳐놓은 묵화 탁본을 망설이다 사 오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후회가 된다.

패키지 여행지에서 옵션으로 이것저것보고 사는 것도 삼가야 할 일이지만, 거기 아니면 보거나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외면하고 온다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겠다.

 

양귀비 나라/ 화성지 

  명나라 오승은이 지은 "서유기(西遊記)"로 유명한 대안탑을 거쳐, 온천 휴양지 화청지(華淸池)에 들어서니 못 가에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된 양귀비가 연못가에서 풍만한 벌거벗은 요염한 자태로 서서 우리를 맞고 있다.

중국 정사(正史)에서도 그 미를 자질풍염(資質豊艶)이라 극찬하였고, 시선 이 태백은 활짝 핀 모란으로, 백낙천은 ‘장한가'를 통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으로 노래하였는데 여기서 보니 옛날의 미인이란 저런 모습이던가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이 선호하는 날씬한 모습이라기보다 옛 화가들이 즐겨 그린 미인도에 나오는 건강하고 풍만한 농려풍비(농麗豊肥)의 몸매였다.

화청지(華淸池)는 양귀비의 별장으로 당나라 현종이 궁으로 조성하여 여기서 생활했다는 곳이다. 양귀비(楊貴妃)가 목욕했다는 부용탕과 현종이 목욕한 구룡탕 등으로 유명하다.

며느리를 뺏어 자기 귀비(貴妃)로 삼는 패륜의 현종. 부용탕 안을 구멍으로 들여다보며 목욕하는 양귀비의 몸매에 늘 감탄하였다는 한량(閑良) 현종의 치기(稚氣)는 음란물이 범람하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점잖지 않은 얘기가 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래서 제왕들의 세계를 무치(無恥)라고 합리화하였나 보다.

그 건물 복도에 어느 화가가 70여 개의 그림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낭만적 비극적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 놓은 것 중, 안녹산 난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양귀비의 모습이 있어 젊음 밖에서 살고 있는 이 백발의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바로 밖 야외에는 여기가 온천이라고 43도의 온천수가 뿜어 나오는 곳이 있어서 이곳을 찾아오는 이의 손을 따뜻이 적셔 주고 있다.

 

진시황 이야기

진시황은 누구인가?

그의 위대한 업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였다. 진(秦), 초(楚), 연(燕), 제(濟), (漢), 위(魏), 조(趙) 전국시대의 군웅 활거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민족 중앙집권의 봉건국을 창건하여 거대한 통일 중국을 있게 한 일세의 영웅이었다.

그의 업적은 무엇보다 3대 통일로 집약된다.

전국의 도(度) (量) (衡)과, 전국의 문자를 통일하였고, 진나라 돈으로 전국 화폐를 통일하였다.

이 세 가지는 소련마저 붕괴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통일 중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뿐인가 전국 시대 각국이 쌓아 놓은 장성을 하나로 이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일컫는 저 유명한 만리장성을 이룩하여 놓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시황을 천고의 제1황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시황 능에 올라서 느끼지 못했던 분노를 진시황 병마용갱 앞에서 터뜨리고 말았다.

나쁜 놈. 그의 야욕을 위해 희생된 인원이 얼마이던가. 우리나라로는 고조선 시대였던 아득히 먼 옛날 전 국민의 1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을 강제 징발하여 그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썼다. 장성 축조나, 변경 방어를 위한 징발은 국토방위를 위한 일이었다고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전의 향락을 위해 지은 아방궁(阿房宮)이나, 사후의 자기 무덤을 쌓기 위하여 무지막지하게 죄수 70만을 희생시킨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용서라 해도, 누가 있어 이 천인공노할 미증유의 폭군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폭군의 상징인 네로의 수백 배 이상 나쁜 놈, 나뿐인 놈이었다.

부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등극하였다가 22세 때에 어머니인 태후(太后)를 연금하고, 함께 국정을 담당하던 노독이란 신하를 쳐 죽이고 국정을 차지한 사람이 지시황이다.

중국을 통일한 직후에는 자기의 덕망은 복희, 신농, 황제인 삼황(三皇)나 요(堯) (舜) 보다 크므로 자기를 삼황오제(三皇五帝)를 겸해 불러야 한다고 하여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하였다. 그러니까 황제란 말을 만들어 처음 쓴 이가 바로 그다.

사서에 의하면 그는 성격이 포악하고 거칠어서 징발한 인부를 다스리기 위해서, 법률을 남용하고 가혹한 형벌로써 민심을 잃어 진나라가 역대 중국에서 가장 짧은 멸망의 역사를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덤인가 산인가/ 진시황 능

 

진시황 능은 여산 남쪽으로, 북쪽으로는 위하를 끼고 우뚝 솟아 있다. 100여 m의 수천 계단을 오르다 보면 좌우로 토사를 막기 위해 심어 놓은 석류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진시황의 무덤이라 하여 정상에 올랐지만 무덤인가 산인가. 이것이 정말 무덤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명부에까지 수록된 중국 유일의 고대 제왕 진시황의 능묘이다.

그 무렵 사람으로 사성(史聖)이라 일컫는 한나라 사마천의 기록을 요약해 본다.

 

"시황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곧 능묘 건조에 착수했다. 전국을 통일한 후에는 또 70여 만 죄수들을 그곳에 보내어 노역에 종사하게 하였다. 묘혈(墓穴) 내에는 진귀한 보물을 가득 수장해 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누구나 부딪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화살이 발사될 수 있게 하여 도굴하려 들어오는 자를 막게 하였다. 지하에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가 있는 궁전도 만들었다.

현실(玄室) 내의 상황을 알고 있는 자는 기밀을 누설하기 쉽다 하여, 이곳을 만든 장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살아 나오지 못하게 순장해 버렸다. 그리고는 무덤 위에 초목을 가득 심어 예사 산처럼 보이게 했다."

이런 능묘 건설 공사가 38년이나 계속되었다.

 

우물 파다가 발견된 세계8대 불가사의/ 병마총

  1974년 봄 섬서성 진시황 능 부근 어느 마을 농민들이 마을 관개용 우물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닷새째 되던 날 뜻밖에 갑옷 입은 토인의 흉장이 나왔다.

이에 놀래서 조심스레 다시 더 파 들어가자 이번엔 토인(土人)의 머리, 팔, 다리가 나오고 이어 푸른 녹이 얼룩진 구리 쇠뇌와 활촉 및 바닥에 까는 벽돌이 나왔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이때 몇 농부들이 파낸 것은 한낱 우물이 아니라 세계를 놀래게 한 2,000년 전의 기적, 고대 군사 박물관, 세계 8대 불가사의였다.

그들 중 살아 있는 노인은 지금 갱 앞 상점에 앉아 모형 유물이나 책자에 사인을 하여 고가에 팔고 있었다.

  이 진나라 병마용 갱은 진군의 축소판으로 이른바 '군사 100여만, 전차 1,000여 승, 전마 1만여 필에 달한다.'는 3군이 집결하여 명령을 기다리는 당시 진군의 위풍을 반영하여 만든 것이다.

이들은 능의 동쪽으로 약 1.5km 밖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능을 지키던 병마용이 모습들이었다.

내가 갔을 때까지 공개된 갱은 1호 갱에서 3호 갱까지 3개로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데, 도굴꾼 같이 삽으로 파는 것이 아니라 붓으로 파는 조심스러운 일이라 이를 완성하는데 는 앞으로 150여 년이 더 걸려도 힘들다고 한다.

이 갱들은 우리가 삼국지를 읽어 알던 것처럼 삼진(三陣)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에 임하여서 중군이었던 지휘부 3호 갱을 중심으로 1호 갱은 오른쪽의 우군, 2호 갱은 왼쪽에 있는 좌군으로 한자의 品(품) 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병마 1호 갱(兵馬1號坑)은 능을 지키는 주력부대가 있는 곳이다. 6,000여 명이 3열 종대로 서서 갑옷 입고 손에 실물 크기의 칼과 창 활 등의 무기를 들고 부릅뜬 눈으로 서서. 토마(土馬) 40여 승의 목전차(木戰車)도 함께 완전무장을 갖추고 출발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안치된 되어 있다.

이 수많은 토용(土俑)들의 생김새가 실물 크기의 등신대(等身大)인 데다가 사실적이어서 그 정교함이나 각기 다른 얼굴로 씩씩하게 부릅뜬 눈에 위엄이 감도는 것이 위풍 당당히 전쟁터로 행군하기 직전의 긴장감마저 들게 한다.

복도에 전시된 토용의 손바닥을 자세히 보면 손금도 분명하고 서로 달랐다.

병마 2호 갱(兵馬2號坑)은 아까 본 주력부대 병마 1호 갱을 보조하는 부대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차를 끄는 토마(土馬) 350여 필, 기병용 말 116 필과 각종 무사 토용 900여 점 도합 1,400여 점이 진을 치고 질서 정연하게 서서 역시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병마 3호 갱(兵馬3號坑)은 머리를 서로 맞대고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모양이 지휘부를 경호하는 부대 같다.

2,200여 년의 역사 속에 수 없이 파손된 유물을 보니,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원통 극장에 서서 영화 상영 속에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병마용에 불을 지르고 토용이 들고 있는 대다수의 무기들도 수거해 가는 모습이 다시 떠올라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싱가포르 이광요 총리는 이 진용을 보고 나서 "세계의 기적, 민족의 자랑"이라 칭찬하였고, 시라크 프랑스 전 총리는 참관 소감을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전에는 7대 기적이 있었는데 진용갱의 발견은 제8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 이집트에 왔었다고 할 수 없듯이 진용을 보지 않으면 중국에 왔다고 할 수 없다."

나도 한 마디로 그 전언부에 세계에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시조(時調) 한 수를 이렇게 남기고 싶다.

 

세계 팔대 불가사의 둘씩이나 만들어 논

진시황은 나쁜 놈, 나뿐인 놈 살인마

아득한 고조선 무렵 엽기적 과대망상자.
 

만리장성 만리 무덤, 병마용 70만 무덤

아방궁 지어 놓고 불로초 탐내다가

49세 겨우 살다가 남들 죽이고 저도 간 놈

              - 2001년 2월 19일 진 시황 병마도용 갱 앞에서

그러나 이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보면 예술지상주의 세계라. 

진시황은 그 시대 평범한 사람을 수없이 자기를 위해 죽였지만 길이 후세에 남는 만리장성이나 병마총 같은 불후의 걸작을 만든 황제다. '예술은 길고 인생을 짧다'라는 말을 너무나 실감 있게 실천하고 간 폭군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인들 그 덕으로 세계인들을 불러 중국을 풍요롭게 살게 하고 하여 주었으니 진시황은 중국이 자랑하는 영웅임을 부인할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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