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동유럽 여행( )/폴란드(Poland)

ilman 2021. 6. 6. 10:48

동유럽 여행( )/ 아우슈비츠 수용소
 

* 폴란드(Poland)  국경을 넘으며


사진출처: ZUM r갤러리

 유럽 여행은 비행기 여행이요 버스 여행이다.
인천공항에서 푸랑크프르트나, 모스크바까지 10시간을 하늘에서 먹고 자고 하며 오가는 곳이 동유럽 여행이다.
도착하여서는 같은 버스를 타고 하루에 보통 4~6시간, 아침에 버스 여행으로 시작해서 버스 여행으로 하루가 끝난다.

그렇게 거의 벌판을 달려 하루에 국경 하나씩은 넘어가며 하루를 달린다.
국내 여행이라면 논과 밭과 산이 보이련만 유럽에는 거의 산이 없이 초록빛 초원이요, 밀밭이 아무 막힘 없이 지평선까지 뻥- 뚫려 있고 그 지평선 위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떠있다.

그 초원은 한국에서 보는 골프장의 잔디같이 아름다워 시심을 저절로 일깨우곤 하였다.

초원 같은 밀밭 위에 골프공 올려놓고
마음껏 스윙하면 흰구름 하늘 넘어
그리운
우리들에게
내 마음 전해질까
                                         -내 마음

  그런 유럽의 고속도로에는 우리네 같이 승용차가 거의없다.
보이는 것은 거의 대형 화물차의 물결로 달리는 차선이 정해져 있다. 차들은 대낮에도 불을 켜고 다니는 차가 많았고 어디에곤 속도감시기가 설치된 곳이 없었다.
화장실에서도 어김없이 돈을 받는 유럽인들인데 이상하게도 고속도로 요금은 받지를 않는다.
여행에 지쳐 잠시 잠들었다가도 지나가는 풍경이 하두 아쉬워 켐코드 촬영을 하였고,그러다가도 가끔씩 머리를 흔들어 몰려오는 졸음을 쫓곤 하였다.

폴란드(Poland) 는 유럽에서 7번째로 큰 나라.
한반도의 1.4배의 땅에서 3,900만명이 사는 나라.
강대국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오랜 세월 동안 자유로워 질 수 없었던 나라.
작곡가 쇼팽, 지동설의 코페리니쿠스, 라듐을 발명한 퀴리부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헨리 시엔키에비츠, 레이몬트와 체스와프 미와시의 조국의 국경을 넘는다. 
폴란드(Poland) 의 '폴(Pol) '은 밭, 풀밭, 낮은 땅이란 뜻에 나라라는 '란드(land) '가 붙어 된 국명이다. 국토의 75%가 해발 200m 이하의 중부유럽 대평원지이기 때문이다.
국기의 '백색'은 평화를 상징하고, 붉은 색은 독립을 위하여 흘린 피와 자유를 상징한다.
인구 95%가 케도릭을 믿는 나라여서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르2세가 교황인 것을 크게 자랑하는 자존심이 아주 강한 민족이다.
폴란드인들은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는 이상으로 러시아인들을 미워한다.
그래서 이 나라 가서는 동구유럽이라는 말을 삼가고 Central Europe(중부유럽)이라 하여야 한다.
한국인 일본인에게는 우호적이지만 베트남, 중국인은 차별 대우를 받는 나라다.
수도는 바르샤바(Warsaw)로 '동구권의 파리'로 여기에는 이런 전설이 전하여 온다.

비스와 강에 살던 인어 어부에게 예언 하더래.
새로운 도시 하나 창설하게 된다고
그 도시
바르샤바이고
폴란드의 수도라지.

나는 유네스코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는 바르샤바 구시가지에 가서 '왕의 성'과 '퀴리부인의 생가'와 박물관을 보고 싶었지만 일정이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의 대학살을 보는 것으로 잡혀 있어서 거기서 가기 가까운 크라쿠프(Cracow)를 거쳐 수용소로 향한다.

 

지금은 흰구름,  푸른 하늘 아래인데
그때의 그 하늘은 피빛보다 붉었습니까.
이 붉은
28동 막사는
원혼 피자욱 아닙니까.

남기신 유품 속에 명복을 담습니다.
관광 길 가스실서 모자를 벗습니다.
시신의
소각장 앞에서
우리들 죄 태웁니다.

 

  클라쿠프에서 50km 되는 곳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나치 히틀러 일당이 눈의 가시처럼 여기며 증오의 대상이던 유태인, 집시, 정치범, 포로 등을 죽인 600만 원혼이 떠도는 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이라 하는 곳이다.
이곳은 인구 밀집 지역과 떨어져 있는 한적한 곳이었고, 철도편으로 죄수(?) 수송을 직접 이곳까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이리 정하였다 한다. 1940년 독일SS사령부(나치독일친위대)는 루돌프 회수 소장을 임명하고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 728명을 이곳에서 처단하였다.

  취사장과 관리 동을 빼고 붉은 28동 건물에 죄수를 닭장보다 더 빽빽이 가두어 두고 2중 3중의 철조망을 치고 고압전류를 흐르게 하여 탈출을 막았다.
수용소 정문 상단에는 쇠 조각을 잘라 독일어로 이렇게 쓰여 있다. "Arbeit Macht Free"(일은 자유를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새까만 거짓말이었다.
죄수가 수송되어 올 때는 양동이 2개씩을 가지고 오게 하였다. 하나는 물통이요, 또 하나는 오줌통이다.
보안을 위하여 주로 밤에 죄인을 수송을 하였는데, 도착하면 즉시 두 줄로 나누어 서게 하였다. 환자, 노인, 애 엄마 등은 왼쪽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오른쪽에 서게 하였다.
왼쪽에 선 사람은 대개 "욕실, 건강, 청결"이라고 쓴 곳으로 보내어 거기 들어가기 전에 옷을 벗게 하였다. 욕실인지 알고 온 가족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육중한 철문을 덜컥 잠가 버렸다.
거기는 캄캄한 가스실로 잠시 있다가 천장 위에서 가스가 뿜어 나오면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는 낌새를 채고는 아우성과 몸부림을 마지막으로 죄없는 이들은 그렇게 죽어갔다.

그러면 그 바로 옆의 시체 소각장 기구에 2, 3 명씩 한거번에 넣어 불태워 버렸다. 그 재는 비료로 쓰거나 하천이나 연못에 버리게 하였다.
그래서 수용소의 커다란 굴뚝에서는 항상 검은 연기가 뿜어 나왔다. 이렇게 희생되는 인원이 하루에 350 구로 이런 참혹한 일이 1940년부터 5년간 계속되어서 이 수용소에서만도 죽어간 인원이 150만 명이 훨씬 넘었다지만 죽이는 일은 기록 이전의 세계라 아무도 그 정확한 수를 몰랐다. 사람들은 동유럽으로 이주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다.
전후에 전쟁 범 재판에서 루돌프 휘스 소장은 도착한 자의 70~80%가 가스실로 갔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 수용소는 '정문으로 들어와서 굴뚝으로 나가는 지옥'이었다.
  이때 쓰인 독가스가 사이클로B(Cyklon B)로, 그때 쓰고 남은 빈 깡통이 커다란 방에 가득하였다. 이렇게 해서 15분에서 20분 정도 지나서 사람들이 완전히 죽으면, 카포스라는 그들이 말하는 모범수를 시켜서 목걸이, 반지 등과 입을 벌려 금니를 빼게 하고, 머리털을 깎아 카펫 재료로 본국으로 보냈다. 그뿐인가. 살은 비누 만드는 재료로 사람의 뼈는 재떨이나 칼로 만들어 쓰기까지 했다.
  오른쪽 줄에 섰던 죄수들은 머리를 깎고, 죄수 번호를 문신하고, 제복, 밥그릇, 스푼을 지급받게 된다.

죄수의 몸에 그 번호를 문신(文身)한다는 곳은 역사상 유례없이 이 수용소에서한 자행한 만행이었다.
죄인들은 종류에 따라서 수의 가슴 부분에 각종 색깔의 삼각형을 달아 죄수의 구분을 편하게 하였다. 정치범은 빨강, 노란색은 유태인, 검은색은 집시였다.

강제 노동을 나갈 때는 죄인들로 조직된 오케스트라의 밴드에 발을 맞추어 일터로 나갔지만, 먹을 것을 너무 적게 주면서 강제 노동을 시키는 바람에 수없는 사람들이 아사(餓死)하기도 했다. 금니를 빼어 빵과 바꾸어 먹는 사람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배가 곺아 시신의 궁둥이 살을 도려 내어 먹는 사람도 있었다.
수용소에 이런 말이 돌았다. '수송되어 온 자 중에 유태인은 2주 이상을 살 수 없고, 성직자는 1개월, 일반인의 수명은 3개월이다.'
죄수 중에도 가장 불쌍한 이들은 어린 아동들과 병자들이었다.

28동 중 10동과 11동의 창문은 완전히 막아버리고 검은 칠을 했다. 그 건물 사이 두꺼운 벽 앞이 '죽음의 벽'으로 총살을 집행하던 곳이어서 죄수들이 못 보게 막았던 것이다.

  28동 중에서도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곳은 죽은 이의 머리털로 짠 카핏, 수 만 켤레의 신발, 그들이 쓰던 안경과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써놓은 숱한 가방들이다. 그때도 유태인들은 잘 사는 측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수용소 관리자들은 그 속에서 귀중품들은 모아서 본국에 보내어 전쟁 비용에 쓰게 하였다.
  살인마 아히만이 전범 재판 중에 이런 무서운 망언을 하였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상의 숫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고문에, 허기에 지쳐서 고압선 철조망에 부나비 같이 스스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고. 탈출을 계획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하루에 2번씩 광장에 나가 점호를 받아야 하였다. 그러다가 탈출하는 사람이 있어서 24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 막사 죄수 10명을 죽여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삼았다.
코브르베 신부가 한 폴란드 병사 대신 죽음을 자청하여 아사(餓死)의 방으로 갔다.
전쟁이 끝날 때 살아남았던 그 병사가 자기 대신 죽어 성인으로 추앙게 된 신부를 부르며 흐느끼는 장면은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게 하였다. 병사도 죽자 연기로 사라진 그 신부님 대신에, 계시던 수도원에 묘로 신부님의 크신 사랑을 기리게 하였다.
폴란드 정부는 1974년에 희생자 박물관을 세우고 폴란드의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 있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

 

밖에 나와보니 이동 교수대가 있다. 죄없이 죽어간 원혼의 자리다. 그 위에 나도 서 보았다.

싸늘한 감정이 목으로 향한다. 죽일 때 군인은 총살당하는 것이고, 일반인은 교수 당한다 하니 민간인이 처형당하던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가장 통쾌한 교수형도 있었다. 당시 루돌프 소장 자신도 자신이 집행하던 이 교수대에서 생을 마치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 역사의 아이로니인가.

 

 교수대(絞首臺) 위에도 낭만이 있던가요.
지옥 중에 지옥인 수용소 아우슈비츠
사死
형刑
대臺
*ilman이 그 현장 위에 철없이 섰습니다.
                                          -교수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