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세계 투어 여행기 사진 무

ilman 2020. 7. 19. 09:20


ilman 의 세계 투어 여행기
          -가 보실 분에게는 꿈을,
             다녀오실 분에게는 추억을

 

/ 차 례
서문…5
Ⅰ. 카나다 로키 산에 단풍 보러 갔다가
설레는 마음으로…7
가자, 로키로…7
나무의 나라 캐나다…8
호수의 나라 캐나다…9
술꾼의 지옥 캐나다…10
세계 10대 명승지/ 루이스 호수…11
고맙다, 곰아…12
로키의 푸른 보석/ 재스퍼…13
대빙하 위에 서서/ 아사바스카 빙하…13
유토피아인가, 무릉도원인가/ 말린 호수…14
아, 3954m의 롭슨산이여…15
귀국 길에서/ 캐나디안 로키→ …16
돌아온 코리아…17
Ⅱ 중국 기행
19…갑천하/ 중국계림
21…역사의 도시/ 중국 서안(西安)
21…철옹성 성곽/ 서안
22…삼림(三林)의 하나/ 비림(碑林)
23…양귀비나라/ 화성지
23…나뿐인 놈/ 진시황
24…무덤인가 산인가/ 진시황 능
25…우물 파다가 발견된 세계8대 불가사의/ 병마총

Ⅲ. 홍콩 기행
27…100만불짜리 야경/ 홍콩
28…꿈의 나라/ 해양 공원
29…인공 해수욕장/ 리벌스베이
29…먹을 수 있는 걸 다 먹는 사람들/ 중국인
29…월세 1,000만원 아파트
30…자가용이 없어야 편한 나라
30…홍콩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들
30…인간의 힘을 실험하는 나라

Ⅳ. 1초에 4원 북유럽 여행

북구 여행 준비…32
누가 못사는 나라 보러 왔나/ 러시아…3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히프/ 모스크바. 서커스…34
붉은 광장/ 크레무린…35
대포 왕∙종의 왕/ 크레무린…35
성당인가 무덤인가/ 우스펜스키 사원36
죽어서 지옥도 못 갈 놈들/ 페떼르브르그 공항…36
세계3대 미술관에서/ 에르미타쥬 박물관…37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증명서/ 표트르 바브로크 성당38
세계 5대 성당의 하나/ 이삭 성당 …39
여름 궁전에서 울려 펴지는 애국가/ 페떼르브르그…39
해외 여행가서 부부 싸움하는 바보…40
Ⅴ. 핀란드 기행
41…유럽 인이 제1로 선호하는 관광지/ 헬싱키
43…발틱해의 소녀/ 헬싱키
44…15.호화 유람선에 사랑을 싣고/ 실야라인(silja line)
Ⅵ. 스웨덴 기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도시/ 스톡홀름…45
침몰하여 더 유명해진 전함/ 오슬로 바사호…46
신의 손/ 오슬로 밀레스 조각 공원…47
스웨덴 인의 생활상/ 스톡홀름…48
Ⅶ. 노르웨이 기행
50…우리는 피오르드를 보러 간다/ 노르웨이 산하
51…아, 지상의 천국이여/ 노르웨이 산하.
53…아기다리고기다리던 피오르드 유람/ 밀포드 사운드
55…마차 타고 찾아간 청색 빙하/ 부리스탈(Briksdal) 빙하
58…산악 열차에 낭만을 싣고/ 포름↔ 미르달
57…외국 식당에 가서 주의해야 할 일들
58…북유럽 나라들은 왜 잘 사는 거지(A․B)
60…삶과 죽음을 해석한 조각 공원/ 베겔란 조각 공원
61… 골다공증 가이드
63…귀국하면서/ 노르웨이→
Ⅷ. 인도차이나 기행
인도차이나 반도여…66
오토바이+자전거+씨클로/ 배트남 하노이…67
갑천하(甲天下)/ 하롱베이…69
베트남인 가이드/ 하노이…72
Korea의 호치민은 언제나 곁에 오시려나/ 호지민 묘…74
하노이에서 만난 여인 제니파존스…75
주마간산의 전승관/ 호치민시 군사 박물관…76


Ⅸ.라오스 기행

77…사바디(안녕하십니까)/ 라오스
78…메콩 강의 낙조/ 라오스 비엔티안
81…고물 유람선/ 남금댐
82…소금 마을 아이들/ 반모 소금 마을
84…라오스 귀부인의 술대접/ 비엔티엔

Ⅹ. 캄보디아 기행
캄보디아는 어떤 나라인가…86
‘보시면 되겠습니다'가이드/ 프놈펜의 가이드(guide)…87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가는 길/ 캄보디아…88
억울한 영혼들/ 쯔응아익 해골 추모탑…90
대학살의 현주소/ 대학살 박물관(Tual Sleng Museum)…91
15살 선장에게 목숨을 맡기고/ 톤레삽 호수…93
새같이 사는 사람들/ 톤레삽 호수…94
여기가 세계7대 불가사의가 아닌가/ 앙코르톰…95
코끼리 테라스/ 앙코르톰…99
세계7대 불가사의/ 앙크로왓…100
해외여행에서의 옵션과 쇼핑하기…104
인도차이나에서 본 우리 코리아…105

Ⅺ. 뉴질랜드 기행

뉴질랜드 남섬편
108…키위(kiwi)들이 사는 나라/ 뉴질랜드
109…손님 대접을 이렇게 해도 되는가/ 크리스천 처치에서
110…우리와 반대의 삶을 사는 나라/ 뉴질랜드
110…신의 의상인 자연/ 뉴질랜드 남섬
112…마운틴 쿡을 보지 않고는 말하지 말라/ 마운틴 쿡
113…세계 제일의 관광의 메카/ 퀸스타운
114…투어 여행의 슬픔
118…밀포드 사운드 가는 길/ 퀸스타운 →
119…피오르드 선상 유람/ 밀포드 사운드
121…관광 유감/ 뉴질랜드 남섬
뉴질랜드 남섬편
121…지명의 유래/ 뉴질랜드
122…키위들의 동물 사랑/ 뉴질랜드
123…뉴질랜드로 신혼여행 가지 마세요
123…유황 온천의 고장/ 로토루아(Rotorua)로
125…10일 간만 우리로 살던 투어 사람들
126…관광지 중에 관광지/ 뉴질랜드 로토루아
127…원주민 마오리(maori)의 고향/ 로토루아
129…아, 유황 온천에 빠진 디카여/ 로토루아 유황온천
131…“대~한 민국!"/ 월드컵 한 키위들의 응원
132…어제 욕(浴) 해보셨죠/ 래드우드 삼림욕장
133…소(牛) 공무원/ 오크랜드(Auckland)

Ⅻ.호주 시드니 기행

나도 호주에 가고 있다…135
호주의 희기 동물들…136
호주의 그랜드케년/ 불루마운틴…138
호주의 국기…139
파도가 구르는 곳/ 본다이 비치(Bondi Beach)…140
세계 3대 미항 선상 유람/ 시드니 항(Sydney港)…142
송충이의 천국은 소나무/ 귀국길 …145

 

 

 

 

 

 

 

 

 

 

 


일만 선생 투어 여행기
가 보실 분에게는 꿈을,
다녀오신 분에게는 추억을
-여행사 따라 가본 세상
서 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물어 보았더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면서 사는 사람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취미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취미는 자기가 좋아서 즐겨 하며, 자기가 잘 하는 일입니다.
취미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되는 취미 하나를 들라면 여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항상 집과 직장과 학교 등 일정한 공간에서만 맴 돌며 살다가, 넓은 세상을 만나러 떠나는 여행은 우리들의 세계를 넓혀 주어 나를 완성하게 하여주는 길입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그래서 생긴 말일 것입니다.
수학여행, 신혼여행, 위로 여행, 회갑 여행 등 우리들에게 기쁜 날이 다가올 때에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꿈꾸게 됩니다.
그 여행 중에서 보다 더 넓고, 깊은 추억을 하루하루 새롭게 약속해 주는 것이 해외여행입니다. 그러나 해외여행은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은 그냥 오지 않고 반드시 그만한 값을 치러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환갑을 맞이했을 때 아내와 함께 지중해 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의 플레밍 고를 보며, 그리스의 아트로 폴리스 언덕을 거닐며, 터키의 이스탄불을 거쳐 이집트 룩소르에서 만난 피라미드, 스핑크스, 신전(神殿)은 얼마나 환상적이던지-. 언어도 서툴고, 가는 길도 모르고, 또 찾아갈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물론 여행사를 따라 투어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지내고 생각해 보니, 아깝게도 다녀온 나라와 큰 도시 유명한 유물 몇 가지만 기억이 날 뿐, 어디 어디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까맣게 잊고 삽니다.
떠날 때는 아는 만큼 보게 된다는 말에 따라, 여러 나라 여행 서적을 사게 되지만, 거기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몇 장이 있을 뿐, 그것도 현장감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주 5일제를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해외여행은 이제는 꿈이 아닌 다가온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서 보지 못하던 우리를, 밖에 나가서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 우리가 찾아가게 되는 곳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왜 아름다운가를 해석해 주는 것이 우리들 문학하는 사람들의 소임이라 생각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가 보실 분에게 꿈을, 다녀오신 분에게는 추억을 드리기 위해서 그 동안 저는 참으로 열심히 써왔습니다.
이 글들이 우리들이 많은 값을 치르고 가거나 다녀온 곳을 분명히 알게 해주고,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는 기쁨이 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은 다녀온 순서대로, 귀국하여 곧 바로 쓴 것들만을 엮었습니다. 오래 전의 여행을 생각하여 쓴다는 것은 그 흥과 실감을 상실한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해외여행을 통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고국에 돌아와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 무심히 잊고 살아오던 우리나라, 우리 국토에 얽힌 사랑입니다.
앞으로는 우리 국토에 대한 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찾아가기 위해서 배낭을 다시 꾸리려 합니다.
- 2003년 1월 25일 지은이 일만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캐나다로 떠난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문장(紋章)이 단풍(maple)으로, 국기에까지 넣어 강조하고 있는 새빨간 단풍을 보러 캐나다 로키로 떠난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들뜬 마음은 태평양 건너 밴쿠버 공항에 마중 나온 가이드를 만나자 마자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로키 투어는 원래 단풍과는 관계가 멀다는 것이다.
단풍을 보려거든 서부 온데리오나 퀘벡 쪽을 거쳐서 와야 했었다는 것이다.
떠나올 때 캐나다 서부 나이아가라와 로키를 함께 보는 코스를 택하자는 아내와 부부 싸움까지 하며,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 권유하는 대로 그분 고등학교 동창생들끼리의 여행에 덜컥 따라나선 내가 이제는 할 말을 잊게 된 것이다.
정년퇴직하면 우리 부부가 가보고 싶은 곳에 함께 떠나자고, 아내가 몇 년을 별러 모은 그 경비로, 엉뚱하게 남들을 따라 나서다니…. 밀물처럼 몰려오는 후회를 주체할 길이 없었다.
‘맞아 다른 모임의 그룹을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그분들 중에 한 분이라도 가본 곳을 뺀 코스로 짜는 것이 그룹 여행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마음은 갸륵한 저축으로 다시 또 여행이 시작된다면, 다른 나라를 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몸은 이런 마음을 싣고도 벌써 캐나다 제3의 도시 밴쿠버에서 빅토리아 섬을 향하고 있는 것을-.
그렇다, 로키가 지닌 멋을 통해 캐나다를 보자. 한 여자, 한 아내를 맞아 평생을 살아가며 세상을 살아 왔듯이.
우리의 여정은 빅토리아 섬에서 일박 한 후에 목재의 도시 캠룹스를 거쳐, 밴프, 재스퍼를 돌아 밴쿠버로 다시 돌아오는 캐나다서만 로키코치 7박 8일의 여행길인 것이다.
북미 대륙에서 제일 커서 남한의 3분의 1이나 되며, 일년 내내 꽃이 피는 빅토리아 섬(Victoria Island)에서도 가장 유명한, 빅토리아의 상징이라는 부차드 가든(Butchart Gardens)은 어제 보았고, 오전에는 인 하버(In Harbor) 주변을 등을 들러 본 다음, 오후부터 드디어 본격적인 로키 여행이 시작되었다.


가자, 로키로
우리는 밴쿠버를 떠나 호프를 거쳐 코카 할라 하이웨이를 따라 캠루프스(Kamloops)로 가고 있다. 그곳은 남북 두 곳의 톰슨 강 합류점으로 캠루프스란 이름은 원주민 인디언 어로 합류점이란 뜻에서 유래한다. 캠류프스 까지는 350km로 6 시간의 관광 길로 장장 900리 머나먼 길이다.
차는 밴쿠버를 벗어나 낯선 이국땅을 달리고 있다. 벌써 로키 산 가는 길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는데 길은 차 소리도 숨 가쁘게 오름 길이 계속되고 있다.
창 밖을 보니 검은 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리듯이 반짝이고 있다.
북극성, 북두칠성, 가시오피아, 오리온성좌…. 이국땅에서 낯익은 별들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시흥에 젖고 말았다.

차(車) 소리도 숨 가쁘게 로키 산 오르는 길
내일 실컷 보라고 어둠도 깔렸는데
낯익은
별들도 좇아오며
앞장서고 뒷장 서고.

캠루푸스컴포트 호텔에서 여독을 풀고, 캐나다 최초의 국립공원인 밴프 국립공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441km 천리 길을 달려 우리를 기다리는 캐나디안 로키의 비경(秘境)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늙었다고 생각되기 시작한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낯선 곳을 가게 되면 언제 다시 올까 아쉬워하며 구석구석 보려 하였다.
정년이 가까워지니까 어딜 가자고 하면 얼른 따라나서지 않고, 정년퇴직하고 시간이 많아지면 그때에 가지- 하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막상 정년퇴직을 하고 보니 해외여행이 아주 망설여지게 되었다. 그것은 지닌 마지막 원금을 까먹게 되는 길이라서, 떨치고 떠나는데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여유가 있어도 못 떠나던 옛날의 우리네가, 좋은 세월을 만나 금수강산을 넘어서 세계 명승지를 이렇게 찾아 나섰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래도 늦복을 타고난 선택된 사람 중에 하나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만나게 되는 이 비경들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 모습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카메라는 물론 비디오와 녹음기와 망원경 등 만반의 준비를 이 여행을 위하여 갖추어 왔다.

 

나무의 나라 캐나다
낙락장송처럼 꾸불꾸불 어렵게만 자라 온 우리의 눈에 쭉 곧게 위로만 크고 있는 저 울창한 나무들이, 눈이 닿는 곳마다 밀림을 이루고 있어 우리들을 놀래게 한다.
이 나무숲으로 난 길을 차로 한참 달리다 보면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가 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무의 나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커다란 전봇대 크기로 똑바로 자라서 90m에까지 이르는 이 로키 산의 나무들은 어느 것이나 다 200년에서부터 600년 묵은 나무들로 하나하나가 그대로 재목이요 이 나라의 자원이 된다.
캐나다 국민 전체가 아무 하는 일없이 이 나무만을 베어 팔아먹고 산다 해도 150년 이상을 거뜬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이 나라는 임업 부국이었다.
그래서인가 혹 가다가 눈에 들어오는 집들은 모두가 다 나무로 지은 나무 집들이었다.
이런 나무들이 지천으로 총총히 높이 서서 계속 차창 밖의 아름다운 로키의 산을 향한 나그네의 캠코더를 막아선다.
미국에도 로키 산이 있다. 그래서 이곳 산을 캐나디안 로키라고 부른다.
로키는 영어로는 바위(rock)라서 로키 산이라 이름 하였다. 이런 2,000m 이상의 성벽처럼 끊임없이 이어진 로키산맥이 바람을 막아 주어서 이 나라에는 태풍이 전혀 없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바위뿐인 척박한 땅이라서 뿌리를 마음껏 펼 수 없도록 땅이 깊지 않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넘어지지 않는 한, 태양을 바라 위로만 자랄 수밖에 없어서 이런 거대한 자연 숲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로키의 나무는 고산지대의 나무이라서 일년에 30일에서 50일밖에 자랄 수가 없다. 그 때문에 나이테의 촘촘함으로 하여, 강도가 세계적으로 고급 가구는 로키 산 나무이어야 한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이 원목은 열대지방의 어느 나라 나무보다 그 가격도 아주 고가에 거래되는 모양이다.

 


호수의 나라 캐나다
차는 요호 국립공원 속을 신나게 달리고 있다. 요호란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의 말로 경이, 외경, 아주 좋은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는 에메랄드 호수(Emerald Lake)에 이르자 넋을 잃고 말았다.
긴 나무다리 넘어 펼쳐진 저 에메랄드그린 물빛이며, 호반을 둘러싸고 있는 수림(樹林)은 가까이서 보았을 때는 커다란 나무이더니, 멀리서 보니 널따랗게 깔아 놓은 카펫 같기도 하고, 금잔디를 깔아 놓은 것 같기도 한데, 그 찬란한 모습이 산을 오르다가 식물 성장 한계선에서 문득 멈추어 선다.
식물 성장 한계선은 2,200m에서 2,400m까지라서 이를 통해 이 산 높이를 대충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위로 만년설(萬年雪)을 인 회색 빛 산과 눈을 품은 계곡들이, 지금도 눈을 녹여 이 호수의 물과 저 빛깔을 이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나무다리가 끝난 곳에 있는 통나무집이 또한 자연과 그대로 한데 어울려 그 옆에 오솔길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데, 호수에서는 유유히 울긋불긋한 구명조끼를 입고 보트를 저어 가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마치 신선들이 노니는 것 같다.
고려 때 평양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 경치에 취하여
"긴 성벽 한편으로 넘쳐 넘쳐흐르는 물, 넓은 들 동쪽에 점점이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 라 읊고도 그 뒤 짝을 채우지 못하고 울며 내려왔다는 김 황원이 살아 있어 이곳에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 황홀한 광경에 기절하여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걸-〮,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게 한다.
요호 계곡 길을 따라 올라간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 그 웅장과 아름다움을 싣고 400m의 낙차로 우렁차게 떨어지는 타카카우 폭포(Takakaw Falls)다. 떨어지던 폭포가 그 도중에 용소에 부닥쳐 위로 튀어 오르다가는 다시 떨어지는 모습이 있어 '카카'가 들어가 ‘타카카우’라고 이름 한 것이 아닌가.
달력으로만 보아 오던 고색창연한 밴프스프링 호텔 아래 있는 보우 폭포(BowFalls)에 이르니 수많은 물줄기가 용솟음치며 하얗게 흐른다.
그때 누군가가 "사슴이다!" 외치는 소리 있어 보니 그 커다란 뿔을 자랑하는, 겁이 많기로 유명한 엘코 사슴 한 마리가 공원에서 노닐고 있는데 오히려 내편에서 가까이 다가서기가 두려웠다. 크기가 작히 2m쯤 되는 것 같았다.
강 건너에서도 수십 마리 암수가 모여 풀을 뜯고 있다. 이 귀한 짐승은 보우 강을 헤엄쳐 건너는 것을 촬영하는 기쁨까지 더하여 주었다.
마릴린 몬로의 ‘돌아오지 않는 강'의 촬영 장소가 이 보우 강이었다는 인연으로 하여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보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밴프(Banff)는 캐나다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로키의 대표적인 관광지며 거점 도시다. 우리는 해발 1,380m 밴프에서 2박을 하게 되어 있다.
다음날 영원의 호수와 투잭 호수(Twojack Lake)를 지나 존슨 협곡을 거쳐 곤돌라를 타고 해발 2,258m의 설퍼 산에 올랐다.
곤돌라가 끝나는 곳에 서니 밴프 국립공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지나칠 때는 하늘에 주먹질하듯 보이던 그 우람한 런들산(Rundle Mt.)이 아득히 먼데, 저 건너 바라보이는 유난히 짙푸르게 보이는 것이 여기서 하산하는 대로 가 볼 루이스 호수요, 그 앞에 성냥갑만 한 건물이 호화 샤토레이크루이스 호텔(Chateau Lake Loues)이다.

 

 

술꾼의 지옥 캐나다
곤돌라 타는 곳에 있는 통나무집에서 점심을 하면서 캔 맥주 둘을 시켰더니, 다 따 주려 하여 하나는 그냥 달랬더니, 이 이국의 처녀가 섭섭하게도 머리를 젓는다.
캐나다에서는 누구든지 하늘이 보이는 어느 곳에서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금주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지정된 리키어 샵(liquer shop)에서만 술을 판다. 영업시간은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무이고, 평일에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였다. 혹 가다 만나게 되는 슈퍼마켓에서도 맥주 이외에는 팔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는 표시가 되어 있는 허가된 음식점이나 라운지 이외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열차나 버스나 심지어 음식점에서도 개봉된 술병을 가지고 다니면서 마시는 것은 위법이어서 적발되면 범칙금을 많이 물어야 된다.
술의 천국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온 것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것을 여기와 서야 깨닫겠다. 술 한 잔에도 비싼 세금을 따로 내고도 지정된 곳에서만 마셔야 하는 캐나다는 분명 우리네 같은 술꾼들에게는 지옥이었다.

 


세계 10대 명승지 루이스 호수
드디어 루이스 호수(Lake Louise)에 도착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딸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루이스 호수는 길이가 2.4km이고 폭이 800m, 수심이 70m나 되는 빙하 호수이다.
아주 먼 옛날에 저 멀리 보이는 해발 3.624m 빅토리아 산과 그 주위의 산에서 흘러 내려온 빙하의 침식으로 패어진 웅덩이에 그 표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생긴 호수인데 그때 빙하 밑 지표에서 깎아 낸 미세한 돌 부스러기와 진흙이 호수에 녹아 저와 같은 신비로운 호수와 그린의 색깔을 만들어 내었다 한다. 이 색깔은 신비하게도 시간마다 계절마다 그 찬란한 색을 카멜레온처럼 바꿔 준다고-.
여기서는 손으로 젓는 보트 이외에는 기름을 쓰는 어떠한 배도 띄울 수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들 중에 복이 있는 사람들은 저 산에 쌓인 눈이 어느 날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그 소리와 그 모습을 보고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 10대 절경 가운데 하나인 이 빙하 루이스 호수 앞에서 갑자기 나는 그 감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저 멋진 자연의 장관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애지중지 준비하여 가지고 다니던 망원경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없다. 웬 일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전에 점심과 맥주를 먹고 온 설퍼 산 통나무집 의자에다가 망원경이 든 잠바를 걸어 놓고 그냥 온 것이다.
맞추어 눈이 무너져 내리며 내었다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천둥소리도, 그 앞에 서 있으면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여기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캐나다의 대표적 절승인, 저 신비한 에메랄드그린의 환상적인 짙은 청록의 호수 물빛을 바라보면서도 아까운 망원경 생각뿐이었다.
‘내가 준비 해간 캠코더로 이렇게 열심히 찍어 온 것도 이런 경우를 위한 준비였구나.' 하며-. 거기서 얼마쯤 가다가 만난 탠픽스 산(M .Ten Peaks)에서 무너져 내린 돌들이 쌓여 천연 제방이 되어 그 이름(moraine堆積)이 되었다는 모레인 호수(Moraine Lake)의 절경도 시큰 둥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스 호수가 올려다보는 경치라면, 모레인 호수는 내려다보는 경치로 그 물 빛과 모습의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보러 왔으면서도-.

 


고맙다, 곰아
일행에게 미안하게도 온 길을 되짚어 가서 그 옷을 찾아 버스로 돌아올 때에는 의자 밑에 숨어 버리고 싶도록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는데, 뜻밖에도 나의 이 건망증이 오히려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될 줄이야.
미안한 승객이 되어 버스를 타고 한 10분쯤 되었을까 했을 때 갑자기 '곰이다'하는 소리가 났다. 지나 칠 정도로 과묵한 한국 기사 아저씨에게서 그 짧지 않은 여행하는 동안 들은 처음이자 마지막 외마디 소리였다.
‘곰이다, 곰.’ 오늘 아침 영원의 호수를 보고 돌아오는 우리를 한참이나 막고 길을 건너서 오줌을 싸 자기 경계를 표시해 놓고는 유유히 다시 건너던 앨코 사슴만 한 곰이다. 귀에 달린 노란 표지가 선명하게 눈에 뜨이는 것으로 보면 이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 놈 중에 하나인 것 같다. 길가에서 빨간 열매 팥배를 따먹으며 사라지는 곰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을 때의 기쁨이란.
그냥 막 달려가서 끌어안고 싶었다. 물건을 잃고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바보의 체면을 돌려준 곰에게.
인생을 연극이라더니 오늘 일은 호사가가 일부러 꾸며낸 한 편의 드라마요, 거짓말 같은 한 편의 수필이 아닌가.
길을 가다 도중에 이유 없이 차들이 서 있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앞에는 영락없이 관광객들이 보고 싶어 열망하는 야생 동물이 있다.
우리가 이 여행 중에 만난 야생 동물로는 흰 산양, 잿빛 산양, 숲 속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뿔이 달팽이처럼 말려 올라간 산양, 앨코 사슴, 빅혼에다가 나그네에게 손을 벌리는 오소리에다가 행복하게도 곰을 더하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까마귀와 갈매기가 사람들의 1m 앞까지 날아와 먹이를 주워 먹고 있었다. 동물이나 새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법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자연적으로 모든 것이 순환되도록 하는 이 나라 위정자들의 배려였다.
캐나다는 나무의 나라요, 호수의 나라이더니 이제 보니 야생 동물의 천국이요, 그들과 사람이 함께 사는 에덴동산이었다.

 

로키의 푸른 보석/ 재스퍼
차는 밴프를 떠나 캐나디안 로키의 제2의 거점 도시 재스퍼(Jasper)를 향하여 300km나 되는 거리를 달려가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 이름도 푸른 옥 재스퍼(Jasper碧玉)라 하였는가. 자연의 신비와 경이와 웅장함에 이렇게 놀란 우리들에게 다시 또 어떤 것들을 숨겨 두었다가 보여주려고 재스퍼는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차는 스위스 50개의 경관을 이곳에 모아 두었다고 한 어느 등산가 말대로, 재스퍼 주립 공원의 경치 속의 경치를 달려가고 있다.
아이스 필드 파크웨이의 곁을 흐르는 보우 강을 따라가다 보니 만나게 되는 것이 보우 호수(Bow Lake)이다. 여기서 강 건너 저 너머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는 만년설(萬年雪)이 보이는데 까마귀 발 세 개를 오른쪽으로 눕혀 놓은 것 같다. 저것이 모양 그대로의 까마귀 발가락 빙하였다. 조금 더 가서 곰의 다리 모양처럼 생긴 초록빛 패이토 호수(Peto Lake)와 호수 속에 잠긴 주변 산들을 보고 난 후, 우리는 대빙원 콜럼비아 아이스필드(Columgia Icefield)에 도착하였다.

 

대빙하 위에 서서
대빙원 아사바스카 빙하(Athabasca Glacier)까지는 차를 두 번 타고 올라간다. 중간에 바꿔 탄 차는 그 바퀴 하나의 크기가 2m 이상이나 된다. 57명이 탈 수 있는 이 설상차(雪上車)는 처음에는 탱크 바퀴에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올렸으나 쇠로 된 바퀴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라 하여 다시 이렇게 만들게 하였다고-.
6 바퀴가 동시에 구동되는 시가가 5억이 넘는다는 눈 위를 다닐 수 있게 제작된 특수차였다.
드디어 아내와 함께 빙하 위에 섰다. 교과서에서만 보고 들어오던 빙하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빙하의 바로 이 아래 깊이가 무려 90m에서 360m에 달한다고 한다. 저 산 너머까지 이어지는 그 길이는 325km로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를 하나의 빙하가 계속되고 있다. 빙하 위를 흐르는 시원한 얼음물을 손으로 떠서 마셔 보면서 나의 눈물 어린 감격은 계속되었다.
칠팔십만 년 전 지구가 몹시 춥던 시절, 북반부 높은 산에 쌓이고 쌓인 눈이 누르는 힘이 더해짐에 따라 눈은 큰 얼음덩이로 변하여 경사로 인하여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빙하(氷河)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빙하는 현재도 계속 녹아내리고 있어 일년에 1m 내지 2m씩 땅과 구별되는 저 아래 빙하 끝이 산으로 점점 올라오고 있다. 그래서 돌에다가 1908년이라 표지해 놓은 것이 첫 번째 차가 오르는 길목에 서 있었다. 우리가 다녀온 밴쿠버에서 빅토리아로 가던 바다에서 바다 냄새가 나지 않았던 것이나, 거기서 잡은 물고기는 회로는 먹을 수 없다던 것은 곧 이 빙하가 바다와 섞여 염분이 적어 기생충을 유념해야 하기 때문이란 말이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된다.
선웹타 폭포(Sunwapta Falls)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장엄한 소리와 함께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로 부스러져 내리고 있다. 그 물결 사이를 헤치며 한 마리 물개 바위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있어 우리를 재미있게 한다.
재스퍼 남쪽 30km 지점에 아사바스카 폭포(Athabasca Falls)가 있다. 그 수량의 풍부함으로 하여 흰 포말과 그 우렁찬 굉음과 그 수마와 수만 년 깎인 계곡은 나이아가라를 못간 우리 부부의 한을 달래 주기라도 하는 듯 줄기차게 물을 하얗게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어 마린 캐년(Maligne Canyon)을 관람하였다. 수만 년 세월의 물줄기가 깊은 협곡을 만들었는데 폭포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깊은 협곡으로 하여 흐르는 폭포수의 우렁찬 소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캐나다는 나무와 산과 호수와 동물로 우리의 기를 꺾더니 그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폭포와 협곡이라.
재스퍼를 떠난다. 여행에서는 많은 것을 보는 것이 재산이 된다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 밴쿠버 시내 관광이 기다리고 있지만 별로라고 생각되어질 만큼 우리의 눈이 높아지고 깊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돌아가는 일뿐이다. 그래서인가 고향을 떠난 객수 때문인가, 우리 일행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다. 이제는 여행도 우리들의 나이처럼 오후 6시가 넘어가는가 보다.

 

유토피아인가, 무릉도원인가/ 말린 호수
호수를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기만 하던 우리는 캐나다에서 가장 크다는 말린 호수(Maligne Lake)에서는 배를 타고 유람선 크로스 관광을 한다. 안내원은 물론 선장도 젊은 여성이었다.
말린 호수(Maligne Lake)는 고산대의 인적미답의 침엽수 처녀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너머에 있는 3,000m의 만년설의 하얀 산들이 줄줄이 서서 지켜보는 깊숙한 곳으로 전속력으로 30여분 넘게 달려가던 배가 멈추기에 내려가서 보니, 거기에 사진에서만 보아 오던 요정의 섬(Sprit Island)이 그 환상적인 얼굴로 우릴 맞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를 감탄시켜 오던 모두가 멀리 두고 바라본 경치라면 이곳의 경치는 우리를 그 속에 끌어안고 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고 우리가 그 속에 하나가 되어서 노닐고 있는 것이다.
푸른 호수 가에 땅이 끊어질 듯 이어져 있는 사람 얼굴 같은 작은 섬 하나에 나무 20여 그루가 겹겹이 싸여 있는 만년설의 산을 배경으로 하여 떠 있고 청록색 물과 원시림과 3,000m의 산들이 두 계절과 함께 어울린 이 비경이 우릴 보고 어떠하냐고 묻고 있는 듯한데, 저 높은 하늘을 가로질러 비행기 하나 높이 떠서 멋진 비행운(飛行雲)을 만들어 인간의 흔적을 긋고 있다.
아름다움도 그 진실이 있고 그 실체가 있다면, 아니 무릉도원(武陵桃源)과 유토피아가 이승에도 있다면, 바로 여기가 거기인 것 같다. 그 모습이 이 모습인 것 같다.
선착장으로 돌아올 무렵 소리치는 사람이 있어 바라보니 호수 가 숲 속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앞에 커다란 검은 움직이는 물체가 보인다. 내리기 무섭게 숨 가삐 달려가 보니 양 손바닥 같은 뿔이 머리 좌우로 나 있는 순록과 비슷한 동물, 커다란 황소보다도 더 큰 빅혼(big horn)이었다. 그런 뿔이 없는 걸 보니 암놈이었다. 외국인 틈에 섞여 나도 사진을 열심히 찍고 또 찍었다.
메디슨 호수를 보러 가다가 길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회색 산양 대여섯 마리를 만났다. '눈물의 벽'에서 본 것은 길가에서 염분을 찾아 땅을 핥고 있는 흰 산양이었는데, 풀을 뜯어먹고 있는 이 놈들은 그와 다른 종류인지 산양은 산양인데 그 모양이 전에 본 것과 서로 같지 않았다.
이제는 차를 타고 가다가 야생 동물을 만나도 내려서 호들갑을 떨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나라에서는 신기한 일이 아닌 자주 있는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아, 3954m의 롭슨산이여
북아메리카의 최고봉 3,954m의 롭슨 산(Robson Mt.) 정상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본연의 얼굴로 하얀 모습의 장관을 드러내어 우리를 맞아 주고 있다.
아프도록 목을 뒤로 젖혀야 보이는 저 높은 정상의 흰눈이 바로 빙하(氷河)이다. 1,950m의 한라산 정상도 구름에 싸여 보기가 쉽지가 않거든, 하물며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이 고봉(高峰)이 화창한 날씨를 열어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축복인가.
서울을 떠나올 때가 9월 하순인데도 이곳은 영하 20도라 해서 털모자에 털장갑까지 준비하여 왔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화한 날씨와 이렇게 청명한 날씨를 주시어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여 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께 비록 신자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이 사람이지만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밴쿠버에 와서 마지막 시내 관광을 할 때 뿌리기 시작한 비가 밤새 적지 않게 내려 대더니, 귀국을 향한 밴쿠버공항 길에는 씻은 듯이 비가 개었다.

 

귀국 길에서/ 캐나디안 로키→
나는 로키 산의 단풍을 보러 왔다가 캐나디안 로키의 진면목(眞面目)을 유감없이 보고 간다.
멀고 먼 나라 캐나다 국립공원을 찾아갔지만, 내가 보고 온 것은 한 나라의 공원을 넘어선 세계의 공원이었다.
이 경치들은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그 이상의 아름다움에다가 경탄과 외경을 더 하고서도 표현이 모자란다.
중국에서, 이집트에서 본 만리장성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에서, 나를 놀래게 한 것이 인간이 도저히 이룩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불가사의한 거대한 인간의 힘이었다면, 캐나디안 로키에서 만난 자연은 신의 위대함이 아니면 도저히 만나 볼 수 없는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경탄과 감격의 세계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천국을 다녀오는 길 같다.
선경(仙境) 같은 아름다운 곳에서 태고처럼 동물과 함께 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가축처럼 사람을 따르지는 않았으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과 함께 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자연을 지키려는 이 나라와 국민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또한 어떠하던가?
‘로키에서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 아무 것도 가져오지도 말라’ 하는 말을 법보다 잘 지키며 사는 국민이었다.
곳곳에 서 있는 입간 판에 쓰인 ‘잠자는 짐승들을 깨우지 말자’는 것을 실천하는 국민들이 사는 나라였다. 산 속에, 호수 속에 쓰러져 누운 나무를 그대로 두게 한 것은 문명 이기의 출입으로 인한 자연 훼손을 막고자 하는 이 나라의 자연보호에 관한 강한 의지였다.
특정 구역을 제외하고는 이 나라는 1세기 전부터 수렵을 금하여 왔고, 자연과 어울리지 않거나 그 조화를 깨뜨리는 어떠한 구조물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
고속도로에서는 길가에 철조망을 쳐서 도로에 뛰어드는 짐승과 사람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국기가 단풍잎으로 그 잎이 여러 가지이듯이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임과 다 민족의 문화를 서로가 존중하고 도와주는 나라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캐나다의 모든 차들은 낮이나 밤이나 불을 켜고 다닌다. 차의 시동을 켜면 불이 들어오고 시동을 꺼야 불이 꺼지게 되었다. 그것이 법제화 된 나라였다.
너무나 거대한 나라로 북극에 가까워서 낮과 밤의 시간이 우리네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여 30%로 교통사고가 줄었다는 인명 존중 사상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였다.
이만큼 나라는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은 위정자를 믿고 사는 나라다.
그래서 캐나다는 옛날부터 ‘21세기의 국가’로 불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닌 어느 분에게 어느 나라가 그중 살고 싶은 나라이던가 하고 물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캐나다를 들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거의가 노인들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부부들이 손을 맞잡고 밝은 표정으로 몇 주일씩 세계를 여행하면서, 어디서나 웃는 얼굴로 나이와 관계없이 먼저 양보하며, 조용히 노년을 즐기며 살고 있었다.
캐나다는 노인의 나라요, 노인이 와서 살고 싶은 노인의 천국이기도 하였다.
그 동안 내가 다니던 곳이나 내가 본 것은 주마간산(走馬看山)이요 창해일속(滄海一粟)일 수밖에 없겠지만, 캐나다를 통하여 정작 내가 보고 온 것은 실상은 우리나라 우리 국민의 모습을 돌아보고 온 것이다.

 


돌아온 코리아
조금 있으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국에 도착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산은 높지 않고, 그 산기슭 어느 곳에나 인가가 있다.
꼬불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이 강을 따라 옆으로 흐르고, 거기에 너무 덥고, 너무 추운 계절처럼 바글바글 거리며 사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
캐나다의 45분의 1 밖에 안 되는 나라를, 그 절반을 갈라 살면서도 다시 또 동서로 나누면서 으르렁대는 나라로 돌아온 것이다.
국민보다 나라가 부자인 나라를 다녀서, 국민이 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에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큰 나라가 자연을 저렇게 아끼며 보호하며 사는데, 좁디좁은 이 땅을 생각 없이 오늘만을 위해 마구 훼손하며 사는 나라에 돌아온 것이다.
아무 데나 거리낌 없이 오물을 버리고, 그것을 줍지도 않으면서도 남을 저주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남을 의식하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양보를 뒷전으로 밀어 두고 제멋대로 살아도 되는 나라에 돌아온 것이다.
나이를 벼슬처럼 칼처럼 휘두르며 사는 나라, 합리적인 논리적 목소리 보다, 큰 목소리가 승패를 좌우하는 사회로 돌아온 것이다.
캐나다에서 8일 동안 단 한번도 만나 보지 못한 캐나다 경찰을, 부릅뜬 눈의 경찰을 지천으로 만날 수 있는 나라로 돌아온 것이다.
캐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런 두려운 생각을 했었다.
들으니 캐나다는 세상에서 국토가 제일 큰 나라이면서 3,000만 인구뿐인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던데, 다녀와서 엉뚱하게 남의 나라를 예찬이나 하면서 다니거나, 우리를 비하하고 다니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송충이와 소나무의 이야기까지 가지 않아도, 강고기는 강에서 살아야 한다. 바다 고기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듯이.
그러므로 우리는 못살아도, 잘못 살지 않으면 되고, 서로 사랑하며 살면 될 것이고, 그 곳의 하늘로 향하여 쭉쭉 뻗은 그 수많은 나무들처럼 많은 우리나라 인구 하나 하나가, 아무렴 그 나무만 못할까 하며 살면 될 것이고.
세계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무질서와 잃어버린 공중도덕은, 옛날의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돌아가도록 나부터 노력하면 그만큼은 나아지게 될 터이고, 우리의 금수강산보다 몇 배 이상 아름답게 본 그 산, 그 호수는, 철없이 늘 보던 내 강토를 다시 찾아가 새로운 마음으로 보면 될 것이고,
그 속에 사람 가까이 뛰놀며 사는 짐승들은, 다음에 다시 가서 보면 되지 하면 될 것이고….
여행도 지나고 나면 잊혀지는 사랑 같아서, 줄곧 기록하고, 촬영하고, 녹음하면서 캐나다의 일부를 갖고 무사히 돌아오는 길의 생각이었다.
돌아오면서 내가 나에게 속삭여 주었다.
나는 9일간 캐나다에 단풍 보러 갔다가, 단풍보다 더 진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젊은이들보다 더 많이 보고 듣고 간직하여 왔노라고.
-새천년 새 가을 10월 10일 일만


Ⅱ. 중국 기행
갑천하/ 중국 계림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草芥)로구나 -. 6.25 동란 때 인해전술로 몰려오는 중공군을 이렇게 노래 부르던 우리는 계림에 어제 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손녀일지도 모르는 중국 처녀에게 발 마사지로 노독을 풀었다. 인생유상(人生有常)이었다.
계림프라자(桂林觀光酒店)에서 일어나 호텔식을 하고 드디어 밖을 나섰다.
여행은 밤에 도착하여야 다음날 관광의 멋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계림 시내 관광 길에 드니,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뿌연 안개 속의 이국적 풍치를 돋워 중국 관광의 절정이라는 계림 이강의 선상 유람을 향한 마음을 설레게 한다.
당송팔대가 중의 한 분인 소동 파는 願生高麗國見金剛山(원생고려국견금강산)이라 하여 고려 국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듯이, 세계인이 가보고 싶어 열망하는 곳에 우리가 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금강산은 1만2천봉인데 계림 봉우리는 무려 10만여 봉. 그중 3만여 봉이 우리가 가기로 한 이강 저 아래에 몰려 있다 한다.
우리나라 진안에 가면 만나 보게 되는 말귀 같이 생긴 마이산(馬耳山)의 모습이 수백 배가 모여 있는 곳이 이곳이다.
3억 년 전 무렵에는 계림 지대는 바다여서 바다이었을 때 석회질 부분이 물에 녹아 버리고, 남은 바위 봉우리가 지각의 융기 작용에 의해 솟아올라 저렇듯 능선이 없는 봉우리가 산 속 아닌 평야에 여기 불끈 저기 불끈 기암 기봉의 모양이 되었다 한다.
산이 봉우리요 봉우리가 그대로 산이었다.
계림에서 와서는 경치 자랑은 하지 말라 하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계림산수 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 하였고 이곳 그림이 그대로 중국 산수화의 대종을 이루었다고 한다.
계림 관광은 사계절 중 어느 때 찾아와도 제 각각 멋이 있다.
봄철 아침 안개 속에 비치는 햇살을 뚫고 배를 타고 내려가다 마주치는 평야에 치솟은 봉우리와 그 뒤의 봉우리들은 수천 년 전의 세상 속을 찾아 드는 것 같고, 여름철에는 시원한 강바람 속에 펼쳐지는 맑은 날의 초록빛의 봉우리들과 물에 비췬 봉우리 또 봉우리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고, 겨울 안개 속에 펼쳐지는 보일 듯 말 듯한 첩첩한 기암 기봉을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강이나 강가에 있으면서도 심산유곡에 들어선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갑천하 품천하(品天下)계림의 풍광은 가을 경치가 제격이라 한다.
시내 가로수로, 이강 가에 무성한 계수나무 꽃이 하양 노랑 빨강으로 어우러져 흐드러지게 피는 때라 꽃향기가 천리만리 풍겨 나온다. 이 꽃으로 빚은 술이 이 고장 특산물인 계림의 명주 삼화주(三花酒)다.
2,000년 전 이곳을 찾은 진시황이 계수나무 숲의 고장이라 하여 계림이라 하였다고-.
우리가 서울을 떠나올 때는 32년 만에 내린 큰 눈을 보고 왔는데, 이곳은 남쪽이라 자목련과 노란 유채 꽃이 만발한 것을 보니 막 시작되는 이른 봄이었다.
이강 선상 관람은 상비산(象鼻山)으로부터 시작된다. 상비산은 이강과 도화강(桃花江)이 합류되는 곳으로 도심에 있는 공원이다. 강으로 면한 바위 모양이 코끼리가 코로 이강의 물을 먹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 하여 코끼리 상(象), 코 비, 상비산(象鼻山)이라 이름하였다.
정상에는 높이 13.5m의 보현보살탑(普賢菩薩塔)이 보인다.
선착장 바로 앞에 대나무로 엮은 긴 뗏목 같은 배 위에 두 마리 가마우지가 묶인 체 조용히 앉아 있다. 머리가 유난히 꺼칠한 놈이다.
가마우지는 길들인 고기잡이 새로, 밤이면 불을 밝히고 가마우지가 물고기 잡는 모습을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얼마의 돈을 받는다. 우리나라 백령도 두무진에 가면 볼 수 있는 새다.
강심(江心) 속에 땅이 보이는 부근에는 수천 마리의 오리를 한가로이 방목을 하고 있고, 모래 채취를 하는 모습, 해초를 채취하는 모습, 강가에서 남녀가 빨래하는 모습 등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실망을 더해 가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안개는 강가에 끼어서 산하를 가리다가 시간이 되면 경치를 되돌려 주는 그런 안개가 아니라, 계속되는 찌푸린 흐린 날씨의 운무였다. 더구나 요즈음은 겨울철 갈수기(渴水期)라, 계림 최고의 경치라는 양삭까지의 6시가 아닌 3시간뿐인 선상 유람이라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관음 동굴 부근에서 볼 수 있는 네 겹 다섯 겹 이상으로 보인다는 중국이 자랑하는 천하 절경의 모습은 겨우 봉우리 뒤에 봉우리일 뿐 계림 산수의 비경은 우리에게 을천하(乙天下) 정도도 허락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가이드는 조선족이면서도 중국을 ‘우리나라, 우리나라’ 하고 되풀이 할 정도로 우직한 사람인데다가,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거기다가 과묵까지 하여 물어보면 대답하는 정도의 사람을 만났으니-.
그러나 계림의 이런 경치는 좋은 날씨에 속한다는 그 사람의 말로써 위안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계림의 산하를 보러 국내외 관광객이 연 800만이나 모여든다는 이 명승지에 와서 실망은 다음날 날씨가 드는 틈을 타서 모든 일정을 폐하고 되짚어서, 이번에는 버스로 다시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이란 이국적, 목가적(牧歌的), 자연애와 동경 적이라던데, 낭만 아닌 실망으로 ‘계림 산수 촬영 정선'이란 사진 책자를 사서 보는 것으로 감탄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 먹어 여행은 온 곳을 다시 올 수 없는 건데, 찾아올 여유가 없는 건데 하면서.


갑천하(甲天下) 품천하(品天下)의 이강에 배 띄니
달려오는 저 풍경 산인가 봉우린가
계림선 자랑 말라던 경치가 저 경친가.

물아래 잠긴 봉들 봉 뒤에 또 봉우리
능선은 어디 가고 봉들만 서 있는가
흐릿한 날씨 탓했더니 겨울 모습이라데.
-2001년 2월 19일 중국 계림에서

 

역사의 도시/ 중국 서안(西安)
중국에 관광 여행가서는 북경은 발로하고, 서안은 귀로하고, 계림은 눈으로 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북경에서는 유물을, 서안에서는 유구한 역사를, 계림에서는 경치를 보고 오라는 말이다.
서안에는 그만큼 역사적으로 유명한 궁궐과 사원 등 둘러볼 곳이 많았다. 오늘 우리는 서안 성곽과 대안탑(大雁塔)을 보기로 되어 있다.
서안(西安/Xi An)은 1,120여 년 동안 서주(西周), 진(秦), 서한(西漢), 당(唐) 등, 역대로 열두 나라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불려졌던 역사적인 고도이다.
기름진 땅과 온난한 기후, 적절한 강우량과 풍부한 생산물 등으로 하여, 현재 520만의 인구가 살고 있는 '천리에 뻗친 황금 도시(a gold city stretching a thousand li)'라고 불리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시발점이 바로 이 서안인 것이다.
함양(咸陽) 공항에서 서안 성곽으로 가는 길은 언덕 하나 없는 끝없는 벌판이었다. 길가에 있는 집들은 모두가 후락한 모습들. 이집트 피라미드를 찾아갈 때 도중에 만났던 집보다는 그 초라함은 덜했지만 가난과 궁색히 질질 흐르는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않은 토담집들이었다.
들판 사이사이에는 우리가 경주에서 보던 이름 모를 왕릉만한 옛날 귀족들의 무덤이 있었는데, 무덤마다 굴이 숭숭 뚫려 있다. 저것이 가난한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살던 곳이었다는 말을 듣고 보면 사람의 삶이란 모질고 질긴 덧없는 길인 것 같다.

 

*철옹성 성곽/ 서안
현재 서안 성곽은 지금까지 전해 오는 중국에 있는 완벽한 성벽이다.
명나라 초에 당나라 때의 황성(皇城)에 기초하여 구축한 여의도만한 땅을 네모로 하여 밖으로 외성인 곽(郭)을 쌓고 안으로 내성인 성(城)을 쌓았다. 13km로 이어진 성벽 위에 서면 말 그대로 완벽(完璧)한 성이 무엇인가를 절로 깨닫게 된다.
성벽 바로 앞에 6m의 해자(垓字)로 판 강이 성벽을 둘러싸고 돌고 있어, 그보다 긴 나무가 아니면 적들이 감히 건너 올 수 없다. 더구나 무거운 갑옷을 입은 장병들이 수영으로 건너온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건너왔다 해도 그 성벽을 도저히 기어 올라 올 수 없게끔 높이가 12m나 된다.
성벽에는 6,000여 개의 화살 구멍이 성밖을 향하여 있다. 성벽에 다가선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 활의 사정거리에 해당하는 곳마다 성벽보다 밖으로 쌓은 반원형이나 네모의 곡성(曲城)과 치성(雉城)이 있어 좌우로 활을 쏘아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막게 하였다.
영화나 사극에서 성을 공략할 때처럼 나무로 성문을 부수지 못하게끔 성문을 이중으로 하였다. 두 번째 성문은 정사각형의 옹성(壅城)으로 되어 있어서 사면 성 바로 위의 화살을 피해 가며 성문을 부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철옹성(鐵甕城)이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였다.
성벽 위에 서면 쭉 뻗어 나간 2차선 고속도로에 선 듯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삼림(三林)의 하나/ 비림(碑林)
중국에서 경치를 논할 때 빼놓지 않고 말하는 삼림(三林)이 있다. 계림(桂林), 석림(石林), 비림(碑林) 세 곳이다.
비림(碑林)에는 한나라 때부터 수․ 당․ 송 대에 이르는 역대 명필들의 친필 석각(石刻) 등 총 1,095개의 비석이 이 곳에 모여 있다. 글자 그대로 비석의 숲 비림(碑林)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중국 서예와 문학 예술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으로, 하나하나가 고대 중국 예술을 넘어서는 세계적 문화유산들이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당나라 때 만들어졌다는 개성석경 114기. 거기에 새겨놓은 65만 252자를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땅과 인구의 나라가 아니면 이룩할 수 없는 위대한 세계의 문화를 접한 감동과 전율을 느끼게 한다.
비림 박물관 한 구석에서는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탁본을 떠서 이를 관광객에게 고가로 팔고 있었다. 그 중 조조가 관운장을 얻으려고 극진한 예우를 주고 있을 때 유비를 찾으면 돌아가겠다는 충성의 시를 대나무 잎에 상징적으로 쳐놓은 묵화 탁본을 망설이다 사오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후회가 된다.
패키지 여행지에서 옵션으로 이것저것보고 사는 것도 삼가야 할 일이지만, 거기 아니면 보거나 구할 수 없는 물건을 외면하고 온다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겠다.


양귀비 나라/ 화성지
명나라 오승은이 지은 "서유기(西遊記)"로 유명한 대안탑을 거쳐, 온천 휴양지 화청지(華淸池)에 들어서니 못 가에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된 양귀비가 연못가에서 풍만한 벌거벗은 요염한 자태로 서서 우리를 맞고 있다.
중국 정사(正史)에서도 그 미를 자질풍염(資質豊艶)이라 극찬하였고, 시선 이 태백은 활짝 핀 모란으로, 백낙천은 ‘장한가'를 통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으로 노래하였는데 여기서 보니 옛날의 미인이란 저런 모습이던가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이 선호하는 날씬한 모습이라기보다 옛 화가들이 즐겨 그린 미인도에 나오는 건강하고 풍만한 농려풍비(농麗豊肥)의 몸매였다.
화청지(華淸池)는 양귀비의 별장으로 당나라 현종이 궁으로 조성하여 여기서 생활했다는 곳이다. 양귀비(楊貴妃)가 목욕했다는 부용탕과 현종이 목욕한 구룡탕 등으로 유명하다.
며느리를 뺏어 자기 귀비(貴妃)로 삼는 패륜의 현종. 부용탕 안을 구멍으로 들여다보며 목욕하는 양귀비의 몸매에 늘 감탄하였다는 한량(閑良) 현종의 치기(稚氣)는 음란물이 범람하는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점잖지 않은 얘기가 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래서 제왕들의 세계를 무치(無恥)라고 합리화하였나 보다.
그 건물 복도에 어느 화가가 70여 개의 그림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낭만적 비극적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 놓은 것 중, 안록산 난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양귀비의 모습이 있어 젊음 밖에서 살고 있는 이 백발의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바로 밖 야외에는 여기가 온천이라고 43도의 온천수가 뿜어 나오는 곳이 있어서 이곳을 찾아오는 이의 손을 따뜻이 적셔 주고 있다.

 

나뿐인 놈/ 진시황
진시황은 누구인가?
그의 위대한 업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였다. 진(秦), 초(楚), 연(燕), 제(濟), 한(漢), 위(魏), 조(趙) 전국시대의 군웅 활거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민족 중앙집권의 봉건국을 창건하여 거대한 통일 중국을 있게 한 일세의 영웅이었다.
그의 업적은 무엇보다 3대 통일로 집약된다.
전국의 도(度) 량(量) 형(衡)과, 전국의 문자를 통일하였고, 진나라 돈으로 전국 화폐를 통일하였다.
이 세 가지는 소련마저 붕괴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통일 중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 뿐인가 전국 시대 각국이 쌓아 놓은 장성을 하나로 이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일컫는 저 유명한 만리장성을 이룩하여 놓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시황을 천고의 제1황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시황 능에 올라서 느끼지 못했던 분노를 진시황 병마용갱 앞에서 터뜨리고 말았다.
나쁜 놈. 그의 야욕을 위해 희생된 인원이 얼마이던가. 우리나라로는 고조선 시대였던 아득히 먼 옛날 전 국민의 1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을 강제 징발하여 그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썼다. 장성 축조나, 변경 방어를 위한 징발은 국토방위를 위한 일이었다고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전의 향락을 위해 지은 아방궁(阿房宮)이나, 사후의 자기 무덤을 쌓기 위하여 무지막지하게 죄수 70만을 희생시킨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용서라 해도, 누가 있어 이 천인공노할 미증유의 폭군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폭군의 상징인 네로의 수백 배 이상 나쁜 놈, 나뿐인 놈이었다.
부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등극하였다가 22세 때에 어머니인 태후(太后)를 연금하고, 함께 국정을 담당하던 노독이란 신하를 쳐 죽이고 국정을 담당한 사람이다.
중국을 통일한 직후에는 자기의 덕망은 복희, 신농, 황제인 삼황(三皇)나 요(堯) 순(舜) 보다 크므로 자기를 삼황오제(三皇五帝)를 겸해 불러야 한다고 하여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자칭하였다. 그러니까 황제란 말을 만들어 처음 쓴 이가 바로 그다.
사서에 의하면 그는 성격이 포악하고 거칠어서 징발한 인부를 다스리기 위해서, 법률을 남용하고 가혹한 형벌로써 민심을 잃어 진나라가 역대 중국에서 가장 짧은 멸망의 역사를 자초하고 말았다.

 


무덤인가 산인가/ 진시황 능
진시황 능은 여산 남쪽으로 북쪽으로는 위하를 끼고 우뚝 솟아 있다. 100여m의 수천 계단을 오르다 보면 좌우로 토사를 막기 위해 심어 놓은 석류나무 숲을 지나게 된다. 진시황의 무덤이라 하여 정상에 올랐지만 무덤인가 산인가. 이것이 정말 무덤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명부에까지 수록된 중국 유일의 고대 제왕 진시황의 능묘이다.
그 무렵 사람으로 사성(史聖)이라 일컫는 한나라 사마천의 기록을 요약해 본다.

"시황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곧 능묘 건조에 착수했다. 전국을 통일한 후에는 또 70여 만 죄수들을 그곳에 보내어 노역에 종사하게 하였다. 묘혈(墓穴) 내에는 진귀한 보물을 가득 수장해 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누구나 부딪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화살이 발사될 수 있게 하여 도굴하려 들어오는 자를 막았다. 지하에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가 있는 궁전도 만들었다.
현실(玄室) 내의 상황을 알고 있는 자가 기밀을 누설하기 쉽다 하여 이곳을 만든 장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살아 나오지 못하게 순장해 버렸다. 그리고는 무덤 위에 초목을 가득 심어 예사 산처럼 보이게 했다."

이런 능묘 건설 공사가 38년이나 계속되었다.

 

우물 파다가 발견된 세계8대 불가사의/ 병마총
1974년 봄 섬서성 진시황 능 부근 어느 마을 농민들이 마을 관개용 우물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닷새째 되던 날 뜻밖에 갑옷 입은 토인의 흉장이 나왔다. 이에 놀래서 조심스레 다시 더 파 들어가자 이번엔 토인(土人)의 머리, 팔, 다리가 나오고 이어 푸른 녹이 얼룩진 구리 쇠뇌와 활촉 및 바닥에 까는 벽돌이 나왔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이때 몇 농부들이 파낸 것은 한낱 우물이 아니라 세계를 놀래게 한 2,000년 전의 기적, 고대 군사 박물관, 세계8대 불가사의였다.
그들 중 살아 있는 노인은 지금 갱 앞 상점에 앉아 모형 유물이나 책자에 사인을 하여 고가에 팔고 있었다.
이 진나라 병마용 갱은 진군의 축소판으로 이른바 '군사 100여만, 전차 1,000여 승, 전마 1만여 필에 달한다.'는 3군이 집결하여 명령을 기다리는 당시 진군의 위풍을 반영하여 만든 것이다. 이들은 능의 동쪽으로 약 1.5km 밖에서 명령을 기다리며 능을 지키던 병마용이 모습들이었다.
현재까지 공개된 갱은 1호 갱에서 3호 갱까지 3개로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데, 도굴꾼 같이 삽으로 파는 것이 아니라 붓으로 파는 조심스런 일이라 이를 완성하는데 는 앞으로 150여 년이 더 걸려도 힘들다고 한다.
이 갱들은 우리가 삼국지를 읽어 알던 것처럼 삼진(三陣)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에 임하여서 중군이었던 지휘부 3호 갱을 중심으로 1호 갱은 오른쪽의 우군, 2호 갱은 왼쪽에 있는 좌군으로 한자의 品(품)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병마1호 갱은 능을 지키는 주력부대가 있는 곳이다. 6,000여 명이 3열 종대로 서서 갑옷 입고 손에 실물 크기의 칼과 창 활 등의 무기를 들고 부릅뜬 눈으로 서서. 토마(土馬) 40여 승의 목전차(木戰車)도 함께 완전무장을 갖추고 출발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안치된 되어 있다.
이 수많은 토용(土俑)들의 생김새가 실물 크기의 등신대(等身大)인데다가 사실적이어서 그 정교함이나 각기 다른 얼굴로 씩씩하게 부릅뜬 눈에 위엄이 감도는 것이 위풍 당당히 전쟁터로 행군하기 직전의 긴장감마저 들게 한다.
복도에 전시된 토용의 손바닥을 자세히 보면 손금도 분명하고 서로 달랐다.
병마2호 갱(兵馬2號坑)은 아까 본 주력부대 병마 1호 갱을 보조하는 부대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차를 끄는 토마(土馬) 350여 필, 기병용 말 116필과 각종 무사 토용 900여 점 도합 1,400여 점이 진을 치고 질서 정연하게 서서 역시 출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병마3호 갱(兵馬3號坑)은 머리를 서로 맞대고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모양이 지휘부를 경호하는 부대 같다.
2,200여 년의 역사 속에 수 없이 파손 된 유물을 보니,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원통 극장에 서서 영화 상영 속에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병마용에 불을 지르고 토용이 들고 있는 대다수의 무기들도 수거해 가는 모습이 다시 떠올라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싱가포르 이광요 총리는 이 진용을 보고 나서 "세계의 기적, 민족의 자랑"이라 칭찬하였고, 시라크 프랑스 전 총리는 참관 소감을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전에는 7대 기적이 있었는데 진용갱의 발견은 제8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 이집트에 왔었다고 할 수 없듯이 진용을 보지 않으면 중국에 왔다고 할 수 없다."
나도 한 마디로 그 전언부에 세계에 오직 우리나라에만 있는 시조(時調) 한 수를 이렇게 남기고 싶다.

세계 팔대 불가사의 둘씩이나 만들어 논
진시황은 나쁜 놈, 나뿐인 놈 살인마
아득한 고조선 무렵 엽기적 과대망상자.
만리장성 만리 무덤, 병마용 70만 무덤
아방궁 지어 놓고 불로초 탐내다가
50세 겨우 살다가 남들 죽이고 저도 간 놈
- 2001년 2월 19일 진 시황 병마도용 갱 앞에서

 

 

 

 

 

 

 

Ⅲ. 홍콩 기행

중국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 홍콩 책랍콕 공항에 내렸다. 중국 속의 서양이며, 서양 속의 중국의 이 공항은 말 그대로 세계적 자유 무역항으로 그 규모가 크고 깨끗하여 우리를 압도한다. 중국 각 곳을 다니며 세우고 다녔던 목의 힘이 저절로 꺾이는 것 같다.
55만㎥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단일 실내 공중 설비를 갖추고 매년 3,000만 명이 다녀간다는 공항이다.
하루 기내식 준비만도 10만 명분을 준비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말 그대로 국제공항에 우리가 온 것이다.
공항 내에는 공항 출입구(gate)만도 71개나 되는데 그 사이를 공항 전용 열차(機場快線)가 다니고 있다. 승객이 기다리는 바로 앞에는 보통 때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막아 문이 닫혀 있다가 차가오니 그 문이 자동적으로 열리고 닫치는 것부터가 선진국에 온 것을 실감케 한다.

 


100만불짜리 야경/ 홍콩
공항에 내리는 즉시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우리는 홍콩의 야경을 구경하러 간다. 별빛이 반짝이는 홍콩의 밤거리라고 노래하던 홍콩은 1,091㎢에 인구 700만 여명이 사는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로, 1국가 2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막 도착한 우리도 여기서는 다시 입국 수속을 하였다. 드디어 우리는 16,000불 GNP의 나라. 동양의 진주라는 홍콩에 온 것이다.
우리는 비행장이 있는 홍콩 제일의 섬 랑타오 섬(Lantau Island)과 구룡 반도를 잇는 웅장한 청마 대교(靑馬大橋)를 넘어 홍콩 섬(香港島)으로 간다.
이 다리는 세계 최장이라는 2,200m의 복층식 현수교(懸垂橋)로 우리를 실은 버스가 가는 이 도로 바로 아래층에는 철도(Air Port Express)가 지나가고 있다.
이 도로는 구룡 반도에서 주도(主島)인 홍콩 섬을 해저터널(Western Harbour Tunnel)로 이어 지는데 남산 터널을 지나가는 듯 해저라는 말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산악 전차 피크 트림(Peack Tram, 山亭纜車)을 타고 빅토리아 전망대 373m을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8분에 45°의 경사 길을 올라가니, 올라 올 때 주변에 쓰러져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키게 하던 아파트들이 콩나물 같이 높이 서서 홍콩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태 주고 있다.
이 열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동력 차로 과거에는 영국 홍콩 영사관이 전용으로 쓰던 것이다.
해발 551m의 빅토리아산(批旗山) 정상에 오르니 말로만 듣던 찬란한 홍콩의 불야성이 펼쳐진다. 세계 최고의 콘크리트 건축물이라는 78층의 센트랄 플라자(中環廣場)의 금은 색의 아름다운 자태를 둘러싸고 우뚝 우뚝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마천루가 낯선 홍콩을 찾아온 이 나그네를 황홀케 한다.
홍콩은 개인 주택이 하나도 없이 30층~40층 이상의 아파트가 열 십자형으로 서서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그 야경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구룡 반도(九龍半島) 연인(戀人)의 거리 쪽에서 어느 영국 사진작가가 홍콩의 야경을 찍어 상금 100만 불 미국 국제 사진전에서 입상하여 홍콩의 야경을 100만 불짜리라 하였다는 그 경치에 감탄하고 있다.

 


꿈의 나라/ 해양공원
다음날은 홍콩 섬의 동남아 최대의 공원이라는 해양공원(海洋公園)을 관광하기로 된 날이다.
해양 공원은 우리나라 에버랜드와 같은 대형 놀이 공원이다.
세계 최대라는 산호 수족관과 돌고래 쇼와 판다곰과 중국의 역사와 문물을 볼 수 있는 집고촌(集古村)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케이블 카(登山纜車)를 타고 나무로 꾸며 놓은 해마(海馬) 쪽을 향해 시원한 푸른 바다와 해안을 굽어보며 산 능선을 넘어 전망대에 오르니 홍콩의 참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다시 회전하며 올라가는 해양 마천탑(海洋摩天塔)에 오르니 맞추어 불어오는 훈풍 속에 아열대 지방인 이곳은 꽃을 앞세워 봄이 와 있었다.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성격대로, 홍콩에는 세계에 내놓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앞에서 말한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하루 3만 명을 소화할 수 있다 하는 길이 80m에 넓이 24m에 달하는 세계 제1의 선상 레스토랑. 하루 평균 한 편이나 제작된다는 홍콩 영화. 91개 국가가 개설한 주 홍콩 영사관. 10만 명당 432명의 친절한 경찰. 남자 77세 여성 82세나 되는 평균 수명. 연간 총 104억 달러를 웃돈다는 마권(馬券) 판매액 등이 그러하였다.
정상 조망 후 해양 공원 해양관(海洋館)을 관람하였다.
3층에서 1층까지 나선형으로 따라 내려가면서 열대어를 감상하도록 되어 있는데, 규모에 걸맞게 1m나 2m을 넘는 커다란 고기들이 떼 지어 유유히 원통형 이 커다란 수족관을 돌고 있는 세계 최대의 수족관이다. 수족관의 진귀한 물고기에 마음을 뺏기고 구경하다 보면 어느 결에 1층에 도달하게 되는데 산호섬의 바다 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잠수함을 타고 깊은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환상적이 분위기를 자아내게도 한다.
여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4,000여 마리의 진기한 커다란 물고기가 떼 지어 몰려오고 몰려가며 관광객을 즐겁게 하고 있다.
작은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 것은 큰놈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인 듯한데 이 많은 고기의 먹이는 무엇일까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물개 쇼의 묘기를 관람하고 에스컬레이터에 섰다. 갑자기 오는 비를 긋기 위함인가 푸른 지붕이 쭉 아래로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 800m나 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고 홍콩이 자랑하는 옥외 에스컬레이터가 바로 이것이다.


인공 해수욕장/ 리벌스베이
리벌스베이(淺水灣)는 홍콩 최대의 해수욕장으로, 중국 본토에서 모래를 사다가 만든 인공 해수욕장이다. 때때로 상아가 나타나 사람의 팔다리를 떼어 가곤 해서 바다에 반달 모양으로 빙 둘러 그물로 막아 놓고 있다.
해안에는 천후 묘가 있는데 주로 도교와 연관된 민간 신앙을 구조물로 만들어 놓은 장수문(長壽門). 인연석(因緣石)과 월하노인(月下老人) 등이 있었다. 월하노인이란 월하빙인(月下氷人)이라고도 하는데 부부의 인연을 맺어 준다는 도교에서의 전설상의 노인이다.
그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정재신(正財神)비였다. 여기 온 사람이 이 정재신(正財神)을 두 손으로 정성껏 쓰다듬은 다음 옆에 있는 노란 황금 모양의 여의주를 쓰다듬고 두 손을 주머니에 그대로 넣으면 재물이 들어와 쌓인다고 하니 아무리 동화 속의 이야기 같다고 하나 어찌 무심히 지나칠 수 있겠는가.

 

먹을 수 있는 걸 다 먹는 사람들/ 중국인
중국 사람들은 돈을 버는 목적 중에 하나가 먹기 위함이라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먹는다. 네발 달린 것은 책걸상만 빼고, 두 발 달린 것은 사람만 빼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만 빼고, 다 요리를 만든다는 광동 요리가 꽃핀 곳이 바로 이 홍콩이다.
이곳에서 제일 비싼 것은 주택과 담배이다. 만약 홍콩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한국에서 선물로 사서 가려거든 한국산 홍삼과 담배를 사가시라.


월세 1,000만원 아파트
집은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좋아야 하고 그보다는 풍수(風水)가 더 좋아야 한다.
너무 비싼 집 값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전세는 없고 월세뿐인데 8평 10평 등 소형 아파트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는 풍수(風水)가 좋은 곳의 아파트는 소형이라도 월세가 1,000만원 넘는 곳이 있다.
홍콩은 지역적인 조건이나 기후가 결코 좋은 나라가 아니다.
홍콩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시야를 막아서는 건물은 상가 1. 2층을 제외하고 그 이상은 거의 아파트로 시커멓게 우중충한 건물로, 불에 그슬린 듯한 건물 창가에 보기 싫게 지저분한 옷가지와 담요를 널어놓았다.
아열대 지방의 다습한 날씨로 인하여 곰팡이가 선 것이다. 우리가 묵은 소위 5성 호텔이라는 곳도 좁고 퀴퀴한 곰팡냄새가 난다. 그래서 홍콩에서는 어느 건물이나 24시간 에어컨을 가동시키고 있다.
여름에는 시원한 실내에서 지내다가 밖에 나서 만나게 되는 아열대 고온 다습한 기온 때문에 그 유명한 홍콩 감기에 걸리게 된다.
새벽에 거리에 나가 보니 음식점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냉장고에 보관할 수 없는 음식 문화로 인해 그날 것을 그날 해결해야 하는 기후 탓에, 아침은 아예 출근길에서 외식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집이 작은 이곳에서는 부모가 따로 살아서 가족끼리 모임이 있다면 음식점에서 만난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음식 문화가 발달하여, 인구 700명 당 식당 하나였다.

 

자가용이 없어야 편한 나라
이곳 모든 사람들은 자가용이 거의 없다. 서울보다 약간 큰 좁은 땅덩어리에 700여만 명이 사는 나라는 세계 8대 무역국 중에 하나다.
그 관광객만도 1년에 1,000만 명이 넘게 찾아오는 이 나라 거리에는 주차 할만한 곳이 없고, 교행조차 아슬아슬한 좁은 길뿐이다. 우리가 이용한 관광버스도 관람을 마치고 약속 장소를 정하여 연락을 하고 기다려야 달려 왔다.
일반 통행이 잦고 주차비가 턱없이 비싸고 게다가 자가용은 제약이 아주 많다. 그래서 대중 교통기관이 발달된 나라였다. 어느 곳이나 연결해 주는 2층 버스, 홍콩 명물 ‘땡땡’이라는 2층 전차, 지하철 등 대중교통 기관이 발달하여서 자가용보다 편하고 더 빠르다.


홍콩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들
홍콩 사람들은 붉은 색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색깔이라서, 노란 색은 황금을 상징하는 것이라서, 빨강 노랑을 좋아하고 흰색, 흑색은 죽음과 연관된 색이라 하여 싫어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쉽다는 발음의 ‘둘', 출산을 뜻하는 ’셋', 번영을 뜻하는 ‘여덟', 영혼의 상징인 ’아홉'은 행운의 숫자라 하여 좋아하지만, ‘하나'는 외로운 숫자, 죽음과 같은 발음 ’넷'과 ‘일곱'은 아주 싫어한다. 나쁜 이미지를 주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죽음을 향해 간다고 생각하기에 불행을 상징한다 하여 시계를 선물하는 것을 꺼린다.
의식구조가 우리와 전혀 다른 것 몇 개를 홍콩 여자 편에서 조사해 보았다.
홍콩 여자는 ‘네가 자식보다 낫다'라는 말을 좋아하고,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한다. 한국에서는 미용사의 90% 이상이 여자이지만 홍콩에서는 미용사의 98% 이상이 남성이었다.


인간의 힘을 실험하는 나라
홍콩의 모습은 흔히 천의 얼굴을 가진 곳이라고 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 바로 뒤편에서, 관상쟁이가 손금이나 사주를 보면서 토속 신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고 빌어 보는 전통과 풍습이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나라였다.
나는 요번 여행에서 서안과 계림을 통해 홍콩에 왔다.
서안(西安)에서 진시황(秦始皇)의 자기만을 위한 역사(役事)에 분노하였고, 계림(桂林)에 와서는 자랑 말라는 경치를 가린 뿌연 연무에 실망하였으나, 여기 홍콩에 와서는 척박한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고 이룩한 인간의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홍콩은 한자로 향항(香港)이다. 홍콩이 향나무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항구란 뜻이라면 귀국하여 우리는 홍콩의 어떤 향기를 기억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언제나 에어컨을 켜고 살아야만 하는 홍콩, 물을 사 먹어야 하는 나라에서 금수강산(金水江山)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동안 머리 속에 맴돌던 시조를 쓰면서 그리운 내 조국 금수강산(錦繡江山)을 향하였다.

부자가
작은 땅에
땅 부자
부러워하게
지워 놓은 저택 홍콩
꾸며 놓은 정원 홍콩
건물은
콩나물이 되고
기후는 홍콩 감기 되고
-2001년 2월 17~22일 중국 여행길에서

 

 

 

 

 

 

 

 

Ⅳ.1초에 4원 북유럽 여행
북구여행 준비
요즈음 내 머리는 온통 북유럽으로 가득 차 있다.
수학여행 떠나는 초등학교 어린이처럼 신혼여행 떠나는 신랑처럼.
러시아를 거쳐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여행에 투어 비용만도 일인 당 거금 310만원을 투자하였다.
이 돈이면, 아내가 나보다 더 가까이 사는 디지털 TV를 대형으로 살 수도 있고, 여름을 괴롭히는 해결사 에어컨도 살 수 있고, 그토록 열망해 오던 디지털 카메라를 최신형 최고급으로 살 수 있다.
‘칠순에나 내지-’ 하며 미루어 놓은 내 문학 작품집을 호화 장정으로 하여 지금 당장 꾸밀 수도 있고,
차 없는 아들에게 중고차 키라도 건네어, 입이 딱 벌어지게 할 수도 있다.
실업자가 백만이 넘는 어려운 시대에 외화 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지만, 우리나라 여행사인 KAL기를 타고 가서, 거기에 있는 한국 식당에 가서, 현지에서는 특식이라는 한식을 먹으면서, 한국 가이드나 교포의 안내를 받으며, 한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사주며, 잠만은 다른 나라 호텔에서 자는 건데 뭘-. 하는 생각은 위안이 되었다.
퇴직금을 이렇게 축내도 되겠는가 하지만, 집을 팔아 가족과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난 어느 작가의 소식은 망설이는 나에게는 커다란 용기가 되어 주었다.
어느 누구는 2,000만 딸라(260억)를 주고 8박 9일 동안 우주선을 타고 여행도 떠나는 세상이 아닌가.
요번 우리의 여행은 아내는 회갑 여행이고, 나는 문학 기행이다.
여행은 젊은 사람에게는 교육의 일부요, 나이든 사람에게는 경험의 일부라고 영국의 수필가 베이컨(Bacon)은 말했다.
그래서 책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열심히 정말 부지런히 자료를 모으고 있다. 두고두고 기억할 경험을 만들기 위해서다.
여간한 결심이 아니고는 우리네 같은 서민이 가볼 수 없는 먼 북유럽 다섯 나라에서의 견문으로, 아내에게 바치는 기행문 다섯 편을 쓰고 싶다.
해외 기행문을 써 놓고 보면 가장 큰 애독자가 함께 다녀온 이들이다. 다녀온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보태 주고, 찾아갈 사람에게 행복한 꿈을 더해 주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천국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 천국을 지옥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천국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거라고 믿어 온 사람이다.
이 지구라는 나라에서 가장 천국처럼 사는 나라가 머지않아 아내와 함께 만나게 될 북유럽 나라들이라고 들어왔다.
숲과 호수의 신비의 나라 핀란드.
나라 자체가 거대한 자연공원이라는 스웨덴.
똑바로 펴면 지구 둘레의 반이 넘는다는 해안선을 자랑하는 노르웨이.
북구에 가서 백야(白夜)가 어떤 것인가, 오로라가 무엇인가, 빙하가 만들어 놓은 그 찬란한 피오르드의 세계가 어떻게,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고 오리라.
문학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덴마크- 하면 안데르센이 꼭 따라 다녀야 하는가. 어떤 힘이 국민소득 2~3만 불의 복지국가인 지상의 낙원을 만들었는가를 보고 배워 오리라.
여행가서 종종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투던 나를 접고, 손잡고 세계 강산을 구경하면서 아내의 회갑 기념 여행에 즐거움을 보태어 주면서, 이렇게 속삭여 주고 싶다.
“사랑보다 더 좋은 것 줄께."
“그게 뭔데?"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


누가 못사는 나라 보러 왔나/ 러시아
초등학교 시절 해방을 맞은 우리에게 반공 교육의 대상이었던 소련, 그 무서운 큰 나라의 수도 모스크바에 와서 우리가 처음 느낀 것은 가난과 초라함이었다. 모스크바(영어로 모스코바)의 관문이라는 공항 시설은 천장은 낮고 낡고 침침한데다가 퀴퀴한 냄새마저 난다. 그 음침한 분위기 속에 세월아 너 가라 식의 느린 느릿한 무성의한 입국 수속은 시차에 지친 우리들을 더욱 짜증나게 하였다.
그 사이 들려 본 화장실의 불결함이란. 검은 휴지에다 망가진 시설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물은 흙탕물이다. 그런 것을 보러 왔으면서도 속절없는 불평이 맴돌고 있었다. 누가 비싼 돈 드려서 얼마나 못 사는 나라인가 보러 여기까지 왔나.
서울의 2배라는 모스크바 시내에 들어서니 길 양옆에 아파트가 보인다. 1층은 상가로 된 같은 모양의 소련식 아파트다.
거리는 비교적 깨끗하였다. 이른 새벽이면 청소부가 거리의 오물을 차도로 쓸어 내고, 그것을 공기 청소차 몇 대가 치우고 지나가면 바로 그 뒤에서 살수(撒水車)가 물을 뿌려서 저렇게 거리가 깨끗하다 한다.
차의 정체는 서울을 뺨칠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썩어 가는 중고 자동차가 길을 메웠고, 도중 고장 난 차가 길을 막고 서 있다. 길가 건물 옥상 곳곳에 선 대우와 LG의 입간판이 우리들의 가슴을 뿌듯하게 하는데, 모스크바대학 박사과정에 다닌다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한국이 일본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부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듣기 싫지 않은 이야기였다.
정체가 심한 곳에는 어김없이 늙거나 병든 이가 목발을 집거나 휠체어를 타고 동냥을 하고 있고, 건장한 청년들이 차 사이를 오가며 꽃을 팔고 있었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을 보다가 시내에 즐비한 고색창연한 제정 러시아의 우람한 건물들을 마주치게 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부자로 살던 사람이, 살던 바로 그 집에서 열심히 가난을 사는 것이라고.
국민소득 2,200불의 나라. 상위 층 10%에 하위 층 70%로 중산층이 거의 없는 나라. 1998년 IMF를 맞은 나라. 의사 교수의 월급이 월 100불(13만원 정도)이고, 교통순경의 수입이 30불로 박봉을 보충하기 위해서 적당히 뜯어먹고 사는 나라가 러시아였다.
한적한 도로를 질주하다 보면 반대편 차가 불을 깜빡 깜빡 신호하여 준다. 그러면 얼마 안 가서 커브 길에 어김없이 러시아 경찰이 함정 단속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권총 차고 오가는 차를 붙들어 노상강도 노릇을 하던 10여 년 전 한국 경찰의 모습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지금도 저렇게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간 북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한 번도 만나 볼 수 없던 경찰들이.
유심히 살펴보면 차가 지나갈 때 손짓하는 사람이 있고 그러다 함께 타고 가는 사람이 눈에 뜨인다. 노랑 색깔의 영업차는 너무 비싸고 드물어서 자가용을 세워 흥정하여 타고 가는 것이다. 그것이 허용되는 나라인 모양이다.
길가는 사람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장을 하고서도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비닐 속에는 우리가 가방에 넣고 다니는 일상 용품이 들어 있다 한다. 가방을 살 수 없는 여유가 주원인이지만, 러시아 상점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물건을 사고 나서 물건을 넣을 봉지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생긴 빠겟뜨 문화(봉지 문화)의 모습이었다.
왼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오른 손에 맥주 콜라 보드카 병을 들고,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며 거리를 산책하는 사람들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러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병문화라 한다.
과거에 세상을 지배하였고 인공위성을 제일 먼저 쏘아 세상을 놀래게 한 그 저력은 어디로 가고, 소련은 이렇게 사분오열되어 그 중에도 가장 큰 나라라는 러시아가 왜 이 모양으로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생각해 봐라. 소유의 개념 없이 일을 해야 하고, 일의 양과 질에 관계없이 똑같이 월급을 준다면 누가 힘써 일하겠는가. 공산주의란 모든 생산 수단이 자기 것이 아닌 사회의 공유가 되는 사회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똑같은 보수를 받는다는 것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이다. 통제 사회에서 자유 사회로, 단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우리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바뀐 세상에서 말이다.
아무리 과거의 꿀 같은 이론이라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러시아 여인이 그 미를 앞세워 성(性)을 팔러 한국을 찾아와서 서울과 대도시 밤거리를 배회하는 고달픈 신세로 전락한 나라가 되고 만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히프/ 모스크바. 서커스
러시아 여인이 아름답다는 말은 이곳에 오기 오래 전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파란 눈, 오뚝한 코, 새하얀 피부, 작은 얼굴, 날씬한 몸매에 어딘지 모르게 숨겨진 동양적인 모습에다 알맞은 키. 러시아 여성들은 세계 남성들이 동경하고 여성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성이었다.
러시아 여인은 왜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울까?
내가 알기에는 옛날 한 동네 사는 총각 처녀끼리 결혼하는 것보다 예로부터 피가 섞이지 않은 아주 먼 동네 사람들끼리 결혼한 분의 자녀들이 인물 좋고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1238년에 몽고의 침입과 오랜 지배는 동서양이 피를 섞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때문에 트기가 예쁘다고 하듯이 그래서 러시아 여인들이 이렇게 예쁘다는 것이다. 우생학적으로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들 여인 중에서도 오늘 가서 본 서커스에 출연한 여인들은 선택된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방년 18세 내외의 처녀들이다.
거기에 운동으로 몸매를 가꾼 처녀들이고, 공연 중 모두가 히프를 드러낼 수 있는 한 드러낸 차림의 모습이었으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남정네들에게는 눈을 깜빡이는 것이 아까울 정도의 눈요기라. 여독을 강 건너 보내 놓고 숨소리를 죽이고 서커스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까워 금하는 사진 촬영을 체면 불구하고 몰래 카메라 하다가 시집가면 미워진다는 늙다리 러시아 여인에게 고만 들켜 버리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중단하고 말았다.
서커스는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스스로 자랑할 정도로 러시아인들은 좋아한다.
국민이 좋아하는 것은 국민 예술이다. 그래서 ‘ 예술의 주인은 국민이다 ’ 라고 레닌이 말한 것을 보아도 그 역사가 퍽 깊다.
단원들은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대를 이어 가면서, 저와 같은 기술과 예술에다가 여체의 미를 더하였으니, 아름다움을 탐하는 이 노(老) 시인의 휘둥그레진 눈을 누가 있어 노안의 주책이라는 차원으로 나무랄 수 있으랴.

 

붉은 광장/ 크레무린
모스크바의 심장과 같은 곳이 붉은 광장이다. 이곳은 러시아 역사의 살아 있는 현장이 되는 곳이다.
붉은 광장이란 말은 메이데이나 혁명 기념일에 걸린 붉은 현수막과 사람들이 들고 나온 붉은 구소련의 깃발로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원래 러시아어인 크라스나야란 말은 붉다 와 아름답다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그래 그런가. 이 붉은 광장은 크렘린과, 레닌 묘, 수많은 탑들, 성바실리 사원, 굼 백화점 등에 둘려 싸여 있어 음침하리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처음 가본 우리들의 눈에는 전체가 아름다움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중 우리들의 눈을 끄는 것은 건물로는 이 러시아에서 제일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성바실리 사원이다.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이 건물을 지어 놓고 보니 너무나 아름답고 멋있어서, 다시는 이런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성당을 설계한 자의 눈을 뽑아 버렸다는 비화 맺혀 있는 이야기 탓일까. 그런 유미주의 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도 그 붉은 모습의 양파 모양의 8개의 지붕들은 우리의 넋을 뺏을 만하였다.
굼 백화점을 가는데 어디선가 종이 울리고 있다. 이곳에 오면서 통과한 삼위일체 종각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였다. 탑의 사방에 대형 시계가 부착되어 있어 매 시간마다, 15분마다 한 번씩 울려 준다고 하는.
크렘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구원의 문' 위의 맨 꼭대기에 있는 루비별은 크기가 3.75m나 된다는데 그 안에 5,000볼트의 전구가 있어 풍향 따라 360도로 회전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대포 왕∙종의 왕/ 크레무린
크렘린 근처에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대포의 왕과 종이 제정러시아의 강성했던 시절을 보여주고 있다.
대포의 길이만도 5.34m이고 무게는 40t. 그 앞에 놓인 대포알의 지름은 105cm 무게가 1t 이나 된다. 종의 무게가 200t에 높이가 6.14m 로 그 주조 공장의 화재로 한쪽이 깨어져서 전시되고 있다. 이 대포와 이 종들은 한 번 사격도 해보지 못하고, 울려 보지도 못한 체 왕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성당인가 무덤인가/ 우스펜스키 사원
저기 보이는 금빛 노란 돔은 무슨 사원일까? 거대한 사원 위의 비잔틴 문화의 양파 모양의 돔을 장식하고 있는 색깔이 노란 것은 보이는 것처럼 모두가 순금이다.
나폴레옹 군이 후퇴할 때 뺏은 금 300Kg과 은 5톤으로 사원 위의 양파 모양 돔을 장식을 한 것이다.
이 성당이 몽고의 지배를 벗어난 기쁨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는 크렘린 최고의 건물인 우스펜스키 사원이다.
성당 내부의 벽들에 당시 화가 1,000여명이 장식했다는 ‘이콘' 화는 그 잔형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각 벽에는 모스크바 최초의 주교였던 ‘뾰뜨르의 관’을 위시해서 유명했던 주교들과 신부들의 관들이 놓여 있다. 쇠로 된 관이었다. 우리나라 성당에 들어서 느껴지던 성스러웠던 마음과는 달리 이름처럼 성모승천 사원은 무덤에 온 듯 음침하다. 이곳은 성당인가 무덤인가?

 

죽어서 지옥도 못 갈 놈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공항에 내리니 우리 일행을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짧은 1시간 40분 사이에 모스크바를 떠나올 때 우려하였던 대로 벌써 우리 일행의 가방에 검은 손이 뒤지고 지나간 것이다.
이 공항에서는 도둑이 심하다 하여 스카치테이프로 단단히 봉했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뒤쪽을 뜯은 것이다.
내 가방은 짐을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가방 바퀴 부분이 파손되어 끌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못쓰게 되었다.
1초에 4원이나 들인 아까운 여행은 이로 인하여 30여분 이상 지체되고 있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공항 당국에서는 책임지려는 사람 하나 없이 조사하겠다는 말뿐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항시 있는 일이기 때문인 모양이다.
공산주의는 가난과 도둑과 사촌인가. 예로부터 장사 잘하기로 이름난 중국 상인들이 꽃게 속에 납덩이를 넣더니, 여기서는 도둑질이라. 욕이 절로 난다. 죽어서 지옥도 못 갈 놈들 같으니-.

 


세계 3대 미술관에서/ 에르미타쥬 박물관
러시아 여행에서 모스크바 다음에 들려야 하는 곳이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우리들의 귀에 익은 레닌그라드를 원래 이름대로 다시 고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젖줄 네바 강 델타 지역에 형성된 자유 섬, 크고 작은 101개의 섬과 65개 이상의 강과 양안(兩岸)을 500여 개의 다리가 연결해 주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북방의 수도(水都)'라는 애칭으로 불려 왔다.
핀란드 만에 있는 스웨덴에게 빼앗겼던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이 땅에 맨 처음 관심을 둔 이는 표트르 대제였다.
문화가 발달한 '유럽으로의 열린 창'을 건설하기 위하여 여기에 요새를 건설하고, 계획도시를 건설하고 모스크바로부터 수도를 이전하였다.
이리하여 18C 말기까지만 해도 인구 22만의 한촌이 제정러시아 200년 동안 수도로 있으면서 지금과 같은 인구 470만의 세계적인 대도시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 도시는 보수적인 고전적인 낭만적인 도시로 알려져 왔다.
흔히 모스크바를 ‘러시아의 심장'이라 하고 상트페테르스브르크는 ‘러시아의 머리'라고 일컫는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유리한 여기서, 서구주의 운동의 선두를 달려 왔고 따라서 고도로 발달한 학술, 문학, 음악, 연극, 발레 등의 중심지로 문화의 도시, 예술의 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는 만리장성을 보아야 하듯이, 이집트에 가서는 피라미드 스핑크스를 보고 와야 하듯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에르미타쥬 박물관이다.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의 3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미술관은 역대 황제들의 처소인 겨울 궁전이라는 ‘동궁(冬宮)'과 4개의 건물이 낭하로 연결되어 있다.
400여 개에 이르는 방과 홀의 전시품을 다 보기 위하여서는 40 리를 걸어야 한다. 에카테리나 대제가 베를린 상인에게서 샀다는 유럽의 세계적인 대가의 작품 225점을 위시해서, 회화, 조각으로부터 장식과 응용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무려 3백만 점에 이른다. 이것을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등으로 고대 미술품을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미술에 식견 있는 사람이 있어 이를 다 보려고 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하나의 전시품을 보는데 1분을 잡는다. 하루에 8시간씩 박물관에 매일 들른다 해도 15년이나 걸려야 전 소장품을 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1층에서 3층까지 1시간 반에 후딱 보고 나왔다. 이것이 투어의 매력인가 투어의 서운함인가.
내 비록 미술에 조예가 없고 미술에 무식할 정도로 아는 바 적다하더라도, 저기 걸린 웬만한 그림 하나의 값으로는 궁색을 떨지 않고도, 평생을 아내와 함께 원하는 곳의 어디나 세계를 돌며 자고 먹고 마실 수 있는 가치 있는 고가의 예술품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래서 귀에 익은 그 소장품을 캠코더에 담아 올 때의 감격이란. 그때마다 가보(家寶) 하나를 여기서 마련하는구나 하였다.
해외여행 중 서양 미술에 접할 때마다 귀국하면 최소한도 미술 감상만이라도 할 수 있는 식견은 길러야지-, 하다가도 돌아와서는 흐지부지 하곤 하였는데 여기 세계 명화들의 원화(原畵) 앞에 서니 또다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게 되는구나.
후진국에 갈 때마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도 촬영을 금지 당하는 것이다. 바다 건너 저 하늘을 날아 이 먼 이국땅에 이것을 보러 찾아온 관광객에게 어째서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는 캠코더 촬영을 왜 못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 ‘꽃을 가진 성모'와 라파엘로의 ‘성모상', 미켈란젤로, 스페인의 루벤스의 ‘무지개가 걸린 풍경', 렘브란트의 ‘천사와 성가족'을 만나고, 프랑스의 세잔, 고호 등을 만나 도둑 촬영의 스릴로 행복하였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 거기에 3층 복도에 걸려 있는 김흥수 화백의 ‘승무'라는 작품이 우리의 발길을 한참이나 머물게 하였다.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증명서/ 표트르 바브로크 성당
122.5m나 되는 높이의 표트르 바브로크 성당은 1703년에 지었다. 이곳에는 제정러시아의 최후의 비극의 황제 니콜라이2세와 그의 아내와 세 딸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
그보다 더 유명한 신화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 성당에는 불행하게도 화재가 두 번이나 났다. 그래서 그 꼭대기의 피뢰침이 떨어져 나가는 등 윗부분이 많이 망가져서 수리를 하여야만 했다.
건축술이 발달하지 못한 17,18C 당시에는 그물이나 치고 수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는 생명을 건 모험이기 때문에 누구나 꺼리는 일이었는데 데리킨 이라는 건축가가 표트르 대제에게 조건부로 자기가 하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유명한 술꾼이었다.
"신이 책임지고 수리하겠사오니, 완성되거든 평생 동안 아무 데서나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수리는 완성되고 왕은 약속하였던 대로 증서를 주어 전국 어디서나 공짜로 술을 마실 수 있게 하여 주었다.
소원대로 마음대로 술을 마시며 다니던 어느 날, 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증서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표트르 대제를 찾아가서 분실 사유를 고하니,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도록 목에다 문신을 하여 주었다. 그로부터 러시아인들은 손가락으로 목을 툭툭 치는 것이 술 마시러 가자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만약 데리킨처럼 그런 증서를 가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만 원어치만 술 먹자고 '일만(一萬)'이라 호(號)하는 궁색을 떨지도 않았을 터이고, 길가 좌판에 죽치고 쭈그리고 앉아 막걸리나 퍼먹는 대신에, 카페나 양주 집으로 다니면서 여성 편력도 심심찮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이대로가 오히려 행복한 것 같다.

 


세계 5대 성당의 하나/ 이삭 성당
양파를 거꾸로 놓은 듯한 웅장한 금빛의 둥근 지붕이 특징인 성당이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에서 제일 높다는 건물이 바로 이삭 성당이다.
19C에 41년 동안 50만 명 노동자를 동원하여 지어 놓은 성당이었다.
모래가 쌓여 형성된 네바 강 삼각주에 세워 있기 때문에 지반이 아주 약하여서 이를 보완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성당 밑을 가로 세로로 철 490톤과 주철 990톤, 구리 70톤과 은 30톤의 청동으로 2만 5천여 개 기둥을 만들어 저렇게 우람하게 박아 놓았다. 이렇게 하여 길이가 111m 폭이 98m로 세계 5대 성당의 하나 이삭 성당을 지었다.
이 성당은 1만 4,000여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커서 제정러시아 교회가 얼마나 그 권위가 막강했던가를 과시하는 듯하였다.

 


여름 궁전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 페떼르브르그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0Km를 달려 핀란드만을 끼고 형성된 작은 도시 페테르호프의 여름 궁전에 이르니, 갑자기 애국가가 그 무서웠던 소련 적성 국가 이국 하늘에서 울려 퍼진다.
우리들이 가는 길목을 지키고 기다리고 있던 약삭빠른 거리의 악사들이었다.
이들끼리는 서로 약속을 했는지, 더 가서는 아리랑을 그 다음 장소에서는 봉선화를 연주하여 마음 약한 우리들의 손을 주머니로 향하게 한다.
마지막까지 그냥 지나치기에 마음이 찔려 1달러를 주었더니 자기들 옆에 와서 사진 찍고 가라고 나팔을 부는 자세를 취해 준다.
우리나라에서의 세종대왕 정도로 러시아에서 유명한 표트르대제가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에게 승리한 기념으로 짓고, 여기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표트르의 궁전'을 보통 여름 궁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을 찾는 외국 관광객만도 하루 평균 1,000여 명이라 한다.
이 여름궁전의 광대한 부지에는 대궁전을 중심으로 20여 개의 작은 궁전과 크고 작은 대리석 석상과 분수 등 이 있고, 수목 사이에 안배된 7개의 공원이 있어 러시아의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들른 분수공원은 주로 보리수나무와 연못을 이용하여 영국식으로 만든 상공원과, 해안에 프랑스식으로 이루어진 하공원으로 나누어져 있어, 장난분수, 요술분수, 대분수 등에서 갖가지 모양으로 요란하게 물을 뿜어 올리고 있다.
18C초 건설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서 수압을 이용하여 분수를 움직이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 저수지에서 수영장으로 물을 끌어 16m 경사진 아래 공원의 분수에다 물을 공급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중 장관은 삼손분수라는 대 폭포였다. 도금한 많은 동상과 화병과 접시 등에서 수많은 분수가 한데 어울려 높이 물줄기를 뿜어 올리고 있는데, 그 아래 연못 가운데에는 사자의 턱을 찢어 여는 모습이 있다. 바로 삼손분수였다.
강력한 한 줄기의 굵은 물줄기가 그 벌려진 사자의 턱을 나와 20m까지 시원하게 치솟아 올라간다. 표트르대제는 삼손이 자기를 닮았다고 늘 주장하였다 한다.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색 벽과 흰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는 건물이 있다. 이것이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여름 궁전 '표트르 대궁전'이다.

 


해외 여행가서 부부 싸움하는 바보
이상하게도 우리 부부는 해외여행 중에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젊어서는 퇴근 후에 돈 떨어져서야,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 작은 집 찾아 어슬렁어슬렁 돌아오던 내가, 그래서 깊은 밤에만 늘 만나 오던 아내와, 해외여행 나와서 온 종일 며칠씩 함께 지내다 보니 옛날의 아내가 아니다. 2, 30년을 함께 살아오며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아내가 아니었다.
한평생 콧소리 섞인 애교 소리 한번 들어보지 못했다 해서, 술 안 마시고 돌아오는 날이 거의 없다 해서, 서로 다툴 때 다음 다시 태어나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던 말이 정말이었나?
왜서일까? 여행할 때마다 비디오 촬영 한답시고 버스 맨 앞자리에 혼자 앉아 가는 비정한 이 남정네 때문에 함께 간 사람들에게 체면을 구겨서인가. 아니면, 아파트로 이사 와서 벌써 6년째 네 방, 내 방하고 따로 자서 정이 멀어 져서인가.
특히 기념품 상점에서 시비가 오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부부들은 모양 좋고 사이좋게 잘도 붙어 다니지만 우리 부부는 각각이다.
그러다가도 내가 무언가를 사려고만 하면 어느 틈에 쏜살같이 달려와서 훼방을 놓는 바람에, 아무리 싸우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벼르고 왔건만 속이 왈칵 뒤집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귀국 길에는 우리 부부는 늘 싸웠다.
내가 '다시는-' 하면은 이에 질세라 저도 '나도-' 하면서 맞받아 되 치며 도끼눈을 부라리곤 하였다.
그래서 해외여행 떠날 때 우리 자식들의 배웅 인사말도 '싸우지 말고 잘 다녀오세요.' 하는 식이다.
그래서 싸움의 주원인이 달러 때문이라고 애꿎은 달러에게 죄를 물어 공평하게 똑같이 나누어 각자 챙겨 가지고 떠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그 효험을 약간은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투어 비용만도 무려 1초에 4원이 넘는 북유럽 여행이라. 비싼 돈 치르고 간 해외여행에서 부부 싸움질은 얼마나 큰 낭비인가 해서 단단히 마음에 다짐하고 떠나왔다. 아내 회갑 기념 여행이니 정말 싸우지 말아야지-.
다음은 인터넷에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내게 일만(필자)이 생각하는 바보는 어떤 것이냐 물어 온 것에 대한 나의 답장이었다.

1. 아내 자식 자랑하다 병신이 되고 싶다는 남자.
2. 죽도록 일하고도 월급을 아내에게 빼앗긴 남자.
3. 그 돈으로 옷 사주고 밥 사줄 때 감격해 하는 남자.
4. 아내보다 빨리 죽어야 행복하다는 남자.
5. 자식에게 목돈 뺏기고도 후회 안 하는 남자.
6. 비싼 돈 내고 해외 여행가서 부부 싸움하는 남자
7. 그래서 나는 바보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대표적인 보기 ♂→ 일만

 

Ⅴ. 핀란드 기행
유럽 인이 제1로 선호하는 관광지/ 헬싱키
러시아에서 입출국이 그렇게 까다롭더니만 핀란드 입국 수속은 물 흐르듯 너무 쉬웠다. 한 마디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우열을 말하여 주는 듯했다.
수도 헬싱키를 향해 달리는 푸른 초원은 국경을 넘으면서 1시간이나 뒤로 시계를 막 돌려놓은 밤 10시가 훨씬 넘었건만 서녘 하늘에 노을이 한창이다. 백야(白夜)인 것이다.
백야(白夜)라는 것은 고위도(高緯度) 지방에서 해뜨기 전 또는 해진 뒤에 볼 수 있는 박명(薄明)현상이다. 박명이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뒤 주위가 훤한 정도로 밝은 현상이다.
하지(夏至)를 중심으로 한 기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 18도 이하로 지지 않기 때문에 밤에 박명(薄明)이 계속되는 것이다.
밤 12시가 넘어도 책을 읽을 정도로 밝았고 새벽 3시부터 또 그러하였다. 지금까지 알아 왔던 밤의 의미를 다시 정의 해야겠다

낮같은 밤 있다는 건
밤 같은 긴 낮 때문
낮과 밤도 몰랐던
두려웠던 하루하루
밤낮을
다시 써야 하는
내 사전의 옹아리.
-백야

국경을 넘으니 흰색 바탕에 파란 십자가의 핀란드 깃발이 나부낀다. 백색은 흰눈을 파란색은 삼림과 호수를 상징한다. 이 북구 나라들의 깃발을 흑백으로 말한다면 좌측 상단에 십자가가 있는 것이 꼭 같다. 바탕의 색깔이나 십자가의 색깔이 각기 가를 뿐이다.
핀란드는 민족 중 93.5%가 핀 족(Finn)이다. 그래서 핀(Finn)족의 나라란 뜻으로 핀란드(Finland)라 한 것 같다.
정식 명칭은 핀란드어로 ‘수오미공화국(Suomen Tasavalta)로 늪과 호수의 땅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1.5배의 크기에 전 국토의 10%가 6만 개의 호수와 강이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겨우 500만 명으로 남북한 인구의 1/15 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뿌리 부분에 자리하고, 동서쪽에 구소련과 스웨덴의 두 강대국 사이라는 불리한 지정학적 요건 때문에 우리나라보다도 더 긴 750년간이나 양국의 지배를 받았다. 스웨덴에게 650년, 19C초에는 핀란드 인들이 송충이보다 더 싫어하는 러시아에게 다시 100여 년이나 탄압을 받으며 적개심으로 민족의식을 키웠다.
러시아혁명으로 1917년에 드디어 독립이 되자 전 국민이 똘똘 뭉쳐 국민소득 25,000불의 러시아는 물론 세계가 부러워하는 복지 국가를 이룩하여 그 한을 풀었다.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나라를 빼앗겼을 때 민족의 마음에 싹튼 것이 애국심이었다. 그 애국심을 키우고 지켜 준 것이 핀란드 고유 언어였다.
핀란드 국민들의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이가 핀란드 최고의 작곡가 시벨리우스다. 그래서 국민들은 지금은 헬싱키 최고의 관광지가 된 시벨리우스 공원(Sibeliuksen Puisto)을 만들어 놓고 평생을 조국 핀란드에 대한 사랑으로 살면서, 그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거기서 우리는 시벨리우스 두상(頭狀)을 만났다.
그 옆에 있는 24톤의 은빛 강철관으로 된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시벨리우스 기념비(여류 조각가 Hiltunen의 1967년도 작품) 앞에 서니 우렁차게 교향시 핀란디아가 울려 펴지는 듯하다.
오늘(2001년 6월 28일)자 신문을 보니, 핀란드는 작년에 이어 세계 국가적 부패 지수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 1위에 선정되었다. 우리나라는 창피하게도 91개국 중 42위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가 4위인데, 홍콩이 14위인데, 일본이 21위인데, 타이완이 27위인데, 말레이시아도 36위나 되는데 우리나라는 42위라니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다는 나라로 체면이 서는 이야기냐.
우리 다 함께 부끄러워하자. 부끄럼을 모르는 이를 철면피라 하지 않던가.

 

발트 해의 소녀/ 헬싱키
‘발트 해의 아가씨’ 또는 ‘북유럽의 흰 수도’로 불리는 인구 60만 내외의 아름다운 도시 헬싱키는 시베리아 철도와 서유럽 철도의 종착역이기도 하다.
헬싱키 하면 우리는 헬싱키 올림픽과 핀란드 사우나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동메달 2개로 만족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곳 상인들에게 코리아에서 왔다 고하니 88 서울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말한다. 스포츠의 힘이 얼마나 크고 그 위력이 어떠한가를 외국에 나와 보니 비로소 알 것 같다.
핀란드 사우나에 잔뜩 기대하였던 나는 새벽에 일어나 호텔의 사우나를 둘러보고 실망하였다. 한국의 웬만한 목욕탕 수준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핀란드 사우나 안에는 돌과 나무통이 있다. 충분히 달궈진 돌에 통 속의 물을 쇠로 된 구기로 물을 떠서 뿌린다. 그러면 솨 악- 소리와 함께 더운 스팀으로 실내 온도가 80°~ 90° 정도가 되면 몸이 뜨거워진다. 그러면 차가운 물 속에 텀벙 뛰어 들라고 풀장이 준비되어 있다.
원래는 통나무집에서 돌에 물을 부어 수증기로 몸이 뜨거워지면 자작나무의 작은 가지에 물을 묻혀 온몸을 두들긴 다음, 겨울 차디찬 호수에 몸을 던지는 것을 반복한다. 이것이 핀란드 사우나다.
전 국민 5백만 명밖에 안돼는 나라에 약 150만 채의 사우나 시설이 있다는 것은 핀란드에서는 사우나가 생활의 일부인 것을 짐작하겠다.
그러나 대형 욕탕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는 그 시설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캐나다 벤프 공원의 세계적인 온천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외치고 싶다. 사우나 시설을 보고 배우려거든 한국으로 오라, 한국으로.
헬싱키의 현관에 해당하는 남쪽 항구에 마켓 광장이 있다. 여기서 아침 일찍부터 발트 해에서 잡은 신선한 어패류를 비롯하여, 야채 등을 파는데, 시장이 오후 2시까지 열린다. 한국의 시골 장터와 어시장을 합쳐 놓은 것 같다.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40불이나 환전하여 가지고 한 잔 걸치려고 부리나케 달려갔으나 그만 환전한 돈을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환전소를 찾아 오가다가 속절없이 기다리는 일행과 합류하고 말았다. 알고 보니 주머니 깊숙이 모셔 두고 잃어버리지 않은 것을 열심히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이와 건망증은 친구인가.
이 일대는 헬싱키 관광의 요지라, 우리는 40만개의 정사각형 화강석 돌길을 따라 대성당으로 향하였다.
대성당은 헬싱키의 상징이 되는 교회로 핀란드 루터 파의 총 본산이다.
중앙청 같은 밝은 녹색의 돔과 흰 주랑(柱廊) 위 지붕 요소요소마다 동상이 있어 원로원 광장 너머 헬싱키 중심이라는 남항(南港)을 바라보며 서 있다.
광장 중앙에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있다. 러시아 지배의 흔적이었다.
최근 영국의 옵서버(Observer)지가 핀란드와 헬싱키를 유럽 여행지 1위로 선정했다니 유럽 인들이 비로소 핀란드의 미를 이제야 발견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처럼 핀란드를 대충 보고 지나쳐서인가.

 

호화 유람선에 사랑을 싣고/ 실야라인(silja line)
여행이란 기쁨으로 만났다가 아쉬움으로 헤어져야 하는 사랑 같은 것인가. 그 먼 곳을 찾아와서 단 하루만 핀란드에서 머물다가 헬싱키를 떠난다.
오후 5시경 핀란드를 떠나 내일 아침 9시 30분까지 타고 갈 호화 유람선이 실야라인(silja line)이다. 이 배는 58,400t 에 차량 400대와 승객 2,980명이나 실을 수 있다. 선실만도 985개(4인 1실)로 침대 수가 2,980개나 된다. 길이는 무려 203m 위로 갑판까지 7층이나 되는 호화 유람선이다.
선내에는 오늘 저녁에 식사와 각종 술을 마음대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전통적인 스칸디나비아 뷔페식당을 위시해서, 카지노, 사우나, 디스코텍, 면세점, 회의실, 무료 나이트클럽, 가라오케 등 부대시설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이런 호화 유람선을 타고 유람하는 것을 꿈이나 꾸었으랴. 그것도 아내와 함께 세계인들이 선망하는 북유럽 여행을 이렇게 즐길 수 있다니-. 산다는 것이 새삼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하다.
선 내 면세점에 들러 양주를 13병이나 샀다. 헬싱키에서 환전하여 가지고 주머니 깊숙이 모셔 두고 잃었다 해서 찾고, 시간 없어 못쓰고 온 핀란드 돈이기에 아낌없이 썼다. 여기 아니면 어디서 쓸 수 있으랴 해서다.
등산화 모양, 전구 모양, 만돌린 모양, 기타 모양, 삼각형 술병 등등 참 재미있게도 생겼다. 외화를 펑펑 쓰고 다닌다고 오해들 마시라. 내가 산 양주는 10cm 미만 크기의 장식용이니까.
이 미니 술병들을 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더 늙어 임종이 임박 하다는 낌새를 알게 된다면 이 병들을 하나하나 뜯어 마시며 오늘의 즐거운 이 여행을 생각하리라.
선창(船窓)을 통하여 지나가는 풍경이 너무 아쉽고, 다가오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그것들을 촬영하다가 보니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토바라기 가 손꼽아 기다리는 토요일이 아닌가?

성(性)을 잃은 아내에게
성을 내고 달려들면
삼십육계 줄행랑
이순(耳順)의 주책 이란다
급습하기도 하고
공갈과 협박에다 애걸을 더해도
언제나 불발탄
하여, 가엾은 몸을 이끌고
해우소(解憂所)에 서면
거울 속에 내가 욕을 한다.
예끼 놈!
-예끼 놈(1995년 작)

그러나 우리 아내가 아내란 이름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내를 열어 주는 날이 있다. 토요일이다. 그래서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고 사는 것처럼 나는 토요일을 바라고 사는 토바라기 다.
토요일이 가까워지면 아내에게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무슨 핑계를 잡아서라도 앵- 돌아서기 쉽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토요일이면 가끔씩 두 딸네가 들이닥치거나, 병약한 아내가 아프거나 하여 낭패를 당할 때의 서운하고 허전함이란.
허나 이 망망대해 이국 하늘 아래 그것도 바다 가운데 둥둥 떠 있는 우리 둘만을 위한 이 선실에 무슨 장애가 있고 어느 누구의 방해가 있으리오. 아내와 함께 여행 다니는 재미가 이것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을까-. 갈매기만 기웃거리며 지나갈 뿐이었다.
토바라기 의 소원이 풀렸구나 하였을 때 요란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일까?
기겁을 해서 부리나케 바지만 꿰고 문을 열어보니 함께 온 홀로된 대학 동창 친구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진다. 함께 술 한잔하자고 찾아온 모양이다. 주책도 없지-. 예끼! 사랑을 방해하면 어디도 못 가는 줄 알아? 애꿎은 욕이 나온다. 큰 일 날 뻔하였다.

 

Ⅵ. 스웨덴 기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도시/ 스톡홀름
어제 저녁 핀란드를 떠나온 호화 여객선 실야라인이 아침에 멈춘 곳이 스웨덴인데, 입국 수속도 밟지 않고 신기하게 그대로 나왔다. 거기가 바로 스톡홀름이었다.
북유럽의 나라들은 서로를 믿고 존중하며 사는 나라이라서 인가, 관광객의 진을 빼고 출입국 시키는 러시아와 비교하면 이런 선진국의 자부심이 자못 부럽기만 하다.
스웨덴은 유럽에서 4번째 큰 나라다. 한국보다 2.4배나 크고, 길고 가는 나라이다. 인구는 우리나라 1/9밖에 안 되는 900만 명으로 인구 밀도가 아주 낮다.
전 국토의 절반이 삼림지대로 호수만도 9만 6천여 개나 된다. 경작지가 10%뿐이지만 나라에서 지원하는 발달된 농업 기술로 하여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의 질을 누리고 사는 선진국으로 2,000년 IMD평가로 세계 국가 경쟁력 9위였다.
1810년대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것을 최후로 오늘까지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6.25사변 덕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일본처럼,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의 덕을 본 나라다. 싸움에 휩쓸리지 않아서 전쟁 중 호황을 누리어 선진국에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물의 도시 스톡홀름은 '물위의 아름다움'이란 이름 그대로 발트 해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곳의 14개 섬에, 53개의 다리가 하나의 스톡홀름으로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스톡홀름은 세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현대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섬보다 아름다운 곳이 있던가. 바다와 뭍의 어울림, 그 해안선 등등-. 그래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리어 지고 있다.
스톡홀름 주변에는 2만 4천 개나 되는 아름다운 크고 작은 섬이 있다. 거기에다가 중세 옛 모습을 간직하기 위하여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건물들은 바다에 둘려 싸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한데 어울려 환상적인 스톡홀름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자연 풍광에다 고풍스런 모습으로 인하여 스톡홀름은 북구의 베네치아로, 문화적인 면으로 ‘북구의 파리’로 애칭 되고 있다.
스톡홀름은 바다로 둘려 싸인 도시이기 때문에 시내 어디에서나 요트와 수영과 낚시를 즐길 수도 있다.
왜 스톡홀름이라 하였을까?
13세기 초에는 많은 무역선들이 오고 갔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하여 통나무로 울타리를 쌓았다. ‘스톡'이란 통나무요 ‘홀름'이란 섬이란 뜻이어서 ’통나무 섬'이란 뜻으로 스톡홀름이라 하였다고.
바사호 박물관에 가는 도중 크고 작은 많은 공원 중에 귀에 익은 노벨 공원이 있다. 그렇다. 우리가 지나는 이곳은 옛날 노벨이 노닐던, 세계적인 여우 잉그렛 버그만이 자라던 나라요 도시요 그 거리였다.
저기 보이는 돛대는 있으나 돛이 없는 커다란 하얀 군함은 호텔이다. 물의 도시답게 호텔은 물론 레스토랑으로 쓰이는 배가 물 위에 떠서 관광객을 저렇게 우아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침몰하여 더 유명해진 전함/ 오슬로 바사호
스웨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시대는 바사 왕조였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싸워 스웨덴의 발트 해 지배를 완성시킨 왕이 바로 북방의 사자 왕이라는 구스타프 2세였다.
왕은 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배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국력을 기울여 건조를 시작한 지 3년만인 1628년 드디어 진수식을 하는 날이었다.
바사 호는 길이 47.70m에 64문의 대포를 적재한 1,300톤 규모의 당시로는 세계 최대 전함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전함 바사 호는 독일과의 30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진수식에서 불행하게도 100m도 못 가서 전쟁의 문 앞도 가지 못한 체 선원 150명과 해군 300여명과 함께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너무 많이 실은 대포와 포탄의 무게에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후 수심 30m인 발트 해에서 대포는 일부 건져낼 수 있었으나 당시의 기술로는 그 커다란 전함을 예인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수백 년이 지난 후 해양 고고학을 전공하던 안데스 프란첸(Anders Franzen)이란 학생이 바사 호에 대하여 교수의 강의를 듣고 바사 호를 예인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이 꿈이 현실화되어 드디어 안데스의 불굴의 집념은 1956년에 바사 호를 발견하게 하였다.
유럽 각국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1961년에 스웨덴은 국력을 기울여 목조 전함 바사 호를 333년 만에 인양하게 되었다.
목조 전함이지만 단단한 참나무로 되어 있고 발트 해에는 소금기가 없어서 나무를 갉아먹는 박테리아가 서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굴 당시의 스웨덴 왕은 우리나라 경주를 다녀갈 정도로 고고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인 후 20년 동안 보수를 끝내고 드디어 1990년 지금의 7층으로 된 여러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바사 박물관 (Vasa varvet)이 개관되어 인류 고고학의 개가를 이룩하였다.
당시 전함은 4척이 있었지만 그 임무를 수행한 전함보다, 침몰하였기 때문에 중세의 조선기술을 고스란히 보전하게 되었고, 현존하는 배로 가장 오래된 역사를 말해 주는 스톡홀름의 제일가는 자랑거리가 되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 오늘의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 제작 과정과 그 예인 작업 자체가 인간 의지의 승리였다. 전함 바사 호는 전함이라기보다 후미의 선체의 황금빛 화려한 조각 하나 하나와 더불어 중세 선박 미술사를 말하여 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와 같았다.

 

 

'신의 손‵/ 밀레스 조각공원(Millesgarden)
스웨덴의 세계적인 조각가 카를 밀레스는 19C 초 사람으로 파리로 가서 로댕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올가 라는 초상화 화가와 결혼하여 아이 없이 살았다. 뒤늦게 귀국하여 발트 해가 보이는 리딩고(lidingo) 섬의 언덕 자기 집에다가 그의 조각은 물론, 그가 평생 수집한 것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자택과 함께 나라에 기증하고 죽었다.
그래 그런 가 조각 작품마다 그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하고, 밀레스가 작품을 제작하다가 우리를 마중 나올 듯한 착각에 빠지게도 한다.
작품 내용은 주로 북유럽의 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는데 그 중 푸른 하늘을 향하여 뻗은 그의 대표작 ‘신의 손'이 밀레스의 손 같이 느껴진다.
밀레스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렇게 생전에 살던 집에서 사랑하던 시민과 나와 같은 외국 관광객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유럽 여행에서 스웨덴은, 핀란드가 그러했듯이 노르웨이의 그 유명하다는 피오르드를 보러 가는 도중에 잠깐 들르는 중간 기착지 정도로 일정이 잡혀 있다.
그래서 스웨덴 관광은 오전에 바사 박물관 관광에다 오후에 밀레스의 조각 공원을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스톡홀름의 발생지라는 감라스탄(Gamla Stan)이란 구 시가지도 주마간산(走馬看山)도 못되는 주차간(走車看)감라스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북구를 떠날 때부터 벼르던 내일 가기로 된 노르웨이 3일의 여행은 우리들의 마음을 다시 설레게 하였다.
커다란 커피 잔이 지붕 위에 있는 찻집이 딸린 신기한 전차를 보면서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호텔로 향하였다.

 

 

스웨덴 인들의 생활상/ 스톡홀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 보장 제도를 자랑한다는 스웨덴 인의 생활상은 어떠한가.
스웨덴은 유럽 대부분이 나라가 그렇듯이 부부가 같이 일해야 살아갈 수 있다. 한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1년 4개월 동안 자식 양육 휴가를 받는다.
그 동안도 물론 100% 월급을 받고, 거기다가 양육비로 한국 돈으로 약 10만원 정도가 16살 될 때까지 정부로부터 받는다. 만약 병이 든다면 받고 있던 월급의 80% 정도를 받으며 집에서 쉴 수가 있다.
직장인은 누구나 주 40시간 일하고 일년에 5주 휴가를 받을 수 있다. 물론 토요일은 휴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9년인 의무교육 기간에는 학비는 물론 점심과 교과서 등이 무상으로 지급되고, 2/3가 진학하는 대학교도 학비가 무료다.
그러나 4년제 종합대학은 한 개의 도시에 한 개뿐이라서 대학 문이 우리나라같이 좁은 편이다. 사립 대학교도 있지만 2년제나 전문대학이고 수업료를 받는다. 그러나 국가 보조를 받기 때문에 금액이 그리 많지는 않다.
스웨덴 보통 부부가 버는 돈은 4인 가정 가족 기준으로 우리나라 돈 400만원 정도를 받으며 남자가 여자보다 약간 많다.
여기서 세금이 30%, 아파트 월세 60만원(전세는 없다) 음식값을 제하고 나면 월급이 자로 잰 듯이 딱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스웨덴 인은 은행에 현금을 예치해 놓은 사람이 드물다. 돈이 있어야 자식 교육도 시키고, 아프면 병원도 가야하고, 노후도 자기가 준비해야 하는 우리들 나라와 달리 모든 것을 모두 국가가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달 조금씩은 저축하여야 한다. 6개월이나 계속되는 겨울이 오면 가족과 함께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지로 햇볕을 쬐러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몇 달씩 흑야(黑夜)가 계속되는 이 곳 사람들의 낙이 햇볕 쬐러 가는 그러한 여행이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정년퇴직하고 받는 돈은 25세부터 일하였으면 월급의 80%를 받는다. 일한 기간이 그보다 짧은 사람은 물론 그보다 적게 받는다. 그러나 연금에 전적으로 의탁하기에는 부족하여 각자가 보험에 들거나 증권 투자 등을 통해 노후를 미리 미리 준비를 해야 여유로운 노년을 보낼 수가 있다.
이 나라는 30년대 이후에 산업이 발달해서 유럽에서 다섯 번째 부자 나라였으나 1990대 오일 파동에 침체기를 맞아 주춤하였다. 그 침체기에 빈부의 격차가 벌어져서 현재에 이르렀다.
누구나 여름이 오면 공원에 나와 일광욕을 즐기지만 그 고마운 햇볕도 두려워졌다. 오존층 파괴로 인하여 피부가 약한 서구 사람들에게 피부암이 걸릴 확률이 높아서였다.
아이들에게 햇볕을 함부로 쪼이지 말라고 정부가 경종을 내린 지지 오래 되었다.
흔히 스웨덴을 ‘사회복지와 성 개방의 대명사’로 후리 섹스 나라라고 불려 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의식 구조나 문화가 동양 사람들하고 다르기 때문에 알려진 말이다. 그 속에는 철저한 질서가 있으니 말이다.
이 나라 부모들은 자식들이 13~14세만 되어도 자유로운 이성 교제를 허락하여, 남자친구 나 여자친구를 데리고 집에 와서 함께 자도 인정해 줄 정도다.
처녀 총각이 사랑하게 되면 집을 얻어 함께 산다. 그러다가 평생의 반려자라 생각하면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정은 여자 편에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 후 둘 중에 하나가 한 눈 팔아 잘못을 저지르면 그 책임을 져야 하고 즉시 이혼을 하게 된다.
결혼 전에는 조심하다가 결혼 후에는 자유로워지는(?) 우리나라 남정네의 경우와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혼은 교회에서 한다. 그러나 종교가 다른 사람은 교회에서의 결혼이 불가능하므로 그런 사람들은 시청에서 결혼식을 하게 된다. 그 결혼식에는 신혼부부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결혼식이다.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에 결혼식이 있는데 길면 3분, 짧으면 1분밖에 안되는 간단한 결혼식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나라에는 이혼율이 높다.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높아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좋으나 싫으나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사람들이 드물다.
이혼하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있으면 1주일씩 엄마 아빠와 함께 살 수가 있다. 만약 재혼하면 배 다른 형제끼리 어울려 복잡한 가정에서 살게 되기도 한다.
차창 밖에 이상한 사람이 지나간다. 덥지 않은 초여름에 팬티만 입고 시내를 경보로 가는 사람이었다. 결혼하면 짓궂은 신랑 친구들이 신랑을 다는 그런 문화가 여기도 있는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가정이 적어도 1대의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고 국민 70%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1998년 현재 우리나라 교민은 865명이다.
이상은 30대 중반의 긴 머리 처녀 한국 현지 가이드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녀는 발랑 까진 가이드처럼 능숙한 언변의 가이드가 아니었지만, 다양하고 심도 있는 안내로 우리들에게 신빙성을 주는, 교양과 품위를 가춘 조용한 여성이었다.

 

 

Ⅶ. 노르웨이 기행
우리는 피오르드를 보러 간다/ 노르웨이 산하
스톡홀름을 떠나올 때 끼었던 짙은 안개는 사라지고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마냥 아름답기 만한 하늘을 건너 노르웨이를 향하였다.
구름 사이에 보이는 초록빛 산야와 호수를 조망하며 40여분 달려 드디어 아기다리고기다리 던 오슬로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 수도 오슬로의 시내 관광은 마지막 날로 미루고 우리는 피오르드로 유명한 예이랑거로 향하였다.
가다가 처음 들른 곳이 스키 점프 장, 파란 인조 잔디 점프대에서 하늘을 날고 있는 이 겨울 나라 젊은이들과 그 시설을 부럽게 지켜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르웨이 산야에 강을 따라 난 길을 차가 달린다. 차창 밖의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떼들이 보이는 초원이 하얀 눈 덮인 산으로 변하고 있었다.
캐나다가 자연만 보고 다니다가 인가를 찾아가는 여행이었다면, 노르웨이에는 어디고 자연과 더불어 인가가 있다.
그 집은 초원 속에 묻혀 있었고, 자연과 인공이 한데 어울려 있었다. 우리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노래하던 그 자연이요 그런 집들이었다.
찌는 듯한 여름 서울을 떠나 오슬로에 오니 6월 초여름이었는데, 우리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곳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다. 우리는 몇 시간 만에 여름에서 겨울을 찾아온 것이다.
길가에 눈 깊이를 재어 보기 위해 박아 놓은 기둥 사이로 차가 달린다. 여기가 '달스니바'라고 불리는 빙하 지역이다.
정상이 가까울수록 길가에 쌓인 눈은 이층 관광버스 높이만큼 눈이 쌓여 있는데 그 단면에다가 짓궂은 관광객이 붉은 색깔로 무언가를 써 놓았다.
온 산이 눈이 덮여 있고 거기에 흰 구름이 끼어 산인지 구름인지 모르는 하늘 아래 만년설이 쌓인 그 tot길로 차는 힘들게 붕붕- 오르고 있다.
자동차로 올라 갈 수 있는 노르웨이 최고 지점이라는 1,495m 달수바 전망대를 지났는가. 차는 깎아지른 천길 낭떠러지 험준한 두메산골 트롤스티겐(trollstigen)이라는 좁은 길을 지나가고 있다.
꼬불꼬불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길에 차가 천길 절벽으로 곤두박질하는 듯하다가도 용케도 이를 피해 가는 곡예 운전에 '아하!' '어유!' 감탄하면서 우리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도의 박수였다.
갑자기 아내가 구박을 한다. 비디오 촬영을 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고.
그러나 카메라를 대면 차가 금방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다시 대면 또 오른쪽으로 굽어져서 어떻게 꾸불꾸불한 이 길의 버스 속에서 저 멀리 보이는 예이랑거의 모습을 담아 찍을 사이가 있단 말인가.
눈으로 보기만으로도 벅찬 찬란한 이 아름다운 감흥을 어찌 손으로 흩어 버릴 수 있겠는가.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것 같이 하는 날이 오늘이구나 하였다.
캐나다 로키에서 내가 보고 온 것이 우러러보는 경치였다면 노르웨이 여행은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그 속에 우리가 함께 하는 그런 여행이었다.
이젠 다 내려왔는가 하는 곳에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조용한 교회가 있다.
우리네 교회와 달리 뜰에는 수많은 비석이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살다간 무덤을 지키고 서 있다. 북구의 모든 교회가 그랬다. 교외=무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 밖 지붕 귀퉁이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외로이 앉아 알을 품고 있다.
망원으로 잡기에 너무 멀어 캠코더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갈매기 한 마리가 무엄하게도 두 번씩이나 나에게 찍을 듯이 덤벼든다. 암놈을 지켜 주고 있던 수놈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우리 아들 생각이 난다.
결혼을 20여일 앞둔 녀석이다. 이제 내 보호를 떠나 훨훨 날아갈 놈이다. 30년이 넘도록 내가 저 수놈 갈매기처럼 지켜 준 막내아들 놈이다.
결혼식을 장로이신 장인은 기독교식으로 하자하고, 불교 신자인 어머니는 남들대로 하자 해서 그 틈바구니에서 고민하고 있는 아들과 새아기가 생각난다. 그래서 그 절충안으로 주례 없는 결혼식의 시안(試案)을 만들어주고 다녀올 동안 결정해라 하고 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 지상의 천국이여/ 노르웨이 산하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산 이가 죽어서 갈 수 있다는 나라. 영혼이 축복 받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은총과 축복의 나라가 천국이란다. 그곳이 지상에 있다면 북유럽이고 그 중에도 노르웨이였다.
노르웨이의 여행은 버스 기차 유람선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도 버스 여행이 주가 된다. 그 차타는 시간이 하루에 항상 6시간이 넘었다.
차창을 향해 눈을 돌리면, 어디에나 서울에서 잃어버리고 살던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을 만난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노래 속에서 걸어 나와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그 진한 초록빛 초원에 묻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있다.
100m 이상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는 것은 이 나라에서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자주 볼 수 있어서다. 세상의 모든 맑은 공기, 청정한 자연이 여기로 모두 피난 온 것 같다.
이렇게 노르웨이는 수천 개의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연 하나 하나는 그대로 관광자원이었다.
우리가 러시아에서 보고 온 것이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힘이었다면, 노르웨이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신이 만든 장엄한 자연 그대로의 세계다.
산에 오르면 눈 덮인 겨울이고, 그 산록은 다투어 꽃 피는 봄인데, 수도 오슬로는 6월 초여름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순서대로만 살아온 우리가 가을만 빼고 계절을 다 만날 수 있던 곳이 노르웨이였다.
차를 달리다 보면 스키를 다녀오는 차가 지나가고, 명승지 곳곳마다에 캠핑 차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3일 동안 내내 달려도 길옆에는 소리 내며 흐르는 강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강에 낚시를 드리우면 나 같은 낚시꾼의 소원이던 팔뚝만 한 연어를 초심자라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한다.
캐나다에 가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다가 외경과 경탄을 더해도 모자라는 지상의 천국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극찬하고 다녔으나, 그것은 찾아가 본 경치에서였는데, 노르웨이는 시선이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모두가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닌 곳이 없다.
젊어서 울릉도에 우연히 왔다가 울릉도가 너무 아름다워 이렇게 눌러 산다는 할아버지를 만난 일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회사 일로 50여 개국을 다니다가 노르웨이에 반해 노르웨이를 60여 번이나 방문하고 그 멋에 반해서 가족과 함께 눌러 산다는 한국인 교포의 말을 들어보자.(홈페이지 참조:www. norway114.com)

"여기 오시기 전에 유럽이나 미국 등 전 세계의 아름답다고 알려진 곳을 미리 다 돌아보고 오세요. 이곳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다른 나라의 여행은 시시하게 되니까요.
로마나 파리를 먼저 보고, 유럽의 다른 도시를 나중에 가서 느끼는 실망과 같으니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물과 공기가 가장 더 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오염이 없는 나라, 그리고 남한 4배의 국토 면적에 450만 인구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면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친절을 사는 나라가 노르웨이랍니다."

노르웨이에서 느낀 감흥을 어떻게 설명할까. 시는 설명할 수 없는 생략된 예술이라. 잠시 시심(詩心)을 빌려 보았다.

파란 하늘 흰 구름
꼭 닮은 만년설에
녹아내리는 폭포수
산기슭 초원 집들
여기에
하나 더하면
맑은 공기뿐이었어
-노르웨이 여행

노르웨이는 지구상 가장 북방에 있는 나라 중 하나다. 6.25 사변 때에는 우리나라에 병원선(病院船)을 보내 주어 의료 지원을 하여주었다. 지금의 중앙 병원의 전신은 메디컬센터였는데 그것을 건립 운영하다가 우리나라에 그 시설 전체를 이양 해주기도 한 고마운 나라이기도 하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서로 끼리끼리 모여 살고 있다. 문화가 같기 때문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그래서 나온 말이다.
북유럽도 마찬가지.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다섯 나라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주변에서, 비슷한 종족이 유사한 문화를 가지고, 비슷한 수준으로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잘 사는 나라로 지금은 노르웨이를 꼽는다.
북구 나라 중 가장 국가 통일이 늦은 나라가 노르웨이였다.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우리나라가 을사 보호조약을 맺던 1905년에야 겨우 독립한 나라이다.
독립을 할 때 노르웨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은 평야 지대 옥토 지대 등 기름진 곳은 다 자기네가 차지하고, 당시로는 쓸모없었던 서쪽 산악 지대를 넘겨주었다 한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듯이 이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줄이야. 그 산악 지대에서 나오는 총 수출액의 14%나 차지한다는 임산(林山)과 석탄 수출은 물론, 산악 지대의 급경사에서 소리 내며 흐르는 강을 이용한 풍부한 수력 발전은 그 양이 연간 800억 Kwhr라 오히려 스웨덴과 덴마크에 수출하는 자원이 되었다.
거기에다가 1968년에 북해에서 발견된 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 다음 가는 세계2위 석유 수출국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부자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풍부한 전력과 석유 자원들은 공업국 노르웨이로 이어졌다.
그뿐인가, 백야(白夜)와 피오르드나 빙하 등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은 누구나 와보고 싶어 하는 관광국 노르웨이가 되게 하였다.
선조 바이킹(Viking)의 후예인 장신(長身), 장두(長頭), 금발 ,벽안(碧眼)을 지닌 이들은 조선(造船)에서도, 어업에서도, 그리고 해양 업에서도 세계 제일의 국가를 만들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험준한 지형, 냉혹한 기후, 빈약한(?) 천연자원이 이렇게 뒤바뀌어 신의 축복을 받은 땅 노르웨이가 된 것이다.
그 노르웨이에서 고작 450만 사람들이 우리 남한(南韓)의 4배나 큰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서로 아옹다옹 다툴 일이 있겠는가. 서로 속일 일이 있겠는가. 더 이상 부러워 할 나라가 있겠는가.
그래서인가 어디를 가던 노르웨이 국기가 나부낀다. 국가가 개인의 자랑이고 자부심이 되기 때문이다.
내 나이는 생존이 문제였던 일제 시대 태어나서 2차 대전을 피해 시골로 소개(疏開)를 갔다가 해방을 맞았고, 6․25동란에 못 먹어 고생하였다.
4․19까지 독재 정치 아래 후진국의 가난을 살았으며, 군사 독재 시절에 울분을 참으면서, 소나무처럼 꾸불꾸불 살아왔다.
이렇게 잡초처럼 살아온 이 초라한 이방인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노르웨이가 추구하는 슬로건이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개인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는 안정 생활"의 나라 건설.
요람에서 무덤까지- , 나라가 그 책임을 진다는 이 나라에서 사회 보장에 대한 지출은 국민 총생산의 11%에 달한다. 그 중 지출액의 50% 이상이 연금이다.
자녀 교육, 병, 신체 애, 업무상 상해, 실업수당, 양로연금, 아동복지 등을 국가가 책임진다.
그러나 여유로운 노후를 위하여 그 준비를 각자가 더 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아기다기고기다리던 피오르드 유람/ 밀포드 사운드
어제 넘어온 ‘달바스바' 빙하 지역은 겨울이었더니 피오르드로 유명한 여기 예이랑거 에는 봄이 와서 이름 모를 북구의 봄꽃이 활짝 피어 이국적인 정취를 더해 주고 있었다.
북구 여행에서 보고 싶었던 자연현상으로는 백야(白夜), 빙하(氷河), 오로라, 피오르드로가 있다.
그 중 러시아에서부터 보아 온 밤11시경까지 책을 읽을 수 있는 백야(白夜)는 신기한 일이 아니게 되었고, 여기 와서 보니 오로라는 현지인도 잘 모르는 북극지방에 가서야 볼 수 있는 겨울의 이야기였다.
오로라란 북극 지방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밤에 빛깔이 붉어서 먼 곳에서 바라보면 불이 난 것 같아 보이는 현상이다. 이것을 극광(極光)이라고 하는 것은 북극 지방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고, 동양에서 적기(赤氣)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색깔을 두고 하는 말이다.
라틴어로는 '새벽'이라는 뜻인데 이것도 오로라란 새벽녘의 하늘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은 드디어 세계인이 보고 싶어 부러워하는 노르웨이 피오르드를 페리 호를 타고 선상(船上) 유람하는 날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서둘러 영화 타이타닉의 연인처럼 선두에 자리 잡았더니 너무 쌀쌀하다. 촬영하는 손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곱아서 소매를 늘려 손을 덮었더니 고맙게도 아내가 장갑을 구하여서 준다. 그래서 늙어 재산이 아내라 하는 것 같다.
강인가 바다인가 하는 푸른 물에 잠겨 있는 천하 절경 속으로 배는 미끄러지듯이 서서히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피오르드의 세계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어 나가고 있다.
버스 수십 대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우리가 탄 유람선 페리 호도 이 우람한 자연 속에서는 하나의 일엽편주에 불과할 뿐이었다.
수심 100여m 가 넘는다는 짙푸른 강물(?)이 흐르는 앞을 산이 막아서고, 거기를 돌아서면 다시 수백 미터가 넘는 천인단애한 절벽이 막아서는데, 그 위에 쌓인 눈 녹은 수많은 폭포수가 바람에 하얗게 눈처럼 흩날리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금수강산보다 야성적이고 남성적인 거대한 모습이다.
바닷가에는 조그마한 집들이 있고 그 앞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주민일까 여행 온 사람들일까.
만약 어젯밤 비가 내리고 오늘 같이 맑은 해가 떠 주었다면, 찬란한 무지개가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어울려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일곱 가지의 영롱한 색깔이 어떠한 것인가의 참모습을 보여 주어 평생에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준다던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청아한 여성의 한국어 안내 방송이 여기에 한국인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배는 이렇게 1시간을 헬리실트까지 간다.


강물의 V자 계곡이

빙하에 U로 깎여
바다가 침입하여
피오르드 되었다지
이제야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
진실인지 알겠어
                   -피오르드

피오르드(Fjord)란 협만(峽灣) 즉 좁은 만(灣)을 말한다. 북극 가까운 지방에서 높은 산에 쌓이고 쌓인 눈이 그 무게에 의하여 거대한 얼음덩이가 된다. 얼음 두께가 30m 이상에 달하면 무게와 경사로 하여 골짜기로 서서히 흘러내리는 빙하가 된다.
이 거대한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강의 양안을 U자 형으로 깎는다. 여기에 바닷물이 침입하여 되는 것이 피오르드의 세계다.
그래서 이 피오르드는 모래가 없고 깊이가 100m 이상 깊어 해수욕장으로는 부적당하나, 폭포수를 이용하여 수력발전소를 세울 수 있고, 큰 선박이 드나들 수 있어 항만과 공장 건설에 이용되고 있지만 그보다 그 웅대한 장관으로 하여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관광자원(觀光資源)이 되고 있다.
이런 노르웨이의 피오르드 해안선의 총 연장은 지구의 둘레의 반에 해당하는 2만km에 달한다.

 


마차 타고 찾아간 청색 빙하/ 부리스탈(Briksdal) 빙하
예이랑거(Geiranger)의 피오르드 선상(船上) 관람을 끝내고 부리스탈(Briksdal) 빙하를 보러 가는 우리들의 마음은 허전하기만 하였다.
우리가 직접 본 피오르드는 관광 수첩을 통해 꿈꾸어 오던 모습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준비 해간 경탄을 하나도 써먹지 못한 체 뭔가 나타나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만 선상 유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뭐가 이래' 하는 실망이 더 컸다. 그래서 인생은 사는 것보다 꿈꾸는 편이 더 낫다고 하였던가. 그래서 욕망은 꽃 피우나 소유는 시들게 한다고 하였던가.
국립공원 요스테달의 부릭스탈(Brilsdal)에 와서는 마차를 타고 청색 빙하(氷河)를 보러 간다. 말만큼이나 큰 노르웨이 처녀 아르바이트 학생 마부가 이끄는 4인 승 마차다.
커다란 포니(pony)가 노르웨이 처녀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힘겹게 폭포를 지나 꼬불꼬불 길을 돌아 그리고 걸어 6~7분 만에 드디어 우리가 도착한 곳이 푸른빛이 감도는 청색 빙하였다.
오뉴월 한여름에 빙하 앞에 서다니, 우리는 지울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여기서 다시 하나 더하는 구나하였다. 이 빙하가 요스테달스브페(Jostedalsbreen) 빙하의 일부였다.
캐나다에서 본 콜롬비아 아이스 필드는 바퀴가 어른 키만 한 시가 5억이라는 특수 설상차(雪上車)로 올라갔었다. 거기서 본 경치는 눈 덮인 평원이었는데, 운치 있게 마차를 타고 올라 와서 본 이 빙하는 파란 빛깔이 은은히 감도는 눈의 언덕이요 눈의 산이다.
이 빙하는 넓이가 468평방km에 걸쳐 뻗어 있는데, 얼음 두께가 10m에서 500m 전후나 된다. 가장 높은 곳은 2,038m나 되어 유럽에서 두 번째 가는 크기라 한다.
이런 빙하가 천천히 흘러내리면서 골짜기 밑이나 측벽을 깎고 그곳에 바닷물이 침입한 것이 우리가 보고 온 피오르드였다.
이런 빙하가 지금도 서서히 아래로 흘러내려 빙하의 끝 설선(雪線)에 이르면 녹아서 호수가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노르웨이 땅이 1년에 1cm씩 넓어진다고도 한다.
마차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니 처녀 학생 마부가 증명서 하나를 건네어 준다. 등반 기념으로 주는 팸플릿이 있어 보니 마차 사진에 그의 사인까지 들어 있다.

4th day of june 2001 you travelled by traditional pony and trap right up to the Brisked Glacier, deep into the heart of a scenic wonderland. On this ride you have been drawn by a Fording, blond-maned, stocky and sure footed. This good natured pony is Norway's oldest breed.-coachman Alone .

이 경우 팁을 주어야 하나 안 줘도 되나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가 '에라 1달라 벌자 .1초에 4원이나 하는 북구 여행이 아닌가' 하였는데 지금까지 걸린다.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것인데-.

 

산악 열차에 낭만을 싣고/ 포름↔ 미르달
그 이름이 한국의 어느 고장을 생각하게 하는 송달(Socal)을 떠나 송네(songle)에서 배를 또 탔다. 연장 185km로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속네 피오르드(signe fjord)를 다시 구경하나 했더니 섭섭하게도 협만을 건너는 것으로 끝이다. 열차를 타고 노르웨이의 산악 여행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굴을 지난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길다는 굴을 지난다. 24km니 60리나 되는 굴로 이를 통과하는데 30분도 더 걸렸다. 바위산을 뚫어서 벽도 울퉁불퉁한 자연석 그대로다. 도중에 파란 불이 대낮 같이 환하게 켜진 곳이 있는데 차가 쉬어 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긴 굴들을 부지기수로 지나간다. 땅굴을 제일 잘 파는 자들이 북한 정부가 아니던가. 그들이 땅굴 파는 법을 배워 간 곳이 바로 이 노르웨이에서란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행기로 모스크바에 갔다. 자동차로 러시아 국경을 넘어 핀란드 헬싱키에 입국하였고, 호화 유람선을 타고 스웨덴 스톡홀름에 갔다. 마차 타고 가서 청색 빙하를 보았는데 이제는 기차 여행이라. 난생 처음 최고로 하는 호강이로구나.
기차 여행보다 좋은 게 있을까? 안전하고 빠르고 편하다. 덜커덩 덜커덩 하며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주는 상쾌하게 흔들리는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으면 ‘빼-엑-' 하는 증기 기관차의 소리가 추억 속에 들려오고 내뿜는 수증기가 보이는 듯하다. 차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또한 어떠하던가.
국내 여행도 그러했거늘 하물며 외국 열차 여행은 얼마나 환상적일까?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노르웨이의 산악 열차라니. 그래서 카메라에 캠코더에다 망원경까지 주렁주렁 목에 건 내 요란한 모습을 굴을 지날 때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니 거렁뱅이 차림이다.
포름(Flam)에서 탄 열차는 20km 거리의 미르달(Myrdal)까지 1시간 반의 왕복 크로스 관광이다.
포름라인은 1923년부터 철도 공사를 시작하여 20여 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경사가 심한 6km의 절벽 중간에는 험준하고 눈이 많은 산악이라 다리를 놓는 대신 터널과 방설망(防雪網)을 20여 개나 설치하여 놓았다.
이 많은 터널은 산악 지방이라 모두 수작업으로 뚫었는데 1m 뚫는데 1개월이나 걸렸다 하니 이러한 노력이 관광 대국으로도 그 부를 축적하여 국민에게 나누어주는 복지국가가 된 것이다.
포름 철도 여행은 노르웨이 자연 중 가장 야성적인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행이다. 여름인데도 흰 모자를 쓴 듯한 만년설이 쌓인 산봉우리가 수 없이 많다. 그것이 녹아 하얗게 바람에 흩날려 웅장한 폭포가 되어 깊은 계곡 사이를 요란히 흐르는 강물 위로 떨어진다.
거기에 어울려 통나무집들이 토지를 조성하여 농사와 가축을 기르는 모습들은 우리를 더욱 감동하게 한다.
차가 93m의 소스 폭포에서 멈추어 선다. 경치도 보고 쉬면서 사진들을 찍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선가 음악이 울려 퍼지고, 음악에 따라 저 멀리 폭포 중간에 붉은 옷을 입은 마녀가 나타나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다.
목적지 미르달(Myrdal)에서 우리처럼 돌아오지 말고 그대로 계속 달려가면 우리의 다음 목적지 오슬로(Oslo)까지 갈 수도 있다.


외국 식당에서 꼭 주의해야 할 일들

여행 10일째 노르웨이 자연 관광을 끝으로 오슬로 시내 관광이다. 점심으로 오랜만에 일식 집에서 도시락을 먹었는데 여행 어느 곳에서 먹던 것보다 꿀맛이다. 문화가 같은 일식에다가 연어 회까지 곁들였으니 말이다.
북유럽 사람들의 단순한 식탁에 비해 우리 동양의 음식 문화는 그들의 문명만큼이나 우리가 발달한 것을 깨닫겠다.
그 동안 우리가 먹어 온 양식이란 빵과 치즈와 우유와 야채와 과일 고기 계란에다 수프가 전부이다. 모두가 남이 만들어다가 파는 것을 사다 먹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가정주부가 직접 굽고, 복고, 졸이고, 끓이고, 찌고, 삶고, 무치고, 담그고, 비비고, 싸 먹는 한식은 얼마나 다양하고 화려한가. 거기에 싱싱한 회(膾)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해외 여행하다가 한식(韓食)을 접할 때마다 특식이라 하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 지는지-.
한국은 삼천리강토가 다 음식점이라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오히려 다양한 음식 문화를 이룩하였다.
전라도 여행을 떠날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지던가.
한국 여자 중에 남성들이 제일 좋아하는 여인들이 호남 여인이라 하는 말 중에는 전라도 여인네들이 음식에 대한 깊은 사랑과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것도 큰 몫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여행하다 보면 외국인과 어울려 식사를 함께 하게 된다. 그들은 우리네와 달리 식탁 예의를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꼭 주의하고 배워야 할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식탁의 예절을 구체적으로 배운 적이 있던가.
․식당에 들어갈 때는 모자를 벗어야 한다.
․핸드백 등은 식탁 위에다 두지 말고 의자 위에 두자.
․손목의 윗부분을 식탁에 올려놓되, 팔꿈치를 식탁에 올려놓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이니 주의하자.
․식사 중에 트림을 하는 것은 아주 실례가 되는 일이다. 내장인 위에서 괴어 생긴 가스라 불쾌하게 생각하고 야만인으로 오인 받기 쉽기 때문이다.
․식사 중 얼굴이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은 실례가 된다. 서양 사람들은 불결하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식사 전에 미리 고기를 잘게 썰어 놓지 말고, 먹으면서 조금씩 썰어서 먹어야 한다.
․음식물을 입에 넣은 체 음료수를 마시는 것은 예절 바른 태도가 아니다.
․식사하고 난 후 그릇은 웨이터가 올 때까지 그 자리에 두어야 한다.
․무릎 위의 냅킨으로는 입가를 살짝 닦아 입가를 깨끗이 하여 주고 식사가 모두 끝나면 냅킨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이상은 노르웨이 교포 홈피 www.norway114.com 참조)
북유럽 나라들은 왜 잘 사는 거지(A)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북유럽! 하면,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다가 내가 가보지 못한 아이슬란드를 더한 5개국을 말한다.
이 나라들은 생활수준이나 문화 수준이 거의 같고 우리 대한민국보다 3~4배나 더 잘 사는 나라다.
가장 잘 산다는 노르웨이 GNP가 2,000년 현재 34,642달러이고 그중 낮다는 핀란드가 25,000달러가 넘는 것만 보면 알 수 있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인류의 꿈이고 이상인데, 이들 나라 평균 수명이 남자는 75세이고 여자는 81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내가 북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알고 싶었고, 여행 중에도 계속 묻고 다니던 이야기가 있었다. 북유럽 나라들은 왜 잘 사는가, 어떻게 해서 잘 살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인구 밀도가 적은 나라이어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면, 그런 정도의 지식은 책을 통하여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데 비싼 돈 들여 여기까지 오겠는가.
그러나 내가 발견한 그 첫 번째 해답이 싱겁게도 역시 큰 땅에 적은 국민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잘 사는 나라 노르웨이는 한반도의 1.6배 국토에 한국 국민의 1/16밖에 안돼는 450만의 국민이 사는 나라이다. 여기에 우리 남북한 7,500만을 풀어놓아 보라. 국민소득 3만5천 달라 가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되는 것이 있다. 왜 북유럽 국가의 국민이 그렇게 적을까 하는 것이다.
북유럽은 지구상에 가장 북쪽에 있는 코가 큰 코쟁이들이 사는 나라들이다. 코가 큰 것은 추운 지방에서 공기를 들여 마실 때 그 공기를 덥게 하여 허파에 보내기 위해서 라고도 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오줌을 더 참을 수 있다는 이치다.
그 추위를 막기 위하여 집들은 모두 3중창을 하였다. 산간으로 갈수록 집들은 뾰족한 지붕이었다. 큰 눈이 지붕에 쌓이는 것을 막으려는 지혜였다.
그 춥다는 모스크의 왕궁에는 카펫 문화가 발달하여 있었는데 우리네 같이 바닥에 깔기 위함이 아니라 벽에 걸어 외풍을 막기 위함이었다.
북구에는 겨울의 이러한 혹독한 추위에다가 6개월이나 되는 그 무서운 흑야(黑夜)가 있다.
난방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그래서 이곳을 버리고 살기 좋은 남쪽 땅을 향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이 저축을 하는 가장 주된 목적이 겨울에 스페인 그리스 등의 따뜻한 나라로 가서 햇볕을 마음껏 쬐고 오려고 떠나는 여행을 위하여서다.
북구를 다니다 보면 모든 음식점 앞에는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북구 사람들은 누구나 태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추진력은 고차 문명(高次文明)의 저차 문명(低次文明)에 대한 도전(挑戰)과 대응(對應)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보는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의 이론으로도 국민이 적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열악한 자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시선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랭하고 메마른 땅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찾아 헤매는 바이킹(Viking)을 탄생시킨 것이다.
바이킹(Viking)들은 용감하게 싸워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살기 위해서는 세계 어디든 용감하게 찾아가야 한다는 도전과 대응의 정신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여름에 떠나가서 풍랑이 심해지는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왔지만, 일부 족장(族長)이 부족들을 이끌고 해외 진출한 경우도 많았다.
바이킹이 아메리카 대륙을 칼럼 버스보다 수십 년이나 더 빨리 발견하였다거나, 인류 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젠 같은 탐험가의 조국이 노르웨이라는 것들은 도전과 대응 정신의 일환이었다.
게다가 지구에서 가장 북쪽의 추운 이 나라들은 고도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유럽 강대국들의 선망하는 도전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구가 적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구가 적게 된 이유 중에 다른 하나로 페스트를 꼽을 수도 있다. 14C 흑사병(黑死病)이라고도 하는 이 무서운 병은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유럽 인구의 태반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다.


북유럽 나라들은 왜 잘 사는 거지(B)

한국 등 동양 여러 나라는 왜 유럽보다도 인구가 많아 졌을까?
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북구의 적은 인구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주는 지름길이 된다.
답은 간단하다. 한 마디로 가문의 계승자로서의 아들을 생산하여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유교적인 전통 의식 때문이다.
중국에서 전래하여 왔다는 칠거지악(七去之惡)에는 아내를 내쫓는데 7가지 이유가 있다.
①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②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③ 부정(不貞)한 행위, ④ 질투, ⑤ 나병․간질 등의 유전병, ⑥ 말이 많은 것, ⑦ 훔치는 것
옛날에는 우리들 가정에서는 대(代)를 잇기 위해서 아들을 꼭 낳아야만 했다.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는 양자라도 꼭 자식으로 꼭 두어야 했다. 그 순수한 혈통을 위해서 아내에게 부정(不貞)을 막아야 했고, 고질에 해당하는 병이 없어야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세상에서는 축첩제(蓄妾制)의 유지가 필요하였고 그래서 여자의 질투(嫉妬)를 막아야만 했다. 그래서 칠거지악(七去之惡)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동양의 옛날 아내들은 남편에게 봉사(?)하는 일보다 시집에 봉사하는, 이른바 부모에게 대한 효(孝)와 아들을 낳아 대(代)를 이어주는 일이 생명같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딸만 있는 집에서는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양에는 인구가 많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콩에 가서 들은 이야기로는 홍콩 주부들은 아들보다 딸을 원하였고, 자기보다 자식들이 더 낫다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생각도 우리네와 달랐다.
새끼를 하늘을 날 수 있을 때까지 키우다가, 떠나보내는 새들처럼 18세가 지나면 가정을 떠나 독립해 가는 자식들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것이 우리들이 반드시 도달하고 싶어 하는 미래를 살고 있는 선진국 사람들의 의식 구조였다.
이렇게 대(代)를 잇겠는 다는 의식이 유럽에는 동양보다 아주 적었다. 우리들처럼 자식을 노후 보험처럼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가 낳은 자식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그들도 나같이 늙어 흰머리 나이 되면, 구부정한 몸으로 부부가 서로 손을 꼭 잡고, 여유가 생기는 대로 선량한 미소를 깊은 주름살 띠며 이렇게 여행을 다니는 것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북유럽 나라는 왜 잘 사는 거지? 하는 답은 이 이외에 여러 가지로 더 말할 수 있다.
1, 2차 세계 대전에 휩쓸리지 않아서 오히려 그 덕으로 잘 사는 나라에 진입하였다던 지. 옛날에는 버림받던 자연이 지금은 그 천혜의 자원이나 관광자원이 되었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나 그보다 나를 놀래게 하는 것이 있다. 노르웨이가 추구하는 사회보장을 위한 슬로건이다.
"개인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는 생활 안정"

삶과 죽음을 해석한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pakr)/ 오슬로
오슬로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pakr)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는 무례하게도 교통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우리를 후문으로부터 몰아넣는다.
미술이 아무리 공간예술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감상의 순서가 있는 법인데 이게 무언가 전에 달려가듯 감상이 시작된다. 목적지에 와서도 다음 일정이 바쁘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1초에 4원이나 경비를 들여 세계인이 선망하는 다시는 못 올 곳의 이방인(異邦人)이 되어 목적지에 와서도 시간에 쫓겨 다니다니-. 어찌 대충 보고만 그냥 가리-. 어이 대충 찍고 갈 수 있으리-.
수학여행 온 학생처럼, 졸졸 가이드와 따라 벌써 구경을 끝낸 함께 간 점잖은 우리 교장 선생님들을 한참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도, 나는 눈에 닿는 것 하나 빠짐없이 캠코더에 담았다. 그리곤 마음에 없는 미안한 표정을 애써 몇 번이나 지었다.
비디오 촬영에서 제일 애로가 배터리라. 이러한 날을 위하여 종일 촬영하여도 남는 특수 배터리를 어렵게 구하여 왔는데 그 무게가 천근이라. 그걸 메고 와서 자기들 시키는 대로하였다고 칭찬이나 받으려고 내가 왔나? 먼 이국땅에서 하늘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이런 것 보려고 바람처럼 달려온 내가 말이다.
짠물이라는 그 인천이 내 고향인데-. 여행에서는 많이 보고 많이 듣는 것, 거기에다 영상에 담는 것이 재산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원형 17m나 되는 260톤 화강암 기둥에 조각하여 놓은 121명의 남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뒤엉켜 하늘로 다투어 올라가려는 모습으로 인간의 본성을 상징화하였다는 모노리텐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조각품도 촬영하였다. 이 조각품은 작자가 제작한 석고 모델을 3명의 석공이 14년간이나 공들여 만들었다. 그래서 조각도 종합예술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고도 이 공원의 완공을 못보고 비겔란 조각가는 죽었다니 그러면 인생은 시간 예술이란 말인가.
그 밑에 주위 빙 둘러 세 겹으로 방금 태어난 아가에서부터 우리와 같이 늙은 부부의 모양과 더 늙어 죽을 때까지의 벌거벗은 인생 삶의 조각들 앞에 서면, 하나의 조각상을 보는데서 나아가서 자기를 보게 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지나간 현재와 다가온 현재와 다가올 구체적인 현재를 비겔란의 눈과 손으로 해석해 놓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비겔란은 이 작품에 대한 일체의 설명을 거부하였다 한다. 작품은 개인의 것이지만 제 각기 다른 창조적 감상을 존중해서이다.
입구 정면에 있는 어린이들의 다양한 표정과 인간의 일생을 58개의 청동상으로 장식한 다리와 동물들을 투조(透彫)한 이색적인 철제 정문도 촬영한다는 것은 단순한 기념을 넘어서 우리 집 가보 하나를 마련하는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이 거대한 공원은 비겔란이란 한 예술가의 집념으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원 조성에 필요한 많은 시간과 그 엄청난 비용을 위해서 오슬로 회화 계의 지원과 기업가나 개인들의 기부금과 성금에다 20C초에는 작은 지방 도시였던 오슬로 시 당국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고, 그보다 많은 시민들의 열렬한 지원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있어 이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pakr) 건설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골다골증(?) 가이드
우리가 해외여행 가서 제일 먼저 느끼는 감탄은 현지 가이드의 그 헌신적으로 계속되는 안내와 유머 넘치는 그들의 해박한 지식이다. 사막 같은 황무지를 달리면서도 웃음꽃을 피워주는 마술사요, 관광지에 대한 어느 것을 물어도 막힘없이 슬슬 흘러나오는 무소불능의 절대적인 존재가 현지 가이드다.
흔들리는 차에서 선 채로 계속되는 희생적인 그 열성에 우리는 얼마나 감격하였던가.
그래서 별도로 거두어 주는 일인당 하루 10달라 가(물론 운전사와 동행 가이드와 나누는 것이지만) 절대 아깝지 않고 오히려 미안하기까지 하였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여 피곤한 관광객을 상대로 한 그 정성스런 안내에 자꾸 감기는 눈꺼풀이 얼마나 미안하기만 하던지.
배낭여행으로 직접 현지인과 접할 수 없는 우리네 투어 여행에서 현지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여행자가 궁금해 하는 것들을 미리 연구하여, 묻기도 전에 가르쳐 주는 고마운 사람이 현지 가이드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비록 비교적 비싼 요금이 들더라도 유명한 여행사를 선호하는 것은, 잘 보고 잘 자고 잘 먹는 기쁨을 위한 투자였다. 이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고 믿어서이다.
그런데 귀국하여 되돌아보니 우리들은 그 가이드 복이 없어서 매우 섭섭한 마음을 안은 체 해외여행을 마친 것이었다.
북구 여행의 백미(白眉)라고도 할 수 있는 노르웨이 관광 이 사흘 동안 우리들을 안내할 여자 가이드는 왕 초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르웨이에 사는 교포가 겨우 200명 내외인데, 그 중 절반이 여자일 테고, 그중 절반이 어른들일 것이고, 이 나라에 모든 여성이 직업을 가졌으니 여성 가이드를 어디서 구할 수 있으리오.
우리가 만난 가이드는 88올림픽 때 울산에서 노르웨이 사람과 국제 결혼한 우리 교포였다. 그의 억센 사투리와 서투른 한국어는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 같았다.
관광에는 별 관심 없이 이 직업 저 직업 전전하며 살다가 고국에 갑자기 불어 닥친 북구 여행 바람에 가이드란 이름으로 우리는 그녀의 두 번째 손님으로 만난 것이다.
노르웨이 가서는 아름다운 산과 맑은 강과 폭포뿐이라 설명할 게 없다고 인천 공항에서부터 동행한 가이드의 말이 이 때문이었구나.
노르웨이 자연이 하도 아름다워서 귀로 보지 말고 눈과 마음으로만 선의로 체념하며 우리들 마음을 달래고 삭히기에 몹시 답답하고 힘들었다.
골다공증을 골다골증이라 하는가 하면. 노르웨이가 스웨덴보다 크다고 대답할 정도의 관광에 관심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무얼 물으면 노르웨이 운전사에게 한국말보다 더 유창한 노르웨이어로 물어 대답하여 주었고, 생소한 노르웨이 지명을 소개하여 주는데도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그 어눌한 경상도 사투리로 한 마디 하고 지나가고 말아서 우리들을 답답하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북구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그 아까운 사흘을 어디를 가는지 어디를 갔다 왔는지조차 모르고 허송세월 하다 왔다. 가끔 듣게 되는 그의 소개의 말은 관광 책을 보고 읽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관광 장소에서나 식당에서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그러하였다.
그녀의 까맣고 커다랗고 착하기 만한 눈과 마주치면 그 동안 마음속에 품은 거부감을 후회하게도 하였다.
그 가이드와 연관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그의 기상천외의 언행에 기가 막혀 웃고, 어리둥절해 하는 태도가 우스워서 웃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그녀는 말끝마다 "~해도 되겠습니까?",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되묻고 기다리는 습성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 직업 저 직업 전전하다가 요번이 두 번째 가이드 길에 나선 왕 초보 가이드였던 것이다.
요번 우리 팀은 정년퇴직한 점잖은 교장 교감 선생님들의 모임이라 별 말썽 없이 그럭저럭 넘어간 것이지만 비싼 경비를 들여 다녀온 여행길이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큰 유감이었다.
우리들의 실망은 핀란드에 갔을 때도 마찬 가지였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이드가 핀란드 가이드를 겸했으니 말이다. 현지인이 아닌 사람의 안내는 녹화 방송과 같아서 현실감이 없고 생생한 안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하는 말이다.
우리들의 여행이 어떤 여행이었던가? 아내의 회갑 기념으로 온 부부가 나를 포함하여 세 쌍이나 되고, 교직에서 퇴직하고 그 아까운 퇴직금으로 평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려고 별러 온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들은 피해자였다. 피해자가 있다면 가해자도 있는 법이라면 우리들의 가해자는 누구인가?
먹고살기 위하여 부르는 대로 따라 나선 현지 교포 가이드인가. 사람이 없어서 현지인 중 아무나 부탁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와 함께 동행 한 가이드인가. 이를 알고도 무리하게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강행시킨 여행사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한국에서 첫째 둘째간다는 여행사의 이름만 믿고 순진하게 따라 나선 우리들인가.
귀국하여 주위에 얘기하였더니 어느 여행사를 통하여 다녀왔는데 그 모양이냐고 묻다가 갸우End 한다.
여행사 책임자를 찾아가 묻고 싶지만 그 동안 함께 한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듯하여 서운함을 마음 한편에 접어 두기로 하였다. 억울해도 참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이었으니까-.

 


귀국길에서/ 노르웨이→
나는 인천 공항을 떠나올 때 자(尺)를 하나 가지고 왔다. 한국이란 커다란 자였다. 내가 우리로 언제나 지니고 살아온 자다.
이 자를 통하여 한국을 떠나 세상을 재 보다가 귀국 길에 있다. 물론 나의 이웃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크게 보면 도토리 키 재 보기였기 때문이다. 혼자 있으면 내가 큰지 작은지, 잘 사는 건지 못사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중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부러워해야 할 외국의 모습보다도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외국을 통하여 찾는 일이다.
그리고 배워야 할 저들의 문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장점을 찾아 단점을 보완하는 절장단보단(絶長補短)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 나가야 할 이상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넓은 땅에서 적은 인구로 행복하게 사는 북유럽 나라 사람들을 보고, 나는 지금 막 결혼한 우리 아들도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나아 주었으면 하였다. 가정이 작은 나라이라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고 잘 사는 나라가 거의 없고, 인구가 적고 못사는 나라가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대(代)를 이어 가야만 하는 전통적인 문화이어서, 아들을 낳을 때까지 끝까지 낳다 보니 인구가 많아졌다는 것을 먼 나라까지 와서야 찾아낸 결론이다.
지금은 딸만 두고 사는 가정도 많다. 양자(養子)라는 제도는 없어진 지 오래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가난한 가정이 그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로 접근 해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정은 자식을 통하여 일어서듯이 나라는 많은 인적 자원을 자원화 하는 길이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교육열이 강한 부모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학습된 노동력이나 고등 기술 등의 인적 자원은 천연자원보다도 더 귀중한 자원이 아니던가.
한국은 전 국토가 음식점이라고 하는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전 국민이 가수 지망생이라는 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별다른 기술이 없어 살고자 음식점을 차리는 것이고, 노래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 노래방을 만들었는데 이런 이들에게 많은 사람은 그대로 그의 자원이 되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여행의 형이하학적인 목적은 잘 보고, 잘 자고, 잘 먹자는 것이니까 이런 다양한 음식 문화는 관광자원으로 얼마든지 활용 수 있다.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양식(洋食)을 먹는 서양 사람들에게 젓가락 문화는 얼마나 신비롭고 재미있는 일일까.
굽고 끓이고 삶고 찌고 볶는 한식(韓食)은 얼마나 다양한 음식 문화인가. 거기에 노래방 문화는 저렴한 비용으로 관광객을 유혹할 것이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군인을 자주 만날 수 있는 나라는 가장 가난한 나라이고, 경찰이 자주 보이는 나라는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이고, 경찰을 만나 볼 수 없는 나라는 선진국이다.
러시아에서 그렇게 자주 보던 경찰을 북유럽에서는 한번도 볼 수 없었다. 이런 눈으로 외국 관광객이 우리나라를 본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중국도 그러하였지만 러시아 국민의 10%가 부유층이고 나머지 90%가 빈곤층이었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중산층이 70%나 되는 선진국 형 구조를 가진 나라다. 외국 가정을 방문하여 보지는 못하였지만 소위 별 넷 이상이라는 선진국의 호텔에 전전하다 보니, 우리들이 사는 수준이 그 잘사는 나라의 중산층 정도는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개인이 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여서 그런가.
언제나 우리도 북유럽 나라들처럼 직업에 귀천이 없는 나라가 되어, 누구나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될까. 언제나 부의 균점(均霑)으로 빈곤층도 최소한의 삶의 낙을 누리며 사는 복지국가가 되려나?
러시아인들은 한국에서 온 우리들을 일본인보다도 잘 사는 나라 국민으로 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도 듣기 싫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덴마크 남편을 둔 가이드 말에 의하면, 덴마크 인은 한국은 가난한 나라로 알고 있다 한다. 8,000명이 넘는 한국 입양아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덴마크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한다. 당신도 입양아(入養兒)냐. 얼굴이 뜨뜻해 지는 이야기였다.
내가 본 러시아나 북유럽 여러 나라들의 도시에 들어서면, 도시 자체와 건물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이던데,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은 무엇을 보고 갈까? 초가집이나 한옥이 사라진 자리에 서 있는 아파트를 보고 갈까?
노점상은 도시 미관을 해치기도 하지만 관광객의 눈에는 낭만이 된다. 한국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한국적인 서민 생활의 일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특정 구역에 이태원처럼 외국인이 즐겨 찾고 편안하게 맞을 수 있는 노점을 마련하면 어떨까?
남대문, 동대문 시장이나, 재래시장 중에 가장 크다는 영등포 시장을 외국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으로 정화하여 보면 어떨까? 요즈음 관광객 유치를 향하여 변모해 가는 남대문 시장을 더 구체적으로 정책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우나의 본고장 핀란드에서 한국의 목욕탕을 생각하였다. 우리나라 신도시의 웬만한 목욕탕 시설에 비할 수 없는 것이 핀란드 사우나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나다 재스퍼 온천의 시설이었다. 우리나라 욕탕 문화는 관광자원으로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중국은 발 마사지 하나로도 외화를 벌어들이지 않던가.
나는 가끔 노르웨이를 말하다가 캐나다를 말하곤 하였다. 그 우열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구별하여 말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보고 온 그 호수의 빛깔과 우람한 자연과 빙하와 폭포 등은 노르웨이 자연을 세계 최고의 풍광이라고 단언하여 말할 수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구 부모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네를 구박하거나 때리면 경찰에 고발하겠다는 자녀의 협박이라 한다. 한국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고발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경찰에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애견(愛犬)을 신문을 말아 때리듯이 방종하고 방황하는 자기 자녀를 그렇게나 꾸짖으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가 사는 나라였다.
외국을 가보기 전에는 국제 결혼하는 여인들을 불쌍히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그 반대로 선진국의 남편들은 이혼 당할 것 같아 아내에게 주눅이 들어 살고 있었다. 선진국은 누구나 부부가 함께 직업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나라이다.
부부가 경제력을 갖다 보니 가사를 나누어 하고 있었고, 부부 중 수입이 많은 쪽에서 가사를 전담하고 사는 것이 북구 에서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네처럼 결혼하면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참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혼하면 물론 재산이 반분되고 모든 것이 여성에게 유리하였다.
남편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보다 귀여움이나 받으며 사는 하나의 인형의 역할이기를 거부하고 집을 뛰쳐나오는 ‘노라'를 내세워 여성 해방을 부르짖던 그 유명한 입센의 ‘인형의 집'이 100년 전이 넘는 1897년 작품이었으니, 오늘날 노르웨이의 남편들의 고충이 어떠한지 가히 짐작할 만도 하다.
남정네들이여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고마워하자.
그러나 오호 애재라. 한국에서도 과거의 남성 공화국은 거(去)하고 이제는 여성 공화국이 내(來)한 것 같다.
가난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되지만, 나는 어려서 형이 입던 헌옷을 입고, 형이 쓰던 헌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였다, 학창 시절에는 돈이 없어 평생 수학여행 한번도 가보지 못했고, 대학 4년을 고학으로 졸업하였다.
그런 내가 1인당 1초에 4원이나 드는 그래서 아무나 갈 수 없는 먼 북구의 나라들을 12일 간이나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여행하는 동안 준비 해간 디지털 캠코더로 내가 본 모든 것을 녹화하여 가지고 왔다. 디지털 녹음기로 현지 가이드의 모든 설명을 녹음하여 왔다. 여행지 가는 곳마다 팸플릿과 명함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하여 준비 해간 수첩에 부치며 다녔다. 돌아와서 기행문을 남기고자 함이었다. 가 보실 분에게는 꿈을, 가 보신 분에게는 추억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글을 5월 25일로 회갑을 맞은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치고 싶다.
Ⅷ. 인도차이나 기행
인도차이나 반도여
나라 사람들마다 돈을 모으는 목적이 다르다고 한다.
서구 사람들은 여행을 하기 위하여 저축을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잘 먹기 위해서라지만 한국 사람들은 좋은 집을 사기 위해서 돈을 모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서구 사회와 같이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교육비, 의료비 등 모든 것을 국가가 아닌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든든한 부동산에 묻어 두려고 하는 것일 게다.
헌데 노인의 나라에 들어간 내 나이로 하여 얻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글쟁이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나를 자꾸 불러내는 여정(旅情)의 소리를 자주 듣게 한다.
글은 발로 쓰는 것이다. 글을 쓰겠다는 눈을 가지고 해외여행을 가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감동을 만나게 되고, 남보다 깊은 이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가본 사람에게 추억을, 가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꿈을 주는 기행문을 쓰겠다는 아름다운 욕망의 꽃을 피게 한다.
옛날의 일기가 까맣게 잊었던 그 날을 되돌려 주듯이, 나의 이번 여행은 기행문이 되어 나와 같이 무리해서 떠난 여행의 즐거움을 몇 번이고 구체적으로 되돌려 줄 것이다.
그 해외여행이 하고 싶어 몇 년 전 정년퇴직을 하면서, 여유 돈 얼마로 증권 투자를 한 것을 후회하여 오다가,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싱겁게 끝나자 증권이 반짝 오른 김에 부리나케 본전을 찾아 내친김에 인도차이나반도 투어를 10일간 하기로 하였다.
거기에다 조금만 더 보태면 찬란한 유럽 문명을 만날 수 있는 금액을, 구태여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쪽을 왜 선택하게 되었을까?
남들이 덜 가본 새로운 곳의 기행문을 써 보고 싶은 욕망에다가, 해외여행에 미쳐(?) 장가까지 포기한 여행가 장 선생과 함께 하면서 그의 해박한 여행에 대한 지식을 배워 보고 싶다는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마음이 선뜻 그를 따라 나서게 한 것이다.
이 여행 계획은 나이 먹는 것이 두려워 지는 이 나이에 2001년의 세모(歲暮)를 부픈 마음으로 보내게 하였다. 새해 1월 5일에 떠나기 때문이다.
계절을 순서대로만 살아온 우리가, 겨울을 살다가 여름 나라를 거꾸로 향하는구나 하는 생각은 즐거움을 더하게 한다.
몇 달 전 큰맘 먹고 어렵게 산 고가(高價) 디지털 카메라로 낯선 나라 풍경을 수천 장 이상을 마음 놓고 찍으며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수학여행을 앞둔 초등학교 학생처럼 마음이 설렌다.
월남 파병으로 한 때는 우리나라와 총부리를 서로 겨누던 나라 베트남은 남한의 3.5배인 S자형의 가늘고 긴 국토에 7,300만 명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음력 설, 대보름, 중추절(仲秋節)을 쇠는 유교국이다.
영화 킬링필드로 널리 알려진 캄보디아는 한반도의 4/5의 국토에 인구 770만 명이 사는 불교 국이다. 오랜 세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었고, 군사 강국인 베트남에게 계속 시달림을 받고 있는 나라다.
작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캐나다를, 금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스칸디나비아 다섯 나라를 둘러보고 왔더니, 내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민이 사는 나라 인도차이나 반도를 간다. 그 중 라오스는 국민 소득 200불미만의 세계 최빈국으로 평균 수명 46세의 나라다. 그 수도 비엔티엔에 가서 그들의 영욕의 삶을 영상에 기록하여 올 것이다.
나를 디지털 맨 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디지털 카메라에, 디지털 캠코더에, 디지털 녹음기에, 컴퓨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 분야에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고 있다. 젊어서부터 노후를 준비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어렵게 고학으로 학업을 마친 나는 거금 250만원을 투자하면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 다닐 수 없는 시절이 오면 더 가까이 살아야 할 평면 대형 TV가 아른거려서이다. 허나 젊어서 여행과 바꾸었던 미제 선풍기는 이제 생각해 보니 잘 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었다.
젊어서는 추억을 만들고 늙어서는 그 추억으로 산다 하였는데, 작지 않은 이 나이에 추억을 만들러 떠나려고 한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어떤 모습으로 이 일만(一萬, 필자)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 모습은 나의 카메라에, 나의 기행문에 어떤 모습으로 담길 것인가?

 


오토바이+자전거+씨클로/ 하노이
우리 같은 해외 여행객이 베트남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 중국 북경의 수많은 자전거를 연상하게 하는 오토바이의 긴 행렬이었다.
거지와 복권 장수를 빼고는 3보 이상 걷는 베트남 사람이 없다는 가이드의 말대로 길에는 거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문밖만 나서면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세상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우르릉- 하며 몰려오고 몰려가는 시끄러운 그 소리를 어디서나 듣게 된다.
헬멧도 없이 백미러도 없이 중앙선도 무시하고 뒤에서 큰 차가 아무리 빵빵거려도 같은 속도로 제갈 길만 가고 있었다. 뒤돌아 볼 여유가 없으니 백미러가 꼭 있어 야할 이유가 없다. 모든 차는 시내 아무 데서나 중앙선을 침범하여 추월하고, U턴하였다. 차와 차 사이를 S자를 그리면서 빠져나가는 곡예 운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하!' 하는 탄성을 발하게 하였다. 베트남에서는 인건비가 싸다더니 목숨 값도 싸서인가. 그러면 반대편 차가 비상등을 번쩍이며 거침없이 질주해 오는 아수라장이었다.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신호등 하나 볼 수 없었고 교통순경도 없었다. 그냥 서로 적당히 알아서 하는 무질서 속에 질서의 세계였다.
혼자 타고 달리는 이도 있었으나 대개는 2명이 타고 달려가고 있었는데 일가족이 전부 타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여자들은 거의 다 모자에 수건으로 마스크를 하고, 긴 장갑을 끼고 햇볕과 먼지와 매연을 피하고 있다.
남녀가 함께 타고 가는 오토바이도 많았다. 물론 남자는 운전석에 여자는 뒷좌석이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 베트남에는 한국처럼 미팅할 곳이 만만치 않고, 있다 해도 그들의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서 저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하는 것이라는데 그 뒷모습만 보아도 둘 사이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한다.
허리를 잡지 않고 가는 둘끼리는 만난지가 한 주가 이내의 사이고, 허리를 잡고 가면 한 달 이상 된 사이요, 뒤에 탄 여자가 운전하는 남자의 거시기를 잡고 가면 둘은 애인 사이라나. 헌데 거시기란 머시기가 아닐까. ㅎ ㅎ ㅎ ^ㄴ^ 설마 그럴까, 우스개 소리겠지.
저렇게 많은 오토바이 행렬 중에 헬멧이나 모자를 쓴 사람이 거의 없는데 왜일까? 비싸기도 하고, 경제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서 쓰지 않기도 한다지만, 삼사십 도를 웃도는 이 상하(常夏)의 나라에서는 헬멧을 쓴다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더워서 안 쓰는 것이란다.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 나라에는 영업용 오토바이가 있는데, 온종일 덥고 먼지와 매연이 가득한 더운 거리를 누벼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꼭 모자를 쓰고 옛날 우리네 데모꾼들이 체류 탄을 피하기 위하여 마스크 하는 모습으로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그래서 자가용 오토바이 오너는 직업 운전사와 같은 취급을 당하기 싫어서 모자를 일부러 안 쓴다니 이해할 만도 하였다. 그와 관계없이 헬멧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부유한 층에 속한다고도 한다.
사고가 나면 어떻게 될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그 배상을 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형무소로 가게 된다. 그 처리 기준은 큰 차나, cc가 높은 오토바이가. 내국인과 외국인이라면 외국인이 책임지면 되는 사회였다.
추월할 때도 우리네와 달리 중앙선 쪽으로 해야 한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보호하기 위하여서였다.
‘97년 통계로는 하노이는 자전거가 150만대에 오토바이 35만대 씨클로 8천대 노후 자동차가 3만 6천대나 되었는데 도이모이(Dou Moi)라는 쇄신 개방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매년 9만대의 오토바이와 1만 5천대의 씨클로와 1만 여대의 자동차가 늘어나고 있다’ 하니 4년이 지난 지금 하노이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의 교통지옥의 도시였다.
이렇게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베트남에서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가구마다 한 대 이상 갖고 있다.
베트남 사람은 혼자 오토바이를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을 정도로 손재주가 많은 민족이다
그래서 길가마다 노점에 간이 오토바이 수리 행상과 부속품을 파는 행상이 있다. 거기서 부속품을 사서 스스로 고쳐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일제 혼다 아니면 한국산인 이 오토바이는 관세를 45%나 물고 오는 고가 물건이어서 국민소득 330불밖에 안 되는 이 나라 국민에게는 재산 목록 1호라, 언제나 깨끗이 닦으며 위하는 것이 베트남 사람들의 일과였다. 거리 곳곳 길가 노상에는 휘발유를 팔고 있는 행상들도 보였다.
오토바이 다음으로 보이는 것이 자전거와, 앞에 둘 뒤 하나의 바퀴로 달리는 씨클로 다. 씨클로 란 손님을 앞좌석에 태우고 뒤에서 운전기사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달리는 인력거다.
하노이는 중국 북경처럼 언덕이 거의 없어 씨클로 운전을 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씨클로 들은 한 대에 200불정도 하는 것으로 영업허가를 받아야 한다.
씨클로 기사는 이것을 소유주에게 매일 1불 이상의 임대료를 내고 빌려 운전 길에 나선다. 전문적인 운전자도 있으나 이 나라 월급쟁이들의 월급이란 것이 겨우 한화로 5~6만 원 이하로 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어서 오전 아니면 오후에 부업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운전사 중에는 공무원 교사 등 인텔리 계층도 많다 한다.
이렇게 하노이에서는 근거리는 자전거로 먼 거리는 오토바이가 중요 교통수단이 된다.
220만여 명이 산다는 하노이가 이러할 진데, 1,000만 이상이 사는 우리의 수도 서울에 일반 버스나 좌석 버스 나 지하철 없이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베트남 국민들처럼 살아야 가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베트남에 와서야 우리나라가 대중교통이 발달한 지상 천국인 것을 알겠다. 출근길이 막힌다고 짜증내는 한국의 오너들은 깊이 명심할 일이다.
그렇다고 베트남인들을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베트남 국민들보다 잘난 것이 무엇인가? 이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최강국인 미국과 싸워 승리하고 통일 베트남의 신화를 이룩한 거룩한 영웅들이 아닌가.

 


갑천하(甲天下)/ 하롱베이
우리의 베트남 관광은 하롱베이부터 시작되었다.
하롱베이는 하노이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데 일찍이 프랑스의 유명한 출판사가 세계8대 불가사의 하나라고 소개하더니, 최근에 유네스코가 세계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경승지 중의 하나로 지정하여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여 주었다.
하롱베이는 그 명칭이 한자로 아래 하(下)자, 용 용(龍)자에다 영어로 만(灣)이라는 베이(bay)가 혼합된 것이다. 이름만 보아도 중국의 지배 천년과 프랑스의 지배 87년간의 슬픈 역사를 깨닫게 한다.
주위가 1,500평방킬로미터에 에메랄드 호수 같은 잔잔한 녹색 바다에 솟아오른 각가지 모양의 3,000여 개나 된다는 봉우리는 계림의 경치 몇 십 배를 하롱베이에다 모아 놓았다는 말에 우리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림의 봉우리들이 이강을 따라 배를 타고 올라가며 바라보는 산중의 경치라면, 하롱베이의 절경은 바이차이 선착장에서부터 희미하게 보이는 선경을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가는 스릴과 흥분의 즐거움이 있다.
다가가면 섬 앞에 섬이 있고, 희미한 섬 뒤에 숨어 있던 섬들이 다시 나타나고, 또 그 뒤에 섬이 있고 또 그 섬들이 각가지 모양으로 에메랄드 녹색 잔잔한 바다와 절묘하게도 어울려 다가오고 있다.
배가 선착장을 떠나기 무섭게 조그만 쪽배가 다가와 우리의 유람선에 붙는다. 갓 채취한 산호를 사라는 여인도 있고, 혹은 과일, 혹은 해산물을 사라고 조르기도 하는 모습이 여정을 돋워 주는데, 그 중에는 바구니 보트도 보였다. 바구니 보트란 대나무로 엮은 대형 바구니에 검은 기름을 묻혀 만든 1 인승 소형 보트로 노를 저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일행은 그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카메라만 들이대고 있었다.
나는 낚시꾼이라, 낚시란 기다리는 시간 예술이어서 한 번 던져 볼 시간이 없는 나그네 처지인 것을 번연히 알건만 대나무 낚시와 병에 새우 이끼를 5,000동(약0.5달라) 깎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였다.
멀리서 보이는 섬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뛰는 가슴을 안고 타이타닉 연인처럼 뱃머리에 캠코더와 디지털 카메라를 활짝 열어 두고 끄덕이며 푸른 바다 위의 보석처럼 박혀 있는 이 기암 절경, 수석을 바다에 펼쳐 놓은 듯한 필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선경(仙境)을, 캠코더에, 카메라에 담았다.
누가 계림에 와서 천하 경치를 말하지 말라고 했던가. 오랜 전쟁에서 끝난 지금은 계림이 갑천하(甲天下)라고 자랑하던 것을 하롱베이에 물려주고 계림은 을천하(乙天下)가 되어야 되겠구나 하면서.
절경이 시작되나 싶었을 때 막아서는 섬이 있고 그 앞에 많은 배들이 모여 있다. 이곳이 항다우고(Hang Dau Go)라는 말뚝 동굴이다.
1288년 몽고군이 하롱베이로 침투해 오자 이 동굴에 매복하여 있던 베트남 ‘쪈’ 장군이 말뚝을 박아 썰물을 이용하여 퇴각하는 몽고군을 수장시키고 대승했다. 그때 군사들이 그 말뚝들을 보관해 두던 동굴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바다 위에 동굴이니, 이 동굴도 계림처럼 먼 옛날에 바다 속에 있던 석회석 바위가 물에 녹았던 것이 지각의 융기 작용으로 솟아올라 저렇게 아름다운 섬과 동굴이 되었으리라.
지리학상으로 보면 하롱베이는 중국 남서부 석회암 지대가 이어진 곳이다. 북쪽 끝 중국 육지에 솟아오른 봉우리들의 무리가 구이린(桂林)이요, 남쪽 끝 바다 위에 불끈불끈 솟아오른 봉우리가 하롱베이라 한다.
삼척(三陟)에서 본 환상 동굴은 산에서 만난 동굴이었고, 계림의 동굴이나 고씨동굴은 강가에서 만난 동굴이었는데, 이 동굴은 남쪽 나라 바다 속에서 만난 항다우고(Hang Dau Go) 동굴이라서 그 종유석이나 굴속의 갖가지 형상이 더욱 환상적으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하롱베이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이 있어 우리의 베트남 가이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록 그의 떠듬거리는 이야기는 절반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눌변(訥辯)이 달변(達辯)보다 나을 때가 있다. 말 못하는 벙어리도 진실한 사랑을 얻을 수 있지 않던가. 그의 이야기는 이국적인 정취를 더해 준다.

"하늘에 하느님 있었습니다. 이 구역에 관광 내려왔습니다. 아이고, 여기 보기도 좋고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고 바다도 아름다운데 왜 사람 하나도 없느냐? 우리 사람이 없고 귀신만 있구나. 하늘에 돌아와서 하느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내려가서 귀신을 다 몰아 내보내라.
용들이 그 지시로 내려왔습니다. 용들은 적들을 다 쫓아내고도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바다도 좋고 물 맑고 여자 많고 그러니까 이 고장 살고 싶은데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화도 내고 다른 용 내려 보냈습니다. 다른 용 내려가 말했습니다. 왜 당신이 하늘에 돌아오지 않는가? 용 대답했습니다. 아이, 여기서 좋다. 여기서 살고 싶다. 할 수 없이 돌아가서 하나님 보고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식사하고 있어요. 화가 났습니다. 그럼 거기서 돌아오지 말고 살아라. 식탁을 탁- 차 버렸어요. 그러니까 식탁 위에 있는 그릇 음식 바다에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접시 모양, 닭, 새우, 거북 같은 봉우리 되었습니다. 바다에 동굴에 구석구석 용 모양 낙타, 많이많이 나타납니다.
하롱베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말로, 사진으로, 문학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이 바다 깊이 평균 30m, 큰 배 다니는 깊이 100m입니다. 물 맑고 공기 좋고 경치 좋습니다. 5시간 빙빙 돌아가면서 관광합니다."

그래 그런가. 이 산인가 봉우리인가 하는 산들이 각기 모양이 있고 3,000 봉우리 중 낙타, 버펄로, 코끼리, 거북, 싸움닭 등 이름 있는 봉우리만도 1,000여 개나 된다 한다.
하롱베이의 하이라이트는 띡땁(tig tap의 소련식 발음)이라 하는 곳. 무명으로 있다가 호치민 주석이 소련 우주인 띡땁(tig tap)과 함께 올라서 관광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마침 서양인들이 수영하는 모습과 벌거벗은 여인들의 몸매를 훔쳐보며 오르다 보니 중간과 맨 꼭대기에 정자가 있다.
새처럼 부앙하여 위에서 내려다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바다에서 보던 아름다움을 배가(倍加)하게 한다. 그래서 높이서 세상을 바라보며 살던 새들이, 비행기가 그렇게 아름다웠나 보다.
배에서는 수평으로 보이던 점점이 박혀 있는 첩첩 해중의 봉우리들이 이 정자에서는 더 많이 눈에 들어와 녹색 바다와 조화를 이루었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유토피아가 있다면, 하늘의 선경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구나 하였다.
섬들과 섬들 사이에는 이 바다에서 사는 고기를 잡아 바다 가운데 가두어 두고 활어로 파는 장수가 있다.
거북은 150 불, 다금바리는 한 마리에 60불- 하며 웬만한 베트남인의 한달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너무 쉽게 부른다. 한 마리 눈 딱 감고 시키고 싶지만 함께 간 사람을 두고 혼자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유 없이 대접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포기하였더니, 유람선 주인이 갑 오징어를 25불 주고 두 마리를 사 먹으라는데 크기가 여인의 얼굴보다 더 하다.
선상 점심은 가이드가 말하는 대로 튀김도 있고, 나물과 같이 볶음도 있고, 오래오래 끓여 요리해서 먹는다는 갖가지 음식이 있었다.
현지 식이지만 여기도 동양이라, 우리의 구미에 쩍쩍 맞는데다가 그 양과 종류가 푸짐하고 넉넉하였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가장 좋다는 타이거 비어를 마시면서, 거기다가 이 남지나해에서 잡은 수북이 썰어 놓은 갑 오징어 회를 안주하여, 보석 같이 아름답다는 하롱베이의 푸른 섬들이 지켜보는 선상에서 우리는 마냥 행복하였다.
일생 중에 이런 즐거움을 몇 번이나 겪었던가, 앞으로 몇 번이나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중국에만 계림이 있고, 베트남에만 하롱베이가 있는가?
그렇게만 믿는 이 있으면 목포에서 배를 타고 완도를 거쳐 제주를 향하여 보시라. 우리 남해의 다도해가 얼마나 어떻게 아름다운가를 보시라.
위 두 곳이 신이 자연을 통해 일궈 논 서경시라면, 우리나라 남해를 뚫고 지나가며 만나게 되는 다도해의 풍광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쓰고 있는 서정시요, 서사시의 세계다.
하노이 하롱베이가 월남의 수많은 전쟁으로 계림에게 갑천하의 지위를 물려주고 있었던 숨겨진 비경이라면, 그와 결코 못지않은 우리나라 다도해는 무심히 잊혀 지나쳐온 비경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 민족도 늦게나마 가치를 바라보는 눈을 안으로 돌리고 있는 현명한 민족이 되었다. 한국의 미래를 바라보는 신선한 느낌이다.
신토불이라 하여 곡식, 과일, 육류 등 가장 중요한 식생활에서 우리 것을 제일로 치더니, 과거부터 외제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식의 나라에서, 코리아의 전자 제품이, 화장품이, 담배가 외제를 앞지르고 있다. 품질을 우리부터 인정하게 된 것이다.
푸대접받던 국산 영화가 관객 동원에서 사상 최고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는 기뿐 소식이다. 내가 사랑하는 자식을 남들도 사랑해 주는 법이다.
타고르의 말처럼 일찍이 동방의 빛나던 횃불, 그 등불을 다시 켜고 있는 것이다.
귀국하면 달려가서. 우리의 계림, 한국의 하롱베이인 홍도와 백도를 찾아가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

 

베트남인 가이드/ 하노이
인도차이나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내가 아프리카나 북한이나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하노이 공항에 마중 나온 차 문에 ‘자동문'이라 한글로 쓰여 있었고 ,호텔의 TV Arirang이란 채널에서는 ’사랑이 뭐길래' 옛날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라오스에서도 그랬다. 한국산 관광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가 호텔에서는 LG가 만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대우가 만든 TV를 보는 것은 먼 이국땅에서의 눈물어린 감격이었다.
일본은 수십 년 전부터 우리 보다 먼저 이들 나라에 진출해 있었으나 베트남인들은 한국을 더 부러워하고 있었다. 일본은 존경하지만 한국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와 문화가 더 가까웠고, 최근에 발전한 나라요,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의 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베트남이 따라가고 싶어 하는 국가 발전 모델이 바로 우리 코리아였다.
이들 나라에서는 한국 탤런트가, 코리아 가수가 영웅처럼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한국 물건은 무엇이나 값으로도 우리나라의 몇 배의 대접을 받으며 거래되고 있었고, 한국 상표를 붙인 물건을 가진다는 것은 베트남 청소년들의 자랑이었다.
우리가 제일 처음 만난 베트남 사람은 베트남 가이드였다.

"저는 성이 황 정입니다. 우리, 우리나라 성 부르지 않고 이름 부릅니다. 그러니까 정, 정씨라 부릅니다. 저는 1960년부터 6년 북한 김척 대학에서 수력발전 전기과 배웠습니다. 졸업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는 7천 3백만입니다. 북한 남한 합한 것과 같습니다. 베트남 농사 85% 농업 나라입니다. 농업 부지런 하는데 고생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먹는데 문제없습니다. 어려운 일도 많지만 잘 뚫고 나갑니다. 여기 농사는 이모, 삼모작도 합니다. 물이 계속 있다면 삼모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이모작입니다. 외국에도 쌀 보내 줍니다. 쌀 수출 세계 2위입니다. 우리나라 민족 다민족입니다. 전체가 64개 민족입니다. 그 중에 우리 비엣 족 85%인 6,000만입니다."
정년 해서 연금을 타 먹고 있는데 굶어 죽지 않을 정도밖에 안되어서 이렇게 가이드를 하고 있다는 58세의 이 가이드의 말은 뇌성마비 자가 말하듯이 어눌하고 떠듬거려서 이해하기에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묻는 말만 대답하는 정도이어서 답답하기 그지없는데다가 그는 고집이 셌다. 월남 사람의 단점이라고 하는 체면과 특유의 고집과 자존심에다가 그는 외국 유학을 할 정도의 인텔리라 자부심이 있어 더욱 그러하였다.
그래 선가, 길가에는 넘쳐흐르는 오토바이 자전거의 물결, 인력거 씨클로나 길가에 쭉 계속되는 옥수수 쪄 가며 파는 사람이나, 사탕수수 짜서 파는 것이나, 뿔이 팔자(八字)로 우람스런 물소나, 바나나 나무 사이로 신기하게도 돌아다니는 돼지라든가, 논 가운데 있는 묘지의 특이한 모습이나, 월남 특유의 전통 여성 모자라는 팜닢 으로 만든다는 고깔 모양의 '누'나, 노동자들이 주로 쓰고 다니는 베트콩 전투모인 국방색 모자 무컹(Mu Cung), 목도체를 메고 다니는 월남 여인 등- 우리들 에트랑제가 처음 보는 낯선 풍물에 대하여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 수없이 많건만, 뒤에 멀거니 앉아 있거나 옆 사람과 잡담만 하고 있었다.
걱정하던 대로 가이드로서는 최악의 가이드를 불행하게도 우리는 만난 것이다. 그는 우리가 다음날 가기로 일정이 잡혀 있는 호치민 묘소, 박물관, 군사 기념관이 월요일이어서 휴관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을 남의 일처럼 태연히 말할 정도로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오전은 많은 돈을 들여 찾아간 하노이 시내 관광을 못하고 엉뚱하게도 베트남 대학 운동장에 우리를 풀어놓아 허송세월을 하게 하더니, 엉뚱하게도 오후에 연다고 우리를 인도하여 헛발 길을 하는 우행까지 범하였다.
이 누구의 잘못인가.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현지 가이드의 잘못 같지는 않고, 이러한 것을 모를 정도의 무능한 여행사 같지도 않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떠나올 때 여행사 사장이 비행기표 구하는데 힘이 들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알고도 밀어붙이라고 한 것 같다. 그러니 그런 회사를 선택해서 온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 같다.
차창 밖에 곱게 리본을 단 차가 지나간다.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는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세 가지 꿈을 갖고 산다. 직업, 혼인, 집을 갖는 것이다.
북 베트남의 경우에는 결혼식은 마을 어디에나 있는 전통의 공회당인 딘(亭)이라는 곳에서 한다. 혼수는 신랑 쪽에서 모두 부담하고 신부는 달랑 반지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된다. 그래서 그 과중한 부담 때문에 베트남 총각들은 퍽 결혼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럼 돈 없는 총각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월남 속담에 삐뚤어진 그릇에는 삐뚤어진 뚜껑이 있다."
하며 낄낄거린다. 사흘 동안 그로부터 들은 가장 시원한 대답이었다.


Korea의 호치민은 언제나 곁에 오시려나/ 호치민 묘
베트남 국민의 영웅에 호치민이 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을 오로지 조국 베트남을 위해 바친 베트남의 영웅이다.
그의 생일과 서거 일을 국경일로 쇨 정도로 베트남 국민은 모두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는 영어, 러시아어, 불어에 능통한 인텔리이기도 하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호 아저씨'로 부르며 따른다.
거대한 미국과 싸워 베트남의 통일을 쟁취한 호치민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베트남인의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남아 베트남인의 우상으로 영원할 것이다.
호치민의 묘는 하노이 시 서북쪽 널찍한 바딘(Ba Din) 광장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다.
참배객들은 누구나 200m 전방에서 걸어서 들어와야 한다. 참배 중에는 모자를 써서도, 반바지를 입어도, 웃어도, 말을 하여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도, 사진기나 비디오를 갖고 들어가서도, 짐을 들고 들어가도 안 된다. 물건들은 보관소에 모두 맡겨야 한다.
이런 설명이 없어도 질서 있게 늘어선 엄숙한 행렬에 끼었더니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층계를 거쳐 묘소 입구에 들어서니 '자주와 자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는 글귀가 있다. 호치민의 말인 것 같다.
79세로 간 호치민 주석은 영원히 썩지 않도록 처리되어 양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포개고 검은 이불에 덮여 잠자듯이 평화스런 얼굴로 누워 있는데 도시 죽은 사람 같지 않고 위엄이 감돈다.
그 옆에 흰 제복의 병사들이 그 주위를 부동자세로 서서 이 귀한 영웅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무덤 내에는 냉난방 시설과 조명이 성스럽게 쾌적하게도 잘되어 있었다.
참배는 그의 주변을 천천히 도는 것으로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한 10여분으로 족하였다.
호치민 기념 묘 남서쪽에 호치민 박물관이 있다.
여기에는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의 유물과 관계 서류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생전의 전쟁터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 아이들을 안고 있는 모습 등 사진이 많았다. 그중 옥중에서 호치민 주석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가장 크게 눈에 뜨인다.

身體在獄中 (몸은 옥중에 있어도)
精神在獄外 (정신은 옥 밖에 있어라)
欲成大事業 (큰 일 이루고자 하나)
精神更要大 (정신은 다시 더 커야겠도다)

우리 한국 국민들은 언제나 베트남 국민처럼 국민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도자를 만나게 될까. 언제나 호치민 같은 통일을 이룰 그런 지도자가 우리 곁에 오시려나.
자기를 위해 헌법을 고치다 쫓겨나고, 무리하게 장기 집권 하려다가 부하에게 총 맞아 죽고, 부정으로 축재하다가 형무소에 가는 우리나라 지도자들. 대통령이 국민의 웃음거리가 되거나 미움 받는 지도자를 우리는 언제나 보지 않게 될까.
호치민 묘소에 서니 베트남 국민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Korea의 호치민은 언제나 곁에 오시려나.

 

하노이에서 만난 여인 제니파존스/ 하노이
결혼하면 신부는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된다.
결혼식 날은 되도록 짝수 날로 한다. 결혼식 날은 물론, 베트남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도, 물건을 살 때까지도 짝수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신혼 신부 나이 차도 띠의 차이가 짝수인 넷인 것을 좋아한다. 띠를 말하는 12간지에서 우리와 다른 것은 토끼띠가 빠지고 대신 고양이 띠가 들어간다.
결혼하면 신부는 남편의 성을 따르고 집을 구할 때까지 대개가 처가살이를 한다.
우리와 같이 아들 낳기를 좋아하고, 장손은 집안에서 상당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가장이 밧홍(가정제단)에 향불을 켜는 것으로부터 일과가 시작한다. 유교를 숭상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손이 가장 많은 상속을 받고 닷호(dat ho)라고 불리는 제사 명목의 땅을 상속받기도 한다.
베트남에는 환갑잔치가 없는 대신에 상수(上壽)라는 7순 행사가 있다.
시장에서 거리에서 만난 베트남 사람들은 표정이 밝고 우리네 외국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무례하게 카메라를 허락 없이 들이대도 놀라기는 했으나 곧 밝게 웃어 주었다. 자기네들과 싸우기 위해 맹호 부대, 백마 부대를 파견한 과거의 적국에서 온 우리들을, 미국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과거의 일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손재주가 좋고 끈기가 있으며 외세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민족이지만, 자기들끼리의 마음속에는 우리나라가 경상도 전라도로 동서로 선을 긋고 사는 것보다 더 크게, 하노이 시와 호치민시를 중심으로 남북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금을 그어 놓고 속으로 앙앙거리며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통일 후에 어쩌면 겪어야 할 일 같아 학자가 있어 그 연구를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공원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여인이 우리를 보고 까맣게 웃는다. 검은 이빨 흑치(黑齒ramg den)로 웃기 때문이다. 산에서 나는 뱅꿴이라는 나뭇잎을 사용하여 흑치를 만든다는데 흑치를 만들어주는 상점들이 있다 한다. 그러나 중국의 전족처럼 지금은 구세대들이나 하는, 없어져 가는 전통적인 풍습이었다.
야자수 비슷한 크기의 벡텔이란 나무를 심어 놓은 집이 많았다. 이를 씹어 빨개지는 입술과 흑치는 과거 베트남 여인 미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인가. 밖에 나가면 끈질기게 걸인이 딸아 붙었다. 전쟁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어 지뢰에 손발이 잘린 장애인이 너무나 많이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아침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니 거리 길가에서 앉아 밥을 사 먹는 수없이 사람이 많았다.
장 선생과 김 교장과 셋이서 어제 간 생맥주 집에를 갔더니 제니파존스가 반갑게 우릴 맞는다. 후리후리한 키에 월남 특유의 곱게 빠진 몸매로 머리를 두 갈래로 따고 청바지를 입었는데, 항상 웃는 모습 중 반달 같은 눈썹이 눈과 시원하게 먼 것이 영화 '모정'에 나오는 제니파존스를 닮았다고 해서 어제부터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저 청바지를 벗고 아오자이를 입는다면 정말 제니파존스 같을 거다.
어제는 생맥주 5잔에 바나나 잎으로 싼 저민 고기 2개를 먹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상위에 동(베트남 돈)을 죽 펴놓았더니 12,000동을 가져간다. 미화로 1.5불 그러니까 2,000원 주고 맥주 5잔을 먹었으니 얼마나 싸냐. 거져다, 거져.
제니파존스에게 준비 해간 비행기에서 얻은 눈가리개를 주었더니 생각 이상으로 고마워한다. 지금도 이 나이 지긋한 이국인을 생각하며 이국 월남 처녀가 그걸 쓰고 잠들겠지 생각하면 흐뭇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제니파존스는 퇴근 시간이 되었는지 옷을 갈아입더니 주방 쪽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가며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린 서로 오른 손바닥을 타 악 마주치며- ‘하이 화이브(hi five)!' 하는 것으로 이별을 했다. 우리는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것이 인연인가 보다.
거기서 일하는 그녀보다 더 젊은 5명 아가씨에게 술이나 콜라 사 먹으라고 2 달러를 주었더니 눈이 마주 칠 때마다 즐겁게 웃으며 건배 시늉을 한다.
볶아 온 고기를 양념해서 호기 있게 양껏 마시고 나니 김 교장이 한턱낸다. 4달러였다. 오늘은 제일 맛있는 술을 먹었다. 공술보다 더 맛있는 게 어디 있더냐.

 

주마간산의 전승기념관/ 호치민시 군사박물관
어제가 월요일이라 휴관하여 못 본 호치민 묘와 호치민 박물관을 둘러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의 구 병영 안에 있다는 군사 박물관을 갔다.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과 프랑스와 미국과의 투쟁의 역사라, 사이공 함락과 같은 승리의 역사는, 작년에 러시아 전승 기념관에서 가서 느낀 것처럼 우리를 부러워하게 하였다. 전승을 기념하는 나라도 있는데 우리 민족은 고작 해방이나 기뻐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군사 박물관 입구 광장에는 미그21기가 있었고 2층 전시실에는 이것으로 격추시켰다는 미국 B52기의 잔해를 모아 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중 고마운 것은 우리와 국교 수교 후 과거 그들의 적대국이었던 맹호, 백마 부대의 자료를 전시실에서 치워 버린 것이다.
어제 헛걸음하며 허송한 세월은 호치민 묘와 박물관과 군사 박물관을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들러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오스 행 비행기 시간 11시 50분에 늦지 않기 위해서 2시간 만에 세 곳을 끝냈으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그래서 하노이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하는 60m 높이의 6각형 깃대(旗臺)도 바로 옆에 두고도 생략하였고, 전시실의 일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비싼 돈 주고 해외까지 나와서 화를 내며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큰 낭비인가 하는 것을 익히 경험한 바라. 라오스 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미련을 버리기로 하였다.
가자,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Bientain)으로!


Ⅸ.라오스 기행
사바디(안녕하십니까?)/ 라오스
우리가 하노이에서 라오스 비엔티엔 까지 타고 갈 비행기가 프로펠러 비행기라니 갑자기 으스스한 두려움이 앞서는데 대구에서 오신 100 개국 이상 해외여행을 다녔다는 80객 황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안전도에 있어서는 프로펠러 비행기가 제일이라고. 비상시에 활강할 수 있어서란다.
라오스 왓타이공항(Wattay Airport)에서 비엔티엔(Bientane) 시내까지는 한 10여분 정도로 가까웠다.
Bientane(비엔티엔)의 현지 원 라오스 발음은 ‘위엥찬'(Wieng:도시 Chan:달)이다. 낭만적이게도 '달의 도시'란 의미였다. 이를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이 영어 알파벳순으로 읽어 비엔티엔(Bientin)이 되었다는 것이다.
라오스는 국민의 90% 이상이 벼농사를 짓는 농업국이라 관개시설이 부족하여 이웃나라에서는 5기작을 한다는데도 2기작(二期作)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끊임없는 내전으로 농업 국가이면서 식량마저 자급자족이 안 되는 나라다. 슈퍼에 가득한 물건은 모두 이웃나라 태국에서 수입해 온 것이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은 가난한 나라라서 노래도 악보도 없이 외워서 연주하며, 시내 웬만한 광고나 간판 그림은 직접 그려 붙이고 있었다.
무용단 중에서 여자 역할은 어린 소년이 분장하여 대신한다. 옛날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남쪽 나라 라오스에 와서 보니 신기하기 그지없다.
시내에 들어서니 갑자기 조용해진다. 하노이에서 귀가 아프도록 듣던 오토바이 소리도 딱 멈추었고, 높고 큰 건물이 없는 나직한 도시를 푸른 하늘이 푹 덮고 있는 것이 한적한 시골 농촌에 온 것 같다.
월남전 때 라오스는 베트콩 편에 서서 무기고 역할을 하여 주는 바람에 미군에게 2차 대전 때 퍼부은 폭탄보다 더 많은 폭격을 받아서 국토가 초토화되었다더니 그래 그런가. 사원 빼고는 큰 건물이 거의 없다. 가로수 우거지 조용한 숲의 도시일 뿐이었다.
간간이 자전거와 오토바이 사이사이에 오토바이 뒤에 인력거를 연결시켜 화려하게 팽키 칠을 한 세 바퀴 차가 지나간다. 저것이 이름으로만 듣던 ‘투투'로구나.
중앙선도 없는 포장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붉은 황톳길이다.
이 나라에 도로는 13,971km뿐인데 그 중 25%가 포장도로요, 34%가 자갈로 겨우 닦인 길이고, 41%가 비가 오면 차가 도저히 다닐 수 없는 진창길이다.
차창밖에 위험하게도 차 뒤에 승객이 매달려 가는 송태우 라 불리는 승객용 트럭이 지붕 위에 짐을 가득 싣고 지나간다. 옛날 이집트 피라미드를 만나러 가 던 길에 룩소르에서 보던 모습이다.
도착한 시간이 점심시간이어서 우리는 메콩 강 가 현지 음식점으로 향하였다.
메콩 강 바로 저 넘어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그래도 제일 잘 산다는 나라 태국이다. 이 나라 해외 자본 중 60%를 투자하고 있다는 태국이다.
슈퍼마켓에 없는 것 없이 가득한 물건은 이웃 나라 태국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그래서 태국보다 더 물가가 비쌌고, 자기 나라 돈 킷(kip)보다 태국 돈 밧(baht)을 주는 것을 라오스 사람들은 더 좋아하였다. 인플레 때문이었다.
라오스는 한반도의 1.1배의 나라다. 국토가 사방으로 뺑뺑 둘러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중국과 국경을 접하여 내륙 속에 완전히 갇혀 있는 내륙 국가이다.
인구는 약 5,410만으로 국민 95%가 불교를 믿지마는, 국교가 불교는 아니다. 68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60%가 라오(Lao)족이라서 나라 이름을 라오스라 하였다.
국토 면적의 90%가 산악 지형으로 라오스에서 가장 높다는 푸비아는 해발 2,814m나 된다.
메콩 강 가에 경작이 가능한 지역이 겨우 4%이기 때문에 농업 국가이면서 자급자족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GNP겨우 250불, 공무원 월급이 50,000킵(kip)로 1불이 900킵(kip)이라니 한 달 월급이 5만원 내외의 가난한 나라다.
이 나라는 신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방글라데시 다음으로 아세아 최빈국 중의 하나인 나라다. 평균 수명은 46세. 의료 시설이 거의 없고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문맹률은 15세 이상이 40%인 나라다. 정식 국명은 라오 인민공화국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이 나라에는 기차도 없다. 내륙국이지만 메콩 강을 지키는 해군이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와는 180번째 수교국으로 베트남과 같이 한국을 자기 나라 발전의 모델 국가로 보며 한국을 ‘까오리'하며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라다.
수도 인구 50만이 사는 이곳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란장 거리에 들어서도 고색창연한 사원과 어울린 가로수와 어울린 조용한 거리는 소음과 매연에서 찌들며 살아온 우리에게는 오래 전에 잃어버린 그리운 고향에 온 것 같아 허락만 된다면 계속 여기서 눌러 살고 싶은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래서 세계 사람들이 ‘은둔의 나라' 또는 ’지구상에서 가장 신비스러운 나라'라고 말하나 보다.
동행한 김 교장이 라오스에 무얼 볼께 있느냐, 무얼 보았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난다고 하지만, 나는 그랬다. 불교 사원과 자연뿐, 볼 게 없는 것이 라오스의 볼거리라고.
옛날에는 왕국이었다가 그 후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이었다가 1975년부터 지금까지 베트남처럼 민족 지상주의를 내세우는 대통령제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우리 일행을 마중 나온 영어로 인도하는 가이드는 내가 평생 동안 만나 본 적이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영국 풍(?)의 신사였다.
일일이 차에서 내리고 탈 때마다 조심스레 우리들을 보살펴 주는 것은 그대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친절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찾아간 음식점의 종업원들이 베푸는 서비스도 우리를 편안하고 즐겁게 하였다. 우리가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동방예의지국을 먼 이국 땅 라오스에서 와서 남방예의지국(南方禮儀之國)을 찾아낸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불교 나라답게 착하고 온순하고 상냥한 라오스 사람들에게 이 푸짐한 생선과, 열대 과일인 망고, 바나나, 파파야, 수박, 둘리안 들이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물어 보며 라오스 특유의 전통 요리를 먹고 있었다. 이 나라 풍습대로 맨손으로 먹는 쌀밥 앞에서 황토 빛 메콩 강을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행복하였다.
이런 행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구나. 해외여행은 잘 보고, 잘 먹고, 잘 자는 건데 지금은 호식하고 있구나 하면서….

 

빠뚜사다.
메콩 강의 낙조/ 라오스 비엔티안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독립 기념문 빠뚜사다.
모양과 크기가 프랑스의 개선문을 닮아서, 아래는 프랑스식, 위는 라오스 식 오리엔탈 바로크 식인데 덩치에 비해 시멘트의 조잡한 건물인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요즈음 얼마나 가난한 나라인가를 말해 주기 위해 일부러 세워 놓은 건물 같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1층 기념품 가게를 지나 전망대까지는 시멘트 층계인데 올라가는 손잡이도 없어 짓다 만 엉성한 고층 아파트 같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이 전망대 6층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라오스 시내는 건물은 안보이고 숲과 붉은 황토 아스팔트에 드문드문 차가 다니고 집 몇 채가 보일 뿐이다. 이름으로 보아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되어 이를 기념하는 기념문 같다.
다음에 찾아간 곳이 불교 나라 라오스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는 왓시켓(Wat Si Saket)이다. 이 사원은 1818연 아노우봉(Anuvong)왕에 의해 세워진 사원이다.
외침이 많은 이 나라에 1828년 삼족의 침입을 용케도 피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옛날 그대로의 유일한 사원이다.
이 사원에는 하나의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사찰과는 달리 크고 작은 불상만도 무려 6,840여 개나 모시고 있는데 18세기에 출간 된 경전과 함께 이 나라 국보로 보전되고 있다.
그중 가장 아름답고 귀한 불상들이 있는 본전은 안타깝게도 촬영이 금지되고 신발과 모자를 벗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본전 주위를 빙- 디귿자 모양의 회랑이 본전을 둘러싸고 있는데, 혹은 좌상으로 혹은 입상으로 등신대의 불상들이 본전 불을 지키듯이 둘러 서 있다.
그 중 입구에 있는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서서 하는 불상의 말씀이 ‘이제 전쟁과 내란을 고만하시오’ 하는 모습이란다.
부처 앞에 초록색 한국 정종 병 모양의 크기의 꽃 같은 것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이 나라에서 흔한 바나나 잎을 곱게 접은 것이다.
길 건너에 있는 왓프릿케오(Wat Pra Kaew)는 ‘왓'이란 이름처럼 사원이면서도 박물관을 겸한 곳이기 때문에, 라오스 관광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명소로 비엔티안에서는 가장 볼 만한 곳이었다. 그 본전 내부도 물론 촬영이 금지된 곳이다.
본전 중앙에 철불(鐵佛)인가 커다란 검은 불상이 주황색 장삼을 걸치고서 수많은 석불과 청동불을 거느리고 있다.
이곳에 모신 부처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에메랄드 부처 좌상이다.
그 원래 부처는 옛날에 약탈당해 태국에 가 있고, 1942년에 원형과 동일하게 만들어 모셔 놓았는데 녹색 에메랄드 불상은 크기가 한두 살 먹은 아이 만하였다.
여행에서는 아는 만큼 본다 하였는데 불상에 대하여 문외한인 나이지만, 불상을 보니 아내 생각이 난다. 자식들 다 여의고 나보다 먼저 인도차이나 반도를 다녀왔다 하여 혼자 집을 지키고 있는 불교 신자 아내다.
그 병약한 아내의 건강을 위해 외국에 나오면 유난히 커 보이는 1달러를 에메랄드 부처님께 정성껏 시주하였다. 나무 관세음보살 하면서-.

비엔티엔은 메콩 강 지류 라오 강을 끼고 발달한 남국 도시라, 우리는 야자수와 바나나 잎이 우거진, 강 너머 서쪽 나라 태국으로 지는 낙조가 유명하다 하여 메콩 강 가에 갔더니 지금은 건기(乾期)라 강심(江心)에서는 준설기로 모래를 강안(江岸)으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어 내륙국의 하천 사랑을 생각게 하는데, 남루한 차림의 부부가 어린 딸을 대리고 야자열매를 팔고 있다.
야자수는 10m~30m 정도나 키가 크다. 그 위에 시원하게 닥지닥지 열린 열매는 어떻게 딸까?
나무 잘 타는 이가 큰 야자나무에 올라 손으로 가지를 잡고 야자열매를 발로 차 떨어뜨린다.
그러면 마제트라는 네모난 사각형 칼로 야자수의 껍질을 도끼처럼 내리 쳐서 구멍을 내면, 그 섬유질 구멍 사이로 대롱을 넣어 배젖이라는 야자유를 빨아먹는다.
그러면 그걸 다시 마제트로 반으로 갈라 주면 흰 부분을 숟가락으로 닥닥 긁어먹거나 밥에 비며 먹는다는데 생각처럼, 모양처럼 맛있지는 않았다.
이 코아(coir)이라 하는 야자 껍질은 취사용 땔감으로 쓰이거나, 말려서 그릇으로 쓰이기도 한다. 야자 잎은 잘 말려서 지붕을 덮기도 하고 내가 1달러 주고 사서 쓰고 다니는 모자를 엮는 재료로도 쓰인다.
이 야자수 열매에는 사탕수수처럼 당분이 있다. 이것만을 갈아 야자 캬라멜을 만들기도 하고 그 뿌리는 약용으로 쓰인다니 이 야자수는 하나도 버릴게 없는 필요하고 요긴한 열대 지방 사람들의 경제 식물이다.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가 묻는다. 야자는 일 년에 몇 번 따냐고? 바나나는 2~3번 따고 야자는 1번 딴다고 들은 것 같다.
여행의 다섯째 날 해가 지고 있다. 고국 한국에서는 2시간 전에 진 해를 바라보며, 생각해 보았다.
작년에 다녀온 북구의 나라들은 열악한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고 지상의 낙원을 이룩하였는데, 몇 배나 더 좋은 천혜의 자연적 조건을 갖고 사는 메콩 강 가 나라의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까?
나그네 카메라에는 이국 하늘의 불타는 저녁노을을, 다시 볼 수 없는 남국의 석양을 계속 담고 있었다.

동해에 해 뜨고
메콩 강에 해지는데
태양 밖에도 사는 나라
태양 속에만 사는 나라
빈부가
그 사이에서
서로 뿌릴 내렸구나.
- 라오스의 메콩 강 낙조

고물 유람선/ 남금댐
라오스에서도 그중 좋다는 라오스 프라자 호텔에서 우리는 이틀을 묵는다.
하여 짐 싸는 것은 내일로 미뤄 두고 여행가 장 선생과 함께 아침 산보에 나섰더니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색창연한 높은 탑이 길을 막아선다.
탑은 너무 후락하여 시멘트로 땜질한 흔적도 군데군데 보이는데 그래도 곳곳에 흙이 흘러내리고 있는 아주 높은 뾰족탑이었다.
탑 주변에는 바나나 잎으로 엮어 만든 정종 병 모양의 화분과 향대(香臺)가 여기에도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아랫부분이 사각 기단인 것을 보면 어제 관광 엽서에서 본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탑 탓담(Tat Dam)인 것 같다.
내 또래의 남루한 모습의 노인이 그 옆을 지나가기에 '헤이-하고 불러 인사를 건네니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라이터를 꺼내 켜 보이며 주려 하였더니 이상하게도 수리해 주겠다는 태도다.
라이터를 그에게 주고 탑을 배경 삼아 함께 사진 한 장을 찍은 다음 천천히 버스 정거장 근처에 이르렀더니, 이 먼 이국땅에서 반가이 내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일까?
아까 만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길가 노점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입은 옷보다도 더 남루하고 잡다한 슬리퍼와 고무신짝을 수없이 늘어놓고 있다. 그것을 수리해 주고 사는 노점 상인이었다.
그 바로 옆에 흑인 같이 새까만 피부의 사람이 아내와 함께 말린 야자수 긴 나무에 불을 지피고 있어 그에게도 준비 해간 일회용 라이터를 하나 주며 수작을 걸었더니, 옆에서 웃으며 영어로 참견하는 사람이 있다. 위통은 홀딱 벗었고 수건 같은 것으로 아래를 두른 50대 중반의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짧은 영어지만 우리는 서로 의사가 통하여 시간이 있으면 오늘 저녁 7시쯤 여기서 술 한 잔 하기로 부질없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더니, 이것이 이 여행에서 두고두고 기억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줄이야.
오늘 일정은 마애석불을 보고 남굼댐(Namgum Dam) 유람 후에 반모 소금 마을 들르는 것이다. 시간이 남으면 꼭 찾아가 새벽의 현지인과 한 잔 해야지….
차가 시내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하자 남국의 드높은 야자나무, 바나나 나무 가로수 길을 차는 신나게 달리고 있다.
길은 뻥- 뚫리어 앞에도 뒤에도 달리는 것은 우리가 탄 차일 뿐 적막강산이다.
길가 집들이 우리네와 달라서 궁금해 하던 중, 화장실도 이용할 겸 길가 농가에 들렀더니, 막 중학교 졸업했을까 하는 나이의 소녀가 쟁반에 받쳐 컵과 함께 냉수를 내놓는다.
물을 사 먹어야 하는 이 나라에서는 친절 중의 큰 친절이었다.
하도 고마워서 갖고 있던 볼펜 중 좋은 것을 하나 골라 주었더니 서울 가이드 미스터 추(秋)군이 한 마디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의 버릇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순수한 저들의 마음의 친절을 우리네 같은 관광객이 있어 뒤바꾸게 한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렇기도 하지만 하노이에서 일정을 잘못 잡았다고 야단을 쳤더니 그 답장이 온 것도 같다. 좋은 일하고도 이렇게 무안을 당하니 이럴 때는 어떻게 한다지?
이곳 집들은 방이 땅과 떨어져 위에 있다. 열대지방이라서 그런가. 1층에는 네 기둥만으로 비어 있거나 아니면 사람은 위에 살고 아래는 가축을 기르거나 창고로 쓰인다.
이 집에서도 1층은 화장실과 부엌 창고로 쓰고 있었다. 목욕탕 욕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래도 잘사는 집인 것 같다.
화장실은 욕조의 물을 퍼서 씻어 내는 것인지 하얀 타일 변기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물은 파이프 없이 그냥 밖으로 흐르게 고랑을 파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이 옆에 있는 연꽃 핀 연못으로 흐른다. 이것이 그래도 잘산다는 라오스의 전통 가옥을 개량한 집이었다.
비엔티안에서 85km 떨어진 지점에 남굼 댐(Namgum Dam)이 있다. 산악이 많은 이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수력발전 시설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설치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 여기에서 발전되는 전력의 절반은 이웃나라 태국에 수출하고 있다. 전력 수출은 이 나라 외화 벌이의 제 1 순위에 해당한다.

거기서 얼마 안 간 남굼 선창가에서 우릴 태울 배가 기다리고 있는데, 햇빛을 가리 울 수 있는 차양이 있는 것 외에 유람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앞으로 세상 어느 관광을 가도 이런 배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라는 것이 일행의 공통으로 하는 말이었다.
핸들과 그 뒤에 엉성한 쇠 의자를 보니 분명 운전석인 것 같은데 그 앞에 통나무 조각에 밧줄을 감아서 톱니바퀴 대신 배 옆으로 빙 둘러 키를 조정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1,000년 전의 옛날 배를 탄 것 같다. 이걸 타고 가다 고장 나면 어쩐다지-.
저 멀리 보이는 드문드문 떠 있는 자그마한 붉은 섬과 선착장 사이에 전망대라 하여 훵 뚫린 저 초라한 3층 시멘트 구조물을 보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온 나그네를 위한 선상 유람이라지만 그 배, 그 시설의 초라함이란. 천하 절경이라는 하롱베이를 둘러보고 오는 우리 눈 높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라 하는 것인가 하는데 이 낡은 배는 이국 땅 라오스의 젖줄이라고 하는 남굼 강(Namgum )의 경치를 돌아 이 남굼 강에서 잡은 생선으로 점심을 먹게 되는 남궁 식당을 향하고 있다. 시장기가 돈다.

 

 

소금마을의 아이들/ 라오스 반모
반모 소금마을에 가까이 오니 어디선가 땅땅 치는 쇳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릴까?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이 어느 날 우물을 파고 보니, 나온 것은 물이 아니라 천만 뜻밖에도 하얀 소금물이었다. 바다 없는 이 나라의 육지에서 소금물이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그들은 그들이 믿는 부처님께 얼마나 고마워하며 감사 드렸을까. 아득한 옛날 바다였던 이 곳이 융기 작용으로 이렇게 내륙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 이 마을이 반모 소금 마을이 되어 이렇게 관광객까지 부르게 되었다.
입구 높은 탱크 위 파이프에서는 펑펑- 하얀 소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주민들이 이를 받아다가 커다란 구유 같은 쇠그릇에 담아 톱밥에 불을 붙여서 하얀 소금을 구어 낸다. 그 열이 강하고 세어야 하기 때문에 그 옆에 톱밥을 발로 다지는 힘든 작업을 이렇게 매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소금 1kg을 만들어야 1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사는 길이요,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그 옆에는 학교를 갔어야 할 15세 전후의 아들이 막대기로 땅땅 치며 구유에 붙어 있는 하얀 소금을 털어 내고 있었다.
관광객의 칭찬을 표정으로 듣고 신이 나서 더욱 힘차게 땅땅- 치며 소금을 털어 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에게 볼펜을 하나 주었더니 잽싸게 딸이 빼앗듯 치뜨려 간다. 아들이 물끄러미 보는 앞에서.
한 어른이 위통도 벗은 채, 팬티가 보이는 찢어진 남루한 반바지를 입고 맨발로 열심히 톱밥을 밟고 있다.
그 옆에 있는 그들의 잠자리를 몰래 들여다보았더니 까치집 같은 곳에 여기서는 1달러면 살 수 있는 그물 침대 해먹이 그 중 좋은 가구였다.
또 한 사람은 전쟁 때문인가. 그때 묻어 놓았다는 지뢰 때문인가. 손마디 하나가 몽땅 잘려 나가 손대신 팔로 일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를 더욱 측은하게 하였다. 그 팔로 소금을 퍼내는 모습이 더욱 그러하였다.
소금마을에 들러 오는 우리들의 마음은 어두웠다.
이들이 열심히 밟고 있는 톱밥은 톱밥이 아니라 그들의 고단한 인생이었고, 아이들이 땅땅 소금을 털어 내려치고 있는 소리는 삶의 고달픈 아우성이었다.
아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손을 벌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일행 중에는 껌을 나누어주는 사람, 설탕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개중에는 여러 개를 받아 흐뭇해하는 놈도 있는가 하면, 그걸 못 받았다고 뒷전에서 울고 있는 아이도 있다.
그들 속에는 해방 직후 인천에 상륙한 미군을 상대로 하여 ‘헬로 껌-'하며 손을 내밀던 나의 어린 시절도 섞여 있었다.
비엔티엔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메콩 강 다리는 관광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건너가기로 하였는데, 저 아래 강가에 몸을 담그고서 40대의 한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다.
라오스 전통 숄 하나만 두른 체 허리를 물에 담그고 몸을 씻고 있다. 상하 좌우로 씻고 있다가 가끔씩 손이 남세스럽게도 은밀한 아랫도리를 닦고 있다. 그런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는 짓궂은 사람이로구나.
이것은 라오스 어느 강가에서나 저녁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라오스의 목욕 문화였다.

 

라오스 귀부인의 술대접/ 비엔티엔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혹시나 해서 술을 좋아하는 김 교장, 장 선생과 함께 약속했던 아침의 장소로 가보니, 길가로 면한 그의 집 정원, 돌 식탁 빙 둘러 몇 사람이 어울려 술을 마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종 병에 약초를 술에 넣은 것으로 보아, 한 잔만이라도 맛보고 싶어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우리의 막걸리 같은 라오스 가정집에서 담근 라오스 전통 술이었다.
안주 값으로 갖고 있던 라오스 돈 킵(kip 한 4불정도)을 다 내놓으니 그의 3째 아들이 안주를 사러 가서 회 같기도 하고 쇠고기를 넣어 얼음에 넣은 것 같기도 한 것을 사 왔는데 의외로 맛이 있다.
내 옆에는 장 선생, 그 옆에는 라오스 대학을 나왔다는 40대의 그의 처남, 그 옆에는 우리를 술대접하는 주인 시샵(Sisavpth) 그리고 우리의 김 교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후진국에서의 부자는 고위 관리 아니면 경찰이나 군인이라더니, 헌병 소령으로 제대한 시샵은 부자였다.
이 길가에 집 3채가 다 그의 집이요, 그 앞에 자동차가 서너 대가 그의 것이었다.
술을 따라 주기에 잔을 좀 씻어 달라 손짓하였더니 표정이 굳어진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표정이다.
얼마 있더니 호리병에 담긴 술을 가져오라 하여 먹자 한다. 그걸 한 잔 먼저 먹자고 했더니 마시던 정종 병의 담근 술을 가리키며 영어로 말한다. “You must finish this wine." 한다. 두 번째로 이 나라 주법(酒法)을 어긴 것이다.
머리를 조아리며 “Ok I understand."하였다.
저는 라오스 식 영어로 하고 나는 부록큰 잉글리시니 서로 피장파장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더욱 영어를 쓰기가 편했다.
“After I remember your kindness long long time." 하니 그도 ”Ok I understand." 하며 머리를 끄덕인다.
이거다 이거. 문법에 맞지 않으면 어때. 자고로 언어란 의사가 서로 통하면 되는 거야, 되는 거.
첫 번째 술이 다하니까 주인 시샵이 집을 향해 큰소리로 누군가를 부른다. 대답과 함께 나타나는 이가 그의 부인이었다.
귀한 파티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정숙한 미인이었다. 이 나라에서도 돈과 지위는 미녀를 소유하게 되나 보다.
그 귀한 부인이 술잔을 따르기에 누굴 먼저 주나 했는데 반을 따르더니 자기가 먼저 마신다. 그러더니 왼쪽으로부터 차례차례 술잔을 돌린다.
하노이에서 제니파존스를 만났더니 여기서는 미녀 귀부인을 만난데다가, 금상첨화로 손수 딸아 주는 술이라. 나는 너무 황홀하고 황송하여 자청하여 몇 잔을 더 마시었다.
주인 시샵은 김 교장에게, 나에게 뺨에 입을 맞춘다. 라오스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호의인가 보다.
이 고마운 거시기를 어떻게 한다. 그렇다 머시기 하자. 내가 누군가, 카메라맨이 아닌가. 하여 그의 딸과 아내와 고마운 시샵을 카메라에 담으며 말했다. “If I comeback to korea. I send this picture for you." 시샵이 말했다. ”Thank you."
우리 셋은 돌아오면서 환상적인 이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면서 그랬다. 오늘 시샵을 만나니 술도 술이지만, 내 부록큰 영어가 많이 늘었노라고 --. 호텔에 돌아와서 취한 김에 시 한 수 써 보았다.
이 열쇠 모양의 나라 라오스를, 마치 한국을 읊은 타골의 마음이 되어-.


꽉 막힌 국토처럼

가난에 갇혔어도
*까올리가 잃은 예절
라오스엔 살아있네
그 열쇠
국토를 여는 날
인도차이나 횃불 되리
-횃불 되리
*까올리:코리아를 라오스인이 부르는 말

Ⅹ. 캄보디아 기행
캄보디아란 어떤 나라인가
캄보디아는 한반도의 4/5인 181,035㎦에 인구 1,100만 명이 사는 나라다. 국민 소득이 겨우 330불정도 되는 아시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다. 평균수명이 겨우 50세도 못 미치는 것은 도시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의료 시설이 전무하다 싶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면 몰핀(마약)을 먹는다. 농촌 마을 어디서도 대마초를 누구나 쉽게 구할 수가 있다. 그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입원할 정도의 병자가 생기면 이웃나라 태국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라오스처럼 캄보디아 화폐 릴(Reel)보다 태국 화폐 바트(Bait)를 더 선호한다.
캄보디아는 서쪽에 태국, 북쪽에 라오스, 동남쪽에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태국과 베트남의 침입과 지배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슬픈 킬링필드로 알려진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뼈저린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나라는 1966년에 제1회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정도로 옛날에는 우리보다 더 잘 살던 나라이었으나, 그 동안의 전쟁과 잦은 내전으로 인하여 1970년부터 국가 발전이 멈추어 버려서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난한 나라 속에 속하고 말았다.
지금도 국토 전역에서는 총칼을 갖고 있는 반대파 무리가 있고, 전쟁 후유증으로 지뢰를 조심해야 하는 나라이다.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AIDS 증가율이 세계 최고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국민들의 낮은 교육 수준으로 인하여 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서다.
캄보디아 민족은 크메르족이 90%로 9세기부터 사용하던 국명은 캄푸치아였다.
캄푸치아(Kampuchea)는 20세기 침략해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이를 불어로 캄보츠 영어로는 캄보디아로 읽히어 캄보디아가 되었다.
캄보디아 지도를 보면 호주와 비슷하게 생겼다.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선을 긋던 메콩 강이 캄보디아 남동부의 캄푸차 평원 중앙을 뚫고 흘러가며 만들어 놓은 비옥한 평원 국가이다.
남쪽을 향하여 비잉 북동서 삼면으로 둘러싼 산지가 중앙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거기서 흘러내리는 모든 강이 움푹 들어간 중앙 호수 톤레샵(Tole Sap)에 모여든다.
그렇게 형성된 이 호수의 지름이 자그마치 400리로, 160km나 되는 바다 같은 호수를 이룬다.
그래서 이름도 이 나라 말로 대호수(大湖水)라는 의미의 톤레삽(Tole Sap)이 되었다.
만약 그 동안 불행한 전쟁과 내란만 없었다면, 메콩 강과 톤레삽으로 형성된 이 평원에서의 3~5 기작(期作)의 농사와 어업만으로도, 아시아의 낙원 중에 낙원에 해당되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프놈펜의 가이드(guide)
프놈펜 공항도 하노이나 라오스와 같이 초라하였다.
그 넓이와 시설은 물론 비행기의 수로도 그러하였다.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문에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 좌변기 세면대 위에 올라앉은 모습을 그려 놓고 ×표를 해 놓은 것이다.
한 마디로 캄보디아 생활수준이 옛날 우리나라 1960년대 이전임을 알게 하여 주는 것이었다.
프놈펜에서 만난 가이드는 ‘보시면 되겠습니다.'나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를 말끝마다 붙이는 30대 초반의 서(徐)씨. 우리 한국 청년이었다.
베트남의 어눌한 가이드에서 실망하였었고, 라오스에서 만난 라오스인 가이드는 남방예의지국의 양반 중의 양반인 라오스 사람인데다가, 서투른 영어로 말하고, 그걸 서울에서 함께 간 가이드가 통역하여 말하는 것이라 인터벌도 있어 그래서 한계가 있었는데, 캄보디아에서 만난 가이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에다 여행 내내 한 번도 앉지 않고 쉴 새 없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였다. 그 동안 가이드에 목말랐던 우리에게는 단비와 같은 사람이었다.

"옛날 이곳 메콩 강이 큰비로 강물이 범람하였는데, 펜(Penh)이란 부인이 있어 떠내려가는 큰 나무 속에 불상(佛像) 3을 건져 이 언덕 위에 사원을 짓고 모셨습니다. 캄보디아어로 언덕이란 뜻이 프놈(Phnom)이니까 프놈펜Phnom Phonh)의 어원이 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그 ‘왓 프놈'(Wat Phnom)은 그 이름처럼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입구에서부터 중앙 탑을 빙 둘러 있는 계단에 우리가 좋아하는 용처럼, 그들이 좋아하는 나가(Naga:코부라) 조각들이 서 있었다.
그 뜰에는 원숭이 가족이 햇볕에 놀고 있는데, 층계 한쪽에서는 한 여자 아이가 새장을 들고 새를 팔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제비였다.
한 가족이 식구 수만큼 사 가지고 ‘뭐이, 삐, 바이.'(하나, 둘, 셋) 하면서 동시에 휘익 날려 주고 있다. 방생하며 복을 빌고 있다.
그렇구나, 한국에서 가을이 깊어지면 제비가 강남으로 간다더니, 그 강남 이 바로 여기였었구나.
시내 구경에서도 ‘보시면 되겠습니다.'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는 계속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데이트는 없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신랑은 결혼 비용으로는 300만원 정도 준비해야 하고, 여자 집에 가서 결혼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결혼하면 3년 정도 데릴사위 노릇을 하며 처가에서 사는데 능력이 없으면 평생 처가살이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자전거 냉차 장수가 보이죠? 여기서는 병째로 사 먹으면 비싸서, 비닐봉지에 저렇게 넣어서 빨대와 함께 사 먹는다 것을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캄보디아에 와서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공짜가 없습니다. 식당에서 물도 사 먹어야 합니다. 수돗물을 먹으면 탈이 납니다. 대마초나 아편도 길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가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나라는 공무원 월급이 50불 내외밖에 안 되지만, 정부 고관이나 경찰 간부나 고위층 군인은 수십만 달러 저택에 살고 있고, 그들의 아들은 우리의 오렌지 족처럼 호텔을 전전하며 유흥비를 헌 칼 쓰듯이 쓰며 배회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지금 고국에서는 한창 무슨 무슨 게이트니 하면서 양파처럼 벗기면 벗길수록 계속 드러나는 고위층들의 부정부패가 생각난다. 그러니 그 전 먹어도 배탈 나지 않던 시절에, 우리네의 고관대작들이 얼마나 잘들 해 드셨을까?
그 더러운 돈으로 그들 자손들은 아무 양심 가책 없이 얼마나 잘들 살고 계실까?
작은 도둑들도 TV카메라 앞에 서면 옷깃으로 얼굴을 감추려고 기를 쓰던데, 그들보다 천 배, 만 배나 더 큰 도둑이라 할 수 있는 위인들이 뻔뻔하게도 버젓이 얼굴을 들고 태연한 모습이던데, 심지어는 웃던데, 그 모습이 먼 이국땅에서 왜 갑자기 이렇게 떠오르는 것일까?
이들에게 묻고 싶다. ‘죄 없는 우리가 당신 네 같은 파렴치한의 그런 모습을 보아야 되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꼭 확인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킬링필드(Killing Field) 로 가는 길/ 캄보디아
호텔에서 일박하고 우리는 프놈펜에서 15km 떨어진 킬링필드(Killing Field) 현장으로 간다.
캄보디아인들이 가장 가기를 꺼리 는 곳이다. 거기 보관된 유해나 유품 중에는 폴포드 이엥사리 정권의 쿠메르즈에 의해 죄 없이 처형되고 학살된 230만 그 유해 중에서, 자기의 가족들을 혹시나 만나 볼지도 모르는 끔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캄보디아인들을 더 열불 나게 하는 것은 이런 비극의 현장을 한국인이 미워하는 일본인보다, 캄보디아인들이 열 배 이상을 더 미워하며 사는 베트남인들에 의하여 그 학살 현장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1984년에 아카데미 3개 부문의 수상 영화 '킬링필드(Killing Field 감독 Rond Joff)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쿠메르즈 군의 살육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느골(Dr.Haing S . Ngor)은 내란 중에 잃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제 조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킬링필드로 가는 길은 인구 1백만 명이 산다고 하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시내 치고는 너무 초라한 붉은 황토 빛 길이었다. 그 거리 교통의 모습은 하노이와 비엔티엔의 그 중간 정도여서, 한적하지도 아주 복잡하지도 아니한 편이었다. 시내 중심부를 제외하면 가로등 중앙선도 없었다.
많은 오토바이 중에 동아 일보 어느 지국이라 쓴 오토바이가 보인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저런 것들은 한국에서 도둑맞은 것이 이 나라에서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나쁜 놈들-.
모든 거리의 길가에 노점이 진을 치고 있었고, 다리를 지날 때 보니 강을 따라 우리가 6.25때 청계천 등지에서 보았던 기나긴 빈민 판자촌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가난의 긴 행렬이었다.
국도를 벗어나자 아스팔트길은 그친다. 차가 통과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다리를 간신히 건너고 나니, 우기(雨氣)에는 도로가 나빠 차량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붉은 황톳길이 나타난다. 그럴 경우에는 기다리고 있는 영업용 오토바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낮 12시쯤 학살 현장 가까이 초등학교 학생들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몰려가고 있다.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가는 것이라는데, 그 체구가 나이에 비하여 우리나라 어린이보다 훨씬 적었다.
이곳 선생님들은 월급이 50불 내외여서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담임선생은 출근길에 아이들이 먹을 과자, 사탕, 빵, 학용품 등을 사다가 교실 바닥에다 죽- 늘어놓는다. 학생들에게 팔기 위해서다.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을 파는 일이요,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보다 그걸 사 먹고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자랑하는 일이란다.
공산주의 국가라, 이 나라에서도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이지만 초등학교라도 이렇게 다니는 학생들은 행복한 가정의 부유한 소수일 뿐이다. 관광객에게 구걸하여 돈을 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에, 부모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린다.
배운 사람이라 하여 죽여 버리려 했던 과거 동족이 겨누던 총부리는, 이 불쌍한 국민들의 교육열마저 빼앗아 가 버려서, 캄보디아의 장래마저 까맣게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런가. 캄보디아보다도 못산다는 남방예의지국인 양반의 나라 라오스에서는 보기 드물던 동냥하는 아이들이, 여기서는 차가 서기 무섭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까만 손을 내민다. 대개 10살 내외의 어린아이들의 오른 팔에는 3살 내외의 어린 동생을 안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얼마나 팔이 아플까?
그러나 이곳 아이들은 베트남 거지 아동처럼 제 것 달라고 떼쓰는 식의 끈질긴 것이 아니고, 낮고 가여운 소리로 동정을 호소하는 순박함이 있었다. 그들은 가난을 호소하는 것이지 거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이에게 1불을 주었더니 벌 떼같이 모여드는데, 나에게 1불을 받은 아이가 뒤에서 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주는 사람이 또 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프놈펜에서 왕궁에 들러, 1,125 kg의 은으로 만든 불록 5,329개로 꾸며 놓았다는 왕궁 전용 사원 실버 파고다(Silver Pagoda)를 보고 나오다 만난 지뢰에 손발이 잘린 걸인을 그냥 지나쳤더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욕설이었다. 빌어먹을 자격도 없는 놈들 같으니--.
1975년 론놀 정권을 중공의 도움으로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한 수상 폴포트와 부수상 겸 외상 이엥사리의 ‘민주캄퓨치아' 정권은 지나친 급진 정책을 썼다.
이 폴포트 정권의 잘못은 그들은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적 틀을 한번에 개조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로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우직하게도 밀고 나아갔다.
첫째로 당시 폴포드의 주구(走拘)노릇을 했던 경찰들은 앞장서서 농본주의(農本主義)적 공동체 정책이라 하여 전인구를 국토 각 곳에 재배치시키었다.
수백만 도시인을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논농사에 또는 관개수로망(灌漑水路網) 건설과 유지를 위해 강제로 농촌에 배치시키는 바람에 전국의 도시 지역은 공백화 되어 버렸다.
캄보디아 전 국토는 강제수용소로 바뀌어 하루 12시간~14시간 일해야 했다. 이로 인하여 그 3년 동안 기근 질병 학살 처형으로 노약자, 불구자 등이 고된 농사일을 견뎌 내지 못하여 죽어 갔다.
둘째 ‘민주 캄퓨차에 유해한 종교는 금지 한다'고 하여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국민 90%가 믿는 불교 사원을 파괴하였고 승려들의 환속(還俗)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당의 승낙 없이는 연애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셋째 불평을 막기 위하여 매스컴은 거의 폐지하였다. 국영 라디오 ‘민주 캄푸차의 소리'가 유일한 선전 기관일 뿐이었다.
넷째 구정권의 공무원과 군인 등 그 중에서도 배운 사람들을 골라, 반대 세력이라 하여 대량 학살하였다.
다섯째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지식인들로부터 나온다 하여, 인텔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학생까지 포함하여 죽였다.
그래서 지금 캄보디아에는 성인들의 50%가 문맹이다. 무식한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지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라디오 방, TV 방, 미장원, 자전거, 오토바이 가게를 글 대신 그림을 그려 가게 앞에 세워 놓는 진기한 모습을 어디서나 만나게 된다.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참상/ 쯔응 아익 해골 추모탑

드디어 쯔응 아익(Cheoung Ek)킬링필드 추모탑에 이르렀다. 1988년에 세운 캄보디아 전통 양식의 위령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각국에 있는 독립 탑이나 보통의 기념탑 같았는데, 가까이 다가 가 좁은 회랑을 돌면서 유리창을 통하여 각층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경악하였다.
난생 처음 바라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골 탑 앞에서 우리가 꿈속에 서 있는가 아니면 영화 속에 서 있는가 의심하고 있었다.
탑 안에는 8,000여 개의 두개골들이 성별 나이 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맨 아래층은 죽은 이들이 죽을 때 입었던 남루한 옷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모양 색깔이 한결 같이 푸른색인 것을 보면 수의인 것 같다. 10층까지 위로 계속 되는 해골의 탑, 해골의 바다, 죽음의 전시장이다. 한층은 아래턱만 전시하여 놓은 곳도 있었다.
내가 수년 전 중국 여순 감옥에 방문하였을 때, 왜놈들이 중국인, 한국인의 주검을 나무통에 억지로 넣어 묻어 죽인 것을 보고 울면서 천인공노의 일제를 구체적으로 저주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래도 이민족 간의 일이요, 동족 간에 있었던 학살은 아니었다.
몇 년 전 한국의 ‘거창양민학살 현장'에 가서 본 세계도 이러하였다. 죄 없는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무차별 학살하여 집단적으로 파묻은 현장이다.
부녀자의 무덤, 아이들의 무덤 등으로 구별하여 묻어 놓았는데 그것을 캄보디아판 거창사건으로 확대하여 놓은 것이 여기 킬링필드였다.
이 죄 없는 주검이 학살되어 묻혀 있던 곳이,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세계를 경악하게 하였던 바로 그 웅덩이였다.
그날을 지켜보았을 커다란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옆에, 많은 웅덩이가 있다.
어떤 웅덩이는 정자처럼 지붕을 하였는데 사방이 트여 있다. 이것이 참살 현장의 허무한 모습이었다.
동족이 동족을 한꺼번에 죽이고 파묻어 당시 국민의 1/2를 매장한 현주소였다.
한 웅덩이 앞에는 목 없는 시체 166구의 웅덩이라 쓰여 있었다. 죽여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목을 쳐 죽였다는 말이다.
처형할 때 총알을 아끼느라고 쇠막대기로 뒤통수를 쳐 죽였다니….
한 웅덩이는 아동만 100명이 묻은 무덤이라 하였다. 그 웅덩이 옆에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에 우는 아이의 두 다리를 잡고 산채로 휘둘러 때려 죽였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공중에 던져 떨어지는 아이를 경찰이 들고 있는 그 총검에 아이를 꽂기도 하였다고-.
이에 대한 불평을 막기 위하여 매스컴을 거의 폐지하였고 국영 라디오 ‘민주 캄푸차의 소리뿐이었다.

 

대학살의 현주소/ 대학살 박물관(Tual Sleng Museum)
거기서 조금 떨어진 '포드 투울슬렝 대학살 박물관'(Tual Sleng Museum)으로 갔다.
한때는 투올슬랭이란 곳에 있는 하나의 평범한 고등학교였지만 이곳은 킬링필드에서 죽은 이들을, 살아생전 고문하던 S-21수용소로 쓰이던 곳이다.
여기에 크메르루즈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반대할 것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체포, 숙청하여 이곳에 수용하였다. 그들은 주로 지배 계층과 각계 지식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안다 해서, 안경을 썼다 해서, 노동을 하지 않아 손이 고운 사람들은 인민의 적이라고 잡혀 온 곳이다. 책의 저자, 국가의 엘리트, 학생들을 무차별 잡아다 죽였다.
마침 귀국한 유학생 500명도 귀국 즉시 소식 없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인텔리 등의 대거 학살은 급속히 발전해 가는 현대를 맡을 지식인이 없어 캄보디아를 1970년대 그대로 역사를 묶어 놓고 말았다.
이 수용소에는 커다란 무덤이 14개나 있다. 해방군이 이곳을 탈환할 때 크메르루즈 군이 도망가면서 마지막 사살한 원혼들의 묘지이다.
당시에는 이 건물 주위에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이 교정에는 A, B, C, D 네 동의 건물이 있는데 A 동은 조사하고 고문하던 곳이요, B동은 수감자들의 사진 촬영, 조서 작성하던 곳이요, C동은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87개의 독방이다. 독방마다 검은 색의 족쇄가 있어 당시의 참혹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D동에는 당시 이곳에 수용되었던 화가가 다행히 살아남아 그 비참한 살해 현장을 그린 그림이 각종 고문 기구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 희생자의 생전의 모습들의 사진이 수없이 늘어서서 우리들의 놀란 모습을 오히려 태연히 바라보고 있다.
정식으로 집계된 인원만도 자그마치 1만4천 5백 명, 그중 2,000명이 죄 없는 아이들이었다.
한 방에다가는 짓궂게도 해골로 모자이크한 캄보디아 지도를 만들어 놓아 관광객의 카메라를 바쁘게 하였다.
고문 장면으로는 높이 매달아 놓고 아래 있는 물통에 넣었다 빼었다 하는 기구. 형틀 옆에 쇠말뚝을 수십 개 박아 죄인들을 묶어 놓고 고문 장면을 지켜보게 하는 것. 돼지처럼 빨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메고 가서, 형틀에 묶어 놓고 손톱을 벤치로 빼고 있는 모습 등, 인간으로는 도저히 자행할 수 없는 고문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이 그림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중 전 정권 내무부 장관 부인의 처형 장면이 우리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
사형대 의자에 묶여 앉아 있는데, 송곳 같은 뇌관이 눈물방울 그렁그렁한 40대 초반 여인의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폴포트 정권은 국제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국내적으로도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챙 삼린은 79년 1월에 베트남의 지원을 얻어 이들을 물리치고 '캄푸차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캄보디아는 근 20여 년 가까이 전쟁 중이라서 경제는 파탄에 이르러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특이한 체험을 기념하게 하는 것이다.
이집트 사람이 무덤을, 중국인이 유물을, 서구 사람들이 문화를 팔아먹듯이, 캄보디아는 인류 역사상 다시는 있을 수 없는 학살의 현장을 팔아먹기 위해서 여기에 더하려는 것이 있다. 천인공노할 악귀 같은 폴포드가 죽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집을 관광지로 선정하여 살인마의 최종 거주지가 어떠했나를 상품화시키려는 것을 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새롭게 느껴진다.

 


15세 선장에게 목숨을 맡기고/ 톤레삽 호수에서
버스에서 내려 톤레삽 호수의 노을을 구경하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시엡립 강가(Siem Reap River) 양안을 바라보니, 그래도 그곳은 부자 축에 든다는, 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가옥들이었다. 해머라는 그물 침대가 거기도 있고, 방 속에 TV도 있구나, 할 무렵 우리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국땅에서 적어도 2시간 이상이나 그 위험하다는 바다 같은 드넓은 물위, 5명 정도밖에 탈 수 없는 이 작고 좁은 배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선장이 아닌가.
여행 중이라 모든 귀중품을 갖고서, 우리들의 목숨을 의탁한 이 배의 선장이 초등학교 6학년 정도의 15살 소년이었고, 그를 돕는 장래에 예비 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는 14살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일몰 구경을 포기할망정, 나는 이렇게 무모한 승객이 되지 않았을 꺼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모두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을까? 아무리,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폴폿 정권이 지식인을 다 죽였다더니 무능하고 무식한 놈만 남아서 그런가. 캄보디아 인이 게으르다더니 그래서 아이들에게 맡기고 낮잠이나 자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까 보니 어른들은 아랫도리만 가리고 다니더니 옷이 없어서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주(船主)란 놈이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하는 약은 수작의 짓거리이리라 생각하면 불쾌하기 그지없다.
만약 배가 뒤집힌다면 나는 인천 바닷가에서 태어난 짠물 출생이라, 수영에 있어 한 가닥 하지만 이 디지털 카메라는 어떻게 한다? 이 캠코더는? 그보다 수영 못할지도 모르는 우리의 동행들은 어떻게 하지?
하는 사이 이 쪼고만 배는 사방이 수평선뿐인 망망대강(茫茫大江) 속에 닻을 내리려 한다.
해가 지려면 아직 30여분 남아서 마침 수상 음식점이 있다기에 들렀더니 고기를 잡아 올린다는 독수리 모양의 가마우지가 대 여섯 마리 묶여 있고, 객을 맞이하기 위해 키우는 2m 이상의 커다란 비단구렁이를 꺼내어 목에 두르며 사진을 찍으라 한다.
앙코르 비어를 2불씩 내고 먹으면, 안주로 여기서 잡히는 새우를 얼마든지 준다 하니, 술을 좋아하는 나 일만(一萬)에게는 천국의 복음 같은 소리라. 낙조에 늦을 새라 서둘러 세 깡이나 마셨다. 그 짭짤한 붉은 새우와 함께.
해가 진다. 바다 같은 수평선 토렌삽호에 붉은 노을이 한창이다. 자연은 이리도 광활하고, 저리도 아름다운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세상은 도랑보다 개천보다 적은 가난 속에 묶여 있구나.
저녁은 캄보디아 무희들의 춤을 보며 뷔페에서 하였다. 무희는 물론 거기서 써빙 하는 웨이터들이 자꾸 자꾸 성공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 캄캄한 밤에 그 호숫가에서 새들처럼 어둠 속에 잠들고 있을 수상 가옥 난민촌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려서다.


새같이 사는 사람들/ 톤레삽
프놈펜에서 앙코르 유적지를 가는 방법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배로 톤레삽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육로로 가거나, 비행기로 가는 것이다.
그 6~7시간 이상 걸리는 것을 우리는 우리나라 시외버스처럼 좌석도 없는 비행기를 타고 45분 만에 씨엠리엡(Siem Reap)에 도착하였다. 씨엠(Siem)이란 단어는 '태국'을 일컫는 말이요, 리엡(Reap)은 영어로 '획득하다'라는 뜻이고 보면 씨엠리엡(Siem Reap)은 태국이 점령했던 곳이라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에,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최고의 유적지라는 앙코르(Angkor)는 내일 보기로 하고 캄보디아의 젖줄이 되는 톤레삽 호수의 일몰을 보러 가고 있다.
호수로 이어지는 씨엠리엡 수로 둑길을 버스로 30여분, 배로 10여분을 가는데, 도중 둑 가에 있는 집들은 6.25때 보던 판잣집이 아니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문도 없어 휑하니 안이 들여다보이는 집들은 우기를 대비하기 위해 대부분 둑보다 높이 2m 내외의 말뚝 위에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새 집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
여기는 열대지방이라 태풍이 생성되는 곳이어서 장마가 없고, 여름 우기(雨期)에도 한국처럼 종일 비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이 2~3시간 오락가락하다가 그친다.
게다가 겨울 갈수기(渴水期)에는 아래로 흘러가서 메콩 강과 합류한다. 그러다가 여름 우기(雨期)에 접어들어 메콩 강 수위가 높아지면 메콩 강 물은 톤레삽호로 역류하여 자동적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면 톤레삽 호수는 넓이가 배로 늘어나 유량조절을 하여 주는 천혜의 자연 댐의 역할을 하여 준다. 그래서 동남아시아에서 6개국을 흘러오는 제일 긴 강인 메콩 강의 모든 물고기가 톤레삽호로 모이게 된다.
이 호수에 사는 물고기는800여종이나 되어 캄보디아인의 식단에 없어서는 안 될 해산물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톤레삽호의 담수어(淡水魚)는 1㎢ 당 8t로 세계 어느 나라 강보다 많아서 이 나라 경제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새들은 모여 산다. 날개, 부리 하나만으로 물고기를 잡아먹으러 주로 강가에서 모여 산다.
여기가 캄보디아에서 새들이 모여 사는 열대 부동항 씨엠리입호(湖)이다.
이 호수에 새보다 더 많이 사는 것이 물론 물고기다. 새에게 잡혀 먹히고, 어부에게 잡혀 먹히고, 큰 물고기에게 잡혀 먹히면서도 물고기가 이렇게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끼를 많이 낳는 것이다. 그래서 장어인 경우 새끼를 한번에 20~30만 마리, 대구인 경우 120만 마리 알을 낳는다 하지 않던가.
수상 가옥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먼 조상들은 제왕의 무덤인 앙코르 유적을 쌓는데 하루 10만 명씩 동원되어 갔고, 전쟁과 내란에서는 총받이로 싸우다 갔고, 폴폿의 학살까지 겪은 불쌍한 물고기들, 포수 앞의 새였다.
그들이 살아남는 것이 무엇일까? 물고기처럼 계속 자식을 낳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들은 새집보다도 더 초라하였다. 옷으로 타월 같은 것으로 아래만 가리고 사는 사람들이나, 찢어진 옷 그것도 못 입고 맨발로 뛰놀거나, 흙탕물에서 수영하며 놀고 있는 난민촌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 눈에는 그들이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새였다.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강가에 모여든 새들이었다. 부리 하나 날개 하나만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재잘거리며 웃고 있는 것은 새들의 나직한 울음소리, 강가에 갇혀 있는 새와 같았다. 영원히 날 수 없는 새, 내일이 없는 불쌍한 새였다.

물고기 잡아먹고
새처럼 살아가요
날개 하나 부리 하나로
새집 짓고 살듯이.
내일이
있다는 것이
사치와 같은 걸요.

호수에 해가 뜨면
새처럼 눈을 뜨고
*톤레샵(Tonle Sap) 노을 보며
새들처럼 잠들지요.
가난이
제일 큰 재산인데
무슨 걱정 또 있겠어요.
                        - 새

 

여기가 세계7대 불가사의가 아닌가/ 앙코르톰
해외여행 1순위라는 유럽 여행을 하지 못한 내가, 이번 경비에다가 조금만 보태면 갈 수 있는 서양 문화의 진수라는 유럽 여행을 버리고 왜 하필 이 인도차이나 여행을 택하였을까? 한 마디로 말하여 앙크로왓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을, 라오스를 들르게 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떠나오기 전에 백과사전 등에서 세계7대 불가사의를 찾아보았더니, 어느 책에도 앙크로왓이 세계7대 불가사의에 들어 있지 않았다.
9세기 15세기에 영화를 누리던 앙코르 제국이 역사 속에서 살아졌다가 세계 불가사의란 말이 생긴 후 19세기 초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리라.
앙코르 유적지란 광활한 것이다. 동서 길이만도 20km로 5백 리요 남북 길이만도 10km에 이르는 거대한 것으로 그 중 10개의 유적 중에도 앙코르톰과 앙코로왓이 가장 유명하다.
오늘이 바로 그렇게 기다리던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앙코르 구경하는 날 이로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이 앙코르 유적도 석굴암처럼 신비 속에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일제 시절 어느 날 우체부가 토함산에서 비를 만났다. 산이 무너져 내리는 큰비였다. 비를 그을 곳을 찾던 우체부는 우연히 산이 무너져 내린 어느 한 곳에 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굴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고려와 이조 시대를 뛰어넘어 얼굴을 들어낸 석굴암의 세계였다.
앙코르도 1858년 프랑스의 탐험가며 자연 학자인 헨리 모오(Hani Mouho) 가 400년 간 밀림에 묻혀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보다 먼저 발견한 선교사들도 있었으나 그들의 말을 유럽 사람들이 거짓이라 지나쳤다. 헨리 모오는 귀국하여 이를 프랑스 신문에 기고하고, 기행문을 써서 널리 세계에 이 세계적인 인류의 유산 앙코르의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발견 당시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하였다.

"저건 저절로 생긴 것을 문둥이 왕(자야바르만 7세)이 고쳐 만들었다. 거기 들어가면 문둥병 왕의 저주가 내려 죽는다.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

그래 그런가, 앙코르를 처음 발견한 앙리 모오는 발굴 다음해 라오스에서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 그런가, 나는 앙코르를 다녀와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 피부병은 문둥병처럼 신체의 은밀한 부분까지 쳐들어와서 그 좋아하는 술을 한 달째나 못 마시며 두문불출하고 있다.
그러나 발견된 지 일년도 안 되어 세계에서 수십만 관광객이 모여들었고, 지금은 이 한적한 나라, 조용한 시엠리엡에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와서 달러를 떨구고 가는 축복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국기, 화폐, 기념품에도, 심지어 술 이름까지 앙코르 비어로 하여 앙코르 팔아먹는 것이, 프랑스인이 나폴 레온 팔아먹는 것 못지않았다. 앙코르왓 입장료 하나만으로도 시엠립엡 시의 전체 재정을 충당할 정도다.
얼풋 보기에는 앙코르톰이 앙코르왓 보다 세계7대 불가사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앙코르톰은 하나의 유적이 전부인 주위의 다른 유적지와 달리, 여러 시대를 걸쳐 만들어진 유적이 모여 한 도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앙코르(Angkor:왕도, 도읍) 톰 (Tom:크다) 은 곧 ‘커다란 도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100만 명이 사는 세계적으로도 큰 도시였다.
그래서 앙크로왓의 그 조각의 미로서가 아니어도, 앙크로톰 보다 앞선 그 지어진 연대와 함께 앙크로톰은 단일 유적인 앙코르왓에 세계7대 불가사의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 중에 하나였으리라.
앙코르 여행은 앙코르톰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것은 정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어 아침 햇살을 받아 시시각각의 모습이 변하는 바이욘사원의 신비로운 4면 탑의 ‘캄보디아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다.
캄보디아인들은 웃으면서 사는 민족이다. 언제나 웃고 산다. 웃으면서 일어나서, 웃고 살다가, 웃으며 잠든 다. 폴포드 정권을 피해 태국 국경을 넘어가는 피난민이 인산인해를 이룰 때 태국인인가 캄보디아인가를 구별하는 방법의 중의 하나가 손을 비틀어 보아, 아프다고 찡그리기만 하면 태국 사람이요, 찡그리면서도 웃으면 캄보디아 인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앙코르톰은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가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광개토대왕에 견줄 만한 이 왕이 12세기말에서 13세기 초 불교 사원으로 지은 바이욘 양식의 건물이다. 이곳은 크메르(Khmer)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로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당시에 강대국으로 성장한 미얀마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 변이 12 km에 이르는 정사각형 성벽을 8m 붉은 흙인 라테라이트로 쌓았다. 그 바깥쪽에다가 가로 3 km 세로 4km 폭 10m의 해자를 두르고, 해자 속에는 아주 난폭한 악어를 풀어 적군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다 한다.
이 성벽은 히말리아의 연봉을, 해자는 대양을 상징한다. 이렇게 앙코르톰은 왕권의 신격화를 위한 당시의 우주관에 따라 지은 것이다.
성문은 다섯 개로 각 문 위에는 4개의 얼굴을 가진 ?아바로키테스바라?신이 새겨져 있다. 메류 산(Meru)에서 사방을 지배하는 신이다. 힌두교를 신봉하여 힌두교의 신인 시바나 비슈누와 일체가 되려 했던 다른 왕들과는 달리, 자야바르만 7세는 불교 신자였으므로 그 대신 관세음보살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왕을 신과 동일시하여 왕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함은 물론 사후에는 그 신과 함께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이욘 사원에 솟아 있는 탑은 54개 중 37개 만 남았는데 이 탑에 드러나는 얼굴들은 모두 관세음 보살의 얼굴이자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기도 하니, 이는 곧 캄보디아의 얼굴인 것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주로 남문을 통하여 들어온다. 남문은 성문 중에 보존이 비교적 가장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남문으로 가는 돌다리는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에서 신의 세계와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하는 우주관에서 만든 것이다.
머리가 7개인 나가(뱀신) 두 마리를 서로 껴안은 신들이 다리 양쪽으로 쪼그리고 우리를 향해 앉았는데 왼쪽에 54명의 선한 신(善神)이고 오른 편의 54명은 악신(惡神)인 아수라 상이라니, 옛날에 이 나라에도 왼쪽을 숭상하는 사상이 있었나 보다. 아수라가 큰 뱀의 오른쪽을, 신들은 꼬리 쪽을 안고 줄다리기를 하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둘을 합하면 108명이 되는 것을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108번뇌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문인가.
이 강건한 동남아 얼굴 거인들의 모습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 얼굴이 없어져 시멘트로 새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처럼 세월에 찌들어 가는 고색창연한 검푸른 색이 아니고 열대 햇발에 반짝이는 황금빛이었다 한다.
남문은 20m나 높이 솟구치어 우람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는데 문의 꼭대기에는 네 방향의 4면 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이 아발로키테쉬바라 보살(bodhisattva Avalokiteshvara)이다. 메류산(Meru)에서 사방을 지배한다는 신이다. 그 남문 안과 밖에 모두 코끼리의 상아가 장식되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 아름드리 숲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것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앙코르톰의 중심 사원 바이욘(Bayon)로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 불교 사찰로서는 가장 큰 규모이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무덤 같이 보이던 것이다. 앙코르와트보다 거의 100년 후에 지어졌는데, 앙코르 유적지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그것은 당시 인구 100만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 시엠리입에 사는 원주민이 겨우 6만 내외라니 나머지 인구는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 사원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과 2층은 사각형, 3층은 원형을 이루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니까 1층 단의 외부 부조가 보인다. 당시에 목조로 있던 지붕은 물론 사라진 지 벌써 오래다.
부조의 조각 내용은 시암족(터키족)과의 전투 내용이 많았다.
가족과 함께 전쟁터로 향하는 모습, 가다가 밥하는 모습, 물물 교환하는 장면, 빨래하는 모습, 가르치는 장면은 물론 심지어 해산하는 장면까지 있다.
불교 설화 등과 함께 당시 크메르인의 일상생활 풍속이었다.
2층에서 만나게 되는 석상들에서 특이하게 발견되는 것은 둥근 광배(光背) 대신 나가(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부조는 툭툭 튀어나오는 입체적인 양각으로 앙로르왓(Angkor Wat)보다는 더 깊게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나 예술적으로 보아 그곳보다 떨어진다는 평이다.
3층에서 마주친 장엄한 54개의 탑 앞에 서게 되었을 때의 감격이란-.
너무 많이 알고 가는 것이 감흥을 반감하는 길이라고, 이 여행 떠나기 전에 사전 연구를 생략하여서, 마음속으로 사면 석불이 몇 개 정도이거니 생각하였었는데, 사면 불의 거대한 모습이 30여 개가 넘는다.
모두 돌로 쌓은 탑이다. 그것은 커다란 봉우리 같지만 사람이 쌓은 정교한 탑이었다.
계림의 봉우리처럼, 하롱베이의 산처럼, 여기 불끈 저기 불끈 솟아나 한결같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앙코르의 미소'를 띤 각 탑의 사면의 불상은 아발로키테쉬바라 보살의 얼굴과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의 얼굴이 어울려 하나로 조화된 부처의 세계였다.
세상에 이렇게 큰 봉우리 같은 탑에, 저렇게 큰 얼굴이 그것도 54개나 되는 탑에 200개가 넘는 얼굴상이 조각되어 있다니-.
불교의 나라 라오스에서도, 여기 앙코르에 와서도 보고 놀란 것은, 절에서 하나의 부처를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 절과는 달리, 수많은 부처를 함께 모신 것이다.
일체 진리를 자비로운 눈에 품고 응시하고 있는 저 시원한 눈매에, 중후한 코. 막 웃음이 터질 듯한 엷은 미소를 품은 얼굴은 우리들 바로 우리 동양인 얼굴이다.
그 신비로운 친근한 미소 속에 우리는 이것이 앙코르의 진수구나 하였다. 불가사의(不可思疑)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였다.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캠코더로 무장한 나에게는 다시 더 없는 물실호기의 행복한 순간이라. 찍고 다시 찍고, 돌아 돌며 다시 찍다 보니 어럽쇼 일행이 없다.
남문에서 들어와 나갈 문이 4개가 있는데 어디로 간다?
일행은 코끼리 테라스를 향한 동문 쪽에 있었다. 미안해 어쩌지. 허나 어쩌랴 주어진 시간이 30여분도 안되는 것에의 아름다운 반란인데. 그때 나보다 더 늦은 비디오 맨이 있어 얼마나 고맙던지.

 

코끼리테라스/ 앙코르톰
왕궁으로 가는 길목에 코끼리테라스라는 곳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동남아 일대를 평정하던 그들의 전성기에, 보무도 당당히 승전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리며 들어오던 개선장군을 맞던 곳이다.
단상 3 개 중 중앙 단상에는 가루다(상상적인 새)가 받치고 있고, 앞쪽 테라스를 오르는 층계 좌우에는 커다란 코끼리 여섯 마리가 좌우로 나누어 서서 이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코끼리테라스다. 사열대처럼 널찍한 곳의 앞에 드넓은 광장이 있어 왕이 중요한 행사나 군인의 사열을 하던 곳이요, 오전 오후 두 번 집무를 보던 곳이다. 물론 이 위에 있던 목조 건물은 세월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코끼리테라스를 내려오다 보니, 함께 간 비디오 맨 정 선생(서울신문사논설위원)이 막 촬영을 끝내고 엄지손으로 기가 막힌 비경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아, 이럴 수가. 테라스 360m을 빙- 둘러쌓은 5층 돌 마다 새겨놓는 부조들. 한 뼘의 공간도 남기지 않고 새겨놓은 불상들, 압살라(천녀)들--. 이것만으로도 앙코르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되지- 하였다.
그래서 일행이 기다린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고 그러나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며 캠코더를 찍으며 도는데 도중에 달러를 노린 악사의 노래가 길을 막는 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찾아 나선 가이드의 재촉을 받으면서도 나는 다시 또 올 수 없는 비경의 촬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욕이라도 먹을 때는 먹는 거야. 난 이걸 보러 온 거야, 이걸 찍으러 온 거란 말이야 하면서-.
승리의 문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곳이 앙코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바로 문둥병 왕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에 세웠다는 프레아칸(Preah Khan) 사원이다.
여기서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의 대결을 볼 수 있다.
앙코르 제국의 이 유적이 400년 동안 역사에 사라졌던 사이, 바람에 실려 떨어진 팜 나무 씨들이 거대한 나무로 자라서 그 뿌리로 귀중한 사원을 파고들어 파괴하고 있었다.
벽은 갈라지고 천장은 무너지고 나무뿌리에 의해 폐허가 된 모습이었다. 이를 제거하고자 한 나무를 잘랐더니 자른 그 위에 싹이 다시 싹이 나서 포기하고 말았다고-.
나무에 의해 파괴된 사원은 지금은 오히려 그 나무에 의지하여 사원이 지탱하여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나무뿌리에 싸여 있는 사원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와 함께 덧없는 세월을 읽을 수 있어, 그렇지 않은 사원보다 더 관광객의 카메라 셔터 소리를 요란히 터트리게 하는 세계 관광 명소가 되었다.
가슴을 치면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사원 내 조그맣게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장난삼아 가슴을 치며 오전 관광을 끝냈다. 이제 가자. 앙코르왓으로 !


세계7대 불가사의/ 앙크로왓

지금 한국은 얼마나 추울까, 여기 시엠리엡은 연중 가장 기온이 낮다는 1월인데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인데. 반티에 반바지 차림으로 앙코르톰을 다녀온 것이 오전이건만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바꿔 입고 점심 후 그 아까운 두어 시간을 호텔에 들어가 깊이 잠들었다.
이곳은 열대라서 사람들은 누구나 점심 후 두어 시간은 일손을 멈추고 오수(午睡)를 즐긴다. 즐긴다는 것보다 작열하는 열대의 따가운 햇볕은 도저히 몸이 마음을 따라 움직일 수도 없고, 이 나라에서는 그 시간대는 모두가 쉬는 시간이라 가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앙코르 유적지 관람은 영롱한 아침 햇빛을 받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앙코르톰을 먼저 보고 오후에 앙코르왓을 구경하여야 한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앙코르톰보다 더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유네스코까지 인정하는 앙코르왓을 먼저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앙코르왓은 수리야바르만2세의 장례식을 위해 지어진 하나의 묘지다. 서방정토라는 말이 있듯이 정문도 앙코르왓은 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앙코르톰을 오전에 먼저 보고 앙코르왓을 둘러본 후 낙조를 보는 것이 순리에 맞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침에는 앙코르톰을 보고, 한낮에는 팜나무가 사원을 뒤덮은 프레아칸사원을 보고, 오후에 앙크로왓을 보고 나면 해거름이 된다.
그러면 프롬바켕에 가서 왕코르왓을 배경으로 넘어가는 장렬한 일몰을 보는 것이 환상적인 앙코르 유적 관광의 진수를 보게 되는 것이나 투어 여행에서 어찌 그것까지 감히 바라리오.
좀 높은 위치에서 앙코르왓을 보면, 중앙 첨탑을 3중으로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그 회랑 위의 사각 탑을 선으로 연결하여 보면 입체적인 4각 추(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
세계 한 가운데 높이 솟아 있다는 신들의 나라 수미산(메류산)을 상징한다는 중앙 첨탑이 60m 위에 솟아 있고, 그 아래 동서남북에 금, 은, 유리, 파리의 사보(四寶)를 상징하는 네 개의 망루 탑과, 히말리아 영봉을 상징한다는 성벽과, 그 성벽 밖에 대양을 상징하는 해자(垓字)에 가득한 물로 속세를 막고 있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하여 37년 동안 하루에 동원된 인원만도 10만 명이 넘었고, 코끼리가 4만 마리나 동원되었다. 한때 코끼리 왕국이라고 일컬어지던 이 나라에 와서, 여행 중 코끼리 한 마리 보지 못하였다. 가난해서 거의 다 팔아먹은 모양이다.
이 사원을 짓기 위하여 쓰인 사암은 여기서 60km 떨어진 톤레삽을 통하여 운반해 왔다.
정문을 향하여 난 해자를 건너는 돌다리는 220m나 되었다.
정문을 들어서 좌우에 늘어선 목 없는 불상을 지나니, 65m의 높이 솟은 중앙 사탑을 높이가 서로 다른 제1회랑 제2회랑 제3회랑이 3중으로 조금씩 높아 가며 이를 둘러싸고 있다.
가장 바깥쪽 제1회랑은 길이만도 760m인데 그 안벽 전면에 부조가 빈틈없이 조각 되어 있다.
남회랑 동쪽에 있는 야마의 사형 선고, 북회랑 서쪽의 신들의 퍼레이드, 쿠르크세트의 전투장면, 염라대왕의 심판, 우유의 바다에 신화를 주제로 한 내용들로 우리들에게 생소한 인도의 힌두교 서사시의 세계였다.
그 조각들을 자세히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아무리 미술에 문외한인 우리의 눈에도 탄성을 발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특히 압살라(天女)의 돋우러 지게 조각한 부조(浮彫)가 그러하였다. 캄보디아 특유의 미소를 머금고 나직이 눈을 내려 뜨고, 맨발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렇다, 저 얼굴은 엊저녁 캄보디아 민속춤을 보며 식사할 때, 춤추던 무희의 그 얼굴이요 그 몸짓이었다. 조용한 음악에 맞추어 손바닥을 뒤집히도록 뒤로 젖히고 가끔씩 한발을 뒤로 올리던 그 모습이다.
저 터질 듯한 무르익은 유방을 들어낸 가냘픈 몸매는 조각만을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니면 왕의 기쁨 조로서의 당시의 자연스런 복장이던가.
그 하늘거리는 여체의 미가 5세기를 뛰어넘어 지금도 살아 춤을 추고 있다. 그 정묘하고 섬세한 몸매에 두른 옷에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흐르는 선은 지금도 살아 춤추고 있는 다시 더 비길 데 없는 미의 세계이다.
이 아름다운 압사라의 이마에 한 가운데에 점이 있으면 천녀(天女) 압사라요, 점이 없으면 왕의 기쁨조 무희(舞姬) 압사라라 한다.
그 젖이 그리웠음인가 무엄하게도 압사라의 젖무덤마다 관광객의 짓궂은 손길에 까맣게 반짝이고 있었다.
앙코르톰보다 100년 앞섰다는 것. 그리고 더 정교하고 섬세함에다가 그 수많은 부조들로 인하여 앙코르톰을 제치고 7대 불가사의로 앙코르왓을 꼽게 되었나 보다.
이러한 조각들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계속 전개되는 그 이야기가 회랑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앙코르왓을 세운 수리야바르만2세가 힌두교 신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이었으나 후세 왕들이 불교를 믿는 바람에 힌두교 유물을 창고로 옮기고 거기에 불교적인 유물을 더한 것이 앙코왓이었다.
우리가 불교 나라 라오스 왕궁과 절에서 보고 온 라오스의 불상들은 그 크기와 그 수(數)로 하여 그 위엄을 들어내려 하였다면, 여기서는 크기보다, 정교한 조각의 수 없는 나열이 우리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서구나 로마에 가서 볼 수 있는 부조보다 그 백 배 이상 많고 정교하다는 거대한 이 조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당시를 살다간 사람들의 모습들과 삶이 하나 하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전쟁터 장면이 나오면, 창칼을 든 행렬과 코끼리와 말을 탄 장군이 나온다. 전쟁터에 향하다가 식솔들이 밥을 하는 모습을 보면 당시에 전쟁은 온 가족이 전쟁에 함께 하였음을 보여 준다.
한 쪽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을 칭찬하며 쓰다듬어 주고 있고, 아이를 낳는 여인을 산파가 도와주는 장면도 보인다.
그 중 벽화 부조 중에서 백미(白眉) 중에 백미(白眉)는 힌두교 유해교반(乳海攪伴Churning of tocean milk)이라는 신화다. 50m 벽 전체에 우유 바다를 휘젓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중앙에 수리야바르만 2세의 얼굴과 비슷하게 조각했다는 비슈누 신이 커다란 거북 위에 올라서 있고, 그 양 옆으로 머리 쪽에 88명신이, 꼬리 쪽에 92명의 악신 아수라가 뱀을 안고, 불사의 명약 암리타를 얻기 위해 1,000년 동안 줄다리기를 하며 바다를 휘젓는다는 내용이다.
힌두교 창세기 신화로 앙코르톰을 들어가는 다리에서도 보던 것이다.
중앙 탑에 이르니 60m나 된다는 오르막길이 오르기에 범상치가 않다. 70도의 가파른 경사 길에 층계 하나하나가 너무 좁아 신발 하나 넉넉히 디딜 폭도 안 된다. 이 층계는 사람 오르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모양으로 만든 것 같다. 저 3층이 왕과 승려만이 출입하는 것이라니 그들은 내부를 통하여 오르는 길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올라오는 이 있으면 이 성스러운 곳을 누구나 자연스럽게 몸과 몸을 낮추어 기어 올라오라는 뜻인가. 아무나 올라 말라는 곳인가. 이곳의 모든 오르는 외부 도로는 50도가 넘는 급경사로 가팔랐다.
허나 내가 누구인가. 왕년에 산과 함께 살아온 산 꾼이 아닌가. 옆에 쇠줄을 외면하고 암벽 타듯 뒤돌아보지도 않고 일행에게 나 보란 듯이 용을 써 기어올랐다.
거의 다 올랐을 때, 어디선가 '반사이!'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사히 올라왔다는 것이다. 나보다 한 10살쯤 더 되어 보이는 일인 노파였다. 해방 후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3층 중앙의 탑은 완전히 파괴되어 텅 빈 곳에 6m 가량의 정사각형의 수영장 같은 곳이 있다. 왕의 목욕 소인데 물은 어떻게 날랐단 말인가.
이곳이 처음 발견될 당시 왕가의 재보(財寶)가 발견되었다는 곳이다.
이곳의 부도는 1층 회랑 같이 많지는 않으나 주로 압사라(天女)의 아주 정교한 부조가 모퉁이마다 숨은 듯이 서 있다.
이 앙코르왓이 완공되기 전에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었기 때문에 3층은 1층 회랑처럼 찬란하지 않은가 보다.
저녁이 가까워 온다. 낙조는 어제 톤네삽에서 미리 보았으니 이제 이 나그네의 여행길도 이제는 귀국 길에 들어서는구나.
세월은 가고 추억만이 남는 것. 추억을 구체적으로 남게 하는 것이 사진이거니-, 하며 저물어 가는 앙코르의 모든 것을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에 담으려 손이 아프게 눌러 대었다.
아, 아기다리고기다리며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앙코르여!
이 나의 감회를 일찍이 세계적 역사학의 태두 토인비(Toynbee)가 이렇게 대신하여 주었다.
“불가사의하고 경이로운 앙코르에서 나의 남은 여생을 마치고 싶구나."
거듭 말하거니와 앙코르왓이 세계7대 불가사의라고 말하고 있는 사전은 없다. 그러한 말이 생기기 이전부터 밀림에 굳게 갇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을 둘러 본 사람이면 이곳을 세계7대 불가사의가 아니라 세계3대 불가사의라 한들 누가 있어 이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투어 일행들은 나만 빼고 50여 개국 이상을 다녀온 배테랑 여행가들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그리스 로마에서보다 더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한다. 유럽보다 더 거창하고 더 정교하며 더 다양하다는 것이다.
압사라가 하늘나라를 춤으로 노래하는 곳. 힌두교를 통한 고대 인도의 거대한 서사시를 부조로 읊조리고 있는 곳. 주판알 같은 창문의 신비한 모습. 방금 도배를 끝낸 것 같은 천장의 연꽃무늬, 부채처럼 활짝 치켜든 코브라의 모습. 어디를 가도 다시 만나 볼 수 없는 앙코르톰의 사면 불들의 캄보디아의 미소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다시 또 천년 이상이 더 흘러도 길이 남을 석조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역사의 자랑스러운 후손들은 어떠한가.
거지보다 더 비참한 생존을 톤레샵 가에서 수상 가옥을 짓고 집시처럼, 새처럼 가난을 살고 있다. 한창 배울 나이의 10살 전의 아이들은 처량한 소리로 관광객에게 달려가서 1달러를 구걸하게 하고 있으며, 몇 십 달러에 캄보디아 여인들이 관광객에게 몸을 팔러 거리에 나서고 있다.
병원이 없는 이곳에서는 몸이 아프면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아편으로 아픔을 멈추게 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캄보디아 장래를 짊어질 인텔리는 폴폿 정권에 의해, 전 국민의 절반인 250만 국민이 아사(餓死)나 학살로 죽어 갔고, 끊임없는 내란으로 세계 최빈국의 대열에서, 생존을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나라였다.
뼈아픈 이러한 역사는 이 위대한 앙코르의 후예들로 하여금 후세 교육에 무관심한 국민을 만들고 말았다. 이 누구의 책임인가. 이 누가 책임져야 할 역사인가.


해외여행에서의 옵션과 쇼핑하기

여행의 즐거움이 잘 보고, 잘 먹고, 잘 자는 것이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쇼핑 잘하기다.
처음 해외여행으로 미국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더니 옵션 중에 하나가 식사를 하면서 보는 민속춤 훌라후프였다.
어린 처녀들이 야자열매 반 조각으로 젖을 가리고 야자 잎 치마를 두른 하체를 흔들어 돌리며 북에 맞추어 추는 훌라후프 춤은 하와이의 상징이요, 향기다.
이 옵션에 100불을 달라 하였다. 아내와 함께라면 200불이라 돈이 아까워 생략하기로 하였다.
돌아와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에게 이 갸륵한 나의 절약을 자랑삼아 말했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면 무엇 하러 거기까지 갔냐는 것이다.
그때 내 가슴을 치던 것이 있었다. 그래,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거야. 써야 할 때 아까워 쓰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낭비였어, 낭비!
그 이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서 풀레밍고 보는 일에 앞섰고, 바르세로나의 피카소 박물관도 망설이지 않고 앞장섰다.
중국에 가서는 처녀의 발 안마까지 받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집트 룩소르에 갔을 때는 역마차 여행이 있어 일인당 5불씩 주고 탔더니 마부가 묻는다. “How many wife do you have?” 한다. 그래 아내를 가리키며 “She is my wife.” 했더니 대답한다. “Me too. because I am poor.” 이런 소리를 옵션 아니면 어디서 듣겠나.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면 달러가 왜 그렇게 크게 보이지? 1불이 일 만원보다 더 많은 것 같다. 내가 숫자에 너무 더듬거려서일까?
캄보디아 왕궁은 내부 촬영을 못하게 하고 겉만 찍을 수 있다는데 그리고도 카메라는 2불, 캠코더는 5불을 받는다 하여 녹음기만 달랑 들고 들어갔더니 함께 한 장 선생이 구박한다.
글 쓰는 분이라 해서 거시기 했는데 실망했다고. 자기는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는 말이다.
나는 속으로 그랬다. 나 모처럼만에 잔소리 피해 온 인천 짠물 일만(필자)이다, 일만. 그렇게 해서 이번 여행에서도 준비 해간 달러를 절반도 못쓰고 왔다.
돌아오니 후회가 난다. 사이공 유니온 이라는 섬에서 파는 야자 잎으로 만든 1불하는 모자를 서너 개 더 사올 걸. 라오스에서 1~3 달러면 살 수 있는 목공예 품은 몇 쌍을 더 사와야 하는 건데-. 그 인력거 시클로 하나만 사올 것이 아니라 월남에서 여자들이 양쪽에 소쿠리를 담고 메고 다니는 가잉(ghang, 목도채)이라는 목각도 함께 몇 쌍 사와야 하는 것이었어. 이천 도자기 엑스포에서 사온 파키스탄 옥 코끼리 하나가 얼마나 외롭던가.
장 선생이 70불이나 주고도 아낌없이 사는 것처럼, 하노이, 사이공에서 관광 책을 사와야 하는 거야. 언제 거기 다시 갈 수 있겠어. 하고 후회하였다.
캄보디아나 라오스에서도 그랬다. 명승지가 박혀 있는 2~3달러 하는 반소매 티를 10여 개 사다가 딸들 아들 내외에게 고루고루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사이공에서는 야자수 마시고 남는 열매만 빻아 만든 캬라멜을 5불 주고 6개 사 왔는데 얼마나 맛있던가. 갸륵하게 쓰고 남은 달러를 받으면서도. 왜 더 사오지 않았느냐고 아내가 말하지 않던가.
버스 보내고 손드는 격이지만 절약한 이번 여행 쇼핑에도 후회가 많았다. 거기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물건들이라 아쉬움이 더했다.
사이공에서의 여행 마지막 밤, 노트르담 사원 광장에서 만난 점잖은 월남 샐러리맨과 만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안고 있는 딸 사주라고 1달라 주고 헤어진 것이나, 거기서 1불로 파는 그물 침대 해먹 4개를 사온 건 아주 잘한 일이었지-.
이렇게 쇼핑한 것은 여행이 끝나고 한국을 살면서, 내 여생의 마지막 여유를 투자하여 다녀온 곳을 가끔이라도 기억하게 하는 물건을, 거실이나 서재에서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남들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버거운 큰 가방을 가지고 다녔는데….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카소 박물관에 갔을 때, 큰 것을 산다고 잔소리하는 아내와 쌈쌈하면서 사다가 걸어 놓고 즐기는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처럼, 요번엔 라오스 아침 시장에 가서 사다가 거실에 걸어 놓은 코끼리 두상은 보면 볼수록 나를 흐뭇하게 한다.
라오스를 떠나올 때 아침 시장(Talat Sao)에서 산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50cm로 제법 큰놈이다. 47달라 달라는 것을 돌아서는 시늉을 몇 번씩이나 하며 36 달러에 깎아 사 가지고 시장 구경을 다닐 때였다. 아뿔싸, 놈의 상아가 쇼 윈도우를 슬쩍 스친 모양인데 진열대 유리가 사선으로 순식간에 금이 죽- 갔다.
순간 생각나는 것이 36계 줄행랑이었다. 주인이 알면 외국인이라고 유리 값의 열 배나 더 받겠지-. 이 코끼리 하나 값은 족히 더 받을 거야. 귀퉁이여서 본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야, 하면서 차로 돌아와 ‘후유-' 하였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입고 있던 조끼, 모자를 차에 벗어 두고 시장 구경을 다시 나갔다.
그러다가 이름과 달리 아침만 아니라 종일 열리고 있다는 라오스 최대 시장 아침 시장(Talat Sao)에서 가장 볼 만하다는 옥을 파는 곳도, 싸게 판다는 동물의 뼈, 발톱, 이빨도, 꼭 사가겠다고 벼르던 7,500 kip(1달라. 외국인에게는 2달라 부름)면 살 수 있다는 전통 복장을 입은 라오스 인형도 못 사오고 말았다.
돌아와서 살펴보니 코끼리 두상은 머리에 비해 작은 눈동자를 가진 놈이다. 코를 오른 쪽으로 둥글게 감아올리고 있고 콧구멍2, 귓구멍 두 개가 예쁘게도 뚫렸는데 유리를 해먹은 하얀 상아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그때 내가 비겁한 어그리 코리안(ugly korean)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진다.

 

인도차이나에서 본 우리 코리아
우리들의 여행이 라오스와 베트남에서 비록 그 나라 수도와 대표적 유적지 주변을 둘러보고 온 것에 불과하지만, 10일 동안 함께 한 우리들은 거의 다 세계 6대주를 다 둘러보고 세계의 오지(奧地) 국가를 찾아 온 사람들이다.
나이테를 보고 나무의 크기와 동서남북을 유추할 수 있듯이, 부분만으로도 전체를 살필 수 있는 눈과 귀가 튼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 둘러보고 온 곳은 인도차이나 반도이었지만,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외국을 통하여 정작 보고 온 곳은 바로 우리나라 코리아였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가 못사는가.
의식주는 사람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3가지 요소이지만, 여기는 상하(常夏)의 나라라, 의식주를 가장 쉽게 해결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웬만한 타월 하나면 옷이 해결되고, 식량이 되는 곡식도 노력에 따라서는 5 기작(期作)이 가능한 나라요, 파초 잎 하나면 그걸 깔고 덮고 어디서나 잠을 청할 수 있는 천혜(天惠)의 축복 받은 땅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지내기 어렵다는 겨울이 없는 나라. 거지와 극빈자가 구별되지 않는 나라. 그래서 국민들은 바쁘거나 조급하지가 않고 게으를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바 있는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가 말하는 저차 문명(低次文明)에 고차 문명(高次文明)에로의 도전이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아서 문명을 향상시킨다는 그 대응에 소홀한 나라였다.
이와 같은 예는 아르헨티나에서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는 브라질 다음으로 큰, 세계에서도 8번째로 큰 나라다.
여기에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국민 3,000만 명이 사는,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부유했던 이 나라가 지금은 IMF를 두 번씩이나 맞고 국가 부도를 내어 세계가 걱정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이유가 천혜의 자원인 1차 산업 농.목축업(農牧畜業)에 안착하고 거기만 의존하다가, 발전하여 가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하여 오다가 국가 파산의 경지까지 몰고 가게 된 것이니, 천혜의 국토와 풍부한 자원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인류 사상 처음 우주를 날아 보고 와서 한 말이 “지구는 푸르다."였다.
내가 이번 여행지 인도차이나 반도를 보고 느낀 것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에서 태어난 기쁨'이었다.
그 동안 스스로를 엽전(葉錢)이라 비하하면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지니고 살던 사대사상, 외제 선호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88올림픽 때 여의도 광장에서나, 대전 엑스포 전시장에서 대부분의 한국 관람객들이 모든 다른 나라 전시관을 젖히고 한국관 앞에서 1시간 이상씩 줄을 서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상상해 보시라. 이름도 생소한 라오스에 수도 비엔티엔에서 ‘자동문'이라 쓴 한국제 버스를 타고, 거기서는 일류 호텔이라는 라오스 호텔에서 LG제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대우 TV를 채널을 돌리니, 아리랑 채널에서 한국의 연속극이 상연되고 있을 때, 나라 밖에서 발전한 한국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코리언이 어디 있겠는가.
동남아에서는 지금 한류(韓流) 열풍이 상상 이상이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동북아가 조명 받는 지금 한국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얻었지만 인화(人和)만을 얻지 못했다"고 위정자를 매도하고 있는 어느 실업 인의 신문 기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인도차이나 여러 나라가 이토록 못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위정자라면,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부류가 위정자가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가장 강국이라는 베트남에서의 한류(韓流) 열풍은 대단하였다.
코리아를 본받아 따라가야 할 부러운 발전의 모범으로 삼고 있었고, 한국 제를 선호하며, 한국의 가수나 탤런트들은 그들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모래시계'라는 한국의 연속극은 호치민시(구 사이공)에서만도 여섯 번이나 재방영되었다 하며, 우리 가수들 TV 탤런트는 그들의 우상으로 그들의 입고 있는 옷은 젊은 베트남인들에게 그대로 유행이 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보다 더 매너가 좋고, 부유한 나라이지만 자기들을 한때 지배하였던 데다가 그보다 한국인의 문화가 자기네와 더 같기 때문이란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들과 너무 닮아서 우리나라 가이드 배(裵)군은 베트남인으로 혼동될 때가 제일 섭섭하다고 할 정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세계 제1위의 IT산업 국가요, 조선국(造船國)이요, 세계 제2위의 반도체(半導體) 국가요, 선박(船泊) 국가이며, 철강 국이요, 세계 제5위의 자동차 국가가 아닌가.
그래서 한번도 성공을 하지 못하고 살아온 나와 같은 서민도, 재작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캐나다의 자연에 감격하였고, 작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는 스칸디나비아 제국에 가서 왜 잘 사는 나라인가를 묻고 다녔더니, 금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에 속한다는 인도차이나 반도 세 나라를 둘러 볼 수 있지 않았는가.
거듭 말하거니와, 아프리카나 인도차이나나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한 10일간의 투어 여행이었다. 우리가 노래하던 잠꾸러기가 없어서 좋은 나라에서 벗어나, 이제는 남들도 인정해 주는 저력 있고 능력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 여행이었다.

 

Ⅺ. 뉴질랜드 기행
[뉴질랜드 남섬편]
키위(kiwi)들이 사는 나라/ 뉴질랜드
흰 구름이 길게 덮인 새파란 하늘 밑에서 1,000만 마리 소가 사는 나라.
별빛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십자성이 내려다보는 초원에서 8,000만 마리 양들이 잠드는 나라.
지구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발견된, 지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낙원.
인간이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지상 천국.
지상 낙원 건설이 국가의 목표인 나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라가 키위의 삶을 책임져 주는 나라.
가난한 키위도 최소의 여유나마 함께 갖고 즐기며 살 수 있는 나라.
스포츠 레저의 천국.
에베레스트 정상을 세계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경 키위의 조국.
한반도 1.2배의 땅에서 인구 360만 키위들이 사는 나라로 우리는 가고 있다.

키위(kiwi)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키위라는 새, 키위라는 과일도 있지만, 키위는 뉴질랜드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키위 새는 크기가 닭만한 새인데, 뉴질랜드에는 천적인 맹수나 맹조류가 없어서 구태여 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날개와 꼬리가 퇴화하여 닭처럼 날개는 있으나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다.
그래서 낮에는 나무 구멍이나 땅속에서 코알라와 같이 거의 18시간 잠을 자는 야행성으로 갈색 깃털인데 부리가 길고 끝이 휘었다. 그 부리를 진흙 속에 깊이 박고 지렁이나 곤충이나 그 유충을 잡아먹거나 연한 풀뿌리 먹고산다.
키위의 암놈은 체중이 2kg 밖에 안 되지만 500g이나 되는 알을 낳는다. 그러나 의외로 이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 일은 수놈 키위 몫으로 새끼가 알에서 깨어 나올 때쯤이면 가엾게도 체중이 1/3이나 준다고 한다.
뉴질랜드 남편들을 키위 허즈벤드(kiwi husband)라고도 한다. 직장에서 퇴근하면 술집으로 가서 1찻집 2찻집 하다가 막차 집은 노래방이 되는 한국 가장들과는 달리 그대로 집으로 직행하여, 이 나라에서는 법으로 정하여 놓았다는 잔디 깎기나 세차는 물론 저녁 설거지 같은 자질구레한 궂은일까지 가족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회식으로 늦는 일도 없다. 회식도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 이 나라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림 잘하는 한국 여인과 키위는 궁합으로 천생연분이란 말도 있다.
새의 이름을 키위라고 한 것은 새의 울음소리가 ‘키위, 키위' 한다 하여 옛날 이곳 원주민 마오리(maori)족들이 키위라고 불렀기 때문이란다.

여름에 유백색의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달걀 크기와 모양에 아주 짧은 다갈색 털이 있는 열매가 열린다. 이걸 반으로 잘라 보면 담녹색에 수박처럼 까만 씨가 많지만 연하여 그냥 먹을 수가 있는데 그 맛은 달지만 약간 시다.
미국 식품 영양학 회가 각 과일의 칼로리 당 영양분을 분석해 순위를 매겨 발표한 것이 있다. 1위는 키위, 2위는 파파야, 3위는 멜론이고 그 좋다는 포도가 10위였다. 비타민C만 가지고 말하여도 사과의 17배나 들어 있는 영양의 보고란다. 칼로리는 낮고 영양은 풍부한 과일이라 해서, 요즈음은 건강 다이어트 식품으로 널리 알려져서 우리나라 농가에서도 재배하고 있다. 참다래 라고 하는 것이다
키위를 먹을 때에는 반을 뚝 잘라서 스푼으로 파먹거나, 깎아 먹을 때는 칼로 하얀 심지를 파내고 세로로 갈색 겉을 깎아 먹는데, 살 때는 만져서 무르지 않고 단단한 것이 싱싱한 키위라 한다.
이 신비의 과일은 원래 양자강에서 다래처럼 작게 자생하던 것을 뉴질랜드 인이 가지고 와서 오늘날의 크기 키위로 개량한 것이다. 이것이 세계 시장에 널리 알려져서, 오히려 중국에도 역수출을 하고 있다.
이 과일이 키위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색깔이 키위라는 갈색 깃털을 가진 키위 새와 비슷하다 해서이다.
그래서 뉴질랜드 인들은 세계에서 자기 나라에만 살면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따르는 이 새를 국조(國鳥)로 삼고 사랑하고 보호하며, 그 유명한 키위 과일로 인하여 스스로 자기들을 키위라고 한다. 이곳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은 한(韓)키위라고 부른다.
뿐만이 아니라 키위란 이름은 뉴질랜드 화폐, 우표나 모든 주요 산물의 상표로 두루두루 쓰이고 있었다.

 

 크리스찬처치 공항에서
어제 밤늦게 도착한 크리스찬 처치 공항에서 입국할 때는 이건 너무 하구나 싶게 듣던 대로 입국 절차가 극심하였다.
맹인견 같은 커다란 개가 꼬리를 치며 짐마다 냄새를 맡으며 지나가더니, 처음 만난 검사대의 키위는 술꾼인 내가 팩 소주 10병을 큰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갔는데도 무엄하게 그걸 하나씩 세어 보고 있었다.
구두 발바닥을 들어보라고도 한다. 가이드가 말하던 대로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물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라는 말이 맞았다. 그들이 금하는 것들을 가지고 들어가다 적발되면 압수당하는 것은 물론 높은 벌금까지 물어야 한다 하여, 가지고 간 약까지 신고해 달라고 가이드에게 맡길 정도였다.
나중에 듣고 보니 이 나라는 청정의 나라라, 이 나라에 사는 동물이 다 병원균에 약하고 저항력이 없어서 음식물 반입을 금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 미국 관광객이 갖고 들어온 사과 씨가 이 나라에 퍼져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고도 하지만, 아무튼 손님의 가방을 이렇게 심하게 뒤지는 것은 자기 나라를 찾아온 손님에게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나 하는 서운한 생각을 갖게 하였다.

 

우리와 정반대로 사는 나라/ 뉴질랜드
뉴질랜드는 우리와 반대로 사는 나라였다.
인천 공항을 초여름인 6월 31일 출발하였는데 뉴질랜드는 한겨울이다. 허나 겨울인데도 우리나라 겨울 같이 춥지가 않았다.
북쪽으로 갈수록 따뜻한 나라이고 남쪽으로 갈수록 추운 나라였다.
밤에 북두칠성이나 오리온 좌가 보이지 않는 대신, 남극성과 은하수 속에 십자성이 보여 “남쪽 나라 십자성 어머니 얼굴~"하던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다 살아 계실 적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고 객수에 잠기게 하였다.
뉴질랜드는 양이 사람보다 23 배나 많이 사는 나라이고, 소가 사람보다 2배 이상 많이 사는 나라였다.
세금으로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는 우리네와는 달리, 사회보장제도가 있어 키위들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을 책임지는 나라였다.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아니라 여존남비(女尊男卑)로 가정에서 아내>자식>노인>개>남편 순으로 가장인 남편 서열이 제일 낮다고 어디서나 말하는 나라였다.
차는 좌측통행을 하기 때문에 자동차 핸들이 우측에 있다.
새 차보다 중고차를 선호하여, 일제 중고차가 모든 시내를 누비고 있었으나, 한국의 중고차는 운전석이 왼쪽이라 여기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일을 많이 하거나, 위험한 직업이거나, 천한 직업에서 일하는 키위가 월급이 많아서 직업에 귀천이 없는 나라였다.
장례에서는 관은 세워서 묻고, 묘소는 산 아닌 동네에 있었고, 무덤마다 꽃이 있어 죽어서도 호강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고 버튼을 눌렀더니, ‘쏴아-' 하며 물이 돌아내려 가는데 시계 반대 방향이었다. 시계를 남반부 사람들이 발명하였다면 시계 방향이 바뀌었을 것이란 말에 수궁이 갔다.
관광 국가에서 우리 같은 관광객이 내국인과 다투면, 손님인 관광객을 강제 출국시키는 손님이 왕이 아닌 나라였다.
그래 그런가, 이 나라에서 만난 한국인 가이드는 일정표를 뒤에서부터 앞으로 돌려주고 있었다.


신의 의상(衣裳)인 자연/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에서 투숙한 홀리데이인 호텔은 모래 다시 올 곳이라 시내 경치 구경은 돌아와 하기로 하고 우리는 퀸스타운(Queens Town)을 향해 8시간의 버스 투어에 나섰다.
40대 초반의 키위 운전기사가 최근에 샀다고 하는 중고차 맨 앞자리에 요란한 카메라 장비를 하고 앉았다. 디지털 카메라, 디지털 캠코더, 디지털 녹음기 등, 첨단 제품을 하나의 액세서리로 장치한 것이다. 보험도 처리해 주지 않는다는 앞자리라지만 달리는 차 속에서 비디오 촬영은 앞자리만 한 데가 없기 때문이다. 차창 좌우에 펼쳐지는 꿈에도 오고 싶어 그리던 뉴질랜드의 산하가 다가오고 달려간다.
가까이 보이는 산은 신기하게도 나무가 거의 없는 돌산이고 그 뒤로 2,600m의 서던 알프스 연봉이 산머리에 만년설을 이고 신비롭고 환상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앞서거나 뒤 따라 오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고스란히 신의 의상(衣裳)이다'라고 여행가 김찬삼 선생님의 뉴질랜드 여행기에 쓰신 카알라일의 글이 생각난다. 그분은 고교 때 나의 은사이셨다.
뉴질랜드는 쿡 해협(Cook Strait)을 두고 북섬과 남섬 두 섬으로 이루어진 칠레처럼 긴 나라이다.
뉴질랜드 지도를 동서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고 유심히 보자, 우리나라 지도와 비슷하지 않은가. 사이에 있는 쿡 해협(Cook Strait)은 비극의 휴전선이라 생각하고, 남섬 아래 ?마우리 카누의 닻?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스테와트섬(Stewart Island)을 제주도라 생각하면 틀림없는 우리 나 지도가 된다. 그러면 크라이스트처치는 인천(仁川) 위치에 있고 오크랜드는 백두산 위치에 있다.
우리나라 태백산맥의 백두대간 같이 70%의 산악 지대가 남섬 서쪽에 치우쳐 있어 남섬은 평야가 적다.
호주 쪽에서 편서풍이 불어와도 비구름이 저 높은 서던알프스 연봉을 넘어 동쪽으로 갈 수가 없어 서쪽에는 연중 거의 비가 내리며 겨울에는 폭설도 내려 만년설이 저렇게 쌓인다.
반대로 지금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동쪽은 연평균 강우량이 668mm로 적은데다가 거의가 돌산이어서 사막처럼 나무가 없고 초원도 드물다.
양들이 모여 사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면 바퀴가 달린 긴 물뿌리개가 있다. 이 움직이는 긴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리면 풀은 우리 땅에서보다 네 배나 더 빨리 자란다. 물을 주지 않으면 이내 말라죽기 때문에 그걸 잘라 건초를 만들어 우리나라에까지 수출을 할 수 있다 한다.
양들이 있는 곳에는 전기가 통하는 울타리를 쳐서 양과 소와 사슴들을 기르고 있다.
그 사이 사이에 관광객이 보기 좋게 곱게 전지하였다는 방풍림이 있는데, 가지가 나무 밑동부터 무성하여서 골프 공 같은 크기 정도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이 울창하다. 축사가 따로 없이 방목하는 초원에서는 이 방풍림이 비바람이나 눈보라 치는 날에는 양들의 피난처도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슴 목장에는 울타리가 유난히 높았다. 사슴은 점프를 잘하기 때문이다. 목장 주들은 이곳에 물탱크를 설치하여 사슴들이 물을 마시게 하려 일주일에 서너 번만 둘러보면 되는 모양이다.
그래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계속되는 양과 사슴의 목장이련만 일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우리네와 달리 사람들이 귀한 세상이었다.

 

마운틴 쿡을 보지 않고 산을 말하지 말라
내가 평생 만나 본 산 중 가장 높았던 산은 캐나다에의 롭슨 산이었다. 그때의 감흥을 다음같이 흥분하여 기록한 일이 있다.
"북아메리카의 최고봉 3,954m의 롭슨산(Robson Mt.) 정상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본연의 얼굴로 하얀 모습의 장관을 들어내어 우리를 맞아 주고 있다. 아프도록 목을 뒤로 젖혀야 보이는 저 높은 정상의 흰눈이 바로 빙하(氷河)이다. 한번만 구경 오십시오 하는 1,950m의 한라산 정상도 구름에 싸여 보기가 쉽지가 않거든 하물며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이 고봉(高峰)이 화창한 날씨를 열어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축복인가."

롭슨 산보다 조금 낮은 3754m의 마운틴쿡(Mt. Cook)은 넓이가 700만 평방km라는 마운틴쿡 국립공원에 있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20여 개가 된다는 3,000m 이상의 산과 2,500m 이상의 뉴질랜드의 알프스라는 서던 알프스의 200개 이상의 산을 연봉으로 거느리고, 새파란 하늘을 헹궈 낸 듯한 에메랄드빛 데카포 호수를 앞에 두고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갈 때는 구름에 가리어 보지 못하던 것을 돌아올 때 보니, 구름을 씻고 만년설을 머리에 인 은빛 얼굴을 들어 내고, 같은 길을 되돌아오는 우리들의 아까운 투어 코스를 위로하듯이 서서 맞는다.
저 지역은 1년에 200일 이상 비가 오는 서부 지역이라 이곳까지 와서도 보지 못하고 가는 이가 더 많은 것은 물론, 이를 보려 며칠씩 묵어가는 사람도 있다 하니, 대~한 민국의 우리들은 그야 말로 하나님이 보우한 민족임을 깨닫게 한다.
이 곳은 뉴질랜드 투어의 하이라이트로, 마운틴쿡을 보지 않고서는 뉴질랜드를 말하지 말라 하지 않던가. 가이드는 마운틴 쿡이 생각나지 않으면 만두 국으로 기억하란다.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나그네라면 호수 옆길로 난 길을 따라 산록에 있는 호텔에 머물면서, 5~6시간 걸려 직접 산에 올라 평생의 추억을 만들거나, 아니면 12만원 정도(NZ$190.00)를 들여서라도 바퀴와 스키를 단 경비행기나 헬기를 이용하면 2시간 30분가량 서던 알프스의 산들과 빙하의 아름다운 모습을 조망하면서 정상에 내려 현지 전문가를 따라 빙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워킹을 할 수 있다 하니, 나도 그 대열에 서서 내가 본 캐나다와 노르웨이에 가서 본 빙하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고 싶어진다.
허나 투어 중에도 알뜰 투어를 선택한 우리들이라, 데포 호숫가에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개(犬)동상 앞에서 사진으로 마운틴쿡에 온 것을 기념하고 있었지만, 역광이라 은빛 산과 푸른 호수 빛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 얼굴이 안타까웠다.
이곳에서 호수와 어울린 마운틴쿡의 참모습을 보시려면 유난히 벽난로 굴뚝이 돋보이는 교회 내로 들어가시라. 이 지역의 개척자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호숫가에 새워진 초라할 정도로 단순한 건물이지만, 이 경치와 너무나 멋지게 어울리면서 그 이름도 아름다운 ‘선한 목자의 교회'에 들어가면 앞에 제단이 있고, 제단으로 향한 벽에 창문이 활짝 열려 있다. 약간은 어둑한 이 교회 내에서 창을 통하여 바라보이는 신이 창조한 저 경치는 산과 눈과 물이 어떻게 조화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대형 최신 디지털 TV을 통하여 보듯, 천국 같은 유토피아를 찾아온 나그네의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즐거움을 생각게 할 것이다.

 

세계 관광의 메카/ 퀸스타운
이름 그대로 퀸스타운(Queenstown)은 여왕이 살기에 알맞은 도시이다.
고산 지대라서 고원의 더할 나위 없이 청정한 공기가 그렇고, S자 모양으로 펼쳐진 퀸스타운 도시가 품어 안고 있는 와카티푸호수(Wakatipu Lake)가 또한 그러하다.
이 호수를 사진보다 마음속에 담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용히 바라보고 가는 것보다 호수의 숙녀라는 증기선이나 경비행기를 타고 우리도 저 아름다운 자연 속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호수에 떠 있는 산 그림자와 배 그림자처럼 그 중의 우리도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호수를 더욱 유명하게 하고 있는 것은 이상하게도 바다의 간만의 차이처럼 담수호가 약 15분마다 수위가 8cm 남짓 증감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호수에는 예로부터 마오리족 연인의 사랑이 얽힌 전설 하나가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옛날에 리마커블스산에 괴물 하나 살았어.
해마다 마오리 처녀를 괴물에게 바쳤는데,
추장의
귀여운 딸이
그 순서가 되었다지.
죽도록 그 처녀를 사랑하는 총각이 있어
잠든 괴물 가슴에 날카로운 칼을 꽂았는데
호수에
굴러 떨어진 괴물이
지금도 헐떡이고 있는 거래.

전설처럼 원래 이 도시에서는 마오리족이 살았는데 주변에 사금(沙金)이 난다는 소식에 금광을 찾아 몰려온 유럽 인에 의해 퀸스타운은 1850년대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그때 사금을 캐던 곳이 우리가 지나온 카와라우 강 급류 너머에 ‘애로우 타운’이 있어 돼지우리 같은 당시의 남루한 집들이 당시에 고생하던 중국인의 거칠고 어려웠던 시절의 옛날을 말해 주고 있다.
거기에는 당시 사금을 캐던 장비가 있어 관광객으로 하여금 사금 채취를 직접 경험해 보게 한다. 그 무렵이 우리나라에서는 강화 도령 철종 때였다.
그 강을 가로질러 있던 광산이 쓸모없이 사라지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카와라우(Kawaru) 다리에서 번지점프를 최초로 시작하였다.
번지점프란 기다란 고무 밧줄로 다리를 묶고 다리 위에서 강물을 향해 42m나 102m을 뛰어내리는 것이다. 뛰어내리던 못 뛰어내리던 10여만 원이라는 요금을 내면서, 모든 사고에 책임을 진다는 각서에 서명까지 하면서 줄을 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평생에 잊지 못할 곳에서의 짜릿한 추억을 위해서였다.
어둑해서 도착해 보니 사람은 우리만 있고 상점도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무리 개척 정신이 깃든 어드벤처 레저라지만 돈을 주어도 뛰어내리지 않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인간의 마음이 재미스럽게만 느껴진다.
여기 오면 저렴한 비용으로 계절과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스키, 골프는 물론 험한 계곡을 나를 듯이 쾌속정을 타고 달리는 멋이 있다. 그래서 여름에는 제트 보트를 타거나, 급류 타기, 낙하산 타기, 글라이딩 등등 특별한 훈련 없이도 누구나 참여할 수가 있는 이 환상적 뉴질랜드 남섬 최고의 관광지 퀸스타운을 향하여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세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오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며, 휴양도시며, 레저 스포츠의 메카 퀸스타운인 것이다.
그보다 더 유명한 게 된 것이 퀸스타운은 우리가 지나온 서던 알프스로 가는 입구요, 내일 가기로 된 피오르드의 고장 밀포드 사운드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이었다.

 

투어 여행의 슬픔
책에서는 세계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 중의 하나가 뉴질랜드의 퀸스타운이라고 하던데 섭섭하게도 우리는 이곳에 이틀이나 와서 먹고 자고 했을 뿐 그 유명한 세계적 관광도시에서 보고 온 것이 하나도 없다.
디지털 캠코더와 디지털 카메라로 중무장하고 갔다 와서도 퀸스타운에서 찍어 온 사진 한 장 없다. 우리는 깜깜한 밤에 가서 저녁을 먹고 자고 아침에는 서둘러 그냥 떠나왔을 뿐이다. 섭섭하기보다는 다시는 올 수 없는 이국의 명승지라 허무하다.
아무리 알뜰 여행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일정이 바빠서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하다.
우리 일행은 캄캄한 밤에 도착하여 식사하러 오가며 본 일부 시내 거리와 산꼭대기에 십자성처럼 빛나는 전등을 보고 무엇인가 한번 올라 가 봤으면 하고 아쉬워했을 뿐이다.
호텔비를 아끼기 위해서겠지만 우리가 두 밤이나 잔 곳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이라 갈 곳도 낯선 시내에 나갈 방법도 없어서 그냥 잠들 수밖에 없었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시내 전경을 바라보지 못한 것은 물론 시내로 한 바퀴 돌아 주지도 않았다. 그 유명하다는 와카티푸 호수(Wakatipu Lake)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호수의 숙녀라는 증기 유람선의 모습도, 선착장을 둘러 싼 각종 이벤트도 못보고 그냥 서둘러 그 도시를 떠나왔다. 알뜰 여행이란 생략 여행인가. 뭐가 그리 바빴을까?
묻고 싶다, 퀸스타운에 와서 이틀이나 자면서 퀸스타운을 못보고 가는 그런 여행객도 있을 수 있는가. 내가 대답해야겠다, 우리가 있다고.
이름값은 하겠지- 하고 한국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여행사를 선택한 우리가 이럴진대다른 여행사는 어떠했을까?
우리보다 먼저 다녀온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더라.
"퀸스타운을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요. 그 아름답고 멋진 그 호반 도시를-."
나는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그보다 값싼 전자 제품을 수리하러 다녀와도, 이상 유무를 묻고 확인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수백만 원을 들여서 10일 동안이나 다녀왔는데, 우리 부부를 반겨 주던 신청할 때의 직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계산이 끝났기 때문인가.
설명회는 하면서 무엇이 시정되어야 할지 알아보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소홀해도 되는가. 그렇다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겠다는 말이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함께 간 가이드에게 폐가 될까 봐. 지나간 일인데-. 내일이 아닌데- , 하며 넘기는 갸륵한 정(情)과 편의주의 속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이 사회는 부당한 행동이 시정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잘못을 하고도 그 잘못을 말하는 이가 이상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인 것이다.
현지인을 대할 기회가 없는 투어 여행에서 가이드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의 투어 여행이란 소리 없는 TV를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때로는 현지인이 되어 주고, 묻기 전에 말해 주는 기대 이상으로 열심이었던 가이드도 많았다. 그들은 사막을 달리면서도 웃음꽃을 피워 주는 가이드이었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여행과 함께 기억될 가이드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대개 현지 가이드에 대한 이야기다.
현지 가이드가 한국말을 못하는 벙어리 가이드인 경우도 있었고, 어떤 때는 운전사에게 장소를 물어볼 정도의 초보 가이드도 만났고,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묻는 말만 대답해 주는 가이드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불이익은 오로지 우리들의 몫이었고, 우리의 재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많은 불이익은 쇼핑할 때다.
그렇게 재촉하던 여행이 쇼핑하는 곳에 가면 왜 그렇게 시간에 관대하여 지는지-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그렇다면 쇼핑할 때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 재촉했다는 셈이 된다.
해외여행에 나선 사람이 가이드 측과 쇼핑센터와의 커미션의 수수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공인된 비밀인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가이드 체면을 지켜 주기 위해 사주는 고마운 사람들의 미덕을 알지 않는가.
시드니에서 만난 가이드는 유능한 30대 청년인데 아는 것도 많고 언변이 청산유수여서 우리 모두는 홀딱 그에게 반하여 그를 신뢰하기에 이르렀다.
시드니의 마지막 날 그가 안내하는 대로 30%나 할인해 준다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시드니 쇼핑센터에서 일행은 믿거라 하고 우리는 많은 물건을 샀다.
그런데 뉴질랜드에서 여행 중에 교포가 아닌 키위들이 파는 곳에 갔더니 그 나라 돈으로 시드니에서 110$ 주고 산 똑같은 상표 여자 모자가 63$이었다. 1 달러로 쳐서 호주가 뉴질랜드보다 100원이 더 높은 것으로 따지면 거의 2배나 비싸게 주고 산 셈이 된다. 그것도 가이드에게 소개받은 우리 교포 가게에서 말이다.
우리는 증거를 만들어 부당한 것을 돌려받기는 했지만, 해외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포가 해외여행 온 우리를 봉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고, 막말로 이민 와서 기다렸다가 서로 결탁해서 한국 사람을 뜯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서운한 생각은 이 여행에서 얻은 불쾌한 소득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가이드가 서둘러 잘못을 시정해 준 데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가격표를 붙인 것은 현지 상인의 잘못이지만 그 책임을 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못은 어리석은 마음으로 하지만, 이를 곧 시정하는 것은 훌륭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지 상인들도 그 나라 사람들의 가게보다 비싸게 고국 여행객에게 파는 이런 행위는 존속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시정해야 할 일이다. 우리만 그런가 하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시드니를 향하는 기내 옆 좌석에 신혼여행을 가는 신혼부부가 있었다. 축시 한 편 써 준다는 약속도 빚이라 e-mail로 보냈더니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다니기에 아픈 답장이 왔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저희 부부는 좋은 신혼여행을 그만 시드니에서 망치고 말았답니다. 시드니의 가이드가 거의 사기꾼에 가까워서 그곳에서 선물을 사며 바가지만 쓰고, 호주의 물건도 아닌 중국의 수입 물건들만 사오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좀 기분이 좋지를 못하였습니다. 저희는 신혼여행이 둘이서 가보는 첫 여행이었고, 또 저는 여행을 다녀 본적이 거의 없거든요."

여행사에게 묻겠다. 이렇게 해서라도 돈을 꼭 벌어야 하겠는가? 우리보다 선진국이라는 일본 여행사나 가이드도 이렇게 비열한 짓을 할까?
우리만이 그런 게 아니라고? 아무리 대통령이, 정부 고관이, 심지어는 그들의 자식들까지 도둑질하는 나라에서 이민 간 사람이라 해도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장 걱정하던 것은 무능한 가이드거나, 가이드에 적성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만난 세 분 가이드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능력과 성실성 등으로 해서 흡족해 하는 편이다.
세 사람은 6학년이 넘는 우리들을 데리고 노는 듯한 가이드, 부모를 모시듯이 안내하는 가이드, 아버지에게 호소하듯이 감격시키는 가이드였다.
우리가 떠나올 때가 바로 월드컵 3~4위전으로 축구 열기가 한창인 때여서, 가장 마음이 가는 가이드에게 주려고 붉은 악마 목도리 하나를 준비해 갔는데 남섬 총각 가이드 남 과장에게 전하고 왔다. 그의 마음속 깊이 가득한 조국애(祖國愛)에 우리 모두가 감격하였기 때문이었다.
가이드의 고충을 우리 같은 여행자도 알아야 하듯이, 가이드도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가이드도 선생이다. 선생은 나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서 도를 깨우친 사람이지만, 남보다 도를 먼저 깨우친 사람도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 선생이 너무 영리적이고 형이하학적으로 일회성 물건을 쓰듯 사람을 대한다면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이 말은 여행사 측에게 먼저 해야 될 말 같다.

 


밀포드 사운드 가는 길/ 퀸스타운 →
이곳은 지금이 한겨울이라 새벽이 캄캄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아침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부(西部)는 고산 지대라 구름이 높은 서던 알프스의 연봉(連峰)을 넘지 못하여서 비와 눈이 많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나!
비가 눈으로 바뀌어 길이라도 막히면 어쩌나 하며 걱정이 앞서는데, 초원에는 밤새 눈이 왔는지 어제 보던 초원에 눈 덩이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구더기 같기도 한 것이 오물오물 모여 있다. 양이었다.
축사도 없는 초원에서 철조망 때문에 피할 곳이 없어서 양들은 그냥 그 자리에 옹크리고 하느님이 주신 털을 벽과 지붕 삼아 눈비를 맞으며 끼리끼리 붙어 한눈을 한 것이다.
안됐다는 생각이 난다. 우리 인간이 이 자연 앞에 죄를 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맹수가 없는 양들의 낙원 뉴질랜드에 천적(天敵)이 누구란 말인가? 이 노 시인의 마음에 갑자기 시심(詩心)이 감돈다.


보이는 게 초원(草原)뿐인데 다툴 일 있겠어요?
내 것이 아닌 몸인데 두려울 일 있겠어요?
맹수가
없는 이 나라엔
인간들이 천적(天敵)이지요.
                           -양
밀포드 사운드까지는 버스로 4시간. 예약한 배 시간에 맞추어 가야 하기 때문에 어둑한 이른 새벽부터 출발하게 된 것이다. 어제 이곳까지 달려 올 때는 나무 하나 없는 누런 산이었다. 그 산에 누런 동글동글한 것이 온 산을 덮고 있는데 마치 산 전체가 부스럼이 난 것 같다. 바위도 아니었다.
이것이 이 나라가 보호하는 터석 이라는 풀로 여름에도 색깔이 저렇게 누렇다고 한다. 이 터석이 있는 곳은 법으로 초원으로 못 만들게 금하고 있다 한다.
어제는 나무 대신 터석이 무성했던 산이, 오늘은 초목이 무성한 산으로 바뀌었다. 비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림(雨林) 지대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환경 보호에 더할 나위 없이 철저한 이 나라에서는 나무가 없는 곳에 나무를 심어도 자연 파괴라고 금하는 나라였다.
자세히 보니 길가 초원에 울타리가 끊기었다. 울타리가 그친 곳이 국립공원이라더니 우리는 드디어 피오르드 국립공원 경내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차로 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황홀한 관광길인데 밀포드 사운드가 가까워질수록 그 아름다움이 더하여 차창을 향한 비디오카메라가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느라 바빠진다.
이 인적미답의 원시림에 활짝 핀 눈꽃을 보며 우리는 감격하고 있었다. 눈이 오면 찻길이 막힌다는데 태고의 원시림에 설화와 피어나는 연무 같은 계곡 속을 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여행가서 볼 것을 다 보고 오는 것도 행복이지만, 남들이 못 볼 것도 보고 오는 것은 행복 중에 행복이 아니던가.
내리던 비는 눈으로 바뀌고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곳곳에 체인을 감고 있는 소 중형차를 지나치고 있다.
어쩌지, 이러다 눈이 막혀 못 가게 되면-. 우리들의 걱정은 자꾸 앞서 간다.
이 질투할 정도로 부럽게 아름다운 나라에는 그 아름다움 중에서도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국립공원은 13개가 있는데 그 중 9개가 남섬에 있다니, 남섬은 관광 뉴질랜드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밀포드 사운드로 가는 길에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터널이 바로 저기 보이는 호머 터널(Homer Tunnel )이다. 암석 지대의 험난한 공사라서 인부 여러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18년을 걸쳐 1965년에 다이너마이트와 곡괭이와 망치와 정만으로 굴을 뚫어 완공한 기리 1,270m의 터널이다. 이 터널은 밀포드 사운드로 향한 출구 쪽으로 10도의 경사가 있어 물이 자연 배수 되게 하였다.

 

피오르드에서의 선상 유람/ 밀포드 사운드
밀포드 사운드에서 우리들과 같이 이곳을 꿈꾸며 찾아 모여든 세계인들과 함께 10mile 10.69km 가량의 선상 유람을 한다. 이곳은 우리들 투어의 목적지다. 여기를 보기 위해서 3일 동안의 지루한 버스 여행 시간을 감수한 것이다.
2~3 시간 동안 배는 선착장을 떠나 먼저 왼쪽 피오르드부터 마이터봉(Mitre Peak)을 지나 빙하수 폭포가 내리는 수직 절벽 너머로 만년설을 이고 서 있는 수많은 흰 봉우리를 바라보며, 옛날 녹옥(綠玉greenstone) 채취로 이름난 아니타 베이(Anita Bay)에서 돌아, 우측의 절벽 쪽에 있는 유명한 스티링 폭포(Stirling Falls)에서 폭포수를 맞으면서 돌아오는 선상 쿠르즈(Cruises)다.
자리를 잡자마자 선상 점심이 시작되었는데 뷔페식이다.
창을 통해 절경을 바라보면서 드시라는 것인데 식사 시간의 제한되어 있다. 허나 카메라의 눈은 사람 눈처럼 융통성이 없어서 오늘 같이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을 용납지 않으니 어찌한다? 핀란드에서 스웨덴까지 밤새워 가는 꿈의 여객선 실자라인 같이 기계로 창을 닦아주는 것도 아닌데-.
궁리 끝에 먹으면서 나가서 찍고, 찍다가 들어와 먹기로 작정하고 들락날락 하는데, 인정 없는 빗줄기가 물을 가장 두려워하는 디지털 캠코더와 카메라를 가슴 아프게 적시고 있다.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착장에서 눈에 마주치는 수직 산봉우리로 허리에 구름을 감고 있는 해발 1,692m 마이터봉(Mitre Peak)이다. 그 생김새가 천주교 주교가 의식 때 쓰고 나오는 흰 모자 같다 하여 주교관(主敎冠)이란 뜻의 마이터 봉(Mitre Peak)이라 하는데 그 주변 깊이만도 246m로 피오르드 지역 중에 가장 깊을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산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 당당하고 수려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인하여 피오르드에서는 물론 뉴질랜드 관광- 하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자랑스러운 뉴질랜드의 관광의 대명사가 되었다.
피오르드(Fjord)가 무엇인가.
산의 정상 골짜기 부분에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눈이 쌓여 30m 이상 계속 되면 그 압력으로 큰 얼음덩이가 된다. 그 거대한 얼음덩이가 그 무게와 경사로 인하여 눈사태처럼 아래로 흘러내리는 빙하가 된다. 그 거대한 빙하가 산봉우리를 칼날 같이 세모로 깎고 계곡 바위를 수직으로 깎으며 지나간 그 자리에 빙하 대신 바닷물이 침범해서 강 같은 바닷가 된다. 그래서 피오르드 지대는 경사가 양쪽으로 수직을 이루고, 깊이가 100m을 넘으며, 바닥과 함께 U자 형의 계곡이 된다. 지금도 계속 눈이 녹은 물이 폭포로 개울로 내리기 때문에 바다이지만 10m 이래는 바닷물이요, 위는 눈 녹은 물 담수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 눈앞에 펼쳐진 피오르드(Fjord)의 세계인 것이다.
밀포드 사운드 이 지역은 우림(雨林) 지대에 속하여 연중 강우량이 7,000m 이상으로 세계에서 제일 많다. 이런 비가 내릴 때마다 하늘에 치솟아 있는 1,000m가 넘는 수많은 암벽들 사이에서는 없던 폭포가 수백 개씩 생겨 한꺼번에 공중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란,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관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보웬 폭포와 스티링 폭포가 160m, 146m의 높이에서 거대한 양의 물을 협곡으로 쏟아 부으며,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더 장엄한 세계를 이루어 관광객을 놀라게 하는데, 위험하게도 배는 그 폭포 밑에 바싹 다가서 가며 선상 마이크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여러분, 이 폭포에서 흩날리는 더할 나위 없이 청정한 폭포수를 맞아 보시며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 폭포수를 한 컵 가득 받아오시는 분이 계시면 고급 위스키 한 병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반갑게도 우리의 가이드 남 과장이 그 통역을 한국말로 하고 있었다.
밀포드 사운드 구경은 이런 선상 쿠르즈도 있지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산책로라고 하는 ‘밀포드 트레킹 코스'도 있다. 바라보는 구경이 아니라 천국 같은 그 자연을 직접 밟아 보며 느끼게 하는 것이다. 풀로펠라 경비행기나 헬리콥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자, 이제는 돌아가야 하는데 지루하게도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산 꾼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법이 아닌데 그것도 장장 8시간 이상이라니-.
그래서 우리 같은 서민을 넘은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올 때는 버스로 오고, 갈 때는 항공편을 이용하는 행복한 선택 여행도 있다 하니, 알뜰 여행으로 온 우리야 불평인들 할 수 있겠는가.

 

관광 유감/ 뉴질랜드 남섬
이틀을 머문 도시 크라이스트처치는 우리에게 올 때는 밀포드 사운드를 가기 위하여, 돌아 와서는 오클랜드를 가기 위한 거점이었을 뿐이었다.
우리들과 크리스트처치 여행은 비유하여 다음과 같았다.
먼 이국땅에서 한국을 찾아온 외국 관광객이 있었다. 밤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시내에 가서 저녁 먹고, 관광버스 타고 호텔에 가는 길에 명동성당 앞에 내려 사진을 찍었다. 제주도에 가서 구경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다시 밤늦어 도착하여 한강 가 호텔에서 자고, 공항 가는 길에 가이드가 공원이나 건물 등 서울에 대하여 이것저것을 이야기해 주는데, 그 관광객 몇이 서울 경치를 열심히 차창을 통하여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다시 또 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밤늦게 도착한 이 아름다운 도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이틀 동안 묵으면서, 대성당 광장에서 사진 찍고 폭이 1m 내외밖에 안 되는 시내를 가로지르는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에이번 강에 노는 고기와 청둥오리를 보며 숙소 돌아와 자고 공항에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 뉴질랜드에서 제일 크고 남섬의 정치 경제 교육의 중심이 된다는 30만이 산다는 크리스트처치에 오니,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춘 세상에 온 것 같았다. 1,000만이 사는 서울을 살다가 만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렸을 적으로 되돌아가는 꿈길을 헤매는 것 같았다.
이렇게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이틀을 묵고 QF 항공편으로 쿡해협을 넘어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오클랜드를 향하면서 남섬 여행에서 키위 나라 위정자들에게 작은 아쉬움을 둔다.
밀포드 사운드 투어인 경우 그렇게 멋진 자연을 두고 지키기만 할 뿐 투자에 너무 소홀히 했다는 생각해서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지상 낙원 건설에서 변화하는 뉴질랜드로서 선회하고 있다고 말하기에 미흡하다는 느낌이다.
자연을 보여 주기만 하였을 뿐 이국 땅 먼 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들여왔던 길을 아깝게도 그 길로 다시 되돌아가게 하는 무성의였다.
그들은 1.270m의 호머 터널 하나를 파 놓고 자연을 지키기만 하는 것 같아서다.
작년에 피오르드를 보러 노르웨이를 가면서 만난,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60리(24km)를 30분을 달려야 했던 터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 터널은 관광 노르웨이를 꿈꾸며 암벽을 하루에 1m 씩 오랜 세월을 들여 뚫은 난공사였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북섬 편]
뉴질랜드 지명의 유래
뉴질랜드의 모든 지명은 거의 대부분 이 섬나라를 발견하거나 개척한 사람의 이름을 땄거나, 아니면 마오리 원주민의 말로 되어 있다.
이 나라 공식 국명은 Aotearoa(아오테아로아)와 뉴질랜드(New Zealand) 두 가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 나라를 Aotearoa(아오테아로아)라고 불리게 된 것은 마오리의 옛 조상인 탐험가 쿠프(Kupe)가 그들이 살고 있었던 남태평양의 군도에 있었다는 하와이키(Hawaiki)를 떠나 두 척의 카누를 타고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부인이 새로운 이 땅을 보고 놀라서 Aotearoa(아오테아로아)라 외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마오리 말로 “길고 하얀 구름이 있는 땅"(Land the Long White Cloud)란 뜻이었다.
뉴질랜드(New Zealand)란 나라 이름은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벨 타즈만(Abel Tasman)이란 사람과 연관된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야기 속에 남쪽 남극 가까이에 큰 대륙이 있다 하여 이를 찾아 떠났다가 인도네시아와 오스트리아 대륙을 거쳐 경치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섬을 발견하였다.
아벨 타즈만(Abel Tasman)은 자기의 모국 네덜란드의 고향 이름 ‘질랜드'에다가 뉴(new)를 더하여 뉴질랜드(New Zeland)라고 한 것이다.
이 타즈만(Tasman)이란 이름은 여러 곳에서도 나타난다.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에 있는 바다 이름을 테즈만 해협(Tasman Sea)이라 하는 것이나, 총 길이 26km로 세계에서 가장 두렵다는 태즈만(Tasman) 빙하 이름도 그와 관계가 있다.
쿡(Cook)이란 이름도 많다.
뉴질랜드에서 제일 높은 산을 마운틴 쿡(Mount Cook)이라 하고. 뉴질랜드 북섬과 남섬 사이의 바다를 쿡 해협(Cook Sea)라고 한다. 이것은 1769년에 캡틴 쿡(Captin Cook)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탐험가이며 항해사였던 제임스 쿡(James Cook)이 뉴질랜드가 두 개의 섬임을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뉴질랜드 북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불의 신 마우이가 하늘땅을 갈라놓았데.
날마다 따뜻하게 해 줄 것 서약 받고
밧줄로 묶어 논 태양을 풀어 주었다나.
거대한 물고기에 형제들을 태워 두고
떠나 버린 마우이를 기다리던 형제가
허기에, 잡아먹은 고기 뼈가 북도가 되었다지.

그래서 북도가 따뜻한 기후에 지열 지대가 많게 되었나.
그래서 그때 씹힌 자국 때문에 물어뜯긴 자국처럼 북섬
모양이 들쑥날쑥한 물고기 뼈 모양이 되었다나.


키위들의 동물 사랑/ 뉴질랜드
한국 가정의 서열은 “며느리>손자>개>가정부>시부모" 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뉴질랜드 학교에서 생활기록부를 작성할 때도, 엄마의 몇째 아들딸이라고 쓴다니 그게 참말일까.
그러나 키위 가정에서의 서열이 “아내>어린이>노약자>개>고양이>남편" 순으로 키위들의 세계에서는 남편의 발언권이 약한 모양이다.
키위의 나라에서 개를 기르려면 반드시 시청에 등록을 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예방 접종을 해 주어야 함은 물론이고, 먹던 밥을 주거나, 줄에 매어서 키우면 안 된다. 반드시 운동을 시켜 주어야 하며 이를 어기는 것을 알면 이웃에서 신고를 한다. 그러면 동물 학대 죄로 벌금을 내야 한다.
개를 이토록 위하는 것은 이 나라가 목축업을 주로 하는 나라로, 양몰이 개들의 역할이 커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뉴질랜드에 가서 이상했던 것은 새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 가까이서 함께 사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가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졸졸 따라다녔다.
갈매기도 비둘기 같이 분수대에서 물을 먹기도 하고, 도시 공원에서 나들이 나온 가족들 곁에서 주는 먹이를 먹고 있다. 바다에 가도 갈매기가 머리 위를 날며 빙빙 돌았다. 먹이를 달라는 것이다. 먹이를 던져 주면 머리를 스칠 정도로 날아와 받아먹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정부를 믿고 살듯이, 새들은 사람을 믿고 따르는 나라였다. 새벽이 되면 새들이 부리로 먹이를 달라고 창을 쪼아댄다. 그러면 먹이를 던져 주며 키위들은 출근을 하고 있었다.
밀포드 사운드 가는 길 우림 지대에서 우리는 뉴질랜드에서만 산사는 앵무새 케아(Kea)를 만났다. 사진 한 번 찍어 달라고 온 것인가. 먹을 것 좀 달라고 날라 온 것인가. 고산에서만 살고 호기심이 많은 케아가 마중 나온 것이다. 허나 이놈은 조심해야 한다, 저 휘어진 날카로운 부리로 가죽구두도 뚫는다는데, 고무를 좋아하여 익살스럽게도 자전거나 자동차의 윈도 부러쉬 같은 고무를 벗겨 낸다니 말이다.
양으로 태어나서, 사슴으로 자라서, 낙타가 되어 버린다는 신비의 동물에 알카파가 있다. 인도인이 소를 숭상하듯 마오리족이 숭상하는 동물이다.
뉴질랜드에는 약 20만 마리가 있는데 그 중 자연사 한 놈들의 가죽을 모아 시트를 만들어 우리 교민이 팔고 있었다.
소형은 150만원부터 대형은 약 250만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누런 자연 색이 고가인데도 같은 값으로 다른 것 을 열심히 권하는 여자 주인의 장사 속을 재미있게 읽다가 빈손으로 나왔다. 아끼자, 다음 여행을 위하여- 하면서.
동물의 천국인 이런 나라에서 잡아오면 현상금을 주는 동물도 있다. 포섬(fossum)과 토끼였다.
호주에서는 희귀 동물이라고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동물이, 뉴질랜드에서는 현상금이 붙은 동물이라니. 옛날에는 가장 천한 광대(廣大)라는 사람들이 오늘에는 스타(star)로 최고로 각광 받는 직업인이 된 것과 연관되어, 공간과 시대에 따라 가치 관념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뉴질랜드로 신혼여행 가지 마세요.
왜냐고요?
조선 시대만 해도 남성 공화국(男性共化國)이던 세상이, 이 시대에 들어 와서 여성 공화국(女性男性共化國)이 되어 가고 있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남존여비(男尊女卑)가 거(去)하고 여존남비(女尊男卑)가 내(來)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성의 천국 뉴질랜드에 가서, 구태여 여권(女權)의 구체적인 것을 신혼 초부터 배워 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랑들은 뉴질랜드에 신혼여행 가지 마세요. 신부는? 물론 꼭 가야 되는 대구요.
가정에서 가장은 개보다 서열이 낮아, 개보다 못한 남자가 사는 나라가 뉴질랜드입니다.
아이를 보거나 저녁 설거지를 하는 둥 집안 일 하러,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반드시 와야 하는 나라랍니다.
이 나라에서는 자식을 낳아 학교 보내면 아내의 몇째 자식이라고 쓴다니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부부 싸움을 하다가 말입니다. 만약에 여자 편에서 맞았다고 거짓으로 전화 1통만 걸어도, 확인 없이 그대로 구속되는 나라가 이 나라랍니다.
이혼할 때는요, 무조건 남자 재산의 70%가 여자에게 위자료로 지급해야 되기 때문에, 서구인보다 “I love you."를 더 자주, 더 많이 해야 살아남는 나라랍니다.
원래 이 나라는 음기(淫氣)가 강한 나라래요. 그래서 영연방인 이 나라 왕이 엘리자베스 여왕임은 물론, 수상도, 대법원장도 높으신 분 거의 여자랍니다.
세계에서도 가장 처음으로 참정권이 생기어 1893년에 여성의 투표권이 실시된 나라가 바로 이 나라라니 알 만하지 않습니까?
암놈이 낳은 알을 수놈이 품어 부화하는 새가 키위라서, 뉴질랜드 남편을 키위 허즈벤드(kiwi husband)라 한다고 제가 위에서 말했죠?
그러면 어느 나라로 신혼여행을 가면 좋겠냐구요? 이집트로 가세요, 이집트로. 거긴 남성의 천국이더라구요.
피라미드를 찾아가는 도중 룩소르에서 만난 마부(馬夫)가 나에게 이렇게 묻더라구요. "How many wife do you have?"


키아오라(Kiaora:안녕하세요)/ 마오리(Maori) 나라
뉴질랜드 북섬에 도착하니 우리를 맞는 가이드는 30대 중반의 한(韓)키위였다. 그가 나누어준 프린트에 있는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오클랜드에서 북섬 제1의 관광도시이며 유황 온천의 도시 로토루아(Rotorua)로 가고 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포카레 카레 아나)
잔잔해져 오면 (나와이오 로토루아)
오늘 그대 오시려나 (후치아루 포헤이네)
저 바다 건너서 ~ (마리오 안나에~)

뉴질랜드는 6∙25 때 우리나라를 도와 군을 파견해 준 고마운 나라다. 그 때 참전했던 뉴질랜드 병사들이 고향이 그리워 부르던 노래가 ( ) 속에 있는 노래다. 이것이 마오리 민요인 연가(戀歌)이고, 이를 편곡하여 우리의 귀에 익은 “비바람이 치던 바다~"로 우리는 불러왔던 것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뚝 떨어진 오스트리아에서도, 동쪽으로부터 1,600km 떨어져 있는 이 나라는 외족의 침입을 받지 않아서, 행복하게도 한 나라로 남아 있지만 우리가 다녀 보니까 두 나라 같았다.
남섬은 춥고 북섬은 따뜻하였다. 남섬에서는 주로 양과 사슴을 기르고, 북섬에서는 소를 키우고 사슴은 기르지 않았다.
남섬은 여름에도 눈 덮인 고산인 서던 알프스(Southen Alps)를 중심으로 한 평야가 적은 곳이었고, 북섬은 지금도 화산이 4개나 활동하는 곳으로 따뜻하여 한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푸른 초원의 고장이었다. 멀리서 보고 느끼는 곳이 남섬이라면, 북섬은 가까이서 피부로 느끼는 아기자기한 관광지였다.
북섬 지도를 보면 가운데에 펑크가 난 것처럼 뻥 뚫린 곳이 있다.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북섬은 물론 뉴질랜드에서도 최대의 호수라는 타우포 호(Lake Taupo)이다. 그 크기가 자그마치 싱가포르보다 넓어서 밤에는 바다처럼 파도가 친다고 한다.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은 가장 긴 강 와이카토(Waikato)강이 되어, 425km의 초록빛 물로 초록빛 대지를 적시며 흐르고 있다.
인구 6만6 천의 뉴질랜드 북섬의 제1관광지 로토루아로 달려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추억으로 살 나이에 이렇게 하루하루 추억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구나. 낯선 이국땅에서 낭만적인 꿈을 하나하나 이렇게 실천해 가고 있구나. 낯선 이국땅에서 마오리 연가 부르며, 아니, 우리나라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이국적, 동경적, 자연애를 낭만적이라 하지 않던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에히네에 호키마이라)
별빛도 아름답지만 (카마테 아후이 테아로아에)
사랑스런 그대 눈은 (에히네에 호키 마이라)
더욱 아름다워라 (카마테 아후이 테아로아에) ♬♪♩~

 

10일간만 우리로 살던 투어 사람들
“오늘 그대 오시려나 (후치아루 포헤이네)/ 저 바다 건너서 ~ (마리오 안나에~)"하며 연가(戀歌)를 노래 부르던 우리 일행 중에 두 여대생이 있었다. 같은 대학 친구 사이인데, 한 여대생은 같이 온 친구의 애인이 뉴질랜드의 유학생이기 때문에 친구를 따라 같이 와 준 모양이다. 그 여대생은 남다른 감흥을 가지고 이 노래 불렀으리라.
연인끼리 이국 땅 파란 하늘 밑 로토루아에서 만나는 그 신나는 광경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 수학여행 한번 가보지 못한 학창시절, 고학으로 보낸 대학 시절이 주마등 같이 떠올랐다. 유학을 떠날 수 있고, 그 애인을 찾아올 수 있는 것은 두 가정의 여유에서 비롯하였을 터인데 부모님들은 무엇 하는 분들일까?
손을 잡고 거닐 때도, 버스 뒤편에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을 때도, 공항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 앞에서 그들의 그림 같은 모습을 보면서도 못 본 척하였다. 사랑을 방해하면 지옥도 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여기 실어 축하해 주고도 싶기도 하지만, 어쩌면 미끄럽지도 않은 곳에서 미끄러져 평생을 평행선을 그리며 서로 그리워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생략하기로 했다. 젊은 세월을 살아본 아픈 추억 때문이었다.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대학생 남매와 함께 온 대학교수 가정, 아내 회갑 기념으로 여행 온 부부도 있었다.
상계동에 산다는 40대 강씨 부부 내외는 아이 둘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여름휴가를 앞당겨 온 모양인데 아내의 말이 참 예쁘다.
“이이 가요, 너무 회사 일로 고생이 많아서 위로 여행을 온 거예요."
저 집 남편은 퍽이나 행복한 남자로구나, 허나 여행에 목적이 왜 없었겠는가? 생일 기념이나 결혼 기념 여행이겠지-.

나를 향한 힘찬 걸음
비춰 보는 우리 거울
날마다 새로운
만남과 이별이지만
다시 또
기약할 수 없는
마음속에 고향 만들기
-해외여행

이번 여행에서의 소중한 만남이 있었다. 대구에서 정년퇴직 기념으로 온 김 사장 부부였다.
서구 여인보다 더 새하얀 얼굴을 가진 그의 부인은, 남자면 누구나 동경하는 고향 같은 마음의 미녀였고, 그의 남편 김 사장은 자기 것을 베풀고 싶어하는 후덕한 60대 초반 사람이었다.
나처럼 술을 좋아하여, 여행 중 술빚을 여러 번 졌는데, 인천 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포도주 2병을 전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기에, 사진과 글을 넣어 보냈더니 그의 고운 마음이 박힌 e-mail이 왔다.

"보내 주신 글과 사진 잘 받았습니다,
너무도 가슴 깊이 와 닫는 글이기에 저희 내외는 너무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호주 뉴질랜드 앨범 첫 장에 두기로 했습니다. 이번 여행길에 일만(一萬)선생님 내외분을 만나게 해주신 천주님께 감사드립니다.
- 해와(海臥) 김창환드림

우리 일행 중 남과 잘 어울리지 않고 내외와만 다니는 광주에서 산다는 60대 중반의, 어찌 보면 퉁명스럽고 무뚝뚝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누구일까? 어떤 직장에 근무하던 분일까? 궁금하다 생각하니 더욱 궁금해진다.

 


관광지 중에 관광지/ 로토루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뉴질랜드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뉴질랜드에서도 제일 가는 관광 도시를 말할 때 로토루아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다.
‘뉴질랜드에 오면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고 볼거리가 너무 많다고' 두고 가는 아쉬움을 이렇게 한탄한다지만, 그 중에서도 볼거리가 많은 곳이 로토루아로 뉴질랜드 관광지 중에 관광지였다.
이곳은 뉴질랜드 화산 지대인 북섬의 중심이 되는 곳에 있다.
로토루아 시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로토루아 호가 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긴 강 와이카토(waikato) 강이 여기를 통과한다. 350km를 흐르며 다시 여러 호수를 거쳐 바다로 가는 동안 푸른 초원과 농장 지대를 적셔 비옥한 땅을 만들어주는 800 리를 흐르는 기나긴 강이다.
이 로토루아 호수 동쪽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열 지대가 있다. 멀리서 보니 하얗게 뿜어 올라오는 안개 같은 하얀 물기둥이 여기저기 보이고 더 가까이 가보니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진흙 밭이 보인다. .
로토루아 서쪽에는 양들의 박물관인 애그로돔(Agrodome)이 있다. 여기에서는 온갖 종류의 양들을 만날 수 있고, 양털깎기 쇼와 목동 견(犬)의 양몰이 묘기를 볼 수도 있다. 짖지도 않고 눈빛 하나로 4~500마리를 몬다는 신비의 개였다. 이가 곧 strong-eye dog라는 양몰이 개다.
우유 짜기 체험을 직접 해볼 수도 있고, 어린양에게 젖을 주는 즐거운 경험도 해볼 수 있다.
무대에서 영어로 행하여지는 이 묘기는,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헤드폰을 쓰면 우리나라 말로 들을 수가 있다. 물론 들어가고 나가는 도중에 양과 관련된 각종 기념품들의 쇼핑도 가능하다.
그 근처에 ‘패러다이스 밸리'라는 자연보호 지역이 있다.
여기에는 캥거루 같은 주머니쥐가 사육되고 있고, 멸종 직전이라는 히말라야 타리(산양의 일종)가 보호되고 있다.
맑은 물에는 팔뚝보다 큰 무지개 송어가 떼가 노닐다가 사람을 보면 모여든다. 먹이를 주기 때문이다. 그 한편에 있는 50년 묵은 민물 뱀장어는 팔뚝보다 훨씬 더 크다.
장어를 한자로 만(鰻)이라 쓴다. 그걸 호사가는 이렇게 말하더라.
이 고기[魚] 먹으면 하루[日]에 네[四] 번씩이나 또[又] 할 수 있다나,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하--.
왜 송어(松魚)라고 하는지는 생각해 보셨는가.
송어도 연어와 같이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온다. 상류의 소나무 뿌리가 있는 근처의 물이 맑고 자갈이 깔려 있는 여울에서, 수컷이 웅덩이를 파고 암컷이 산란하면 그 위에 수놈이 방정을 한다. 그러면 암컷이 자갈로 알을 덮고 죽고 만다. 이것이 송어의 일생이다.
송어 고기는 소나무 뿌리의 붉은 색깔을 닮았다 해서 소나무 송(松) 고기 어(魚), 송어(松魚)라 고 하는 것이다.
이때 알에서 깨어난 것이 바다로 가면 송어(松魚)요, 강에 남아서 자라는 송어를 산천어(山川魚)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천어가 작은 것은 물의 깊이가 낮아 큰놈은 바다로 가기 때문이다.
로루아 호수의 남쪽에는 로토루아 시내가 형성되어 있고, 시내 중심에서 남쪽으로 3km쯤 가면 와카레와레와(Whakarewarewa)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열 지대가 있다.
지구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로만 듣던 간헐천(間歇川)과 온천과 마오리 문화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간헐천(Geyser)이란 화산 지대에서 뜨거운 물이나 수증기가 보통의 지하수와 혼합할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물과 가스가 뿜어 나오다가 멎었다가 하기 때문에 간헐천이라 하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을 후투(Pohutu)라고 한다.
후투는 대개 1시간에 1번꼴로 분출한다. 그 높이는 20~30m에 이르기도 한다. 분출하는 시간은 보통 5-10분 간격인데, 이제까지의 최고 기록은 무려 15시간이나 된다. 이것이 화산 지대가 아니어서 온도가 뜨겁지 않고 약하면 온천수가 되는 것이다.
뜨거운 진흙이 둥근 원을 그리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팥죽 끓듯이 가운데서 방울이 툭- 툭 튀어 오르는 것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개구리가 뛰는 모양 같다하여 프로구 풀(Frog Pool)이라고 한다.
피부 미용에 좋다는 머드 팩(mud pack) 원료로 사용된다는 끓어오르는 진흙 풀(Mud Pool)이 바로 저것이었구나.
처음 보는 간헐천 앞에서, 사방에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바라보며, 이렇게 살아 있는 지구를 보며 흥분했는가. 한눈을 팔던 나는 그만 꽝! 진흙 바탕에 카메라를 감싸고 넘어지고 말았다.
아, 내 디지털 카메라! 아 내 캠코더! 궁둥이가 얼얼- 하였다. 카레라는 무사하였다. 다행이었다. 그렇지, 그까짓 상처야 옥도정기로 나을 텐데, 그까짓 옷이야 바꿔 입으면 되지-.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 하였다.

원주민 마오리(maori)의고향/ 로토루아
지금껏 남섬에서 보지 못하던 원주민 마오리(maori)족이, 북섬에 오니 자주 눈에 띠었다.
키와 눈과 코가 크고, 큰 입으로 웃는 얼굴이 선량한 인상을 주는 황인종이었다.
이들이 눈 덮인 서던 알프스의 남섬을 외면하고. 일년 내내 눈이 오지 않는 북섬에만 살고 있는 것이나, 그 중에서도 지열 지대로 따뜻한 로토루아에 거의 다 몰려 사는 것을 보아도, 그들 조상이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열대지방에서 왔다는 것을 쉽게 알게 해 준다.
이 마오리족은 전 국민의 14%나 된다는데, 이 로토루아에 5천명이나 살면서 그들의 옛 문화를 보존하면서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남섬과 달리 낯선 지명이 많은 것은 대개 마오리어로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어 표기도 발음 그대로인 것을 보면, 친근감마저 돌았지만, 가이드가 이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말을 듣고 보면, 마오리들이 미국의 흑인처럼 사회의 저층 구조를 이룬 이가 많아서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다.
와카레와레와(Whakarewarewa)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가이드로부터 그들의 특이한 인사법을 배웠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남녀 구분 없이 서로 오른 손을 잡는다. 웃는 얼굴로 마주 보며, 코를 살짝 맞대고 비비면서 키아오라(Kiaora안녕하십니까)라고 한다. 두 번 비비는 것은 인사요, 세 번 비비는 것은 I love you.란 뜻이 된다. 비비는 것이 네 번이면 존경한다는 뜻이라 한다.
도착하여 마중 나온 마오리 키위는 여자였지만 한 번도 비비기도 싫었다. 생각하면 황홀한 이국 여자와의 코를 대는 설레는 것이었지만 시커먼 뚱보 50대 아줌마였기 때문이다.
마오리의 전통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아주 특이하다. 지열이 들끓는 땅에 구덩이를 판다. 그 속에 고기, 야채, 조개 등을 젖은 가재에 싸서 넣고, 그 위에 굵은 장작이나 돌과 흙으로 덮어두기만 하면 그 지열에 의하여 음식이 익게 된다. 이를 항이(hongi)라고 한다. 찜질 방에서 계란을 익혀 먹는 식이었다.
저녁 식사는 숙소인 호텔에서 민속춤인 하카 댄스(Haka Dance)를 감상하며 이 항이(hongi)식을 먹었다.
하카 댄스(Haka Dance)는 호텔에서 행하여지는 마오리 민속춤이다.
원주민 민속춤에는 세 가지가 있다.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포이 댄스(Poi Dance), 막대기를 이용하여 공연을 하는 스틱댄스(Stick Dance)도 있지만 대표적인 품은 역시 하카 댄스(Haka Dance)이다.
춤 중에는 팬터마임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군대에서 암호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듯 그런 의식이다.
낯선 이를 만나면 먼저 이 나라 어디에나 있는 고사리 잎이나 칼집을, 눈을 부릅뜬 위협적인 자세로 상대방 발밑에 놓는다.
이를 상대가 집어 들면 적의가 없다는 뜻이 되므로, 여성들의 환영의 노래에 맞추어 남자 마오리들은 위통을 벗은 전통적인 복장인 아래에 풀로 만든 특유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환영하는 춤이 시작되지만, 이를 밟으면 스틱이나 낫과 같이 생긴 무기로, 무섭게도 길게 혀를 내밀어 적을 위협하면서, 과격할 정도의 동작으로 맞서서 전투를 하는 것이다. 이를 하카 댄스(Haka Dance)라 한다.
왜 혀를 내밀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마오리족들이 적에게 까불면 잡아먹겠다는 표시로 볼 수 있다. 적을 잡아먹음으로써 승리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주술적인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1962년 네덜란드 탐험가 테스만의 부하가 마오리에게 잡혀 먹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춤은 1시간가량 계속되는데, 위의 세 가지 춤이 차례로 추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런 호전적인 태도로 인하여 백인들에게서 1840년 와이탕기 조약을 얻어내어, 오늘날 호주 원주민 아보리지널(Aboriginal)족들과 달리 영국계 이 나라 국민들과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고유문화를 이룩하며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손재주가 있어 조각을 잘하며,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지만, 왜 그런가. 그들의 수명은 50세로 단명 한단다. 로토루아의 유황 성분 때문일까?
이러한 마오리 문화는 뉴질랜드 고유의 문화로 인정되어, 거국적으로 보존, 발전되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을 신비의 나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 마오리 여인과 내 아내가 카메라 앞에 함께 서서 내 사진 모델이 되어 주었다.

오른 손 잡고 두 번
코 부벼 인사하고
마오리 여인 하나
코리아 여인과 함께 섰습니다.
십자성
아래 키위의 아내와
북두성 아래 일만(一萬)의 처입니다

 


아, 유황 온천에 빠뜨린 디카여
오늘 오후에 가기로 되어 있는 온천은 유료지만, 유황 온천 지대를 둘러보는 중에 무료로 발[足] 온천 하는 곳이 있다.
노천에 간단하게 지붕을 하고, 풀장 모양으로 직사각형으로 만든 난간에 앉아 유황 온천에 발을 담그는 것이다.
아내 옆에 자리를 잡다 보니, 건너편에 함께 다니면서도 인사 한번도 제대로 나눈 적이 없는 붉은 조끼 입은 그 무뚝뚝한 60대 부부가 있다.
내가 누구인가. 글쟁이가 아닌가. 글은 '?'로 생각하고 '!'로 느끼게 될 때에 써지는 것이 아닌가. 먼 곳을 알려면 이웃부터 먼저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면서 건너가서 우리는 사이좋게 앉아 유황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다.
자기보다 3살이 내가 위인 것을 알자 그는 갑자기 겸손해 진다. 두 대의 카메라에다가 망원경까지 주렁주렁 메고 다니어서, 자기보다 손아래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의 아내가 거든다.
"이이는요, 경찰에서 정년 해서 좀 딱딱해 보여요."
아! 그렇구나 하면서 허리를 숙이고 유황 온천물에 발을 깊숙이 담그려는 순간이었다. 아, 아-, 그만 내가 메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가 텀벙 물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케이스가 열려 있던 것이다. 혹시 나를 염려해서 카메라 케이스에 카메라를 줄로 연결하여 가지고 다니던 것을, 조금 전에 가이드의 사진을 찍어 주겠다는 고마운 말에 매고 다니던 것을 끌렀다가 무심결에 그냥 넣은 것이다. 뚜껑을 닫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갑자기 말을 끊고 조용히 당황해 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아, 아아…. 나는 뉴질랜드를 한 번 더 오고도 남을 돈을 물에 빠뜨리고 만 것이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말해 주는 소리에 따라 나는 재빨리 배터리를 뽑았으나 나는 이내 깊은 허무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넘어진 것이 어떤 불길한 징조였었구나.
파란 하늘에 구름이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직업이 이렇게 사람 성격 형성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경찰로 제대하였다는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위로 한 마디도 없었다. 아, 아….
나와 마지막 인연을 다한 디지털 카메라를 아픈 마음으로 들고 숙소에 돌아와 드라이로 카메라 몸체가 뜨거워 질 정도로 말리고 또 말리었다. 마음 아프게도 화인다 속에, 렌즈 속에 물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다.
1년 전 막내를 혼인시켜 살림을 내 놓고 아내와 단 둘이 살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무리를 해서 산 카메라였다. 별매로 산 그 부속품 값만도 자그마치 50만원이 훨씬 넘는다. 그래서 나는 똑같은 카메라를 다시 사야만 된다. 일만(一萬: 나의 호)하면 카메라를 연상시켜 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위안은 있었다. 산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반도체의 세상이라, 그 값이 130만원에서 80만원으로 내렸다. 그러나 다음 여행지로 작정하고 있는 남미(南美) 나 인도(印度) 여행은 이 나이에 그만 더 연기를 해야 된다니-.
그렇구나, 내가 잃어버린 것은 절약하고 절약해야 하는 1년 이상을 잃어버린 것이로구나.
여독도 잊고 밤늦도록 드라이로 찜질을 하고 조심조심 배터리를 넣고 촬영 모드로 바꾸어 보았더니 멀쩡하게 제 기능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아, 아 하나님! 잊고 살던 하나님이 생각났다.
그랬어, 함께 간 강(姜) 이사가 배터리를 빼라고 한 것이 제일 잘한 일이고, 물에 빠져서 숙소에 돌아갈 때까지 시간이 짧았던 것, 충분히 드라이로 말린 것 등등, 이 모든 것이 카메라를 원상태로 다시 내게 돌려주게 한 거야.
‘여러분, 불행히 핸드폰을 물에 떨어뜨렸거든 무엇보다 먼저 배터리를 빼시라.' 이제 내 이야기 거리가 하나 더 늘었구나 하며, 나는 이 순간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였다.
하나님께서 내 글에 재미를 주기 위하여 추억을 만들어 주신 거나 아닌지-.



“아, 대~한 민국!”/ 월드컵 한(韓)키위들의 응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폴리네시안' 온천에서 유황온천을 한다. 수영복을 입고 세계에서 달려온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 아름답다는 백인 여인의 몸매를 음흉한 마음으로 황송하게도 훔쳐보면서.
지하에서 분출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함유량이 높다는 라듐과 미네랄의 광천수에서-.
무좀 등 피부병에 좋고, 근육통 관절염에 특효가 있다 한다. 금반지를 끼고 들어가면 깨끗이 닦여진다. 은제품은 까맣게 변질되고, 머리를 염색한 노인은 백발로 되돌아가니 주의해야 한다. 유황 성분이 높기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때를 밀어서는 안 된다. 때를 미는 것은 동양인들의 문화이니, 여기서는 담그고만 있어야 한다.
탕에서 나와서는 샤워로 깨끗이 씻어도 안 된다. 그냥 말려야 몸에 좋다는 라듐과 유황 성분 등을 오래 오래 몸에 간직할 수 있다니 말이다.
우리는 먼저 온천 풀(pool)에 들어갔다. 다음은 미네랄 풀과 라듐 풀로 나누어진 각각 온도가 다른 8개의 야외 탕으로 옮겨간다.
하늘은 찌푸린 채 간간이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들 조국의 월드컵 열기도 지금 이 온천물만큼이나 뜨거울 것이다.
세계인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소리쳐 “대~한 민국!"을 외쳐 보았다.
“짜짜짜 짝짝" 함께 한 일행의 박수가 우리를 서로 즐겁게 하여 주고 있었다.
이국 하늘 밑에서, 그것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외침이었다.
그러나 왜일까. 외국인들은 별 반응이 없다. 여행 중이라 TV를 못 본 것인가. 그렇다면 뉴질랜드 인들은?
그 게 아니었다. 이 나라 국기(國技)가 럭비로 축구에는 별 관심이 없는 국민이 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TV도 정규 방송 아닌 케이블 TV 방송으로만 중계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쭉 럭비 경기를 보고자란 백성들이라서 럭비에는 지나칠 정도로 광적이다.
이 나라 키위들은 술, 여자, 럭비가 아니면 술자리에서 할 얘기가 없다 하지 않던가.
가이드 말을 들으니 한 키위들은 월드컵 한국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한 장소에 모여 우리들의 16강, 8강, 4강 진출 할 때마다 부둥켜안고, 울면서 울면서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고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고….

 

어제는 욕보셨죠/ 래드 우드(Red wood) 삼림욕장
“어제는 욕해 보셨죠? 목욕해 보셨냐구요. 지금 여러분은 뉴질랜드에서 시원한 삼림욕(森林浴) 하러 래드 우드(Red wood) 삼림욕장으로 가시고 계십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한솔 제지 공장이 경영하고 있는 임업 사업소가 있습니다."
가이드의 말이 끝나자 멈추는 곳에서 내리니, 이곳이 바로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곳 래드 우드(Red wood) 삼림욕장이다.
2차 대전에 희생된 뉴질랜드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미국이 준 캘리포니아산 래드 우드를 육종한 것이 이렇게 크게 자라서 지금의 래드 우드(Red wood) 수목원이 되었다.
이곳 날씨와 비옥한 토질로 한국보다 4배나 더 빨리 자라서 로토루아가 자랑하는 세계에서도 이름난 삼림욕장이 된 것이다.
입구에 들어가니 산책 코스가 15분, 30분, 1시간에서부터 8시간 코스까지 다양하다.
그 코스가 여러 가지 색깔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는 30분 코스니까 표지판이 나오면 붉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비가 오지만 우산을 펼 필요가 없다. 하늘을 가린 숲의 수목들이 우산처럼 비를 막아 주기 때문이다.
숲에 들어서면 왜 이렇게 마음이 맑아지고, 상쾌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일까? 숲은 낯선 곳도 언제나 와 본 것 같은 고향 같은 느낌을 준다. 콧노래가 절로 난다. 이것이 숲의 힘인 모양이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 준 대요.♩♪♬"
그렇다. 숲 속에 들어오니 시원한 바람이 있고, ‘톡’ 쏘는 듯한 수목 특유의 고마운 향기가 있다.
옛날에 가장 무서운 병은 폐결핵이었다. 그 결핵 환자들이 즐겨 찾던 곳이 ‘마산 요양원'이었다. 당시에는 유일한 치료법이 숲 속에서 요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왜 숲이어야 하는가?
이를 분명히 알고 삼림욕을 삼림욕답게 즐기기 위하여 먼저 파이톤사이드(phytoncide)란 말부터 이해하자.
영어로 ‘식물'을 파이톤(phyton)이라 하고, ‘죽인다'를 사이드(ride)라 한다.
식물은 그냥 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기 위하여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자기들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동물처럼 도망갈 수는 없으므로, 이를 죽이기 위하여 분비하는 물질이 있다. 이것이 바로 파이톤사이드(phytoncide)이다.
자고로 우리가 피로나 감기 등 웬만한 병이 들 때, 숲 속에 머물러 있기만 하여도 자연이 치료된다고 하였는데, ‘자연이'가 아니라 이 파이톤사이드(phytoncide) 때문인 것이다.
숲 속에 들어가서 느끼는 삼림의 시원한 향기가 바로 수목이 성장에 방해가 되는 미생물을 죽이려는 이 휘발성 물질이라는 파이톤사이드(phytoncide)인 것이다.
파이톤사이드는 나무에 불필요한 미생물을 죽이지만, 사람 몸에는 부작용 없이 흡수되어, 병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2차 감염을 막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노벨상을 받은 미 세균학자 왁스만(Waksman) 교수의 이론이다.
숲 속에 들어가면 ‘톡’ 쏘는 향기도 있다. 이것은 나무를 활성화시켜 준다는 테르펜(terpene) 때문이다. 테르펜(terpene)은 유익한 곤충을 유인하거나, 무익한 곤충을 억제하고, 자기와 다른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는 등의 복합적인 작용을 한다.
이 테르펜도 인체에 흡수되면, 우리의 몸을 활성화시키고 안정시켜 주며 살균 살충 작용까지 해준다는 것이다.
태초에 나무가 있었고 그 속에 살도록 사람을 신이 창조하여 주신 것이다. 나무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인간이 그 숲을 파괴하니까 현대에 무수한 질병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알면 보이고, 보면 느끼고, 느끼면 행하자.
그래서 노래가 나는구나, 콧노래가, 그런데 벌써 가사를 잊었다니-.
“강가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소(牛) 공무원/ 오크 랜드(Auckland)
오클랜드는 뉴질랜드의 전체 인구의 1/4인 120만이 사는 이 나라 제1의 도시다. 여기에 우리 한(韓)키위도 80%에 해당하는 25,000여명이 살고 있다.
이 나라 최대의 주요 관문. 교통의 중심지. 폴리네시아 문화의 중심. 이 나라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오클랜드이다.
남섬과 마주 보이는 웰링턴(Wellington)으로 서울이 옮겨지기 전까지 25년간 영국 식민지 시절 수도였던 곳이다. 그때 초대 총독 오크(Auck)경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오클랜드(Auckland) 라 하였다.
개척 초기에는 북섬이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북쪽의 와이터마타, 남쪽의 마누카우의 두 항구가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도시 서쪽에 태즈만 해(Tasman Sea)와 동쪽에 남태평양을 바라보면서, 로마와 같이 일곱 개의 언덕을 따라, 시내가 형성된 도시라서 오클랜드 인들은 바다와 함께 산다.
오클랜드를 ‘요트의 도시'라고도 하는 것은 이 나라 사람 네 명에 요트 한 척 꼴이고, 집보다 요트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와이터마 항구에는 그림 같이 떠다니는 요트와 정박한 높은 돛대의 수많은 요트들로 하여 시드니보다 더 아름다운 미항(美港)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 오클랜드 항구와 도시를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는, 여기서는 제일 높다는 194m의 에덴동산(Mt. Eden)을 가고 있다.
가는 길 좌우에는 한 겨울인데도 파란 잔디가 무성하였다. 이 나라 잔디는 용도가 우리네와는 사뭇 달랐다.
시민이 들어가 휴식하며 즐기기 위하여 가꾼다는 것이다. 누가 가꿀까?
인건비가 비싼 나라라서 잔디 깎는 역할은 소[牛]공무원이 한다. 월급 한 푼 주지 않아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고, 24시간을 현지에서 근무하며 잔디를 깎아 주는 갸륵한 공무원이다. 그래서 이 소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언덕 오르는 길가 표지판에 놀라게 하지 않도록 경적을 울리지 말라는 간판이 곳곳에 보인다.
성산포보다는 훨씬 작은 움푹 팬 분화구가 눈 아래로 보이는 에덴동산 정상에 오르니 항상 그러한가,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여기 말고, 보다 더 유명한 언덕에 콘월 파크(Cornwall Park)가 있다. 정상에 ‘한 소나무 언덕'(One Tree Hill, 183m)이란 이름처럼 하나의 커다란 소나무가 우뚝 서 있고, 거기에 전설의 마오리 추장의 동상이 있다 한다.
멀리 이 남반부에서 제일 높다는 328m의 스카이 타워(Sky Tower)가 보이고, 길이 1.025m의 하버 부리지도 보인다. 원래 2차선이라 교통 체중이 극심한데 나라 예산의 70%를 사회복지에 써야 하는 나라라 확장할 길이 없었다.
이때 나서서 이 다리를 8차선으로 완공하여 준 나라가 고마운(?) 일본이다. 대신 중고차 수출권을 따내서, 이 나라에 굴러다니는 모든 차는 90%가 중고차였고, 그 모든 것이 메이드 인 자판(Made in Japan)이었다. 우리나라 중고차는 운전대가 좌측이라서 여기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차는 본다이 비치를 해변을 끼고 이 나라 손꼽히는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를 지나가고 있다. 칙칙하게 비가 계속 내리더니 오클랜드에서도 손꼽히는 부유층들이 산다는 우리나라로 치면 8학군이라는 강남에 해당하는 이 동네를 지날 무렵에는 우박으로 바뀌어 차창을 두들기고 있다. 있으라고 이슬비가 온다는데 가라고 가랑비가 오는 모양이다.
우리네와 달리 여름은 건기(乾期)이고, 겨울이 우기(雨期)라지만 줄기차게 며칠씩 내리는 비가 아니라 호랑이가 장가간다는 오락가락 하는 비였다. 이 나라에는 태풍이 전혀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우리들의 뉴질랜드의 마지막 목적지 미션베이(Mission Bay)에 이르니 비가 갠다. 오클랜드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해변 가에는 우리들을 향하여 갈매기가 각종 새들과 함께 모여든다. 여의도 고수부지의 비둘기 같다.

 

Ⅻ.호주 시드니 기행
나도 호주에 가고 있다
학창시절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음악의 도시 '빈'이 수도인 오스트리아(Austria)를 자주 혼동하였다. 그 중 한 나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를 향하여 장장 10시간을 인도양을 넘어 우리는 가고 있다.
지금은 제목도 지은이도 잊어버린 젊어서 암송하던 영시(英詩)가 입가에 맴돈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넘어서 바람은 간다.
들을 넘어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

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n)라 하였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시아 대륙의 남쪽에 미지의 땅이 있다고 믿어 왔다. 그들은 이를 Terra Australia Incognita라 하였다. 글자 순서대로 해석하면 '땅, 남방, 알려지지 않은'이니 곧 미지의 남방 땅이 되니까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n)이란 말은 '남방'(南方)이란 뜻에서 유래된 말일 것이다.
‘시드니와 뉴질랜드'를 투어 하기로 여행사와 계약을 끝내니, 성큼 마음속에 남쪽나라 오스트레일리아가 다가온다. 서점에 들러서, 여행 서적을 뒤적이다 보니 호주 여행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 몇 가지를 요약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도 호주와 같은 문화권이라 같이 보아야 될 것 같다.

* 차들이 좌측통행하는 나라이니, 길을 건너거나 버스를 탈 때 조심할 것
* 차내에서는 서 있거나,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지 말 것.
* 차내에서는 흡연 음주는 물론 생수를 제외한 모든 음식물을 먹지 말 것.
* 횡단 도로에서는 보행자 절대 안전 100% 우선이므로, 현지인은 달려오는 차를 무시하고 그냥 건너간다는 것을 염두에 둘 것.
* 횡단보도에 서 있으면 모든 차가 멈추니, 빨리 빨리 건너 갈 것.
* 만약 사고 등으로 경찰에 적발되었을 때는 운전대에 손을 얹고 기다릴 것. 내 리거나 주머니를 뒤지는 시늉을 하면 사격 당할 수도 있다.
* 경찰을 부르거나 어떤 사고가 났을 경우, 신고 전화번호는 '112'가 아니라 ‘000'이다.
* 함께 가다가 건물의 문을 연 경우 연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사회가 아니다. 뒷사람이 먼저 들어가도록 기다리며 양보할 것
* 식당에서 식사 중에는 모자를 벗어야 하며, 식사 후에는 가급적 함께 일어나도 록 할 것.
* 길가다 행인과 어깨를 부딪치지 말 것.
* 어린이가 예쁘다고 어루만지거나 머리를 쓰다듬지 말 것.
* 전기는 240볼트고 플러그가 셋인데 11이 아니고 八자 형이니 준비해 갈 것
* 오존층의 파괴로 자외선이 너무나 강렬하니, 장시간 여행 시는 반드시 모자와 선글라스를 쓸 것이며, 여성인 경우는 자외선 차단 크림을 바를 것 등등.


대륙의 막내 호주, 가장 나중 발견한 신천지
한 대륙 한 국가, 축복 받은 행운의 나라
마지막
신비의 낙원
부자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여.

이 나라는 한때 백호주의(White Australia) 정책이라 하며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던 나라다. 최근에도 야당 당수의 선거 공약 중에 하나가, ‘당선되면 호주 인들의 행복을 위해 아시아 이민자들을 몰아내거나 혼내 주겠다.'는 것을 보면 호주 인의 저변에는 아직도 백호주의(白濠主義)가 살아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 교민 3만여 명이 사는 나라이니, 교민을 위해서라도 그들에게는 백안시 될 수 있는 혐오스런 행동을 삼가야겠다.
90% 영국계 백인들은 원주민 마오리족들과 함께 사는 뉴질랜드와는 달리, 4만년 이상을 살아온 원주민 에버리진을 유색인종이라 하여 살육하던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심지어는 희귀 동물의 뼈와 함께 에버리진의 뼈를 박물관에 전시해 놓을 정도였다.
그래서 호주 백인들은 과거를 참회한다는 뜻에서 매년 5월 26일을 '소리 데이(Sorry Day)'라는 날을 정하여 반성하고 있다.


호주의 희기 동물들
드디어 우리는 여름나라 북반부 나라 코리아에서, 겨울나라 남반부 시드니 킹스포드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인구 4,800만이 사는 대~한 민국 보다 33배나 크다는 이 대륙에서 겨우 1,880 만 명이 살고 있는 나라에 온 것이다.
면적이 유럽의 약 1.5배. 미국과 크기가 비슷한 나라
태초의 자연이 그대로 숨쉰다는 신비의 나라.
전 세계 양털의 1/3을 생산하는 나라.
나라가 개인의 생로병사를 책임져 주는 나라.
출산 수당, 육아 수당, 학생 수당, 실업자, 장애자, 미망인 또는 홀아비 등 외로운 사람에게 연금을 주고, 질병을 무료로 해까지 주는 지상의 천국.
캥거루가, 잠꾸러기 코알라가 인간과 함께 마음 놓고 뛰놀고 잠자는 나라에 온 것이다.
그 중 이 나라 인구의 1/4이나 되는 400만 인구가 사는 남반부 최대의 도시가 바로 시드니였다. 한창 겨울이라는 시드니 공항을 나서니 겨울답지 않게 산하가 거의 초원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추워진다는 이 나라의 가장 남쪽 시드니가 이러하니-.
북은 열대 지방이고, 이곳은 온대로 사계절이 함께 있는 나라이며, 시드니는 하루에 사계절있다는 나라였다. 그래서 낮은 봄가을 같고, 밤은 겨울 같은 날씨란다.
불루마운틴을 가는 길에 야생 동물원(Australian Wildlife Park)에 들렀다. 크기만으로는 서울대공원과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동물원이었지만 여기 아니고는 볼 수 없는 희귀 동물이 사는 곳이다. 이 동물원의 특징은 울안으로 들어가 동물을 만져 볼 수도 있고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캥거루는 마음이 착하여 우리가 울안에 들어가 쓰다듬어 주며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생각보다 작아서 진돗개 만한 이 캥거루가 크기 약 2.5㎝, 몸무게 약 1g의 새끼를 낳으면 새끼는 앞발만을 이용하여 육아낭(育兒囊) 속에 기어 올라가서 젖꼭지를 물고자란다.
호주인 들은 '조이'라 불리는 육아낭 속의 이 새끼 캥거루를 보는 날이면 재수 좋은 날이라고 복권을 살 정도로 보기가 힘들다 한다.
처음 호주에 상륙한 영국인들이 육아낭에 새끼를 넣고 두발로 뛰어 다니는 이 이상한 동물을 보고 원주민 애버리진(Aborigine) 에게 물어 보았다 원주민 애버리지니(Aborigine) 대답하였다. "캥거루(Kangaroo)." 원주민 말로는 I don't know였다. 캥거루의 수명은 15년 내외인데 독수리․비단뱀․딩고․여우 등이 천적(天敵)이지만, 그보다 몇 백 배 무서운 천적(天敵)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었다.
잡아먹기도 하고 그 가죽은 벗겨 방석을 만들어 팔고 있는데 꼬리에 앉아 고스톱을 치면 허벌나게 잘된다고 특히 한국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
이 동물원에서 최고 스타는 뭐니 뭐니 해도 물을 전연 마시지 않고 산다는 코알라(Koala)였다.
나무 위에서만 사는 이 코알라는 유칼리나무 잎만 먹고사는데 유칼리나무 잎에는 알코올 성분이 있어서인가. 먹는 시간을 빼고 20 시간 이상을 나무에 매달려 잠만 자는 잠꾸러기였다. 캥거루처럼 배에 육아낭(育兒囊)이 있어 새끼를 주머니 속에 넣고 1개월 동안 기르다가, 자라면 1년 동안 등에 업어서 키운다.
원주민 애버리진 말로는 크보르(ku-bor-oo)라 하는데, 이는 '물을 마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먹는 것은 호주 산림의 90%나 차지하고 있다는 유카리나 잎이었다.
다음으로 크다는 에뮤는 약 1.8m 크기로 키위(Kiwi) 새와 같이 부성애가 강하다. 암놈이 알을 나면 2달 정도 수컷이 알을 품는 날지 못하는 새이다. 맹수가 없는 나라여서 날개는 퇴화하였지만, 시속 40~50km를 질주할 수가 있다. 호주 대륙에서 가장 무서운 맹수라는 딩고(dingo)는 하얀 진돗개와 다름없는데 늑대보다 약간 작은 야생 들개였다. 원주민이 가지고 온 개가 야성화 한 것이다.
웜뱃(Wombat)은 곰과 쥐의 특징을 갖고 있어서, 고양이 잡아먹는 쥐로 알려져 있다.
호주 대륙의 모든 동물을 두루 살피려면 세계적인 타롱가 동물원(Talong Zoo)에 가자. 거기엔 369종 3,000여두나 만나 볼 수 있다 한가. 타롱가 동물원은 시드니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20분이면 가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호주의 그랜드케년/ 불루마운틴

봉우리가 없는 산이 있다는 소리 들었는가
유카리 나뭇잎이 뿜어내는 푸른 지평선
호주의
그랜드 캐년
불루마운틴이래요.

해발 1,000m 전후의 높은 산이 줄줄이 이어진 불루산맥이 수평선 같은 지평선을 이루고 남북으로 뻗어 있는데, 그 색깔이 바다보다 더 푸른빛을 띠고 계곡 너머 저 멀리 보이는 곳이 불루마운틴(Blue Mt.)이었다.
움푹움푹 패인 깊은 계곡은 하류 지역에서 깊은 계곡을 이루어 포트 잭슨만(灣)과 보터니 만(灣) 등을 이루고 있다.
미국의 그랜드캐년의 대안 협곡에서 보이는 푸른빛이 감도는데, 웅장하기는 비슷하나, 그 장관은 그랜드캐년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랜드케년(Grand Canyon)은 이름 그대로 협곡의 거창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말함이고, 불루마운틴은 이름 그대로 마운틴 즉 산의 유칼리나무 잎에서 증발하는 수액이 햇빛과 조화되어 푸른 안개 같은 장엄한 빛의 세계였다.
저런 환상적인 푸른 빛깔이 일년에 100만 명이 훨씬 넘는 관광객을 이곳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를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에코우 포인트(Echo Point)다. 여기서 동틀 녘 해 뜨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느끼게 한다.
그 바로 왼쪽에 세 붉은 바위 봉우리가 세 자매 봉(The Three Sisters)인데, 가이드의 입을 빌어 이렇게 그 구슬픈 전설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들 세 자매는요, 아버지와 이 에코우 포인트에서 단란하게 살았답니다.
하루는 식량을 구하러 깊은 산에 들어갔더니 굴이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갔다가 그만 실수로 잠자는 무서운 마왕(魔王)의 잠을 깨우고 말았어요.
마왕은 우리 세 자매를 보자마자 아버지께 우리를 달라고 협박하는 거예요. 당황한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요술 지팡이로 마왕 모르게 세 자매를 바위로 만들어 놓고, 아버지는 새가 되어 허둥지둥 날아가다가, 그만 실수로 요술 지팡이를 깊은 계곡에 빠뜨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우리 세 자매는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바위로 서 있게 되었답니다.

보통 날이면 항상 원주민 애버리진(Aborigine)들이 이 나와서, 그들만의 고유한 악기를 연주하며, 관광객들에게 이국적인 풍취를 더하여 준다던데, 웬 일일까 우리가 갈 때는 서운하게도 없어 원주민 애버리진의 참모습을 대할 수가 없었다.
불루마운틴을 더 자세히 보려면 부시 워킹(Bush Walking: 숲 속 산책)을 하는 것이 좋다. 거기에는 적게는 1시간 30분에서 5~6시간 등 여러 가지 코스가 있다.
우리는 세 자매 봉을 더 가까이서 불루마운틴과 함께 보기 위해서 마련된 세계 제일의 급경사 궤도 열차(시닉 Railway)를 탔다. 옛날 광부들을 실어 나르던 기차였다.
52도가 훨씬 넘는 듯한 경사 길을 거꾸로 쳐 박히듯이 단숨에 내려온다. 열차는 지붕이 있을 뿐 안전장치라고는 양옆에 늘어져 있는 쇠기둥과 밧줄뿐으로 허름하기 짝이 없었지만 우리는 안심하였다.
가이드의 말대로 위험을 책임지고 보상해 줄 수 있는 나라에 우리가 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한 부시 워킹 코스(Bush Walking)는 세 자매 봉 근처의 기암괴석의 절벽을 뒤로하고 나무다리로 이어진 원시림을 보는 워킹이다.
동으로 만든 마차와 석탄 색깔의 마부가 있고, 석탄 박물관에서는 TV를 통하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주고 있었다.
매년 껍질을 벗기면서 자란다는 거목, 나무와 나무가 엉키어 하늘 높이 자라는 부부 나무, 세 나무가 엉킨 첩(妾)나무 등을 지나 삼림욕은 계속되었다.
고사리 하나하나가 야자수보다 더 굵고 더 높았다. 청명한 날인데도 전혀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너무 무성히 자란 원시림 가운데를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올라가는 궤도차는 같은 경사 길이건만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앉고 뒤로 않는 것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이렇게 다른 것인가. 우리가 살아온 길도 이러하다 하였다.
옛날 영국은 죄수들을 미국으로 추방하였다. 죄수에게 드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1776년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미국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새 유형지(流刑地)로 선택하였다.
1788년 1월 11척의 영국 선단(船團)이 7백17명의 살인범, 정치범들과 같은 죄수가 선원들과 함께 1,030명이 이곳에 도착한 이래 1867년까지 16만 명의 유배 죄수가 실려 왔다. 생각해 보라. 국외로 추방할 정도의 죄수라면 그 죄질과 형량이 어떠한 사람들인가를.
그러나 조국이 버린 그들에게 이 새로운 땅은 넓고, 비옥하고, 살기 좋은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 우리가 지금 가는 시드니 부근 보터니 만(灣)이었다.

 


호주의 국기
그 나라의 상징으로 정한 기가 국기(國旗)이다. 우리나라 국기가 태극기(太極旗)이듯이 영국의 국기는 유니온 잭(Union Jack)이다.
호주나 뉴질랜드의 기가 비슷한 것은 두 나라가 다 영연방 국가이기 때문이라서 푸른 바탕에 왼쪽 위에 유니온 잭을 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의 국기에는 유니온 잭 아래에 7개의 뾰족한 뿔대를 가진 큰 별 하나가 더 있다.
7개 뿔대는 호주의 6개 주(州)와 연방 직할시를 나타내고, 오른쪽 중간의 5개의 별은 남십자성(南十字星)으로 남쪽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상선(商船)은 파란 바탕이 아니라 붉은 바탕이었다.
십자성을 아무 데서나 찾지 말자. 남반부 밤하늘에 십자성이, 북반부 밤하늘에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국기는 무심히 보면 호주와 같은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별이 남십자성 다섯뿐이다.
이렇게 호주와 뉴질랜드는 같은 나라 같으나 다른 나라요, 다른 나라로 보이나 한국과 일본처럼 비슷한 문화를 갖고 사는 이웃 나라다.
일본과 같이 역사적으로 못된 짓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나쁜 이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사는 가족 같은 이웃 나라이다.
영국을 어머니처럼 모시고 미국을 형처럼 함께 사는 나라들이다.

 

파도가 구르는 곳/ 본다이 비치(Bondi Beach)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남쪽나라 해변 가에 왔다. 그 오스트레일리아 해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본다이 비치(Bondi Beach)에 와 있는 것이다.
푸른 바다 파도를 몰고 오는 시원한 바닷바람 앞에 서면, 구름이 굴러가듯이. 파도가 굴러 왔다가 굴러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곳을 본다이(Bondi)라고 하는 것은 원주민 말로 '파도가 구르는 소리'란 뜻이기 때문이다.
본다이 비치는 바람을 막아 주는 섬이나, 언덕 하나 없이 남태평양에 직접 대하고 있어서, 새파란 파도가 철썩이며 이렇게 몰려왔다가 물러가고 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파도가 숨을 쉬는 소리 같기도 하고, 파도가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한데, 올 때는 바람처럼 왔다가 물러갈 때는 밀가루보다 더 고운 모래를 밀어 주고 간다.
이런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활처럼 굽어진 경사가 아주 낮은 해안선이 1km나 이어지고 있다.
하와이 가서 밟고 다니던 모래도, 월남 하롱베이 비치에서 만난 모래도 이렇게 곱지는 못하였다. 은과 금을 곱게 갈아 놓아도 이만 못할 것 같았다. 소월이 살고 싶은 이상향으로 노래하던 마음속의 금모래란 이러하였으리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본다이 비치는 세계 최초로 톱리스(Topless)가 시작된 곳이다.
톱리스(Topless)가 무언가. 아담과 이브같이. 유방을 들어 내놓고 팬티만 가리고 다닌다는 말이 아닌가.
신의 창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여체(女體)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것이 백인 여인이라는데, 신이 주신 그대로를 그냥 이 초록빛 바다와 흰 구름과 하얀 모래에 맡겨 두고 자연과 하나 되어 노니는 그 모습은 얼마나 황홀할까.
평범함에 지친 점잖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감격이고 눈요기가 될까.
여기 아니면 어디서 다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랴,
허나 서운하게도 지금은 겨울이고, 비록 여름이라 하더라도 우리와 같은 관광객은 오전에만 다녀가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니, 이 모래 사장에서의 여름날의 노니는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구나.
시드니 서클러 선착장에서 수상 비행기를 타고 20분가량 남쪽으로 가면 팜비치라는 누드 비치가 해안 따라 펼쳐져 있다. 거기서 서양의 선녀 같은 젊은이들이 알몸으로 황금 모래사장에서 배구도 하고 수영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싱숭생숭하게 한다.
우리 같은 에트랑제가 주의할 때가 있다. 저녁에 바닷가나 공원 근처에서 자동차 지붕 위에 옷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볼 때다. 그것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중이라는 표시라니 사랑을 방해하지 말 것이다.
잔잔한 바람에도 저렇게 심하게 치는 파도는 세계적인 서핑(surfing, 나무 조각으로 파도타기 놀이)의 최적의 조건이 되어 본다이 비치는 서핑의 메카, 서핑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어 세계 각지의 젊은이를 부르고 있다.
본다이 비치는 여름에는 서핑으로 겨울에는 100m을 훨씬 넘는 수직의 절벽 길 따라 더들리 페이지나 갭팍으로 산책하는 것이 제격이다.
해안선 절벽을 따라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스러지는 파도를 보며, 우리는 매콰이 등대(Mackuarie Lighthouse)를 향하고 있다.
100m 수직 절벽 아래 절벽 틈새로 보이는 바다 경치가 너무나도 좋다는 갭팍(Gap Park, 갈라진 틈으로 보는 공원)에 이르렀다.
나라가 모든 것을 해결하여 주니 허무해서인가. 이 나라에는 유난히 자살자가 많다나. 기왕 죽을 바에는 아름다운 자연에 몸을 던지자는 것인지, 자살자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가 바로 갭팍(Gap Park)이 되었다.
중간에 커다란 닻이 하나 표지 설명과 함께 서 있다. 1857년에 이 앞 바다에서 침몰한 영국 선박을 기념하는 것이다. 선원 127명 중 1명을 제외한 전원이 풍랑으로 사망하였다 한다.
멀리 보이는 절해고도 같은 곳의 절벽이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탈출하던 절벽이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거기서 조금 올라간 곳에 우리가 점심 식사 후에 가기로 되어 있는 시드니 전경이 가장 잘 보인다는 더들리 페이지(Dudley Page)가 있다.
본다이 비치에서 언덕을 올라 산등성이에 이르면 앞이 확 트인 운동장 같이 널따랗게 펼쳐진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여기가 더들리 페이지(Dudley Page)다.
부자 동네에 있는 이곳은 원래는 개인 소유의 땅이었는데 혼자 시드니의 전경을 보기가 아깝다고 시드니 시에 이를 기부를 하였다. 더들리 페이지(Dudley Page)라는 이름은 기증한 그 부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곳은 우리네 관광객에게는 시드니를 배경하여 촬영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고, 그 지하는 시드니 시의 물을 대는 물탱크로 쓰고 있었다.

 

 

세계 3대 미항 시드니 항(Sydney港) 선상 유람/ 시드니 항(Sydney港)
호주 인구의 1/4인 400만이 사는 시드니는 이 나라 문화 교육, 경제, 산업, 교통의 중심지가 되는 호주 제1의 도시다.
시드니(Sydney)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며, 호주 개척의 출발점이 되는 곳으로, 이 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깊은 도시이기도 하다.
인류가 세계에서 가장 늦게 발견된 대륙이라서, 가장 최근에 이룩한 계획도시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 도시보다 더 현대적이고, 더 다양한 도시에서 정열적이고 형식을 싫어하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
신의 축복은 기름진 옥토에다 살기 좋은 날씨까지 더하여 주어서, 지금은 7월로 이 나라에서는 한겨울이건만 사람들의 옷차림이 우리나라의 봄가을과 같다.
어디나 새파랗게 잔디가 자라고 있는, 겨울답지 않은 온화한 겨울을 살 수 있는 나라였다.
이태리의 나포리 항,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루 항(Rio de Janeiro港)과 함께 세계3대 미항(美港) 중에 하나인 시드니 항(Sydney港)의 써큘라 부두(Circular Quay)에서 우리는 선상 쿠르즈(유람)를 한다.
배를 기다리는 사이 잠시 항만을 거닐어 보니, 오른쪽에 그 유명한 오페라하우스가 코발트 빛 출렁이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있는 하버 브리지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배치된 것이,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나발 소리와 북소리가 시선을 빼앗아 보니, 원주민 애버리지니 전통 악기인 나발을 불고 있는데, 관광객 몇이서 흥겹게도 북을 쳐 장단을 맞추고 있다. 거리의 악사였다.
오전에 이곳의 경치를 가장 멋있게 볼 수 있다는 포인트(Macquarie's Point)에서 기념 촬영을 여러 장 하였는데, 지금은 반대쪽에서 그곳을 보고 있다.
잭슨 만(Port Jackson)에 툭 튀어나온 곶(point)에 옛날 유형 식민지 개척시대에 호주의 아버지라고 추앙 받고 있는 주지사 매쿼리의 부인이 살았다.
늘 바다에 나간 남편을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하여 그곳을 '매쿼리 부인의 의자(Lady Macquarie's Chair)'라고도 애칭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선상에 오르니 뷔페식 점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유람선에서 이곳을 찾아온 세계인들과 온갖 이국 음식을 먹으며, 2시간 동안 유람선에 몸을 싣고 세계인이 동경하는 시드니 하버의 경치에 우리도 그 하나가 되어 있다 생각하니, 행복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한 일인지를 생각게 한다.
센프란시스코 항에서, 사이공의 메콩 강에서, 이집트의 나일 강에서, 지중해에서 쿠르즈를 하여 보았지만 그곳들보다 몇 배로 더 격을 높게 하여 주는 것은 바로 시드니의 얼굴이라는 오페라 하우스(Sydney Opera House) 때문이었다.
시드니 셔쿨라 부두에서 탁 한 눈에 들어오는 베넬롱 포인트 반도 끝자락 자연 암반에 세운 오페라하우스는 하얀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포개 놓은 것 같은 새하얀 지붕이 새파란 하늘과 코발트빛 바다에 어울려 너무나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세계 32개국의 232점 공모작 중에서 당선된 건축 건축가 덴마크 요른(jorn utzon)은 잘라 놓은 오렌지 조각에서 힌트를 얻어 설계도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총 공사비만도 1억 200만 달러로 14년간에 걸친 공사로 1975년에 완공되었다.
무엇보다 오페라하우스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하얀 지붕이다. 백만 개도 훨씬 넘는 스웨덴 산 세라믹 맞춤 타일로 제작한 것이다.
좌우나 공중 어느 각도로 보아도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직선과 곡선의 조화는, 푸른 하늘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개구름이 살며시 내려와 앉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한다.
시드니 인들의 자랑거리자 자존심인 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건축의 세계를 넘어서 조각 경지에 이르렀고, 그 조각에서는 아름다운 가락이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내부는 모두 목재로 꾸며져 있는데 방만도 무려 1,000여 개나 되고. 큰 콘서트홀은 수용 인원이 2,700명이나 되며, 1,6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오페라 극장도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건물 제작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너무 많은 공사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시에서 복권을 팔아 건축비에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된 사람이 8살 먹은 어린이였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이 불행한 어린이는 그 돈을 노린 유괴범에게 납치가 되어, 피지도 못한 어린 목숨을 8살로 끝맺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유람선은 잠수함 모양의 성채가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곳을 돌아서 시드니의 또 하나의 상징 하버 부리지를 향하고 있다.
이곳이 포트 데니슨 성(城)이다. 이 바다에는 집채만 한 고래가 나타날 정도로 수심이 깊은데다가 세계에서 상어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라서 1841년까지는 죄질이 나쁜 범죄자를 격리 수용했던 교도소로 이용하였다.
이 성에 수감되면 힘든 노동에 소량의 음식물만을 지급 받아 아사 직전까지 가는 죄수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섬은 '굶주린 창자'라 고 불려 져서 누구나 이 섬을 두려워하였다.
그 후 크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군 요새로 개조하여 쓰다가 지금은 신기한 곳 찾기를 즐기려 하는 사람들의 가이드 투어인 경우만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 포트 데니슨 성체를 등지고 하버 부리지를 향하 다보니 센프란시스코 쿠르즈(Bay Cruise)가 생각난다. 금문교를 넘어 알카포네가 투옥되었었던 바다 가운데 있던 중 죄수만 가두어 두었던 감옥 알카트라즈 섬을 돌아보는 투어였다.
시드니 하버는 해안선이 240km나 펼쳐져 있는데, 백사장으로 계속되기도 하지만 육지와 직접 접한 곳에는 해안선 따라 빙 둘러 가며 그림 같은 집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 집들 뒤꼍에는 대개 보트가 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낚싯대만 드리우면 남태평양의 뛰노는 바다 고기를 직접 낚을 수가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회(膾)를 탐하는 낚시꾼으로 하여금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배는 오페라하우스가 건너다보고 있는 529m 높이의 하버 브리지(Sydney Harbour Bridge) 밑을 통과하고 있다. 하늘에 둥근 호를 그리며 시드니의 남북을 이어주고 있는 이 다리는, 그 모양이 마치 옷걸이 같다 하여 '낡은 옷걸이?(old coaphan)라는 애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8차선 차도와 두 전철 선로, 자전거 전용도로와 인도로 구성되어 있는 폭 48.8m의 이 다리는 폭으로는 세계 최대, 길이로는 세계 2번째로, 1920년에 몰아친 공항의 타개책으로 호주가 국력을 기울여 장장 9년 만에 완성된 다리다.
공사 당시에는 시간 당 1,000대의 교통량을 생각하고 만든 이 다리가, 지금은 15,000대로 도저히 늘어나는 교통체증을 감당할 길이 없어, 1989년에는 해저터널을 뚫어 교통을 분산시켰다.
이 다리가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팽키 칠을 하는데 그 양만도 자그마치 3만 리들이나 되어 통행세를 받아 이에 충당한다고 한다.
유람선이 이 다리 밑은 지나다 보니 다리 위에 사람이 보인다. 파리론 내부를 통하여 관광객은 10만원(안전 유지비) 가량 돈을 내고 남쪽의 전망대에 오를 수 있는데, 그 조망대에서 한눈에 시드니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치가 하나하나 그림같이 펼쳐져서 왜, 시드니가 세계3대 미항의 하나인가를 스스로 느끼게 한다고 한다. 그 중에도 밤의 경치는 홍콩과 함께 백만 불의 야경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시드니에서 이틀을 잤다. 한번은 이 투어 여행 첫날 늦게 도착하여서 다음날 구경하고 저녁에 뉴질랜드 남섬을 향하였고, 올 때는 시드니에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려고, 오클랜드에서 이곳에 다시 들렸던 것이다.
나는 10일째 투어의 마지막 날 피곤하다는 아내를 졸라 호텔 뒤에 있는 백사장을 캄캄한 밤에 거닐다가 아내를 먼저 호텔에 보내고 호텔에 있는 카페에서 56세라는 호주 운전기사에게 한 잔 사며 밤늦게 시드니의 마지막 여정을 달랬다. 마지막 시드니의 밤을 마시다가 객실로 돌아오면서 취기 속에 자문자답하며 흥얼흥얼 돌아왔다.

해외여행에서 가장 큰 낭비를 하는 사람이 누군가? 저녁에 일찍 자는 사람.
가장 속상한 사람은? 물건을 잃어버리고 오는 사람.
가장 멍청한 사람은? 가이드가 소개하는 곳에 가서 물건 많이 사는 사람.
가장 손해 보는 사람은? 함께 간 사람과 싸우며 다니는 사람.
가장 후회할 사람은?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에 가서, 옵션 사야 할 물건을 외면하는 사람.
가장 일행에게 폐를 많이 끼치는 사람은? 여행 중 아픈 사람.

불행하게도 내 아내는 여행 떠나기 전날 자전거와 충돌로 인하여 여행 내내 아팠고, 나는 세계 여행을 위해 애지중지 모시고 다니던 고가의 망원경을 잃어버리고 왔구나.


송충이의 천국은 소나무

여행길은 찾아오기가 힘들 듯이, 다시 가기는 더욱 어려운 즐거운 낭만의 길이다.
지난 10일 동안, 하루가 새롭게 다가와서는 바삐 흘러가기만 하는 그 추억이 아쉬워서, 달리는 차에서는 차창을 통하여 비디오로, 내려서는 카메라로 기록하며 다녔고, 가이드의 설명은 거의 다 디지털 녹음기에 담아 왔다.
현지에 갈 때마다 그곳에 비치되어 있는 팸플릿을 수집하였고, 가능한 한 그곳의 풍경이 담긴 그림책을 사 왔다. 인생을 두 번 이상 사는 것이 기록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나는 그 곳을 3번 이상 여행하는 셈이 된다.
가기 전에는 찾아갈 곳을 연구하느라 도서관보다 편리한 대형 서점을 들락거리다가, 가서는 듣고 보고 기록하고, 다녀와서는 보고들은 것을 열심히 찾아보고 연구하며 이렇게 글로 남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가 끝나면 비디오 편집에 들어갈 계획이다. 대개는 벼르다가 다음 여행으로 생략하고 말았지만, 요번 여행에서 술빚을 지고 온 김 사장 부부에게 공항에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일만(一萬)이 미안하였지만, 귀국하여서는 김 사장 차례요'
나는 지금보다 더 젊었을 때 컴퓨터와 카메라와 비디오와 문학 등에 투자하고 바친 나의 시간과 그 여유를 사랑한다.
세계 5대 주를 다니는 동안, 나만한 장비를 두루 갖추고 다니는 사람을 못 보았대서 가 아니라, 그들 세계를 조금이라도 넘볼 수 있기 위하여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드니 공항을 떠나서, 흰 구름 아래 호주 대륙을 건너가면서 구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계속 카메라에 담으면서 우리들의 조국 대~한 민국을 향하고 있다.
돌아가면 새벽마다 낚시터에 가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일산 이산포 수로는 하루에도 몇 번 수문(水門)을 열어 한강 물을 받아들이는데도, 더 넓고 깨끗한 한강으로 나지 않고 태어난 그곳에서만 사는 참붕어들처럼, 낯설지 않은 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우리는 송충이의 천국이 소나무이듯이,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거기서 죽어 갈 소나무 우거진 나라, 외국에 가서도 잊지 못하던 우리들 나라 코리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연어가 고향 찾아 되돌아오듯이
돌아가는 귀국 길, 우리들 나라
그리운
이들의 세상
천국 같은 내 고향

송충이 천국이 소나무이었듯이
한국적인 것들은 우리들의 천국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 속에 있었구나.
                     -귀국 길에서

 

후기 : 나는 이 글을 쓸 무렵 위 '해외여행기'와 함께 '한국 국립공원 산행기'를 완성하고 어느 것을 책으로 엮을까

망설이고 있었다. 대학교 선배이신 서울대 교수 구인환 소설가(작고)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한국 국립공원 산행기' 발간을 권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때가 20여 년 전 일이라 글의 자료 2020년 현재와 많이 다른 점이 있다. 허나 젊었을 때 나의 글을 그냥 두기 아쉬워 당시 글대로 나의 불로그에 올린다. 불행하게도 그때 내 글의 모든 사진이 사라져서 글로만  이렇게 발표하니 양해하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