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동화사(桐華寺)/ 대구팔공산

ilman 2017. 7. 8. 05:01

 대구에는 중요한 사찰 문화재로서 동화사(桐華寺), 파계사(把溪寺), 북지장사(北長寺)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으뜸 가는 유명한 사찰이 동화사(桐華寺)다.
이 동화사 지구는 팔공산 관광과 산행의 기점이라서 케이블카(6인승 곤돌라)가 산 중턱까지  오르내린다.
 

왜 절 이름을 동화사(桐華寺)라고 하였을까?
 
신라 소지왕(493년)에 극달(極達) 스님이 이 절을 처음 지었을 때(?)에는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 그 뒤 흥덕왕의 셋째 아들 심지(心地) 대사가 중창을 하였는데, 때가 겨울철인데도 이상하게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였다. 그래서 오동나무 '동(桐)' 꽃 '화(華)'라 하여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
 이런 기록도 있다.
 심지(心地) 스님이 속리산 길상사에서 영심 스승에게서 법통을 계승하는 간자(間資)를 받고 팔공산으로 돌아와 산꼭대기에서 간자를 날려 떨어진 곳에 절을 지으니 이가 곧 동화사

   한쌍의 당간(괘불대)를 양쪽에 두고 절에서는 처음보는 반원형의 층계를 올라 대웅전 왼쪽 옆문을 통하여 보니, 석가모니(釋迦牟尼) 좌우로 앉은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모셨는데 천장에는 세 마리 용과 여섯 마리 봉황의 조각이 화려하다. 절에 용이 있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봉황이 있는 것은  봉황같은 팔공산의 형상을 생각한 모양이다.
   "여보 저 꽃 좀 봐."
'이 엄동 설한에 꽃이라니-' 하고 대웅전에서 참배를 하고 나오는 아내의 눈길을 따라 가보니 색이 중후한 소슬꽃살 창이었다. 지난해 앙코르왓에서 보던 돌로 된 창살무늬가,  여기에는 나무 무늬다.
그러나, 아쁠싸 세월에 아품에서인가. 색이 바래고  떨어져 나간 문살 조각도 보인다. 이런 것들 하나 하나가 동화사 대웅전(유형문화재 10호)의 역사를 말해 주는 흔적들이었다.

 지금은 겨울이고 저녁이 가까운 무렵이라 방문객은 우리뿐인데 절마당 건너 저쪽에 커다란 석조불상의 뒷모습이 우릴 부르고 있다. 세계 최대석불이라는 '통일약사대불(統一藥師大佛)'이었다. 대불(大佛)을 찾아가다가 스님에게 길을 물으니, 모르고 지나쳐온 봉황문(一柱門 옆에 '마애불좌상'도 보고 가라고 한다.
 동화사 창건과 인연이 깊은 심지(心地) 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磨崖佛坐像(보물 243호)'은 남쪽 입구 암벽 위에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자연 암벽에다가 우러러 보도록 손길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높이에 부조된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이었다.

몸체 높이가 1.6m 정도 되고, 머리 뒤에는 광배가 뚜렷하다. 이중의 화려한 연꽃 대좌가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다. 그 상호(相好)는 갓바위에서 우리가 보는 범접할 수 없던 위엄이 아니라, 아담하고, 부드럽고, 포근한 인상을 주는 친근한 모습의 부처였다.
  한 가지 엷은 실망은 서울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불상이나, 강화도 보문사 눈섭바위을 보던 우리의 눈에는 기대했던 장엄미와는 달리 귀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작았다. 
그래서 그랬던가 다시 발길을 돌려 아까부터 마음을 붙잡던 약사여래 대불 앞에서 서서 우리는 얼마나 놀라고 황홀하였는지-.

한 눈으로는 보기에는 벅찰 정도의 확 트인 공간에 동양 최대 석조불이라는  통일약사대불이, 일만 평이나 되는 넓은 중간에 서 있고, 여의주를 머금은 두 마리 용이  하늘을 우러르는 그 뒤로 부처와 수호신들의 조각들이 부조된 둘레석 석조물이 빙- 둘러 서 있다.
국내 최고 높이인 17m(원석 2천톤) 석등 2기, 병풍석(원석 5,000톤)은 물론, 석조예불 석실에 불교유물 전시관을 만들은 지하 1층 , 지상 3층의 거대한 구조였다.
통일약사대불은 총 높이가 33m, 둘레가 16.5m 무게로, 좌대만을 합친다 해도 자그만치 돌의 무게가 5,000톤이나 된다. 그 원석을 전북 익산에서 여기까지 300km나 되는 먼 거리를 1년을 걸려 옮겼다는 것이다. 거기서 채취된 황등석 화강암 여덟 덩어리를 통일약사대불로 조각한 것이다. 더구나 약사대불은 24시간 개방으로 365일 내내 꺼지지 않은수행기도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로써 동화사는 '동아시아 10대 관광명소'로 지정되어  수백만 명의 내외국인들이 참배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성지가 되었다.
 무엇을 발원하기 위하여 석가모니도, 관세음보살도, 미륵불도 아닌 약사여래불 그 많은 시간과 시주를 모아 왜 세웠을까?
 우리가 절에 가면 한 손에 병을 들고 있는 부처를 볼 때가 많다. 그 약병을 든 부처가 바로 약사여래(藥師如來)다. 
약사여래는 전세의 약왕(藥王) 보살로 있으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키기 위한 12가지 큰 소원을 이룬 공덕으로 부처가 되었다. 그래서 중생의 고통인 질병과 재앙을 치료해 주고  소멸시켜 주며 다닌다는 부처다.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질병과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병들을 샤머니즘에서는 무당(巫堂)에게, 불교에서는 약사여래(藥師如來)에게 빌어 예방하고 고치려 한 것은 어느 민족에게나 있는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 절은 임진왜란 때에는 유정 사명당(四溟堂)이 영남 도총섭으로 승군을 지휘하고 훈련시키던 호국불교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호국 불교에서는 우리 민족의 분단의 역사도 크게는 병(病)으로 보고 있다.
이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온 겨레가 마음으로 약사여래불로 모시고 뭉치어 그 무한한 원력인 불력으로 분단이라는 비정상적인 병을 치유하고자 불심을 모으자는 것이다.   





 

 

 

동화사 다음 어둠을 밟고 들렸던 팔공산 파계사(파溪寺)의 북과 인경 소리를 들으며 광장 오른쪽 귀퉁이에 선 약사여레가 약병에 긴 대나무 파이프를 통하여 흘려주는 약수를 거북이처럼 마시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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