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참상/ 캄보디아(2)

ilman 2012. 12. 22. 10:25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참상/ 캄보디아(2) 

  호텔에서 일박하고 우리는 프놈펜에서 15km 떨어진 킬링필드(Killing Field) 현장으로 간다.

캄보디아인들이 가장 가기를 꺼리 는 곳이다. 거기 보관된 유해나 유품 중에는 폴포드 이엥사리 정권의 쿠메르즈에 의해 죄 없이 처형되고 학살된 230만 그 유해 중에서, 자기의 가족들을 혹시나 만나 볼지도 모르는 끔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캄보디아인들을 더 열불 나게 하는 것은 이런 비극의 현장을 한국인이 미워하는 일본인보다, 캄보디아인들이 열 배 이상으로 더 미워하며 사는 베트남인들에 의하여 그 학살 현장이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에 아카데미 3개 부문의 수상 영화 '킬링필드(Killing Field 감독 Rond Joff)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쿠메르즈 군의 살육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느골(Dr.Haing S . Ngor)은 내란 중에 잃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제 조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처님께 감사드립니다."

  킬링필드로 가는 길은 인구 1백만 명이 산다고 하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시내 치고는 너무 초라한 붉은 황토 길이다. 그 거리 교통의 모습은 하노이와 비엔티엔의 그 중간 정도여서, 한적하지도 아주 복잡하지도 아니한 편이었다. 시내 중심부를 제외하면 가로등이나 중앙선도 없었다.

많은 오토바이 중에 '동아 일보 xx 지국'이라 쓴 오토바이가 보인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저런 것들은 한국에서 도둑맞은 것이 이 나라에서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모든 거리의 길가에 노점이 진을 치고 있었고, 다리를 지날 때 보니 강을 따라 우리가 6.25때 청계천 등지에서 보던 기나긴 빈민 판자촌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가난의 긴 행렬이었다.

국도를 벗어나자 아스팔트길은 그친다. 차가 통과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다리를 간신히 건너고 나니, 우기(雨氣)에는 도로가 나빠 차량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붉은 황톳길이 나타난다. 그럴 경우에는 기다리고 있는 영업용 오토바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낮 12시쯤 학살 현장 가까이 초등학교 학생들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몰려가고 있다.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가는 것이라는데, 그 체구가 나이에 비하여 우리나라 어린이보다 훨씬 작았다.

이곳 선생님들은 월급이 50불 내외여서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담임선생은 출근길에 아이들에게 팔 과자, 사탕, 빵, 학용품 등을 교실 바닥에다 죽- 늘어놓는다. 학생들에게 팔기 위해서다.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을 파는 일이요,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보다 그걸 사 먹고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자랑하는 일이란다.

공산주의 국가라, 이 나라에서도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이지만 초등학교라도 이렇게 다니는 학생들은 행복한 가정의 부유한 소수일 뿐이다. 관광객에게 구걸하여 돈을 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에, 부모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린다.

배운 사람이라 하여 죽여 버리려 했던 과거 동족이 겨누던 총부리는, 이 불쌍한 국민들의 교육열마저 빼앗아 가 버려서, 캄보디아의 장래마저 까맣게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런가. 캄보디아보다도 못산다는 남방예의지국인 양반의 나라 라오스에서는 보기 드물던 동냥하는 아이들이, 여기서는 차가 서기 무섭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까만 손을 내민다.
대개 10살 내외의 어린아이들의 오른 팔에는 3살 내외의 어린 동생을 안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동냥을 위해서지만 얼마나 팔이 아플까?

그러나 이곳 아이들은 베트남 거지 아동이 제 것 달라고 떼쓰는 식의 끈질긴 것이 아니고, 낮고 가여운 소리로 동정을 호소하는 순박함이 있었다. 그들은 가난을 호소하는 것이지 거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아이에게 1불을 주었더니 벌 떼같이 모여드는데, 나에게 1불을 받은 아이가 뒤에서 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주는 사람이 또 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프놈펜에서 왕궁에 들러, 1,125 kg의 은으로 만든 불록 5,329개로 꾸며 놓았다는 왕궁 전용 사원 실버 파고다(Silver Pagoda)를 보고 나오다 만난 지뢰에 손발이 잘린 걸인을 그냥 지나쳤더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욕설이었다. 빌어먹을 자격도 없는 놈들 같으니-.

 

1975년 론놀 정권을 중공의 도움으로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한 수상 폴포트와 부수상 겸 외상 이엥사리의 ‘민주 캄퓨치아' 정권은 지나친 급진 정책을 썼다.

이 폴포트 정권의 잘못은 그들은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적 틀을 한번에 개조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로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우직하게도 밀고 나아갔다.

  첫째로 당시 폴포드의 주구(走拘)노릇을 했던 경찰들을 앞세워 농본주의(農本主義)적 공동체 정책이라 하여 전인구를 국토 각 곳에 재배치시키었다.

수백만 도시인을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논농사에 또는 관개수로망(灌漑水路網) 건설과 유지를 위해 강제로 농촌에 배치시키는 바람에 전국의 도시 지역은 공백화 되어 버렸다.

캄보디아 전 국토는 강제수용소로 바뀌어 하루 12시~14시간 일해야 했다. 이로 인하여 그 3년 동안 기근 질병 학살 처형으로 노약자, 불구자 등이 고된 농사일을 견뎌 내지 못하여 죽어 갔다.

  둘째 ‘민주 캄퓨차에 유해한 종교는 금지 한다'고 하여 종교 활동을 금지하였다. 국민 90%가 믿는 불교 사원을 파괴하였고 승려들의 환속(還俗)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당의 승낙 없이는 연애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셋째 불평을 막기 위하여 매스컴을 거의 폐지하였다. 국영 라디오 ‘민주 캄푸차의 소리'가 유일한 선전 기관일 뿐이었다.

  넷째 구정권의 공무원과 군인 등 그 중에서도 배운 사람들을 골라, 반대 세력이라 하여 대량 학살하였다.

  다섯째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지식인들로부터 나온다 하여, 인텔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학생까지 포함하여 죽였다.

그래서 지금 캄보디아에는 성인들의 50%가 문맹이다. 무식한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지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라디오 방, TV 방, 미장원, 자전거, 오토바이 가게를 글 대신 그림을 그려 가게 앞에 세워 놓는 진기한 모습을 어디서나 만나게 된다.

 
쯔응 아익 해골 추모탑

 

드디어 쯔응 아익(Cheoung Ek)킬링필드 추모탑에 이르렀다.
1988년에 세운 캄보디아 전통 양식의 위령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각국에 있는 독립 탑이나 보통의 기념탑 같았는데, 가까이 다가 가 좁은 회랑을 돌면서 유리창을 통하여 각층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경악하였다.

난생 처음 바라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골 탑 앞에서 우리가 꿈속에 서 있는가 아니면 영화 속에 서 있는가 의심하고 있었다.

탑 안에는 8,000여 개의 두개골들이 성별 나이 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맨 아래층은 죽은 이들이 죽을 때 입었던 남루한 옷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모양 색깔이 한결 같이 푸른색인 것을 보면 수의인 것 같다. 10층까지 위로 계속 되는 해골의 탑, 해골의 바다, 죽음의 전시장이다.
한층은 아래 턱만 전시하여 놓은 곳도 있었다.

내가 수년 전 중국 여순 감옥에 방문하였을 때, 왜놈들이 중국인, 한국인의 주검을 나무통에 억지로 넣어 쑤셔 넣어 묻어 죽인 것을 보고 울면서 천인공노의 일제를 저주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래도 이민족 간의 일이요, 동족 간에 있었던 학살은 아니었다.

몇 년 전 한국의 ‘거창양민학살 현장'에 가서 본 세계도 이러하였다. 죄 없는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무차별 학살하여 집단적으로 파묻은 현장이다. 부녀자의 무덤, 아이들의 무덤 등으로 구별하여 묻어 놓았는데 그것을 캄보디아판 거창사건으로 확대하여 놓은 것이 여기 킬링필드였다.

이 죄 없는 주검이 학살되어 묻혀 있던 곳이,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세계를 경악하게 하였던 바로 그 웅덩이였다. 그날을 지켜보았을 커다란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옆에, 많은 웅덩이가 있다.

어떤 웅덩이는 정자처럼 지붕을 하였는데 사방이 트여 있다. 이것이 참살 현장의 허무한 모습이었다.

동족이 동족을 무자비하게 한꺼번에 죽이고 파묻어 당시 국민의 1/2를 매장한 현주소였다.

한 웅덩이 앞에는 목 없는 시체 166구의 웅덩이라 쓰여 있었다. 죽여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목을 쳐 죽였다는 말이다.

처형할 때 총알을 아끼느라고 쇠막대기로 뒤통수를 쳐 죽였다니….

한 웅덩이는 아동만 100명이 묻은 무덤이라 하였다. 그 웅덩이 옆에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에 우는 아이의 두 다리를 잡고 산채로 휘둘러 때려 죽였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공중에 던져 떨어지는 아이를 경찰이 들고 있는 그 총검에 아이를 꽂기도 하였다고-.

이에 대한 불평을 막기 위하여 매스컴을 거의 폐지하였고 국영 라디오 ‘민주 캄푸차의 소리뿐이었다.

  

대학살의 현주소/ 대학살 박물관(Tual Sleng Museum) 

 

  거기서 조금 떨어진 '포드 투울슬렝 대학살 박물관'(Tual Sleng Museum)으로 갔다.

한때는 투올슬랭이란 곳에 있는 하나의 평범한 고등학교였지만 이곳은 킬링필드에서 죽은 이들을, 살아생전 고문하던 S-21수용소로 쓰이던 곳이다.

여기에 크메르루즈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반대할 것이라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체포, 숙청하여 이곳에 수용하였다. 그들은 주로 지배 계층과 각계 지식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안다 해서, 안경을 썼다 해서, 노동을 하지 않아 손이 고운 사람들은 인민의 적이라고 잡혀 온 곳이다. 책의 저자, 국가의 엘리트, 학생들을 무차별 잡아다 죽였다.

 

마침 귀국한 유학생 500명도 귀국 즉시 소식 없이 사라져 갔다.

이러한 인텔리 등의 대거 학살은 급속히 발전해 가는 현대를 맡을 지식인이 없어 캄보디아를 1970년대 그대로 역사를 묶어 놓고 말았다.

  이 수용소에는 커다란 무덤이 14개나 있다. 해방군이 이곳을 탈환할 때 크메르루즈 군이 도망가면서 마지막 사살한 원혼들의 묘지이다.

당시에는 이 건물 주위에는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이 교정에는 A, B, C, D 네 동의 건물이 있는데 A 동은 조사하고 고문하던 곳이요, B동은 수감자들의 사진 촬영, 조서 작성하던 곳이요, C동은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87개의 독방이다. 독방마다 검은 색의 족쇄가 있어 당시의 참혹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D동에는 당시 이곳에 수용되었던 화가가 다행히 살아남아 그 비참한 살해 현장을 그린 그림이 각종 고문 기구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 희생자의 생전의 모습들의 사진이 수없이 늘어서서 우리들의 놀란 모습을 오히려 태연히 바라보고 있다.

 

정식으로 집계된 인원만도 자그마치 1만4천 5백 명, 그중 2,000명이 죄 없는 아이들이었다.

한 방에다가는 짓궂게도 해골로 모자이크한 캄보디아 지도를 만들어 놓아 관광객의 카메라를 바쁘게 하였다.

고문 장면으로는 높이 매달아 놓고 아래 있는 물통에 넣었다 빼었다 하는 기구. 형틀 옆에 쇠말뚝을 수십 개 박아 죄인들을 묶어 놓고 고문 장면을 지켜보게 하는 것. 돼지처럼 빨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메고 가서, 형틀에 묶어 놓고 손톱을 벤치로 빼고 있는 모습 등, 인간으로는 도저히 자행할 수 없는 고문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이 그림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중 전 정권 내무부 장관 부인의 처형 장면이 우리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

 

  사형대 의자에 묶여 앉아 있는데, 송곳 같은 뇌관이 눈물방울 그렁그렁한 40대 초반 여인의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폴포트 정권은 국제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국내적으로도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챙 삼린은 1979년 1월에 베트남의 지원을 얻어 이들을 물리치고 '캄푸차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캄보디아는 근 20여 년 가까이 전쟁 중이라서 경제는 파탄에 이르러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특이한 체험을 기념하게 하는 것이다.

이집트 사람이 무덤을, 중국인이 유물을, 서구 사람들이 문화를 팔아먹듯이, 캄보디아는 인류 역사상 다시는 있을 수 없는 학살의 현장을 팔아먹기 위해서 여기에 더하려는 것이 있다.
천인공노할 악귀 같은 폴포드가 죽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집을 관광지로 선정하여 살인마의 최종 거주지가 어떠했나를 상품화시키려는 것을 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새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