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31일~4월 10일/ 독일>폴란드>체코>헝가리>슬라비아>오스트리아>독일/노랑풍선 따라/ 인원 28명>
동유럽 여행(1)/ *베를린 장벽에서
*동유럽 여행을 왜들 가는가
흔히 유럽 여행을 3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북유럽, 서유럽, 동유럽이다. 여기에 스페인, 그리스, 터키, 이집트를 지중해 여행이라고도 하고, 남유럽 여행이라고들 한다.
유럽 중에서도 유럽이라고 말하는 서유럽은 유럽 여행 1순위가 되는 곳으로 함께 간 28명의 일행들 거의가 다녀온 곳이란다. 그들 중에는 북유럽, 지중해 여행을 다녀오지 않은 이들이 많던데 왜 구태어 동유럽을 선택하여 온 것일까. 그것은 솔직히 한 마디로 말해서 무엇보다 여행경비가 저렴해서인 것 같다.
체코나 헝가리 등은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그 동안 가볼 수 없었던 곳이다. 게다가 공산주의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동유럽도 못사는 나라들이어서 물가가 싸고 인심이 순박하다.
따라서 투어 경비가 다른 곳보다 싼 것이 동남아나 중국과 같이 우리들의 선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들 나라들은 최근에 사회주의의 옷을 벗고 자유경제 체제로 바뀌는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올라가고 있어 아주 오르기 전에 가보자 하는 마음인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생각보다 물가가 싼 편이 아니다. 최근에 EU에 가입한 나라여서 몇 년 전보다 3배나 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서울에서 산수유가 만발하고, 막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 무렵에 떠나와 4월초부터 11일 간 동유럽 6개국인 독일, 체코,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여행을 차례로 한다.
돌아올 때쯤이면 내가 사는 '꽃과 호수의 도시 일산(一山)' 호수공원에 진달래와 벚꽃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 베를린 장벽에서
어제 장장 9시간 55분 걸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여 베를린 가까이 있는 바이마르(Weimar) 근처 작은 도시에서 일박을 하고 우리는 베를린으로 가고 있다.
독일은 한반도의 1.6 배로 우리나라보다 3배나 잘 사는 나라다.
2차 세계대전의 패망국으로, 우리가 한반도를 38선, 휴전선으로 남북으로 나뉘었듯이, 독일 국토를 베를린 장벽으로 하여 동서로 나뉜 분단국(分斷國)이었던 나라다.
베를린은 서울보다 1.4배나 넓지만 서울보다 1.4배나 적은 8,300만(2002년)이 사는 통일 독일의 수도다.
녹지 공간이 1/3이나 되어서 ‘베르린너 리프트’(베를린 공기)라 하여 우리 서울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맑은 것이 그들의 자랑거리다.
이 나라의 수도를 '베를린'이라 부르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정성껏 거둬 주고 속죄로 세운 도시
'베어(bar)'에
작다는 독어 ‘린(lin)’
베를린이라 했답니다.
베를린 장벽을 가는 길에 반쯤 무너진 교회가 시내 한복판에 있다. '카이져빌헬름교회'다.
제2차 대전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부러 무너진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고 그래서 유명해진 교회다.
교회 내부의 유명한 성화들도 곳곳에 금이 가서 옛날 연합군의 폭격을 되돌아보게 하는데 교인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고 입구에서는 헌금겸 해서 사라고 능금을 1유로를 받고 팔고 있다.
통독 전에 있었던 베를린의 동서를 가로 막았던 높이 4m, 두께 50cm나 된다는 155km의 장벽은 지금은 철거 되었지만 그 일부분이 남아있어 아직도 분단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도로에 두 줄로 나타난 과거의 담의 흔적과 거기에 박아놓은 동판이 또한 그러하다.
분단 시절 우리 나라 판문점과 같이 공식적으로 동서를 오가던 문이 '부란덴 르크 문'이다.
18C 독일 에오크리시즘의 선구라는 이 문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재흥을 목적으로 항한스가 건축한 문이지만 지금은 분단의 상징이 되는 문이요 광장으로 더 유명하다.
그보다 장벽을 더욱 실감하게 하는 것이 장벽이 끝나는 곳 옆의 철조망에다 걸어놓은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장벽을 넘다 사망한 철조망에 걸어둔 하얀 십자의 행렬이다. 감시탑과 군용견과 콘크리트 탑 앞의 철조망에다가, 닿기만 해도 터지는 경보기나 지뢰밭을 넘다가 사망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행렬이다.
이런 탈출이 동독정부 수립된 1949년서부터 61년까지만 해도 250만 명이 훌씬 넘었고, 탈출하다가 사살된 동독인이 41만이 달한 해(年)도 있었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인가.
심지어는 탈출을 지키는 경비병의 탈출만도 150명이 넘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장벽 앞에서니 장벽 벽에는 낙서인가 그림인가. 대형 그림만도 108개나 계속 이어지고 있는 곳에 먼저 온 관광객들이 그 앞을 서성거리고 있다.
갑자기 슬픈 노랫소리가 심금을 울려온다. 우리 남북한 민족이 함께 부르던 통일의 노래 ‘우리의 소원’(작사 안석주/ 작곡 안병원)이다.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오라.. 통일이여 오라.
1989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분단 28년만에 장벽이 허물어지고 통일이 이루어진 통일 독일은 오늘날 어떠한가. 당시 ‘옛 동독을 꽃피는 땅으로 만들겠다.’는 서독 헬 무트 총리의 언약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았다. 지금도 서독인의 두 배나 되는 과거 동독인들의 높은 실업률, 동독, 서독인과의 빈부의 격차, 친밀했던 과거와 사뭇 다른 인관관계, 높은 범죄율, 불완전한 보조금 제도 때문에 과거 동독인들은 불안해하며 그 중 50%가 '오스타로지(Ostalogie, Ost:동쪽)'라 하여 동독 체제를 그리워하고 있다 하지 않는가. 게다가 서독인들의 피해의식은 또한 어떠한가.
매년 0000억 마르크나 들여 동독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선진국 독일이 이러할진데 우리 통일 조국의 앞날은 어떠할까.
자꾸 우리들의 통일 이후의 날들을 걱정하게 되는 것이 기우(杞憂)라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방송을 자유로이 들으면서 문화의 차이를 좁혀 온 독일도 통일의 진통을 겪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던 금강산 여행을 가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북한 동포와의 개인 접촉이 철저히 차단된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행은 여행이라고 할 수 없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동유럽이 아무리 아름다운 산하(山河)라 하더라도 그 동유럽 인을 한 사람도 만나볼 수조차 없게 한 곳이라면 비싼 돈을 들여 그 누가 오겠는가. 게다가 사진마져 마음대로 찍지 못하는 곳에 무얼하러 간단 말인가.
베를린을 떠나오면서 늘어가는 탈북 하는 북한 동포의 생각이 잠자던 시심(詩心)을 일깨운다.
통한(痛恨)의 그리움 앞에 휴전선(休戰線)을 웁니다
봄철은
언제나처럼
오가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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