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톰이 세계7대 불가사의가 아닌가/캄보디아(3) 해외여행 1순위라는 유럽 여행을 하지 못한 내가, 거기다 조금만 보태면 갈 수 있는 서양 문화의 진수라는 유럽 여행을 버리고 왜 하필 이 인도차이나 여행을 택하였을까? 한 마디로 말하여 앙크로왓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과 라오스를 들르게 된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떠나 오기 전에 백과사전 등에서 세계7대 불가사의를 찾아보았더니, 어느 책에도 앙크로왓(Angkor Wat) 이 불가사의에 들어있지 않았다. 9세기 15세기에 영화를 누리던 앙코르 제국이 역사 속에서 살아졌다가 '불가사의(不可思議)'란 말이 생긴 후인 19세기 초에 발견되었기 때문이리라. 앙코르 유적지란 광활한 것이다. 동서길이만도 20km요 남북길이만도 10km에 이르는 거대한 것으로 그 중 10개의 유적 중에도 '앙코르톰'과 '앙코르왓'이 유명하다. 오늘이 바로 그렇게 기다리던 이 여행의 하이라트가 되는 앙코르 구경하는 날이로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이 '앙코르 유적'도 '석굴암(石窟庵)'처럼 신비 속에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일본강압 시절 어느 날 우체부가 토함산에서 비를 만났다. 산이 무너져 내리는 큰비였다. 비를 그을 곳을 찾던 우체부는 우연히 산이 무너져 내린 어느 한 곳에 전에 보지 못했던 작은 굴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뛰어넘어 얼굴을 들어낸 석굴암의 세계였다. 앙코르도 1858년 프랑스의 탐험가며 자연학자 헨리 모오(Hani Mouho) 가 400년간 밀림에 묻혀 있던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 전에 먼저 그보다 발견한 선교사도 있었으나 그들의 말은 유럽 사람들이 거짓이라고 지나쳤다. 헨리모오는 귀국하여 이를 프랑스 신문에 기고하고, 기행문을 써서 널리 이 세계적인 인류의 유산 앙코르의 유적을 알렸다. 발견 당시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이러하였다. "저건 저절로 생긴 것을 문둥이 왕(자야바르만 7세)이 고쳐 만들었다. 거기 들어가면 문둥병 왕의 저주가 내려 죽는다.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 하였다. 그래 그런가, 앙코르를 처음 발견한 앙리무오는 발굴 다음해 라오스에서 열병(熱病)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발견 일년도 안 되어 세계에서 수십만 관광객이 모여들었고, 지금은 이 한적한 나라, 조용한 시엠리엡에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와서 달러를 떨구고 가는 축복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국기, 화폐, 기념품에도, 심지어 술 이름까지 '앙코르 비어'로 하여 앙코르 팔아먹는 것이, 프랑스인이 '나포레온' 팔아먹는 것 못지 않았다. 앙코르왓 입장료 하나만으로도 시엠립엡 시의 전체 재정을 충당할 정도란다. 원주민들의 말이 사실이었던가. 나는 앙코르를 다녀와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 피부병은 문둥병처럼 신체의 은밀한 부분까지 쳐들어와서 그 좋아하는 술을 한 달째나 못마시며 두문 불출하고 있다. 이 앙코르톰은 하나의 유적이 전부인 주위의 다른 유적지와 달리, 여러 시대를 걸쳐 만들어 진 유적이 모여 한 도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앙코르(Angkor:왕도, 도읍) 톰(Tom:크다) 곧 '커다란 도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 100만 명이 사는 세계적으로도 큰 도시였다. 그래서 그 조각의 미(美)로서가 아니어도 세계7대 불가사의 자리를 그 지어진 연대와 함께, 단일 유적인 앙코르왓에 물려주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큰 이유 중에 하나였으리라. 앙코르(Angkor) 여행은 앙코르톰(Angkor Tom)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다. 그것은 정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어 아침 햇살을 받아 시시 각각의 모습이 변하는 바이욘사원의 신비로운 4면 탑의 '캄보디아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다. 캄보디아인들은 언제나 웃고 산다. 웃으면서 일어나서, 웃으며 살다가, 웃으며 잠든다. 폴포드 정권을 피해 태국 국경을 넘어가는 피난민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룰 때 태국인(泰國人)인가 캄보디아인가를 구별하는 방법의 중의 하나가 손을 비틀어 보아, 아프다고 찡그리면 태국 사람이요, 찡그리면서도 웃으면 캄보디아인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앙코르톰(Angkor Tom)은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가 세운 것이다. 앙크로 유적은 우리 나라에서 광개토대왕에 견줄만한 이 왕이 12세기말에서 13세기 초 불교 사원으로 지은 바이욘 양식의 건물이다. 이곳은 크메르(Khmer)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로서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당시에 강대국으로 성장한 미얀마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각변이 12 km에 이르는 정사각형 성벽을 8m 붉은 흙인 라테라이트로 쌓았다. 그 바깥쪽에다가 가로 3 km 세로 4km 폭 10m의 해자(垓子)를 두르고, 해자 속에는 아주 난폭한 악어를 풀어 적군의 침입을 막으려 하였다 한다. 이 성벽은 히말리아의 연봉(連峰)을, 해자(垓子)는 대양(大洋)을 상징한다. 이렇게 앙코르톰은 왕권의 신격화(神格化)를 위한 당시의 우주관에 따라 지은 것이다. 성문은 다섯 개로 각 문 위에는 4개의 얼굴을 가진 “아바로키테스바라”신이 새겨져 있다. '아바로키테스바라 신'은 메류산(Meru)에서 사방을 지배하는 신이다. 힌두교를 신봉하여 힌두교의 신인 시바나 비슈누와 일체가 되려했던 다른 왕들과는 달리, 자야바르만 7세는 불교신자였으므로 그 대신 관세음보살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왕을 신과 동일시하여 왕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함은 물론 사후에는 그 신과 함께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이욘 사원에 솟아 있는 탑은 54개 중 37만 남았는데 이 탑에 드러나는 얼굴들은 모두 관세음 보살의 얼굴이자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기도 하니, 이는 곧 캄보디아의 얼굴인 것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주로 남문(南門)을 통하여 들어온다. 남문은 성문 중에 보존이 비교적 가장 잘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남문으로 가는 돌다리는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에서 신의 세계와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하는 우주관에서 만든 것이다. 머리가 7개인 나가(뱀신) 두 마리를 서로 껴안은 신들이 다리 양쪽으로 쪼그리고 우리를 향해 앉았는데 왼쪽은 54명의 선한 신(善神)이고, 오른 편의 54명은 악신(惡神)인 '아수라' 상이라니, 옛날에 이 나라에도 우리나라처럼 왼쪽을 숭상하는 사상이 있었나 보다. 아수라가 큰 뱀의 오른쪽을, 신들은 꼬리 쪽을 안고 줄다리기를 하는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둘을 합하여 108명이 되는 것을 보면 남문(南門)은 불교에서 말하는 108번뇌에서 해탈을 하고자 하는 문(門)인 것 같다. 이 강건한 동남아인 거인들의 모습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상처투성이로 얼굴이 없어져 시멘트로 새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처럼 세월에 찌들어 가는 고색 창연한 검푸른 색이 아니고 열대 햇발에 반짝이는 황금빛이었다 한다. 남문은 20m나 높이 솟구치어 우람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고 있는데 문의 꼭대기에는 네 방향의 4면 보살상(菩薩像)이 있다. 이 보살이 아발로키테쉬바라 보살 (bodhisattva Avalokiteshvara)로 메류산(Meru)에서 사방(四方)을 지배한다는 신이다. 그 남문 안팎에 모두 코끼리의 상아가 장식되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 아름들이 숲을 걸어서 만나게 되는 것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앙코르톰의 중심 사원 '바이욘(Bayon)'으로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 불교 사찰로서는 가장 큰 규모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무덤 같이 보이던 것이다. 앙코르와트보다 거의 100년 후에 지어졌는데, 앙코로 유적지 중에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그것은 당시 인구 100만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 시엠리입에 사는 원주민이 겨우 6만 내외라니 나머지 인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사원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과 2층은 사각형, 3층은 원형을 이루고 있다.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니까 1층 단의 외부 부조(浮彫)로 보이는데 당시에 목조로 있던 지붕은 물론 사라진 지 벌써 오래다. 부조의 조각 내용은 시암족(터키족)과의 전투 내용이 많았다. 가족과 함께 전쟁터로 향하는 모습, 가다가 밥하는 모습, 물물교환(物物交換)하는 장면, 빨래하는 모습, 가르치는 장면이나 심지어 해산(解産)하는 장면까지 있다. 불교설화 등과 함께 당시 크메르인의 일상생활의 풍속 조각이었다. 2층에서 만나게 되는 석상들에서 특이하게 발견되는 것은 둥군 광배 대신 나가(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부조는 툭툭 튀어나오는 입체적인 양각(陽刻)으로 앙로르왓(Angkor Wat)보다는 더 깊게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으나 예술적으로 보아 그곳보다 떨어진다는 평이다. 3층에서 마주친 장엄한 54개의 탑앞에 섰을 때의 감격이란. 너무 많이 알고 가는 것이 감흥을 반감하는 길이라고, 이 여행 떠나기 전에 사전 연구를 생락하여서, 마음속으로 석불이 몇 개 정도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었는데, 다가오는 사면불(四面佛)의 거대한 모습이 50여개나 된다. 모두 돌로 쌓은 탑인데 사람이 쌓은 정교한 탑이라고 믿기엔 벅찬 커다란 봉우리 같이 너무 큰 탑이 중국 계림(桂林)의 봉우리처럼, 하롱베이의 봉우리처럼, 여기 불끈 저기 불끈 솟아난 것처럼 보이는데 모두 한결같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앙코르의 미소'를 띄운 각 탑의 사면의 불상은 아발로키테쉬바라 보살의 얼굴과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의 얼굴이 어울려 하나로 새겨져 있다는 불상의 세계였다. 세상에 이렇게 큰 봉우리 같은 탑에 저렇게 큰 얼굴이 그것도 54개나 되는 탑에 200개가 넘는 얼굴상이 조각되어 있다니-. 불교의 나라 라오스에서도, 여기 앙코로에 와서도 보고 놀란 것은, 절에서 하나의 부처를 모시고 있는 우리 나라 절과는 달리, 캄보디아의 절들은 수많은 부처를 함께 모시고 있었다. 일체 진리를 자비로운 눈에 품고 응시하고 있는 저 시원한 눈매에, 중후한 코. 막 웃음이 터질 듯한 엷은 미소를 품은 얼굴은 모두 우리들 동양인 얼굴이다. 그 신비로운 친근한 미소를 보며 우리는 이것이 앙코로의 진수(眞髓)구나 하였다. 불가사의(不可思疑)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였다.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캠코드로 무장한 나에게는 다시 더 없는 물실호기(勿失好機)의 행복한 순간이라. 찍고 또 찍고, 돌아 돌며 다시 찍다보니 어렵쇼 일행이 없다. 남문에서 들어와 나갈 문이 4개가 있는데 어디로 간다? 일행은 코끼리 테라스를 향한 동문 쪽에 있었다. 미안해 어쩌지. 허나 어쩌랴 주어진 시간이 30여분도 안돼는 것에의 아름다운 반란인데. 그때 나보다 더 늦은 비디오맨이 있어 얼마나 고맙던지. 코끼리테라스(Elephant Terrace)에서 코끼리테라스 가는 길에 있는 신하들의 목욕탕 코끼리테라스의 코끼리부조 프레아칸 사원 입구 프레아칸 사원의 나무들 왕궁으로 가는 길목에 '코끼리테라스(Elephant Terrace)'라는 곳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가 동남아일대를 평정하던 그들의 전성기에, 보무도 당당히 승전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리며 들어오던 개선장군과 장병을 맞던 곳이다. 단상 3 개 중 중앙 단상에는 가루다(상상적인 새)가 받치고 있고, 앞쪽 테라스를 오르는 층계 좌우에는 커다란 코끼리 여섯 마리가 좌우로 나누어 서서 이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그래서 이름도 코끼리텔라스라 한 것이다. 사열대처럼 널찍한 곳의 앞에 드넓은 광장이 있다. 이곳은 왕이 중요한 행사나 군인의 사열을 하던 곳이요, 오전 오후 두 번 집무를 보던 곳이다. 물론 이 위에 있던 목조 건물은 세월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코끼리 테라스를 내려오다 보니, 함께 간 비디오맨 정선생(서울신문사논설위원)이 막 촬영을 끝내고 엄지 손으로 기가 막힌 비경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아, 이럴 수가. 테라스 360m를 빙둘러 쌓은 5층돌마다 새겨놓는 부조들. 한 뼘의 공간도 남기지 않고 새겨놓은 불상들, 압살라(天女)들-. 이것만으로도 앙코르는 불가사의가 되지- 하였다. 그래서 일행이 기다린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고 그러나 비교적 빠른 걸음으로 돌아가며 캠코더를 찍으며 찍으며 도는데 도중 도중 악사(樂士)의 노래가 길을 막는 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드가 나를 찾아와 일행이 기다린다는 재촉을 받으면서도 나는 다시 또 올 수 없는 비경의 촬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욕이라도 먹을 때는 먹는 거야. 난 이걸 보러 온 거야, 이걸 찍으러 온 거란 말야 하면서. 승리의 문(勝利門)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곳이 앙코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바로 문둥병왕 자야바르만 7세가 12세기에 세웠다는 '프레아칸(Preah Khan) 사원'이다. 프레아칸이란 성스러운 검(劒)이란 뜻으로 이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지은 불교 사원이다. 여기서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의 대결을 볼 수 있다. 앙코르 제국의 이 유적이 400년 동안 역사에 사라졌던 사이 바람에 실려 떨어진 팜나무 씨들이 그 거대한 나무로 자라서 그뿌리로 귀중한 사원을 파고들어 파괴하고 있었다. 벽은 갈라지고 천장은 무너지고 나무뿌리에 의해 폐허가 된 모습이었다. 이를 제거하고자 한 나무를 잘랐더니 자른 그 위에 싹이 다시 싹이 나서 포기하였다고-. 나무에 의해 파괴된 사원은 지금은 오히려 그 나무에 의지하여 사원이 지탱하여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나무뿌리에 싸여 있는 사원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화와 함께 덧없는 세월을 읽을 수 있어, 그렇지 않은 사원보다 더 관광객의 카메라 셔터 소리를 요란하게 하는 세계적 관광 명소가 되었다. 가슴을 치면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사원 내 조그맣게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장난삼아 가슴을 치며 오전 관광을 끝내었다. 이제 가자. 앙코르왓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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