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캄보디아 기행

ilman 2012. 12. 18. 10:15

 캄보디아(Cambodia)란 어떤 나라인가

  캄보디아는 한반도의 4/5인 181,035㎦에 인구 1,100만 명이 사는 나라다. 국민 소득이 겨우 330불정도 되는 아시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다.
평균수명이 겨우 50세도 못 미치는 것은 도시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의료 시설이 전무하다 싶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면 몰핀(마약)을 먹는다. 농촌 마을 어디서도 대마초를 누구나 쉽게 구할 수가 있다. 그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입원할 정도의 병자가 생기면 이웃나라 태국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라오스처럼 캄보디아 화폐 릴(Reel)보다 태국 화폐 바트(Bait)를 더 선호한다.

캄보디아는 서쪽에 태국, 북쪽에 라오스, 동남쪽에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태국과 베트남의 침입과 지배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슬픈 일은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알려진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뼈저린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1966년에 제1회 아시안게임이 열렸을 정도로 옛날에는 우리보다 더 잘 살던 나라였으나, 그 동안의 전쟁과 잦은 내전으로 인하여 1970년부터 국가 발전이 멈추어 버려서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난한 나라 속에 속하고 말았다.

지금도 국토 전역에서는 총칼을 갖고 있는 반대파 무리가 있고, 전쟁 후유증으로 지뢰를 조심해야 하는 나라다.

캄보디아(Cambodia)는 세계에서 AIDS 증가율이 세계 최고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국민들의 낮은 교육 수준으로 인하여 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서다.

  캄보디아 민족은 크메르족이 90%로 9세기부터 사용하던 국명은 '캄푸치아'였다.

캄푸치아(Kampuchea)는 20세기 침략해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캄푸치아를 불어로 '캄보츠', 영어로는 '캄보디아'로 읽히어 캄보디아가 되었다.

캄보디아 지도를 보면 호주와 비슷하게 생겼다.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선을 긋던 메콩 강이 캄보디아 남동부의 '캄푸차 평원' 중앙을 뚫고 흘러가며 만들어 놓은 비옥한 평원 국가이다.

남쪽을 향하여 비잉 북동서 삼면으로 둘러싼 산지가 중앙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거기서 흘러내리는 모든 강이 움푹 들어간 중앙 호수 톤레샵(Tole Sap)에 모여든다.

그렇게 형성된 이 호수의 지름이 자그마치 400리로, 160km나 되는 바다 같은 호수를 이룬다.

그래서 이름도 이 나라 말로 대호수(大湖水)라는 의미의 톤레삽(Tole Sap)이 되었다.

만약 그 동안 불행한 전쟁과 내란만 없었다면, 메콩 강과 톤레삽으로 형성된 이 평원에서의 3~5 기작(期作)의 농사와 어업만으로도, 아시아의 낙원 중에 낙원에 해당되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프놈펜의 가이드(guide)

프놈펜(Phnom Penh) 공항도 하노이나 라오스와 같이 초라하였다. 그 넓이와 시설은 물론 비행기의 수(數)로도 그러하였다.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문에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 좌변기 세면대 위에 올라앉은 모습을 그려 놓고 ×표를 해 놓은 것이다. 한 마디로 캄보디아 생활수준이 옛날 우리나라 1960년대 이전임을 알게 하여 주는 것이다.

프놈펜에서 만난 가이드는 ‘보시면 되겠습니다.'나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를 말끝마다 붙이는 30대 초반의 우리 한국 청년 서(徐)씨였다  .

베트남의 어눌한 가이드에서 실망하였었고, 라오스에서 만난 라오스인 가이드는 남방예의지국의 양반 중의 양반인 라오스 사람인데다가, 서투른 영어로 말하고, 그걸 서울에서 함께 간 가이드가 통역하여 말하는 것이라 인터벌도 있어 한계가 있었는데, 캄보디아에서 만난 가이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에다 여행 내내 한 번도 앉지 않고 쉴 새 없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여 주었다. 그 동안 가이드에 목말랐던 우리에게는 단비와 같은 사람이었다.

 

"옛날 이곳 메콩 강이 큰비로 강물이 범람하였는데, 펜(Penh)이란 부인이 있어 떠내려가는 큰 나무 속에 불상(佛像) 3을 건져 이 언덕 위에 사원을 짓고 모셨습니다. 캄보디아어로 언덕이란 뜻이 프놈(Phnom)이니까 프놈펜(Phnom Phonh)의 어원이 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그 ‘왓 프놈'(Wat Phnom)은 그 이름처럼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입구에서부터 중앙 탑을 빙 둘러 있는 계단에 우리가 좋아하는 용처

럼, 그들이 좋아하는 나가(Naga:코부라) 조각들이 서 있다.

그 뜰에는 원숭이 가족이 햇볕에 놀고 있는데, 층계 한쪽에서는 한 여자 아이가 새장을 들고 새를 팔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제비였다.

한 가족이 식구 수만큼 사 가지고 ‘뭐이, 삐, 바이.'(하나, 둘, 셋) 하면서 동시에 휘익 날려 주고 있다. 방생하며 복을 빌고 있는 것이다.

그렇구나, 한국에서 가을이 깊어지면 제비가 강남으로 간다더니, 그 강남 이 바로 여기였었구나. 시내 구경에서도 ‘보시면 되겠습니다.' 가이드의 친절한 안내는 계속되었다.

 

"캄보디아에서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데이트는 없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신랑은 결혼 비용으로는 300만원 정도 준비해야 하고, 여자 집에 가서 결혼 허락을 받아야 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결혼하면 3년 정도 데릴사위 노릇을 하며 처가에서 사는데 능력이 없으면 평생 처가살이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자전거 냉차 장수가 보이죠? 여기서는 병째로 사 먹으면 비싸서, 비닐봉지에 저렇게 넣어서 빨대와 함께 사 먹는다 것을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캄보디아에 와서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캄보디아에서는 공짜가 없습니다.
식당의 물도 사 먹어야 합니다. 수돗물을 먹으면 탈이 납니다. 대마초나 아편도 길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가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나라는 공무원 월급이 50불 내외밖에 안 되지만, 정부 고관이나 경찰 간부나 고위층 군인은 수십만 달러 저택에 살고 있고, 그들의 아들은 우리나라 강남의 오렌지 족처럼 호텔을 전전하며 유흥비를 헌 칼 쓰듯이 쓰며 배회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15세 선장에게 목숨을 맡기고/ 톤레삽 호수에서 

 버스에서 내려 톤레삽 호수의 노을을 구경하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가며 시엡립 강가(Siem Reap River) 양안을 바라보니, 그래도 그곳은 부자 축에 든다는, 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가옥들이 많았다.
해머라는 그물 침대가 거기에도 있고, 방 속에 TV도 있구나, 할 무렵 우리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국땅에서 적어도 2시간 이상이나 그 위험하다는 바다 같은 드넓은 물위, 5명 정도밖에 탈 수 없는 이 작고 좁은 배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야 할 사람이 어린이 선장이 아닌가.

여행 중이라 모든 귀중품을 갖고서, 우리들의 목숨을 의탁한 이 배의 선장이 초등학교 6학년의 15살 소년이었고, 그를 돕는 장래에 예비 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는 14살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일몰 구경을 포기할망정, 나는 이렇게 무모한 승객이 되지 않았을 꺼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우리 모두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을까?
아무리, 로마에 가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폴폿 정권이 지식인들을 다 죽였다더니 무능하고 무식한 놈만 남아서 그런가. 캄보디아 인이 게으르다더니 그래서 아이들에게 맡기고 어른들은 낮잠이나 자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까 보니 어른들은 아랫도리만 가리고 다니더니 옷이 없어서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선주(船主)란 놈이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하는 약은 수작의 짓거리이리라 생각하니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배가 뒤집힌다면 나는 인천 바닷가에서 태어난 짠물 출생이라, 수영에서 한 가닥 하지만 이 디지털 카메라는 어떻게 한다? 이 캠코더는? 그보다 수영 못하는 우리의 동행들은 어떻게 하지?

하는 사이 이 쪼고만 배는 사방이 수평선뿐인 망망대강(茫茫大江) 속에 닻을 내리려 한다.

해가 지려면 아직 30여분 남았다. 마침 수상 음식점이 있다기에 들렀더니 고기를 잡아 올린다는 독수리 모양의 가마우지가 대 여섯 마리 묶여 있고, 객을 맞이하기 위해 키우는 2m 이상의 커다란 비단구렁이를 꺼내어 목에 두르며 사진을 찍으라 한다.

앙코르 비어(매주)를 2불씩 내고 먹으면, 안주로 여기서 잡히는 새우를 얼마든지 준다 하니, 술을 좋아하는 나 일만(一萬)에게는 천국의 복음 같은 소리라. 낙조에 늦을 새라 서둘러 세 깡이나 들이 마셨다. 그 짭짤한 붉은 공짜 새우를 안주하여.

  해가 진다. 바다 같은 수평선 토렌삽호에 붉은 노을이 한창이다.
자연은 이리도 광활하고, 저리도 아름다운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세상은 도랑보다 개천보다 적은 가난 속에 묶여 있구나. 저녁은 캄보디아 무희들의 춤을 보며 뷔페에서 하였다. 무희는 물론 거기서 써빙 하는 웨이터들이 이 나라에서는 성공한 사람이란다. 
이 캄캄한 밤에 그 호숫가에서 새들처럼 어둠 속에 잠들고 있을 수상 가옥 난민촌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려서다.

 

 새같이 사는 사람들/ 톤레삽  

 프놈펜에서 앙코르 유적지를 가는 방법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배로 톤레삽 호수를 거슬러 올라가거나, 육로로 가거나, 비행기로 가는 것이다.

그 6~7시간 이상 걸리는 것을 우리는 우리나라 시외버스처럼 지정 좌석도 없는 비행기를 타고 45분 만에 씨엠리엡(Siem Reap)에 도착하였다.
씨엠(Siem)은 '태국'을 일컫는 말이요, 리엡(Reap)은 영어로 '획득하다'라는 뜻이고 보면 씨엠리엡(Siem Reap)은 태국이 점령했던 곳이라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에,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최고의 유적지라는 앙코르(Angkor)는 내일 보기로 하고 캄보디아의 젖줄이 되는 톤레삽 호수의 일몰을 보러 가고 있다.

호수로 이어지는 씨엠리엡 수로 둑길을 버스로 30여분, 배로 10여분을 가는데, 도중 둑 가에 있는 집들은 6.25때 보던 판잣집이 아니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문도 없어 휑하니 안이 들여다보이는 집들은 우기(雨期)를 대비하기 위해 대부분 둑보다 높이 2m 내외의 말뚝 위에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새 집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 여기는 열대지방이라 태풍이 생성되는 곳이어서 장마가 없고, 여름 우기(雨期)에도 한국처럼 종일 열심히 내리는 비가 아니라 2~3시간 오락가락하다가 그치는 비였다.

 

게다가 겨울 갈수기(渴水期)에는 아래로 흘러가서 메콩 강과 합류한다. 그러다가 여름 우기(雨期)에 접어들어 메콩 강 수위가 높아지면 메콩 강 물은 톤레삽호로 역류하여 자동적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면 톤레삽 호수는 넓이가 배나 늘어나 유량조절을 하여 주는 천혜의 자연 댐의 역할을 하여 준다.
그래서 동남아시아에서 6개국을 흘러오는 제일 긴 강인 메콩 강의 모든 물고기가 톤레삽호로 모이게 된다.

이 호수에 사는 물고기는  800여종이나 되어 캄보디아인의 식단에 없어서는 안 될 해산물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톤레삽호의 담수어(淡水魚)는 1㎢ 당 8t으로 세계 어느 나라 강보다 많아서 이 나라 경제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새들은 모여 산다. 날개, 부리 하나만으로 물고기를 잡아먹으러 주로 강가에서 모여 산다.

그 새들이 모여 사는 열대 부동항이 캄보디아 씨엠리입호(湖)다.

이 호수에 새보다 더 많이 사는 것이 물론 물고기다. 새에게 잡혀 먹히고, 어부에게 잡혀 먹히고, 큰 물고기에게 잡혀 먹히면서도 물고기가 이렇게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새끼를 많이 낳는 것이다. 그래서 장어인 경우 새끼를 한번에 20~30만 마리, 대구인 경우 120만 마리 알을 낳는다 하지 않던가.

수상 가옥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먼 조상들은 제왕의 무덤인 앙코르 유적을 쌓는데 하루 10만 명씩 동원되어 갔고, 전쟁과 내란에서는 총받이로 싸우다 갔다. 캄보디아인들은 폴폿의 학살까지 겪은 불쌍한 물고기들, 포수 앞의 새였다.

그들이 살아남는 것이 무엇일까? 물고기처럼 계속 자식을 낳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들은 새집보다도 더 초라하였다. 옷으로 타월 같은 것으로 아래만 가리고 사는 사람들이나, 찢어진 옷 그것도 못 입고 맨발로 뛰놀거나, 흙탕물에서 수영하며 놀고 있는 난민촌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 눈에는 그들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새였다.

물고기를 잡아먹기 위해 강가에 모여든 새들이었다. 부리 하나 날개 하나만 가지고.

천진난만하게 재잘거리며 웃고 있는 것은 새들의 나직한 울음소리로 강가에 갇혀 있는 새와 같았다. 영원히 날 수 없는 새, 내일이 없는 불쌍한 새였다.  

물고기 잡아먹고

새처럼 살아가요

날개 하나 부리 하나로

새집 짓고 살듯이.

내일이

있다는 것이

사치와 같은 걸요.

호수에 해가 뜨면

새처럼 눈을 뜨고

*톤레샵(Tonle Sap) 노을 보며

새들처럼 잠들지요.

가난이

제일 큰 재산인데

무슨 걱정 또 있겠어요.

                                                                                - 새

 

 

   었다.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참상 /캄보디아 (1) 
 호텔에서 일박하고 우리는 프놈펜에서 15km 떨어진 킬링필드(Killing Field) 현장으로 간다. 캄보디아인들이 가기를 가장 꺼리는 곳이다.
거기 보관된 유해나 유품 중에는 폴포드 이엥사리 정권의 쿠메르즈에 의해 죄없이 처형되고 학살된 230만 그 유해 중에서, 자기의 가족들을 혹시나 만나볼지도 모르는 꿈직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캄보디아인들을 더 열불 나게 하는 것은 이런 비극의 현장을 한국인이 미워하는 일본인보다, 캄보디아인들이 10배 이상을 더 미워하며 사는 베트남인들에 의하여 그 학살 현장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1984년에 아카데미 3개 부문의 수상영화 '킬링필드(Killing Field 감독 Rond Joff)에서 남주연상을 받았던 쿠메르즈 군의 살육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느골(Dr.Haing S .Ngor)은 내란 중에 잃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 제 조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처님께 감사 드립니다."
킬링필드로 가는 길은 인구 1백만 명이 산다고 하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치고는 너무 초라한 붉은 황톳빛 길이었다.
그 거리 교통의 모습은 하노이와 비엔티엔의 그 중간 정도여서, 한적하지도 아주 복잡하지도 아니한 편이었다.

시내 중심부를 제외하면 가로등 중앙선도 없었다. 그 많은 오토바이 중에 동아일보 어느 지국이라 쓴 오토바이가 보인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저런 것들은 한국에서 도둑 맞은 것이 이 나라에서 저렇게 버젓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모든 거리의 길가에 노점이 진을 치고 있었고, 다리를 지날 때 보니 강을 따라 우리가 6.25때 보았던 기나긴 빈민 판자촌이 계속 이어진다.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가이었다.
국도를 벗어나자 아스팔트길은 그친다. 차가 통과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다리를 간신히 건너고 나니, 우기(雨氣)에는 도로가 나빠 차량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붉은 황톳길이 나타난다.
그럴 경우에는 이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영업용 오토바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낮 12시쯤 학살 현장이 가까워 오자 초등학교 학생들이 걸어서 또는 자전거를 타고 몰려 간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이라는데, 그 체구가 나이에 비하여 우리 나라 어린이보다 훨씬 적었다.
이곳 선생님은 월급이 50불 내외여서 그것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담임선생은 출근길에 아이들이 먹을 과자, 사탕, 빵, 학용품 등을 사다가 교실 바닥에다 주욱 늘어놓는다. 학생들에게 팔기 위해서다.

선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것보다 그 물건을 파는 일이요, 학생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부보다 그걸 사먹고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자랑하는 일이란다.
공산주의 국가라서, 이 나라에서도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이지만 초등학교라도 이렇게 다니는 학생들은 행복한 가정의 부유한 소수일 뿐이다. 관광객에게 구걸하여 돈을 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에, 부모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을 꺼린다. 배운 사람이라 하여 죽여 버리려고 동족이 겨누던 총부리는, 이 불쌍한 국민들의 교육열마저 빼앗아 가버려서, 캄보디아의 장래마저 까맣게 죽여버렸다.
그래서 그런가 캄보디아보다도 못산다는 동방예의지국인 양반의 나라 라오스에서는 보기 드물던 동냥하는 아이들이, 여기서는 차가 서기 무섭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까만 손을 내민다.

대개 10살 내외의 어린아이들의 오른 팔에는 2살 내외의 잠들어 있는 어린 동생을 안고 있는 아이가 많다.
얼마나 팔이 아플까? 그러나 이곳 아이들은 베트남 거지 아동처럼 제것 달라고 떼쓰는 식의 끈질긴 것이 아니고, 낮고 가여운 소리로 동정을 호소하는 순박함이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한 아이에게 1불을 주었더니 벌떼 같이 모여드는데, 나에게 돈을 받은 아이가 뒤에서 저 사람이라고 나를 겨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프놈펜에서 왕궁에 들러, 1,125 kg의 은으로 만든 블록 5,329개로 꾸며 놓았다는 왕궁 전용 사원 실버 파고다(Silver Pagoda)를 보고 나오다 만난 지뢰에 손발이 잘린 걸인을 그냥 지나쳤더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이 욕설이었다. 나도 욕이 나온다. 빌어먹을 자격도 없는 놈들 같으니-.
1975년 론놀 정권을 중공의 도움으로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한 수상 폴포트와 부수상 겸 외상 이엥사리의 '민주캄퓨치아' 정권은 지나친 급진정책을 썼다.
폴포트 정권의 잘못은 그들은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적 틀을 한번에 개조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로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우직하게도 밀고 나아갔다.
첫째로 당시 폴포드의 주구(走拘)노릇을 했던 경찰들은 앞세워 농본주의(農本主義)적 공동체 정책이라 하여 전인구를 국토 각곳에 재배치시키었다. 수백만 도시인을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논농사에 또는 관개수로망(灌漑水路網) 건설과 유지를 위해 강제로 농촌에 배치시키는 바람에 전국의 도시 지역은 공백화 되어 버렸다.
캄보디아 전국토는 강제수용소로 바뀌어 하루 12시간~14시간 일해야 했다. 이로 인하여 그 3년 동안 기근 질병 학살 처형으로 노약자, 불구자 등이 고된 농사일을 견뎌내지 못하여 죽어갔다.
둘째 '민주 캄퓨차에 유해한 종교는 금지한다'고 하여 종교활동을 금지하였다. 국민 90%가 믿는 불교사원을 파괴하였고 승려(僧侶)들의 환속(還俗)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당의 승낙 없이는 연애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셋째 불평을 막기 위하여 매스컴은 거의 폐지하였다. 국영 라디오 '민주 캄푸차의 소리'가 유일한 선전기관일 뿐이었다.
넷째 구 정권의 공무원과 군인 등 그 중에서도 배운 사람들을 골라, 반대 세력이라 하여 대량 학살하였다.
다섯째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지식인들로부터 나온다 하여, 인텔리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학생까지 포함하여 죽였다. 그래서 지금 캄보디아에는 성인들의 50%가 문맹이다. 무식한 사람들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지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라디오방 TV 방, 미장원, 자전거, 오토바이가게를 글 대신 그림을 그려 가게 앞에 세워놓는 진기한 모습을 어디서나 만나게 된다.
드디어 '쯔응 아익(Cheoung Ek)킬링필드 추모탑'에 이르렀다. 1988년에 세운 캄보디아 전통양식의 위령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각국에 있는 독립탑이나 보통의 기념탑 같았는데, 가까이 다가가 좁은 회랑을 돌면서 유리창을 통하여 각층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경악하였다. 난생 처음 바라보는 헤일 수 없이 많은 해골의 무덤 앞에서 우리가 꿈속에 서있는가, 영화 속에 서있는가 의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