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별장(別莊) (2)
서울 갔다가 돌아오는 귀가 길에 수도권 전철 3호선을 타려고 기다리다 보면 '구파발행'과 종점인 '대화역행' 둘 중 하나가 온다. 고양시 일산은 1시간 이상 먼 거리라서 가급적 앉아 가고 싶어서 구파발행이 오면 그냥 보내고 다음에 오는 대화행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주저 없이 구파발행을 고집한다. 다음 차를 타려고 거기서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차를 타고 우선 앉아 가는 편이 더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화행 전철이라도 앉아 간다는 보장도 없는데다가, 구파발행은 앉아 갈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가급적 구파발 도달하기 직전 역이나 그 전전 역에서 내린다. 앉아갈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거기서 젊고 고운 목소리를 가진 80세 가까운 얼굴을 한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는 주엽역 가는데 앉아 가려고 구파발 전 역에 내렸어요.”
“저와 같은 생각이네요. 저는 대화역까지 가요. 녹번동이 집인데, 오늘같이 무더운 날에는 시원한 전철을 타고 종착역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제 일과랍니다.”
집 가까운 주엽역에서 하차하려다 보니 그 노인이 앉아 있어 말을 걸어 보았다.
“저와 같이 내리시지 않으실래요? 함께 약주를 한 잔 하시거나,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적당한 장소가 있는데요.”
노인은 주저하지 않고 나를 따라 내렸다.
이런 경우 따라나서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다. 아주 가난한 사람이거나, 자기도 한 잔 살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중산층이다. 부유한 사람을 만나 이런 수작 부렸다가는 나는 영락없는 미친놈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럴 때마다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그래 난 미친놈이다. ’미친놈(狂人)‘이 아니라 미친놈(美親者)란 말이다.’
“저는 소띠로 ilman(一萬)이라 합니다. 술을 하도 좋아해서 만원 어치만 마시자 해서 지은 아호(雅號)지요.
술로부터 몸과 지갑을 지키기 위해서였지요.”
“그럼 제 형이 되시겠네요. 저는 범띠로 74세인 최 xx이라 합니다. 수성 최가예요.”
우리는 노점상에게서 술안주와 요기를 겸하여 먹음직한 순대와 머리고기를 3,000원어치 사 들고 나의 아파트를 향하였다.
“ 저 주공 아파트 있지요? 저기에다 정년(停年)할 무렵 소형 아파트 한 채를 사놓았어요. 거기서 나오는 월세로 저의 노후의 용돈에 보태 쓰려고요. 그러다가 된통 임자를 만났어요. 6년이나 월세를 밀려가며 나를 고생시키는 사람을요.
작년에는 10개월이나 월세를 밀리고 나가지 않고 버티는 임자를 보증금이 소진되기 전에 서둘러 명도소송(明渡訴訟)을 하여 3번의 재판 끝에 8개월만에 그분들을 쫓아내고 간신히 되찾은 집이지요.
월세 받기에 너무 지쳐서 월세 놓기를 포기하고 팔려고 내놓았어요. 요즈음은 불경기라서 당분간은 지금처럼 ‘나의 별장’처럼 쓰고 있지요.”
나를 따라오는 최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쩔뚝거리는 발길이 몹시 느렸다.
“몇 년 전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승용차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기사가 20만 원을 주면서 합의하자고 해서 돈 욕심에 얼뜬 합의서(合意書)에 도장을 찍어 주었더니 그 후유증으로 1,000만 원이나 들여 병원 신세를 지고도 이렇게 병신이 되고 말았어요.
그보다 더 억울한 건요 그까짓 돈에 합의서를 써 주었다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지금까지 병신 취급하며 구박당하는 거예요. 진짜 병신 된 사람을 보고.“
“그건 주위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교통사고에서 후유증이 있으면 합의와 관계없이 치료비를 받아낼 수 있는 법을 가족들도 몰랐으니까요.”
“집이 소형(小型)이라 좁습니다.”
“ 아닙니다. 우리 집보다는 천국인데요. 탁 터진 전망이나 맞바람 쳐서 시원한 것을 보니-.
우리 집은 3,400만 원에 전세를 든 반지하집에요. 그래도 제 처지에서는 살 만한 집인데 내년에 만기가 되면 집주인이 전셋값을 올려 달라고 할 것 같아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도 월세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요.”
“그 돈은 세검정 S 아파트 경비로 있을 때 저축한 돈이지요. 그때 월 수입이 60만이었던 것 같아요.”
“ 부인께서 알뜰 주부셨나 보군요. 용돈은 자식한테 타 쓰시겠네요.”
“자식들도 부모 도와줄 여유가 없어요. 1남 3녀 중에 제 집 지니고 사는 자식이 강남에서 사는 막내딸뿐인 걸요. 사위가 재별 S회사에 다니는 덕분이죠.
제 용돈은요 나라에서 가난한 노인에게 매달 주는 9만 원이 전부예요. 아내도 마찬 가지구요.”
“저는 이발 한 번 하는데만 1만 2천 원이나 들던데-.”
“ 교회 교인들이 자원봉사로 머리를 무료로 깎아 주는 곳이 있어요.
일산 킨텍스에 갔더니 그날은 밥도 주고, 안마도 해주고, 구두도 닦아 주니까 거기서 만난 어느 노인이 말하더군요. ‘전철도 공짜, 점심도 공짜, 우리 노인들에게 무슨 돈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늘 점심은 어디서 하셨어요."
“오늘은요. 안국역 근처 절(조계사) 무료급식소에서 했어요. 거기서는 대여섯 개 조로 나누어 점심을 주는데 1개 조에 200 명예요. 점심 내용도 실하구요.
이 외에도 서울에는 무료급식소가 많아요. 청량리 다리 밑(?)도 있구요, 동국대학 근처(장충공원)에 갔더니 갈비탕도 주던데요.”
마침 집에 친구 대접하다 남은 3년 담근 더덕주가 있어 드렸더니 홀짝홀짝 잘도 마신다.
술을 못 마신다 하더니 마시는 것을 보니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보다 술 마실 용돈이 부족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음식 중에 술보다 비싼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난다.
“핸드폰 있으세요?”
“ 없어요. 있었는데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환자복 주머니에 넣은 것을 그냥 빨래 통에 넣었다고 해서 못 찾고 말았어요. 다시 또 구하자니 요금도 많이 들어서-. 제 처는 핸드폰이 있어요. ”
“부인이 걱정하실 텐데 전화하실래요?”
내 전화를 건네 주려하였더니 최노인은 지갑에 고이 간직한 메모지를 꺼내 준다.
치매 같지 않은데 아내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송 XX 여사’라는 메모지는 예쁜 여자 글씨체다. 세 딸 중에 한 분이 써 준 모양이다.
그의 아내도 우리 아내와 같은 뱀띠로 작년에 고희를 지낸 71세라 한다.
“지금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슨 일까요?”
“어머니는 제가 14살 때, 아버지는 18살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중학교도 중퇴하고 말았어요.
고향인 포천군 이동면에서 나고 자랐는데 거기서 결혼하고 살다 보니 ‘ 이 시골에서 계속 살다가는 자식 공부 하나 제대로 못 시키겠구나!’ 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지요. 못 배운 것이 무엇보다 한이었거든요.
조실부모하고 먹고살아가기가 힘들다 보니 조상에 대하여 잘 몰라요.
시조 할아버지 이름(諱)이 무언지, 우리 자식이 그 몇 대 손인지도 몰라요. 죽기 전에 그걸 알아 자식들에게 가르쳐 죽어야겠는데-. “
“제가 알아서 가능한 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그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을 적다 보니 함께 라면 끓여 먹자던 약속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 나의 별장에는 나 혼자 끓여 먹을 코펠과 버너뿐 함께할 그릇이 부족하였다.
“이 건 제가 끓여 먹으려고 사놓은 고급 나면이니 하나 가져가서 맛보실래요?”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들려주니 한 마디 한다.
“기왕 주려거든 2개를 주지 그랬어요. 그분 아내와 오순도순 함께 먹게.”
최 노인은 세 번째로 나의 별장에 초대받은 손님이다.
첫 번째는 ‘호수공원 세계꽃전시회’에 촬영차 온 ‘KCC창작가협회’ 우리 친구들이었고, 두 번째 백운대를 3,600번 오른 술친구인 산악인 하정우 님에 이어 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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