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선물
금년 들어 가장 추웠던 초겨울 저녁 누가 벨을 누른다. 누구일까?
등산가며, 시인이신 하정우 님이셨다.
백운대를 금년 들어 3,700번 이상 등반 기록을 세우신 분, 고시 4회 출신, 국회전문위원을 지내신 분, 산시(山詩) '애산송(愛山頌)'의 저자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 나보다 5년 연배이신 분이다.
나처럼 생맥주를 유난히 즐겨하시어 종종 우린 술자리를 함께 하였다. 우리는 다 산(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둘이 만나 나누는 대화 화제는 언제나 산(山)이었다. 우리 아파트 관리실 앞에서 전화를 하셨는데 어디 계신지 영 안 보이더니 키가 넘는 액자를 들고 어둠을 뚫고 나타나신다. 확인 전화를 하신 후에 몸소 가지러 갔다 오신 것이었다.
일전에 서예 작품을 주신다는 말을 그냥 무심히 들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려 하시는 모양이다.
몇 년 전에도 그림 한 폭을 얻고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귀한 것이라서 자식들에게 주려고 했더니 별로 관심이 없어한다고 개탄하시던 그 서예작품인가 보다. 인터넷을 켜고 앉아 그 글을 쓴 서예가를 검색하여 보니 다음과 같다.
-서예가 박태준(朴泰俊)은 고향이 제주도로 아호(雅號)가 海丁 , 海汀 , 有田 , 一西 , 守石軒主人. 2000년 6월 25일 작고하실 때까지 주옥같은 글을 곳곳에 남기신 분이다.
국전입선 15회(특선 3회), 국전 초대작가 출품 5회, 국전초대작가, 중앙서예공모전 대상, 대통령상 수상. 국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셨다.
이 액자를 주신 하 정우 선생께서는 행정가로 국회에서 근무하실 때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서예지도를 담당하시던 당시의 해정(海丁) 선생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이라 한다.
글씨도 글씨려니와 액자가 예사롭지 않은 고급인 것을 보면 소장자가 고가를 들여 액자를 하여 소중히 보관하던 것 같은데 이렇게 아낌없이 주시는 것을 보면 지금 막 떨어져 내리는 낙엽처럼 무언가 준비하시는 거 아닌가 해서 숙연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그동안 진묵대사(震默大師)의 글을 걸었던 그 자리에 액자를 걸어놓고 보니 초서(草書)인가 행서(行書)인가로 쓴 글씨가 살아서 꿈틀대는 것 같다. 획 하나마다 가는 실선이 고운 눈썹같이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자로 이어지는 맺음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뜻을 강조하는 글자에서 커다란 획이 되다가 다시 작아지는 필력은 우리가 바다에서 파도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하고 그 소리를 듣는 듯하다.
새 소리는 우리가 그 뜻을 몰라도 듣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서도에서는 그 내용을 욕심내는 것이 인지상정이라서 그 내용을 알고 싶어 한한대자전, 서도대자전을 꺼내놓고 보지만 초서, 행서, 예서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서도의 문외한이라 답답하기 그지없어서, 문학사이트 '한국수필가작가회' 인터넷 방에 혹시나 해서 'sos'로 도움을 청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여수(麗水)의 임병식 수필가께서 명쾌한 답을 보내 주셨다. 글자만 찾아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역시(譯詩)까지 보내 주셨다.
다시 또 서도대사전을 뒤져보며 소란을 피우다가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그런 글자였구나.
그렇게 얻은 한시와 그 풀이를 이렇게 정리하여 보았다.
家 住 碧 山 岑(가주벽산잠)
從 來 有 寶 琴(종래유보금)
不 妨 彈 一 曲 (불방탄일곡)
抵 是 少 知 音(저시소지음)
- 朴 海 書
푸른 산기슭에 살면서
예부터 지녀온 거문고 안고
한 곡조 타보면 꺼릴 것 없겠지만
이 풍류 알아 줄 이 얼마나 되리.
-임병식 풀이 ilman 윤색
한강이 보이는 집에 낙조를 바라보면서, 인생의 오후를 살아가는 이 사람에게 귀한 분이 주신, 귀한 선물 서예 작품을 바라보며 약주 대접 드리면서 하 형께서 궁금해 하시던 이 시를 읊어보고 싶다.
그 서예가 분도 산을 즐겨 산처럼 사셨는가. 제주도 한라산 중턱 1,100고지에 산악인 고창돈기념비에 쓰인 글이 그 필체를 자랑하고 있다.
추신: 이 글을 퇴고하는 지금은 2023년 세모,
두산 하정우 산악인 가신 지 벌써 지 5년여 세월이 흘러 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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