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길에서: 최종회(8) /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나의 장문(長文) '일본 속의 한국사 '는 여행 시 조선일보사에서 준 책의 일본문화연구소 조양옥 소장의 글 '오늘의 일본, 그 빛과 그림자'에 대한 독후감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조 소장은 일본어를 전공하고 조선, 국민일보 도쿄 특파원을 거치면서 평생을 두고 일본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남긴 분으로 우리들의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인 일본 여행을 위해서 심도 깊은 글을 '나누어준 책'에 실어 준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의 생각을 두고 일본에 문외한인 내가 무슨 췌언(贅言)을 덧붙이랴.
*.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일본 정신
'화혼양재(和魂洋才)'란 1868년 明治維新(메이지유신)이래 '일본정신+서양기술=和魂洋才'가 일본의 슬로건이다.
일본이 이렇듯 서양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일본을 살지우던 그 황금같이 귀중한 그 시기에, 우리의 대원군(大院君)은 우리나라를 서구문명으로부터 꼭꼭 닫아 놓은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조선과 통상하러 온 미 군함정과 오히려 일전(一戰)을 벌이며 망국의 길로 허송세월 할 때, 일본은 나날이 국력을 키우며 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일본(Japan)과 쿠바(Cuba) 두 나라는 둘 다 비슷한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져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쿠바(Cuba)의 건너편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렇다 할 고대 문명이 없었던 반면, 일본의 건너편인 한반도와 중국에는 뛰어난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곶감을 빼어먹듯이 알자배기만 쏙쏙 뽑아 가면 되었다.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 서문 일본 경제기웍청 장관 사카이야 다이치
이런 시각의 말은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미국의 에드윈 라이샤워의 글에도 나타난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서 자가(自家)의 약탕기에 넣고 달여 스승을 능가하는 문화 꽃을 피웠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서 배운 문물에다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루면서, 서구로 눈길을 돌려 서구 문물이 거세게 밀려올 때 실기(失機)하지 않고, 미국과 유럽에 108명의 사절단 등을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배워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일본으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해군은 영국군인, 육군은 독일군인에게 교육을 맡기고, 신식 교육은 미국식을 채택하였다.
인구 3,500만 명 시절에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국에서 전문가가 1만 명을 불러들여다가 조선이 영원히 따라올 수 없는 일본의 국력을 키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길준이 그 서구를 다녀와서 서구의 문물을 소개한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년)이 나온 갑오경장 무렵이었다.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을 배우되 거기에 창의를 더하여 새로운 일본 것을 만들어 내는 훌륭한 민족이기도 하였다.
그때 벌써 일본은 배움의 경지를 넘어서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껏 여름철이면 누구나가 찾는 쥘부채(摺扇)는 한반도를 통해 건너간 둥근부채를 발전시켜 접는 부채로 개발하여 합죽선(合竹扇)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메이지유신 10년이 지난 후 일본인들은 비누를 사용하고, 시계를 찼으며, '영국신사의 심벌'이라는 양산을 쓰기 시작했다. 그 양산을 꺾이고 접히는 간편 휴대품으로 환골탈태( 換骨奪胎)시켜 수출품으로 둔갑하여 유럽사람을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화가이며 사상가인 와타나베 가잔(度邊華山)의 '상인(商人) 정신' 또한 일본 정신의 치밀함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글이다. 이 글은 구구절절이 모든 분야에서 한국인(韓國人)도 배워서 지켜야 할 법도였다.
-첫째, 종업원보다 일찍 일어날 것.
둘째, 열 냥짜리 손님보다 백 푼짜리 손님을 더 소중히 대할 것.
셋째, 사간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러 온 손님은 사갈 때보다 더 정중히 대할 것.
넷째, 사업이 번창할수록 절약할 것.
다섯째, 한 푼이라도 지출이 있을 때에는 꼭 장부에 기입할 것.
여섯째, 항상 창업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지닐 것.
일곱째, 동일 업종의 가게가 근처에 문을 열어도 당당하게 선의의 경쟁을 할 것.
여덟째 종업원이 독립하면 3년 동안 자금 지원을 해줄 것.
*. 일본의 교육
-'모든 마을에 불학(不學)의 가정이 없고, 모든 가정에 불학의 인간이 없도록 한다.'고 일본 정부가 선언한 때가 1872년으로 한국에서는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쇄국정치 시절이었다. 신미양요란 개화기 교역하러 미국과 강화도에서 일전을 벌인 사건이었다.
일본은 태평양 패전 후 반 세기만에 유카와 히테키(湯川秀樹)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래 12개의 노벨상을 받았다.
21세기 일본 정부는 '향후 50년 동안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고 야무진 꿈을 밝히고 있을 때다.
그런 일본의 저력은 현재 170여 개의 국공립대학, 500개에 육박하는 사립대학과 그와 비슷한 수의 2년제 단기 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거기 비해 한국은 김정일을 만났다고 해서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상(平和賞) 하나가 고작이었다.
일본을 시찰한 중국인들도 말하고 있었다.
-중국과학원 연구팀이 발표한 '중국 현대화 보고 2005'에는 중국이 일본과 2001년을 기준으로 50년의 차이가 난다.
그걸 조소장은 재일 작가 김소운(金素雲)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 하나를 언제까지나 버리지 못하는 그런 옹졸한 백성은 되고 싶지 않다.
허나, 알고도 너그러이 잊어버리는 것과, 흐지부지 소가지 없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치 뜻이 다르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조상 신라, 백제의 얼이, 일본에 속에 있다고 이번 우리들의 여행 같이 여러 곳을 다니며 흥분해 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의 컴풀렉스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자랑해온 새마을 운동, 향토예비군, 유신 등 우리 생활에서 일본의 영향은 수없이 많다.
그래서 일본을 볼 때는 과거를 통하여 침략의 역사를 보되. 현재를 통하여서는 우리들이 도달하여야 할, 앞서간 선진국의 경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는데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귀국길 '후지마루' 선상에서
'용서(容恕)할 수 없는 것을
용서(容恕)하는 것이 용서(容恕)'라지만
강한 자는 용서(容恕)를 빌지 않고도 잘 사는 법이다
그 옛날
이 나라가 한창 배워야 할 시절의 허송세월 때문에
얼마나 큰 서러운 고개를 울며 살아온 민족이던가 .
역경과 가난의 고개도 넘으면 재산이러니
슬픈 과거는 잊지도,
탓하지도 말자.
과거(過去)는 지나간 현재러니
다가올 현재를 아름답게 열어
찬란한 오늘을 살고 있는 일본인들도 부러워 하게.
'Japan이
용서(容恕)를 빌지 않더라도
용서(容恕)를 용서(容恕)하는 Korea'가 되자.
부끄러운 어제 위에 우뚝 서서
영광스런 현재를 가꾸어 가면서-.
*. 귀국선(歸國船)에서
쿠르즈 '후지마루호'로 귀국할 때
눈물을 어리게 하던
일인이 부라스벤드와 소방정(消防艇)의 분수로
흔드는 손길의 '사욘 나라!'
거기엔
임진왜란(壬辰倭亂)도
정유재란(丁酉再亂)도 없는
친절한 이웃나라
일본(日本)이 살아 있더라.
-7호차 611호실
ilman 성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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