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man의 세계여행(1)

필리핀 배낭여행(5)/ 리잘공원과 인트라무로스

ilman 2021. 12. 10. 11:15

필리핀 배낭여행(5)/ 최종회 라잘공원과 인트라무로스
*. 만나지 말았어야 할 한국인

드디어 어제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글 간판이 즐비한 말라테(Malate)에 도착하여 신나는 마음으로 막 코너를 돌아서려는데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한국어로..
며칠만에 들어 보는 한국어인가. 그것도 이국에서 처음 들어보는 한국말이니 얼마나 반갑던지-. 드디어 나는 한국인을 만난 것이다.
‘낯선 이가 먼저 말을 걸거든 일단 멀리 하라’는 말도 까맣게 잊은 체 반갑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말이 심각하다.
"저는요, 마닐라의 오직 하나의 한국인 홈리스입니다. 며칠을 굶다 보니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일인지 알겠어요 굶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것도 요즈음 실감하게 되네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 약한 나는 기왕이면 그를 도우며 나의 마닐라 시티 투어나 하자 하고 일정을 바꾸게 되었다.
마침 나도 식사 전이라서 K를 따라 쇠고기 국물이 맛있다는 손수레 노점 하는 그의 친구를 찾아갔다.
식사 후 그는 남쪽 나라에서 맛볼 수 있는 갖가지 간이 음식을 찾아 먹게 하여 주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 화폐의 계산에 어두운 나 대신 잔돈은 그에 의해 지불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리잘공원은 찾았지만 몇 군데 둘러 보더니 12시가 지나자 아무리 말해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그 시간은 너무 더워서 모두 다 쉬니까 시원한데 가서 쉬는 게 상책이라면서-.
하릴없이 우리는 에어컨이 있는 맥주 집을 찾아 맥주와 치킨을 시켰더니 필리핀 방식대로 닭다리에 흰 쌀밥이 나온다.
부지런히 먹던 그는 담배를 피고 온다고 나가더니 30분 이상이 지나도 오지 않아 여행으로 바쁜 내가 오히려 엉뚱하게 그를 속절없이�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에게 가이드 비 일부라고 500페소를 준 직후였다.

하릴없이 계산하고 나 홀로 여행을 떠나려 할 무렵 그가 왔다.
화는 금방 풀리기 위해서 있는가 보다.
회가 싸고 좋은 곳이 있다 하여 우리는 한국에서는 이 십만 원 이상을 주어야 먹을 수 있다는 활어 다금바리 한 마리를 잡아 회를 시켰다. 마닐라에서는 라푸라푸어(Lapulapu魚)라고 하는 귀한 고기였다.
회에 맥주 3병값이 우리 돈으로 55,000원 정도로 저렴하였다.
그러나 나 쓸 돈만 가지고 배낭여행 온 사람이라서 두 사람 몫을 지불하고 다니는 것이 내게는 부담이 되었다.
식욕이 왕성한 사람과 함께 하다 보니 시킨 음식도 항상 부족하였다.
그래서 비상금으로 가져 간 한국돈을 환전하여 보충하기로 했다. 환전하면서 내일의 가이드 비라고 500페소를 또 주었다.
40대 후반인 그가 담배를 피울 때도 밖에 나가 피는 예의 바른 태도며, 어머니가 매달 부쳐주는 40만 원으로 마닐라를 산다며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 나를 더욱 그를 신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숙자라는 그와 함께 나의 숙소인 호텔에서 오늘 밤을 유하기로 하였다.
마닐라는 인건비가 싸서 한국인은 여기서는 취직을 할 사람도 채용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필리핀 선생님들의 월급이 한국 돈으로 30만 원 정도구요, 그 보다 많이 받는다는 경찰의 월급이 40만 원이래요.
그 돈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부업을 가져야 해요. 그들의 부정부패는 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르는 것이구요. 그러나 트라이시클 운전기사는 한 달 수입이 6,000 페소(18만 원)인데 그 정도는 이 나라 서민들이 살만한 돈이랍니다."
호텔에 돌아와서 맥주를 사온다기에 지갑에서 500 페소를 주었더니 1,000 패소 짜리를 달라 한다.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던 터라 '마각(馬脚)이 드디어 드러나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거절하여 보내고 나니 비로소 그의 흑심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돈을 주면 그는 어딘가 다녀오지 않던가. 담배를 피우러 밖을 나가곤 하는 것은 누군가와 접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거리에서 앉아서 나에게 말을 건 그 순간부터 그가 쳐 놓은 그물에 내가 걸려 든 것이었구나.!
'가난하면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던 말은 나를 해코지 할 수 있다는 복선(伏線)의 말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사람과 하룻밤을 함께 자기로 하다니-.
이대로 가다가는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 나는 마닐라의 미아(迷兒)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은 지금 빨리 그와 서둘러 작별해야 할 시간임을 깨닫게 하였다.
그는 명승지는 알되 그곳의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를 따라 리잘공원에 갔을 때 거기서는 가장 중요하다는 리잘동상과 기념탑도 안내받지 못한 생각이 난다.
낯선 길을 가다가 아무에게나 길을 물었다가 나는 얼마나 고생하고 후회하였던가. K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찾아가려 했던 한국인은 마닐라에서 상가를 운영하거나 그 종업원이어서 그들의 말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K와 같이 길거리에서 배회하는 사람을 어떻게 지금까지 내가 믿은 것일까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말라테를 찾아갔던 몸이라서 K가 아니었다면 나는 나의 계획대로 필리핀의 아름다움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마닐라 근교에 있다는 세계7대 절경의 하나라는 100m의 낙폭을 자랑하는 팍상 폭포(Pagsang Fall) 모습도 카메라에 담아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이드가 직업인 사람을 따라 다니며 마닐라 시내 곳곳을 더 구체적으로 소개 받았을 것이련만 그런 나의 희망이 K로 인하여 불행하게도 물건너 가 버린 것이다.
 여행자가 해외여행 중에 갖고 있는 외화는 피와 같은 존재다.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거나 숙박하는 일은 비자(BISA) 카드로도 할 수 있지만, 서민을 상대로 할 때에는 현지 돈 현찰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걸 보충할 길은 아무 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귀한 외화의 일부를 믿을 수 없는 K에게 자청하여 준 것이다. '잘못은 누구나 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잘못임을 깨다을을 때 빨리 수정하는 것이 현자의 길이렷다.'
나는 만약의 후회를 예방하기 위해서 그의 사진을 찍어 두었고 카메라를 도난당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메모리를 깊숙이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를 주의 삼아 그에게도 한 바도 있다. 그러나 시간 되면 떠나야 하는 나그네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물건 사러 갔다 온다는 K가 30분이 더 지나서야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단호하게 K에게 어려운 말을 해야했다.
"당신은 거리에서 만났기 때문에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신을 자세히 알아야겠으니 신분증을 봅시다. " 하였더니 내 태도에 놀란 그가 주머니를 털어 내놓는 것은 내가 준 명함과 낡은 가족사진 1장과 낡은 휴대폰뿐이었다.
내가 내일 가이드비라 준 돈과 사오라고 준 돈은 내 돈이니 달라고 하였더니 그건 방금 다 쓰고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돈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의 휴대폰을 내가 준 돈을 갚을 때까지 압수하기로 하고, 변명하려는 그를 그냥 쫓아 버렸다. 그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그와 함께 밤을 지샜더라면 이곳 피리핀 범인인들의 상투적인 수단이라는 몰래 타 놓은 수면제를 나는 마셨을 것이고-. 그 다음은 말해야 무엇하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선량한 사람에게 가한 비정한 처사일지도 모르지만 이국 땅에서의 1/100 의 위험에서도 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싫든 좋든 우리들은 한국교포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외국에 나가서 그 나라 사람을 상대로 하여 먹고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찾아온 한국 동포를 상대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중에 한국인을 상대로 사기 치는 저질의 K 같은 부류를 내가 만난 것이다. 40대 후반의 K씨의 모습과 신분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가급적 일체 생략한다. 그것이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와 함께한 '리잘공원' 이야기다..
.
*. 리잘공원(Rizal Park)

 필리핀 인들이 이 나라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호세 리잘(Jose Rizal)을 만나러 K와 함께 로하스 거리(Roxas Street)를 따라 리잘공원(Rizal Park)을 향하고 있다.
호세 리잘(Jose Rizal)은 333년 간 스페인의 압제의 민족을 대신하여 스페인에 맨주먹으로 맞서 저항하다가 체포되어서 1896년 지금의 리잘공원에서 36세의 꽃다운 나이로 처형당한 독립운동가다.
그가 처형된 장소에다 이 나라는 그를 기리기 위해 '리잘공원(Rizal Park)'이라는 이름으로 10만 평 규모의 필리핀에서는 가장 큰 공원을 세웠다.
우리나라 서울의 국군묘지처럼 외국 국가 원수들이 제일 먼저 찾아 참배하는 곳이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리잘공원은 시민의 휴식처다. 
그가 총살로 처형된 자리에 리잘의 유해를 매장하고 그 위에 리잘 기념비(Rizal Monumant)를 세웠다. 기념비 앞에서 일년 내내 2명의 경비병이 항상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이 필리핀 국민들의 리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엿보인다.
필리핀 정부는 그가 서거한 12월 30일을 '리잘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호세 리잘(Jose Rizal)은 죽기 전에 필리핀 국민에게 글을 남겼다.
 사형장에 가던 날 스페인군 몰래 지인을 통하여 호롱불 등에 감추어 전한 그의 시(詩)가 리잘 기념비 뒤에 한글은 물론 세계 주요 국어로 번역되어 전하는데 다음은 그 시의 일부다..

잘 있거라 사랑하는 나의 조국(祖國)
사랑 받는 태양의 고향(故鄕)이여!
동방 바다의 진주(珍珠)
잃어버린 우리의 에덴 정원(庭園)이여!
나의 이 슬프고 암울한 인생(人生)을
기꺼이 너를 위해 바치리니
더욱 빛나고
더욱 신선하고
더욱 꽃핀 세월이 오도록
나의 사랑하는 조국(祖國)이여!
나의 아픔 중의 아픔이여.!
사랑하는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 인사(人事)를 들으라.
           -'나의 마지막 작별(Last Farewell)' 중에서


다음은 호세 리잘(Jose Rizal)의 최후 순간의 일화(逸話)다.

  사형대 앞에 리잘의 복장은 죄수복 아닌 정장(正粧)이었다.
'나는 죄수가 아니다. 나는 조국 필리핀을 위해 정당한 일을 하였을 뿐이다.'라는 그의 신념에서였다.
그는 총구를 향해 서지 않고 돌아서서 등에 총을 맞고 순국(殉國)하였다..
죽을 때 스페인군 앞으로 꼬꾸라지며 무릎을 꿇기가 싫어서였다. 이것이 필리핀 영웅 리잘(Rizal)의 최후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의사요,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11개 국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지성인이었으며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팔방미인었다.

*. 마닐라 최고의 관광지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좌측 그림 출처: ‘세계를간다 필리핀)’
리잘공원 바로 북쪽에 인접하여 있는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는 마닐라 최고의 관광지인 성벽도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필리핀을 통치하던 1571년에 스페인 인과 스페인 혼혈계인 메스티소(mestizo)를 원주민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방어할 수 있도록 해장(垓子)를 파놓은 거대한 4.5km 길이의 성채(城砦)라서 그 내부에는 중세 풍의 유적이 잘 보존된 도시다.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란 뜻도 스페인어로 ' 벽안에서'란 뜻이다.
곧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또는 요새란 뜻으로 그 크기가 19만평에 달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당시 스페인군의 사령부였던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로 피리피노와 중국인들이 150년동안 지었다는 성채다. 스페인 통치 시절 마닐라는 이 인트라무로스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 위치가 인트라무로스의 가장 북서쪽에 피그강 가에 위치하여 있어서 그 주변을 방어하는 피리핀에서는 가장 중요한 방어진이었다.
요새(要塞) 내에는 호세 리잘이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던 감옥 자리에 리잘기념관이 서 있는데, 입장료로 40 페소를 받는다.
리잘이 이 감옥에서 나와 처형 장소였던 기념비까지 가던 길에 리잘의 발자국을 재현해 놓았다니 유심히 볼 일이다.
그런데 가이드 따라 가지 않는 나 같은 배낭여행자들에게 인트라무로스 곳곳에 무엇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어찌 알까?
이런 사람을 위해 멋진 마차 깔레사(Calesa)가 손짓하여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그 값도 만만치 않아 짧은 거리라도 최하 30페소 이상, 1시간이면 300페소 이상을 주어야 하는 모양이지만 관광객에는 더 받으니 흥정해서 후회없도록 할 일이다.
아니면 100페소 이하의 자전거 사이드 카를 이용해도 운치 있는 일이다.
사이드 카(Side Car)는 마닐라에서 우리들의 자가용 이상으로 쓸모가 많다.
손님을 태워 주고 돈을 벌지, 짐을 운반하는 수단이지, 심지어는 집 없는 이게는 숙소가 되어 주기도 한다.
이 사이트 카도 아니라면 인트라무로스 방문 센터에 가서 지도를 구해 가지고 리잘공원, 인트라무로스 등을 거니는 것도 좋다. 거닐만한 거리의 산책코스이기 때문이다.
이 인트라무로스는 스페인에 이어 미국의 점령시절까지도 번성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 때 일본군이 이를 점령하여 군사기지로 사용하고 있을 무렵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산어거스틴 성당(San Augustin Church)은 미군도 그 역사적인 중요성을 알아 폭격을 하지 않아서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의 하나가 되었다.
그 외 인트라무로스에는 산어거스틴 박물관과 마닐라 성당, 등등 돌아 볼 곳이 많다.
그러나 이 부근은 나의 숙소인 바클라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가 K와 그의 동료들이 사는 곳이라, 잘못하다가는 그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서 다시 찾아 갈 갈 수가 없었다.
K는 내 소중한 여행비를 축낸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내 여행을 망친 장본인인 것을 그도 알까?
그로부터 휴대폰을 압수한 것이 걸려서 호텔에 놓고 오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많은 돈이 부과될 것 같아 못했는데 그것이 후회된다.
필리핀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선불제였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옛날 66세 나이에 30kg의 베낭을 지고 지리산 단독 종주를 하다가 벽소령에서 태풍 루사를 만나 3일 동안 묶였다가 대원사로 하산하였다. 그 후 나는 산행에 대하여 자신을 갖게 되었다.
희수(喜壽)를 1년 앞둔 나이에 나는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그 필리핀을, 단독 배낭여행으로 무사히 다녀왔다. 그동안 나의 해외여행은 여행사 가이드 따라 투어 여행이나 다니면서 영어회화를 못해 엄두도 못 내던 배낭여행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어디든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학창 사절에는 돈이 없어서, 직장 시절에는 시간이 없어서, 노인이 되면 시간과 경제력은 있어도 체력이 없어서 여행을 못 떠난다고 한다. 나는 금년 봄에는 자전거 전국 여행을 떠나려 한다. 두려움 속에 두려움을 배우고 그 두려움 속에 안전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게서 여행은 젊음을 되돌려 받는 샘물'이라는 안데르센의 말을 믿으며-. 그보다 그동안 나를 꽁꽁 묶어 놓았던 여행기를 오늘 탈고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