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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移葬)

ilman 2021. 9. 18. 10:02

 이장(移葬)

  흙수저로 태어나서 우리 5 남매가 가난이란 고개를 넘어 어느 정도 벗어날 무렵 제일 먼저 한 일이 우리 부모 묘소에 석물(石物)을 세운 일이었다. 이는 우리들의 마음의 표적이요, 우리 자식들의 한(恨) 풀이이기도 하였다.

 비석(碑石)과 상석(床石)과 망주석(望柱石)이 새파란 잔디 위에 우람스럽고 있는 앞에서면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해지던지. 그 잔디에 딩굴딩굴 구르고도 싶었다.

 살기 어려운 시절에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충남 대덕군(大德郡) 구즉면  산 속에 석물을 세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묘소(墓所)를 가꾸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주 찾아 성묘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 조부모(祖父母)님은 거기서도 한참 가야 하는 충남 연산(延山)에 모시어 두고 부모님의 성묘만 하고 오는 것과 부모님을 모신 곳이 선산(先山)이라서 묘소를 돌봐 주는 산직이 분에게 금일봉까지 챙겨 주어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성묘가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형제들이 성묘를 서로 미루기도 하고 생략도 하는 불효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무렵 우리 종중의 묘를 모신 구즉면 일대가 대형 쓰레기 하치장으로 지정 되는 바람에 昌寧成氏 종중묘를 부득이 옥천(沃川) 시내를 굽어 살필 수 있는 대천 리로 이장(移葬)하는 바람에 거기에 우리 가족 납골묘(納骨墓) 한 자리를 조성하게 되었다. 새로운 창녕성씨 종중묘를글 조성하게 되어 8 위를 모실 납골묘(納骨墓) 한 자리를 구하여 우리 5남매가 힘을 모아 조부모, 부모를 한 자리에 모시기로 하고 이장(移葬)한 것이 석물 세운 것보다 더 잘한 일 같다.

지금의 내 생각에는 나 죽은 후에는 8위를 모실 자리를 지하 1, 2층으로 정성껏 만들게 하여 지하 2층에 조부모, 부모, 우리 형제 내외를, 18자리는 우리 2세들을 위한 자리로 남겨 가족묘가 되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