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한국 도립공원(道立公園) 산행’/ 2016. 1. 12 편집 1차 완료
차례
들어가는 말 ---------------------------------
아들 축하의 글----------------------------------
아들 성낙준
경기 ⦁남한산성 도립공원--------------------------3
⦁수리산 도립공원 ---------------------------23
⦁연인산 도립공원----------------------------30
강원 ⦁경포대도립공원
1 경포대---------------------------------34
2 오죽헌---------------------------------36
⦁낙산사 도립공원
1 낙산사---------------------------------41
2 하조대---------------------------------48
⦁태백산-----------------------------------52
충남 ⦁덕산 도립공원
1. 수덕사---------------------------------61
2. 덕숭산---------------------------------68
3. 가야산---------------------------------76
⦁칠갑산 도립공원 ---------------------------83
전북 ⦁대둔산 도립공원----------------------------93
⦁마이산 도립공원----------------------------99
⦁모악산 도립공원----------------------------105
⦁선운산도립공원 ----------------------------128
전남 ⦁두륜산 도립공원
1. 대흥사---------------------------------138
2. 두륜산---------------------------------147
⦁조계산 도립공원도립공원
1조계산 ------------------------------------------155
2송광사 ----------------------------------161
⦁천관산도립공원 -----------------------------175
⦁팔영산 도립공원-----------------------------182
경북 ⦁금오산 도립공원 ----------------------------189
⦁문경새재 도립공원 --------------------------.201
⦁청량산 도립공원 ----------------------------210
⦁팔공산 도립공원
1 팔공산----------------------------------220
2 동화사-----------------------------------
경남 ⦁가지산도립공원
1. 가지산----------------------------------227
2. 운문산-----------------------------------233
⦁ 연화산 도립공원-----------------------------239
제주 ⦁마라도해양----------------------------------244
⦁성산 일출봉---------------------------------250
⦁우도해양------------------------------------256
⦁추자도 도립공원------------------------------261
부록 ⦁백두산 -------------------------------------278
⦁소금강---------------------------------------
⦁관매도 명승지1호------------------------------289
남한산성(南漢山城) 도립공원
병자호란 이야기 3
남한산성 산행 7
남문 5
수어장대 6
서문 10
행궁 9
남한산성 종로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남장대지 암문
동당대 터의 여장
남한산성(南漢山城)
*. 병자호란 이야기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 중에 살아가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든다면 선조 22년(1592년 4월)부터 인조 15년(1638년 1월)까지 46년 동안을 살았던 백성들일 것이다.
그 사이에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겪어야 하였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었을까.
그때 우리를 괴롭힌 작자들은 남(南)으로 왜놈들이요, 북(北)으로는 여진족들이다.
여진족(女眞族)이란 명칭은 시대마다 달라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숙신(肅愼), 수(隨)나라와 당(唐) 시대에는 말갈(靺鞨), 송(宋)나라 때는 여진(女眞), 청(凊)나라 때에는 만주족(滿洲族)이라고 일컫던 민족이다.
고려 때만 해도 우리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활, 말, 모피 등을 조공하고 의류, 식량, 농기구, 그릇 등을 수입해 가던 무리들이었다. 명(明)나라가 임진왜란 시의 조선 파병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여진족의 추장 누루하치가 심양(瀋陽)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금(後金)(후에 淸으로 개명)이라 하고 나아가 중국을 통일한 민족이다.
그 금(金)나라가 1차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서 우리나라와 형제지국(兄弟之國)의 관계를 강제로 맺고 가더니,
여기에서 한술 더 떠서 군신지국(君臣之國)의 관계를 요구하며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조차 없는 지나친 요구를 해오다가 20만 대군을 끌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특별히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쟁 후 더 많은 고생을 하게 된 한 많은 굴욕적인 ‘청(凊)의 요구 11개 사항’이다.
1. 청(淸)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행할 것,
3.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4. 청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는 지체 없이 원군을 파견할 것,
5. 가도(假島)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6. 청 황제나 황후, 태자 생일 등의 경조사에 사신의 파견은 명나라에 하던 구례대로 할 것.
7. 압록강을 건넌 후 납북자 중 도망자가 있으면 즉시 되돌려 보낼 것.
8.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9. 조선은 성(城)과 그 담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11. 조선은 다음 해인 1639년부터 해마다 조공물을 보낼 것
이런 강압적, 굴욕적인 조약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이 9년 간이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고,
무고한 백성 50만여 명이 개 끌려가듯이 잡혀가서 그들에게 온갖 만행을 당했다.
들어보지 않았는가. 우리나라 부녀자들이 그들의 성(性) 노리개가 되었다가 돌아온 여인이 화냥년(←還鄕女)이라는 어원이 되었다는 것을. 이러한 모욕적인 조약은 일본과 싸우다가 일본에게 패한 청일전쟁(淸日戰爭, 1996년)까지 XXX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남한산성(남한산城) 산행
남한산성은 서울에 지하철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가보고 이번에 두 번째로 왔다.
3호선 종점이었던 수서역에서 분당선을 바꿔 타고 복정역에서 내려서 다시 8호선을 갈아타니 산성 다음 역이 남한산성입구역이었다. 밖에 나오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전혀 다른 세상에 되어 있는데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란 싯구처럼 변함없는 남한산성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역에서 6번 버스를 타면 남한산성의 중심인 ‘종로(鐘路’)로 간다지만, 걸어서 10분이면 ‘남한산성 유원지’라고 하여 남문 쪽을 들머리로 산행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가는 길에 먹음직한 음식점이 있어 점심식사를 하고 보니 12시가 넘어서야 등산을 시작한다.
중국에 가면 산동성(山東省)이 있다. 태항산(泰行山)의 동쪽에 있다하여 생긴 지명이다. 성남시도 마찬가지로 남한산성 남쪽에 있는 도시라서 성남(城南)이라 부르는 것이다.
산에 오르다 보니 그 시설에 투자한 것이 여유가 만만한 것이 '강부자'(강남 부자)가 많이 산다는 분당과 판교 신도시가 있어서 이렇게 좋은 시설 투자를 한 것 같다.
약수터 시설, 신발의 먼지를 터는 에어 건과 유난히 많은 돌탑, 그리고 걷고 싶은 맨발 공원 등.
유원지를 막 벗어나니 등산로가 시작되는데 거기서 산성약수터까지 1km 사이에 ‘시조가 있는 산책 등산로’가 있는데 그 간판에 등산에 대한 말도 있다.
-등산 효과: 생활의 활기가 생기고 노화의 지연/ 스트레스 해소와 긴장완화/ 근력강화
그렇다. 옛말에 '補藥三貼不如秋日登山‘(보약삼첩불여추일등산)'이라. 보약 세 첩이 가을 등산만 같지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나이 들어도 술을 그렇게 퍼 마시면서도 친구들보다는 내가 비교적 젊게 사는 것은 오로지 등산 때문인 것 같다. 산책등산로는 좌우에 석물을 세우고 거기에 비명 대신 시조를 음각하여 놓았는데 그 중 다음 시조가 그중 멋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의 산이시다
뜰에서면 뜰이 가득, 방에 앉으면 방이 가득
아버지! 불러만 봐도 높고 푸른 산이시다.
-정완영 시조시인
내가 본 거기 있는 10수의 작품은 병자호란을 노래한 시를 주로 모은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4수를 빼고는 시조가 아닌 한시(漢詩) 번역 등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시조 중에 이 산에는 꼭 있어야 할 병자호란 당시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면서 쓴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자 漢江水야 '로 시작하는 김상헌의 우국시조는 내가 못 본 것인가 빠진 것일까.
*. 남문(南門) 이야기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左翼門(좌익문, 동문), 우익문(右翼門, 서문), 지화문(至和門, 남문), 전승문(戰勝門, 북문) 같은 4대문이 있다. 이 중 남문은 남한산성 유원지에서 2km 지점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는 문으로 성 내에서는 가장 크고 웅장한 남한산성의 중심 문이다.
북한산의 대서문(大西門) 같은 문으로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남문은 유일하게도 '至和門'(지화문)이란 현판이 남아 있는 문으로 그 앞에다가 성남시에서는 ‘남문 앞 역사 터’를 꾸며 놓았다. 성남시가 보호수로 지정한 수령 350년가량의 느티나무가 5 그루가 있는데 이는 비가 올 때 경사진 성곽 주변의 토양 유실을 막기 위함도 있지만, 적들로부터 시각적으로 이 문을 차폐하려는 목적으로 식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다.
‘무궁화공원’을 지나니 8각 정자가 있다. ‘영춘정(迎春亭)’이었다. 원래는 남문 아래 있던 것을 서울과 경기지방 일대를 관망할 수 있는 현 지점으로 옮긴 정자다. 경치 좋은 곳에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과 방이 없이 마루만 있는 것이 정자(亭子)이니 사방을 어찌 아니 관망하랴. 그러나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만 그 사이로 성남시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이야기
거기서 400m 지점에 암문(暗門)이 있고 그 위에 이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2층 누각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가 있다.
장대(將臺)란 장군이 성(城)이나 보(堡)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 서장대) 이외에도 동서남북으로 4개의 장대(將臺)가 가 더 있는데 나머지는 터만 남아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장대는 수어장대 한 곳뿐이다. 북한산에 동장대(東將臺)와 같은 것이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摠戎廳)에서 맡았다가 수어청(守禦廳)이 5영(營)을 관활하였다.
남장대(南將臺)에서 전영장(前營將)이, 북장대에서 중영장, 동장대에는 후영장 등이, 서장대[守禦將臺]에서는 우영장이 진(陣)을 치고 맡았는데, 현재는 서장대[守禦將臺]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수어장대가 있는 이곳이 이 산의 주산인 청량산(淸凉山, 482.6m) 정상이다.
남한산성은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에 연주봉(467.6m), 동에 망월봉(502m)과 벌봉(521.1m, 일명 남한산), 남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성이다.
산성은 평상시에는 곡식과 무기를 저장하는 군창(軍倉)으로 쓰이다가, 전쟁이 나면 주민 모두를 이끌고 산성에 들어와 농성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수어장대 바로 밑에 청량당(淸凉堂)이란 당우가 있는데 여기에는 비화 맺혀 있는 슬픈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였다. 동남쪽 부분을 책임진 이희(李晦)가 공사경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으로 죽음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부인 송씨와 소실이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이회가 죽은 후 횡령 사건을 다시 조사해 보니 횡령한 사실이 전혀 없이 일가족이 무고하게 참변을 당한 것이 밝혀져서 그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서장대 옆에 청량당이란 사당을 짓고 초상을 안치해 주었다.
그 수어장대 좌측에 커다란 매바위가 있는데 거기에도 이회(李晦)의 죽음과 관계된 전설이 돌에 깊이 음각되어 전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조를 맡았던 이회가 완벽한 시공과 지세의 험악으로 기일 내에 완공하지 못하여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절명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이회를 응시하다 갑자기 없어졌다. 사람들이 매가 앉아 있던 곳에 가보니 돌에 매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하였다.
매바위 바로 앞에 ‘무망루(無忘樓)’란 누각이 있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수어장대 2층 누각에 있던 이 편액을 시(市)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밖에다가 만들어 놓은 누각이었다. 없을 '無'(무), 잊을 '忘'(망)이란 글자처럼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함께, 8년간이나 억울하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가 승하한 효종(孝宗)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수어장대 뒤에 가 보면 원형극장 같은 곳이 있다. 이곳이 남한산성 내에 있다는 45개의 우물 중에 하나로 당시 병사들이 식수로 쓰던 샘터다. 이런 우물 외에도 성내에는 45개의 연못을 두어 유고시를 대비하게 하였다.
*. 서문(西門) 이야기
수어장대에서 서문 가는 중간에 병암(屛岩)이란 바위가 있다. -정조 때 산성 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이곳 주민들이 자진하여 보수하였으므로 당시 부윤(府尹) 서명응이 백성들을 찬양하는 글을 이 암석에 기록한 것이다.
남한산성의 매력은 꾸불꾸불한 성을 끼고 오르내리다가 네 성문을 만나는 기쁨이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조용한 평범한 누각인데 성문을 내려가서 성문 밖에 나서서 우러러 보면 성벽과 어울린 모습이 우람하고 아름답다. 성문이나 암문(暗門)을 나서 보면 북한산성과는 달리 널찍한 밖에서 순례하는 넓은 길이 있다.
그 성문 부근에는 전설 어린 유적지가 있는 법이다. 그 유적지의 하나가 수어장대 바로 아래에 있는 ‘국청사(國淸寺)’였다. 남한산성에는 축성 전부터 망월사, 옥정사가 있었으나, 이 산성을 지키는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천주사, 국청사, 개원사, 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 등 9개의 사찰을 당시에 지었다. 그러나 이 절들은 아깝게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의하여 폭파되고 오늘날까지 남은 곳은 장경사 하나뿐이었다. 그 8개 절 중 현대 와서 복원한 절이 망월사, 개원사요 국청사다.
-국청사(國淸寺)는 인조 3년(1625년) 각성대사에 의하여 창건된 절이다.
각성대사(覺性大師)는 임란 때 불타버린 화엄사를 재건한 대사로, 병자호란 때는 8도총섭절제중군주장( 8道總攝節制中軍主將)으로 임명 받아 전국 8도의 승군(僧軍)을 모아 남한산에 성을 축성하고 9개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사찰들을 중심으로 승군을 훈련하고 군기(軍器)며, 화약,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니 그 중의 하나가 국청사이다.
그러나 일본강압기 시절에 일본군에게 방화 소진 된 것을 다시 중건 중수 한 절이다.
북문을 가는 길에 ‘매탄처’ 터가 있다. -매탄처(埋炭處)란 병자년 혹독한 추위에서 전쟁을 치룬 후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하여 숯을 묻어 두었던 곳이다. 천주사부터 북장대까지 숯을 가마니에 담아서 묻은 곳이 94개소에 24.192석이었다고 한다. 그 북장대(北將臺) 터를 지난다.
-북장대(北將臺)는 남한산성이 준공된 후에 수어청(守禦廳)을 둔 곳 중에 하나다.
수어청에는 전후중좌우익(前後中左右翼)의 5영(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중영장(中營將)이 배치돼 진을 치고 휘하장졸을 지휘하던 북장대가 있던 곳이다.
북문(北門)은 일명 ‘전승문(全승門’)인데 날이 저물어 가고 있어 부득이 하산해야겠다.
내일은 만사 제폐하고 다시 남한산성을 찾아 나머지 곳을 두루 순례하기로 하고 오늘의 마지막 순례지 행궁으로 하산길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행궁은 남한산성이 준공된 후에 수어청(守禦廳)을 둔 곳 중에 하나다. 수어청에는 전후중좌우익(前後中左右翼)의 5영(營)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중영장(中營將)이 배치돼 진을 치고 휘하장졸을 지휘하던 북장대가 있던 곳이다.
*. 행궁(行宮) 가는 길
행궁 가는 길 북문에서 100m 지점의 이정표에 ' 0.3km 숭열전'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서 붉은 홍살문을 지난 양지 바른 곳에 사당 하나가 나타난다. ‘숭열전(崇烈殿)’이었다.
이곳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위패와 성 축성 당시 총 책임자였던 이서를 배향하는 사당이었다. 왜 남한산성에 백제의 온조대왕이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였더니 이 지역이 백제 도읍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리왕에게 세자(世子) 자리를 양보한 온조대왕은 10명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는 ‘십제(十濟)’ 를 세웠다가 형 비루의 신하까지 합쳐서 백(百) 명 신하의 도움(濟)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국명을 ‘백제(百濟)’라 하였다는 그 온조왕 말이다.
드디어 인조왕의 피눈물이 어린 행궁에 들어섰다. 북한산 대남문에서 북한동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에 우람한 축대 위에 행궁 터만이 남아 있는데(2016년 현재 복원 중) 남한산성에서도 이를 복원하고 있었다. .
-행궁(行宮)이란 일명 이궁(離宮)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임금이 왕궁 밖에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는 별궁을 말하는데 피서나 피한(避寒) 또는 승경지에 짓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유사시에 피신하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47일간이나 이 행궁에서 적과 싸우다가 1만 7천명의 군량미가 부족하여 할 수 없이 삼전도(三田渡)에 나가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인조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삼전도 이 자리에 청 태종은 높이 395cm, 폭 140cm 의 비에 전면은 몽고문과 후면에는 한문으로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하여 삼전도한비(三田渡汗碑, 사적 101호)를 우리나라에게 세우게 하여 부끄러운 역사적인 유물로 남게 되었다.
그 삼전도가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289-3이라니 기회 있으면 찾아가서 옛날을 같이 울어보고 싶다.
*. 남한산성 '종로(鐘路)' 답사
어제 남한산성 산행은 '산성유원지→남문→수어장대→북문→숭렬전→행궁'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하산하였더니
오늘은 남한산성 입구역에서 6번 버스를 타고 종로(鐘路)를 들머리로 나머지를 둘러 볼 생각이다.
남한산성의 ‘종로(鐘路)’란 남한초등학교 근처의 로터리 버스 종점을 말하는 곳으로 옛날 ‘종각’ 이 있었다는 자리다.
옛날 같으면 버스를 타고 남문으로 종로에 올 수도 있었지만, 산성터널이 생기는 바람에 남문 갈 사람들은 성벽 앞 갈림길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
종로 마을에서 빼놓지 않고 보아야 할 곳이 산성 로터리에서 동문(東門) 쪽으로 가다가 우측에 있는 '남한산성역사관'이다. 남한산성의 안내도는 8호선 남한산성입구역이나 관리소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역사관이라서 더욱 그렇다.
이 곳에는 수많은 유적지가 종로에 몰려 있는데, 남한산성초등학교, 파출소, 교회, 음식점 등 거의 모두가 약속한 듯이 한옥의 기와집들이어서 유적지와 구별이 안 된다. 그래서 이 산성의 올바른 순례를 위해서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지도는 필수품이었다.
역사관에는 남한산성의 연혁, 병자호란에 대한 기록, 여러 역사서와, 척화파(斥和派)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세 분 삼학사(三學士)의 필적, 남한산성의 항전(抗戰, 김내 그림) 모습과 남한산성의 모형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역사관을 나와 보니 바로 동문 쪽으로 해공 신익희(申翼熙)의 동상이 멋지게 서있다.
나의 대학 학창시절 자유당 말기 독재자 이승만 정권에 맞서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대통령에 입후보하여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뇌일혈로 급사한 정치가다.
그 해공 선생이 자랑스런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남한산초등학교를 졸업한 분이기에 그 동상을 여기에 모셔 놓은 것이다.
그 동상에는 '民主爲到 同等樂域'(민주주의의 길은 동등하게 즐거운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 음식점 사이에 커다란 비석이 있는 것이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순교자현양비(殉敎者顯揚碑)'였다. 현양(顯揚)이란 '세상에 높이 들어내는 것'을 말함이니, 천주교 박해에 맞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순교자 넋을 기리는 뜻이리라.
그 아래 '순교 정신을 기리며'란 글이 세월을 넘어 순교자들의 거룩한 생애가 속절없이 살아온 나의 심금을 울려 주고 있다.
-인조 때(1626년) 개축공사 이후 광주 유수의 치소와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잊을 수 없는 박해 터가 되었다. 신유박해(1801년)에는 최초의 순교자 하느님의 종 한덕운 토마스가 이 곳에서 참수형을 당하고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순교자들의 명단이 현양비 뒤에 음각되어 있는데 참수형, 교수형 아니면 옥사자들이었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과 함께 건립되어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라는 연무관(演武館, 경기 유형문화재 제6호)은 널찍한 터전에 있는데 그 주위에 400년 이상의 고목이 옛날을 말하여 주는 듯 즐비하다.
다시 역사관에 이르니 그 뒤에 이정표가 있다. ' ↑ 0.5km 개원사/ ↑ 남단사지/ ↑ 남장대지'
절 앞에 가서 실망하게 되는 것은 신도를 제외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할 때나, 출입금지의 글로 앞길을 막을 때다.
자기 신자들 이외의 사람의 출입을 싫어한다면 묻고 싶다.
'그런 절이 왜 이 세상, 이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가?' 개원사도 그랬다. 일주문을 지나 있는 멋진 사천왕문은 쪽문만 열어놓았는데 그 문에 가급적 절에 들어오지 말라는 글의 내용이 암암리에 역역하여 나그네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있다. 나도 먼 일산에서 서울을 지나 찾아온 손님의 하나가 아닌가.
-개원사는 임진왜란에 파손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지키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인 승군을 총지휘했던 본영 사찰이다. 인조 2년(1624년)에 창건되어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370년간이나 수도 서울을 지켜온 호국사찰이다.
이 사찰 주위에 있는 군기고지(軍機庫祉), 누각지(樓閣祉), 종각지(鐘閣祉) 등이 주춧돌, 석계(石階), 박석(薄石) 등이 남아 있어 이 개원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하여 준다. 천왕문을 막 넘어 좌측 기슭에 '승장조수전'이라는 다른 곳에서 못 보던 당우를 보니 호국불교사찰 개원사임을 다시 한 번 생각게 한다.
정문을 나오니 ‘남단사‘란 표석이 서 있다.
-남단사는 성 수축 당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할 수 있는 군막사찰(軍幕寺刹)이었는데 일제가 조선인의 무기 및 화약 수거 때 폭파해 버리는 바람에 그 터만 남아 있는 곳이다.
남단사에서 남장대지를 향하는 길은 운치 있게도 낙엽에 묻혀서 짐작으로 길을 찾아야 할 지경이더니 드디어 성의 여장(女裝,성가퀴)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어제의 '남문→북문'에 이어 성터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남한산성에 백제의 온조왕을 모신 사당 숭렬전(崇烈殿)이 있는 것은 이 성이 백제의 온조왕 성이라는 유추를 하게 한다. 신라 때의 한산주(漢山州)에 있었다는 주장성, 일명 일장성(日長城)이나 세종실록에 나오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은 곧 남한산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토성이었는데 광해군 13년(1621년)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여 2년 5개월만인 인조 4년(1625년)에 완공되었다. 완공 후 1년만인 인조 5년에 침입한 금(金, 후의 淸)의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으로 형제지국(兄弟之國)의 평화조약을 맺은 후부터였다.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목으로 병선(兵船)과 군마(軍馬)와 병력 등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해오자 배청열(排淸熱)이 높아지면서 우리 조정에서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온 사신마저 만나주지도 받지도 않았다.
이에 격분한 청 태조 누루하치가 인조14년(1636년) 12월 1일 12만 대군을 이끌고 9일 압록강을 넘어 10여 일만에 서울 근교에 육박한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두 왕자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 등을 우선 강화도로 보내고 그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청군이 그 앞을 막는 바람에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자, 청군은 20만으로 성을 포위하고 말았다. 이때 성안의 군사는 1만 3,000 명으로 성안에는 겨우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식량뿐이었다. 전국에서 원군이 남한산성을 향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청군에게 격파 당하고 남한산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이 되었다.
포위 된 지 45일이 되니 식량의 부족과 엄동설한의 추위에 장병들은 기력을 잃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어 왕자들이 청군에 잡혔다는 전갈이 왔다.
당시 궁녀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성일기'에는 그 당시의 촉박한 사항을 세세히 기록이 보인다.
-이십사 일의 대우(大雨)가 내리니, 성첩(城堞) 지킨 군사를 다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상감께서 세자로 더불어 뜰 가운데 서서 하늘께 빌어 가로사되, "금일 이에 이르기에는 우리 부자가 득죄함이니, 일성 군민(一城軍民 )이 무슨 죄 있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하옵건데 만민을 살려주옵소서." 군신들이 들어가시기를 청하되 허락치 아니하시더니, 미구(未久)에 비 그치고, 일기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城中人)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이십오 일의 극한(極寒)하다. 묘당[조정]이 적진의 사신 보내기를 청하오니, 상이 갈오사되. 아국이 매양 화친으로써 적에게 속으니, 이제 또 사신을 보내어 욕될 줄 알되, 모든 의논이 이러하니 이 때 세시라. 술, 고기를 보내고 은합에 실과를 담아 써 후정(厚情)을 뵌 후, 인하여 접담(接譚)하여 기색을 살피리라." 하시다. -이십육 일에 이경직, 김신국이 술, 고기 은합을 가지고 적진에 가니, 적장이 갈오되, "군중이 날마다 소를 잡고 보물이 뫼같이 쌓였으니, 이것을 무엇에 쓰리오. 네 나라 군신이 돌구멍에서 굶은 지 오래니, 가히 스스로 씀직하도다." 하고 드디어 받지 아니하고 도로 보내니라. -이십칠 일에 날마다 성중의 구완하러 오는 군사를 바라되, 일인도 오는 이 없고, 강원감사 조정호가 본도군(本道軍)이 다 모이지 못하였기로 써 양근에 퇴진하여 후에 오는 군사를 기다리고, 먼저 영장 권정길로 하여금 영병(領兵)을 하여 검단산성에 이르러 봉화를 들어 서로 응하다. 당시에 척화파(斥和派)였던 윤집, 정온도 당시의 슬픔을 글로 노래하고 있다.
성루에 올라보니 천지는 끝없는데
변경 밖 오랑캐군이 한 눈에 들어오네
장부의 큰 뜻을 이제 어디에 쓰리
영웅의 마음으로 칼 어루만지며 저녁 바람을 맞네
-윤집 세상 살기가 어찌나 험준한지
한 달 동안 달무리진 산성 가운데 있구나
이 한 몸 아까울 것 없으나
임금님께선 어찌 그리도 곤궁하실까
바깥에서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군사 끊기고
조정에선 나라 팔자는 흉한 소리 많도다.
늙은 신하는 무슨 일을 하려고
허리 아래 서릿발같이 날카로운 칼을 찼는가.
-이조 참판 정온
산성에 갇힌 지 45여 일이 지난 1월 30일, 겨우 2달도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드디어 항복을 결단하고 만백성의 호곡(號哭) 소리 속에 남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가서 곤룡포를 벗고 진흙 바닥에 엎드려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항복을 고하며 그 치욕적인 성하지맹(城下之盟)의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 남장대지(南將臺祉) 암문(暗門) 이야기
이런 비화가 어린 '남장대지(南將臺祉)'도 그 주춧돌만 덩그렇게 남아서 이제는 나그네의 쉼터 의자의 역할이나 하고 있다. 이곳이 오영(五營) 중 후영장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병을 지휘하던 타운루(唾雲樓)가 있던 남장대 터라는 것을 표지석이 말하여 주고 있을 뿐이다.
이정표를 보니 어제 들렸던 남문(南門)은 0.6km라서 1.1km의 동문(東門)을 향하려는데 시선을 빼앗는 곳이 있다.
치성(雉城)이었다. 치성(雉城)이란 성벽에 바짝 다가붙거나 성벽을 오르는 적을 사각(斜角)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다른 성벽보다 바깥으로 네모 모양으로 내어 쌓은 것이다.이때 네모가 아니고 반원형이면 곡성(曲城)이라고 한다.
남장대 터에서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암문으로 나가 볼 일이다. 암문(暗門)이란 이 문을 통하여 적이 모르는 사이에 나가서 적을 뒤로부터 공격하거나,상황이 불리할 경우에는 적이 모르게 성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 적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위치에 다락집 없이 만들어 놓은 문이다.
남한산성에는 이런 암문이 16개나 더 있다. 그 암문을 통하여 나가보니 거기 아직 복구되지 않은 옹성(甕城)이 있고 제2옹성에 대한 표지석이 이 옹성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옹성(甕城)은 둘레가 327.9m이며 87개의 여장(女裝)이 있었다.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 동서남 방향으로 3개씩 9개의 포루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다.
암문을 나오니 그 옹성도 보이고 담 아래로 성터를 끼고 도는 더 운치 있는 등산로가 성 밖으로 열려있다. 다시 제3 남옹성 직전의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들어서니 '한흥사' 가는 이정표가 있는 곳부터는 동문까지 내림 길인데 성이 복원 되지 않은 채로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성이 아예 무너진 곳도 있다.
거기서 준비해간 점식 식사를 하다 보니 건너편 산으로 아스팔트가 올라가고 있고 그 끝에 오른쪽에 하얀 탑을 세워둔 절이 있다. 이 남한산성 성내에 있었다는 9개 사찰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망월사(望月寺)였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정할 때 한양의 '장의사'를 허물고, 불상과 금자 화엄경, 금정 하나를 옮겨 놓았다는 망월사지만 그것들은 모두 불타버리고 1990년에 복원하여 놓은 사찰이었다.
*. 벌봉 가는 길
찻길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좌익문(左翼門)이라고도 하는 동문(東門)이 눈에 들어온다. 동문 아래로 난 찻길을 건너기 전이 수구문이었다.
-남한산성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어서 대부분의 물이 이 수구문(일명 水門)을 통하여 나간다.
통행시간이 지나 동문이 닫혔을 때에는 이 문을 통하여 출입하기도 한 비밀문이다.
성안에서 사망한 자가 있으면 4대문으로는 통과할 수 없었고 이 문으로만 성 밖으로 나갔으므로 주민들은 이 수문을 수구문(水口門)이라 부르고 있다.
동문(東門)을 지난다. 이로써 나는 어제에 이어 남한산성의 동, 서, 남, 북의 문을 다 견학한 셈이다.
동문에서 아스팔트길로 계속 오르면 망월사이지만 그 길을 버리고 1.9km의 벌봉을 향하여 성을 끼고 난 멋진 통나무 오름길을 오르고 있다. 가파른 통나무길이 끝난 곳에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에 송암정(松岩亭)이란 정자가 있었다는 곳이다.
- 황진이(黃眞伊)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들과 기생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건장한 남자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의 심오한 불도의 설법으로 응답하였다. 이에 감명 받은 무리 중 기생 한 명이 자괴(自愧)함을 느끼고 이곳에서 투신자살하였다. 그로부터 달밤에는 어디서인가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는 곳이다.
정조가 이곳에서 고사(枯死)한 소나무를 보고 벼슬을 내리며 옥관자를 붙여 주도록 하였다 하여 ‘대부송’이라 불려졌다 한다.
성터 길을 끼고 벌봉을 향하다 보니 등산로 치고는 제법 큰 길이 있어 성터 길을 버리고 길을 따라가다 보니 아스팔트길이 나타나더니 뜻밖에도 멋진 일주문(一柱門)이 있다. 이것 봐라 하였더니 성내에 9개 절의 하나인 장경사(長慶寺)였다. 장경사(長慶寺)는 개원사, 망월사와 마찬가지로 승군을 지휘하던 국방호국사찰로서 갑오경장(1894년)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명으로 산성을 쌓거나 방어하는 승군이 머물던 사찰이었다.
다시 산성 길에서 만난 것이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信地饔城)'이었다.
옹성(饔城)이란 큰 성문을 옹호하여 외적의 직충(直衝)을 막으려고 성문 밖에 쌓은 성이다. 그 모양이 반달 같으면 월성(月城), 네모꼴 모양이면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信地饔城)은 그 둘레가 150.9m로 여장(女墻)이 40개가 있고 끝머리에 대포혈(大砲穴) 2개소가 있다. 이 옹성은 암문을 통하여 안 밖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5개 옹성 중 가장 작다. 좌측에는 무기고가 있었다.
여행의 기쁨 중에 하나는 새로운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옛날에는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행복이다. 내가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의 하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요번에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하는 호기심의 연속이 여행이다.
'요번에 또 보게 되는 것이 '군포지'(軍鋪祉, 사적57호)였다
-군포(軍鋪)란 궁성 밖의 수라군이 머물러 있던 곳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哨所) 건물을 말한다.
옛날 이 남한산성에는 그 군포가 125군데가 있는데 지금은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아 여기 있는 것은 자료에 의하여 모조 초석을 설치하여 놓은 것이다.
*. 동장대(東將臺) 터에서 여장(女墻) 이야기
터만 남은 동장대(東將臺)는 해발 504.1m에 있었다. 이곳이 병자호란 때 전영장(前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지휘하던 곳인데 거기 여장(女墻) 에 대하여 설명하는 입간판이 있다.
여장(女墻) 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성가퀴를 말한다. 전쟁 시 이에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하여 총이니 활을 쏠 수 있게 길이 4.2m, 높이 1.3m 내외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주로 벽돌을 사용하여 쌓는다.
여장에는 흔히 근총안(近銃眼) 1개와 그 좌우에 원총안(遠銃眼) 2개를 만든다. 그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성가퀴[타구]가 있다. 일명 ‘남한산’이라고 하는 벌봉은 동장대에서 0.6 km 밖에 있는데, 아취형 성문을 나오면 외성으로 향한 또 하나의 암문이 있다. 이 일대가 외성인 봉암성(蜂巖城)이다.
- 이 성은 숙종 12년(1685년) 부윤 윤지선이 쌓은 둘레가 2.71km다. 봉암에서 한봉에 걸쳐 축조되어서 두 암문을 통하여 출입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암문이 4, 군포가 15 개소 있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호란 당시에 청군이 본성보다 높은 암봉인 벌봉(蜂峰)에 올라서 성의 동태를 살폈기 때문에 본성의 보강 차원에서 축조한 것이다.
벌봉 이정표에서는 '벌봉암문'이 이곳의 정상인 것처럼 쓰여 있지만 거기서 나무숲 사이의 바위가 그 정상이니 올라가 볼 일이다. 이제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있다.
다시 동장대로 와서 북문 쪽으로 가다가 이정표에서 하산을 시작하다 보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좌측으로 가면 망월사 길이요, 우측 길이 현절사(顯節祠) 가는 길이다. 병자호란 당시 항복하지 말고 사수하자하던 (斥和派) 중 삼학사((三學士))인 홍익한, 윤집, 오달재와 김상헌과 정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호란이 끝나고 인질로 심양에 잡혀 갔다가 순절(殉節)한 만고 충신 삼학사(三學士)와 김상헌과 정온을 모신 사당이란 말이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고국 산천(古國 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 동 말 동 하여라
나는 그 현절사 앞에서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이 고국을 떠나며 지은 우국 시조를 읊으면서 선인들의 호국을 위해 바친 거룩한 넋을 더듬어 보며 남한산성의 두 번째 날을 접는다.
개원사의 저녁 종소리가 이십팔수(二十八宿)을 울리는 저녁이었다.
-2008.12.04(내 나이 73세 때)
수리산(修理山,9m48) 수리산은 남한산성(南漢山城)과 연인산(戀人山)에 이어 2009년에 세 번째로 지정된 경기도 도립공원(道立公園)이다. 수리산은 북동쪽으로는 안양시, 동남쪽엔 군포시, 남서쪽은 안산시의 경계에 있는 군포시(軍浦市)의 진산(鎭山)이다. 수도권의 도심 속에 있어 연간 140만여 명이 찾는 휴식처로 그 녹지를 자랑하는 산이다.
그래서 수리산은 자연 개발보다는 그 보전에 중점을 두기 위해 지정된 도시공원이다. 그래서인가 이 산에는 산불조심 포스타가 유난히 많다.
수리산은 슬기봉(469m), 수암봉(398m), 태을봉(太乙峰 489m)과 관모봉(冠帽峰 426.2m)의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수리산(修理山)은 안산시, 군포시와 화성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지만, 최고봉 수리산(489m
, 태을봉)과 슬기봉(469m)이 군포시 서측에 있어 군포시의 진산(鎭山)이라 한 것이다.
*. 수리산(修理山)의 어원
수리산의 어원 유래담 중에서 가장 믿을 만한 이야기로는 수리산의 빼어난 산봉의 모습이 마치 독수리와 같아 "수리산"이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이에 대하여 1864년에 간행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이런 글을 볼 수가 있다. 동오리의 산을 일컬어서 태을산 또는 견불산이라고 한다. 자못 크고 높은 취암봉(수암봉)이 있어 그 독수리 ‘취(鷲)’자로 인연하여 지방 사람들이 수리(修理)라 불렀다.(東五 一云太乙山 一云見佛山 頗峻高 有鷲岩峯 方言 謂鷲爲修理) 이런 ‘취암(鷲岩)’이란 말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나온다.(本朝因之. 鎭山. 曰鷲岩) 이 ‘취암(鷲岩)’을 ‘대전(大田)’을 순우리말로 ‘한밭’이라고 하듯이 순우리말로‘수리암’이라 하다가 수리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암봉(秀岩峰)이란 이름이 남았을 것이다. 수리산의 어원(語源)으로는 신라 진흥왕(539∼575) 때 창건한 절이 신심(信心)을 닦는 성지(聖地)라 하여 수리사(修理寺)라 하였고, 따라서 산 이름도 수리산(修理山)이라 하였는데 그 후 빼어난 산이라 하여 수리산(秀理山)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설로는 조선왕조의 왕손(王孫)이 수도(修道)한 산이라 해서 수리산(修李山), 산세가 독수리의 부리와 같다 하여 수리산이라 했다는 등 여러 가지 설(說)들이 전하여 온다.
나의 수리산 산행은 1호선 전철 명학역(鳴鶴驛)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11시 넘어 도착한데다가 종주하고 싶은 욕심에 시간을 아끼려고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이 역에서 가장 가깝다는 소곡안마을(신성고 정문)이 그 들머리였다. 여기서부터 관모봉까지는 1,450m 거리다.
산길은 쭉쭉 벋은 키 큰 소나무가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 길은 잘 가꾸어 놓은 길이요, 정성껏 마련한 이정표와 쉼터가 있어 도립공원 지정 전의 예보던 풍경이 아니다.
진달래는 잎을 활짝 열어 먼 고장에서 찾아온 나그네를 즐겁게 맞고 있다.
군포시가 정성껏 마련해 놓은 로프를 타고 오르다가 나무가 시야의 가림을 멈추는 곳에 관악산 사이의 군포시의 전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군포(軍浦)란 이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에는 이 고장 이름을 ‘軍飽(군포)’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여 승려 의병과 관군이 이곳에서 재정비할 때였다. 이때 이 고장 마을 사람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관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이에 힘을 얻은 관군이 의병과 합세하여 왜병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부터 이 지역을 굶주린 관군이 배부르게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軍飽)라 하였으나 시대 변천에 따라 지금처럼 군포(軍浦)로 한자가 바뀐 것이다. -군포시청 홈페이지)
얼마를 더 가니 철 층계가 가파르게 정상을 향하는데 그 정상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있다. 그 방향에 따라서 보이는 뾰족한 것이 벼슬아치들이 쓰는 관모(冠帽)를 닮았기 때문에 관모봉(冠帽峰)이라 하였다는 봉이다.
나는 웬만한 산꾼이면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올 수 있는 겨우 426.2m 높이의 야산 관모봉의1,450m 되는 짧은 거리를 수없이 쉬면서 올랐다. 희수(喜壽)를 넘고 보니 나이는 나이라, 수리산도 나에게는 벅찬 산행이 되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여성들이 많이 찾는 산이 수리산이라고 하던데 말이다.
관모봉(冠帽峰)에서 이 산의 최고봉이라는 태을봉(太乙峰)은 0.74km 거리에 있었다.
태을봉 가는 길은 능선길이 아니라 아깝게도 내림 길로 시작된다.
두 번째 만나는 노랑바위 갈림길을 지나니 다시 오름길 바로 위가 수리산의 정상인 것 같다.
요란한 흰 밧줄을 부여잡고 오르니 드넓은 마당이 있다 헬리콥터장이다. 그곳에 도립공원 이전에 못 보던 태을봉(太乙봉, 489.2m, =수리산) 정상석이 우람하게 서있다. - 옛 기록에 현재 수리산의 주봉인 태을봉이 옛날에는 태을산이라는 독립된 산으로 불렸다. ‘태을(太乙)’이란 동양사상에서 우주의 본체 즉 천지만물의 출현 및 성립의 근원을 뜻하며 풍수지리에서는 큰 독수리가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 내리는 모습을 천을봉, 태을봉이라 한다.
옛날에 왔을 때는 돌로 쌓은 탑이 있었고 어느 산악회에서 만든 조그만 정상석만이 있었던 곳이었다.
거기 마련된 식탁과 의자에 앉아 준비해 온 캔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분주히 들것을 들고 달려가는 젊은이들이 있다. 119구조대원이었다. 추락사고가 난 모양이다.
*. 119 구조대원들의 나라 사랑 , 겨레 사랑
수리산은 육산이지만 도중 돌산이기도 한데 그중 가장 위험한 구간이 태을봉에서 1.86km 거리에 있는 슬기봉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90도의 절벽에 밧줄이 길게 매어진 구간을 막 지내려 하는데 추락한 40대의 여인의 피 묻은 얼굴이 들것에 실려 오르고 있다. 나는 급히 카메라를 열었다. "이 사진, 신문기사에 실릴 거에요." 하면서-.
요즈음 나는 '국제인터넷뉴스신문' 기자로 위촉 받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마운 우리 119구조대원들이 한 인간의 목숨을 구하고 있는 지고의 순간을 취재한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계속되는 길은 너덜겅으로 그 위에 낙엽까지 덮여 길을 분간하기도 어려운 바윗길을 두 스틱에 의지하여 기다 싶이 내려오다 보니 갑자기 조용한 산중에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하다. 아마도 추락한 부상자 여인을 싣고 급히 병원 응급실로 가는 헬기 소리 같다. 부디 무사하기를 기원해 본다.
힘들게 힘들게 너덜겅 하산 길을 마치고 슬기봉과 출렁다리 갈림길에서 아점으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하산하는 아까 만났던 그 119 대원들을 만났다. 다음은 그 중 양(梁)대원이 내게 보낸 문자 메일이고 이에 답하여 보낸 나의 졸시(拙詩)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좀 전에 수리산에 출동했던 안양 119구조대 소방교 양재영입니다. 현장에서 구조업무를 하다보면 가끔은 힘들 때도 있지만 사진도 찍어 주시고 글도 써 주신다고 하니 정말 힘이 납니다. 혹시 그 사진을 메시지나 E-mail로 받아 볼 수 있을까요?~
아아, 119여 -안양소방서 1‘19구조대원’ 들에게
내가 젊었다면
나도 119구조대원 되어 살고 싶다.
나라와 겨레가 위급으로 부르면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작은 영웅의 삶을 살고 싶어서다.
나만을 위해 사는 세상에서
너와 우리를 위해 사는 젊음이란
얼마나 찬란한 축복이던가.
우리 장인(丈人)이 생명을 다투시던 날
앰뷸런스로 위급을 도움 받던 날
드린 감사의 금일봉에
가슴을 찌르던 그 말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아닙니다. 우리는 Korea의 119 구조대원입니다."
스마트폰과 스틱에 매단 호루라기로 무장하고
희수(喜壽) 나이 지나서도
내가 이렇게 전국의 산을 홀로 누빌 수 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부르면 달려오는
다정한 형제 같은 가족 같은
든든한 우리 119구조대원이 있어서인가 보다.
- 2014년 수리산 사고 현장에서
*. 출렁다리로 가는 길 출렁다리로 가는 길은 애써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야 했다. 그러나 조금도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연 그대로의 너덜겅이 내게 준 교훈 때문이었다. 인공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통나무로 곱게 만든 오름길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길이 길다우니 마음도 편안하였다. 그 길에는 진달래가 더 만발하여 있었다.
슬기봉 코스를 생략하고 구태여 출렁다리를 택한 것은 새로운 것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슬기봉은 오르지도 못하고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하산하는 길이 아니던가.
통나무 길을 올라 방금 핀 진달래 길을 지나 고운 산길을 가다 보니 나를 막아서는 정자가 있다. 제3전망대였다. 전망대는 말뿐 그 전망을 나무들이 모두 막아 서 있다. 그 틈 사이로 수리터널과 슬기봉의 군부대와 수암봉이 겨우 보인다. 전망대이니 그 이름값을 위해서라도 소나무 가지를 전지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제3전망대서 출렁다리까지는 200m 거리에 있었다.
수리산 출렁다리는 2012년 12월에 안양시 만안구에서 2~3 전망대 중간에 설치한 길이 25m의 다리다. 일명 '수리수리 마하수리수리산 출렁다리'다. 다리를 건너면 이벤트 표지가 있다. 빨강(사랑), 노랑(가족), 파랑(건강) 그 중 버튼 하나를 누르면 다리를 건너는 동안 관련 멘트와 어울리는 감미로운 음악을 스피커를 통해 청취할 수 있게 방송 시스템을 설치한 것이다. 노란 가족버튼을 눌러 보았더니 묵묵부답이다. 운영시간인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사이를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출렁다리란 구름다리를 말한다. 구름다리란 한길이나 철길 등을 건너질러 공중으로 놓은 다리다. 산속의 그 구름다리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데 거기에다가 안양시는 멋을 보텐 것이다. 그 등산객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다시 멋있는 진달래 산길을 지나 아름다운 나무 층계를 지나니 넓은 마당이 있다. 바로 그 위가 6각 정자가 있는 제2전망대였다.
전망대에서는 오늘 가기로 했던 슬기봉 군부대와 안산(安山)의 진산이며 안산천(安山川)의 발원지라는 수암봉(395m)이 보이고 바로 오른 쪽에 다녀온 태을봉이 나를 굽어보고 있다.
바로 그 아래가 철쭉꽃 만개한 제1전망대였다. 맑은 날에는 안산 시화공단, 시흥시와 광명시 까지 보인다는데 요즈음은 미세먼지의 날씨라 속절없이 전망안내판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 병목석탑
이 병목석탑 아래가 '병목안시립공원'이다. 광장에 폭포도 있고 시민들의 쉼터도 있다. 병목안이란 이 아랫동네인 안양9동의 마을의 옛 이름이다. 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마을 입구는 좁으나 그 안에 들어서면 골이 깊고 넓다 하여 생긴 마을 명칭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안양시에서 1990년에 수리산 산림욕장과 함께 준공한 탑이 '병목석탑'이다. 높이 7m, 폭3m의 이탑은 이 병목안의 5만 6천여 개의 자연석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국 최대의 자연석탑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제1만남의 광장을 지나 숲속교실 등 병목시민공원을 둘러보며 병목캠푸장을 지나 귀가를 서둘러야겠다.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이 어디겠는가?
이 시간에 나만을 다리고 있는 오직 하나의 여인인 아내가 사는 일산(一山)으로 향한다. 명학역까지 15번 버스를 타고. 오늘의 행복을 주던 수리산의 사진을 한 아름 안고.
연인산(戀人山) 2016. 1. 3 퇴고
< 연인산(1,068m)/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면, 북면/'한뫼산악회‘ 따라>
서울에서 60km로 3시간 이내에 갈 수 있다는 산 철쭉꽃을 보러 아내와 함께 가평의 연인산(戀人山)을 오르고 있다. 비가 막 갠 초여름 5월 아침이다. 연인산은 경기도 가평군 한북정맥(광주산맥) 명지산 자락에 있는 1,068m의 고산이다. 작년 남원 운봉읍 ‘바래봉’의 진홍빛 철쭉꽃을 보고, ‘지상에도 이런 화원(花園)이 있었구나!’ 감탄, 감탄하였더니 오늘은 연인산의 철쭉제라는 그 이름에 끌려서 동네 산악회 따라 온 것이다.
어떻게 연인산(戀人山)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연인산은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과 북면 하면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가평 8경 중 제3경으로 꼽히는 용추구곡(龍湫九谷)의 수원 발원지가 되는 최고봉인데도 그동안 이름 없는 무명의 산이었다. 가평군에서는 이 고장 발전을 위해서 1999년 3월 15일 그 산 이름을 공모해서 정한 이름이 연인산(戀人山)이었다.
옛날 이 고장의 한 처녀가 바위에 앉아 바느질을 하다가 주위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구경하다가 발을 헛디디어 못에 빠져 죽었다는 유래를 가진 처녀소(處女沼)가 있는데 이와 연관된 이름 같다.
가평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도 전하여 온다.
옛날 길수라는 청년이 홀로 연인산 속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며, 겨울에는 숯을 구워 팔기도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길수는 흉년이 들던 어느 해 그곳의 김참판 댁에 쌀을 꾸어 먹은 것이 빌미가 되어 그 집에 종으로 살고 있는 소정이란 처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길수는 용기를 내어서 김참판에게 소정과 혼인하고 싶다고 말하자, 소정을 탐내던 김참판은 길수에게 "조 백 가마를 내놓던가, 아니면 숯 가마터를 내놓고 이 고장을 떠나 살면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고민하던 길수는 연인산 정상 근처 밭을 발견하고 이를 일구어 조를 심고 밤낮으로 일해서 조 백가마가 무르 익어갈 무렵 김참판은 길수를 관가에다가 역적의 자식이라고 무고한 모함을 하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친 길수는 소정과 함께 도망가고자 소정을 찾아갔으나 길수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잡혀갔다는 소문에 낙담한 소정은 죽어버린 후였다. 소정의 시신을 안고 아홉 마지기 밭으로 돌아간 길수는 자신의 희망이었던 조를 불태우며 그 안으로 뛰어들어 함께 불에 타죽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불란 곳을 찾아 올라가 보니 두 사람은 간 곳 없고 신기하게도 신발 두 짝이 놓여 있는 자리 주위에 철쭉나무와 얼레지가 불에 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도 봄이면 연인상 정상 부근에 얼레지꽃과 철쭉꽃이 눈부시게 피어오르고 있다. 이로부터 연인들이 연인산 정상을 찾아 올라와서 사랑을 기원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의 산이 되었다. -연인산도립공원 홈페이지
연인산에는 화전민들의 생활의 터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연인 산 정상의 서쪽으로 보면 숲과 숲 사이에 산불방화 공간이 있다. 그래서였을까 연인능선 골로 내려가다 보면 총각이 쓰던 것 같은 '숯 가마터'가 있고 봄이 오면 철쭉꽃과 엘레지 꽃이 수줍게도 땅을 향하여 꽃술을 터뜨리고 있다. 우리 부부는 연인 산의 철쭉을 보러 가는 코스 중에 장수능선을 타는 것이 가장 좋다하여 지금은 폐교가 되어서 주차장이 되어버린 백둔 초등학교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하는데 팍팍한 아스팔트 삼림도로가 오래 계속되어 실망을 주고 있다. 장수고개에 이르니 비로소 이정표가 있어 연인산 정상까지가 3.9km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산을 오르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면 859m 노적봉(옛 이름, 구나무산)으로 가는 길이다. 800m 이상서부터 시작된다는 철쭉은 흰빛 가까운 연분홍색으로 철쭉꽃 밭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진다는 바래봉(남원 운봉)이나 덕유산 평전, 지리산 세석철쭉, 제왕 봉 철쭉, 소백산철쭉, 강원도의 두위 산철쭉 같이 군락으로 핀 철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이곳은 철쭉제라 이름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철쭉이 보이다가는 2m도 안 가서 없어지고, 그것도 요즈음이 철쭉의 계절이건만 한쪽은 지고 한쪽은 피고 그리고는 한참을 가야 다시 만나 볼 수가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철쭉의 군락이고 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이곳을 철쭉제로 지정한 사람들은 5월이면 전국에 시작되는 전국의 철쭉 축제를 몇 군데나 가보고 연인산의 철쭉 축제를 시작했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작년 5회 연인산의 철쭉제도 꽃 없는 철쭉제를 거행한 모양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육산의 한가로음을 걷고 있는데 앞서 가던 아내가 기겁을 하며 놀라 비명을 지른다. 산에 와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뱀을 만난 것이다. 그냥 도망가지 않고 나무 옆에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독사였다.
뱀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연인산이 청정지역이라는 징표다.
이곳에 많다는 은방울 투구 꽃, 동자 꽃, 하늘말나리 꽃은 길가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데서는 흔하지 않은 전설에 나왔던 엘레지 꽃과 양지꽃이 철쭉꽃보다 무성하더니 ‘그랬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제6회 들꽃 축제’라는 현수막이 보이고, 들꽃이 온 산등성이를 덮고 있었다. 정상이라고 몇 번이나 속다가 연인 산 정상을 앞두고 있는 ‘장수 샘’이 나그네의 목을 시원 히 준다. 옛날에 '엘레지 샘’이 불리던 곳이다. 정상 입구는 돌로 기둥을 세운 것이 문을 열고 맞는 모양 같아서 신기하고도 반가웠다. 게다가 정상석 근처 커다란 바위에 방위를 음각하여 놓았는데 연인 들꽃 축제 소개 현수막이 이를 덮고 있었지만 이러한 노력을 기울여준 가평 인들이 고마웠다.
정상은 시야를 막는 나무 한 그루가 없어서 북서쪽으로부터 시계바늘 방향으로 790m, 1,036km 귀목봉, 1267m 명지산, 794m 수덕산, 858m 구나무산 뒤 먼 곳까지 시야를 넓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도와주고 있다.
정상이 갈림길이 될 때에 거기 있는 이정표는 나의 마음에 항상 묻고 있다. ‘어때 이리로도 저리로도 가고 싶지?’ 그렇다. 언제 또 온다고 왔던 길로 다시 아깝게 내려가랴. 가능하다면 906m 우정봉을 밟고 우정능선의 산철쭉도 보고 싶고, 아니면 예서 하루 묵더라도 연인능선을 따라 내려가서 감추어진 용추구곡의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고 싶어진다. 연인 산에는 연인과 함께 와야 이 산 특유의 등산의 그 멋을 더할 수가 있다.
이곳에 오면 그 연인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나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할 것이다. 정상 표지에 쓰여 있는 말대로 이곳이 정녕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나의 소망 하나를 이렇게 여기에 남기고도 싶다. 나를 향하여 평생을 함께 한 아내와 세월 속에 주운 시조 한 수를-.
이 글을 편집하고 있는 내 나이 80세, 아내는 76세를 맞는다. 금년 10월 3일로 우리는 금혼식(金婚式)을 맞기 때문이다.
부부(婦夫) 다음 세상 또 있다면
다시 부부(婦夫) 되고 싶다 아내는 내가 되고, 당신은 남편 되어 녹발(綠髮)이 백발(白髮)이 되도록 우리로 살고 싶다. 잔소리 않는 아내 당신에게 되어주고 아내만 위해 사는 나의 남편 당신 되어 저 세상 부부(夫婦)가 되어 지금처럼 살고 싶다.
경포도립공원(鏡浦道立公園)
강릉 시가지로부터 북동쪽 약 6㎞ 지점에 있는 경포대(鏡浦臺) 일원은 1982년 6월에 지정된 도립공원으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경포대(鏡浦臺)와 오죽헌(烏竹軒: 보물 165)을 핵심으로 하는 면적 9.4㎢의 지역을 말한다.
모래톱에 의해 바다와 분리된 석호(潟湖)인 경포호와, 송림(松林) ·백사(白沙)가·푸른 바다와 어울린 경포해수욕장은 여름은 물론 1년 내내 국내외 관광객을 부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이 주변에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 보물 183) ·금란정(金蘭亭) 같은 정자와 선교장(船橋莊:중요민속자료 5) 등의 명승고적과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주변을 아울러 말하면서 여기에 국보 51호인 객사문(客舍門)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한다.
*. 경포호와 경포대(鏡浦臺)
다음은 경포호에 얽힌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다.
-경포호에 있던 자리가 뭍이었던 옛날 옛적에 이곳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한 중이 와서 시주를 청하니 놀부 같이 마음씨가 고약했던 그 부자가 시주 대신 똥을 한 바가지 퍼주는 것이 아닌가. 그랬더니 밤 사이에 뭍이었던 이곳이 큰 호수로 변하였고 곳간에 가득이 쌓였던 쌀이 조개로 변해 버렸다. 그 조개는 이 고장에서는 매복이라고 부르는 민물조개로 찌개거리나 국거리로 쓰이는 강릉 명물로 손꼽히는 먹거리가 되었다.
이 경포호의 아름다음을 조선 선조 때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다음과 같인 노래하고 있다.
"斜샤陽양 峴현山산의 텩튝을 므니발와 羽우蓋개芝지輪륜이 鏡경浦포로 나려가니, 十십里리 氷빙紈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 長댱松숑 울흔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잘샤 모래를 혜리로다."
호수 물이 거울(鏡)과 같이 맑은 호수(湖水)라 하여 경호(鏡湖)라고도 불리는 관동8경 중에서도 으뜸의 경치를 자랑하는 경포호(鏡浦湖, 국가 지점문화재 명승 제108호)의 원래 둘레는 12㎞이었으나 하천에서 흘러드는 토사와 개발 등으로 지금은 그 둘레가 4.3㎞ 축소되었다. 수심은 약 0.96m 로 지금은 강태공에게는 낚시의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그 호수에는 ‘홍장암(紅粧巖)’과 ‘조암(鳥巖)’이라는 바위섬이 있는데 조암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썼다는 ‘鳥巖’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고려말, 조선 초에 홍장(紅粧)이라는 기생이 강릉에 살고 있었다. 박신(朴信)이 강원도 안렴사로 갔을 때 그녀를 사랑하여 정이아주 깊이 들었는데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갈 때 강릉을 찾았더니 강릉부윤(江陵府尹)으로 있던 조운(趙云)이 '홍장은 이미 죽었다'고 하고, 그녀를 마치 신선처럼 꾸민 뒤 박신을 경포호 한송정(寒松亭)으로 유인하여 놀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홍장암(紅粧巖)에 얽혀 전하여 온다.
-서거정의 '동인시화(東人詩話)'
이 경포호의 북쪽 나지막한 언덕에서 이 호수를 굽어보고 있는 경포대(鏡浦臺, 도 지방 유형문화재 제6호)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년)에 지어졌다는 건물이다. 여기서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달맞이 행사'가 열린다.
이때 경포대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이는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다는 낭만적인 곳이 경포대다. 하늘의 떠 있는 달, 호수에 잠긴 달, 바다에 떠 있는 달, 술잔에 비친 달, 님의 눈동자에 어린 달이 그것이다.
철없이 살던 세월을 무심히 지내다가 내 안에 흐르는 낭만의 광맥을 발견하고 시인(詩人)의 마음이 되어 다시 와서 경포호를 바라보니 젊은 시절 나의 강릉(江陵)이 그리워 나도 박신(朴信)처럼 나의 홍장을 뒤돌아보게 된다.
백발(白髮)을 이고 와서 홍장암(紅粧巖) 바라보니
모여 살던 꽃들처럼 생각나는 그리움들
그 옛날
나의 홍장(紅粧)은
어디메쯤 살고 있을까.
꽃들이 모여 살듯이 아름다움도 모여 사는 것인가. 방해정, 경호정(鏡湖亭)· 금란정(金蘭亭) 등의 정자와 사대부의 양반 저택이라는 99간의 옛날 건축물인 선교장(船橋莊, 중요민속자료 5) 이 홍장암과 어울려 이 부근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점심 때라 벗들과 함께 와서 주문진의 회를 탐하여 그냥 간다마는 돌아오는 강릉 단오제에는 홀로 와서 '江강門문橋교 너믄 겨테 大대洋양(동해)'도 보고, 경포해수욕장에 가서 젊어서 헤엄쳐 다녀온 오리바위 십리바위도 나의 추억의 창에 담아오고도 싶다.
*. 오죽헌(烏竹軒, 보물165호)
오죽헌은 15세기 후반 강릉 유현(儒賢)인 최치운(1390~1440)이 지은 건물로 형조참판을 지낸 아들 최응현(崔應賢)에게 물려 준 것을 후에 그의 둘째 사위 이사온(李思溫)이 물려받은 집이다. 이사온은 다시 외동딸 용인 이씨(龍仁李氏)와 결혼한 사위 신명화(申命和, 사임당의 부친)에게 오죽헌을 물려주었다. 신명화는 딸만 다섯을 두었다. 그 중 둘째 딸이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사임당의 외할머니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이 나자 간호를 위해 강릉에 내려와 머물러 있을 때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을 낳았다. 그 후 사임당도 서울 선비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하였으나 아들 없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강릉에서 지내다가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사임당은 이 오죽헌을 셋째 딸의 아들인 외손자 권처균에게 신씨 조상 묘를 돌본다는 조건으로 물려주었다.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줄기의 대나무가 많아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지어 오죽헌(烏竹軒)이란 이름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율곡 어머니며 스승인 신사임당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女性) 한 분을 말하라면 누구를 들겠는가.한 마디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강릉 오죽헌에 가면 신사임당 동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남성들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많이 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을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은 우리민족의 만세(萬歲)의 여성상(女性像)이라 이를 것이다.
그 신사임당(申師任堂)이란 어떤 여성일까? 중종 때 수구파(守舊派)가 신진파(新進派)인 조광조, 김정 등을 사사(私事)하거나 유배시킨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난을 면한 아버지인 진사 신명화(申命和)와 이사온의 외동딸 용인 이(李)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부자집의 다섯째 딸 가운데 둘째 딸로 오죽헌에서 태어난 이가 사임당이다.
사임당은 감찰 벼슬을 지낸 덕수(德水) 이씨 원수(元秀)에게 출가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 맏딸이 '참새', '달과 새', '묵매도(墨梅圖)'로 유명한 여류화가 이 매창이고, 그 세째 아들이 우리나라 백세의 스승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율곡(李栗谷) 선생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지향하던 최고의 여성상은 주(周) 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이었다. 아들 문왕이 강태공(呂尙,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천하를 평정하고 손자 무왕으로 하여금 주나라를 건국하게 한 문왕은 유가(儒家)에서 성천자(聖天子)로 숭앙 받는 황제이다. 그래서 율곡의 어머니의 당호는 사임당(師任堂, 思任堂, 師妊堂, 任師齋)·시임당(媤妊堂)·
임사재(任師齋)로 어느 호(號)나 '임(任)'자가 들어간다.
중국 주(周)아하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같이 그런 아들을 키워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율곡은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조선 성리학을 완성한 사상가요, 철학자이자 대정치가가 되었다. 신사임당의 위대함은 그보다 조선 사회가 바라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여성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여 자아실현(自我實現)하려고 하는 데에 있다.
7세에 벌써 조선 초기의 최고의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여서 안견의 화풍에다가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더하여 역대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 중 '산수도', '묵포도도', '초충도'를 잘 그렸다. 그가 그린 풀이나 벌레의 그림을 볕에 말리려고 마당에 놓았더니 닭이 다가와 쪼아 먹으려 했다는 일화(逸話)가 있을 정도였다. 19세에 덕수 이씨 원수(元秀)와 결혼하였지만, 친정이 무남 오녀(無男五女)라서 신혼 초에는 남편의 허락을 얻어 친정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이것은 시가(媤家) 일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숨은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혼인한 지 몇 달 후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들을 대신하여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친정에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할 수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가운데에 강릉에서 셋째 아들 이이(李珥)가 탄생한 것이다.이런 사임당의 문장은 아들 율곡(栗谷)이 본받고, 그의 그림은 딸 이매창(李梅窓)이 이어받아 후세에 활짝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렇게 율곡 이이는 문필가요 화가인 어머니를 스승으로 두고, 화가인 누나를 가진 행운아였다.게다가 당시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의 교유는 그의 학문을 드높은 경지에 이르게 하였으니, 황강 김계휘(金繼輝), 김장생의 스승인 귀봉 송익필(宋翼弼), 고향 파주의 우계 성혼(成渾)들이 당시의 친구요,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한 동년배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평생의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 *.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역사를 살펴보면 성현이나 위인들은 우리네 같이 혼자 태어나지 않고 한 시대를 공유한다. 율곡보다 36세 위인 퇴계 이황(李滉)이 바로 율곡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함께 '조선 유학(儒學)의 쌍벽'을 이룬 분이시다.율곡은 1558년(명종13년)에 대선배이신 퇴계 선생을 찾아 그분의 고향인 경북 예안을 찾아내려 갔을 때 퇴계 이황 선생은 율곡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한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더니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 그의 재능에 탄복하면서 어린 율곡에게 나이의 고하를 불문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절을 하게 하였다. 이를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율곡은 동방의 대성(東方 大聖)"이라고 하였다 한다. 율곡이 구도장원(九度壯元)으로 9번이나 장원 급제하기 전의 일이었다. 잠깐, 그런데 어린애 같은 질문을 한번 던져 보자. 율곡 선생과 퇴계 선생은 어떤 분이 더 훌륭할까?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덕수(德水) 이(李)씨 율곡의 후손들과 진보(眞寶) 이(李)씨 퇴황의 후손에 물어 보라. 그와 연관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1,000원 짜리는 앞에는 퇴계의 영정과 뒤에는 도산서원이 있고, 5,000원 짜리 앞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과 뒤에는 오죽헌 모습이 있다.이 돈이 처음 찍혀 나오자마자 진보 이씨인 퇴계의 후손들이 조폐공사에 몰려가 시위를 벌렸다. 어째서 우리 할아버지 퇴계가 5,000원 짜리 화폐가 아닌 1,000원 짜리에 쓰였냐는 것이다.그 결과는 조폐공사 측의 재치 있는 해명에 싱겁게 끝나 버렸다. "우리도 그걸 압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훌륭한 사람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 율곡(栗谷) 이이(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호(號) 이야기
파주 임진강 강가를 굽어보는 자리에 화석정(花石亭)이 있다. 그 화석정 아래 층계를 내려가니 거기서 도로 건너 마주 보이는 동네가 율곡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율곡리(栗谷里)다.이이 선생이 호를 밤 '율(栗)', 골 '곡(谷)', 율곡(栗谷)이라 한 것은 자기가 자란 고향의 밤나무 때문이라 생각 된다. 물론 율곡리(栗谷里)란 이름은 그 후에 생긴 지명일 것이다. 그곳에 방문한 때가 가을이었는데 유난히 많은 밤나무 아래 여기 저기 떨어진 산밤을 주워 먹으며 이 율곡 선생의 증조부, 조부의 묘소를 차례로 참배하고 자운서원(慈雲書院)을 향하던 일이 생각난다.그때 가장 아쉬웠던 점은 470 여 년이란 세월이 우리의 거유(巨儒) 이 율곡 선생이 살던 가옥 터를 찾지 못하게 한 것이다.
*. 오죽헌 탐방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가문을 들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퀴리부인(Marie Curie) 가(家)를 들겠다. 2대에 걸쳐서 3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4개의 노벨상을 프랑스와 태어난 조국 폴란드에 바친 영웅 가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성공한 가문을 들라면 나는 또 서슴지 않고 이율곡 가문을 들겠다.
신사임당, 이율곡, 이매창(李梅窓)으로 이어지는 학문과 예술의 세계를 두고 어찌 다시 논할까 해서다. 각 국가의 화폐는 그 나라에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그 도안으로 한다. 우리나라 5만 원권의 얼굴이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요, 5천원권이 이율곡임에 또다시 무슨 말을 덧붙일까.
그런 입지적인 인물들을 모신 입지문(1)을 들어서니 오른쪽에 자경문(2)이 있다. 율곡선생이 금강산에서 공부하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외가인 오죽헌으로 돌아오면서 앞으로 스스로 경계하여야 할 11가지 좌우명인 자경문(自警文)에서 나온 이름이다. 그 첫째가 입지(立志)여서 오죽헌의 중요한 두 문을 입지문(立志門), 자경문(自警門)이라 한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오죽헌(4)은 우리나라 목조 건물 중에 가장 오래 된 건물 중에 하나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 된 목조 건물이다.
이곳 강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려웠던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이 미치지 않은 곳이어서 병화(兵禍)를 피해 남아 있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 '夢龍室(몽룡실)' 앞에 서니 이율곡 탄생 전설이 생각난다.
서울 살던 이원수가 청룡 황룡 꿈을 꾸고사임당 찾아갈 때 대관령 주모 유혹했지만용꿈을
그대로 안고
아내 찾아 운우지락(雲雨之樂).
서울 가던 이 선비 대관령 주모 유혹했지만그 주모 시기 지났다 거절하고 말았다지-.하마면
율곡(栗谷) 선비
주모(酒母) 아들 될 뻔했네.
당시 33세를 오죽헌에서 살던 사임당(師任堂)도 봄날 동해 바닷가에 간 꿈을 꾸었다. 바다 속으로부터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불쑥- 나와 부인의 품에 옥동자를 안겨주는 꿈을 꾸고 아기를 잉태하였다. 그해 12월 26일 새벽이었다. 흑룡(黑龍)이 바다에서 날아와 부인의 침실인 오죽헌 몽룡실의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셋째 아들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다. 그래서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였고, 율곡의 아명(兒名)을 태몽에 용이 보였다 하여 보일 '見(현)' 용 '龍(용)' '見龍'(현용)이라 하였다.
그 오른쪽 '烏竹軒'(오죽헌)은 율곡이 6세 때까지 공부하던 방이다.
사랑채[바깥채](5)는 주로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외부 손님을 접대하던 곳으로 원래는 그 뒤 안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증외조부 이사은과 외조부 신명화, 아버지 이원수 그리고 이종4촌인 권처균이 유하던 곳이다.
'文成祠'(문성사)(4)의 '문성(文成)'은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아 1624년에 인조대왕이 이율곡에게 내린 시호(諡號)다, 이 문성사에 율곡 이이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이 문성사란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니 주의 깊게 보고 올 일이다.
어제각(御製閣)(7)에는 율곡이 친필로 쓴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 시절 사용했다는 벼루가 있다.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대왕이 이를 보고 책에는 머리글을, 벼루 뒷면에는 율곡선생의 학문을 찬양한 글을 새겨 소중히 보관하라는 명을 내리자 이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오죽헌에서 제일 볼 만한 곳은 율곡전시관 (8)이다.
율곡 전시관에서 구체적인 이율곡과 신사임당의 이모저모를 보고 입지문을 나서니 광장 건너에 '시립박물관', '선정비군'(문화재자료 제48호), '향토민속관'과 '야외 전시장' 등이 있다. 거기 들려서 꼭 보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정에 쫓겨 경포대를 향한다.
이렇게 아쉬움을 두고 떠나 그리워하다 다시 찾게 되는 것이 여행(旅行)인가 보다.
낙산도립공원(洛山道立公園)
*. 낙산사(洛山寺)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洛山寺)부터 하조대(河趙臺)까지 연장 24km 해안선 주변을 낙산도립공원(洛山道立公園)이라 한다. 그래서 낙산사(洛山寺)는 나의 ‘낙산사도립공원’ 출발 기점이기도 하다.
洛山(낙산)은‘補陀伽洛山(보타락가산, Potalaka)’의 준 말이다. ‘補陀洛(보타락)’이란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을 말한다.
이웃나라를 둘러보아도 관세음보살이 상주(常住)하는 곳은 해안 가로, 인도(印度)인 경우도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伽山)’이며, 중국은 경치가 좋은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도(‘補陀島)에 있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도 남해 금산사의 보리암(菩리庵), 서해 강화도 낙가산의 보문사(普門寺), 동해의 오봉산(五峰山)의 낙산사(洛山寺)로 모두 바닷가에 있다.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화엄학(華嚴學)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신라 문무왕 10년에 관세음보살이 낙산 동쪽바닷가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親見)하기 위해서 그 굴 앞에서 7일간 간절히 기도한 후 아침이었다. 그동안 앉아 있던 좌구(坐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8부 신장들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굴속(관음굴)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들어가 참배하고 공중에서 떨어진 수정염주 한 벌과, 동해용이 주는 여의보주 한 벌을 받고 물러 나왔다.
의상은 다시 7일 동안 수행하여 드디어 관세음보살님을 뵈었더니 의상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 자리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圓通寶殿) 자리였다.
굴에서 나오니 말씀하시던 그 자리에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나왔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을 짓고 흙으로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고 절 이름을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 하여 낙산사(洛山寺)라 하였다. 의상대사는 용왕에게서 받은 구술을 법당에 모셔 두고 절을 떠났다. 관세음보살님으로부터 절의 건립 위치를 전해 받아 지은 원통보전(圓通寶殿)은 이 낙산사의 중심 금당(金堂)으로 법당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1362호), 법당 앞에 서 있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등 귀중한 보물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뿐인가 원통보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220m의 담장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쌓았다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담장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36호로 알려진 담장이다.
이 담장이 유명한 것은 이 담을 쌓을 때 적토 빛은 진흙에 기름을 먹여서 구운 벽돌로 쌓은 것이어서 매우 튼튼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높이가 4m, 둘레는 30여m이다.
이후 낙산사는 1,340여 년 동안의 관음성지로 역사를 이어 관동8경(關東8景)의 하나로, 국가 명승 제27호, 사적지 제495호로 지정된 명찰이다.
*.의상대(義湘臺)
우리의 낙산사 탐방은 후문 매표소에서 시작되어 이 절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대를 향한다.
의상대(義湘臺)는 의상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지은 정자로 고송(古松)과 8각 정자가 바다와 어울린 경치로 서 있는데 이를 시샘하듯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
이곳에 맑은 날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이 되면 동해 최고의 일출(日出) 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라는데-. 나도 모르게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일절이 입가에 맴돈다.
梨花는 벌써 지고 접동새 슬피 울 제
洛山 동반으로 義湘臺에 올라 앉아
日出을 보리라 밤중만 니러하니
祥雲이 집히는 듯 六龍이 바치는 듯
바다에서 떠날 제는 萬國이 일위더니
천중에 치뜨니 毫髮을 헤리로다.
*.홍련암(紅蓮庵)
홍련암 가는 길에 관세음보살이 병으로 물을 떨어뜨리는 감로수(甘露水)가 있는데 이와 연관된 재미있는 전설이 나그네의 발을 멈추게 한다.
-원효대사가 낙산사를 참배하기 위해 오다가 보니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대사가 그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은 벼가 익지 않았다고 하였다.
대사가 다시 길을 가다가 보니 속옷을 빠는 한 여인을 만나서 물 한 목음을 청했더니 여인이 빨래를 빠는 더러운 물을 퍼 주는 것이 아닌가.
원효가 그 물을 버리고 그 윗물을 먹자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가며 "스님 가지 마세요." 하더니 숨어 버렸다. 원효가 돌아보니 여인은 없어지고 짚신 한 짝이 남아 있었다. 절에 와서 보니 나머지 짚신 한 짝이 관음상 앞에 있었다. 비로소 원효는 앞서 만난 두 여인이 관음의 진신(眞身)이었음을 깨닫고 이를 못 알아본 자신을 후회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일연)
홍련암(명승 27호)이 가까워지면서 목탁소리가 은은한데 홍련암은 깎아진 절벽의 관음굴위에 세워진 암자였다.
염불이 한창이지만 염치를 무릅쓰고 들어가서 마루 가운데 뚫린 네모진 곳을 통하여 밑을 살펴보니 깊은 저 바다의 파도가 하얀 포말을 내며 부서지고 있는데, 거기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금’하는 그림이 있어 무례하게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의상대사가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서 그 굴 앞에서 7일 동안 기도하자 바다 위에 붉은 연꽃(紅蓮)이 솟으면서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現身)하여서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그 이름을 홍련암(紅蓮庵)이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관음보살이 말한 죽순이 솟은 자리에 지은 것이 홍련암이란 설도 있고, 의상에게 여의주를 바친 용왕에게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절벽 위에 법당을 바다가 보이도록 지었다고도 한다.
*.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가는 길
이정표 따라 해수관음상 가는 길에 ‘의상대사기념관’에 들렀더니 의상의 영정도 모셔져 있지만 그중 인상 깊은 것은 지난 2005년 낙산사 화재로 불탄 당우의 기둥, 종들이 있어 당시의 참상을 엿보게 한다.
밖을 나서니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약수터에 '마음을 씻는 물', 그 옆에 고송 아래에 '길에게 길을 묻다'와 같은 법어나 화두 같은 말들이 쓰여 있다.
길에게 길을 묻는 대신 나는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 해수관음상을 향해 가다 보니 '지장전 (地藏殿)' 앞에 낙산사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이라는 '寶陀殿(보타전)이 있다. 법당에는 천수(千手), 십일면(十一面) 등 많은 관음보살을 모신 것을 보니 낙산사가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설렘이 있는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20m 아래에 ‘공중사리탑(보물 제1723)’이 그냥 가지 말고 들렸다 가라고 이정표로 나를 유혹한다.
-1683년(숙종9년) 홍련암 불상에 금칠을 할 때였다. 갑자기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하더니 공중에서 탁상 위로 떨어지는 것이 있다. 보니 사리(奢利)여서 이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탑비가 해수관음보살 바로 아래 중턱에서 망망대해와 의상대 그리고 제방과 등대를 굽어보고 있는 공중사리탑(보물 제1723)였다.
이 사리탑의 고풍스런 유래비인 ‘해수관음공중시리탑비’가 홍련암 입구 언덕에 고풍스럽게 서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말 것이다.
*.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
드디어 나도 낙산사 가면 누구나 꼭 들리는 해수관음상 앞에 섰다. 활짝 핀 연꽃 위에 우뚝 서서 왼손에 감로수(甘露水)병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수인(手印)을 짓고 있는 해수관음상 앞에 섰다. 수인(手印)이란 불보살이 당신의 서원(誓願)을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양을 말한다.
낙산사 해수관음보살의 서원(誓願)은 무엇일까?대자대비(大慈大悲)가 부처들의 서원이니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 것이다.
여기가 해방 후 북한 땅이다가 6.25 이후 수복지역이라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일 것이다. 평화 통일일 것이다.
높이 16m의 불상 밑에 화살표가 있어 다가 가보니 "두꺼비(삼족섬)를 만지고 가면 두 가지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하여 불상 밑의 거북이를 만지며 나도 소원을 빌었다. 나도 소원을 빌어 본다.
‘저로 하여금 잃거나 잊고 찾지 않는 삶이 되게 도와주소서. 저는 하루 중에 1/5 이상을 찾는데 소비하는 중생입니다. 나무아미타불 ilman'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통하여 원통보전으로 가는 길에서의 나의 서원이었다.
*. 불탄 사찰 문화재들
나는 화재로 불탄 후 새로 건축한 지금의 남대문이 과연 국보1호일까 하는 생각에 회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국보 제180호인 김정희의 '완당세한도(玩堂歲寒圖)'가 불의에 참화로 불타버려서 그걸 원형과 똑 같이 복원해 놓았다면 그 세한도가 국보 제150호라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국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국보란 원형에 따르는 이름이지 이름만이 세습되는 것이 아니란 견해다.
그런 생각에서 보면 낙산사에는 누차 화재로 소실된 보물급 아까운 문화재들이 너무 많다.
의상대사의 창건 이래 너무 잦은 화마(火魔)가 휩쓸고 갔기 때문이다.
낙산사는 고려 초기에도 산불이 있었고, 몽고의 침략, 성종 때, 임진왜란과 6.25 때도 전소된 사찰이다. 2005년에는 또 산불로 거의 전소된 절이라서 낙산사를 둘러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여느 고찰(古刹)에 들러서 느끼게 되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맛이 전혀 없이 새로 지은 사찰 같다는 느낌이다.그래서 복원한 낙산사 동종(銅鐘)은 보물479호에서 해제되었다는 우울한 소식이 있다.
2005년 화재에서 당우 20여 채 중 홍련암과 의상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목재 당우가 전소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원통보전에 봉안되어 있던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1362호) 불상을 스님들이 지혜와 원력으로 화마 속에서도 안전한 지하로 옮겨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그 중에도 아까운 것으로 홍예문(강원도유형문화재 33호), 동종(보물479호), 원통보전(강원 유형문화재 제36호), 보타전 등이다.
그래 그런가. 설산당이나 동해의 일출을 맞이하는 누각이라는 賓日樓(빈일루)도, 사천왕문도 그리고 세조가 1467년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인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제 33호)도 원형이 아닌 복원한 건물들이라 시큰둥하게 보고 온 것 같다.
낙산 탐방을 마치고 정문을 통하여 내려오다 보니 낙산해수욕장이 울창한 송림을 뒤로 하고 4km의 백사장이 커다란 활모양을 그리며 파도와 어울리고 있다.
해안에서 70m까지 바다로 들어가도 1.5m밖에 안 되는 깊이에다가, 낙산사와 설악산의 주변 관광지 등으로 하여 경포대와 함께 동해안 2대 해수욕장이라는 낙산해수욕장이었다.
게다가 절벽 위의 팔각정 의상대의 일출은 해수욕장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두루 가춘 곳이 아닌가.
하조대(河趙臺) 여행은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나는 명승지를 찾아 낯선 여행지에서 그 고장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 우선 찾아보게 되는 곳이 그 ‘고장의 8경이다. 내가 찾아온 그 ’양양군(襄陽郡)8경‘은 다음과 같다.
제1 남대천, 제2 대청봉(설악산 주봉), 제3 오색령(한계령), 제4 오색 주전골, 제5 하조대, 제6 죽도항, 제7 남애항, 제8 낙산사‘
양양8경’을 찾아보면서 나는 무지 행복하다.
한국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명승지가 이 양양에 거의 모였구나 하는 놀라움에다가 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이런 명승지를 다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행복은 그 중 몇 개를 빼고는 거의 다 글로 남긴 곳들이다.
오늘은 거기서 빠진 하조대(河趙臺) 일원을 가는 날이니 다른 사람이 내 행복의 깊이를 어찌 알랴.
우리는 낭만가도(Romantic Road of Korea)를 따라 하조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나의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독일의 백조의 성((Neuschwanstein)성에서 로덴츠부르크(Rothens db der Tauber)를 향하여 달리던 길이 낭만가도였는데 거기서 이름을 따온 것 같다.
한국의 낭만가도(浪漫街道)는 우리나라 최북단 고성에서 속초- 양양- 강릉- 동해- 삼척을 잇는 동해안의 빼어난 해안절경 길인데, 가다 보니 이런 생각이 난다.
오늘은 택시를 이용하지만 언제 마음먹고 아내와 함께 차를 가지고 와서 고성에서 삼척까지 달려 보리라. 그땐 지금처럼 대충 지나치지 말고 곳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일일이 참견하며 다니고 싶다고-.
*. 하조대(河趙臺, 명승 68호) 이야기
하조대는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리 7번 구 도로의 해안가에 있는 경승지(景勝地)로 양양8경 중 제5경이다.
하조대에는 기암절벽 위에 河趙臺(하조대)란 6각 정자가 서 있고 그 옆에 등대가 우뚝한데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을 뒤에 둔 4km의 백사장에 수심(水深)이 완만한 '하조대 해수욕장'이 있다.
그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우면 예부터 이런 말이 전해 왔을까.
-이 하조대를 한번 구경한 이는 저절로 딴 사람이 되고, 10년이 지나도 그 얼굴에 산수자연의 기상이 서려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치 좋은 곳에는 어느 곳에나 군부대가 있네요.” 하는 함께 간 기사의 말대로 군부대가 관람 시간을 제약하고 있는 철조망 따라 층계를 조금 오르내리는 곳에 하조대 전설을 알리는 입간판이 있다.
-고려 말 신돈(辛旽)의 비행과 최영(崔瑩)장군의 요동 공략이 불가함을 반대하다가 유배생활을 하던 하륜(河崙)과, 최영의 휘하에 있다가 우왕의 폐위를 도모한 조준(趙浚)이 조선개국 공신이 되기 전 잠시 은거하던 곳이라 해서 두 분의 성(姓)을 따서 하조대(河趙臺)란 명칭이 유래되었다.
또 다른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민초들의 이야기도 있다.
-신라 때 이 고장에 대대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던 지방호족인 하씨(河氏) 문중의 총각과 조씨(趙氏) 문중의 처녀가 남 몰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나머지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이루자고 이곳 절벽에서 함께 몸을 던져 하조대의 넋이 되었다.하조대 6각정 정자 절벽 주변에는 해당화가 동해안의 어느 곳보다 붉게 피는데 그것은 두 연인의 애절한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이 고장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하조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의 하나는 바위 사이를 뚫고 자란 수령 200년이라는 9m의 한 그루의 소나무다.
이런 소나무를 중국 황산(黃山)에 갔더니 파석송(破石松)이라 하고 있다.
왜 소나무를 한자로 '松'이라 쓰는가.
'松'을 파자(破字)하면 '木+公'이 된다. 나무[木] 중에 공작(公爵)이란 말이다.
보라, 저 소나무는 오작(五爵)의 우두머리인 공작(公爵) 벼슬을 줄 만하지 않은가.
태백산(太白山) <2010년 1월 19일 태백산/유일사매표소→유일사→주목군락→장군봉(정상)→천제단→만경사→당골/ 산속세계 따라> *. 유일사(唯一寺) 등정길
태백산 등산 코스는 5개가 있다.유일사코스: 매표소입구→유일사쉼터→장군봉→1.7km천재단(4km/2시간) 백단사코스: 백단사입구→반재→망경사→천재단(4km/2시간) 당골코스: 당골광장→반재→망경사→천재단(4.4km/2시간 30분) 문수봉코스: 당골광장 →제당골 →문수봉 →천제단(4km/2시간)
사길령코스: 사길령입구→유일사 쉼터→장군봉→천재단(4.7km/2시간 40분) 태백산을 관광으로 갔거나 승용차를 몰고 등산을 할 경우에는 원점산행을 위해서 볼거리가 많은 당골 코스로 가야 한다. 태백산의 무속인들이 신성시 하는 당골에서 산 기도를 드리면 신기(神氣)가 한국의 어느 산보다도 기(氣) 충전이 잘 되는 곳으로 많은 무속인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유일사매표소(해발880m)를 들머리로 등산을 시작한다.
들머리가 해발 800m라니 태백산(1,567m) 정상까지는 700m만 오르는 것이니 태백산은 크게 힘든 산이 아니다.이 코스는 주목(朱木) 군락지를 거쳐서 장군봉(1,566.7m)과 천제단(天祭壇, 1,560.6m)을 보고 문수봉(文殊峰, 1,517m)을 건너다보며 망경사(望鏡寺)를 지나 단군성전(檀君聖殿)과 석탄박물관 그리고 내일(1월 20일)부터 시작된다는 ‘눈 조각축제’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산악회가 선호하는 한국의 대표 겨울산지이다. *. 도립공원 태백산 이야기 태백산은 백두산과 더불어 우리 민족에게는 신성시 되는 태백산맥과 백두대간의 중추가 되는 민족의 영산이다. 한국의 국립공원은 대부분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 중의 큰 산을 중심으로 지정된 산들이다. 백두산에서 설악산, 오대산을 따라 태백산까지 흘러가가는 백두대간은 월악산, 속리산을 지나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그 중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산이 태백산(太白山, 1,567m)이다. 그래서 환경부는 태백산 국립공원(太白山國立公園) 추가 지정을 놓고 타당성을 조사하여 21번째 국립공원으로 태백산을 지정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태백시의회와 사회단체 그리고 주민의 집단적 반발로 인하여 중단하고 말았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영월군 상동에 있는 공군사격장 이전도 문제가 되지만, 그보다 태백산 주변의 각종 개발에 제약을 받고, 휴양도시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등의 지역적인 이해타산의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태백산은 도립공원(道立公園)이지만 2009년에 43만여 명의 찾을 정도로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구태여 국립공원으로 지정할 필요가 없다는 배부른 이유에서다. *.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사는 주목(朱木) 이야기 “어디서 오셨습니까?" ”부산, 진해, 대구, 온양, 발안에서 오셨다고요. 저는 산에서 온 사람입니다. ‘일산(一山)’ 이란 산(山) 말입니다. ㅎ ㅎ~. “ 금년은 유난히 춥고 전국적으로 폭설에 가까운 눈이 많이 내려서 설화(雪花)를 구경하러 전국에서 눈의 나라 태백산에 온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올 겨울 영동 지방에는 건조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비와 눈이 적게 내려서, 눈의 나라 태백산에도 기대하던 설화는 없었지만 처음서부터 끝까지 눈길이어서 초입에서부터 아이젠을 착용하여야 했다.
유일사매표소에서 유일사(唯一寺)까지는 2.3km로 45분 거리다. 거기서 500m 오르면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다. '유일사 2km, 천제단 3.6km/유일사매표소 0.5km/유일사 슄터 1.8km'
유일사 쉼까지도 임도로 찝차가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길이지만 이 길로는 유일사로 짐을 실어 나르는 삭도(索道)를 따라 100m를 내려가서야 유일사를 볼 수 있는 게 흠이 있다. 유일사쉼터(해발1,260m에)까지는 등산초보자나 가족 산행지로 적합할 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이 쉼터는 사길령매표소에서 2.4m 오르는 길과 합류점이기도 했다. 유일사쉼터부터는 차도를 버리고 등산길로 접어드는 가파른 오름길이 시작된다. 드디어 커다란 주목을 보니 주목군락지가 가까운가 보다.
여기에 4,000여 그루의 주목이 있다.
제일 처음 보는 주목은 '수령 600년, 수고 9m로 '표고가 700m 이상의 고산에서 자생하는 상록교목이다. 상록(常綠)이란 늘 푸른 나무요, 교목(喬木)이란 키 작은 관목(灌木)의 대가 되는 말이다. 주목은 줄기가 곧고 굵게 높이 자라는 나무로 소나무와 같이 위쪽에 가지가 많은 키가 큰 나무를 말한다.
그 줄기와 가지가 적갈색인 데다가 붉은빛의 염료로 쓰이기 때문에 붉을 '朱'(주), 주목(朱木)이라고 하는 나무다. 주목은 4월이면 꽃이 피고 10월에 붉은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독이 있어 먹으면 설사를 한다. 한방에서는 그 잎을 말려 신장병(腎臟病)에 사용한다 하니 잘 먹으면 약이 되고 잘못 먹으면 병이 된다는 말이 주목 열매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주목은 설악산, 오대산, 소백산과 같이 한랭한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나무로 남방 한계선으로 소백산 희방사 이남부터는 없는 나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산다는 태백산 주목에도 쓰러지지 말라고 깁스를 하여 놓았고, 고사목도 있는 것을 보니 생명체의 유한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 천제단(天祭壇, 1,560.6m)과 장군단(將軍壇, 1.566.7m) 주목군락지를 지나니 정상에 우뚝 돌탑 같은 것이 있다. 여기가 태백산 최고봉인 장군봉(1566.7m)이다. 드디어 나는 한국에서 7번째로 높다는 태백산에 오른 것이다. 한국의 높은 산(山) 순위는 1위 한라산 1,950m 제주도[국립공원] 2위 지리산(천왕봉) 1,915m, 전남 구례, 전북 남원, 경남 함양, 산청, 하동[국립공원] 3위 설악산(대청봉) 1,707.9m, 강원 속초, 인제, 양양[국립공원] 4위 덕유산 1,614m, 전북 무주, 장수, 경남 거창, 함양 [국립공원] 5위 계방산 1,577m, 강원 홍천 내면, 평창 진부면 6위 함백산 1,573m, 강원 정선 고한읍, 태백 7위 태백산 1,566.7m, 강원 태백, 경북 봉화 석포면[도립공원] 8위 오대산 1,563.4m, 강원 홍천 내면, 평창 진부면, 도암면[국립공원] 그 태백산 정상에 둘레 20m, 높이 2m의 장방형의 장군단(將軍壇)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이 거행되던 곳인데, 지금까지 행하여지는 곳은 여기서 300m 아래에 천제단에서였다. 그런데 장군단 제단 위에는 돌 셋을 정성껏 세워 모셨는데 이는 무엇을 상징하는 돌일까? 우리의 국조 단군왕검과 관련한 환인, 환웅, 단군을 상징하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사상에 의하면 생명체는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있어 여섯 가지 세상에 번갈아 태어나고 번갈아 죽어 간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불행한 곳이 육체적인 고통을 받는 지옥도(地獄道)요, 다음이 굶주림의 고통을 받는다는 아귀도(餓鬼道)다. 육도 중 가장 행복한 곳이 하늘나라 천도(天道)이고 다음이 인간 세상인 인도(人道)다. 단군 신화에 의하면 그 셋째인 축생도(畜生道)의 곰이 인도(人道)의 세계에선 여자로 태어났다.
그것만 해도 곰에게는 커다란 축복인데, 게다가 하느님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과 결혼을 하였으니 이로 보면 우리 배달민족은 천손(天孫)으로 복에 복을 받은 민족이니 어찌 감축하지 않으랴. 그리 생각하니 천제단 앞에서 감사의 기원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여 주신 것, 남자로 태어나게 하여 주신 것,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신 점을-.
천제단(1,560m), 문수봉(1,517m)보다 높은 봉이라서 장군봉(1,567m) 정상에도 장군제단을 차렸네요. 천제단(天祭壇) 거기만 가시고 아니 올까 두려워서.
거기서 우리 민족의 얼이 어린 천제단(天祭壇,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28호)으로 향한다. 한 반도에서 제단으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둘레 27.5m 높이 34m, 좌우 폭 7.3m의 타원형 자연석으로 단군 조선시대 구을 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오는 제단이다. 담은 타원형으로 하늘을, 제단은 네모로 땅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생각한 옛 조상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제천의식은 천제단(天祭壇)을 중심으로 장군단(將軍壇), 하단(下壇) 세 곳에서 거행했는데, 그 중 거국적인 제례는 천제단에서 거행하였다. 천제단은 강원 도민 체육대회의 성화 채화장소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옛 기록에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3산 5악(三山五岳)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이라하고 제사를 받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 민족은 태백산을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섬겨 온 것이다. *.단종과 태백산 천제단에서 직진하여 능선 따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문수봉(1,517m)을 가고 싶지만 500m 아래에 있는 망경사(望鏡寺)로 향한다. 망경사 근처에 있는 있는 단종비각(端宗碑閣)이 보고 싶어서다. 1,300여 년 전 신라 28대 진덕여왕 무렵. 함백산 정암사(淨岩寺)에서 말년을 보내던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망경대 건너편 봉에 문수보살 석상(石像)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망경대에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는데 그 암자가 월정사의 말사인 망경사(望鏡寺)라 한다.
이 절에서 유명한 것은 낙동강의 발원지 중의 하나라는 용왕각(龍王閣) 때문이기도 하다. 물이 차고 맛이 좋아 한국의 100대 명수 중에 하나라는 샘이다.
천제단에서 500m라는 이정표 따라 가파른 내리막길이 다한 곳 우측에 보이는 것이 단종비각(端宗碑閣)이다. -조선 6대 왕인 단종이 영월에 유배 되자 고을 추익한(秋益漢) 전 한성부윤이 태백산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進上)하였는데, 어느 날 추익한의 꿈에 산과(山果)를 진설하려고 영월로 가는 길에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이 단종이 승하하신 날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이를 단종이 돌아가시어 태백산 산신령으로 오신 것이라고 매년 음력 9월 3일에 제를 지내고 있다. 이곳 단종 비각은 1955년 망경사 박묵암 스님이 건립하였는데 그 비문 '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는 오대산 월정사 서예가 탄허 스님의 친필이다.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배반이다. 그것도 혈육의 배반은 골육상쟁(骨肉相爭)으로 비극 중에 비극이다.
단종이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에 귀양 와서 살다가 17세에 죽임을 당하였으니 당시에 단종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그래서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던 말이 ''내가 죽거든 저 태백산의 산신이 되고 싶다' 하는 유언을 하였다는 말이 전하여 온다. 죽은 단종의 혼백이 지금의 어라현을 지나게 되었다. 단종은 그 경치가 너무 좋아서 "이곳은 신선이 살 만한 곳이라 하여 여기에 머물겠다." 하였다. 이때 갑자기 물살이 갈라지면서 크고 작은 물고기 떼가 줄을 지어 이어 늘어서더니 단종께 아뢰는 것이었다. "대왕께서는 한 나라를 다스릴 임금님이신데 억울하게 승하하셨으니 영계(靈界)에서라도 통치하셔야 하옵니다. 부디 태백산 산신령이 되셔서 태백산맥이 미치는 모든 곳을 다스려야 하옵니다. 이는 하늘의 뜻이오니 꼭 태백산으로 가시옵소서."
- 한국지명의 신비(김기빈 저) 이 천제단과 망경대는 태백시 소도동에 있다.그 주소 所道(소도)는 그 음이 '蘇塗(소도)'와 같은 것이 그냥 우연만이 아닌 것 같다.
'소도란' 삼한 때 각 고을에다가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신에게 제사하던 곳이나 일을 말한다.
제사 지낼 때에는 아무리 큰 중죄인이 있더라도 이 소도 구내에서는 잡아갈 수 없는 치외 법권적인 신성한 지역이었다. 이렇듯 소도란 옛날에 개인의 가정에서 경사나 기도를 드릴 때에 임시로 세우는 신간(神竿)이요, 마을의 동구에 세우는 솟대요,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자기 집 문 앞이나, 마을 입구나 산소에 세우던 화주(華柱)가 곧 소도다. 이렇게 태백산은 그 이름처럼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 하여온 성스러운 산이었던 것이다. *. 저승과 이승을 오가다 오른 나의 태백산 태백산은 나에게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산이다. 직장에서 정년할 무렵 갑자기 백혈병(白血病)으로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죽음의 높은 고비를 오르내리다가 퇴원하였다. 퇴원 후 자유롭게 걷기조차 어렵던 1998년 여름의 나의 병상일기가 그 사연을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나는 지금 이승과 저승의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인가. 머리를 빡빡 깎고 우두커니 앉아있는 환우(患友)들을 바라보니 각가지 두려운 생각이 엄습하여 온다. 무균병실(無菌病室)에서는 며칠마다 죽음을 찾아 퇴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난생 처음 응급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을 때 울면서 염불하고 있는 아내 옆에서의 감회를 정리하여 보는 것으로 공포를 잊고자 노력하였다.
하나, 둘, 셋~. 응급실에 누워 먼저 간 친구를 하나하나 헤아려 본다. 여기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 아픔과 죽음을 복습 예습하는 곳. 병문안도 올 수 없는 환자와 돈과 싸우는 간병인의 전쟁 터. 어느 날 갑자기 죄인이 되어버린 미안한 수혜자(受惠者)에게 삶을 더 사랑하게 된 아담 이브들에게 눈감으면 까만 축복이 내린다. 퇴원하면 알에서 깨어나리라. 그 알 속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시혜자(施惠者) 쪽에 서는 세상의 간병인으로 태어나리라. -1998. 5.6(화) 그해 겨울 퇴원하여,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겨울 산 태백산을 넘어 보았고 그래서 내가 살았다는 것을 확인한 산이 바로 태백산이다. 태백은 설악산 같이 빼어난 산도, 지리산 같이 장엄한 산도 아니었고, 도봉산 같이 아름답지도 아니한 그냥 평범한 대표적인 육산(肉山)일 뿐이었다. 물 같고, 쌀밥 같은 맛이 아닌 멋. 어머니란 이름처럼 미를 초월한 그리움. 무엔지 그리울 때 기대보고 싶은 아버지와 같은 그런 산이었다. 그런 내가 고희(古稀)도 훨씬 넘긴 나이에 다시 왔으니 어찌 감회가 없을까? 태백산(太白山)에 눈꽃 보러 찾아 갔더니
가지란 가지가 모두 흰 눈을 벗은 맨 얼굴로 맞아서
죄 없는 길의 흰 눈만 원 없이 밟다 왔습니다.
무릎보호대 하고 기를 써서
천제단(天祭壇) 오름 길에 만난 주목 중에는
시멘트로 깁스한 늙은 주목과고사목(枯死木)도 많아서
100년도 못사는 내가
살아 천년(千年)에
죽어도 천년 산다는 주목에게 물었습니다. '주목(朱木)도 늙는가.
우리들처럼 그대들도 죽는가.
이 몸은 살아생전 태백산 그대 주목을 보고 가네만
그대들은 살아 천년 동안 무엇을 보았다고 말하겠는가.
묻는 이 있거든 전해 주게나.
세상에서 산(山)을 사랑하던 ilman이 우리를 보고 갔노라고.
오늘은 산속세계 속에
태(太)
백(白)
산(山)의 행복한 하루더라고.
-경인년 1월 '태백산에서'
3덕산(德山) 도립공원/ 수덕사(修德寺)
오늘은 내 평생 처음으로 우리 가족 삼대(三代)가 함께 산행을 하는 날입니다. 우리 아들(성낙준)과 손자(성진모)와 함께 충남 덕산 도립공원에 온 것입니다.
덕산도립공원(德山道立公園)은 두 지구로 나뉩니다. 가야산(伽倻山) 지구와 덕숭산(悳崇山) 지구입니다.
그중 우리는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德崇山)을 오르기 위해 고양시 일산(一山)에서 146km를 달려 3시간만에 수덕사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덕숭산은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20km에 있는 산으로 1973년에 도립공원(道立公園)으로 지정된 산입니다.
덕숭산 등반은 크게 3가지 코스가 있다지만 우리는 수덕사 절 구경을 하고 그 경내를 통과하여 1,080 돌계단 오르는 길로 가려 합니다. 정상(頂上)에서는 원점회귀(原點回歸)를 하지 않고 둔리1구 8각정으로 빠질 계획입니다.
*.수덕사 이야기
수덕사 입구에는 이응로(李應魯) 화백이 거처하였다는 구 수덕여관과 그의 예술 세계의 편모의 집과 암각화 등이 있지만 수덕사(修德寺)와 직접 크게 관계없는 것이라서 여기서는 생략하렵니다.
덕숭산은 도립공원이고 문화재 구역이라서 입장료를 받습니다. 성인인 아들은 3,000원, 어린이 손자는 초등학생이라서 1,000원을 내지만 저는 만 65세 이상이라서 무료입니다. 경로 우대이기도 하지만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이라 무료인 것 같습니다.
매표소를 막 지나 우측 돌층계를 올랐더니 부도군이 있습니다. 수덕사에서 열반하신 스님들의 부도군입니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탑으로 우리가 집을 아름답게 짓듯이 그 탑을 예술적으로 돌로 꾸며 놓은 탑이 부도입니다. 부도는 원래는 부처의 Buddha(붓다)라는 원음을 음차(音借)한 것인데 이를 '스님의 묘탑(廟塔)'으로 쓰고 있는 것은 스님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는 마음에서 부도라고 했답니다. 이 부도 중에는 '원담(圓潭) 부도'가 가장 멋집니다. 원담(圓潭) 스님은 덕숭총림 3대 방장이셨습니다. 둥글 '원(圓)' 자를 시각적으로 'o'으로 표기 한 것이나 원형 돌을 상단에 얹은 것이 멋집니다. '방장(方丈)'은 절의 주지(住持)를 뜻하는 말입니다.
절의 첫 번째 문인 일주문(一柱門)을 지납니다. 네 기둥이 아닌 두 기둥의 문은 그 모양이 한자로 '一' 자 모양이라서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씻고 부처의 경지를 향하라는 뜻이랍니다.
그 일주문에 '德崇山 修德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다음은 수덕사와 덕숭산의 사찰이름의 유래 대한 전설입니다. 수덕사 대웅전(大雄殿) 뒤에 있는 관음바위에 있는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백제 시대에 강건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퇴락하여 대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서 공양주를 자청하는 것이었다. 이 여인이 절세미인인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자자하게 퍼지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게 되었다.
그 중에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총각이 청혼을 하였다. 이에 수덕각시가 말하기를 '이 불사가 원만히 성취되면 청혼을 받들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청년은 가산을 기울여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하게 되었다. 대 공덕주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 각씨에게 함께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 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후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붙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바위 속으로 사라져서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남아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졌다.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修德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定慧寺)라 하였다고 한다.
- 수덕사 주지 김법장
이 전설을 살펴보면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蕙寺)의 지명 전설이지만, 이와 약간 다른 전설에서는 그 도령 이름이 덕숭(德崇)이고, 각시 이름이 수덕(修德)이어서 절 이름은 수덕사(修德寺)라 하였고 산 이름은 총각 이름을 따서 덕숭산(德崇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수덕사(修德寺)의 역사
어느 절에나 일주문 근처에는 절에 대한 유래나 안내도가 있는 법이니 그냥 지나치면 후회하게 되는 곳이지요.
수덕사(修德寺) 창건에는 다른 설화도 있지만, 그 중에 하나로, 이 절은 백제 29대 법왕 원년(599년)에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하고 백제가 망할 때까지 혜현(惠顯) 스님이 이 절에서 법화경을 강론하던 사찰로, 신라 때는 원효대사가, 고려 때는 나옹화상, 근세에는 경허(鏡虛)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대사가 거(居)하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친 백제의 고찰이랍니다.
부도군을 거쳐서 불교의 수호신인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모신 금강문(金剛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니 황하정루(黃河精樓)가 있습니다. 황하정루는 2층에서는 이 사찰의 여러 의식을 행하는 장소이고, 그 우측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이 있네요.
이 박물관에는 수덕사와 그 말사(末寺)에서 수집한 소장품을 각 분야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 볼거리로는 이 수덕사에서 가장 중요한 경허선사(鏡虛禪師)와 그의 제자 만공대사(滿空大師) 등 고승의 유물들을 전시하여 놓은 것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저는 몰카로 몇 가지 자료를 얻어 가지고 황하정루의 누하진입문(樓下進入門)을 거쳐서
황하정루를 오르니 바로 앞에 있는 9.5m의 석탑이 금강보탑(金剛寶塔)으로 2000년 7월 세웠다 합니다. 수덕사 중창불사를 하던 중 조인정사(精舍)를 해체하는 과정에 옛 탑의 좌대(座臺)가 발견되고 그 자리에 세운 탑이랍니다. 기단부에 문수, 보현, 관음보살과 부조 모서리에 사자상을 조성했구요. 이 탑에는 덕승총림 방장이신 원담(圓潭)대선사께서 스리랑카(srilanka)를 예방하였을 때 스리랑카 종정 스님으로부터 증정 받은 부터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를 본 탑에 봉안하여 2000년 7월에 세운 탑입니다.
대웅전 바로 아래 좌우 당우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寮舍)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입니다. 거기 이르기 전에 범종각(梵鐘閣)과 법고각(法鼓閣)이 따로 있었습니다.
수덕사 범종(梵鐘)은 높이 5.5m, 둘레 4.5m, 무개가 6,500 근의 대종으로 에밀레종 등 신라 종들 참조하여 1973년에 조성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절에 가면 어느 절에나 있는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범종(梵鍾)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이를 사물(四物)이라 하는데 상징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법고(法鼓)의 북소리는 축생들을, 운판(雲版)의 소리는 날짐승을, 목어(木魚)는 수중 생물을, 대종(大鐘)은 일체 살아 있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소리들이니까요.
*.수덕사의 대웅전(大雄殿, 국보49 호)
수덕사 대웅전 건물은 고려 충렬왕 34년에 조성한 백제 양식의 고려시대 목조 건출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연대가 확실히 알려진 오직 하나의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출물로 국보 49호입니다.
중국사서(中國史書)인 '북사(北史)' 등에 "백제에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僧尼寺塔甚多)"라고 하며, 백제 사찰로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獅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사찰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 중 수덕사만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이 대웅전에는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 문헌이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에 들어서면 마치 왕대밭에 들어선 듯 청신한 기운이 가득하다. 들보나 연목 어느 하나 주춤거림 없이 죽죽 벋어나 상쾌하게 서로를 가르고 나왔기 때문이다. 일체의 장식이 배제 되어 있는데도 극도의 장려(壯麗)한 세련미를 느낄 수 있으니 과연 무기교의 기교가 최상의 기교임을 실감하겠다. 불단에 모신 삼존불은 법당 크기에 비해 조금 왜소해 보이는데, 이는 1938년 무인에 만공 대선사가 전북 남원군 산동면 귀정사(歸政寺)에서 이안(移安)해 온 석가(釋迦), 약사(藥師) ,미타(彌陀) 삼여래상(三如來像)이기 때문이다.
-'명찰순례(민속학자 최상수)
대웅전 오기 전 금강문 왼쪽에 있던 환희대 경내에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던데 대웅전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대웅전(大雄殿)의 '雄(웅)' 자는 영웅 '雄' 자로 석가모니( 본명 싯다르타)를 이르는 말입니다. 전각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주불로 모셨을 때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통(圓通)'이란 관세음보살을 뜻하는 말로 이르지 않는 곳 없이 두루 통달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정성껏 외면 여러 가지 형태로 화신(化身)하여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하여 주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천수관음(千手觀音) 또는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백의관음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돕는 보살입니다.
수덕사 대웅전 왼쪽 뒤로 가면 큰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초록색 관세음보살입상이 있는데 그 보살이 바로 앞서 말한 수덕각시로 나타나 절을 짓게 하여준 전설의 관세음보살입니다.
*. 김일엽(金一葉) 스님 이야기
이 원통보전은 하엽(荷葉 1898~1971)스님이 입적한 곳입니다.
제가 33살 때 우연히 수덕사에 갔다가 다비식(茶毘式)을 구경할 때만 해도 우리들은 수덕사를 이광수와 로맨스가 있었다는 김일엽(金一葉) 스님과 연관하여 수덕사를 기억하였고, 그래서 수덕사를 비구니(比丘尼)의 사찰로까지 오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일엽 스님이 불교에 귀의하여 받은 법명이 하엽(荷葉 )입니다.
하엽스님은 1898년 평남 용강의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김원주였구요.
1910년 한일합방 2년 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과 이화여자전문학교를 거쳐서 일본 닛산(日新)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활약하던 당시에는 조선 최고의 인텔리 신여성이었습니다.
필명 일엽(一葉)은 일본 유학 시절 문인으로 데뷔하였을 때 만난 춘원 이광수가 당시 일본의 최고 인기 여성작가 라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것이랍니다. 춘원과의 로맨스는 와전된 것이었구요. 2014년 신문을 보니 김일엽과 일인 오오타 세이지로(大田淸藏) 사이에서 난 아들인 화가며 스님인 일당 김태신(金泰伸)씨가 93살의 나이로 열반하였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일엽은 속세에서 2번 결혼하고 이혼한 시인(詩人)이며 스님인 신여성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신여성을 간행하고 동아일보, '불교' 기관지에 기자로 활동하다가 20대까지 다니던 교회를 버리고 31세에 금강산 표훈사에서 스님의 길을 가게 되었답니다. 대표작은 그의 자서전적 수필 ‘청춘을 불사르고’(1962)는 당시의 베스츠쎌러였답니다.
덕산(德山) 도립공원(2-2)/ 덕숭산(德崇山, 495.2m)
수덕사 관음바위 근처에 "←정상/정혜사" 의 이정표를 보니 이제부터 산행이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서는 학벌이나 문벌을 중요시 하듯이 산에서도 명산(名山)의 조건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문헌을 소개합니다.
한국에서 명산(名山)이란 어떤 산을 두고 이름일까. 산세가 수려하여 선인의 발자취며, 역사 유적이 흥건하거나, 아니면 이름난 절간이 들앉아 골짜기 천석(泉石)이 아울러 빼어나거나 함으로써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이겠지만 산은 무엇보다 크고 높아야 한다. -'한국의 명산기' (김장수)
충남의 하고 많은 산 중에 덕숭산은 계룡산국립공원에 이어 칠갑산과 함께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위에서 말한 이름난 절간인 수덕사를 품에 품고 있어, 산격(山格)에서 제일 먼저 따지는 높이가 겨우 495.2m이면서도 도립공원으로 지정 된 것일 것입니다.그래서 덕숭산(德崇山, 495m)을 위의 위성 지도에서와 같이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합니다. 도립공원 지정 당시에도 미흡한 점이 있던가, 주변 가야산(伽倻山)을 포함하여 ‘덕산 도립공원(德山道立公園)’이 된 것입니다. ‘덕산’이란 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행정구역이 덕산면(德山面)이어서 생긴 이름입니다. 가야산과 덕숭산은 각기 다른 산이 아니라 도로로 끊기기 전 옛날에는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으로 하나의 산이라고들 합니다.
수덕사에서부터 정혜사까지는 자연석 층계가 1, 080개라니 이는 불교의 백팔번뇌(百八煩腦)를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거기서 얼마 안 올라가는 거리에 사면석불(四面石佛)이 있습니다. 다음은 거기에 쓰인 사면석불 봉안의 내용입니다.
-이 사면석불은 1983년 충남 예산군 봉산면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 유일의 사면불(四面石佛)을 그대로 재현하여 사방에 약사불, 아미타불, 서가모니불, 미륵존불을 박태화 거사의 정성으로 2008년에 봉안한 것입니다.
-덕수총림 수덕사
이 외에도 수덕사에서 덕숭산 정상까지 계단 따라 오르다 보면 수많은 불교 유적이 있습니다.
사면석불, 소림초당, 관음석불과 향운각, 만공탑 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덕숭산을 등반하는 것은 불교 신자 선남선녀가 성지순례를 하는 듯이 불교 유적을 찾아가는 길과 같네요.
층계를 오르다 보니 계곡 건너 숲 사이에 초가집이 있습니다. ‘소림초당’입니다. 벽초 스님이 만공선사와 함께 이곳을 지나다가 만공 선사가
"저곳에 수행처 하나 있으면 좋겠다. 고 말하는 것을 듣고 1924년에 자연목을 그대로 기둥으로 하여 이영을 얹어 초당을 지어 드렸다는 곳인데 섭섭하게도 굳게 닫힌 문에 '등산객 및 일반외부인의 출입을 일체 불허합니다. -소림초당 스님 白' 이란 푯말이 발길을 돌리게 합니다.
*. 관세음보살압상(觀世音菩薩立像)
돌계단은 다시 좌측에 관세음보살입상석불(觀世音菩薩立像石佛)로 우릴 인도합니다. 1924년 만공선사의 발원으로 자연암벽을 깎아 조성 봉안한 8m의 거대한 보살상입니다. 머리의 보관 위로 이중의 보개(寶蓋)를 얹은 입상으로 손에는 병을 받들고 서 있는 우람한 모습의 불상입니다.그 옆에 약수가 있고 약수터 옆에 '향운각'이란 암자가 있는데 이 역시 외인출입 금지란 푯말과 함께 굳게 닫혀 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근다는 것은 나와 너를 가르는 거절의 표시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불신이요 이는 중생을 미워한다는 이야기와도 같은 행위입니다.
거기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만공탑'이 있습니다. 1947년 제자들이 만공선사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정혜사 밑에 세운 근대적인 만공선사의 부도(浮屠)입니다. 여기서 사진을 찍을 사람들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만공탑'이란 앞면만 보지 말고 탑의 사방을 둘러보시란 말씀입니다. 다른 탑과 달리 이 만공탑의 좌우 측면에는 '世界一花'(세계일화), '百艸是佛母'(백초시불모; 모든 초목도 부처님의 어머니)를 비롯한 만공의 친필 등을 음각으로 새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수덕사 곳곳에서 보이는 '世界一花'란 말은 당(唐) 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쓴 육조혜능선사 비명의 '世界一花 祖宗六葉'(세계일화조종육엽)'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세계는 하나의 꽃이며 조사의 종풍은 여섯 꽃잎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만공선사가 생존 시 무궁화 꽃을 먹물에 적셔 ‘世界一花’를 휘호로 남겼다 해서 부도에 새겨 놓은 글귀 같습니다. 덕숭산 정상을 오르는 길에 만공 선사와 얽힌 이야기가 많은데 만공선사(滿空禪師)란 어떤 분일까요?
*. 경허(鏡虛), 만공 선사(滿空禪師) 이야기
수덕사에는 수많은 고승들이 주석(駐錫)하다 가셨지만 그중에 근대 스님 세 분만 들라면 경허(鏡虛)선사, 만공(滿空)선사와 하엽(荷葉) 스님일 것입니다.
선사(禪師)란 선종(禪宗)에서 참선(參禪)으로 진리를 통달한 스님을 말합니다. 선종(禪宗)이란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중국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9년(面壁九年) 참선하여 도를 깨우쳤다는 달마대사(達磨大師)를 시조로 하는 불교 종파로, 불경에 얽매이지 않고 참선으로 자기를 구명하며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석존의 깨달음을 중생의 마음에 전하는 것을 종지로 삼았습니다.
한국의 근대 선맥(禪脈)은 경허와 만공선사부터였습니다.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 1912)) 선사는 한 손에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놓아 졸음을 쫓으면서 정진하다가 '홀연히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삼천대천 세계(三千大千世界; 한 세계를 천 배한 것이 세 번 거듭된 세계) 가 내 집임을 깨닫고 일정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선(禪)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선풍을 일으킨 스님이었습니다.
경허선사는 문하에 네 제자를 거느렸는데 그 중에도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이 수제자였습니다.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 선사는 법명은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滿空)으로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하였습니다. 통도사 백운암에서 어느 날 새벽 종소리를 듣고 득도(得道)를 한 후 경허선사의 법통을 이어 수덕사를 오늘날 한국불교의 선지종찰로 만든 분입니다. 한 마디로 경허선사로 시작된 근대 선종을 완성한 스님이 만공선사라는 말씀입니다. 수덕사와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안동 김씨의 소유였던 충남 서산 간월암 터를 찾아 1914년 현재의 간월암(看月庵)을 복원한 분도 만공선사입니다. 만공선사는 한국 선불교 진흥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6년 덕숭산의 전월사(轉月寺)에서 입적하였습니다.
*. 정상 가는 길
정혜사에서 직진하는 바람에 정상 가는 길을 잘못 들어서서 수도승이 스승을 찾아 가듯 덕숭산 정상을 향하는 길이 고행 길 같았습니다.
그렇게 오솔길을 가다 보니 힘은 들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몇 개의 큰 바위를 만났더니 우리 아들과 손자가 좋아라 올라가서 카메라를 찾습니다.
산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이 정상입니다. 덕숭산 정상은 제법 널찍하지만 잡목이 시야를 막아 전망을 자랑할 바가 못 됩니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 줄기가 만들어내는 덕숭산은 북으로는 이 산과 함께 도립공원인 가야산(伽倻山, 677.6m), 서로는 홍성의 오서산(791m), 동남간으로 용봉산(381m)이 병풍처럼 덕숭산을 빙 둘러싸 그 중심부에 덕숭산이 우뚝 서게 하였습니다.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여름에 아내와 함께 셋이서 가방에 텐트를 짊어지고 중산리에서 화엄사까지 지리산 종주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손자는 초등학교 6학년에 난생 처음으로 오늘 495.2m의 덕숭산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 자기도 대견하였는지 연신 엄마에게 전화로 보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손자에게 나의 무용담을 이 기회에 말해 주고 싶습니다.
진모야, 성진모(成陳模)야.
할아버지는 70세서 79세 사이에
백두산 종주
한라산 종주
겨울 산 설악산 덕유산 종주 등과태산 4,000 계단 답파
필리핀 배낭여행
이 모두를 단독으로 해냈단다.
백두산 종주만 빼고-.
목숨을 걸고 생사가 오락가락 할 때도
가난이란 고개를 넘던 것보다는 쉽더구나.
그 후론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
세상 모든 일에 두려움이 없어졌단다.
자신이 생겼었거든.진모야, 우리 손자 성진모(成陳模)야,이런 점은 할아버지를 닮아 다오.
저 평야 너머 황해가 보입니다. 그 근처에 안면도가 있는 모양입니다. 정상의 잡목들이 가리고 있어 이를 피해 본 전망입니다. 다시 한 번 수덕사라고도 하는 수덕(修德)을 생각해 봅니다.
도를 닦는 것이 수도(修道)요, 행실과 학문을 닦는 것이 수행(修行)이고, 덕을 닦는 것이 수덕(修德)이라면, 그 덕은 밝고 크고 옳고 빛나고 착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따스하여 사람으로서의 길을 행하는 마음이나 행동이나 선을 깨우친 고승의 경지가 수덕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수덕사라, 수덕산이라 하였고, 그 덕을 숭상한다 하여 덕숭산이라 이름한 것을 이제야 분명히 알겠습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부득이 한 경우가 아니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를 꺼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정에는 390m봉 고지를 지나 북동 쪽 둔리로 내려갈 계획인데, 대한민국 산 정상이면 어디에나 있는 이정표가 도립공원이라는 덕숭산에는 없으니 이게 웬일이지요? 몇 번을 둘러보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도 없다는 대답뿐입니다. 등산객이 찾는 것은 이 한가한 둔리 마을에 도움도 될 터인데요.
정혜사를 못 보고 가는 것은 덕숭산 도립공원의 1/3을 못보고 가는 격이라 정혜사가 우리를 부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 정혜사(定慧寺) 이야기
정혜사로 하산하는 길은 넓고 층계가 있고 계단이 없는 경사 길에는 흰 밧줄이 있는 편안한 길입니다.
채소밭에서 울력하는 스님에게 정혜사를 들어가 구경할 수도 있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서 절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정혜사도 수덕사와 같은 시대인 백제 때 지명대사(智明大師)가 지었다는 절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수도 정진했던 곳으로 현대 불교계를 움직인 선사들의 정진처라고 합니다.
절에는 인기척이 없어 정혜사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 죄를 지은 것 같은데 능인선원(能仁禪院) 앞에 바윗돌 하나가 우뚝이 정적을 돕고 있습니다.
능인선원(能仁禪院) 앞뜰에
바위 하나
나 하나.
바위 일은 바위만 알고
내 일은 나만 아니
묻지들 마오.
왜 거기 있게 됀 연유를. -능인선원 바위 ‘한국의 5대총림’으로는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가 있습니다.
총림(叢林)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정혜사 돌 앞에 있는 당우가 능인선원(能仁禪院)으로 여기는 스님들이 참선 수행 하는 도량입니다. ‘능인(能仁)’이란 말은 능하고 어진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뜻하는 말입니다.
정혜사 마당에는 바위 위에 남매탑이 있지만 계룡산 같은 전설은 선원인 정혜사에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전설은 없답니다.
오른쪽의 당우가 능인선원이고 우측 당우 위에 있는 건물이 관음전입니다.
이 정혜사의 자랑은 이 절의 위치로 인한 확 트린 전망입니다. 그 전망 속에는 수덕사도, 평야도 산도, 바다를 다 품고 있습니다.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아들과 손자가 즐겁게 가는 뒷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는 즐겁고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수덕사에 와서 덕숭산 등산까지 마쳤으니 부처님께 소원 하나 빌고 싶습니다. .
"부처님, 저는 자식 자랑하다가 병신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제발 제 손자 진모를 자랑하다가 병신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게 해주소서. 나무아미타불 ilman 합장"
가야산(伽倻山, 6776.6m ) (2009. 11. 25/上加里주차장→남연군묘옆→관음사→옥양봉→석문봉→암봉→가사봉→상가저수지→남연군묘소→주차장/ '우리산내음 산악회' 따라) *. 가야산 명칭 이야기 가야산을 가고 있다. 합천 가야산(伽倻山)이 아니라, 충남 예산 가야산(伽倻山)으로 가는 길이다. 가야산이란 이름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어원(語源)은 무엇일까. 가야(伽倻)의 어원을 알기 위해서 우선 인도에 있는 불교의 사대 성지(四大聖地)를 살펴보아야겠다. 불교의 성지 네 곳은 네팔과 인도에 있다. 부처님이 탄생(誕生)하신 네팔에 있는 룸비니(Lumbini) 동산과 인도에 있는 가비라성을 나와 35세에 성도(成道)하신 붓다가야(Buddha Gaya), 다섯 제자에게 불법을 가르치신 곳 사르나트(Sarnath)와 80세에 열반에 드신 곳이라는 쿠시나가라(Kusinagara)다. 그중 부처님이 득도하신 '붓다가야(Buddha Gaya)'에서 '가야산'이란 이름은 유래하였다. Gaya(가야)란 말의 산스크리트어(Sanskrit. 옛 인도어, 梵語)의 뜻은 힌두교 교도들이 숭상하는 '소'(牛)다. 합천 가야산의 정상을 올라 보면 정상석에 '伽倻山 牛頭峰'(상왕봉)’이라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상왕봉’이란 또 무슨 의미인가. -불교사전에 ‘象頭山’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가야산(伽倻山)을 뜻하는 말이다. 象迦葉(상가섭)에서의 '象('상)은 석가모니를 뜻하는 말이요 迦葉(가섭)은 부처님 제자의 이름이다. 가야산의 한 줄기 선상에 있는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의 '象'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렇듯 가야산은 불교와 연관된 이름이다. 가야산은 백제 때에는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 불교가 정착한 곳이요, 신라 때에는 매년 신하를 보내 가야산에서 제(祭)를 지냈다는 명산이다. 불교 전성기에는 이 산에 99개의 암자를 거느린 가야사((伽倻寺)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야산을 벼르다 가고 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더니 오전 중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고 있어 걱정이다. *. 가야산 등반길 가야산 상가리(上加里) 주차장에 이르니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우장을 하고 산행길을 나섰다가 다행히도 도중에 우장을 벗을 수 있었다. 가야산 가는 길은 서산 방면의 일락산(日落山, 516m) 등에서도 시작할 수도 있으나 우리는 예산의 상가리(上加里) 주차장에서 ‘上加里주차장→관음사→옥양봉→석문봉→암봉→가사봉→상가저수지→남연군묘소→주차장’의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원효봉(605m)을 뺀 것은 남연군 묘소를 들르기 위해서였고 수도권에서 먼 곳에서 온 우리들이라 귀가하는 길에 바다 속에 있는 절 간월암(看月庵)도 보고 싶어서였다. 주차장에서 옥양봉(玉洋峰, 621m)을 향하다 길이 두 길로 나오면 비석이 있는 왼쪽 길로 갈 일이다. 가는 길에 ‘←3.0km 가야산,2.5km 원효봉’ 갈림길도 있지만 우리는 옥양봉을 향한다. 거기서 얼마 올라 아스팔트가 끝난 곳이 이 산의 들머리였다. 관음암 갈림길에서 나는 일행과 떨어져서 옥양봉을 향하는데 길은 계속 오름길이다. 사람들은 가야산이 6776.6m로 낮은 산이라 하지만 그렇게 만만히 얕볼 산이 아니었다. 이 산은 바다 가에 서 있는 산이어서 아까 상가리 주차장이 해발 130m인데다가 여기서부터는 계속 오름길이니 산의 중턱에서 오르는 내륙의 산보다 더 힘들었다. 게다가 일행보다 넉넉한 시간에 오르려고 우회하는 관음암 길을 생략하였는데 벌써 떠드는 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들리고 있다. 관음암은 내가 오르는 길에서 50m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니 관음암은 개인이 경영하는 암자라 하니 그걸 지나친 것이 서운하지만은 않았다. 거기서부터는 더 힘든 오름길이 계속되었지만 굽어보는 산하의 경치는 운무에 싸인 내 눈을 놀라게 하였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운해가 우리를 반기고 있는 것이다.밧줄 지대가 나타난다. 산행을 할 때 제일 기다려지는 것이 능선길인데 이 산은 옥양봉을 올라서야 능선 길을 내주었지만 그렇게 힘들게 오른 보람 없이 옥양봉이란 푯말하나 볼 수 없었다. 옥양봉에서 우측으로 가면 수정봉(456m)이 있고 거기서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명명하는 용현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이 있는 곳이지만 그 곳은 다음으로 기약하고 석문봉을 향한다. 전망바위에 서니 아직도 가야산 운해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운해 속에 잠긴 마을이 인간이 그리던 천국 같이 아름답다. *. 석문봉(石門峰, 653m)에서 지금까지 내가 오른 가야산은 육산이었는데 능선부터는 암릉이 계속된다. 암릉 길로 넘어야 할 봉도 560봉에 이어 험산 602봉으로 이어지며 갈수록 태산이더니 드디어 약 2km의 석문봉(石門峰, 653m)에 이르렀다. 가야산 등정은 가야산의 최고봉이라는 정상인 가사봉(177.6m)이 TV중계소로 출입금지 지역이 되어서 이 그 정상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석문봉이서인지 정상에는 태극기도 휘날리고 있고, 정상석도 그리고 해미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기념 돌탑도 요란하다. 거기서부터의 가야산 정상을 가는 길은 오밀조밀 아슬아슬한 암릉길 등산인데 그중 609m 암봉이 제일 가파른 것이 가사봉 가는 길이 수도하러 입산하는 고행길 같았다. 그 암봉을 넘어 바라보는 석문봉과 옥양문은 애써 지나온 길이라서인가 아름다웠다. 그러다 보니 시흥이 절로 인다.
산을 바라 우러르다 산길에 오르면
고운 님 발자국이 열어주는 이 산길. 정상이 언제나 앞에 있어 후회 없는 고행의 길. 능선에 올라 굽어보는 세상처럼 능선 길에서 돌아보는 산길처럼 돌아본
내 인생길도
후회없는 삶이었으면 -산에는 왜 가나
*. 남연군묘 하산길
가야산 정상인 가사봉도 한자로 스님의 옷 ‘袈裟’(가사)로 불교를 뜻하는 말 같다. 정상은 TV중계탑으로 출입금지 지역이라서 이젠 예정대로 좌측 남연군묘 쪽으로 하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측에 우뚝 선 원효봉(元曉峰, 605m)이 자꾸 눈에 밟힌다. 그 원효봉 쪽으로는 차도(車道)가 있을 정도로 하산 길도 편하다는데 남연군묘 쪽 하산 길은 1km도 안 되는 길이었지만 아침에 비가 온 뒤끝이라 미끄러운 길에다가 너무 가팔라서 나 같이 고희(古稀)를 넘긴 사람에게는 생명을 건 모험의 길 같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하산 길은 더욱 더 늦어져서 우리 산내음의 최 회장, 청파님의 눈물겨운 고마운 동행이 있었다.
어려운 하산길이 상가 저수지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우리 일행은 저 멀리 남연군 묘소를 오르고 있었다.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높은 언덕에 반구형(半球形)의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 있던 무덤을 ‘2대에 걸쳐서 왕이 나올 자리’라는 당대의 유명한 풍수지리의 대가 정만인(鄭萬仁)의 예언에 따라 옮긴 것이다. 고종이 왕위에 등극한 뒤 그 보은(報恩)의 뜻으로 그 부근에 지금은 비구니 도량이 된 보덕사(報德寺)를 지어 주고 당시 무덤에 있었던 탑을 옮겨 세웠다.
그 묘 아래 큰 건물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상여유물보관소였다. 대원군이 아버지의 상여를 연천서 이 고장까지 500리 길을 운반하는데 광천리 마을 사람들이 지극 정성으로 모셔서 대원군이 고마운 뜻으로 광천리 마을에 주었다는 상여다. 이 묘는 구한 말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이어지게도 하였다. 1866년 프랑스인들이 대원군 아버지의 시신을 담보로 조선과 협상을 꾀하고자 묘를 파 시신을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로 주물로 지어붓고 양회를 발라 견고히 준비된 묘라서 도굴을 시도하던 독일의 오페르(Oper) 일당은 실패하고 그냥 돌아갔다. 이를 계기도 천주교 대탄압과 학살로 이어지고 쇄국정책을 더욱 굳건히 하는 바람에, 한창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야 할 시기를 놓쳐 버리는 바람에 일제 36년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예산에도 ‘예산 8경’이 있다.수덕사, 가야산, 충의사(윤봉길 사당), 삽교평야, 추사 김정희 고택, 예당저수지, 임존성, 예산사과가 그것이다. 그중에 하나인 가야산을 우리는 답사한 것이다. 예산(禮山)이란 예절 '예(禮)' 뫼 '山(산)'이다. 예산의 진산(鎭山)이라는 가야산에 올랐는데, 그 캐릭터가 예산 8경의 하나인 예산의 특산물 사과다. "禮를 지킬 줄 아는 아이" 라는 뜻이다. 그래서였을까. 충남을 사시는 고운 분들이(예산산악회 회장, 이상일님) 고장의 막걸리에 돼지 머리고기로 예로써 우리를 대접하여 우리를 행복하게 하여 주었다. *. 간월암(看月庵) 갔던 길에 천일만에 있는 바다 속의 섬이라는 간월암(看月庵)을 보기로 했더니 간월암은 그 경치에다가 마춘듯이 서해의 낙조를 선물하고 있었다.
- 간월암은 피안도(彼岸島) 피안사(彼岸寺)라 불린다. 하루 두 번씩 밀물 때는 섬이 됐다가 썰물 때는 자갈길로 육지와 연결된다는 섬이다. 그래서 물에 떠 있는 연꽃 같다 하여 연화대(蓮花臺)라고도 하였다. 고려 무학대사가 달을 보며 이곳에서 수도하다가 도를 깨우쳤다하여 간월암(看月庵)이라 한 것이다. 그 모습이 구름 속에 떠 있는 연꽃과도 같고 석양 노을 속에 피어난 연꽃간월도 간월암이라 하였다. 그 후 후락한 이 암자를 만공대사가 1941년에 새로 절을 짓고 조국해방을 위한 천일기도를 드리고 곧 광복을 맞이하였다는 영험안 암자가 간월암(看月庵)이다.
그 천수만의 횟집에서 우리는 오늘을 축하하며 하루를 닫는다. 비록 바지락 칼국수로 저녁을 대신하지만 우리들의 오늘은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하루였다.
칠갑산(七甲山)
대치터널 주차장→쉼터→ 한치고개 →자비정→정상→ 사찰로→ 장곡사→장승공원 주차장
*. 칠갑산과 그 노래 칠갑산에 갔더니 들, 마을, 산과 내 마음속에도 '콩밭 매는 아낙네' 로 시작되는 칠갑산 노래로 가득하다. 거기서 나는 그 노래를 통하여 조운파 작곡가를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와 “옥경” 그리고 “칠갑산”을 작곡하여 무명의 가수였던 하수영과 태진아, 주병선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가 바로 조운파 작곡가였다. 그는 '작곡가며 서정시인으로 우리의 가요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 시킨 사람'이라고 음악계에서 평가 받는 사람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이 노래의 노랫말에는 콩밭 매는 한 많은 아낙네와 이 홀어머니를 두고 울며 시집가는 어린 딸, 두 여인이 등장한다. 아낙네는 화전민(火田民)인 남편을 여읜 아내로 너무나 가난해서 밥이나 굶지 말고 살라고, 어린 딸을 부자 집 민며느리로 보내면서 밭떼기를 받은 어미의 서러운 사연이 얽혀 있는 노래라고도 한다. 이 구슬픈 노래 가락은 한 많던 우리 겨레의 심금을 울리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민가요의 하나로 불리게 되었다. 이 노래의 작사, 작곡자인 조운파 씨는 청양(靑陽)이 가까운 부여(夫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객지에서 살았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완행버스를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그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그때 가난 속에 살던 아낙네들의 기억이 노래화 한 것이 '칠갑산' 노래라 한다. 이렇게 쓰인 가사와 곡을 제자인 가수 윤상일에게 줘 취입토록 했으나 별다른 인기가 없이 거의 잊혀 가던 10여 년 뒤였다. 주병선이 대학 시절 'MBC대학가요제'에서 '칠갑산'을 불러 금상을 타고 가요계에 데뷔하면서 칠갑산 노래는 갑자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당시에 한창 인기가 있었던 ‘주부가요 열창’ 에서 장애인 어느 가정부가 자기의 한(恨)을 호소하는 듯 한 이 노래를 눈물로 열창하여 방청객은 물론 심사위원까지 울리면서 국민가요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중국 조선족들의 정서에도 꼭 맞아 교포들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하다가 김정일이 북한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한 ‘남한가요 20곡’ 중에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 칠갑산의 주 등산로가 시작되는 한치고개도 '恨(원통할 '한')'과 '峙(고개 '치')에서 온 恨峙고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대치터널 고개를 말하지만 옛 '한치고개'란 칠갑산장과 한치(장승) 일대였다. *. 구봉산(九峰山)과 칠갑산(七甲山 ) 두메산골 청양에는 구봉산(九峰山 485m)과 칠갑산(七甲山 561m)이 있다. 이 두 산 때문에 사람들이 충남에서 가장 오지였던 청양(靑陽)이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봉산에는 전국 제1의 금광이 있었지만 그보다 1967년에 36살의 양창선씨가 낙반사고로 지하 125m 지하에 매몰되었다가 16일만에 구조되는 바람에 전국에 알려지게 된 산이 청양의 구봉산이다. 그렇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났지만 그 구출에 들인 막대한 비용 때문에 금광회사는 망하여 폐광하여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전 국민에게 청양(靑陽)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 양창선씨는 지금쯤이면 78세일 터인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후 양씨는 갑자기 유명인이 되어 돈도 많이 벌었으나 가난하던 사람이라서 돈이 무서운 줄을 잊고 함부로 쓰고 다니다 가난한 옛날로 다시 돌아가서 외롭게 살다가 오도바이 사고로 비명횡사하여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다. 그 양창선 사건보다 청양을 전 국민에게 알린 것이 "콩밭 매는 아낙네야로 시작되는" 칠갑산이란 노래다. 이를 보면 실감 나는 것이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다. 산꾼들이 산의 들머리에 도착하면 산행 채비를 하고 서둘러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산행의 들머리에는 어느 곳이나 산의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등산지도, 산행거리, 버스 시간표 , 관광 안내소 등 가장 중요한 정보가 있는 곳이다. 그것을 찾아서 하나하나 챙기며 사진에 담다 보면, 함께 온 등산객 일행을 훌쩍 떠나보내게 되고 언제나 나는 일행의 가장 후미에서 등산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 후미 담당 인솔자에게 양해를 받으면 나는 홀로 유유자적하는 즐거운 산행으로 행복한 사람이 된다.거북이처럼 꾸준히 가면서 토끼처럼 자주 쉬어야 하는 것이 내 몸에 맞는 등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함께 간 산악회 회원들과 식사를 함께 한 경우가 거의 없다. 젊은 분들이 식사를 하는 그 시간이 내가 그분들을 조금이라고 따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한치고개 들머리에서 특이한 것은 '베트남 참전기념탑'이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운 이 고장 청양지역 참전유공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였다. 이 월남전의 국군 파병은 오늘날의 잘 사는 한국을 만든 첫 번째 계기였던 것이니 이를 기념하자는 기념탑이었다. 지금은 9시인데 정상까지는 3.4km밖에 되지 않고 그 길이 평지를 걷듯 평탄한 길이니 오늘 등산은 나에게는 어떤 등산보다도 여유작작한 산행이 될 것 같다. 대치터널 바로 앞에 있는 약수터와 돌장승 한 쌍을 굽어보며 길 가 쪽으로 오름길 층계를 따라 얼마를 가니 이 오솔길이 차도 길과 마주친 곳에 약수터와 정자가 있는 쉼터가 있다. 거기서 얼마 안가니 옛날에 못 보던 터널 같은 문이 막아선다. 그 내부가 고구려 쌍용총에 보던 고구려인이 말 타고 활 쏘는 모습의 타일 조각이 멋지다. 옛날 이곳이 백제 땅이었는데 이 그림과 이 고장에 무슨 연관이 있어서일까. 그 문 위가 칠갑광장(七甲廣場)이었다. 광장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동상이다. 면암(勉菴)은 그의 스승 이항로(華西 李恒老)가 힘쓰는 사람이란 뜻으로 지어준 호다. 몇 년 전 대마도에 갔다가 일정(日程)에 쫓겨서 슈젠지(修善寺)의 면암 최익현(崔益鉉) 선생 순국비를 참배하지 못하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었는데 오늘 그 면암 선생의 동상 앞에 서니 반갑기도 하지만 만감이 교차된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선생(1833~1906)은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이 고장에서 의병 400명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제자 임병찬과 함께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선생은 거기서 지급되는 음식물과 약을 적 왜놈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하다가 유소(遺疎)를 구술하여 임병찬에게 초하여 나라님께 드리게 한 뒤 굶어죽은 구한말 애국지사다.
포천에서 태어나시어 67세에 이곳 청양으로 와서 항일 운동을 하다가 74세로 돌아가신 분이라 내 나이와 비슷한 또래라서 감회가 남달랐다. 청양인들의 면암 선생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13년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청양 유림들이 세운 목면 송암리에 '묘덕사'로도 이어진다. 묘덕사(慕德詞)의 현판은 고종황제가 내린 "艱虞孔棘'慕'卿宿'德(면암의 덕을 흠모한다.)의 구절에서 '모(慕)' 와 '덕(德)' 자를 취한 것이다. 그 광장 가에 '칠갑산의 유래비'가 있다. 이를 재편집해 본다.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하늘과 산악을 지극히 숭앙하여 왔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이 산을 향하여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옛날에 칠악산(漆岳山)이라 하던 산 이름을 불교식 이름 칠갑산(七甲山)으로 바꾸었다. '七'은 천지만물을 생성한다는 풍, 수, 화, 화, 견, 식(風, 水, 火, 和, 見, 識)을 뜻하고, '甲'은 천체 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의 으뜸이 '甲' 자여서다. - 일설로는 금강 상류인 지천을 굽어보는 이 산이 입곱(七) 장수가 나올 갑(甲) 자 형의 일곱 자리 명당이라는 것이다. 즉 갑옷 '갑(甲)' 자는 갑옷을 입을 장군의 상징이라 하여 칠갑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신동국여지승람에도 '칠갑산 재현동(七甲山在縣東) 15리'라고 칠갑산을 소개하고 있다. 정상 가는 길은 잘 다듬어진 차도인데 가다 보니 널찍한 쉼터가 있고 거기 친절한 등산 안내판이 있다. -등산의 효과: ● 등산은 오래 걷는 운동으로 심장과 폐의 기능이 좋아집니다. ● 다리의 근육을 전체적으로 골고루 발달시켜 줍니다. ● 체중이 실리는 운동으로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이 됩니다. ● 폐활량을 증가시키고, 폐를 신선한 공기로 청소합니다. ● 정신력을 높이고, 정상에 도달했을 때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등산 수칙 ● 물은 조금씩 자주 마신다. ● 가볍고 얇으며, 보온과 통풍이 잘 되는 옷을 착용할 것. ● 자신의 체력에 맞게 쉬면서 천천히 걷는다. ● 하산할 때는 무릎의 충격 보호를 위해 평소보다 더 구부려 걷는다. -청양군 보건의료원 세상에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아름답게 사는 사람을 보는 것이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남을 배려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청양군민들이 이 고장을 찾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은 사랑과 친절이었다. 적지 않게 등산을 다녔지만 이런 친절은 처음이다. 외지인에게 베푸는 이런 배려와 친절이 결국은 청양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충혼탑(忠魂塔)’을 지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화한 청양군 출신의 전몰 호국영령들의 호국 정신과, 나라사랑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산세가 수려한 명산 칠갑산에 청양군에서 건립한 것이었다. 높이 9m로, 매년 1월 1일에는 해맞이 행사와 현충일인 6월 6일 에는 추념행사를 거행하는 곳이다. 충렬(忠烈)의 고장이 충남(忠南)이라더니 이 충혼탑(忠魂塔) 앞에 서니 그 말이 명실상부한 이야기 같다. 그 비에 새겨둔 비명이 마음을 두드리는데 그 비명 자체가 하나의 탑이었다. 용감 했도다. 오오, 임들은 청양의 힘이 나라의 기둥이요, 겨레의 참빛이외다. 굽힐 줄 모르는 정의는 조국애, 민족애, 고향애로 대한 땅 무궁화꽃 피었도다.
-청양군 충혼탑 추진위원회
'산은 산이어야 하는데, 등산로가 차길이로구나.' 하는 아쉬움을 산(山)도 들었는지 산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길은 군용헬기장 가는 길이라고 녹슨 입간판이 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그 길을 가로막은 밧줄 위에는 이를 통과한 산악회들의 수많은 리본이 나부끼고 있다. 그래서 좌측 차도를 버리고 우측 산길로 들어섰다. 왼쪽의 차도가 없어진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닌가 했더니 저 바로 아래 다시 길이 나타난다. 산길도 임도도 모두 가까이서 함께 모두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산길은 약간의 땀을 흘리는 시간을 주더니 헬기장이 나타난다. 여기가 지도상의 425m의 봉 같다. 비로소 나뭇가지 사이로 칠갑산이 보인다. 거기로 내려가다 보니 차도와 합류점이 나타나고, 거기에 서 있는 이정표가 그 맵다는' 청양고추'를 달고 서 있다. 500m 간격으로 있는 말뚝 이정표가 모두 청양의 특산물 '구기차, 청양고추, 메론'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못 보던 청양 군민들의 고향 사랑, 자랑이었다. 10분을 더 오르니 오른쪽으로 팔각정자가 나타난다. ‘자비정(慈悲亭)’이었다. 자비정이란 이름은 ‘칠갑산 서쪽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 자비성(慈悲城)의 이름에 유래한다. *. 칠갑산 정상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정상(頂上)을 향하고 싶어 한다. 정상은 더 이상 높이 오를 수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힘들게 오른 정상에서 10여 분 이상 머물지 않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정상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들의 목표는 정상(頂上)이었는데-. 막상 정상에 올라서 보면 산행도 인생도 그 목표는 산행하는 것이요, 살아가는 그 과정인 것 같다. 그 정상의 층계 앞에 서 있다. 그 멋진 층계지만 인공의 길은 자연의 길보다 더 편하고 좋은가. 사람들은 그 왼쪽 우회하는 오솔길 따라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있다. 정상은 광장 같이 드넓고 아무런 막힘이 없는 헬기장인데 거기에는 561m라는 정상석과 등나무 쉼터가 있다. 그래서 이곳은 산꾼들에게는 휴식의 장소보다는 점심 식사 장소가 된다.
금강 이북의 충남 최고봉이라는 오서산(790.7m) 서남쪽의 성주산(680.4m) 동북쪽의 광덕산(699m)이 칠갑산을 둘러싸고 있고 남북으로는 호남의 젖줄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칠갑산 정상에는 다른 산 정상에서는 보기 힘든 제단(祭壇)이 있다. 아까 칠갑광장 유래 비에서 말했듯이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하늘과 산악을 지극히 숭앙하여 왔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이 산을 향하여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라는 말은 이 제단에 대한 설명 같다. 칠갑칠로(七甲七路)라는 말처럼 칠갑산 등산로는 7군데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올라온 칠갑사 주 등산로인 산장로와 사찰로로 해서 장곡사로 하산할 예정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산악인들에게는 이 코스는 너무 단조롭고 너무 쉬운 코스라서 544m 작은 갑산(삼형제봉)을 통해 장곡로 능선 길로 해서 장곡사집단시설지구로 하산 하는 길도 있지만 그 길은 장곡사를 빗겨가는 길이라 나는 장곡사(長谷寺)를 향하는 사찰로로 하산하고 있다. 정상에서 3,9km 1시간 거리였다. 청양인들은 칠갑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 울창한 숲, 봄의 산철쭉, 여름의 울창한 천연림, 가을 단풍과 겨울의 설경을 내세워 이 산을 '충남의 알프스'라고 있다. 그러나 칠갑산은 산악인에게는 인기 있는 산이 아니다. 산의 높이가 561m 밖에 안 되는데다가, 어느 명산에나 다 있는 기암괴석은 고사하고 육산이어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바위 하나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물이 귀하다. 더욱이 산길보다는 차가 다닐 수 있는 임도가 많아서 먼 고장의 산꾼을 부를 이렇다 할 만한 매력이 없는 산이다. 그러나 산을 어찌 한 두 가지로만 폄하할 수만 있겠는가. 중국의 장가계(張家界)와 황산(黃山)을 갔더니 어떤 이는 말하더라. '금강산을 어찌 이 산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때 내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민족과 문화에 우열이 없는 것처럼 산에는 한 가지 미(美)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황산이나 장가계가 웅장하고 아름답다면 금강산은 아기자기한 이곳 산들과 또 다른 한국적인 미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 우리네 남정네들은 처음에는 여성의 미모를 제1로 치다가도 장가들어 살아가다 보면 여성의 미모보다 고향 같은 여인의 마음을 얼마나 그리워하던가. 칠갑산도 그와 같이 수수하고 순박한 여인처럼, 부담 없이 가족이나 남녀노소가 어울려서 사계절 언제나 편안히 오를 수 있는 산이다. 게다가 우리가 올라오면서 보았듯이 청양군민들이 똘똘 뭉쳐서 내 고장 칠갑산으로 정성을 다하여 가꾼 산이어서 우리를 감격하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 장곡사(長谷寺) 가는 길 나도 다른 등산인들처럼, 정상에 갔다가 그 길로 다시 되돌아오는 원점회귀(原點回歸) 산행을 아주 싫어한다. 새로운 길로 시작되어 새로운 길로 하산하는 등산이 나를 항상 행복하게 해 주어서다. 나는 등산에서 만난 모든 것을 카메라에 기록하며 다닌다. 오늘 칠갑산 산행에서 찍은 사진만도 190여 컷이 넘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지 행복한 하산길에 있다. 그러나 보니 흥겨워 중얼거려 본다.
오늘 나의 행복은 원점회귀(原點回歸)가 아닌 까닭이다. 외출도 출퇴근도 여행길도 귀가 길에도 언제나 그랬듯이 반드시 그래야 하지만 산행만은 또 다른 산을 보며 걷고 싶다. 가보지 못한 그 길에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곳곳에 모여 나를 부르고 있으니까. - 원점회귀(原點回歸) 산행
장곡(長谷)이란 글자 그대로 길고 아름다운 계곡이란 말이다. 칠갑산에서 시작하여 아흔 아홉골을 지나 장곡천(場谷川)으로 이어지는 골짜기가 길고 아름다운 계곡이라서 길 '長', 골 '谷', ‘장곡(長谷)’이라고 부른 모양이다. 이제 나는 처음 보는 장곡사에 가서 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58호)과 삼배에 그렸다는 미륵불괘불탱(국보 300호) 2 점을 보고 한국에서 유일무이 하다는, 한 절에 대웅전이 둘이나 있다는 상 하 대웅전을 볼 생각이다. -장곡사 전경/ 하 대웅전 상 대웅전 장곡사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국보58호)/ 삼배에 그린 장곡사 미륵불괘불탱화(국보300호)
-장곡사철조좌상비로사나불부석조대좌(보물174호)/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제337호)
그리고 장곡사 입구에 조성된 장승공원에서 다시 또 행복한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다.
장승이란 이정표처럼 십리나 오리 간격으로 길 가에 세워 두고 이수(里數)를 표시하거나, 마을 수호신이라 하여 한 주(柱)에는 천하 대장군, 또 한 주에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새겨서 마을 입구에 주로 나무에 인형의 모습을 기이하고 해학적으로 새겨서 세워 놓은 목상(木像)을 말한다.청양장승공원에는 양반장승, 농부장승, 도깨비장승은 물론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350여개의 장승을 전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매년 4월에 '장승제'를 지내는 청양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승 보전 지역이기도 하다.
2015. 12. 22 수정
대둔산(大屯山, 877.7m)
(2011. 2. 17 대보름날, 케이블카 주차장- 금강구름다리- 삼선쇠철다리- 마천대- 수락폭포- 논산 수락리 주차장/ 늘푸른산악회 따라) *. 대둔산(大屯山) 지명
금년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와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다가 입춘(立春)이 지나서야 원거리 산행으로는 처음, 대둔산을 향한다. 수도권 일산에서 대둔산까지는 233km로 580여리여서 3시간 30분만인 9시 30분에 대둔산 케이블카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대둔산 정상은 877.7m로 정상 부근이 논산시, 금산군과 완주군에 접하여 있어서 충남은 1973년에, 전북에서는 1980년에 하나의 산을 2개 도(道)가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산이 대둔산이다. 전북 완주 쪽은 기암절벽이 절경으로 유명하여, 충남은 금산의 숲과 계곡이 아름다워서 도립공원으로 지정한 것이라 한다. 대둔산을 옛사람들은 '한듬산'이라 하였다. '한'은 '대(大)'요 '듬'은 깊은 산골을 뜻하는 '두메'의 방언이다. 그런데 한자에는 '듬'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서 우리말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와 비슷한 음인 '둔(屯)'으로 표현되어 대둔산(大屯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곳 대둔산 지역은 임진왜란 때나 동학혁명 때 격전지였던 곳임을 생각하면 군사 주둔할 '屯(둔)' 자가 그와 연관된 뜻이기도 한 것 같다. 대둔산 8경 중 ‘군지계곡(軍地溪谷)’이 있다. 220계단 아래 쪽에 있는데 백제 때와 임란과 6. 25 무렵 이 골짜기에서 군인들이 많이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것을 보면 ‘진 칠 둔(屯)’자를 이 산 이름에 쓴 것이 이상하지 않다. *. 케이블카 산행 나는 금년 들어 50년 전에 25세인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 폐가 안 되게 삭도(索道)를 이용해 오르면서 호남의 소금강이라는 대둔산의 이모저모를 굽어보려 하였다. 그러나 엊저녁 내린 눈은 뿌연 안개로 이어져서 5m 이상 앞을 볼 수 없는 날씨였다. 그래서 마천대 가는 길 좌측에 있다는 동심바위와 우측의 장군바위도 케이블카에서는 물론 걸어가면서도 볼 수가 없었다. 오늘 같이 안개 자욱한 날이지만 대신 간밤에 내린 눈이 만들어 놓은 대둔산의 또 다른 비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려야 했다. 케이블카는 927m로 승강착까지 6분에 올라가는데 매시 20분, 40분으로 20분 간격이었다. 성인 요금은 편도 5천원, 왕복 7천원이었다. 우리는 개척탑이 서 있는 정상 마천대(馬天臺, 877m)를 지나 논산의 수락주차장으로 하산하여 논산의 오골계(烏骨鷄)로 뒤풀이를 하러 가는 일정이다.케이블카의 대둔산 소개 아나운서 맨트에 의하면 대둔산의 경치 곳곳이 이 고장 아름다음의 진수를 드러내고 있다는데 천지사방이 미운 안개뿐이다. 맑은날 파란 하늘에도 별들이 빛나고 있듯이, 소개하는 대둔산의 명소는 보이지만 않을 뿐일 것이니 옛날에 보던 기억을 떠 올려 보기로 하자. 요 원본 사진 대조-동심바위: 케이블카 옆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0.6km/40분 거리에 커다란 돌기둥 위에 돌모자를 얹어 놓은 듯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가 원효대사의 전설이 어린 유명한 동심바위다. “신라 문무왕 때 국사 원효대사가 처음 이 바위를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3일을 이 바위 아래서 지냈다는 바위다.”
거기서 우측 길로 가다 보이는 것이 장군봉이요, 장군바위다. 케이블카를 타기로 하면서 오늘 산행은 도보로 올라오는 분들보다 1시간 정도 시간을 벌었으니 오늘 산행은 여유작작하겠구나 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종착지에 도달하였더니 벌서 도보로 올라오는 우리 일행 선두의 수런수런 소리가 들려온다. 케이블카 승차를 기다리는 시간에다가 거리가 삭도까지가 겨우 200m여서 그런 것 같았다. 케이블카 종착점에 멋진 팔각 정자 전망대도 있었지만 보이는 것은 그 정자뿐이었다. 거기서부터는 멋진 쇠층계 오름길이 계속되고 있었다. *. 금강구름다리(金剛雲橋)와 삼선철쇠사다리(三仙雲梯) 얼마를 더 오르니 입구에서 걸어서 올라오는 거리로 1.0km/ 60분 거리에 대둔산의 명물 중에 하나라는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잇고 있는 길이 50m, 폭 1m 다리가 있다. 경사 51도의 금강(金剛)구름다리였다. 구름다리란 길 위로 공중 높이 가로질러 놓은 다리로 한자어로 운교(雲橋)라 하는 다리다. 이름만도 멋진 다리인데 계곡을 가로 질러 놓은 다리이니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깊은 계곡을 굽어보며 그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넌다는 것이니 얼마나 스릴 있는 황홀한 길인가. 거기서 200m 더 가니 이번에는 45도의 급경사의 127개의 쇠다리 층계가 앞을 막아선다. 삼선철사다리(三仙雲梯)로 그 끝 바위가 해발 670m의 전설 어린 삼선대(三仙臺)다. 고려 말 한 재상이 딸 셋을 거느리고 나라가 망함을 한탄하여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는데 그 딸들이 선인(仙人)으로 변화여 바위가 되었다. 그 바위 모습이 세 선인(仙人)이 능선 아래를 굽어보는 모습과 같다 하여 삼선바위라 이름하였다.
이 삼선철다리를 올라서면 우리도 그 신선의 하나가 아닌가 착각하는 즐거움도 맛보게 된다. 그 철사다리를 오르니 정상인 마천대가 350m 거리에 있었다.
*. 낙조대(落照臺) 가는 길마천대 이르기 전에 '낙조대0.9km/ 낙조산장 0.7km' 의 이정표를 지난다. 마천대에서 낙조대까지가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능선이라는데 내 어찌 이를 두고 마천대만 고집하며 어찌 그냥 지나치고 말까. 이 낙조대 이정표를 따라 가다보면 일곱 폭의 동양화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봉이 나타난다. 대둔산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칠성봉(855m)’이다. 옛날 그 아래 용문굴(龍門屈)에서 용이 등천할 때 7개의 별이 떨어져서 칠설봉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하여 오는 산이다. 칠성봉에서 더 내려간 마천대에서 오쪽으로 약 1.2㎞에 있는 봉이 대둔산의 기암괴석과
어울려 낙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는 대둔산 6경인 ‘낙조대(落照臺, 850m)’였다. 그 낙조대 바로 아래에 있는 절이 대둔산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태고사(太古寺)다. 만해 한용운은 "태고사를 보지 않고는 천하의 승지를 말하지 말라.' 라 하였다니 앞서 동심바위에서 원효가 말했다는 “사흘을 둘러보고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산"이라는 말과 함께 대둔산의 일부를 겨우 본 우리네 같은 이가 대둔산의 아름다움을 함부로 말할 수 없게 한다. 태고사는 마천대 능선 기슭에 있는 사찰로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이지만 6. 25에 소실된 절이다. 이곳이 원효가 꼽은 ‘한국 12승지의 하나’로 서산대사(西山大師)와 진묵대사(震黙大師)가 오래 수도하다 입적한 절로도 유명하지만 그 절 입구 100m 지점에 있는 석문 바위에 쓰인 '石門'이란 음각으로도 유명하다. *. 마천대(馬天臺, 877.7m)에서 대둔산의 정상이라는 마천대의 개척탑(開拓塔)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울 북한산의 백운대보다 41m 높은 산이어서 크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수도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30년 이상의 세월을 뛰어 넘어 다시 찾은 산이고 보니 그 등산로는 다 잊었지만 이 탑을 대하니 까마득히 잊혀진 옛날이 되살아난다. 탑은 여전한데 나에게만 세월이 지나 갔는가. 이제는 파뿌리 같이 하얀 백발이고 보니 마음은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을 읽게 한다.
마천대에 올라서도 마천대(馬天臺)를 몰랐더니 이제 다시 찾아 드니 대둔 3경(大屯3景) 분명하다. 옛탑은 그 모습 그대로인데. 녹발(綠髮)만 백발(白髮) 되었구나.
대둔산의 주봉인 마천대(馬天臺, 877.7m)에 오르니 역시나 안개의 바다요 안개의 나라일 뿐이다. 맑은 날 마천대에 오르는 이는 북동쪽으로 속리산 문장대(文藏臺, 1,028m), 남쪽으로는 진안의 마이산(馬耳山, 686m)을, 서쪽으로 서해 바다와 동남쪽으로 덕유산(德裕山, 1,614m ) 등 산수화 같은 경치에 운해를 더하여 볼 수도 있다는데 우리는 그런 복은 갖지 못했나 보다. ‘마천대란 이름은 하늘나라에서 선인(仙人)이 말을 타고 내려와서 많은 중생을 구제하고 다시 말을 타고 승천하는 곳이라 하여 마천대(馬天臺)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 220계단'의 아름다움 대둔산 산행은 ‘층계 여행’이라 할 정도로 옛날과 달리 마천대까지의 오름길에는 층계가 많았다. 그러나 그 쇠층계의 시설은 치악산국립공원과는 비할 수 없이 훌륭하여 온종일 눈을 밟으면서도 아이젠 없이 올라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천대부터 우리가 가는 논산의 수락계곡 주차장까지 3.7km의 길은 계속되는 내리막 길이라서 아이젠을 해야 했다. 오전 내내 산을 가리던 안개도 사라져 가고 있어서 설화 만발한 길은 어쩌면 금년에 마지막 보내는 겨울의 눈길이라 생각해서인가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보거나 듣기에 좋은 느낌을 가질 만하다는 말이다. 사물이 원만하게 조화되어 있을 때 우리들의 감정에 기쁨과 만족을 줄만하다는 뜻이다. 예쁠 때, 고울 때, 귀여울 때, 우아하게 보일 때, 수려하다고 할 수 있을 때, 빼어나거나 매력적인 모습을 우리가 접할 때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름답다’라는 말이다. 그 아름다움이 대둔산 하산 길에 있었다. 눈과 어우러진 노송, 눈이 소복히 덥고 있는 바위도 그랬지만 눈 쌓인 하얀 층계들이 또한 그랬다. 그 중에 백미가 눈 덮인 220계단이었다. 내림길의 하얗게 눈 덮인 층계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99굽이라는 옛날 대관령고개처럼 구불꾸불 에돌아 휘돌아가는 층계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 같이 아름다웠다. 내가 지금까지 보던 계단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단이었다. 그 층계가 수락폭포에서 멈추더니 석천암 갈림길부터는 냇가로 내려갔다가 군지계곡(軍地溪谷)을 건너는가 했더니 '亞' 자를 쓰더니 멈추고 만다.
아름다움을 미운 안개로 수줍게 가리더니 섭할까 염려했나,
설화로 단장하고 만발한 천국의 계단으로 환송하는
대
둔
산.
-2011. 2. 17 대보름날
마이산(馬耳山)
*. 마이산(馬耳山) 유래 출처:진안군청 홈피 마이산(馬耳山)의 산 이름은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 때는 용출산(湧出山), 조선 초에는 속금산(束金山)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이 남행하여 진안 성묘산에서 제를 올리다가 이 산을 보고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가 '신증여지승람'에 전하여 온다. 다음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속금산[馬耳山] 전설도 있다. -대망을 가진 이성계는 지리산, 금산 등 전국의 명산을 찾아서 기도를 올렸는데 어느 날 밤에 꿈에 산신이 나타나서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으로 삼한 강토를 마음대로 헤아리도록 하라.'고 하더란다. 그 후 고려 우왕 때 장군이 되어 전라도 운봉 땅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여 수도 개성으로 가는 도중 마이산을 보고 놀랐다. 꿈에 금척을 받은 장소가 마이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태조 무렵에는 속금산(束金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가 등극 전에 임실 성수산에서 100일 기도를 마치고 이 산에 들어올 때 말을 매어 두었다는 곳이 탑사 아래에 이산묘란 사당으로 위 이야기의 신빙성을 말해 주고 있다. *. 마이산 종주 길 산악회는 건강한 젊은 사람들의 모임이라서 우리 같은 늙다리가 끼어 함께 하기엔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산악회는 저렴한 산행 회비로 인하여 입장료를 아끼기 위해 들머리로 대개는 매표소가 아닌 험난한 코스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따라 함께 하다 보면 덕분에 오늘 같은 마이산 종주 코스를 경험하게도 한다. 혼자 와서야 종주를 감히 엄두라도 낼 수가 있겠는가. 1990년 대 초에 마이산에 왔을 때도 달랑 암마이산 하나 오르고 탑사 구경을 마치고 갔다. 그때는 지금의 대웅전 자리에 양철 지붕의 당우만 있었던 시절이었다. 마이산에는 11 개의 다양한 등산 코스가 있다. 전주에서 오다가 덕천교에서 태자굴로 향하거나, 그보다 쉬운 길로 강정교에서 북수골 따라 오르는 보흥사 코스도 있지만 우리는 좋은 경치는 끝에 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강정리 함미산성 입구에서 시작하여 고대봉으로 해서 암마이산을 거쳐 탑사에 이르는 약 9km가 넘는 능선 종주 길을 가고 있다. 이 코스는 마이산 종주코스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지만 이 코스의 능선에서는 진안읍을 왼쪽으로, 탑사를 우측으로 전망을 즐기며 마이산을 바라보며 점점 가까이 가는 등산이기 때문에 너무나 좋았다. 산행 들머리의 무덤 있는 곳서부터는 한동안 계속되는 완만한 오름길이었다. 강풍에 떨어진 진달래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는 산길 가에는 4월을 알리는 흑싸리 꽃이 화투 밖으로 나와 하얗게 피어 있었다.
차도에서 0.5km 쯤 되는 거리에 흩어진 돌이 한 줄로 100m 정도 이어져 있어서 여기가 성(城)터인가 했더니 지나고 보니 과연 함미산성이 맞았다. 그러니까 이 부근이 삼국시대의 격전지였던 모양이다. 비정의 전쟁터여서 그러한가. 꽃샘추위치고는 지나친 강풍이 큰 소리를 내며 불어오고 있어 등산복을 여미고 등산 내내 장갑을 꼭 끼어야 할 정도로 추웠다. 산길은 계속 육산의 오름길이었다. 진달래꽃길, 철책길과 무성한 삼림 길을 지나니 멀리 뾰족한 광대봉이 보인다. 함미산성 터에서 마이산 가는 길에서는 제일 높다는 광대봉은 정상을 향한 가파른 철 난간이 또렷한데 앞선 우리 일행이 오르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니 신선들 같다. 세 번째 이정표가 좌측으로 1.1km에 태자굴을 가리키고 있다. 좌우로 바라보이는 산기슭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을 보면 저 아래가 해발이 400m 정도 되나 보다.
가파른 돌비알로 올라서니 멀리 마이산 두 봉우리를 배경으로 광대봉 608.8m의 정상석이 반가이 나를 반긴다. 여기서는 전망이 사방으로 탁 트여서 좌측이 진안읍인데 앞으로는 암마이산 그 뒤에 수마이산이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이산의 전경을 하나하나 열어주고 있다. 광대봉에서의 하산 길은 위험 구간으로 오금을 떨며 밧줄을 붙들고 내려오는데 경사가 80도가 넘는 직벽이었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내려가는 길이가 300m도 넘는 것 같다. 산행 경력이 40년이 넘는 내 경험으로도 이런 긴 밧줄을 타기는 처음이다. 일행과 혼자 떨어졌으니 더욱 두려움이 앞선다. 창원에서 왔다는 앞서 가는 50대 초반의 가정주부나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거침없이 내려가고 있는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야 얼마나 두려웠을까? 천신만고 끝에 안부에 내려서니 이정표가 다음 목적지인 2.2km 라는 '고금당'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마이산 종주 길의 이정표는 왜 그럴까 자기 위치를 잊은 채 방향만 가리키고 있다. 기둥에 세로에다가 여기가 어디인가를 먼저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 원칙일 터인데.565봉을 지나 555봉, 505봉으로 낮아지던 산이 다시 또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길에서는 오른쪽 산 아래에서 떠들썩한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다. 금당사 벚꽃 10km라는 진안벚꽃놀이가 한창인 것이다. 노란 사찰이 금당사요, 꼬불꼬불 10km로 이어져 간 것이 해발 400m라서 전국에서 가장 늦게 만발한다는 ‘진안벚꽃축제’ 모습인데 거기 잠깐 푸른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못이 탑영제다. 제(堤)는 둑이라는 말이다. .
*. 나옹화상이란 누구신가 이 능선에서 처음으로 만난 멋있는 층계를 오르니 바위 위에 멋진 진신 사리탑이 있다. 탑을 돌아 내려가 보니 거기가 바로 고금당(古金塘)이었다. 나옹선사가 수도했다는 자연암굴이라는 ‘나옹암(懶翁庵)’은 굳게 잠겨있었다. -외를 먹고 잉태한 가난한 여인이 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못하여 관가에 잡혀 가는 도중에 핏덩이로 태어나 길가에 버려져 있던 아이가 나옹(懶翁)이었다. 그때 날짐승이 날아와서 날개로 덮어 주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나옹이 10살쯤 되었을 때 외(瓜)를 동냥하러 온 스님을 따라 출가하였다.
나옹이 득도하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다시 고향을 떠나면서 땅에 지팡이를 꽂으면서 말하기를 '이 나무가 자라 가지가 무성하면 내가 살아있는 줄 알라' 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 있는 반송이 바로 그 소나무라는데 요즈음에는 시들어 가고 있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바로 나옹화상이요, 그 유명한 보우(普愚),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바로 나옹화상의 제자였다.
우리 산꾼에게는 이런 이야기보다 '토굴가(土窟歌)'로 널리 알려진 나옹 스님인데 그 토굴(土窟)이 바로 여기였나 보다.
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 왜 수마이산이 암마이산보다 작을까
종주 능선 길에서 수려하게 생긴 그리고 어느 산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모습의 마이산의 두 봉을 바라보며 차츰 차츰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광대봉에서 봉두봉까지의 능선이 말 잔등 같고 암·수 두 마이봉이 말의 귀 같다더니 그 말이 정말 같다. 동쪽에 수마이봉이 해발 667m, 서쪽에 솟아 있는 암마이봉은 673m로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은 암마이봉만 오를 수가 있다. 수마이봉은 너무 가파른 직벽이라서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수마이봉이 암마이봉보다 초라하게도 작아 보인다. 왜서일까? 나는 '남성들이 왜 여성들보다 몸집이 크고 힘이 센 것인가?' 하는 데에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농사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시절에 남정네가 여성들보다 체력이 우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남성들은 여성보다 더 활동적이고 더 충동적이다. 지난 시절을 나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아내가 알면 큰 일 날 번한 아내 모르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 아가씨들과 술을 먹는 것부터 그랬다. 쓰지 않아도 좋을 일에 돈을 펑펑 쓰고 다닌 것이 또한 그렇다. 이런 일들을 감춘다고 그 앙큼한 아내가 모르겠는가.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남정네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내가 육체적 항거로는 도저히 남정네와 더불어 맞설 수 없는 우리 남정네들의 강한 체력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게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아내 폭력에 시달렸을 것인가. 이런 구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점점 가까와 오는 암마이봉이 수마이봉보다 더 훨씬 크기에 하는 말이다. 서쪽에 있는 암마이산을 향하여 동쪽에서 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가까이 가니 수마이봉은 암마이봉에 가려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름을 서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먼저 마이산에 얽힌 전설부터 들어보자. *. 마이산 전설 출처:www.kormt.co.kr -등천(登天)을 꿈꾸던 네 식구 신선 가족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남 신선은 남들이 잠든 한밤 중 등천하자 하였고, 여 신선은 밤이 두려우니 새벽에 가자고 하였다. 아내의 말 따라 새벽에 등천하고 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새벽에 물 길러 나온 아낙네가 이를 보고 놀라 고함을 치는 바람에 부정을 타서 등천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남편은 홧김에 두 아이를 빼앗아 안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않아 바위가 되었고, 여신은 부끄러워 등을 돌려 앉은 바위가 되어 버렸다. 수마이산을 자세히 보면 양쪽에 두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인데, 그보다 웬만한 사람이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이 우뚝 선 것이 남자의 우람하고 힘 있는 남정네의 거시기 같은 모습이다. 거시기가 뭘까? 여의봉처럼 필요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는 남정네의 거시기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기서는 산의 크기로 암수를 나눈 것이 아니라 그 모양새로 나누었던 것이고, 옛날 어느 호사가가 그 모습에 맞추어 알맞는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고개는 금강(錦江)과 섬진강(蟾津江)의 분수령이 되는 곳으로 천황문이라 한다. 천황문에서 100m쯤 수마이봉 쪽으로 화엄굴이란 동굴이 있다. 굴속에 석간수가 있어서 이 약수를 마시고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 한다. 마시고 공부하면 과거에 알성 급제한다 하니 지나가는 나그네여, 아들을 낳고 싶거나 자손이 시험에 합격하게 하고 싶거든 이 물을 마실지어다. *. 나봉암의 팔각정 비룡대(飛龍臺)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이 마이산이라면 이 마이산에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 나봉암(527m) 비룡대(飛龍臺)다. 멀리서도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와 그 위의 8각 정자가 그 멋을 자랑하더니, 가까이 가서 그 오르는 가파른 쇠 층계가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모든 정자는 올라갔다가 되내려오는 층계이던데 비룡대는 전망 후 그 반대로 내려가는 멋이 있다. 아무리 바빠도 예서 정상주(頂上酒) 한 잔을 마시면서 코앞으로 다가선 마이산의 모습을 완상하고 싶었지만, 강풍이 너무 심히 불고 추워서 전망을 여유롭게 탐낼 겨를이 없었다. *. 마이산의 사계(四季) 삿갓봉(532m)은 능선 길에서 벗어나 있어서 생략하고 마이봉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 불끈 솟아 있는 봉을 오르니 봉두봉(540m)이란 정상석이 서 있다. 그 바로 위가 헬리콥터 장이었다. 나는 마이산을 향하여 오면서 멀리서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는 마이산을 바라보며 저것을 어떻게 옛날에 올랐지- . 오늘은 어떻게 올라가지- 걱정하면서 드디어 도착하였더니 이런 나를 위함인지 마이봉은 휴식년제로 10년(2004. 10.~2014. 10) 동안 등산로가 폐쇄돼 출입을 금하고 있다. 간판에 쓰여 있기를 '무단출입할 경우에는 50만원의 과태료'라고 등산객을 위협하고 있다. '막걸리가 보인다.' '통돼지 안주도 보인다. 어서 어서 하산하자.' 그 유명한 탑사로 해서 진안벚꽃축제의 봄을 만끽해야겠다. 암마이산은 하나의 거대한 수성암으로 이루어졌다. 가까이서 보니 크레인으로 자갈과 같은 큰 돌들과 모래를 시멘트로 버물려 다져서 쌓아 놓은 탑 같다. 게다가 북한산 인수봉이나 수락산 바위와는 달리 움푹움푹 작은 굴들이 파여 있는데 큰 돌들이 제 무게에 빠져나간 자리라 한다. 그 자연이 만든 굴속은 비둘기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풍화작용이 표면 아닌 바위 내부에서 일어나서 표면 밖에 박힌 바위를 밀어내서 생긴 모습들이다. 이를 타포니 지형이라 하고 타포니 지형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의 하나가 마이산이라고 한다. (2006. 4. 20/함미성-광대봉-고금당- 전망대- 봉두봉-암마이봉-탑사-탑영제-매표소-남부주차장/ Daum 고양시늘푸른산악회 따라)
모악산(母岳山, 793.5m)
* 진묵대사의 고향
天衾地席爲山枕(천금지석위산침)
月燭雲屛作樽海(월촉운병작준해)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卦崑崙(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 땅을 자리, 산을 배게 하고
달을 촛불, 구름을 병풍, 바다로 술잔 하여
얼큰히 취해 거연히 더덩실 춤추면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 게 불편하이.
임진, 병자호란 무렵 전라도 김제(金堤) 땅에 행적이 변화무쌍한 진묵대사(震默大師)라는 괴승이 있었다.
스님이 어느 날 위와 같은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그 시가 너무나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경지라서 모악산 금산사, 부여 무령사를 비롯한 스님이 노닐던 곳에 주렴으로 걸어 놓고 즐겼다 한다.
나의 외사촌 아우 송원순 사장이 구해준 그 글을 나도 액자에 고이 담아 서재에 걸어 놓고 그런 경지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다.
지금 나는 그 진묵대사(震默大師)의 고향 김제(金堤)의 모악산(母岳山)을 향하고 있다. 그가 유했다고 하는 대원사까지는 갈 수 있을지 염려하면서-.
진묵대사는 어머니인 고(高)씨가 처녀 시절 빨래터로 떠내려 오는 복숭아를 먹고 낳았다 해서 호로 자식이라고 버림받다가 7세 때에 출가하여 소석가(小釋迦)라는 이름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고승이 되신 분이다.
내일부터 금산사 유스호텔에서 1박 2일의 ‘한국동인지문학관’ 세미나에 참석하는 길에 나는 하루 먼저 가고 있다. 내일 새벽에 모악산 산행을 하기 위해서다.
* 모악산(母岳山)의 어원
계집 ‘女’ 자에다가 점 둘을 찍으면 어미 ‘母’ 자가 된다. 점 둘은 여자의 젖을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 김제, 만경 평야에서 제일 높은 산이니 ‘岳’(악) 자를 붙여 '母岳山'(모악산, 794m)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 호남평야의 중심부에서 제일 높은 모악산에서 발원된 강은 북으로 만경강, 남으로 동진강으로 만경평야와 김제평야를 적셔주는 젖줄이 된다.
김장호님의 '한국명산기'의 '모악산' 편에 이런 말이 있다.
산신뿐 아니라 고대 신앙상의 신은 대부분은 여성으로서 세계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도 영국인이 그렇게 명명하기 전부터 현지 티베트인들은 '초몰룽마(Chomolungma)'라 불렀는데 그것은 '세계의 어머니인 여신의 산'이란 뜻이라는 것이다.
에베레스트(M. Everest)란 1865년 이후 인도 측량국장을 지낸 영국인 관리였던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가 8,848m로 세계 최고의 산임을 측량하고 증명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모악산(母岳山)은 삼국유사와 고려사에서는 '금산(金山)'이란 기록이 보이다가 동국여지승람에는 '모악(母岳)'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김제(金堤市)나 금산면(金山面), 금천(金川) 등의 금(金) 자를 보면 월평천, 두월천의 사금(砂金)이 많이 나는 데서 유래된 말 같다.
'금산사지(金山寺誌)'에 기록되어 있는 모악의 유래에 대한 말은 우리를 자못 흥미롭게 한다.
.삼국유사와 고려사 등에는 이 산을 금산(金山)이라 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에는 엄산, 큰뫼라 불렀다. 이 모두 엄지와 같이 '크다'는 뜻이다. '엄뫼'는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모악'(母岳)이 되고 '‘큰'의 명사형은 '큼'이니 한자 '금(金)으로 음역(音譯)되어, 금산(金山)으로 표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모악산 정상 아래에 있다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라 하여 모악산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또 김제 평야 등지에서 멀리 이 산을 바라보면 그런 모습이라 하여 그렇다는 말도 있다.
모악산의 새벽 등산
별들은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등산길에 물통 하나 달랑 차고 모악산을 향하여 나섰다. 금산사(金山寺)까지 가는 도중에 가로등이 꺼지더니 일주문에서 야경을 촬영하려는데 그마저 꺼져 버린다.
금산사는 절 문이 커다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금산사 정상의 군 시설물을 제거하여 불자의 기도처가 되게 해달라고 등산로 찻길을 막고 투쟁 중인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철문을 넘어 우측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가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리 등산이 위주라지만 '이 먼 곳 김제(金堤)까지 와서 금산사(金山寺)를 어찌 그냥 두고 지나칠 수 있으 랴. 국보 62호라는 미륵전(彌勒殿)이라도 챙기자.' 하는 생각에 뒤돌아 금산사 경내
.
로 들어섰다. 서향하고 있는 3층 미륵전은 외모와 달리 내부는 전체가 툭 터진 하나의 통층이다. 거기 세 불상은 모두 입상(立像)인데 중앙 주불 소조삼존불입상(塑造三尊佛立像)은 높이가 11.81m, 좌우의 협시보살입상(脇侍菩薩立像)로 법화림(法花林) 보살과 대묘상(大妙相) 보살은 8.79m 가량이지만 안타깝게도 1597년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로 불타버린 것을 1938년에 완성하여 모신 불상이었다.
등산 후에 챙겨야 할 일이 급하여 '나머지는 다음에 보지-' 하면서 절을 뒤로 하고 모퉁이를 막 돌아 조금 가다보니 부도(浮屠)군이 있다.
우리가 절 근처에 가면 만나게 되는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보통의 부도가 아니라, 그 중 한 부도는 철조 물에다가 파란 플라스틱으로 하늘을 가리었다.
등에 비(碑)를 인 거북을 보니 보물24호라는 혜덕왕사진응탑지인 것 같다.
길은 계속되는 지루한 콘크리트길이었지만 개울물이 길까지 적셔 가며 소리 내며 흐르는 삽상한 여울물소리를 거슬러 한참이나 올라가니 갈림길이 있다. 이정표를 보니 여기는 금산사에서 0.8km 올라온 곳이요, 모악정(母岳亭) 1.2km, 심원암 0.6km가 남았다.
모악정은 내려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심원암 코스를 택하였다. 모처럼만에 시원하게 하늘로 곧장 뻗어 오른 수목을 본다. 맞추어 서 있는 하얀 콘크리트 전봇대와 나무가 구별이 안 될 정도의 서유럽, 동유럽 여행길에서나 만나보던 그런 나무들이었다. 심원암(深源庵)에는 금산사북강삼층석탑(보물29호)이 있다. 탑을 돌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 성취한다 하여 조선조 때에는 서민층과 사대부집 부녀자들의 발길이 그칠 새가 없었다는 심원암 암자였다.
모습을 드러낸 심원암은 아침 염불이 끝났는가 굳게 닫혀 있는데, 사찰이나 요사체가 요즈음 신축한 건물이라서 땀 흘려 찾아온 깊은 산사인데도 그윽한 풍취를 반감하게 한다.
마당에 있는 화강암에 양각으로 된 관세움보살상 이외에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탑은 어디에 있는가. 신원사지를 현재 자리로 옮겼다더니 나의 소원성취도 빌어볼 곳이 없구나.
갈림길에서 600m까지 올라와서 되돌아가기는 억울한데 올라갈 등산로가 어딘지 보이지 않는데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얼른 보니 절 뒤 산죽 우거진 곳에 나무에 매달린 비닐봉지가 보일뿐이다. 수통에 물을 갈아 넣고 깊이 잠든 이 절의 사방을 기웃거리다가 자세히 보니 그 흉한 비닐봉지가 리본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길 솟은 산죽 사이 길의 흔적이 있다. 거길 뚫고 나가니 등산길이 어부가 무릉도원을 찾아 들어선 별유천지 같은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토끼인가 산짐승이 숲을 헤치며 도망을 가는지 숲이 요란히 흔들린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스틱을 가져올 걸 그랬다. 배낭 속에 준비해온 종을 가져올 걸 그랬다.
절에 있는 풍경이나 종(鐘)이 뱀을 쫓는다고 하지 않던가. 치악산의 전설에서 선비를 뱀으로 구해준 것이 까치가 만들어 낸 종소리이었듯이-.
깊은 산 중에 웬 성(城) 터인가. 공들여 쌓은 것은 분명 성터이다.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툴 때의 것인가. 아니면 임진왜란 때 처영(處英)이 승병 1천을 이끌고 왜병을 무찌른 곳이 모악산이라 하더니 그때 쌓은 성인가.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니 바람이 그리워지는데, 바람도 아직 자고 있는지 온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반가운 이정표가 있기는 있는데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기대어 있다. 온 길을 표준삼아 가름하여 이정표대로 직진해보니 영- 길이 안 나타난다. 리본도 없었다. 이럴 때는 큰길로 가는 것이 상책이지 하며 오르다 보니 리본 몇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드디어 모악산을 빙 둘러 있는 평야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무 사이로 정상이 보인다. 관악산 같이 송신탑인가 군부대인가 산꾼에게 섭섭하게도 정상을 온통 독점하고 있었다. 헬리콥터 장에 서니 350m라는 이정표가 정상을 향하여 손짓하고 있다. 이곳은 벌판으로 둘러싸인 전망이 일품이었다. 어느 산이나 정상이 가까운 곳에서는 인적소리가 있듯이 비로소 사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구이저수지 쪽에서 올라온 등산객인가 보다.
헬기장에서 170m를 오른 곳에 정상3거리 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정상까지는 170m만 가면 된다. 멀리 금산사가 손바닥만 하게 숲 속에 묻혀 있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간 곳은 철조망 밑 어느 상호신용금고가 세워 놓은 알루미늄 구조물에 쓰인 793m라는 글씨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쩌랴. 분단국가에서 우리가 감수해야 할 현실인 것을.
정상에 서니 멀리 금산사 쪽으로 김제시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반대 동쪽에 거대한 구이저수지가 전개 된다.그 북쪽 어름에 한 눈에 가득 들어오는 아파트촌이 전주시(全州市)인가 보다.
정상이라고 하는 이곳에서는 수암사를 거쳐 진묵대사가 있었다는 대원사를 거쳐서 선녀폭포를 보면서 구이저수지로 내려갈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장근재를 거쳐 심원암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이 모악산은 산도 산이지만 계곡이 유명한 곳이라 계곡과 모악정을 보러 아까 올라온 정상3거리를 향하고 있다. 거기서 모악정까지는 1.1km였다. 한국의 정자는 마루바닥을 지면보다 한층 높게,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산수 좋은 높은 곳에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다.
그런 정자를 어찌 산을 핑계하여 정자를 생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물가에 있는 모악정을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지나치고 말았다. 동료들과 함께 하여야 할 일을 뿌리치고 나만을 위한 새벽 산행이었기 때문이다.
길이가 4km나 된다는 눌연계곡(訥然溪谷)은 굴곡이 심하여 길게 늘여 있다 해서 늘연계곡이라 한다지만' 訥'(눌) 자가 '말 더듬을
눌' 자인 것은 말을 더듬거리는 모양 같이 물의 흐름이 더디어서 눌연계곡이란 말이 더 재미가 있다.
백중(百中) 날이 가까왔지만 그래도 매미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이 가까이 와서인가 그 소리는 힘이 없었고 우는 매미도 많지가 않았다.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올 여름의 더위에다 몰려오는 태풍 때문에 그 동안은 칩거하였지만 돌아가면 다시 또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해야겠다. 먼저 꿈꾸던 덕유산 종주부터. 그리고 지리산 피아골의 삼홍(三紅)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이 가을에는 반드시 챙겨 봐야겠다.
-<2004년 8월 28일/금산사-심원암-모악산-모악정-금산사/단독산행>
모악산 개방
KBS 전주방송총국이 모악산 정상을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해발 794m인 모악산 정상(사진)은 1978년 KBS송신시설이 들어선 이래 지난 30년 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이 통제돼 왔다. 이에 전북도내 시민·사회단체들은 “모악산 정상을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달라”고 요구해 왔다.
모악산 정상 개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KBS는 시민들이 송신시설을 둘러볼수 있는 견학 프로그램을 하루 3차례 운영한다.1일 견학인원은 60명 이내로 제한한다.
KBS관계자는 “모악산 정상은 지상파 TV의 송신을 위한 핵심시설 뿐 아니라 군부대 등 국가 보안시설이 함께 자리잡고 있어 관계 기관
무등산(無等山) 국립공원 2016. 1.5 수정(2010. 1. 10/ 너나목장- 중머리재-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 장불재- 백마능선- 국화마을/ 우리산내음 부부산방 따라) *. 광주 무등산국립공원 무등산(無等山, 1186.8m)은 광주(光州) 동쪽 10km에 있는 도시와 가까운 산이다. 소백산맥에서 서쪽으로 뻗은 호남정맥 중 장안산(1,236m, 장수)과 백운산(1,217m, 광양) 중간 지점에 있는 광주의 진산(鎭山)으로 그 넓이가 30.23㎢인데, 광주 27.0㎢, 화순 2.4㎢, 담양 0.8㎢에 걸쳐 있는 산이다. 무등산의 이름은 백제 이전까지는 무당산(巫堂山), 통일신라 때는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 고려 때는 서석산(瑞石山) 이라는 이름과 함께 무등산(無等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무등(無等)'이란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유등등(無有等等)'의 준말로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산과 ‘겨줄 수 있는 산이 없다[無等]’하여 지어진 이름이 무등산(無等山)이다. 무등산이란 이름이 전하는 노래로 백제의 부전가요(不傳歌謠) 무등산가(無等山歌)가 있다.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으로 전라도에 있는 큰 읍이다.이 산에 성을 쌓으니 백성들이 근심 없이 편안히 즐거워 하며 이를 노래하였다.(無等山 光州之鎭山. 州在全羅道巨邑. 城此山 民束負以 安樂而歌之) -고려사 악지(樂志)
무등산(1,187m의)은 호남평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호남의 얼굴이 되는 어머니 산이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보아도 그 모습이 한결같이 두루뭉술하여 믿음 직하고 덕이 있는 산이다. 그래서 그 모양 때문에 광주의 고로(古老)들은 이 산을 '무덤산'이라고도 불렀다.
이 산은 서울ㆍ부산ㆍ대구ㆍ인천에 이어 국내에서 5번째로 큰 1,492,948명(2014년)이 사는 호남지방(湖南) 최대의 도시요 전국 6대 도시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이요,호남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 증심사(症心寺) 코스 금년 연초에 103년만에 최고라는 폭설로 무등산에 설화(雪花)가 만발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전 이한희 ‘화순한마음산악회’ 회장 초대에 따라 우리 산내음산악회는 서울서 800리 길을 달려 화순을 왔다. 안내까지 자청해 준 전 이 회장이 버스에 올라 화순(和順)을 소개 한다. "아시다싶이 광주의 자랑은 무등산입니다. 그 무등산의 진수인 서석대와 입석대 광석대가 우리 화순군에 있지요. 천불천탑(千佛千塔)과 와불(臥佛)로 유명한 운주사(雲住寺)가 있는 고장,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고인돌과 그 채석장으로 유명한 고장 화순에 오신 한국의 산하 '우리 산내음산악회'의 무등산 방문을 환영합니다."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서울의 진산 북한산 백운봉(白雲峰)이 고양시(高陽市)에 있듯이 무등산의 '장불재, 입석대, 광석대, 규봉, 천황봉'이 화순(和順)에 있고 '서석대 인왕봉, 지왕봉'이 화순(和順)과 광주(光州)에 걸쳐 있다. 다음은 2008년 10월 26일 화순한마음산악회가 주관한 "전국산악인 초청 등반대회"를 다녀와서 쓴 나의 졸시(拙詩)다.
운주사(雲住寺) 다녀오고도 화순(和順)을 몰랐다. 입석대(立石臺), 규봉(圭峰)을 올라서도 화순(和順)을 몰랐다. 화순(和順)의 인정(人情)을 만나고야 화순(和順) 것임을 알았다. 쌍봉산(雙峰山) 대웅전(大雄殿) 닮은 속리산(俗離山) 팔상전(八相殿). 고인돌 채석장(採石場)과 화순(和順)의 지석묘(支石墓)가
세계의 문화유산(文化遺産)임을 화순(和順) 와서야 알았다. 이제는 화순(和順)을 아노라 말하리라. 무등산(無等山) 참모습을 화순(和順) 와서야 만났다고. 화순군(和順郡) 그 옆에 있는 도시가 빛고을 광주(光州) 라고. -화순 군민(和順 郡民)께
오늘 우리들의 등산 일정은 화순 '너나목장'에서 출발하여 '중머리재→ 장불재→ 입석대→ 서석대→ 백마능선'으로 해서 국화마을로 하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산행에다가 3년 전에 찾아온 '증심사→ 약사사→ 새인봉(490m)'과 '규봉암 이야기'를 아우를 생각이다. *. 증심사(證心寺)와 약사암(藥師庵) 이야기 무등산에는 원효계곡,·용추계곡,·약사사계곡 등 3계곡이 있다. 약사암계곡을 끼고 증심사와 약사암이 있고, 원효계곡에 원효사가 있다.
무등산 절 중 제일 큰 고찰이 무등산 서쪽 산록의 증심사(證心寺)다. -증심사(證心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철감선사 도윤(澈鑑禪師 道允 798년~868)이 창건하였다고 전해 오는 절이다. 정유재란에 때 불타버리고 다시 지은 절이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에 또 불타면서 국보급의 문화재들이 분실되었다. 그때 증심사에서 소실되지 않은 당우에 오백전(五百殿, 광주시유형문화제제13호,광해군 때 건물)이 있다. 이 증심사에서는 오백전 외에도 사성전(四聖殿) 안에 신라의 대표적인 철불인 철조비로사나불좌상(鐵造毘盧舍那佛坐像,보물131호)과 유형문화재1호인 3층 석탑이 유명하다.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은 왼손 집게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 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는 불상이다.
이때 오른 손은 불계(佛界)를 왼손가락은 중생계(衆生界)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불상의 크기가 인체 크기의 등신불(等身佛)이어서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불상이다.
3층석탑은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지붕모서리를 쳐올림한 곡선이 매우 아름다운 신라 시대의 탑이다.
증심사 입구3거리로 다시 나오니 0.8km 거리에 약사사(藥師寺)가 있다. -무등산에서 6.25 피해를 입지 않은 오직 하나의 사찰이 약사사다. 신라 문성왕 때 철감국사가 증심사를 세우기 전에 세웠다는 이 암자는 인왕사(仁王寺)라 하다가 약사사(藥師寺)로 절 이름을 고쳤다. 이 절의 자랑은 9C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연화좌(蓮華坐)에 결가부좌한 높이 1.2m의 석조여래좌상(보물 600호)이다.
*.새인봉(璽印峰) 이야기 약사사 대웅전 섬돌에 앉아 바라보니 남쪽에 커다란 봉우리가 있다. 새인봉(608m)이었다. 이 절의 일주문에서 0.6km를 오르니 우측으로 새인봉 가는 능선이 펼쳐진다.
무등산에 있는 주요 산봉우리를 높이 순서대로 들어보면 '천왕봉(1,187m), 중봉(915m), 원효봉(561m),의상봉(546m),낙타봉(546m),새인봉(490m)' 등이다. 새인봉(璽印峰, 490m)은 약사사 남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덩이의 봉이다. 그 정상의 바위 모습을 멀리서 보면 나라님의 도장인 옥새(玉璽)와 같다 하여 새인봉(璽印峯) 또는 인괘봉(印掛峯)이라 하는 봉우리다. 새인봉에서는 굽어보는 광주시의 전망도 일품이지만 남동쪽의 투구봉[감투바위]과 바로 아래 배 머리 모양의 10여m 높이 직벽의 선두암(船頭岩)이 특히 아름답다. 선두암은 금강산의 총석정 같은 절리의 기둥을 하늘로 뽑아 올리고 있는데, 기묘하게도 능선이 작은 쇠 층계로 연결되어 있다. 새인봉의 절경 속에 하나의 흠이 있다면 새인봉 정상에 있는 두 개의 무덤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간혹 보게 되는 밭 가운데 있는 무덤이나, 등산길을 막는 무덤은 우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유지에다 쓴 묘야 어쩔 수가 없겠지만, 여기는 광주가 자랑하는 도립공원이요, 국립공원 선정을 꿈꾸는 무등산이기에 하는 말이다. *. 장불재 가는 길의 설화(雪花) 화순 '너와 나의 목장'이 있는 수만리4구에서 중머리재로 가는 오늘의 무등산 산행 길은 중봉을 바라보며 산을 우회하는 평탄한 눈길의 산길이었다. 우측으로 장불재의 멋진 송신탑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중머리재다. 무등산의 설화(雪花) 때문이었을까. 게다가 마침 점심시간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식사하는 이, 쉬는 이들로 떠들법석하다.
중머리재(586m)의 어원은 무엇일까. 여기서 '머리'는 끝이나 꼭대기를 뜻하는 말인데 그 앞에 ‘중’은 무슨 의미일까. 지리산 천황봉 다음으로 높은 산이 중봉이듯이, 무등산 천황봉 다음으로 높은 산이라서 중봉(中峰)이라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머리재의 ‘중’은 중봉에서 왔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다. 그도 아니라면 새인봉(490m)과 중봉(915m)의 각각의 중간 1km 내외에 있어서 '중'자가 붙은 것이라고도 생각되지만 전자가 알맞는 말 같다. 중머리재에 있는 '중봉1km'라는 이정표가 이 나의 생각을 뒷바침해 준다. 장불재를 향하다 보니 찬란한 눈꽃길이 시작된다. 나무란 나무는 흰눈을 이고 있고, 가지란 가지마다 하얀 눈이 꽃처럼 피어있다. 눈 없이 그냥 서있는 초목은 하나도 없다. 여심(女心)이 호들갑이 마음을 신나게 한다. "저 나뭇가지 봐! 루돌프 사슴 뿔 같아!" "저 것 봐. 솜사탕도 같고 눈 소시지도 같아. 아냐 눈 열매야!" 중머리재에서 용추3거리를 지나 장불재까지 1.5km나 그 설경에 그 감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옛날 내가 태백산과 소백산 가는 길에서 보던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설화 만발한 세상이 아닌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때 감흥을 다음과 같이 시화(詩化)한 적이 있다. .
구름이 산을 그려 눈으로 내려왔나. 나무가 겨울 기려 겨울 꽃을 피웠는가. 바람이 파란 하늘 아래 눈꽃 잔치 벌였다. -눈꽃
금년에는 이상 기온으로 기상대 창설 이래 최대의 폭설이 내렸다. 농산물 수산물은 값이 급등하고 출퇴근에 직장인들은 교통체증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산꾼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음이 산을 향하고 있다. 눈다운 눈이 내린 눈 덮인 산을 마음껏 밟아 보며 설화(雪花)를 보고 싶어서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상고대와 설화(雪花)를 혼동하여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상고대란 '서리(frost)'고 설화는 '눈(snow)'과 관계 되는 말이다. 다음은 사전을 소개하는 것이니 참고하여 상고대와 설화를 구별하여 사용할 일이다. ○영한사전: 상고대: a heavy frost on tree tops 나무 위의 강설(降霜)/ 설화(雪花‧雪華) :『눈송이』 snowflakes, 『나뭇가지의』 snow on the branches; sil-ver thaw ○민중서관 국어사진(이희승): 상고대: 나무나 풀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1. 눈송이. 2. 나뭇가지에 꽃처럼 붙은 눈발. ○우리말큰사전(한글학회): 상고대: 서리가 나무에 내려 눈처럼 된 것/설화(雪花, 雪華)=눈송이, 나뭇가지에 붙은 눈발 ○표준국어사전(이숭녕): 상고대: 초목에 내려 눈같이 된 서리/설화(雪花, 雪華)=눈송이, 나뭇가지에 내린 눈발 snow on the branches *. 장불재 이야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듯이 무등산 등반은 장불재로 통한다. 정상 밑의 요란한 송신철탑이 솟아있는 곳이 장불재다. 오른쪽 것이 KBS통신 탑이요,왼쪽에 있는 두 탑이 MBC, SBS 송신탑이다. 옛날에는 이 장불재 일대가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여 민간인의 출입금지 지역이었다가 1981년에야 풀린 곳이다. 90년에 와서야 정상 일부인 서석대(해발 1,100m), 입석대(1,17m)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중봉에도 군부대가 주둔해 오다가 1999년에야 철수하였지만 천황봉 일대만은 지금도 그대로 묶여 있다. 군부대가 물러난 그 자리를 복원하면서 자연스레 억새가 장불재까지 이어져 가을의 백마능선은 억새밭으로도 유명하게 되었다. '장불재'의 어원은 무엇일까. 나는 국문학도라서 지명이나 산명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한국의 산 이름은 산악숭배 사상과 함께 불교적인 것이 많다. 불교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장불’이란 말은 없고 대신 '長佛寺(장불사): 전라남도 화순군 서석산에 있던 절.'란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장불재란 장불사가 있던 절 근처의 고개란 말이겠다. 그 장불(長佛)을 길게 누운 불상 즉 와불(臥佛)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장불재는 평전(平田)이다. 평전이란 지리산의 세석평전처럼 높은 곳에 있는 평지(平地)를 뜻하는 말이라서 생긴 이야기 같다. *. 무등산 3대 절경
장불재에 오르니 저 멀리 천황봉은 운무에 싸여 있고 ‘무등산의 3대 절경’ 이라는 입석대 서석대 규봉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다.
규봉 대신에 규봉암 뒤 절벽인 광석대를 더하여 ‘무등산 3대 석경’이라고 한다.
그 중 제일 처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이 입석대다. 입석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전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입석대 가는 길은 질퍽한 노면 때문에 고생하였는데 오늘 와서 보니 자연형 돌깔기 방법으로 탐방로를 잘 정비하여 놓아 상쾌한 길이 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멋진 ‘입석대 전망대’와 '立石臺해발 1,017m'란 표지석도 만들어 놓아 더 가까운 위치에서 입석대를 감상하고 기념할 수 있게 하였다. 광주의 상징이 무등산이라면 무등산의 상징은 천연기념물 제465호인 서석대(瑞石臺)와 입석대(立石臺)다. 약 7천만 년 전에 화산 폭발로 인한 용암이 식으면서 수축현상에 의해 냉각면이 수직방향으로 갈라져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柱狀節理)를 이루었다. 절리(節理)란 바위의 규칙적인 틈새를 말하는 지리학 용어다. 이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빙하기를 겪으며 우리나라 그 어떤 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각 또는 육각형의 깎아지른 돌기둥 모양의 신비로운 절경을 이룬 것이다. 입석대와 규봉은 그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둥 모양이지만, 서석대는 풍화가 덜 진행된 병풍 모양이다.
서석대를 향하여 오르다 보면 드문드문 너덜겅이 있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돌기둥이 무너져 쌓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등산이 형성된 순서는 '서석대-입석대- 너덜겅'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니 이런 풍화과정을 우리는 눈으로 느끼고 보면서 서석대를 향할 일이다. 그 아름다운 모양이 금상첨화(錦上添花)로 오늘은 설화가 만발한 은빛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으니 오늘의 무등산에 있는 사람은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옛날에는 입석대 주변에 많은 암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움푹 뚫린 주춧돌이 있는 것도 그렇지만, 조선 중기 의병장 제봉 고경명(高敬命)이 무등산을 돌아보고 쓴 견문록인 ‘유서서석롤(遊瑞石錄)’에 '입석암, 상원등암, 상일암을 비롯한 10여개의 암자들이 바위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함께 어울어져 무등산 제일의 명소였다'.라는 기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입석대서 0.5km의 서석대 가는 길에 옛날에 있었다는 승천암의 전설 안내 표지가 있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했다. 얼마 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곧장 스님을 풀어주고 승천하게 되었다.
입석대(立石臺,천연기념물 제465호)는 무등산 정상의 서쪽 해발 1,017m 지점에 주상단애(柱狀斷崖)석축으로 5~6모 또는 7~8모로 된 돌기둥이 반달 같은 모양으로 둘러서 있는 것을 말한다. 높은 것은 15m~16m로 대개는 10m 이상 되는 것이 한 무리고 또는 3~4단으로 겹쳐 세워져 있는 것이 마치 석수가 먹줄을 튕겨 깎아 세운 듯 돌기둥이 줄줄이 열을 지어 늘어 서 있다.
그러나 입석대를 통해 서석대에 오르게 되면 우러러보는 병풍 같은 모습이 아니라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서석대 경치였다. 서석대의 참모습을 보려면 거기서 옛길 따라 중봉 쪽으로 내려가든지 아니면 중봉에서 1.1km를 오를 일이다.
서석대 전망대 부근의 공군부대장의 경고문이 있는 쪽이 이 무등산의 주봉 천황봉이 있는 곳인데 천황봉 일대는 연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서 있는 간판을 자세히 보니 1년에 한번쯤은 개방한다는 말이 있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이 천황사 지역에 있는 봉을 '삼재봉(三才峯)'이라 한다.삼재(三才)란 천지인(天地人)이니, 천왕봉(天王峰,1,187m)을 중심으로 북쪽에 지왕봉(地王峰,1,120m), 남쪽에 인왕봉(人王峰1,140m)이 그것이다. 이 천황봉 일대가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처럼 개방된다 해도 내 나이로는 다시 올 수 없는 곳이라서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장불재를 향한다.
규봉암(2010. 1. 10/장불재- 석불암- 지공너덜- 규봉암- 백마능선-국화마을/ 우리산내음 산악회 따라)
일찍이 입석대 서석대를 둘러본 육당 최남선은 “무등산은 천연의 신전(神殿) 같다.” 하였고 또 다른 옛사람들은 “오대산 같은 육산(肉山)에다 골산(骨山) 월출산을 얹어 놓은 산이 무등산이라.”고도 하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무등산 3석대’만도 그러한데, 당시 분들은 천황봉까지 본 후의 이야기일 것이다.
군부대가 주둔하여 있어 천황봉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다시 장불재로 원점회귀(原點回歸)를 한다. 입석대로 하산하다 보니 커다란 제왕의 능 같은 봉분이 하나가 있다. 누구일까? 비명에 쓰인 것을 살펴보니 '處士崔公燦翼之墓' 라 쓰여 있다. 처사(處士)란 옛날 벼슬살이에 나서지 않
고 조용히 초야(草野)에 묻혀 살던 선비를 말한다.
지체가 높지도 않은 분이 어떻게 이런 천하 명산 그것도 정상의 일부를 찾이 하고 있는 것일까 자못 신기하기만 하다. 무덤의 위치는 물론 잘 가꾼 봉분과 망주석까지 있는 것을 보니 유명한 후손을 둔 분의 무덤 같다. 그보다 그 비석 측면에 부인을 합장한 이곳의 위치를 '郡西龍鎭山土峰下'라 쓴 것을 보니 천황봉을 옛날에는 토봉(土峰)이라 한 것 같아 그 고증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규봉암 가는 길 몇 년 전 등산회를 따라왔다가 앞만 보고 달리는 말과 같은 그분들과 떨어져서, 홀로 증심사와 약사사에다가 새인봉(璽印峰)까지 둘러보고 장불재에 이르고 보니 일행은 벌써 하산하여 산 아래 주차장에서 뒤풀이를 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고양시 일산에서 860리를 달려와서 입석대와 서석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분들에게 산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겠다고 연락하고 규봉암(圭峰庵)을 향하였다. 설마 절에서 길 잃은 이 늙다리 나그네를 내치랴 하는 마음에서였다. '입석대 '0.4km/ 규봉암 1.8km/' 이정표에서 보듯이 규봉암은 장불재에서 1.8km로 산허리를 돌아가야 하는 인적이 드문 희미진 외길인데 그 중간도 가지 못하여 해드랜턴을 켜야만 했다. 그 어둠 속에서 제일 먼저 만난 곳이 석불암(石佛庵)이라는 마애미륵불(磨崖彌勒佛)을 모신 작은 암자였다. 이 암자는 산신기도 도량으로 불심이 두터운 선남선녀가 찾아온다는 곳이다. 석불암은 대변을 못 가리는 93세의 노모를 모신 스님 한 분이 지키는 암자라서 다시 규봉암을 찾아 가야했다. 깊어 가는 밤에 홀로 찾아가는 규봉암 길은 발자취를 확인 할 수 없는 너덜겅 길에다가 이정표도 거의 없는 산길이라서 암자 찾기가 쉽지 않았다. 노산 이은상은 규봉에 와서 그 아름다움에 취해 달밤에 밤길을 헤맸다는데, 이 사람은 달도 없는 깊은 밤에 그 규봉을 찾지 못해 두려움 속에서 그 험한 지공너덜길을 헤매고 있다. 규봉(圭峰)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 +-+- 밤 예불 마디마디 달은 점점 밝아 오네 삼존석(三尊石)
십대(十臺)를 돌아 밤새도록 헤맬거나. - 규봉암에서/ 노산 이은상
-지공(指空)너덜: 장재불에서 규봉(圭峯)까지 사이에 무수히 깔려있는 너럭바위들은 무등산의 3대 너덜 중 대표적인 너덜인 지공너덜이다.이 너덜은 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3km 남짓 되게 깔려 넓은 돌 바다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을 지공너덜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인도의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에게 설법을 듣던 나옹(懶翁)선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명명한 것으로 지공대사가 여기에 석실(石室)을 만들고 좌선수도(坐禪修道)하면서 그 법력으로 억 만개의 돌을 깔았다고 전하여 온다.
지공너덜을 어둠 속에 지나다 보니 돌로 싼 담이 있다.웬 담인가 하여 들어가 보니 크고 넓은 바위 사이로 석실이 있다. 한국불교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송광사를 창건하기 전에 좌선하였다는 보조석실(普照室,일명 은선대)였다. 이를 보고 '이젠 규봉암'에 다 왔구나 !' 하고 희희낙락 반가와 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불빛도 인적도 없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나마 주위는 서석대, 입석대 같은 바위로 둘러 싼 절경이 계속된다. 그 절리 앞에서 갑자기 겁이 난다. 내가 지금 규봉암을 지나친 것은 아닌가. 길을 잘못 들었다면 큰일이다. 꼬막재까지가 3.6km요, 거기서 인가가 있는 원효사까지는 3.4km를 더 가야 한다니 이 밤중에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해서였다. 급히 핸드폰을 열었다. 119에 전화를 걸어서 규봉암 스님에게 절에 불이라도 켜 주어서 위치를 알게 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중에 무심코 옆을 보니 우측에 두 바위 사이가 길인 것 같다.
커다란 바위 둘이 있는 사이를 너덜을 딛고 올라가보니 아아, 거기에 절 지붕이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가. 규봉암의 범종각이었다. 그 절 바로 옆에서 절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규봉암 이야기: "스님, 서석대 입석대를 날이 저물어 보지 못하여서 그냥 서울로 올라 가지 못하고, 그걸 보고 가고 싶어 여기까지 오게 된 사람입니다. 하루 저녁 유할 수 있는지요?"
50대 중반 스님은 먼저 공양은 하였는가를 묻더니 급히 침실로 안내 한다. 스님의 인정처럼 심야 전기온돌의 방은 유난히 따뜻하였다. 집에서 보온 도시락에 준비하여 간 점심겸 저녁겸 먹는 밥에다가 스님이 차려 주는 절 반찬으로 편안한 요기를 할 수 있었다.
초면에 친절을 받다 보니 미안한 마음에 수다를 떨었는지 스님이 한 마디를 한다.
"기(氣)는 쏟지 마시고 보관하셔야지요."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묻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 한 마디에 더 이상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밤 7시도 안되었는데 이 암자의 밤은 절간 같이 조용한 절간이기만 하였다.
'이 많은 시간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한다?' 잠을 청하다가 일어나 보니 아직도 밤 10시 경이었다. 내일 눈이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걱정스러워서 몇 번이나 밖을 나가 보곤 했다. 저 아래 화순 지역의 반짝이는 인가의 전등불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과 같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규봉암은 관세음보살을 관음전(觀音殿)에 모신 관음 도량이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규봉암의 절경이 보고 싶어 밤새도록 기다리던 아침은 왔지만 주위는 깊은 안개에 휩싸여서, 규봉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아가고 싶어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마음을 섭섭하게도 접어야만 하였다. 광주의 진산인 무등은 또 서석이라 한다. 그 산세가 웅장하게 엎드려 아무 산이나 본뜰 수가 없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으니 규봉암이라 한다. 곁에 기이한 바위들이 널려 서 있기 째문이다. 위를 쳐다보는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는 바위, 누운 바위, 일어선 바위, 총총하게 솟은 바위, 홀로선 바위 등의 높이가 가히 수백 척에 사면이 구슬을 깎아 놓은 듯하니 서석 규봉의 이름은 거시서 취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권 40조 규봉(圭峯)에서 '圭(규)' 는 '홀(笏)'이란 뜻이다.
규봉암의 두 문 같은 바위 모습이 벼슬아치들이 임금님을 알현할 때 조복(朝服)을 입고 오른 쪽에 들던 홀(笏)과 같다하여 이 절을 규봉암(圭峯庵)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기둥과 그 위에 걸린 돌로 인하여 삼존석(三尊石)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이 암자 정문으로 난 돌층계를 밟고 오르다 보면 '無等山圭峰庵'이란 현판의 2층 범종각이 있어 그 아래로 암자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까 범종각(梵鐘角)이 이 암자의 일주문인 셈이다.
그 범종각 왼쪽에 우람한 돌기둥 둘이 문처럼 서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상단에 커다란 돌 하나가 걸려 있다. 그것이 내가 어제 들어온 문바위 석문이다.규봉암에서는 가장 유명한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의병장군과 애마(愛馬)에 얽힌 전설이 전하여 오는 ‘문바위’였다 . -임진왜란 시 의병대장 김덕령 장군이 무술 연마할 때의 일이었다.지금의 규봉암에 있는 ‘문바위’라는 높은 돌기둥 앞에서 자기의 애마 백마에게 말하였다.‘내가 큰일을 하려면 너부터 잘 달려야 할 것인즉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화살이 건너편 5리 밖에 있는 마실리에 이르기 전에 네가 먼저 거기에 당도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네 목을 치겠노라.‘백마도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백마도 김 장군을 태운 채 쏜살같이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한 김장군은 화살이 보이지 않자 화살이 말보다 먼저 날아와 어딘가에 박혀있는 줄 알고 칼을 뽑아 애마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순간 허공에서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무등산도립공원 홈페이지
규봉암의 진면목을 보고 싶어 오전 8시 30분까지 날씨가 맑기를 기다려 보았으나 무등산 최고의 절경이라는 규봉은 짙은 안개가 그 모습을 감싸고 드러내지 않아서 하릴 없이 스님과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 일기 예보가 비나 눈이 몰려온다는데 서둘러 입석대, 서석대로 가 봐야겠습니다." 밤 늦게 불쑥 나타나서 아침 공양까지 얻어먹은 이 무뢰한이 스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암자를 나서는데 반갑지 않은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스님은 우장없이 떠나는 나에게 걱정스런 마음으로 공양하던 과일 몇 개를 건넨다. 불자가 아닌 나의 마음에도 진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마음속으로 염하고 있었다. 입석대 서석대를 비를 맞고 가다 보니 문득 깨닫는 바가 있다.
'그렇구나. 어제 내가 헤매다 만난 절리가 ‘광석대(廣石臺’)였구나.
내가 어둠 속에 찾아 들어온 문이 ‘문바위’였구, 오늘 아침 세수를 한 차디찬 물이 의상조사를 감동시켜 규봉암을 짓게 한, 가물 때도 마르지 않는다는 ‘석간수’였어. 내가 잠들었던 여기가 바로 보조(普照), 진각(眞覺), 양진(養眞) 대사들이 거닐며 득도한 곳이었던 거야'. 이것이 이름을 감추고 ‘똥그랑 땡 스님’이라 말하던 스님이 가르쳐주신 이심전심(以心傳心)이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규봉을 가보지 않고는 무등산을 말하지 말라’ 라는 그 규봉을 나는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만난 것이다. *. 백마능선(白馬稜線) 이야기 무등산에서 내려다보면 장불재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가는 능선이 있다.
장불재는 꼬리요 저 끝 낙타봉이나 안양산(853m)은 짐승의 머리 같다. 백마능선이었다.
가을이면 바람 따라 능선의 하얀 억새가 파도치면 "장불재(900m)~낙타봉(920m)"까지 7km의 억새 길이 마치 백마의 갈기처럼 보인다하여 '백마능선'이라 부르는 호남정맥의 길이다. 뒤돌아보면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하던 설산 무등산이 시선을 준다. 그 무등산 중간에 호피를 펴놓은 듯한 모습이 옛날 내가 밤 깊어 규봉암을 찾아가던 지공너덜겅이고 그 우측에 있는 절리가 무등산 3대 절경의 하나라는 규봉(圭峰)이다. 백마능선에 서서 나의 발자국이 찍힌 무등산을 멀리 바라본다. 망팔(望八)를 훨씬 넘긴 나이이고 보니 요즈음은 산을 오르는 길이 버겁다. 젊어서는 정상이 그렇게 반갑더니, 왜 이렇게 멀어만 보이는지. 그 자리에 주저않아 바라 보다가도 그래도 가고 싶어진다.
오늘도 ‘오늘 안 오르면 다시는 못오르지!’ 하는 마음에 기를 쓰고 오르는 것이 오늘은 무등산이 되었다.
山은 無等山은三才峰, 三石臺로 육산 五臺山에다 골산 月出山을 머리에 인 하나의 거룩한 神殿. 無等山은 우러러 보던 天國이다. 光州와 和順은
굽어보는武陵挑源이다.부처가 無等이듯 절도 山도 無等이어야 하듯 湖南 사람도Korean도 다 無有等等하라고 無等山은 說法한다.
-무등산
선운산, 336m)산행 (2007. 1. 11 주차장-호텔- 민가- 안부-벌봉- 선운산-견치봉입구-용문굴-낙조대-천마봉-도솔암-마애불-진흥굴-일주문/ 일산신도시산악회 따라) *. 새해 첫 산행 선운산(禪雲山)
나는 고창(高敞)에 세 번째 온다. 문학회 따라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고택과, 한국의 대표시인 미당시문학관을 주로 둘러 본 것이 처음이고, 대학 동창생들 따라 2년 전 가을 선운산에 온 것이 두 번째다. 그 해 단풍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게다가 비까지 촉촉이 적시어서 단풍을 짙게 물들이는 바람에 전국에서 몰려온 카메라맨들이 선운사 계곡을 따라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둘러본 선운산 도솔암 주변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오늘을 별러 드디어 선운산에 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선운산 주차장에서 우측에 호텔을 끼고 경운산(443.3m) 쪽으로 해서, 이 산의 최고봉 선운산(도솔봉)을 향하고 있다. 낙조대를 들려서 도솔암, 선운사를 향할 것이다. 안개가 낀다는 예보처럼 겨울 날씨 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 속에 부드러운 산길이었다. 선운산은 남녘의 야산이라서 인가. 흰 눈 하나 찾아보기 힘든 이 선운산은 손이 하나도 시리지 않은 것을 보니 차 속에서 두터운 오리털 등산복을 배낭에 넣고 온 것이 잘한 것 같다. 앞서 가던 일행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 겨울산 산행은 겨울에 상하(常夏)의 나라로 떠나는 해외여행과 같다. 겨울이라고 해서 잔뜩 끼어 입고 온 옷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하나하나 벗었다가, 하산 길에 하나하나 되 입는 것이 그러하다. 1시간쯤 오르니 능선이 나타나며 북쪽으로 바위 지대 넘어 경수산(444.3m)이 보이기 사작한다. *. 개이빨산(犬齒山, 345.1m) 앞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전주 노인회에서 온 한 무리가 지나가는데 남자보다 노파가 더 많았다. 조선 시대는 남성공화국이요, 대한민국은 여성공화국이라더니 산에서 와서도 그렇구나. 선운산은 그 높이가 335m밖에 되지 않는 육산어서 노인들이 주로 찾는 산이라서 인가 젊은이들을 만나보기가 드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아까보다 더 부드러운 능선으로 서쪽은 바다가 보이는 심원면이요, 동쪽으로는 우리가 올라온 아산면이다. 이를 양쪽으로 굽어보며 길은 내리막길이더니 경수봉에서 1.7km 온 지점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마이재'였다. 거기서 무덤 옆을 지나 오름길이 시작되더니 싱겁게도 여기가 이 산의 정상이라는 '수리봉'(일명 도솔산)이다. 고창에는 산악인도 없는가. 정상석 대신에 세워놓은 입간판은 초라하기 그지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안개는 아직도 완전히 걷히지 않아서 서해는 안개 속에 잠들어 있었다. 어떤 산행 서적에서는 경수산(444m)이 정상으로 나오는 것이 있던데 그래서 그런가. 견치산(犬齒山, 345.1m)이나 가서 이 서운함이나 풀어볼까 해서 속력을 내다보니 서쪽 멀리 바위산이 ‘내가 견치산이라고’ 멋진 자세로 모습을 뽐내고 있다. 개 '견(犬)', 이빨 '치(齒)' , 우리말로 '개이빨산'이 저것이로구나. 그런데 등산지도 책과 달리 이정표에는 '견치산 입구 왕복 1.2km'라 쓰였다. 견치산은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다른 능선 상에 있는 산이라서 할 수 없이 사진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가평군과 이동면 경계에 '개이빨산'과 '민드기봉'의 능선이 개 이빨같이 뾰죽뾰죽 솟아 있어 '개이빨산', 또는 '견치산(犬齒山)'이라 하더니 저 산도 각도를 달리 보면 개 이빨 같이 생긴 모양이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니 우리 일행이 막 식사를 시작하고 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니 내 키의 두 배도 더 넘는 환상적인 산죽이 활짝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름도 멋진 '소리재'는 참당암(懺堂庵)으로 가는 갈림길이기도 했다. 여기서 참당암까지는 1km로 고려 말에 지었다는 정사각형의 맞배지붕의 대웅전(보물 제805호)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대웅전에 모셨다는 매부리코의 불상도 보고 싶지만 참당암을 갈 수만 있다면 꼭 보고 싶은 것이 아래에서 말하려는 선운사 창사(創寺) 설화에 얽힌 인도로부터 석주(石舟)에 실려 왔다는 '옥석의왕불좌상(玉石醫王佛坐像)'이다. *. 선운산의 비경 ‘호남의 내금강'으로 겨울에는 설경이 기암괴석과 어울려 경관을 자랑하는 산이 선운산 또는 도솔산이라고 고창인들이 자랑하더니 이제 와서 보니 명실상부(名實相符)하였다. 이 산이 TV드라마 '商道', 문인시대, 대장금, 서동요, 신돈, 주몽'이나 영화 '남부군'의 촬영 장소이어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 '이 산의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TV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되었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난다. 미국의 '그랜드케년', 중국의 황산, 장가계, 백두산 천지를 굽어 볼 때 감흥이 되살아난다. 적지 않게 세상을 둘러본 내 눈을 놀라게 하는 우리 Korea의 이러한 장엄한 경치를 볼 때마다 한국에 태어나서 젊어서부터 70고개를 넘어선 지금까지 한국산하를 둘러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다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나이로구나 생각게 한다. 전망대 같은 바위에 앉아 수없이 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데 그 바위 사이에 암자 하나가 이런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내원궁(內院宮)이라고 하는 상도솔암이었다. *. '용문굴(龍門窟)'의 전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듯이, 아름다움도 아름다움끼리 모여 사는 모양이다. 낙조대 가는 능선에서 벗어나 좌측으로 통나무 계단으로 내려가니 멋진 자연 동굴 '용문굴(龍門窟, 裂石窟 또는 左邊窟)'이 있다. - 선운사를 지었다는 금단선사(黔丹禪師)가 절을 지을 때였다. 절터에 못 용택(龍澤)이 있어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선사가 이무기를 몰아내니, 다급해진 이무기가 이 바위를 뚫고 서해로 도망쳤다. 그때 생긴 굴이 용문굴이라고 한다. 그 용문굴 안쪽에 돌이 싸여있는데 그것이 TV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장금의 어머니의 무덤이라 한다. 용문굴에는 두어 개의 작은 바위굴들이 더 있고 주위에 둥근 통나무 쉼터가 있다. 선운산이 자랑하는 낙조대(落照臺)는 조금 전에 보던 겹겹이 쌓인 서쪽 하늘 끝에 큰 짐승 하나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양의 바위였다. TV드라마 '대장금'에서 악역을 맡은 최상궁이 자살했다는 바위가 바로 낙조대였다. 오르는 길에서 본 낙조대는 큰 짐승의 웅크린 자세더니 그 옆 천마봉에서 본 낙조대는 여러 개의 불꽃이 불붙는 형상이다. 낙조대에서는 칠산바다, 변산반도, 곰소만 지역의 석양이 일품이라지만 지금은 3시경으로 우리는 서둘러 하산해야 한다. 복분자(覆盆子)에 풍천장어가 예약되었기 때문이다. 낙조대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서 보니 건너 '배맨바위산'이 운치 있게도 길고 가파른 하얀 쇠층계를 놓고 오라고 유혹하고 있지만 이것도 생략해야 한다. 그런데 산 이름을 하필이면 '배맨바위산'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조계사 도립공원에서 언급하였으니 이를 참조할 일이다. *. 도솔암 이 산에서 가장 유명한 천마봉(天馬峰)에서는 마주 건너다보이는 도솔암이 멋지고 아름답게 보인다. 옛날 선운사에는 동서남북, 상하에 6개의 도솔암이 있었는데 지금은 2개 도솔암과 내원궁만 남았다. 우측의 요사체 당우와 나한전이 ’하 도솔암‘이요, 거기서 '도솔산내원궁'이라고 쓰인 문으로 365개의 돌층계를 올라가 좁디좁은 너럭바위에 세워진 당우가 ’상
도솔암‘이라는 내원궁(內院宮)이다. 내원궁에서 앞을 막아서 있는 천마봉과 낙조대의 바위가 제일 볼거리지만 내원궁에 봉안된 조선 초기 5대 걸작불 중에 하나라는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도 지나치면 안 된다. 두건 쓴 머리, 턱 밑까지 내린 귓밥과 귓바퀴(耳輪), 오른쪽 어깨에 걸친 부드러운 옷 무늬가 그렇다. *. 선운사동불암마애석불(禪雲寺東佛庵磨崖石佛) '선운사에 갔다가 마애불을 보지 않고는 선운사에 갔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마애불(磨崖佛)이란 벼랑의 벽이나 동굴 벽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목조나 인조 건물은 유한하여서 훼손 되어도 반영구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마애불이기 때문에, 선운산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마애불(磨崖佛)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앙코르와트의 부조물 등이 마애석상을 빼고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운사 마애불은 전체 높이 13m, 너비 3m로 전북유형문화재 제30호로 백제 위덕왕이 검단 선사에게 부탁하여 조각한 미륵불로 결가부좌한 자세로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이마에 백호가 유난히 툭 튀어나와 있고, 치켜 올라간 눈초리에다가 뾰족 내민 입술의 네모진 얼굴에 목이 몸에 딱 붙어 있는데 귀는 늘어져 어깨에 닿을 정도의 모습이다. 이를 자세히 보면 한 마디로 별로 잘 생긴 얼굴이라기보다 그 반대로 익살스런 개그맨의 표정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난다. 솔직히 말해서 북한산 승가사와 월출산마애여래좌상 등의 불상과는 격이 다르다. 전설에 의하면 위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다는데 그게 없어지고 숭숭 뚫린 구멍만 남아있다. 그 동불암(東佛庵)은 조선 말엽 폭풍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그 마애불상 가슴 속에는 검단선사의 비결록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가져간 후 땜질한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 도솔산 선운사 선운산 일주문에는 '禪雲山禪雲寺'가 아닌 '도率山禪雲寺'라 쓰여 있다. 옛날에 '도솔산'이라 하던 산이 '선운사'를 지은 후에 자연스럽게 '선운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禪雲'이나 '도솔'이란 무슨 뜻일까? '禪雲'(선운)이란 '參禪臥雲'(참선와운)에서 따온 말로 '구름 속에 누워서 참선을 한다.'는 뜻이다. '도솔'이란 천상계(天上界)를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태어나기 전에 수행하던 곳이요, 미륵불이 설법하며 성불을 기다리는 33천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선운산'이나 '도솔암'은 한 마디로 불도를 닦는 장소란 뜻이 된다. 그래선가. 몇 년 전 선운사를 둘러보았을 때는 참선과 관계되는 불경의 말씀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온갖 진실한 것을 보려하거든/ 법의 가르침을 즐겨 들으며/ 인색하고 옹졸한 마음을 버려라./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믿음이다. 믿음은 능히 생사의 강을 건너고/ 그 복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며/ 그것은 어떠한 도적도 막는다. -법집요송경 그 선운사 창사(創寺) 설화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위덕왕 때였다. 죽도포(竹島浦)에 돌배(石舟)가 떠와서 사람들이 달려가면 배가 바다 쪽으로 떠나 멀러지곤 했다. 소문을 들은 금단선사(黔丹禪師)가 달려오니 배가 스스로 다가 왔다.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옥돌부처’(현재 참당암에 모심), 금옷입은 사람이 있었다. 그 금의인(金衣人)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는 서찰이 있었다. 그래서 본래 연못이 있던 자리를 메우고 절을 짓는데 불심이 가득한 진흥왕이 재물과 장정 100인를 보내서 뒷산에 무성한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기금에 보태어 역사를 돕게 하였다. 이 절의 당우의 기둥은 해수에 담가 두었다가 사용한 것이라 한다. -신라 위덕왕 24년에 금단선사(黔丹禪師)에 의하여 이 절이 창건할 때 검단리(檢旦里) 해안가에 도둑의 무리가 살고 있었다. 선사는 도둑의 무리를 모아놓고 천일염 제조법 가르쳐 생업을 삼게 하였다. 그래서 대사에 대한 보은염(報恩鹽) 공양의 관습이 8.15 무렵까지만 해도 선운사에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는 선운산은 일명 도솔산이라 하며 선운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31본산이자 제24교구의 본사의 하나다. 창건 당시에는 89 암자에 189채의 크고 작은 당우에 3,000여 승려가 수도 하던 대가람이었다. 이 절이 자랑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66평의 조선중기 대표작 ‘대웅보전(보물 제290호)’과 일인이 훔쳐간 것을 되찾아온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 등 보물과 자방문화재가 이 절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 백제의 노래 '선운산가' 백제의 노래로는 '정읍사, 선운산가, 지리산가, 방등산가, 무등산가' 가 있지만 그 내용이 현재까지 전하는 노래로는 ‘정읍사(井邑詞)’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는 그런 노래가 있었다는 기록만이 전할 뿐이다. 당시는 우리의 한글이 제작되기 전이어서 '정읍사'마저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에 글자로 정착된 노래였다. 그 선운산가에 대한 기록도 고려사나, 중보문헌비고에 한문으로 그 유래가 전할 뿐이다. - 長沙人 征役 過期不至 登禪雲山 望而歌之: 장사인이 서울로 정역을 갔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 (남편 오는 곳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다 *. 선운산 동백 숲(천연기념물 184호) 선운산 골짜기로 선운산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선운산 동구/ 서정주 동백나무는 치나무과에 속하는 바닷가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다. 그 꽃이 피는 시기로 나누어 춘백(春柏) 추백(秋柏) 동백(冬柏)으로 부르는데 선운사 동백은 북방한계선에 위치하여 피는 꽃으로 그래서 선운사 춘백(春柏)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늦게 만발하는 붉디붉은 색으로 피었다가 시들기 전에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이다. 이 동백나무숲은 선운사 입구 비탈에서 시작하여 선운사 뒤까지 약 30m 너비로 5,000여 평에 수령 500여 년의 6m 크기의 동백나무 3,000여 구루가 군락을 이루어 3월 말부터 4월 중순경에는 그 절정을 이룬다. 동백은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 등잔기름으로 쓰이는데, 선운사 절에서 등불을 키기 위한 동백기름을 얻기 위하여 심었다한다. *. 선운사의 자랑 '상사화'와 송악 선운사가 자랑하는 식물에는 이 외에도 '꽃무릇'과 '송악'이 유명하다. -옛날 선운사에 잘 생긴 젊은 스님 한 분이 있었다. 불공드리러 온 젊은 처녀가 그 스님을 보고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스님을 짝사랑하던 처녀는 애틋한 사랑을 완곡히 표현하였으나 스님은 처녀의 마음을 몰라주었다. 처녀는 끝내 상사병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녀가 묻힌 무덤에 처음 보는 붉은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이 '상사화(相思花)'인데 순우리말로는 '꽃무릇'이라 한다. 9월 중순이경 온 산에 군락을 이루어 붉은 꽃이 피며, 꽃이 진 후 진녹색의 잎이 나와서 다음해 5월이면 사라진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이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만 한다는 애틋한 연모의 정을 닮고 있어 일명 상사화(相思花)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한 겨울이라서 선운사관리사무소~선운사 입구, 선운사~도솔암까지 탐방로 숲 바닥에 초록색 잎이 가득 덮여 있다. 9월이면 누구를 위해서 상사화는 다시 피어나는 것일까? 선운사 일주문 근처 좌측 선운산계곡 건너 편 절벽을 타고 얼핏 보면 소나무 같은 송악이 있다. 송악은 두릅나뭇과에 딸린 늘 푸른 덩굴나무인데 선운사 입구 송악은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80cm요, 높이도 15m나 되는 거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송악으로 천연기념물 제 367호이다. 꽃은 가을 10월~ 11월에 풀빛꽃이 산형꽃 차례로 피고, 앵두 같은 열매가 둥글게 모여서 달리는 나무로 줄기와 잎은 약재로 나무는 관상용으로 심는 나무로 선운산의 명물이다. *. 진흥굴(眞興窟)과 장사송(長沙松)의 전설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도중 진흥굴이 있고 그 바로 앞 위쪽에 장사송이 있다. 신라 24대왕 진흥왕이란 누구신가. 지증왕의 손자요,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었다. 7세에 즉위하여 국토를 넓히고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워 놓은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다. 그뿐인가. 진흥왕은 화랑제도를 창시하여 삼국통일의 원동력과 기초를 닦아놓은 왕이기도 하였다. 진흥왕은 숭불왕(崇佛王)으로도 유명하여 경주에 흥륜사, 황룡사를 창건하였는가 하면 황룡사의 장육상을 주조한 왕이다.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왕위를 스스로 물려주고 선운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법호를 법운(法雲)라 하였다. 그 진흥왕이 거하였다는 곳이 진흥굴이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좌변 굴에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속에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지 않는가. 이에 감동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하고, 다시 이를 크게 일으켰으니 이것이 이 절이 시초라고 하였다. -도솔산선운사創修勝蹟記 그때 도솔암은 도솔왕비를 위하여, 중애암은 도솔공주를 위해 진흥왕이 건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당시는 삼국통일 이전의 백제 땅이었던 곳이어서 진흥왕 이야기는 황당한 것 같아서 후 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진흥굴’은 신라 24대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의운국사를 시켜 당시 백제 땅이었던 이 산을 살펴보게 하고 왕위에서 물러난 후 찾아와 수도했다는 곳이다. 진흥굴 옆에 있는 장사송(長沙松)은 옛날에 이 고장의 이름이 장사현(長沙縣)라서 장사송(長沙松)이라고 하지만,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다하여 진흥송(眞興松)이라고도 한다. 높이 23m 높이의 이 장사송은 가슴 높의 둘레가 3.07m인 데다가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지다가 그 위에서 다시 여덟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뻗어 우리나라 팔도(八道)를 상징하고 있다는 노송이다. 이를 선운산가와 연관시켜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숨진 부인의 넋이 낙락장송(落落長松)으로 환생했다는 전설도 갖고 있는 소나무다 . *. 선운사의 삼미(三味) 등산의 매력 중에 하나는 뒤풀이와 먹거리다. 그것이 먼 고장일 때나 바다와 인접해 있는 산행을 할 때 어찌 이를 생략할 수 있겠는가. 국내여행은 잘 보고 잘 먹은 것인데-. 우리의 고창(高敞)에는 ‘자연산 삼미(三味)’가 있으니 풍천장어, 복분자술, 작설차 그것이다. 우리 산악회는 선운산 등산을 왔지만, 그렇게 양기가 좋다는 풍천장어에 복분자를 탐하여 입맛을 다시며 달려왔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 하듯이, 알면 더 그 맛을 알 터이니 선운사의 삼미를 알아보는 것으로 이 산행기를 맺도록 하자. *. 선운사 풍천장어 뱀장어를 한자로는 鰻(만)이라 쓴다. 그리고 이를 호사가들은 다음과 같이 파자하여 풀이하는 이도 있다. 魚+日+四+又: 이 고기(魚)를 먹으면 매일(日) 거시기를 네 번(四)씩 또(又)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력에 좋은 고기가 뱀장어라는데 그중 풍천 장어가 최고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그 유명세의 정확한 이유는 무엇일까? 담수에서 성장하여 60cm 정도의 성어가 된 뱀장어는 8월~10월경에 깊은 심해 바다로 가서 산란하고 죽는다. 부화된 실뱀장어 새끼들은 어미처럼 민물과 바닷물이 석인 기수(汽水)인 인천강[풍산강]을 통하여 담수로 올라와서 성어가 될 때까지 7~8년을 살게 된다.
그 뱀장어 서식지로서 가장 맑은 계곡이 강원도의 내린천과 선운사 입구의 풍천강[인천강]이다. 풍천장어들은 먹이가 적은 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자란 장어보다 사냥력과 탐식성이 뛰어나고 이로 인하여 힘이 매우 좋다. 이렇게 커오던 장어가 산란이나 겨울 동면을 하려고 바다로 나가기 전 선운사 입구 쪽의 기수(汽水) 지역인 인천강[풍천강]에서 머물다 잡히기는 것이 자연산 풍천장어다. 뱀장어는 클수록 값이 곱절로 뛰어 보통의 300g보다 큰 2kg을 잡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장어는 예로부터 간장식품으로 고급식품이어서 김해군 녹산에서 1966년부터 양식하여 대만과 일본에 수출품 중에 하나이지만 풍산장어는 자연산 장어로 고기 색깔과 맛이 특이하다. -큰 놈은 길이가 10여자로 모양은 뱀과 같으나 짧고 거무스름하다. 물고기는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 같이 물에서 나오면 꼼짝 못하지만 뱀장어는 예외다. 장어 맛은 달콤하여 사람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 고기로 죽을 끓여 먹으면 이내 낫는다 - 玆山魚譜 *. 복분자(覆盆子) -옛날 선운사에 살던 노부부가 늦게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아들은 너무 병약하여 좋다는 약은 모두 다 먹여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선운사 스님이 노부부의 근심을 듣고 하는 말이 ' 이 산에 들어가서 어려서는 초록, 젊어서는 빨강, 늙어서는 검은 딸기를 따 먹이시오. 그러면 건강해 질 것입니다.' 하였다. 부부는 합심하여 검은 딸기를 찾아 먹여보았더니 놀랍게도 아이가 건강이 넘치더니 소변을 볼 때마다 요강[盆]이 뒤집어[覆] 지더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검은 딸기의 이름을 복분자(覆盆子)라 불리게 되었다. -성질은 평하며 맛은 달고 시며 독이 없다. 남자의 신기(腎氣)가 허하고 정(精)이 고갈되거나 여자가 임신 되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또한 간을 보호하며 눈을 밝게 하고 기운을 도와 몸을 가뿐하게 하며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게 한다. 과로나 몸이 허약해지면서 생기는 빈뇨증에 특히 효과가 있고, 피부를 곱게 한다. -동의보감
복분자 딸기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줄기는 30m 안팎에 가시가 있으며 끝이 휘어져 땅에 닿으면 뿌리가 내린다. 5월 초순에 개화하며 6월 중 하순에 열매가 파랗다가 붉게 익으나 완전히 익으면 검붉은 색을 띤다. *. 작설차(雀舌茶) 작설차는 잎 모양이 참새[雀]의 혓바닥[舌]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작설차(雀舌茶)라 이름한 차다. 봄철 곡우 철을 전후해서 잘게 돋아나는 어린 새싹을 손으로 직접 따서 말려 만든 차다. 은은한 향과 빛깔을 띠는 이 차를 마시면 간이 좋아지고 눈이 밝아지며 정신도 맑아진다는 차로 선운사 명물 중에서도 제1위로 꼽히는 식품이다. 선운사 일주문에서 선운사까지 보성 녹차 밭을 연상케 하는 파란 작설 이랑이 탐방로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도솔암 막 들어가기 전에 찻집이 나그네의 발을 멈추게 한다.
해남 두륜산(頭輪山, 700m) /대흥사(大興寺) 대흥사
*. 해남 가는 길
두류산도립공원을 가기 위해서 대흥사(大興寺) 행 버스를 타려면 전국 어디서나 해남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해남(海南)에서 12Km/ 20분여 분 거리에 있는 대흥사는 거기서 ‘해남~대흥사’행 군내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나는 대전종친회 모임에 가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홀로 구름 따라 물 따라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광주를 거쳐서 해남(海南)에 도착하니 오후 8시 경이다.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해남 행 직행 버스로 간다면 `5시간30분 거리였다. 열차 편을 이용하려면 광주(光州)나 나주행(羅州行) 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서울역 → 광주행 열차. 광주역 → 광주버스터미널(택시 기본요금) → 해남행 버스 -서울역 → 목포행 열차. 나주역 → 영산포버스터미널(택시 기본요금) → 해남행버스 해남은 전라남도 남서(南西)에 돌출하여 완도(莞島)를 남동쪽에, 진도(珍島)를 서쪽에 끼고 있는 반도다. 그 반도의 바다 연안은 리아스식 해안이라서 굴곡이 심하여 그 해안선 길이가 520km, 도서(島嶼) 수는 105여개로 다도해(多島海)를 형성하고 있다. 해남군은 전남 시(市)와 군(郡) 중에서 가장 넓은 곳이다. 그 넓이가 광주시의 4배로 전남의 7% 정도나 큰 군郡)이라서 어느 군보다 농토가 넓고 따라서 주민들의 생활이 부유한 편이란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의하면 해남 땅 끝에서 서울까지가 1,000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2,000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해남은 소도시라 일찍 가게 문을 닫는데다가, 늦은 시간에 먹을 수 있는 음식 값이 서울의 두 배 이상이다. 친구가 소개해준 ‘해남식당’을 찾아가자니 모든 식당이 해남식당인데다가 초행길이라서 택시를 타야하고, 그것도 2인분 이상이어야 주문이 가능한데다가 유명하다는 한식은 요금도 2만 원 이상인 모양이다. 그래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버스터미널 근처 찜질방에서 1박을 하였다. *. 대흥사(大興寺) 가는 길
다음날 아침6시 50분에 대흥사행 군내 버스(20분/약 1시간 간격) 첫차를 타고 대흥사를 향한다. 대흥사는 아도 화상(阿道和尙)이 544년에 창건하였다는(?) 절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의 사찰이요, 다성(茶聖) 초의대사가(草衣大師) 기거하던 차문화(茶文化)의 성지(聖地)다. 이곳에도 해남과 두류산 산행 지도를 구할 수 있는 두륜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고 이 고장 출신인 심호 이동주 (李東柱)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강강술래야'가 음각되어 있다. 대학 시절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로 풀이하는 것을 배운 생각난다. 그 원뜻이 强한 오랑캐[羌(] 물[水]을 건너[越] 노략질하러 왔다[來]는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려면 좌측 유스호텔 쪽 언덕길로 안내판 따라 올라야 한다. 케이블카는 9시부터 운행하는데 하나의 케이블카에 50명이 탈 수 있다. 전망대인 고계봉(高髻峰, 638m)까지는 8분간 오른다. 길이는 1,600m로 한국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다. 전망대에 오르면 국립공원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맑은 날이면 제주도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케이블카로 등산을 겸하려면 거기서 오심재(悟心재) 차도까지 내려가서 1시간여 거리의 노승봉(능허대, 685m)- 가련봉(703m)- 만일재에서- 구름다리로 유명한 두륜봉(630m)을 향할 것이다. 버스주차장이 '두륜산 대흥사 관광시설지역'으로 매표소와 상가가 즐비한 곳에 멋진 나무도로가 시작된다. 거기가 '추억의 거리'인 모양이다. 집단시설지구에서 사찰까지의 아침 길에는 사람 하나 없는 2Km의 고즈넉한 거리였다. 한반도 남쪽 끝이라선지 선혈처럼 붉은 단풍이 요란하다. 구비구비 우측의 커다란 내를 따라 가다 보면 구곡유수(九曲流水)로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물소리가 일품인데 대흥사까지 아홉 구비마다 9개의 멋진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 초입에 우람한 일주문이 나타나는데 이상하다. 일주문은 기둥 2개가 ‘一’(한 일자)라 一柱門(일주문)이라 하는 것인데 기둥이 4개다. 그래서 이 문을 산문(山門)이라고 한다.
게다가 현판이 ‘頭崙山大芚寺’ 로 우리가 알고 있는 ‘頭輪山大興寺‘가 아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그 현판 아래에 ’대흥사 옛 이름 대둔사‘란 친절한 설명 현판이 있다. -두륜(頭輪山)이란 뜻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두륜' 또는 '둥근 머리 산'이라는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 두륜산은 예로부터 큰 언덕(산)이란 뜻으로 ‘대듬’ 또는 ‘한듬’으로 불렀다. 그래서 대흥사를 옛날에는 ‘한듬절’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을 한자화 하여 대둔사(大芚寺’)라 한 것이다. '대둔산지(大芚山誌)'에 의하면 ‘頭崙山’(두류산)이란 명칭은 白頭山(백두산)의 ‘頭’(두)와 중국 전설 속의 산인 崑崙山(곤륜산)의 ‘崙’(륜)에서 따 온 이름이다. 그 산 이름 ‘崙’(윤) 자 대신 이 산의 모습이 수레바퀴 같다하여 우리가 더 많이 쓰는 輪( 수레 윤) 자로 바뀐 모양이다. 그 ‘대둔사’가 ‘대흥사’로 바뀐 것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13 대종사와 13 대강사가 이 절에서 배출되어 불법을 크게(大) 일으켜(興) 세웠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대흥사 일원을 오르내리다 보면 곳에 따라 대흥사(大興寺)와 두륜사(頭崙寺) 등으로 나오는데 한자마저 ‘頭崙寺/ 頭輪寺’로 서로 다르니 해남에는 이를 염려하고 시정하려는 식자(識者)가 없는가. 이를 하나로 통일함은 간과할 일도 망설일 일도 아닌 시급한 일인데-. 대흥사 뒤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을 끼고 오르는 길에는 매표소서부터 대흥사 주차장까지 1.23km의 숲속 산책로도도 있다. 이곳이 도립공원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절 바로 몇 m 앞에 식당이 있는가 하면 민박집이 있다. 개울가 민박집, 유선관이 그것이다. 알고 보니 그중 ‘유선관(遊仙館)’은 1914년에 지어 대흥사를 찾는 손님들이나 판소리의 가객들이 묵던 12칸짜리 전통한옥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취화선’, ‘서편재’ 등의 촬영장소요, 5.18 의거자들이 모이던 중요한 곳으로 한국최초의 여관이기도 했다. *. 대흥사(大興寺) 이야기 대흥사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우측으로 왕벚나무 자생지 가 있다. 거기 천연기념물 173호 왕벚나무가 2구루가 있는 모양이다. 이 왕벚나무가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국화(國花) 사꾸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피안교(彼岸橋)’를 건너다보니 나도 이제는 이승을 벗어나는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비로소 일주문(一柱門) 나타난다. 이어서 길가에 커다란 부도밭(浮屠殿)인데 여기에는 50여기의 부도와 14개의 비석이 두어 줄로 도열하여 있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넣는 탑으로 이곳에는 서산대사와 그의 문도, 법손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모셨다. 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海脫門(해탈문)이 있고 사천왕들이 있을 양쪽에 자리에 나무 동자상이 있다. 대흥사도 순천의 선암사와 같이 사천왕이 없어도 절을 지켜줄 지형인가 보다. 대흥사의 당우(堂宇)의 배열은 금당천(金塘川)을 중심으로 크게 둘로 나뉜다. 대웅전 일원의 북원(北元)과 천불전,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남원(南院) 이다. 그 나뉨 길 광장에 서산대사의 ‘삼몽시(三夢詩)’가 눈길을 끈다. 主人夢說客(주인몽설객) 주인이 나그네에게 꿈 이야기 하네 客夢說主人(객몽설주인) 나그네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 하네 今說二夢客(금설이몽객) 지금 꿈 이야기 하는 두 사람 다 亦是夢中人(역시몽중인) 역시 꿈속의 사람이네 -서산대사 . 이 글을 보고 있는 이 사람 ilman도 꿈속 사람이네. 대웅보전 가는 길에 오랜만에 사랑의 나무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만났다.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 합니다. 뿌리가 서로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릅니다. 연리(連理)란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부모의 사랑, 화목한 부부,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라고 합니다.
대흥사 연리목은 천년 된 느티나무로 왼쪽 나무는 음(陰)의 형태, 오른쪽은 양(陽)의 형태로 남녀가 천년 동안 사랑을 하고 있는 모양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연리나무를 희귀하고 경사스런 길조(吉兆)로 여겼습니다.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진실한 마음을 기원하고 108개의 등에 불을 밝혀 소중한 인연과 아름다운 사랑을 기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는 바람에 꺼지지 않게 옹기로 만든 많은 촛대가 있었다. *. 대흥사의 현판(懸板) 이야기
대흥사 대웅전에 가려면 금당천의 멋진 무지개다리 일심교(一心橋)를 건너 누하진입문인(樓下進入門)인 침계루(沈溪樓)를 지나야 한다.
'沈溪樓'(침계루) 편액은 서예가 원교 이광사(李匡師)가 쓴 글씨이다.그 '沈溪樓'(침계루) 편액처럼 대흥사의 각 전각들의 현판 글씨는 크고 장엄한 것이 범상ㅎ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해남은 역대로 제주도로 귀양 가는 대선비가 귀양 와 머물거나 거쳐 가던 곳이어서 그분들의 필적이 많이 남아서 그런 것 같다. 다음은 제주로 귀양 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조선 후기 서화가 이광사(李匡師)에 얽힌 일화다. - 1840년(헌종6)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이곳 대흥사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다. 거기서 이광사가 썼다는 '大雄寶殿' 현판을 보고 조선의 필체를 망가뜨리는 글씨라며 직접 자신이 대웅보전의 현판을 써주고 갔다.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가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걸리지 않고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전날 자신의 부끄러운 아집(我執)에 사과를 하며 다시 내다 걸게 하였다. 이를 사과한다는 뜻으로 써 주고 간 것이 백설당의 ‘無量壽閣(무량수각)’ 이란 현판이다. 원교 이광사(李匡師)는 영조 때 소론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진도에 귀양 와서 거기서 생을 마친 명필이다. 대흥사에는 그 이광사가 쓴 현판이 그 외에도 해탈문, 침계루, 천불전 등이 더 있다. 천불전에 들어가려면 U자 모양의 문지방이 있는' 鴐虛樓'(가허루)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편액은 명필 이삼만(李三晩, 호 蒼巖)의 글씨다. -그는 어린 시절 대흥사 ‘대웅보전’을 쓴 이광사(李匡師)에게 글씨를 배웠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글씨에만 몰두하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다. 병중에도 하루 1,000자씩 글씨를 쓰는 서예가로, 평생에 벼루 3개를 먹을 가느라고 구멍을 냈다는 명필이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
그래 그런가. '鴐虛樓'(가허루)란 편액 글씨는 보면 기러기처럼 날아갈 듯 한 필체가 힘찬 것이 기세가 등등하다. 대흥사 대웅전 계단 오르는 양 쪽에 두 눈을 부릅뜬 한 쌍의 사자 머리조각의 석상이 있고 그 양 옆에 괘불을 거는 나지막한 당간지주가 있다. 대흥사 대웅전 축댓돌에는 이상하게 음각한 글씨가 있어 자세히 보니 ‘대웅보전기단 축석중수기’로 시주자 명단이었다. 대흥사 와서의 유감은 너무 시주를 강요하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중요한 전각 앞마다 다른 절에서는 보지 못한 촛불 밝히는 수십 개의 옹기로 만든 조형물 설치도 그렇지만 각종 현수막이나 기와 시주, 윤장대는 물론 심지어 연리목까지 돈타령인 것 같아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개화불사의 의미: 기와 한 장을 시주한 공덕은 집 없는 업보를 면하게 하고 무진겁래로 지은 업장을 소멸하여 세세생생토록 불자님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공명이 충만하여 모든 소원이 성취됩니다. -기와 시주 접수처 이런 똑 같은 글이 한 곳에 2개씩이나 걸려 있는 것도 그랬다. *.천불전(千佛殿) 이야기 -천불전으로 들어서는 가허루(鴐虛樓) 문지방은 U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다. 이는 천불전 앞산의 ‘오도재(悟道재) 능선‘과 천불전 뒷산의 ‘오심재(悟心재) 능선’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허공 가운데 다리를 의미한다. 이 다리는 인간세상인 차안(此岸)에서 부처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이른다는 뜻이다. 20여 년 전에 왔을 때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낡은 옛 문지방을 새로 바꿔놓은 것이다. 천불(千佛)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서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들로 극락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천불전에는 맨 앞의 석가모니를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서있다. 그 뒤로는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대흥사의 10여명 스님들이 6년 동안 완성하였다는 1,000불을 모셨는데 그 형태가 각각 다르다. 그 천불을 이곳에 모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영험한 전설이 전하여 온다.
- 고려 순조 무렵 경주에서 조성한 1,000 개의 불(佛)을 2척의 배에 싣고 오다가 울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768여구의 옥돌을 실은 배 1척이 일본 천불 대도포에 정박하게 되었다. 일인들은 기쁜 마음에 좋아라 절을 지어 봉안하려 하였더니, 일본 현감의 꿈에 조선사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불상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는 것이었다. 이를 확인해 본 일인들은 옥불을 그냥 돌려보내기가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자를 새겨 둔 후 보냈다. -일본표해록 *. 표충사(表忠嗣) 표충사(表忠嗣)는 서산대사의 위국충절의 애국심을 기리고 선풍(禪風)을 뿌리내리게 한 대사를 추모하고 재를 올리기 위해서 1669년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서산대사가 열반 시에 남긴 유언에 따라 선조가 내린 교지(敎旨)와 의발(衣鉢, 가사와 스님의 밥그릇) 등을 모신 곳(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서산대사 좌우에 사명(四溟), 처영(處英), 영정을 모신 곳이다.
그 表忠嗣(표충사)란 편액은 정조가 내린 친필이다.숭유척불(崇儒斥佛)의 조선 시대에 유교적인 충의를 강조한 사당이라 그런지 유생들의 횡포를 막을 수가 있어 인근의 송광사, 선암사와 어깨를 나란히 발전할 수가 있었다는 대흥사였다.
그러나 당시의 두륜산과 대흥사는 국토의 맨 끝인 귀퉁이에 치우쳐 있는 뛰어난 명산도 유명한 절도 아니었다. 그러던 것을 지금 같이 빛내 준 분이 오로지 서산대사였다. 서산대사 덕분에 대흥사는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 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이 대흥사 일원을 ‘문화재 자료 제 78호’로 지정되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 서산대사 이야기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호는 청허(淸虛)요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하게 된 것은 대사가 주로 주석한 묘향산(妙香山)에서 연유한 것이다. 예로부터 한국 4대 명산의 하나인 묘향산은 수이장(秀而壯)이라 하여 동쪽의 금강산(東金剛)에 비하여 묘향산을 서금강(西金剛)이라 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라 하게 된 것이다. -대사가 출생하기 전 어머니 김(金)씨가 어느 날 밤 한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주는 태몽을 꾼 이듬해 봄에 아들을 낳았다. 3세 되던 해 사월 초파일에 그의 아비가 연등불 아래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 스님을 뵈러 왔다.”하고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아이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사의 아명(兒名)은 '운학(雲鶴)'이라 하였다. 9세에 조실부모하고 출가하여서 30세에 당시로는 출세 길인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대사는 묘향산에 주로 기거하다가 임란 때는 선조의 명을 받아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평양 탈환 등에 혁혁한 공을 세워 8도16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의 직분을 받았다.
다음은 묘향산에서 입적(入寂)할 때의 이야기다. -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 오게 하였다.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저거시아 팔십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80년 후는 내가 너로구나! 하는 시를 자기의 영정 뒷면에 써서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처영(處英)에 주라 하고,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전 서산대사는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여 재(齋)를 받게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두륜산은 국토의 귀퉁이에 있어 명산은 아니다. 왕의 교화가 제대로 미치기 힘든 먼 곳이지만, 어리석고 아둔한 풍속을 깨우칠 수 있으며 처영(處英) 등 여러 제자들이 남방에 있으므로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은 바로 대흥사라고 하였다. 서산대사는 두륜산 대흥사 일대를 萬古不破之地 三災不入之地(만고불파지지 삼재불입지지)라 하였다. 삼재(三災)에는 전란. 질병. 기근의 소삼재(小三災)와 화재. 수재, 풍재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 그래 그런가, 두륜산 대흥사는 임란과 6.25의 전화를 입지 않았다는 명당 자리였다.
*. 동다실(東茶室) 이야기 '이제는 두륜산 등산을 시작해야지- '하고 나서다 보니 연못이 있다. 무염지(無染池)였다. 그 못 위에 지팡이를 부여잡은 스님 동상이 있다. '누굴까 ?'하고 가보니 대흥사 13대 종사 초의선사였다.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속명은 장의순, 호는 초의(草衣),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으로 무안 출신이다. 15살에 강변에서 놀다가 탁류에 휩쓸려 죽을 고비에 어느 승려가 구해 주어 그 인연으로 16세에 출가한 고승이다. 불교, 유교, 도교에 통달하여 당시의 대선비 정약용, 김정희 등과 교유가 깊었다. 스님은 선사상(禪思想)과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특히 한국 다도(茶道)의 정립자로 다성(茶星)이라 추앙을 받는다.
초의선사는 항상 제법불이(諸法不二)를 부르짖었다.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 했다.
그렇다면 '차(茶)와 등산도 둘이 아닌데' 어찌 그냥 갈 수 있을까 해서 그 앞 동다실(東茶室)에서 우전차를 낭만 속에 마셨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차 한 잔에 5,000원씩이나 주고 마신 것은 처음으로 오로지 초의선사(草衣禪師) 덕이었다.
2011.11.30 06:58
해남 두륜산(頭輪山)
지도에서 보면 대흥사를 두륜산의 봉우리들이 비잉- 둘러싸고 있다. 고계봉(638m)에서부터 서쪽으로 , 노승봉(老僧峰85m), 가련봉(迦蓮峰 703m), 두륜봉(頭輪峰 630m), 도솔봉(도率峰671.5m), 연화봉(蓮花峰 613m), 혈망봉(穴望峰 379m), 향로봉(香爐峰 9469m) 등 8봉이 이 대흥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모습을 어떤 사람은 남한지도(南韓地圖) 같다고 한다. 북으로 주둥이를 둔 주머니나 자루 같다고도 한다. 그 모양이 수레바퀴 모양이어서 두륜산(頭輪峰)의 가운데 자로 '崙' 대신 '輪'(륜)자를 쓴다고도 한다. 수도권에서 해남까지는 천리 길이지만 나의 마음의 거리는 그보다 더 멀었다. 두류산이 보고 싶어 남도에 올 때마다 수없이 벼르다 끝난 것이 무릇 얼마만이던가. 그 두류산 등반길에 드디어 오른 것이다. 두류산 코스를 크게 나누면 3 코스가 있다. 제1코스: 표충사- 삼거리- 북미륵암- 오심재- 노승봉- 가련봉(정상-만일대- 두륜봉-(구름다리)- 진불암- 표충사( 총 7.4km/5시간 소요) 제2코스: 표충사- 삼거리- 북미륵암- 천년수-(만일암터)-만일제- 두륜봉(구름다리)- 진불암- 물텅거리골- 표충사( 5.9km/ 3시간 30분 소요) -제3코스: 표충사- 삼거리- 일지암- 천년수(만일암 터)- 만일재- 두륜봉(구름다리)- 진불암- 표충사( 5.5km/ 3시간 소요) 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등산인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가고 싶은 코스가 노승봉, 가련봉을 들러 두륜봉을 가는 제1코스다. 그 길은 세 코스 중 가장 먼 길로 북암(北庵)에서는 국보306 호의 미륵불을 친견할 수도 있고, 두륜산의 주요 봉우리를 다른 코스보다 더 많이 원 없이 밟아 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코스로는 두륜산의 명물인 '천년수(千年樹)'를 볼 수가 없고, 제2코스와 같이 ‘한국다문화(茶文化)의 성지(聖地)’라고도 하는 초의선사의 '일지암(一枝庵)'을 생략해야 한다. 나는 그 일지암이 보고 싶어 제3코스를 택했다. *. 일지암(一枝庵) 이야기 표충사에서 완만한 차도를 따라 800m를 오르니 '일지암3거리' 이정표가 있다. '1.3km←천년수(만일아터)‘인데 일지암 쪽으로는 거리가 없는 것을 보니 일지암은 보고 다시 원점회귀(原點回歸)해야 할 모양이다. 이정표에서 300m를 올라 모퉁이를 돌아서니 거기가 초의선사가 40년간 은거하였다는 일지암이었다. 추사 김정희도, 다산 정약용도 초의선사를 찾아 왔다는 생각을 하며, 나 ilman도 왔구나 하는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두 분은 초의선사를 만나러, 나는 선사의 유향(遺香)을 만나러 온 것이다. 초의선사보다 다산(茶山)은 24세 위요, 추사(秋史)는 동갑이었다.일지암에는 멋진 대웅전과 초의선사가 기거하던 살림채로 연못에 석주를 박아 기둥을 올린 자우홍련사(紫芋紅蓮社) 그리고 그 옆에 일지암(一枝庵) 초가가 있다. 그 이름을 보니 그 못에 홍련(紅蓮)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지암과 자우홍련: 한국의 대표적인 차문화(茶文化) 유적인 일지암은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해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1786~1866)가 39세에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40년간 머물던 곳이다.
일지암(一枝庵)이란 “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 때문에 나무 끝 한 가지에 살아도 편안하다”(중국 唐의 寒山 詩僧)는 시에서 ‘一枝를 따온 이름이다. .이곳에서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하며 끊어져 가던 차문화를 일으키며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확립시켰다. 남긴 저서로는 ‘동다송(東茶訟)’, ‘다신전(茶神傳)’ 등 명저가 있다. 특히 남종화의 거장인 소치 허련을 가르쳐 추사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자우홍련사(紫竽紅蓮사, 紫竽山房)는 일층 가옥이 일지암 쪽으로 한층 아래의 연못에 네 개의 돌기둥 박고 기둥을 올린 누마루 건물이다.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가신 후 폐허가 되었던 것을, 차를 사랑하는 모임인 ‘한국다인연합회’에서 일지암을 복원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 앞면에 사립을 바짝 둘러놓아 쓸모없는 비로 만들었으니 세운 이들이 보면 얼마나 섭섭할까 걱정이 된다. 그 상류 연못은 돌확 길을 따라 아래 둥근 석축의 연못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그보다 작은 둥근 연못으로 이어진다. 그 뒤 샘에서 흐르는 물은 3개의 돌확으로 반쪽 대나무로 흘러 찻물로 쓰게 하였는데 그 위 자우홍련사 마루에는 차를 끓일 그릇이며 촛불이 준비되어 있고, 벽에 초우선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 천년수(千年樹) 전설 다시 아까의 3거리로 내려오니 거기서부터는 찻길을 버린 등산길이 시작되는 돌길이었다. '아래3거리'에 이르니 이정표에 천년수가 30m 거리 아래에 있다고 한다. 붉은 플라스틱 2개의 통에 파이프를 박은 생수로 목을 축이고 천년수를 향하는데 바로 위에 돌담이 있고 그 돌담 넘어 5층 석탑이 빈 공간에 우뚝 서 있다. 만월암 터였다. -두류산 가련봉 이래의 만월암지에 조성된 5.4m의 5층 석탑(전남문화재자료 데 246호)의 주변에 흩어진 석등의 잔해가 흩어져 있다. 조성한 연대는 고려 중반기인 13세기로 추정되는 탑이다. 주목이나 은행나무도 아닌 천년수 느티나무수가 얼마나 클까 하는 호기심으로 내려가 보니 만월암 터 바로 아래에 천년수가 있다. 노인의 얼굴이 나이 들어 보이듯이 회색빛의 이 천년수는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1,200년 ~ 1,500년 수령이라는 나무였다. ‘천년수: 수종 느티나무(괴목). 흉고 9.6m . 수고 22m’ 천년수에는 북암(北庵)과 남암(南庵)의 미륵불과 연관된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천상에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살고 있었다. 둘은 천상의 계율을 어겨 하늘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루 안에 이 산 바위에다가 불상을 조각하는 일밖에 없었다. 하루만에 불상을 조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둘은 해가 지지 못하게 만일암(挽日庵:‘당길 挽, 해 日) 앞 천년수(千年樹)에 끈으로 해를 매달아 놓고 천녀(天女)는 북쪽 바위인 북암(北庵) 미륵암에 좌상(坐像)의 불상을, 천동(天童)은 남쪽 바위인 남암(南庵)에 입상(立像)의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천녀는 좌상(坐像) 미륵불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입상(立像)의 미륵불을 조각하는 천둥보다 먼저 불상 조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천동이 조각하는 미륵불의 완성을 기다리다 지친 천녀는 빨리 승천하고 싶은 욕심에 끈을 잘라버리고 혼자 승천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천둥은 영원히 승천하지 못하고 미륵은 남암(南庵)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 만일재(挽日재) 전설 속의 천녀가 지었다는 4.2m의 북미륵암마애여래 좌상은 남성을 상징하는 양각(陽刻)의 불상으로, 그 조각이 섬세하고 우아하여 보물 48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제306호로 승격되었다. 이에 비하여 천동(天童)이 전설처럼 미완성이어서인지 여성을 상징하는 음각(陰刻)으로 조각되었지만 남미륵암 터에 초라한 전각만 남아있고 미륵은 노천에 방치되어 이끼 낀 체 분간할 수조차 없다 한다. 그보다 남암(南庵)은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북암에 가서 북미륵암마애여래 좌상과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도 보고 싶었지만 북미륵암은 거기까지 0.6km를 갔다 되돌아오든지, 아니면 거기서-0.6km- 오심재- 0.8km- 노승봉- 200m- 가련봉까지의 험난한 길을 각오해야 한다. 오늘 같이 홀로 인적 없는 초행길이라서 이를 생략하고 가련봉과 두륜봉 사이의 안부인 만일재를 향한다. 예서 200m 거리밖에 안 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편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두륜산 구름다리 두류산 모습을 멀리서 보면 두류봉은 부처님의 얼굴이요, 천년수는 부처님의 심장 같다고 한다. 가련봉(703m)은 부처님의 오른손이요, 노승봉(685m)은 왼손 그리고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고계봉(638m)은 부처님의 발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에 해당하는 것은 만일재일 것이다. 만일재에 오르니 비로소 다도해가 까마득하게 열린다. 만일재는 가련봉과 두륜봉 갈림길이었다. 어디로 간다? 만일재에서 500m라는 가련봉(703m)에 올라 노승봉을 향하면서 남동서로 확 뚫린 굽어보는 다도해가 될까? 아니면 두륜봉의 구름다리가 될까? 욕심 같아서야 두륜산의 정상이라는 가련봉을 올라갔다가 다시 두륜봉으로 갔으면 좋겠지만 만일재에서 보는 가련봉의 주봉은 너무나 까마득하다. 올라갈 길도 없는 수직의 직벽의 바위산이다. 그래도 올라갔다가는 다시 내려와 두륜봉을 향한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두륜봉에 올랐다가 뒤돌아 가련봉을 시도할 수 있으면 그때 오르기로 하고 두륜봉을 향했다. 서울에서부터 벼르던 것이 젊은 시절에 보고 간 두륜산의 랜드 마크라는 '두륜산 구름다리'를 꼭 카메라에 담아 가자고 벼르며 왔기 때문이다. 동쪽 능선으로 두륜봉을 오르다 보니 만일재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높아 보이던 두륜봉 길은 빙빙 나선형으로 돌아 오르는 길이어서 생각보다는 아주 평탄하였다. '두륜봉 정상입구'까지가 만일재에서 300m 거리밖에 안 되었다.
드디어 벼르고 찾아온 두륜산 구름다리가 보인다. 눈썹 같기도 하고, 무지개 같기도 한 5m 가량의 돌다리까지 오르는 길은 쇠층계를 올라야 했다. 바닷가에서 바위가 뻥 뚫리면 코끼리 바위라고 하던데, 산이라서 구름다리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 구름다리에서 100m에 두륜봉 정상석이 가련봉이 노승봉을 업은 모양으로 솟아 있었다.
지도에서 보면 대흥사를 두륜산의 가련봉으로 다시 되돌아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다음 일정을 핑계로 0.8km의 진불암(眞佛庵)으로 하산하는데 위험한 돌길이 계속된다. 기대하고 간 때문일까? 애써 찾아간 진불암(眞佛庵)은 암자치고는 무언가 빠진 듯 엉성하다.대웅전 대신 16나한을 모신 응진당(應眞堂))과 요사채인데 그 절 마당 끝에 세워놓은 몇 개의 자연석이 비석 같기도 하고 마당에 누워있는 돌이 평상 같기도 하다. 이 절에 또 무엇이 있나 해서 그 옆 층계를 올라가 보니 진짜 요사채인데 둥근 돌을 3개의 조약돌을 받혀 쌓은 탑이 멋지다. 층수를 세어보니 무려 11층탑이다. 진불 암부터는 아스팔트길인데 질러가는 길이 있어 가다 보니 '물텅거리3거리'가 나타난다. 물텅거리3거리는 도솔봉3.3km, 남암1.1km, 관음암1.4km인데 지내놓고야 남미륵암이나 보고 갈 걸 후회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서부터는 상수도원인데 이정표의 이름값이나 하려는듯 요란한 계곡물 소리에 정신을 팔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비온 탓도 있겠지만 등산 내내 등산길이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 두륜산은 물이 많은 산이로구나 하였다.그 계곡은 보이지 않고 등산길을 따라 좌측으로 흐르는데 그 물소리는 다른 어떤 산에서 듣던 소리보다 우렁찼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등산객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 탓일까. 그 소리가 하두 커서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낙엽에 털퍽 앉아 그 소리를 나는 스마트폰에 글자로 담았다. 어허, 저 물소리 물과 물이 부딪는 소리 돌을 굴리는 소리 낙하(落下)는 폭포가 되고 폭포(瀑布)는 흰 포말(泡沫)을 낳는가. 뒷물에, 뒷물에 앞선 물 떠밀려가 흐름이 되어 소리가 되어, 소리가 되어 나도 그 하나가 되어 어허, 이 두륜산의 물 소 리
되는가.
-물소리
조계산 (曹溪山, 884.3m)*.조계산(曹溪山)의 어원 신라 말 혜린(慧璘) 선사에 의해 길상사(吉祥寺, 송광사의 옛 이름)가 창건될 때 지금의 조계산의 당시 산 이름은 송광산(松廣山)이었다. 그 길상사를 제1차로 중창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길상사(吉祥寺) 터에 새로 수선사(修禪寺)를 개설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천양(闡揚)하면서 '송광산(松廣山)'을 '조계산(曹溪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일설에 의하면 大覺國師 義天이라고도 함). 이는 조계종이 중흥 도량(道場)의 산이 되면서 송광산(松廣山)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조계산(曹溪山)은 원래 중국에 있는 산으로 한국에서는 대각암(大覺庵)의 대각국사 의천(義天) 이전에는 조계(曺溪)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조계산의 어원과 관계된 그 증거라 할 수 있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98~300쪽 의거)
-이 산은 원래 송광산(松廣山)이라 불려오다가 고려 희종(熙宗)이 '曺溪山'이라 어필친서(御筆親書)를 내리면서 '조계산(曺溪山)'이라 개명한 산이다.
-名山古刹 따라’ ‘하’ 박설산, 이고운저 조계산(曹溪山)은 한국도립공원 중에 하나인 것은 조계산이 명산이기 때문에 그 반열에 들은 것일까? 조계산은 산악인에게는 그리 인기 있는 산이 아니다. 설악산 같이 산이 높거나 산세가 수려한 산도 아니요, 덕유산 무주구천동 같이 깊은 계곡이 있는 산도 아니다. 기암괴석도 거의 없이 평범한 바위가 몇 개 있는 육산(肉山)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도립공원'의 하나가 된 이유는 순천(順天)이란 큰 도시가 가까워서 교통이 편한 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한국3대 삼보(三寶) 사찰 중에 승보(僧寶)사찰인 송광사(松廣寺)와 천년 고찰인 선암사(仙巖寺)를 기슭에 품은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선암사와 송광사를 오고가는 길은 3가지 등산코스가 있다. ∙⦁선암사- 굴목재산장- 송광사 (6.6km 3시간 소요) ⦁선암사- 조계산 정상- 송광사(8.0km 4시간 소요) ⦁선암사- 굴목재- 천자암- 송광사(7.5km 3시간 30분) 지금 나는 선암사로 해서 조계산의 정상인 장군봉(將軍峰, 884.3m)을 거쳐서 연산봉(851m)으로 해서 송광사를 가고 싶은 마음으로 조계산 장군봉을 향하여 가고 있다. 그런데 3시간 코스라는 이 길이 왜 이리 힘들까? 생각해보니 엊저녁 순천의 찜질방에서 잠을 설친 탓인 것 같다. 나이도 나이지만 어제 새벽에는 여수의 향일암을 보고 그 금오산(金鰲山)을 등반한데다가 어젯밤 초저녁에는 개럭시 탭(스마트폰)을 충전하며 찜질방이라서 혹 잃을까 해서 그 곁을 지키며 잠 못 잔 것과 오늘 꼭두새벽에는 날이 새면 가려는 선암사(仙巖寺)가 고향인 장 현철 사장과 선암사와 조계산의 이런 저런 이야기로 새벽녘까지 밤을 지새웠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아침 9시에 시작한 산행이어서 조계산을 넘어가서 송광사에서 하루 밤 유할 계획인데, 밝은 대낮에 스님께 하루 밤 묵기를 부탁하면 거절당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산길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며 여유 작작 산행을 하고 있다. 게다가 기암괴석은커녕 능선도 전망도 없이 오름길만 계속되는 조계산 길이 노독에 지친 나를 더욱 치치게 하였다. 드디어 하늘이 뻥 뚫린 능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가 장군봉(將軍峰, 884.3m)이었다. 정상에 이르러서의 산꾼의 가장 큰 기쁨은 정상석을 보며 더 이상 하늘로 오를 길이 없다는 성취감이다. 그리고 굽어보는 동서남북의 전망이다. 조계산 정상석은 그리 크지 않은 바위들의 모인 곳에 세워 있는데 주위는 비정하게도 졸참나무 수목들이 사방의 전망을 가로 막고 있다. 서쪽으로 제일 가까이 연산봉은 보이지만, 한눈에 보인다는 민속마을 낙안읍성과. 선암사 앞에 있다는 상사호도 나무에 가렸다. 정상석의 바위는 기어오를 만한 바위가 아니지만 거기서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산행에서 늘 나침반과 지도를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보면 모든 산이 연봉(連峰)인데 특별한 전문가가 아니면 그 산이 그 산 같아서 어찌 구체적으로 자세히 각각인 그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지도를 보고 조계산 정상에서 대충 서쪽이 광주의 무등산(1,187m)이요, 승주호 쪽이 화천의 모후산(919m), 북동쪽 방면의 백운산(1,218m), 지리산 천왕봉(1,915m) 등이라고 어리 짐작하여 말할 뿐일 것이다. 갑자기 시장기가 감돈다. 그러고 보니 큰 일 났다. 순천에서 떠날 때 ‘점심 먹거리는 선암사에서 준비하지-.’ 하고 그냥 왔는데 다른 고장과 달리 상가가 길거리 아닌 개천을 건너야 있는데다가 거기가 선암사의 최고 명승지 승선교(昇仙橋) 근처라서 그 구경에 팔려 깜빡 잊고 그냥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정표에 ‘2.1km 보리밥집’ 이정표라니? 반가운 마음에 계획했던 송광사 뒷산이라는 연산봉(851m)은 생략하고 보리밥집을 향한다. 금강산도 식후경(金剛山食後景)이라 하지 않던가. 그보다 나는 ‘배바위’가 더 보고 싶었다. *.배바위 이야기
조계산 장군봉에서 ‘배바위’로 가는 하산 길은 계속 되는 돌길이었다. 그 길을 10분쯤 내려간 곳 좌측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정표도 안내판도 없어 수없는 사람이 그냥 지나치는 ‘배바위’였다. 로프가 있어 이를 잡고 올라가면 멋진 전망이 열리는 모양이다. 이런 배바위는 창녕의 ‘화왕산(火王山, 756.6m)’에도 있다. 그 ‘배바위 이야기’를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쓴 나의 ‘화왕산 산행기’ 부분을 여기에 또 옮긴다. -화왕산 정상 근처에 배바위가 있다. 왜 배바위라 하였을까? 어떤 이는 배를 매어놓은 곳이라고 해서 배바위라 한다. 옛날에는 바다였던 이곳이 지각 융기로 인하여 산이 되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배 모양으로 생긴 바위라서 배 바위라고도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야기다. 배 바위에는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그걸 말하려면 화왕산의 청룡암으로 오느라고 가보지 못한 관룡사에서 300m 오르면 있는 용선대(龍船臺, 보물 제295호)를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다.
-'용선대'(龍船臺)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盤若龍船'(반야용선)의 준말이다. 반야의 지혜로 사바세계와 극락 사이에 있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배란 뜻이다. 이 배의 선장이 부처님이요, 이를 이끄는 것은 용이다. 한 마디로 이승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구하여 열반의 세계로 이끌 때 타고 가는 배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흔히 대웅전을 반야용선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음사 용선대 바위 끝에 선장이신 석가여래불이 결가부좌를 하고 석굴암의 여래처럼 동쪽을 향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화왕산 분지를 굽어보는 자리에 켜켜이 쌓인 돌을 배바위라 하는 것도 용선대와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 조계산 보리밥집 하산 길은 계속되는 위험한 돌길로 조계산보리밥집에 도착하고 시계를 보니 3시 30분이나 되었 다. 등산안내도의 “장군봉-5분-배바위-10분-작은굴맥이재-30분-보리밥집” 45분보다 2배나 더 걸린 것이다. 노인이 행동이 느리거나 나처럼 산행 속도가 느린 것은 안전을 위한 신의 섭리다. 천천히 가면 멀리 간다는 중국의 속담을 내가 몸소 실현한 것이다. 조계산보리밥 집은 널찍한 마당에 평상을 여러 개 펼쳐 놓은 셀프 서비스 식당이었다. ‘보리밥 6,000원/ 동동주6,000천원/ 도토리묵 60,00원’ 등을 파는 저렴한 대중음식점이었다. 참기름을 친 보리밥에 빨간 고추장과 파김치를 넣고 쑥쑥 비빈 밥을 깊은 산 조계산에서 자란 야채에 쌈 싸먹는데 쇠솥의 구수한 누룽지 숭늉이 서비스로 제공된다. 여기에 막걸리를 더하여 등산 중의 산상의 향연(山上 饗宴)이라니 사는 게 이런 보람 때문인가 보다 하였다. 이 근처에서 어렵게 자라던 최씨 일가가 30여년 전에 시작했다는 보리밥집이었다. 그런 보리밥집이 주위에 몇 개 더 있었다.여기가 ‘맹산골3거리’로 4륜구동으로 갈 수 있는 비포장도로 30분 거리에 그분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 모양이다. 산행안내도에 의하면 송광사까지는 “보리밥집-30분-송광굴맥이재-(대피소)-25분- 피아골입구-(비룡폭포)-20분- 송광사”로 정상인이 65분 거리니 내 걸음으로 송광사 가기 전에 산이 어두워지겠구나. 거기서도 서서히 오름길인데 얼마를 가니 대피소가 나온다. 담이 없는 정자 같은 대피소다.
옛날 이 부근은 인적 없는 두메산골이라 1969년 눈이 많이 온 한겨울 광주일고생(光州一高生)들이 조난으로 사망한 일이 있어 세웠다는 대피소인데 이 고장사람들은 ‘배도사대피소’라고 한다. 배도사란 기인(奇人)이 살던 대피소라는 것이다. 평지 길이겠거니 했던 송광사 가는 길이 짜증스런 오름길이 되더니 드디어 재(고개)가 나타난다. ‘마당재’라고도 부르는 ‘송광굴목재’였다. 조계산 산행에서 작은굴목재, 큰굴목재 등 많은 ‘굴목재’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곳이 고향이며 삶의 터전인 조계산보리밥집 최 사장보다 더 아는 이가 있을까. 해서 전화로 물어 보기로 했다. -1950년대만 해도 ‘송광사(松廣寺)’란 이름처럼 길을 막을 정도로 이 부근에는 소나무가 아주 많았지요. 그래서 그 길을 가려면 소나무가 터널을 이루어 소나무굴을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窟’(굴) +‘木(’목) +‘재’(고개)이라 해서 ‘굴목재’라 하였다고 어르신들께 들었어요. -최석두 60세 해발 720m의 송광굴목재는 송광사의 부속암자 천자암을 가는 갈림길이기도 했다. 천자암은 수령 800여년이라는 송광사의 3대 명물 중에 하나라는 쌍향수(雙香樹, 천연기념물 제19호)로 이름난 암자다. -천자암 뒤쪽에 있는 나무로 두 그루가 인접하여 엿가락처럼 꼬인 모양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와 그의 제자 담당국사(湛堂國師, 왕자)가 중국에서 돌아 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로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나무의 모습이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 절을 하고 있는 듯하여 스승과 예의 바른 제자의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이라 한다. 한 손으로 밀거나 여러 사람이 밀거나 똑같이 움직이며, 중생들이 이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그 천자암에 들러 그 쌍향수를 보고 싶지만 35분 거리의 천자암을 보고 송광사를 가는데는 2시간 이상이 걸린다 하는데 지금은 5시를 넘어 곧 어두어질 시간이라 발길을 2.5km/1시간 거리의 송광사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산속의 밤은 빨리 오는가. 벌써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한다. 그 송광굴목재부터는 계속 내림 길인데 전부가 돌길이라서 발길을 재촉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200m를 더 내려오니 제2대피소가 있고 그 아래가 피아골[避厄洞]입구다. 이곳 피아골의 중간에는 연중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 은신처로서 알맞은 곳으로 6.25 사변 중에 공비들의 유골들과 그들이 사용했던 탄창과 철모, 식기 등이 많이 발견되던 곳이라 한다.
피아골은 避厄洞(파액동)의 변한 말로 옛 사람들이 액[재앙]을 피하던 곳이란 말이 변하여 된 말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준비한 해드랜턴을 찾기에도 밤은 너무 어두웠다. 군에서 배운 야간 정숙보행처럼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높이높이 들어 걷다 보니 드디어 드디어 인가가 나타나고 고맙게도 툇마루에 불을 켜 둔 절집이 있다. 가방에서 해드렌턴을 찾고 있는데 인기척에 나더니 나를 보자 들어가서 불을 탁 꺼버린다. 무정한 사람, 나쁜 사람, 욕이 절로 나온다.
송광사와 관계있는 사람들일 텐데, 절집 사람이 이래서도 되는가. “전기가 그렇게 아까운가. 지옥도 못 갈 사람들 같으니-” 들으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그 사람도 미안하였는지 절간 같이 조용하기만 하다.
송광사(松廣寺) *. 송광사의 새벽 예불 “스님 저는 '도립공원 산행' 책자를 내기 위해 조계산 장군봉(將軍峰)을 넘어온 사람입니다. 오늘 밤 송광사에서 일박을 할 수 있을까요? ” 송광사 스님께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하였더니 쾌히 허락하고 담당 스님께 안내하면서 공양은 하였는지부터 걱정해 준다. 조계산 장군봉을 넘으며 '보리밥집'에서 먹은 밥이 오늘의 나의 점심겸 저녁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자가 아닌 내가 구례 화엄사(華嚴寺), 오대산의 상원(上元寺), 광주 무등산 규봉암(圭峰庵)에 이어 송광사(松廣寺)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부처님의 나라인 사찰에서의 소중한 밤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숙소 ‘지혜실’에다 여장을 풀고 함께 유하기로 한 분은 승가사 스님들의 다비식(茶毘式)에 쓰일 납골 자기(瓷器)를 미리 만들기 위해 일하러 온 45세의 총각의 안내로 먼저 욕탕에 가서 샤워를 했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마음처럼 따뜻한 방에 누우니 잠이 스르르 엄습해 온다. 절에서는 9시가 되면 소등해야 하는 모양이다. 은은한 목탁소리에 잠을 깨니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 20분 예불 참여를 알리기 위해서 치는 목탁 소리였다. 부지런히 옷을 입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기 위해서 대웅전을 찾았다. 송광사 대웅보전에는 삼세불(三世佛)을 모셨다. 왼쪽으로부터 석가모니의 미래를 예언하였다는 연등불(練燈佛, 과거불),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현세불), 미륵불(彌勒佛, 미래불) 그리고 그 세 부처를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네 분의 협시보살이 모시고 서 있다. 예불에 참가한 스님들은 60여 명에, 불자가 10 여 명인데, 그 중 한 여성 불자가 ‘松廣寺讀誦要輯’(송광사독송요집)과 방석을 친절히 가져다준다. 그분 보기에도 내가 불자가 아닌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불자(佛者)가 아닌 내가 먼 고장 송광사(松廣寺)에 와서 피곤을 무릅쓰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은 산사(山寺)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불심(佛心)에 한껏 젖어 보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한국 3대사찰의 하나인 송광사의 불상(佛像)과 그 내부를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송광사 법당(法堂)에 앉아 ‘지옥의 중생을 위해 울리는 범종(梵鐘) 소리. 지상의 축생(畜生)을 향한 북소리(弘鼓音)와, 하늘의 날짐승을 향한 운판(雲版)과 수중의 어류를 위로하는 목어(木魚) 등의 사물(四物)의 범종루(梵鐘樓)의 불음(佛音)’을 들으면서 나도 명상에 잠겨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예불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해야 하는 건데 무릎을 꿇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저께 새벽에는 여수 돌산의 향일암(向日庵)에서 일출을 보려고 금오산(金鰲山)에 올랐었고, 어제는 선암사를 둘러보고 조계산(曹溪山)을 종주했으니 어찌 노독이 풀렸겠는가. 그래서 절을 하지 않을 때는 부처님께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는 대신 양반다리 하고 편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 소중한 경험의 아침예불의 전 과정은 녹음할 수가 있었지만, '가능하다면 아침 예불' 사진을 한 장만이라도 찍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런 마음을 부처님께서 헤아리셨는지 모든 스님이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한다. 위 사진은 '이때다! '하고 찍은 ilman의 회심의 역작이다. *.산사(山寺)의 아침 날이 밝으니 아침공양을 하는데 공양간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보아도 예사롭지가 않다. 지금까지 나의 식사는 아내 고마운 줄로만 여기고 먹던 밥이었는데 이제부터 더 깊이 생각하며 들어야겠다. 스님들도 공양이 끝나셨는가. 모든 스님이 대비를 들고 온 마당을 쓸고 있다. 그 넓은 산사의 곳곳이 단장한 여인의 머리 같이 곱고 깨끗하고 신선하다. 산사의 아침이라서인가. 뽀얀 안개가 절의 각 전각을 휩싸 감돌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황홀한 작업인가. *. 송광사 전설
송광사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 조계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다. 신라 말 혜린선사(惠璘禪師)가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가 수선사(修禪寺), 송광사(松廣寺)로 개명한 사찰이다. 송광사는 조계산의 옛 이름 송광산에서 따온 것인데 그 '송광'이란 말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수선사(修禪寺) 절터를 옮기실 때 모후산(母后山, 918.8m)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國師殿)에 앉아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지금도 그 곳 이름을 솔개가 떨어진 곳이라 하여 '치락대(鴟落臺)'라 한다. 솔개의 전남 사투리가 솔갱이여서 '솔갱이 절'이 '송광사'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송광(松廣)'이란 이름은 이 산에 솔나무가 많아서 이 산을 '솔메'라 불렀는데 거기서 '송광사'란 이름이 생겼다.- 지눌(知訥) 이후 큰 스님 18명의 큰스님이 나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 해서 송광사라 하였다. '松' 자를 파자해보면 '十 + 八+ 公' 이니 18(木) 분의 큰 스님(公)이 불법을 널리(廣) 펼 뜻이라는 것이다. -이상 '송광사(대춴출판사 29쪽)
어제 다녀온 선암사의 최고 명승지가 승선대(昇仙橋)였다면,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홍골에서 흐르던 물을 거너는 홍교(弘橋) 다리와 그 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우화각(羽化閣)이다. 거기에 멋을 더해 주는 것은 두 석주(石柱)에 기둥을 얹고 있는 삼청각(三淸閣)과의 어울림이다. 그 홍교(弘橋, 무지개다리)를 넘으면 불교의 수호신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天王門)이 나타나고, 거기서 다시 종고루(鐘敲樓)를 지나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좌우에 승보전(僧寶殿)과 지장전(地藏殿)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송광사에는 대웅전 앞에는 탑이 없다. *.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 세상 사람들이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은보화 등이겠지만 불가에서는 불보(佛寶), 법보(法寶)와 승보(僧寶)로 삼보(三寶)라 한다. 그래서 불자들이 바라는 꿈은 삼보(三寶)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니 삼보란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이 그것이다. 삼보사찰(三寶寺刹)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양산의 통도사(通道寺)가 불보사찰(佛寶寺刹)이요, 8만대장경을 모신 합천의 해인사(海印寺)가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순천의 송광사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렷다.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僧寶殿)에는 부처님께서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 등 10대 제자와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셨다. 이 승보전은 한국전쟁(6.25) 당시 대웅전으로 사용 되었던 전각이었는데,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전각이니 송광사 사찰 관람 시에는 특히 유념하고 볼 일이다. 그 건넌 편에 지장전(地臧殿)은 원래 명부전(冥府殿)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地藏普薩)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성불도 하지 않겠다는 커다란 원을 세운 보살로 삭발한 모습이다. 그 좌우에 두 보살과 함께 시왕(十王)을 모셨다. 시왕(十王)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 지은 죄의 경중을 가려 준다는 저승에 있다는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분의 대왕을 가리킨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후에는 100일, 1년(小祥), 2년(大祥) 때까지 차례로 각 왕에게 가서 생전에 지은 선악업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 송광사 3가지 명물 '송광사의 3 가지 명물(名物)에는 성보박물관의 능견난사(能見難思), 천자암의 쌍향수(雙香樹), 대웅전 옆의 비사리구시가 있다. 가던 날이 장날이란 말처럼 월요일이라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 쉬는 날이라 '능견난사'는 볼 수가 없었다. 능견난사(能見難思)란 잘 보고도 보통의 이치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르는 일이라지만, 불교에서는 송광사에 있는 쇠로 만든 그릇을 뜻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원(元)나라에서 보조국사 지눌(知訥))에게 내렸다는 대웅전에서 불상에 올리는 제구(祭具)를 말한다. 쌍향수(雙香樹)는 앞서 '조계산 산행'에서 말한 대로 천자암 암자 뒤쪽에 있는 두 그루 나무가 엿가락처럼 꼬인 모양새의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 고목이다. '바시리구시'는 큰 싸리 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 밥통을 말한다. 비사리는 싸리나무의 껍질을 말하는 것이고, 구시란 구유의 전남, 경북, 제주도의 사투리다. '1972년 전라도 남원 동동면 세전골에 있던 커다란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졌다. 이를 가공하여 만든 것이 비사리구시로 조선 영조 이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하던 밥통으로 쓰이던 일종의 구유다. 여기에는 약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었다 한다. 그 비사리 크기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재미난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승주 땅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내외, 손자들과 함께 화목하게 사는 노파가 있었다. 할머니는 불심이 깊어 반나절 거리에 있는 송광사를 자주 찾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어 저승에 갔더니 염라대왕이 묻는 것이었다. "송광사에 가본 적이 있느냐? 거기서 비사리구시를 보았느냐? 그 크기가 얼마나 되더냐?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 세상에 보내 다시 살게 하여 주겠다." 할머니는 송광사를 자주 갔던 일과 지눌대사의 기일에도 빠짐없이 갔지만 비사리구시의 크기는 잘 모르겠노라 했다. 이를 갸륵하게 생각한 염라대왕은 노파를 인간 세상에 다시 보내 주었다. 다시 살아난 노파는 아들과 함께 송강사에 가서 자로 재보다가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실로 폭과 길이와 높이를 재어서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은 노인들은 송광사에 와서 그 크기를 노파처럼 실로 재어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습이 생겼다 한다. *. 보조대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이야기 송광사의 세 가지 명물들도 모두 보광국사 지눌(知訥)과 관련된 물건들이었다. 그 유명한 보조국사 지눌의 영정이 국사전에 16명의 대사와 함께 모셔져 있는데 그 중 보조국사 영정 앞에는 촛대가 놓여 있다. 승보 사찰인 송광사 16분 대사 중에 그 제1세 대사가 바로 보조국사 지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도둑이 들어 16분 대사 중 13분의 영정을 도둑 맞은 모양이다. 송광사 건물 중 가장 뒤쪽에 있는 관음전 뒤에 층계가 있는데 그리로 오르면 고색창연한 보조국사 사리탑과 비가 있다. 그 비명이 '佛日普照國師甘露塔'(불일보조국사감로탑)이다. 지눌 스님은 고려 중기의 고승이자 선종의 중흥조로 속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시다.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그의 아버지 정광우는 '병만 낳게 하여 주신다면 자식을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후 병이 나았으므로 8세 때 승려가 되었다.
지눌이 25살 되던 고려 명종 때에 당시로는 큰 출세 길인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스님은 평생 동안 당(唐)나라 선종(禪宗)의 6대 조인 육조 혜능(六祖慧能)을 사모한 나머지 송광산 길상사를 중창한 뒤 혜능 육조대사가 머물었던 조계 보림사(曺溪 寶林寺)의 조계(曺溪)를 따서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산 이름을 고쳤다. 말년에 송광사에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선서(善逝)하는 날 큰 북을 쳐 대중을 법당에 모아놓고 대중들과 불법을 논하다가 한 제자가 " 스님의 병환이 저 유마 거사의 병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묻자 들고 있는 육환장으로 법상을 두어 번 치고 "일체의 모든 진리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법상에 않은 채로 입적하였으니 그 때가 1197년 (음)3월 27일이었다. 현대에 송광사를 빛낸 큰 스님 효봉(曉峰) 스님은 지눌 스님을 흠모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스스로 호를 '지눌을 배우고 싶다 ' 하여 '學訥(학눌)'이라고 할 정도로 지눌(知訥)은 한국 최고의 스님이었다.' *. 송광사 '심우도(尋牛圖)'
나의 송광사에서의 제일 큰 기쁨 중이 하나는 송광사 대웅보전을 빙둘러 벽을 장식하고 있는 '송광사 심우도(尋牛圖)' 벽화를 카메라에 담아 온 것이다. 심우도(尋牛圖)란 찾을 '尋'(심), 소 '牛'(우)란 뜻처럼 불교 선종(禪宗)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선화(禪畵)로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송광사 심우도에는 그림 밑에 곽암사원(郭庵師遠) 스님이 쓴 한시와 그 해설이 일품이다. *. 귀가 길 송광사를 뒤로 하고 귀가 길에 낙안읍성을 둘러 보고 순천만의 갈대를 보러 가는 길에 버스 기사 아저씨와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가 잘 가는 단골 술집 자랑에 귀가 번쩍 뜨인다. 막걸리 한 병 주문에 족발을 푸짐하게 서비스한다는 술집이 있다 해서 순천만 가는 마음을 접고 그 술집 앞에서 내렸다. 거기서 만난 어부와 마지막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나의 2박 3일의 여정을 접기로 했다. 낯선 고장에 와서 거기가 고향인 사람과 정담을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정성껏 안주를 준비해 주는 그 포도식당 여 사장이 고마워 시 한 수를 주기로 했다. 여행이란 매일 떠나는 이사(移徙).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옮아 다니는
나는 한 마리 나그네 새. 하루가 끝나면 다시 시작되는 이사(移徙). 그 길에서 만난 사람이 순천 송광사 다녀온 길에 만난 포도식당 조덕심 여사장이었네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 *. 송광사의 새벽 예불 “스님 저는 '도립공원 산행' 책자를 내기 위해 조계산 장군봉(將軍峰)을 넘어온 사람입니다. 오늘 밤 송광사에서 일박을 할 수 있을까요? ” 송광사 스님께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하였더니 쾌히 허락하고 담당 스님께 안내하면서 공양은 하였는지부터 걱정해 준다. 조계산 장군봉을 넘으며 '보리밥집'에서 먹은 밥이 오늘의 나의 점심겸 저녁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자가 아닌 내가 구례 화엄사(華嚴寺), 오대산의 상원(上元寺), 광주 무등산 규봉암(圭峰庵)에 이어 송광사(松廣寺)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부처님의 나라인 사찰에서의 소중한 밤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숙소 ‘지혜실’에다 여장을 풀고 함께 유하기로 한 분은 승가사 스님들의 다비식(茶毘式)에 쓰일 납골 자기(瓷器)를 미리 만들기 위해 일하러 온 45세의 총각의 안내로 먼저 욕탕에 가서 샤워를 했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마음처럼 따뜻한 방에 누우니 잠이 스르르 엄습해 온다. 절에서는 9시가 되면 소등해야 하는 모양이다. 은은한 목탁소리에 잠을 깨니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 20분 예불 참여를 알리기 위해서 치는 목탁 소리였다. 부지런히 옷을 입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기 위해서 대웅전을 찾았다. 송광사 대웅보전에는 삼세불(三世佛)을 모셨다. 왼쪽으로부터 석가모니의 미래를 예언하였다는 연등불(練燈佛, 과거불),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현세불), 미륵불(彌勒佛, 미래불) 그리고 그 세 부처를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네 분의 협시보살이 모시고 서 있다. 예불에 참가한 스님들은 60여 명에, 불자가 10 여 명인데, 그 중 한 여성 불자가 ‘松廣寺讀誦要輯’(송광사독송요집)과 방석을 친절히 가져다준다. 그분 보기에도 내가 불자가 아닌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불자(佛者)가 아닌 내가 먼 고장 송광사(松廣寺)에 와서 피곤을 무릅쓰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은 산사(山寺)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불심(佛心)에 한껏 젖어 보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한국 3대사찰의 하나인 송광사의 불상(佛像)과 그 내부를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송광사 법당(法堂)에 앉아 ‘지옥의 중생을 위해 울리는 범종(梵鐘) 소리. 지상의 축생(畜生)을 향한 북소리(弘鼓音)와, 하늘의 날짐승을 향한 운판(雲版)과 수중의 어류를 위로하는 목어(木魚) 등의 사물(四物)의 범종루(梵鐘樓)의 불음(佛音)’을 들으면서 나도 명상에 잠겨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예불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해야 하는 건데 무릎을 꿇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저께 새벽에는 여수 돌산의 향일암(向日庵)에서 일출을 보려고 금오산(金鰲山)에 올랐었고, 어제는 선암사를 둘러보고 조계산(曹溪山)을 종주했으니 어찌 노독이 풀렸겠는가. 그래서 절을 하지 않을 때는 부처님께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는 대신 양반다리 하고 편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 소중한 경험의 아침예불의 전 과정은 녹음할 수가 있었지만, '가능하다면 아침 예불' 사진을 한 장만이라도 찍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런 마음을 부처님께서 헤아리셨는지 모든 스님이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한다. 위 사진은 '이때다! '하고 찍은 ilman의 회심의 역작이다. *.산사(山寺)의 아침 날이 밝으니 아침공양을 하는데 공양간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보아도 예사롭지가 않다. 지금까지 나의 식사는 아내 고마운 줄로만 여기고 먹던 밥이었는데 이제부터 더 깊이 생각하며 들어야겠다. 스님들도 공양이 끝나셨는가. 모든 스님이 대비를 들고 온 마당을 쓸고 있다. 그 넓은 산사의 곳곳이 단장한 여인의 머리 같이 곱고 깨끗하고 신선하다. 산사의 아침이라서인가. 뽀얀 안개가 절의 각 전각을 휩싸 감돌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황홀한 작업인가. *. 송광사 전설
송광사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 조계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다. 신라 말 혜린선사(惠璘禪師)가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가 수선사(修禪寺), 송광사(松廣寺)로 개명한 사찰이다. 송광사는 조계산의 옛 이름 송광산에서 따온 것인데 그 '송광'이란 말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수선사(修禪寺) 절터를 옮기실 때 모후산(母后山, 918.8m)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國師殿)에 앉아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지금도 그 곳 이름을 솔개가 떨어진 곳이라 하여 '치락대(鴟落臺)'라 한다. 솔개의 전남 사투리가 솔갱이여서 '솔갱이 절'이 '송광사'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송광(松廣)'이란 이름은 이 산에 솔나무가 많아서 이 산을 '솔메'라 불렀는데 거기서 '송광사'란 이름이 생겼다.- 지눌(知訥) 이후 큰 스님 18명의 큰스님이 나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 해서 송광사라 하였다. '松' 자를 파자해보면 '十 + 八+ 公' 이니 18(木) 분의 큰 스님(公)이 불법을 널리(廣) 펼 뜻이라는 것이다. -이상 '송광사(대춴출판사 29쪽)
어제 다녀온 선암사의 최고 명승지가 승선대(昇仙橋)였다면,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홍골에서 흐르던 물을 거너는 홍교(弘橋) 다리와 그 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우화각(羽化閣)이다. 거기에 멋을 더해 주는 것은 두 석주(石柱)에 기둥을 얹고 있는 삼청각(三淸閣)과의 어울림이다. 그 홍교(弘橋, 무지개다리)를 넘으면 불교의 수호신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天王門)이 나타나고, 거기서 다시 종고루(鐘敲樓)를 지나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좌우에 승보전(僧寶殿)과 지장전(地藏殿)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송광사에는 대웅전 앞에는 탑이 없다. *.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 세상 사람들이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은보화 등이겠지만 불가에서는 불보(佛寶), 법보(法寶)와 승보(僧寶)로 삼보(三寶)라 한다. 그래서 불자들이 바라는 꿈은 삼보(三寶)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니 삼보란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이 그것이다. 삼보사찰(三寶寺刹)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양산의 통도사(通道寺)가 불보사찰(佛寶寺刹)이요, 8만대장경을 모신 합천의 해인사(海印寺)가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순천의 송광사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렷다.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僧寶殿)에는 부처님께서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 등 10대 제자와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셨다. 이 승보전은 한국전쟁(6.25) 당시 대웅전으로 사용 되었던 전각이었는데,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전각이니 송광사 사찰 관람 시에는 특히 유념하고 볼 일이다. 그 건넌 편에 지장전(地臧殿)은 원래 명부전(冥府殿)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地藏普薩)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성불도 하지 않겠다는 커다란 원을 세운 보살로 삭발한 모습이다. 그 좌우에 두 보살과 함께 시왕(十王)을 모셨다. 시왕(十王)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 지은 죄의 경중을 가려 준다는 저승에 있다는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분의 대왕을 가리킨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후에는 100일, 1년(小祥), 2년(大祥) 때까지 차례로 각 왕에게 가서 생전에 지은 선악업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 송광사 3가지 명물 '송광사의 3 가지 명물(名物)에는 성보박물관의 능견난사(能見難思), 천자암의 쌍향수(雙香樹), 대웅전 옆의 비사리구시가 있다. 가던 날이 장날이란 말처럼 월요일이라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 쉬는 날이라 '능견난사'는 볼 수가 없었다. 능견난사(能見難思)란 잘 보고도 보통의 이치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르는 일이라지만, 불교에서는 송광사에 있는 쇠로 만든 그릇을 뜻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원(元)나라에서 보조국사 지눌(知訥))에게 내렸다는 대웅전에서 불상에 올리는 제구(祭具)를 말한다. 쌍향수(雙香樹)는 앞서 '조계산 산행'에서 말한 대로 천자암 암자 뒤쪽에 있는 두 그루 나무가 엿가락처럼 꼬인 모양새의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 고목이다. '바시리구시'는 큰 싸리 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 밥통을 말한다. 비사리는 싸리나무의 껍질을 말하는 것이고, 구시란 구유의 전남, 경북, 제주도의 사투리다. '1972년 전라도 남원 동동면 세전골에 있던 커다란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졌다. 이를 가공하여 만든 것이 비사리구시로 조선 영조 이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하던 밥통으로 쓰이던 일종의 구유다. 여기에는 약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었다 한다. 그 비사리 크기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재미난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승주 땅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내외, 손자들과 함께 화목하게 사는 노파가 있었다. 할머니는 불심이 깊어 반나절 거리에 있는 송광사를 자주 찾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어 저승에 갔더니 염라대왕이 묻는 것이었다. "송광사에 가본 적이 있느냐? 거기서 비사리구시를 보았느냐? 그 크기가 얼마나 되더냐?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 세상에 보내 다시 살게 하여 주겠다." 할머니는 송광사를 자주 갔던 일과 지눌대사의 기일에도 빠짐없이 갔지만 비사리구시의 크기는 잘 모르겠노라 했다. 이를 갸륵하게 생각한 염라대왕은 노파를 인간 세상에 다시 보내 주었다. 다시 살아난 노파는 아들과 함께 송강사에 가서 자로 재보다가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실로 폭과 길이와 높이를 재어서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은 노인들은 송광사에 와서 그 크기를 노파처럼 실로 재어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습이 생겼다 한다. *. 보조대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이야기 송광사의 세 가지 명물들도 모두 보광국사 지눌(知訥)과 관련된 물건들이었다. 그 유명한 보조국사 지눌의 영정이 국사전에 16명의 대사와 함께 모셔져 있는데 그 중 보조국사 영정 앞에는 촛대가 놓여 있다. 승보 사찰인 송광사 16분 대사 중에 그 제1세 대사가 바로 보조국사 지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도둑이 들어 16분 대사 중 13분의 영정을 도둑 맞은 모양이다. 송광사 건물 중 가장 뒤쪽에 있는 관음전 뒤에 층계가 있는데 그리로 오르면 고색창연한 보조국사 사리탑과 비가 있다. 그 비명이 '佛日普照國師甘露塔'(불일보조국사감로탑)이다. 지눌 스님은 고려 중기의 고승이자 선종의 중흥조로 속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시다.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그의 아버지 정광우는 '병만 낳게 하여 주신다면 자식을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후 병이 나았으므로 8세 때 승려가 되었다.
지눌이 25살 되던 고려 명종 때에 당시로는 큰 출세 길인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스님은 평생 동안 당(唐)나라 선종(禪宗)의 6대 조인 육조 혜능(六祖慧能)을 사모한 나머지 송광산 길상사를 중창한 뒤 혜능 육조대사가 머물었던 조계 보림사(曺溪 寶林寺)의 조계(曺溪)를 따서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산 이름을 고쳤다. 말년에 송광사에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선서(善逝)하는 날 큰 북을 쳐 대중을 법당에 모아놓고 대중들과 불법을 논하다가 한 제자가 " 스님의 병환이 저 유마 거사의 병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묻자 들고 있는 육환장으로 법상을 두어 번 치고 "일체의 모든 진리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법상에 않은 채로 입적하였으니 그 때가 1197년 (음)3월 27일이었다. 현대에 송광사를 빛낸 큰 스님 효봉(曉峰) 스님은 지눌 스님을 흠모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스스로 호를 '지눌을 배우고 싶다 ' 하여 '學訥(학눌)'이라고 할 정도로 지눌(知訥)은 한국 최고의 스님이었다.' *. 송광사 '심우도(尋牛圖)'
나의 송광사에서의 제일 큰 기쁨 중이 하나는 송광사 대웅보전을 빙둘러 벽을 장식하고 있는 '송광사 심우도(尋牛圖)' 벽화를 카메라에 담아 온 것이다. 심우도(尋牛圖)란 찾을 '尋'(심), 소 '牛'(우)란 뜻처럼 불교 선종(禪宗)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선화(禪畵)로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송광사 심우도에는 그림 밑에 곽암사원(郭庵師遠) 스님이 쓴 한시와 그 해설이 일품이다. *. 귀가 길 송광사를 뒤로 하고 귀가 길에 낙안읍성을 둘러 보고 순천만의 갈대를 보러 가는 길에 버스 기사 아저씨와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가 잘 가는 단골 술집 자랑에 귀가 번쩍 뜨인다. 막걸리 한 병 주문에 족발을 푸짐하게 서비스한다는 술집이 있다 해서 순천만 가는 마음을 접고 그 술집 앞에서 내렸다. 거기서 만난 어부와 마지막 술 한 잔을 기울이며 나의 2박 3일의 여정을 접기로 했다. 낯선 고장에 와서 거기가 고향인 사람과 정담을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정성껏 안주를 준비해 주는 그 포도식당 여 사장이 고마워 시 한 수를 주기로 했다. 여행이란 매일 떠나는 이사(移徙).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옮아 다니는
나는 한 마리 나그네 새. 하루가 끝나면 다시 시작되는 이사(移徙). 그 길에서 만난 사람이 순천 송광사 다녀온 길에 만난 포도식당 조덕심 여사장이었네
천관산(天冠山,723m) 원본 찾아 사진 위치 정할 것*. 벼르고 벼르던 천관산(天冠山) 서울 세종로 광화문에 있는 도로원표(道路元標)에서 동쪽으로 똑바로 계속 가면 정동진(正東津)이 나온다. 그 도로원표에서 북으로 가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춥다는 중강진(中江鎭)이요, 남으로 가면 정남진(正南津)이 바로 장흥(長興)이다. 그 장흥읍에서 남쪽 20여 km 지점에 천관산(天冠山, 723m)이 있다. 고양시 일산에서 453.8km로 장장 1,110리나 되는 원거리여서 수도권 산악회들도 당일치기로는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산이다. 그 천관산(天冠山)의 명성을 오래 전부터 듣고 그리워 하다가 오늘 드디어 동네 산악회 따라 천관산을 향하고 있다. 동네 산악회가 좋은 것은 떠날 때도, 돌아올 때도 우리 마을이어서 전남 장흥의 천관산 산행이 당일치기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5시 30분 캄캄한 꼭두새벽에 고양시 일산을 떠나 6시간 30분만에 전남 장흥군 관산읍(冠山邑) 주차장에 12시 조금 못 미쳐 도착하여 천관산(天冠山) 산행을 시작한다. 감이 익어가는 10월 중순이었다. 고양시 일산에서 장흥까지는 너무 멀어서 고속도로 휴게소를 가능한 한 생략하거나 짧게 줄여서 오고 가기로 했다. 천관산을 제대로 보는 산행코스로는 방촌리 주차장- 환희대- 억새군락지- 정상 연대봉- 산 너머 정탑 주차장으로 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돌아오는 시간을 고려하여 그 연대봉에서- 능선- 영월정- 주차장으로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 천관산(天冠山) 도립공원 장흥은 사계절 대축제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봄: 제암산 철쭉제와 키조개 축제(매년 5월)/ 여름: 개 매기 체험(매년 6월~8월 3회)/ 가을: 천관산 억새제(매년 10월초)/ 겨울: 해맞이 5경(정남진, 남포소등섬, 여닫이, 천관산, 한재공원) 요즈음 같은 가을은 장흥 회진항에서 전어축제(9월)와 전국바다낚시대회까지 더 한다지만 우리는 그 일부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올라 갈 시간이 바빠서다. 관리소에서 '천관산 억새제' 팜풀렛을 받아 챙기고 막 등산이 시작되는데 우측에 '湖南第一 支提靈山' 이란 자연석 비가 있다. '천관산'을 '지제산(支提山)'이라고도 하는구나. 하며 단풍나무 터널을 지나다 보니 장안사 갈림길에 그 설명이 있다. 우측에 비석이 가득한 유적지가 있는데 이는 어떤 곳인가 하였더니 이 고장 출신 독립지사 위석규(魏錫珪)님을 기리는 비였다. 그 중에는 1906년 일제에 맞서 독립전선에 투신하면서 그분이 쓴 우국의 글도 있지만 그보다 천관산읍 연혁과 장흥의 역사와 천관산기(天冠山記)가 볼 만하다. *. 천관산기(天冠山記) -천관산(天冠山)은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의 하나요. 우리나라 100대 명산의 하나인 산으로 한반도 최남단의 진산(鎭山)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지제산( 支提山) 또는 천풍산(天風山)이라 하였는데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는 풍천(風天)이란 이름도 보인다. 이 산은 가끔 흰 연기 같은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하여 신산(神山)이라고도 불리던 산이다. '천관산(天冠山)'이란 이름은 첩첩이 쌓인 기암괴석이 천자의 면류관(冕旒冠)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다가, 김유신의 연인 천관보살이 살았다 해서 천관산(天冠山)이라 칭하였다 한다. 백두대간 호남 정맥 끝자락인 이 산에는 ‘6개 동천(洞天)과 44개 영봉(靈峰), 36개 석대(石臺)’가 있다. 옛날 이 산에는 89개의 천년 고찰과 암자가 있어 28명의 대사를 배출하여 금강산(金剛山) 다음의 명산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이 남해안 가의 사람들이 그 재앙을 불력(佛力)으로 막고 싶어 하던 민중의 소망이 담겨서 인 듯하다. 고려 17대 인종 왕비 공예태후 임(任)씨가 당동에서 탄생한 곳이었다거나, 이태조가 등극하기 전에 명산대찰에 기도하러 다닐 때 지리산과 함께 불복산(不服山)으로도 유명한 산이 천관산이었다. 육각정 영월정은 갈림길이었다. 좌측 길은 이 산의 정상인 연대봉(烟帶峰)까지 2.3km/1:20 코스지만 우리는 직진하여 '3.6km/1:40'라는 환희대 코스로 향한다. 그 길에는 볼거리와 이 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천관산의 암봉(岩峰)들을 먼저 보는 코스다. 상수도원이라는 큰골을 가로지르는 도화교(桃花橋)를 지나니 재실 앞에는 수령(樹齡) 600년, 수고(樹高) 20m나 되는 '태고송'의 위용이 멋있다. 태고송(太古松)이란 이름은 이 재실을 지을 당시인 조선 태종 때부터 이 나무가 이곳에 있었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큰 나무 한 가지가 땅에 닿을 정도로 현애(懸崖)되어 있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그 나무가 우는 소리로 기상을 예측할 수 있다 하여 '장천재(長川齋)'라는 지방문화재(15-12-2-4) 보호수가 되었다. 그 앞에 있는 장천재(長川齋, 유형문화재72호)는 원래 장천암(長川庵)이란 암자가 있던 자리로 위씨 가문의 묘각(墓閣)인데 그의 후손들이 강학(講學)을 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고종 때(1870년)에는 천문 지리에 능통한 실학자 존재 위백규(存齎 魏伯珪)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거기서 얼마 올라가니 이정표가 나온다. '금수굴1.5km/한희대 2.9km/주차장0.7km' 금수굴은 연대봉에서 하산 길에 있다는 양근암(陽根岩)과 짝이 되는 남설악의 여심폭포(女深瀑布)와 같은 모양새의 굴이지만 초행길이라면 그 길(2.6km/1:20)로 가면 안 된다. 천관산의 아기자기한 환희대(歡喜臺)를 보고 억새군락지와 천관산 정상이라는 연대봉(烟帶峰)을 아우르기 위해서다. *. 환희대(歡喜臺)에서 '풍향대 0.4km' 이정표를 뒤에 두고 환희대를 향하고 있다.
풍향대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주는 능선에 있는 대(臺)로 남해를 바라보는 전망대였다. 두 번째 다리를 넘어서부터는 계속 힘든 오름길이었다. 대개의 산은 가파른 오름길을 고생고생 오르다 보면 능선을 만나게 되고, 그 능선부터는 비교적 덜 힘든 법인데 천관산 산행은 그와 달리 환희대까지 완만하기는 하였지만 계속 되는 오름길이었다. 해발 723.1m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바닷가에서 불끈 솟은 산이라 그런지 몹시 힘이 들었다. 암봉들이 천자의 면류관이 같다는 멋진 모습은 그 정상이 아니라 환희대(歡喜臺) 일대를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바위 하나하나를 보며 오르는 것이 천관산 산행이었다. 힘들지 않아도 걸터앉아 쉬어가고 싶은 멋진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거기 앉아 오던 길을 뒤돌아보면 지금까지 잊고 살아온 쪽빛 바다가 마음을 열어 절로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 ♪ ' 앞에 봉우리가 보여서 그것이 환희대인 줄 알았더니 선인봉이었다. 그러더니 소나무 너머에 천관산이 비로소 나뭇가지 사이에서 얼굴을 내민다. 이럴 때는 그 멋진 절경을 가리는 소나무가 밉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저 암봉들은 멀리서 보면 저렇게 한 데 모여 있지만 다가 갈수록 암봉은 암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높은 나이에, 천 리도 넘는 길을 젊음과 함께 달려와서, 그들보다 비록 늦게나마 이렇게 산을 오르면서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하나하나에 감탄하면서 마음에는 물론 카메라에 담을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이런 아름다움을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나와 같은 이를 위하여 관동별곡(關東瞥曲)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와 조화옹(造化翁)이 헌사토 헌사할샤. 날거든 뛰지 마나 섰거든 솟지 마나. 부용(芙蓉)을 꼬잤는 듯 백옥(白玉)을 묶었는 듯, 높을시고 망고대(望高臺) 외로울사 혈망봉(穴望峰)이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사로리라 천만겁(千萬劫) 지나도록 구필 줄을 모르는다. 금강굴을 지나 종봉(鐘峰)을 옆에 끼고 층계로 오르니 천주봉이 앞을 막아선다.
-'천주봉(天柱峰)'이란 천주(天柱)를 깎아 기둥으로 만들어 구름 속으로 꽂아 세운 것 같다하여 불가(佛家)에서 보찰(寶刹)이라고 하는 봉우리다.
드디어 환희대(歡喜臺)에 올랐더니 저 멀리 서쪽으로 억새풀 군락지 너머로 천관산의 정상이면서 멋진 봉화대인 연대봉(烟帶峰)이 보이는데 어느 곳이 환희봉인가.환희봉 설명 입간판 뒤 같지만 주위가 모두가 절경이라서 헷갈린다. 환희봉의 모습은 그 이름보다 너무 소박한데 그 설명은 요란하였다. - 환희봉(歡喜封)은 책바위가 네모나게 깎아져 서로 겹쳐 있어서 만 권의 책이 쌓인 것 같다는 대장봉 정상에 있는 평평한 석대(石臺)이니, 이 산에 오르는 자는 누구나 이곳에서 성취감과 큰 기쁨을 맛보게 되리라. *. 천관산 억새군락지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메입니다. ♪♬ ♩ ♪ ~
우리나라에서 40, 50대 이상 나이든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하는 대중가요 가수 고복수 노래의 '짝사랑'에 나오는 으악새는 어떤 새인가? '으악새'는 새[鳥]가 아니라 '억새'의 방언이다. 가을 천관산은 매력은 40만 평에 달하는 억새군락지에도 있다. 천관산 오는 길에도 '천관산 억새 가는 길' 이란 현수막이 도처에 있었고 방촌주차장 근처 들머리에도 '억새 이야기' 설명으로 우리를 맞았었다. -천관산 억새는 봄철에 아름다운 신록과, 여름철에 초원을 이룬 후 9월 중순에 녹황색의 꽃을 피우다가 10월에 은빛 물결로 아름다움을 이루다가 11월에 열매를 맺으며 낙화(落花)한다. 억새 감상은 맑은 날 일출 직후나 일몰 직후에 태양을 마주하여 역광으로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따라서 천관산 억새 산행은 오전에는 환희대에서 연대봉에 이르는 코스로, 오후에는 연대봉에서 환희대에 이르는 코스를 이용하여 일출과 일몰시에 감상하는 것이 최선이다. 가을의 여왕 이 억새가 환희대에서 연대봉까지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을 뒤덮고 있는데 그 사이로 울긋불긋한 탐승객들이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이 고물고물 곰실곰실 움직이고 있다. 천관산 갈대가 특히 아름다운 것은 짙푸른 다도해 남해를 배경으로 하여 나부끼는 모습 때문이요, 천자의 면류관 같은 저, 저 암봉들을 배경으로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 때문이다. *. 연화봉(烟帶峰)에서
-연화봉(烟帶峰)은 옛날에는 옥정봉(玉井峰)이라 하던 곳으로 동서 7.9m, 남북 6.6m에 높이 2.3m로 1986년에 복원한 봉화대이다.
일찍이 고려 의종왕(1160년대) 때 봉화대를 설치하여 낮에는 연기[熢]로 밤에는 횃불[수]로 나라의 위급을 연락하던 통신수단이라 해서 봉수봉(熢燧峰) 또는 연대봉(烟帶峰)으로 부르게 되었다. 연화대에서 바라보이는 3면의 다도해는 동에 팔영산, 남쪽에 완도의 신지도, 약산도는 물론 해남의 두륜산, 영암의 월출산, 담양의 추월산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이다. *. 하산 길의 양근암 장안사 쪽으로 향한 하산 길 능선은
2.3km/1:20 코스로 남해를 굽어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며 가는 환상적인 길인데 양근암(陽根岩)이 그 흥취를 더하여 준다. 양근암은 남성의 거시기다. 불끈 힘을 주고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저 우람한 모습은 남성의 상징인가. 아니면 천관산의 상징인가. 그 모습에 장난기 어린 산악회 회장 카우보이님이 거시기를 만지고 그 두 개의 봉알을 밟고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주차장에 내려와서 뒤풀이를 벌이면서 우리들의 오늘을 행복하게 하여준 것은 ‘광주보고파산악회’와의 만남이다.
맛있는 국거리로 푸짐한 뒤풀이를 하게 도와준 것도 그렇거니와 돌아올 때 수박만한 배 한 박스의 넉넉한 인심은 천리 길을 돌아가기에도 급한 우리들을 자주자주 고속도휴게실에서 차를 멈추게 하였다. (2007. 10. 11/ 전남장흥 관산읍 주차장- 육각정- 장천제- 고비- 능선3거리(250고지)-종봉--환희봉-억새군락지-선- 천관사연대봉-정원석- 양근암- 봉황봉- 주차장/ 고양시 늘푸른산악회)
팔영산(八影山, 608.6m)(2006. 3.30/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능가사-흔들바위-석문-1봉~8봉-우천리자연휴양림/고상늘푸른산악회 따라 ) *.가 보고 싶던 산 팔영산(八影山) 내 일찍부터 산하(山河)를 사랑하여 여기 저기 배회하며 다니다가 전라도를 넘나들 때, 목포 가는 차 속에서는 월출산(月出山)에 혹하였고, 고흥반도 내. 외 나로도를 가다가는 팔영산(八影山)을 마음에 두고도 그리워만 하다가 오늘 이른 봄을 맞아 팔영산을 향하고 있다. 전남 고흥읍에서 동쪽으로 25km 거리에 있는 팔영산(八影山) 은 소백산맥의 끝자락에서 남해를 향하여 마치 공룡의 등처럼 일직선으로 늘어선 8봉우리를 말한다. 팔영산은 해발 608.6m로 고흥 반도에서는 최고로 높다는 고흥군의 진산(鎭山)이다. 한반도의 끝자락인 전남 고흥반도에 있으니 욕심 따라 단독등산으로 무리를 하다 보면 그 경비도 적지 않아서 마음에만 두고 벼르던 산이 ‘팔영산도립공원(八影山道立公園)’이었다. 그러나 동내 산악회를 이용한다면 수도권에서라도 당일치기 팔영산 여행이 가능하다.
나의 경우 일산에서 새벽에 떠나 밤늦게라도 일산으로 돌아오면 되기 때문이다.
고양시 일산(一山)에서 새벽 5시 30분에 떠난 차가 동광주(東光州) 톨게이트를 지나 곡성휴게소에서 쉬었다가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차 속에서 탄성이 연발되고 있다. "어머, 목련이 활짝 피었어. 개나리도 노랗게 피웠구." “저 닥지닥지 핀 흰 꽃은 매화인가 배꽃인가?" ”저 산 좀 봐 산마루로 올라가며 피어 있는 꽃이 진달래지? “ *.왜 팔 영산(八影山)인가 그러더니 수도권 일산에서 6시간만에 우리는 팔영산 안내소에 도착하였다. 도립공원이라서인가. 주차료도 입장료도 무료다. 그런데 왜 이름을 팔영산(八影山)이라 하였을까?
-세수하던 중국 위왕(魏王) 대야에 비친 8봉 황명(皇命) 따라 고흥서 8봉산 찾아서 여덟 八(팔) 그림자 影(영), 뫼 山(산) 八影山(팔영산) 이름했다지. 중국 황제가 세수하다가 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산을 보고 ‘찾으라.’ 명하여 찾았다는 전설을 가진 산이 우리가 찾아온 팔영산이었다.
이 외에도 팔영산의 이름을 가진 산이 한국에 몇 개 더 전하는 걸 보면 모화사상(慕華思想)에서 과장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로 만든 전설 같다. 어떻거나 8봉으로 구성된 이 산의 각 봉우리에 어느 때부터인가 각각 이름을 붙여 놓았고 고흥군에서는 이들 각 봉두에다가 대리석으로 표석을 만들어 놓았다. 팔영산을 팔전산(八顚山)이라고도 부르지만 불가(佛家)에서는 '능가산(楞伽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늘에 실 가듯이 명산 팔영산에 속한 명사찰이 능가사(楞伽寺)로, 원점회귀하는 등산길에서는 능가사는 팔영산의 들머리요 종점이기도 하다. *. 호남 4대 사찰 능가사 (楞伽寺) 지금 능가사는 송광사의 말사이지만, 옛날에는 순천의 송광사, 구례의 화엄사, 해남의 대흥사와 함께 ‘호남 4대 사찰’로 4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다.
-능가사(楞伽寺)는 1,500년 전 신라 눌지왕 때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지을 때 처음 이름을 보현사(普賢寺)라 하였다지만 임란 때 그 당우는 다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지리산에서 수도하던 정현대사(正玄大師) 벽천(碧川)이 90살 되던 어느 날 꿈에서 '이 산에 가서 절을 짓고 중생을 제도하라'는 부처의 계시를 받고 와서 신축하고 이름을 ‘능가사(楞伽寺)’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능가(楞伽)'란 인도에서 명산을 '능가'라 하므로 '능가사'라 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능가산'에서 대혜보살을 위하여 설법하였다는 '능가경(楞伽經)'이란 이름도 그래서 유래한 말이다. 이 절에 들어가다 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산기슭에 세운 산사(山寺)가 아니라 평지(平地) 사찰이란 점이 그렇고, 사천왕문을 향하여 북향하고 있는 대웅전이 그러하다. 그래서 일주문을 겸한 사천왕문을 통하여 마주 보이는 대웅전이 유난히 아름다운 절이 능가사다. 이 절에서 꼭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 곳으로는 사천왕문에 모신 '목조사천왕상'(전남유형문화재 224호)과 '대웅전('보물1307호)에 모셨다는 350년 전에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하였다는 불상 8위와, 157cm의 '범종'(전남유형문화재69호)과 5.1m의 고색창연한 '사적비'(전남유형문화재70호)다. 그래서 나는 사천왕문의 고목 느티나무부터 카메라에 담다 보니 일행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절보다 산만이 중요한 산꾼이라서 절은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으로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다.절의 모든 곳에 인기척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등산로가 어디로 났는지 물어볼 사람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우리 일행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절 탑 앞에 있던 것을 덕목이란 스님이 도술로 절 뒤로 옮겨 놓았다는 귀부(龜趺)가 유명한 '사적비' 근처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서 더 멋져 보이는 '응직전'(應直殿) 근처에도 일행이 없었다. 산(山)만을 향하여 말처럼 달리듯이 가는 것이 산꾼의 습성이어서 절을 그냥 지나가듯이 통과해 버린 모양이다. 내가 시큰거리는 무릎을 끌며 체력의 한계를 무릅쓰고도 정상에 오르는 것이나, 그 산에서 가장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 사찰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언제 다시 오랴?' 하는 나이를 의식해서이기도 하였지만 함께 온 젊은이들의 그 팔팔한 젊음과 산을 우선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이 부럽기
그지없다. 하릴없이 동백꽃과 개나리가 만발한 절을 둘러보고, 샘가에서 수통에 물을 담아 가지고 '어느 곳으로 가야 팔영산일까?' 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능가사 왼쪽으로 팔영산을 향하고 있는 큰 길이 있다.그 길이 팔영산에서 흘러내리는 만공골 옆 등산로인데 봄 가뭄 때문인가 물이 완전히 말라 있었다. *. 팔영산 가는 길 절을 막 벗어나니 부도(浮屠)군이 있다. 조선 후기의 승려로 사제 간이었던 추계당과 사영당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이었다. 거기서 첫 번째 만난 이정표가 '제1봉 유영봉/2.7km, 8봉 적취봉/3.2km' 중 어느 봉으로 갈 것인가를 묻고 있다. 버스에서 나누어 준 지도에 1봉에서부터 8봉을 타고 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간다고 하여서 왼쪽 1봉 길로 들어섰다. 이런 속도로 가면 나는 우리 일행이 점심이 끝난 다음에나 만날 것 같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서 버스에서 미리 이동식을 먹고 왔다. 점점 팔영산의 봉이 가까워지더니 원시림 같은 숲이 앞길을 막아선다. 오솔길 양쪽은 아직 봉오리를 맺지 못한 철쭉나무와 잡목들이 무성한 돌길로, 완만한 오름길이라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뒤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있더니 대구에서 왔다는 일행이 떠들썩하게 지나간다. 능선이 가까웠는가. 바람소리가 심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곳은 바닷가 산이라서 남쪽 바다에서 막힘없이 달려오는 바람이 병풍 같은 팔영산에 부닥치는 소리였다. 오늘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바람 소리가 요란 한 곳인 것 같았다. 쌍무덤부터는 가지 사이로 두 봉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두 번째 이정표가 있다. '유영봉0.3km/ 흔들바위 0.5km'. 조금 아까 두 갈래 갈림 길이 있어 리본이 많은 왼쪽 길로 올라왔더니 오른쪽으로 갔어야 흔들바위를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올라온 이에게 흔들바위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설악산 울산바위 가는 길 계조암의 흔들바위와는 비슷하지도 않고, 몇 사람이 힘껏 밀어야 약간 흔들리는 이름값을 못하는 덩치만 큰 평범한 바위라 한다. 지금까지 팍팍한 돌길은 능선이 시작되면서 육산의 길이더니 다시 또 돌길로 바뀐다. 세 번째 이정표가 좌측 '암벽등반(절벽위험), 노약자, 어린이 우회'란 표지로 서있다. ‘나는 적당한 모험을 즐기는 노강자(老强者)다'라는 생각에 암벽등반 길로 들어섰더니 혼자만의 초행길이라 휘휘한 생각도 들었지만, 떠나올 때 고흥군에서 위험한 구간마다 안전시설을 철저히 하여 놓았다는 귀 소문을 들어서였다. 석문(石門)을 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열어주는 전망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도해 국립해상공원이었다. 산과 바다를 아우르면서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인자(仁者)와 지자(智者)의 경지를 넘보고 싶어서 우리들은 새벽을 가르고 수도권서 한반도의 끝 고흥을 향하여 달려온 것이다. 그 고흥반도가 품고 있다는 다도해 중 175개의 섬이 보이기 시작한다. 북쪽으로 우리가 올라온 성기리 마을과 평지 사찰 능가사가 멀리 별세상 같이 아름답다.
*. 아름다운 제1봉 유영봉(儒影峰) 팔영산 유영봉은 대구에서 온 분들과 함께 올랐는데 어찌나 떠들던지-. 중국인들이 떠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중국어를 몰라서 시끄러운 소리로만 듣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보니 경상도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 이상이다. 다가오는 경치가 아름다울수록 그 뚝뚝 끊어지는 무뚝뚝한 억양의 경상도 사투리는 고함이 되다가 악을 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은 안복(眼福) 때문인가 그 소리가 꽹과리나 징소리 같이 듣기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유영봉 평평한 암반에서 약간 빗겨 난 운치 있는 곳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하도 신기해서(?) 물어보았다. "어디서 오셨지요?" "충청도 충주에서 왔시유." 제1봉 유영봉(儒影峰)은 '선비 儒'(유), 그림자 '影'(영)이니 선비 되기를 그리워하며 살던 옛사람의 마음을 봉의 이름으로 가져온 것 같다. 우리들은 가까이에서는 못 느끼던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헤어지고야 발견하고 그 인품을 그리워하는 경우가 있다. 제1봉 유영봉이 그랬다. 유영봉을 지나서 2봉, 3봉을 올라서 멀리 보고서야 8봉 중 가장 아름다운 봉이 1봉 유영봉이로구나 하였다. 팔영산 8 봉을 타다 보니 남쪽 바다 쪽으로 안부에 헬리콥터 장을 걸쳐 두고 우뚝 솟아 봉황처럼 고고하게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봉우리가 있다. 신선대(神仙臺)였다. 신선대가 있어 다도해가 더 아름다웠고,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 있어 신선대가 더욱 돋보였다. *. 팔영산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사물을 보거나 들을 때에 기쁨과 만족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대상에게 부여하는 말이다. 그것은 원만과 조화에서 시작되어 감동으로 마음속에 깊이 남게 되는 갸륵하고 훌륭한 경지를 말한다. 산하 같은 자연에서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들어나지만, 인간의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언행이 예쁘고 고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 아름다움이 팔영산에는 8 개 이상이 있다. 제1봉에서 시작되는 봉우리는 조금씩 남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높아져 가면서 남해의 비경을 하나하나 열어주고 있다.1봉 491m 유영봉(儒影峰), 2봉 538m 성주봉(聖主峰), 3봉 564m 생황봉(笙簧峰), 4봉 578m 사자봉(獅子峰), 5봉 579m 오로봉(五老峰), 6봉 596m 두류봉(頭流峰), 7봉 598m 칠성봉(七星峰) ~. 7봉을 지나서 8봉 591m 적취봉(積翠)峰)부터는 하산하라 함인지 낮아지기 시작한다. 각종 등산 서적에 608.6m를 팔영산의 최고봉이라 하였으니 정상석의 기록으로만 따진다면 8봉 중에서는 598m인 칠성봉이 제일 높으나, 남쪽으로 뚝 떨어진 무선중계소가 있다는 저 깃대봉이 팔영산의 최고봉인 것 같다. 그렇다면 구영산(九影山)이라고 하여야 할 터인데 팔영산에는 섭섭하게도 그 깃대봉이 빠져 있다. 팔영산은 고흥군에서는 어린이나 노약자도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봉과 봉을 오르내리는 곳이 직벽이요, 아슬아슬한 암릉은 40년 이상의 산행을 한 나도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유격훈련을 받는 것 같이 힘들고 위험한 코스도 많았다.
봉을 오를 때는 어느 봉이나 손발로 네발을 다 써야 했다. 봉마다 곳곳에 쇠줄이 있지만 너무 반질반질하여 몇 번이나 손에 침을 뱉어 쇠줄을 잡아야 했다. 이 봉들은 험준하기가 도봉산의 포대능선과 같고, 설악산의 공룡능선과 월출산 버금가라면 서러워할 지경이지만 위험한 곳마다 철책과 층계와 철제 디딤판과 문고리 같은 쇠고리까지 완벽하게 안전시설을 하여 놓아서 고흥 사람들의 정성에 감탄하게 한다. 꽃밭에 꽃들이 모여 살듯이 봉우리 봉우리는 짧은 거리를 두고 모여 있어서 험하고 아기자기한 것이 온종일 혼자였는데도 심심함을 모르겠다. *. 고흥군(高興郡)의 어원이 된 류 정승 피난 굴 깃대봉은 저만치 두고 봉우리를 타며 바라보이는 ,저 산록에 아름다운 자연휴양림 휴양관을 향하여 하산을 한다. 일산까지는 5시간 이상을 가야 하니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하산 길은 쉬워서 얼마 가지 않아서 아스팔트가 나오고 휴양관에 이르렀다. 아스팔트길은 구불구불한 것이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차로는 환상적인 코스일지 모르나 걷기에는 운치가 없어서 도중 도중 직진하여 길 아닌 언덕으로 질러 내려오니 휴양림 입구가 나타나며 안양동계곡 건너에 굴이 있다. '류정승(柳靑臣) 피난 굴'이었다.
10살의 류 도령이 난을 피해 굴에 살 제 겁탈하려는 왜구에 맞서 어머니를 지켜내니 왜구도 그 효심에 감동해 스스로 물러났다네. 고려 말 어진 정승이었던 류청신(柳淸臣)의 어렸을 때의 이러한 효행이 나라에 알려지자 조정은 그 갸륵한 효를 기려 정려(旌閭)를 내렸다. 유청신은 자라서 과거에 급제하여 29번이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니면서 나라에 공을 세웠다. 어려부터 배운 몽고어가 능통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유정승의 공을 기려 고흥군(高興君)에 봉하고 장승현에 속하였던 그의 출생지 고이부곡(高伊部曲)을 승격시켜 그의 봉작의 이름을 따서 고흥현(高興縣)으로 관명을 바꾸어 주어 오늘날의 고흥(高興)의 이름을 있게 한 분이다. 그러나 아뿔싸, 그분은 용두사미(龍頭蛇尾) 인생을 살아서, 원(元) 나라에 아첨하며 고려에 반역하다가 고국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73세 고령으로 원 나라에서 객사한 불행한 재상이기도 한 분이다. 벼르고 벼르던 고흥의 팔영산 등산을 마치고 고흥군의 어원과 능가사의 어원을 밝힌 것에 지금 나는 무지 행복하다. 팔영산의 아름다움과 안전 산행을 위해 배려하며 쏟은 고흥사람들의 정성에 감동한 마음으로 한 동안 이렇게 묻고 다닐 것 같다. "제가 어느 산에 다녀왔는지 물어 줄 수 있어요?"
-2006년 3월
금오산(金烏山, 976m)
금오산(金烏山)은 경북 구미시 남서쪽 8km 지점에 있는 금릉군, 칠곡군의 경계에 솟아 있는 이 일대에서는 제일 높은 기암괴석의 험난한 976m의 산이다.
‘금오산(金烏山)’이란 이름의 산으로는 여수 돌산 향일암(向日庵)의 금오산(金鰲山, 323m)도 있고, 경남 하동 금오산(849m)이나 대중가요 ‘신라의 달밤’에 나오는 경주 금오산(金鰲山458m)도 있지만 나는 구미의 ‘금오산도립공원(金烏山道立公園, 976m)’ 을 향하여 가고 있다.
그런데 구미의 금오산은 다른 산과 달리 한자로 ‘金鰲山’이 아닌 ‘金烏山’이라 쓴다.
금오산이라 이름은 중국 진(晉)나라 아도(阿道) 스님이 신라에 와서 이곳을 지나다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 빛 까마귀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金烏山)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名山)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오악(五嶽) 중 하나인 숭산(崇山)과 비슷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하고 문종(文宗)은 왕자를 출가시켜 이 산에서 수도(修道)하게 하였는데, 그 왕자가 바로 대각국사(大覺國師)였다.
이외에도 금오산은 남성적인 기백의 골산(骨山)으로 기암괴석(奇巖怪石)의 암석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하였고,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이 숨어 충절을 지킨 곳이 중국의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와 비슷하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외에서 ‘필봉(筆峯)’, ‘귀봉(貴峯)’, ‘거인산(巨人山)’, ‘와불산(臥佛山)’, ‘노적봉(露積峯) ’등 각기 유래를 가진 이름이 많다.
*. 어쩌면 나의 마지막 고산(高山) 산행이 될 금오산
내가 처음으로 산에 오른 것은 1962년 ~ 63년 가을 강릉상업고등학교(현 강릉 제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때 학생들을 인솔하고 오대산과 소금강에 수학여행 갔을 꽃다운 27~8세의 젊은 시절이었다.
교직이란 여름, 겨울, 봄방학에다가 공휴일을 합치면 1년 중 1/3 이상을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이라서 다른 직장인들보다 많은 여행과 산을 다닐 수가 있었다.
그래서 60넘어 문단에 등단(登壇)하여서 작가의 길을 가던 중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1년 중 1/4은 여행을 다녔고요,
2/4는 그 글을 쓰며 살았네요.
나머지 1/4은요
막걸리 마시며 살았지요.
-개팔자
그렇게 해서 전국의 산을 찾아다니다가 2010년 발간한 책이 ‘국립공원 산행’이란 책자였다.
이제 산수(傘壽) 나이가 되고 보니 그 후속 편으로 ‘도립공원산행’ 책자를 발간하여 스스로 기념하고자 별러 왔는데 그동안 쓴 도립공원 25 여 편 중에 대구의 팔공산과 구미의 금오산도립공원이 빠졌다.
그래서 10일 전에 팔공산도립공원을 다녀와서 확인한 것은 남들의 4시간 코스를 나는 11시간을 걸려서 등산을 해야 하는 나약한 나의 체력이었다. 팔공산을 다녀온 후 그동안 아팠던 왼쪽 다리 관절이 더욱 심하게 아파 물리치료를 받으러 어제까지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젊어서는 마음이 이 몸을 부리더니
늙다리 이 몸을 마음이 부려먹네
오기(傲氣)로
내 마음이 노구(老軀) 부리니
남는 것은 골병뿐이구나.
-늙다리
그래서 서울서 KTX를 타고 구미에 가서 당일치기로 금오산도립공원(金烏山道立公園, 975m) 산행할 수 있는 것을 여유롭게 구미시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일찍부터 쉬엄쉬엄 산행을 하기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주머니와 상의 끝에 무궁화호(12,100원) 열차를 타고 와서 찜질방(9,000원)을 찾아서 1박 하려는 계획이다.
그래서 나의 고산(高山) 산행은 산행을 시작한 지 55년만에 이번을 마지막으로 접어야 할 것 같다. 이젠 몸이 시키는 대로 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금오산도립공원(金烏山道立公園)(2)
“이제 더 이상 무리를 하다가 걷지를 못하게 되면 어쩌려고.” 하며 만류하는 아내를 뿌리치고 이제 나는 홀로 금오산 주차장에 와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길 같이, 금오산을 오르는 코스도 여럿이 있다.
이를 금오산 관광안내도에서는 4코스로 말하고 있다.1코스: 주등산로: 금오상가 주차장-케이불카 타는 곳-해운사-명금폭포-정상
2코스: 금오상가 주차장-케이불카 타는 곳-해운사- 명금폭포- 성안- 정상
3코스: 금오상가주차장- 법성사- 약사암- 정상
4코스: 경북환경연수원-취영정-칼다봉-성안- 정상
그런데 나는 상가주차장에 너무 이른 시간인 7시경에 도착한지라 케이불카는 물론 매표소도 굳게 닫쳐있어 안내도를 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1코스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2005년 11월 1일~2016년 5월 20일까지 등산로 폐쇄 구간이었다.
안내도 없는 단독등반이란 이정표만 따라 가야 하는 산행이라서 꼭 가보아야 할 곳을 놓지기 싶상이다. 그러나 금오산의 이정표는 어느 산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해서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이번까지의 두 번의 금오산 산행에서 얻은 나의 이상적인 금오산 등산 코스로는 다음과 같다.
매표소-케이불카-금오산성- 대혜문- 해운사- 명금폭포-할딱고개- 정상/성안 갈림길- 금오정- 성안- 정상- 약사사- 마애보살입상- 오형탑- 할딱고개- 명금폭포- 케이불카 - 채미정- 대중버스/택시- 구미역
매표소를 지나 금오산 산행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자연보호발상지비'다. 금오산은 한국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였다.
-1971년 9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 명금폭포에 도착하였을 때 깨어진 병 조각과 휴지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박대통령은 "자! 우리 청소 작업부터 하자."고 말하면서 바위 틈에 박힌 유리병 조각을 일일이 주웠다. 이것이 자연보호운동으로 이어져서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캐이불카는 내려 올 때 타기로 하고 직진하다 보니 나무층계가 시작되는 오름 길에 원추형 돌탑군이 많았다. 새천년인 2000년을 맞아 금오산 정기가 온 누리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34만(현 45만)시민의 뜻을 모아 금오산 오르는 길목에 세운 돌탑 21기들이었다. 21은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금오산성(金烏山城, 경북기념물 제67-1호)
거기서 얼마 안간 위치(관리소에서 0.6km)에 커다란 산성문(山城門)이 나를 굽어보고 있다. 금오산성의 외성인 '大惠門'(대혜문)이었다. 산성(山城)이란 적을 막기 위해서 산세(山勢) 따라 쌓은 성(城)을 말한다.
금오산성의 내성(內城)은 정상부에 테를 두른 모양으로 쌓았다는데 둘레가 2.326m, 높이가 2.1m로 험한 절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았다. 외성(外城)은 1.253m, 높이가 4.2m 계곡을 감쌌는데 내· 외 성벽의 길이는 6.3㎞나 된다.
평상시에는 군창(軍倉)에다 곡식과 무기를 두었다가 전쟁이 나면 주민들을 모두 산성에 들어오게 하여 군인과 함께 농성(籠城)하는 것이다. 산성은 적으로 하여금 많은 힘을 기울여 공격하게 하고 아군은 적을 내려다보며 수성(守城)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이 되게 하려고 쌓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는 약 1,200여개의 산성 터가 있는 모양이다. 이 모두 왜놈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함이었다.
*. 대혜폭포(大惠瀑布)
산성을 지나 오르다 보니 ‘영흥정(靈興井)’이란 멋진 약수터가 있다. 지하 168m의 암반층에서 솟아나는 양질의 지하수다. 절수를 위해서 사람이 다가서면 물이 나오는 식으로 구미시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약수터였다.
그 영흥정 약수터 바로 위 천인절벽을 뒤로 하고 있는 절이 구름도 쉬어간다는 ‘ 해운사(海雲寺)’였다.
'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이 절은 금오산의 북쪽에 신라말 고승 도선(道詵)대사가 대혈사(大穴寺)라는 절을 창건(서기 827〜898)하였다 한다. 그 절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린 것을 1925년 4월 20일 대혜폭포 북서쪽 언덕에 철화스님이 해운사(海雲寺)란 이름으로 지금 같이 복원하여 창건한 절이다.
등산길 가에 이층 누각으로 멋지게 서 있는 해운사의 범종각이 발길을 붙든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니 거기가 금오산의 명물 ‘대혜폭포’였다.
-대혜폭포(大惠瀑布)는 해발 400m 지점에 위치한 27m의 수직 폭포다. 그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금(金)오산을 울린다[鳴] 하여 '명금폭포(鳴金瀑布)'라고도 한다. 이 폭포는 금오산 정상 부근에 있는 고원분지에서 발원하여 남북 방향의 계곡 따라 흘러 내려서 이 고장 관개(灌漑)의 유일한 수자원이 되어 농사에 큰[大]은혜(惠)을 주는 골(谷)이라하여 골짜기 이름을 '대혜골(大惠골)', 폭포 이름을 '대혜폭포(大惠瀑布)'라 한 것이다. 이 폭포는 그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서 '경북 8경' 또는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폭포는 여름 장마철을 빼고는 수량이 적은 것이 흠이다.
대혜폭포에서 0.1km를 오르니 '2.2km정상/도선굴 0.2km' 이정표가 있다. 신라 말의 풍수지리에 능한 도선(道詵)대사와 고려 충신 야은 길재(吉再)선생이 금오산 이 동굴레서 숨어 수도하였다는 천연동굴이라서 야은굴(冶隱窟)이라고도 하는 굴이다.
금오산 입구에 채미정(採薇亭, 지방기념물 제55호)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길재(1353~1419)의 학문과 충절을 기려 이를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 44년에 건립한 정자다.
채미(採薇)란 말은 고사리를 캔다는 말로 은(殷)나라의 충신 백이, 숙제(伯夷叔齊) 형제가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 나라를 치려는 것을 막다가 듣지 않자 주(周) 나라의 곡식 먹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 정자 명을 ‘채미정(採薇亭)’이라 한 것은 성삼문(成三問)의 다음과 같은 시조를 생각하고 지은 정자 이름 같다.
首陽山 바라보며 夷齊를 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에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더니
지루한 나무층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바닥을 폐 자동차 다이야를 잘라 깔아서 걷기에 편하였지만 끝없이 계속되는 층계가 몸을 지치게 하였다. 금오산 등반 코스 중에 가장 숨이 찬 지점이라해서 예로부터 이 고개를 '할딱고개'라 불렀다는 정상까지의 1단계 지점이라는데 내 체력에는 할딱고개보다 '헐떡고개'란 표현이 더 맞는 말 같다.
비로소 뒤돌아보는 전망이 있다.
대혜폭포, 대혜골이 만든 금오저수지도 보인다.
보통 산 같으면 이쯤해서 능선이 나타나련만 헐떡고개 보다 더 걷기 어려운 돌길이 계속되고 있더니 이정표가 보인다.
'정상, 약사암0.9km/성안0.8km/0.6km마애석불' 나는 망설임없이 정상코스로 향하였으나 정상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성안'인 것을 내 어찌 모르랴.
*. '성안' 이야기
성안이란 내성(內城)이란 뜻으로 낙안읍성이나 남한산성처럼 '성안 마을'을 말한다.
금오산 정상(頂上)에서 서남쪽으로 800m 정도 내려가면 해발 800m 지점에 고위평탄(高位平坦)한 넓은 분지(盆地)가 나타난다.
왜구가 가장 극성을 부리던 고려 시대에는 금오산 부근의 선산· 인동· 개령· 성주 백성들이 난리가 나면 피난 오던 곳이 바로 '성안 마을'로 이를 산성취락(山城聚落)이라 한다. 왜구가 처들어오면 백성들은 관군과 함께 왜구에 맞서 성을 지켰으며, 평상시에는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한 군창(軍倉)을 두었다.
옛부터 금오 성안마을에는 9정 7택(九井七澤)이라 하여 금오정(金烏井)을 비롯한 9 개의 우물과 7개의 못이 있어서 산 아래 마을 사람들보다 가뭄이 들더라도 오히려 물 걱정이 적었다 한다. 성 안에는 고종 5년(1868) 무렵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금오산성 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있다 하는데 성안 마을은 요즈음 등산 통제 구역이니 오늘은 생략해야 할 것 같다. 금오산이 한국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여기서 살던 7~8 가구가 있었다고 한다.
*.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峰)과 약사사(藥師寺)
산의 정상은 선착객들의 두런두런 소리와 함께 가까와 지는 법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오르다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아내와 정형외과 의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남들이 2시간이면 오를 정상을 6시간 이상을 기진맥진하며 쉬엄쉬엄 올라왔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걸음은 거북이 걸음이 아니라 달팽이 걸음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이 산의 등반이 끝나고 그 산행기를 쓰면 나의 '한국도립공원 산행기'의 편집에 들어간다. 그런 내 나름대로의 꿈에 십여 년 전부터 아픈 무릎을 무릅쓰고 도립공원을 찾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만약 건강상의 불행이 닥쳐와도 나는 오늘을 후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리고 이젠 고산(高山) 산행은 멈춰야겠다. 그러니까 이 산이 55년 간 나의 산행의 마지막 산행이 되는 산이 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는 백두산 종주를 위시하여 작년에는 5.000 계단을 걸어 태산(泰山, 1,945m)에 올랐고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덕유산 등을 목숨을 걸고 70을 넘긴 나이로 단독 종주하였다. 그런 모험으로 '국립공원 산행기'를 발간할 수 있었더니, 이젠 30여개의 한국도립공원 산행을 마치고 이를 책자로 엮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지금 무지 행복하다.
금오산 정상 바로 아래는 커다란 광장이 있다. 핼기장이다. 거기서 나보다 먼저 오른 선착객들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시장기가 도는구나.
20여 년 전에 왔을 때는 정상은 엄두도 못내고 약사사만 들렸었다. 1953년 한미행정협정에 의해 미군통신기지가 정상 일원에 설치되고, 그 이후부터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다가 작년 2014년 10월 현월봉 정상 부분의 일부분을 미군 측으로부터 반환받았다.
그래서 등산객들은 약사암까지만 다녀오던 것을 이제는 정상 현월봉(懸月峰)에 서서 사방을 굽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상석은 걸 '懸', 달 '月'의 '懸月峰'이니 달이 봉우리에 달려 있다는 말로 산이 그만큼 높다는 표현일 것이다.
지금은 12월 중순 멀지 않아서 병신년(丙申年) 새해가 오면 나는 산수(傘壽)의 나이를 맞는다. 그러다 보니 허탈한 마음이 되어 금오산 현월봉에서 나의 벗들에게 새해 연하장으로 졸시(拙詩) 한 수를 보내고 싶다.
머리가 희었다 검었다.
안경을 썼다 벗었다.
이빨을 꼈다 뺐다.
무릎이 아팠다 또 아팠다
반복 되는 나이가
또 한 해를 보내고 맞습니다.
벗들이여!
그래도 부디 금년 같이만 새해를 사소서.
새해를 금년 같이 사는 것이
우리들 늙다리의 축복이니까요.
-세모에서
*. 약사암(藥師庵)
약사암 둘어가는 '東國第一門'(동국제일문)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름답다.
그 문을 몇 발자국 들어서 굽어보니 산너머 산들의 산파(山波)가 사이사이 도시를 품고 있는 것이 세상도 무릉도원(武陵桃園) 같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여길 두고 생긴 말 같이 아름다왔다.
너무 위험해서인가 속인을 꺼리서일까. 문이 굳게 닫쳐 있는 종각(鐘閣)까지의 구름다리는 천국에 이르는 길 같다.
이 약사암(藥師庵)은 금오산에서 가장 오랜 고찰(古刹)로 약사봉(藥師峰, 958m) 아래 너럭바위 위에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지리산 석불삼구(石佛三軀) 중 일구가 현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그 약사여래는 수도산 수도암, 황학산 삼성암의 약사불과 함께 3 형제불로도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이 암자 동쪽 암벽에 약수가 용출하고 있다는데 옛날에는 쌀이 한 톨씩 떨어져 나왔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그래서 이 절은 옛부터 참선 도량(參禪道場)으로 이름이 난 절이다.
그런데 이정표에서 말하는 '마애보살 입상'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이정표 따라 약사암을 에돌아 휘돌다 보니 마애석불 가는 하산길이 나타난다.
신비로운 약사보살좌상을 봉안하고 있다는 법성사(法城寺) 가는 3코스로 내려오다가 보니 리본이 닥지닥지 열린 것이 혹시나 여기가 마애석불인가 했더니 역시나 맞다. 금오산마애보살입상(金烏山磨崖普薩立像, 보물 제490호)이었다.
금오산 마애보살입상(金烏山磨崖普薩立像, 보물 제490호)은 금오산 정상 북쪽 아래 자연암벽에 조각된 높이 5.5m의 석불입상이다. 불상은 특이하게도 자연 암벽의 돌출 부분을 이용하여 좌우를 나누어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다.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면서도 부피감이 있으며 가는 눈, 작은 입 등에서 신라보살상보다는 다소 진전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일선지(一善志)’ 문헌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는 보봉사(普峰寺)란 절이 있다 하였는데 지금은 무속인의 것으로 보이는 불구가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어 귀한 불상 보물이 푸대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하산길에 '오형돌탑'만 보면 오늘의 일정은 마치는구나 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오형돌탑'에서 '오형'은 무슨 뜻일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 건너에 핼기장 같은 넓은 암반이 있고 거기에 수없이 많은 원추형 돌탑이 서있다. 기대 이상으로 찬란한 광경이었다.
산에 가서 만난 돌탑으로는 치악산(雉岳山) 정상과, 마이산(馬耳山) 탑사에서였는데 그 유래담이 신비하듯이 이 ‘오형돌탑’에도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전자는 원주시에 사는 과자장수 용진수 씨가 산신령의 현몽(顯夢)을 받아 쌓았다는 세 미륵탑이요, 후자는 마이산 기슭 탑사에 100년 전 이갑룡 처사가 10년에 걸쳐 쌓았다는 80여 개 돌탑같이 그 신비로운 탑들이다.
-구미시에 사는 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두었는데 손자 '형석'이는 불치의 병인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태나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였다. 학교라고는 단 하루밖에 다니지 못하였고 시름시름 앓다가 10살이 되던 해 패혈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탑들은 그 손자를 위해 할아버지의 못다한 사랑을 9년 동안 금오산 곳곳에 돌탑을 세워 손자를 추모한 것이라 한다. 오형탑(烏亨塔)이란 금오산의 '오(烏)'자와 손주의 이름에 '형(亨)'자를 따서 '오형돌탑(烏亨石塔)'이라 한 것이라 한다.
탑 중에 지은이가 써놓은 '오형돌탑'이란 글이 발길을 붙잡는다. 살아 생전 손자 형석을 '석아, 석아'로 부르며 먼저 간 손자를 화장하여 낙동강에 그 재를 띠우며 울부짓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이 글에서 읽을 수가 있다.
큰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
차곡차곡 등에 업고 돌탑으로 태어나서
떨어질까 무너질까 잡아주고 받쳐 주어
비바람을 이불 삼아, 산님들을 친구 삼아
깨어지고 부서져서, 모래알이 될 때까지
잘 가라 띄워 보낸, 낙동강을 굽어보며
못다한 너를 위해 세월을 울고 싶다.
석아!
-오형돌탑이 오형돌탑을 살펴보면 돌을 쌓은 이가 약간은 장난기가 있는 것 같다. 탑이 그냥 탑이 아니라 탑 위나 탑 속 에 불상이 있는가 하면 탑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새나 짐승 등 갖가지 물형(物形)이 있다. 원추형도 있고 정식 탑 모양의 것도 있다. 태극기도 있고 우주 여인 이소연의 우주여행 로켓도 보이니 말이다.
이제 오형돌탑은 금오산의 명승지가 되었으니 이 탑도 마이산의 탑사처럼 영원히 무너지지 않게 시(市)에서 관리하도록 부탁하고 싶다.
금오산을 오르다 보면 이정표가 세 가지종류로 나타난다.
하나는 방향과 거리를 가리키는 보통의 이정표요, 또 하나는 네모진 기둥에 현재 위치를 가르쳐 주며 해발 몇 m인가까지를 친절히 가르쳐 주는 것이요, 또 하나는 '119 쏠라 표시등'으로 금오산에서만 보는 것이다. 이는 낮에는 햇빛에 충전되고 밤에는 점멸하는 야간 조난 방지 등이다. 이 고장 구미의 금오산을 찾아오는 등산객과 관광객의 안전을 위한 배려이니 이 얼마나 구체적인 겨레 사랑인가. 이 얼마나 훌륭한 고장 사랑인가. 구미 시민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오형탑을 쌓은 분도 그런 마음의 사람인 것 같다.
오형탑에서 100m 정도 내려가니 주등산로인 아침에 올라왔던 폭포 가는 길이 나타난다. 할딱고개로 해서 해운사 옆에 케이블카로 내려 가서 이를 타고 내려 왔다.
금오산 케이블카(cable-car)는 1974년 9월에 개통되었은데 15분 간격으로 운행구간이 금오산 주차장에서 대혜폭포까지 805m 거리를 운영하는데 6분 30초가 걸렸다. 폭포까지만 가려는 관광객의 이용을 위해 만든 것 같아 등산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거리였다. 운행은 아침9시부터 일몰시(하절기19:30, 동절기17:30)까지라 한다.
문경 새재 이야기 2016.1.1 수정
*. 문경 새재 이야기 제1관문관리소→ 선비상 신길원현감비(0.2km) →옛길박물관(0.3km) → 영남 제1관 · 타임캡슐 (1km) → 선정비군(0.6km) → 문경새재오픈세트 장(0.9km) → 조산(1.4km) → 지름틀바위(1.6km) → 조령원터(1.8km) → 마당바위 · 상처난소나무 (2.1km) → 주막(2.4km) → 용추 · 교귀정(2.6km) → 꾸구리바위(2.8km) → 소원성취탑→ 산불됴심비(3.2km)→조곡폭포(3.3km)→ 영남제2 관 · 조곡약수(3.5km)→ 문경새재아리랑비 (4.1km)→ 이진터(4.7km)→ 동화원(5.8km) → 장 원급제길(6.5km) → 영남제3관(7.0 km) · 조령약 수 -이상 ‘문경새재’ 책자 참고(문경새재관리 사무소)
*. 제2관문 가는 길 문경새재 길은 기차나 버스가 없던 시절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같은 길이었다. 그 길은 말을 타지 않는 경우에는 모두 걷는 길이어서 길가 곳곳에 전하는 옛 조상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조상들의 삶과 얼이 어울려 있는 길이 되었다.
-문경새재오픈 세트장: 초곡천 냇가 길 따라 평탄한 황톳길을 오르다 보니 2000년 문경시와 KBS가 문경새재 용사골에 조성한 ‘문경새재오픈 세트장’이 있다. 여기가‘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등의 TV 드라마를 촬영하였다는 곳이다. 들어가 보니 ‘대왕세종’, ‘제중원’, ‘추노’ 등을 촬영하기 위해서 조선시대 경복궁, 동궁, 사대부집, 저잣거리 성문 등 130여 동의 세트장등을 조성해 놓았다. 그 산 위에는 ‘일지매 산채’도 있었다. 왕건교로 나가 다시 제2관문을 향하는데 초가지붕을 멋지게 휘어 네 기둥이 받치고 있는 정자 옆에 돌로 쌓은 산 같은 탑이 있다. 조산(造山)이었다.
-조산(造山) : 조산이란 마을 입구나 마을 경계지점이 풍수 지리적으로 볼 때 허하거나 취약하다고 생각될 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서 그 안전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산을 말한다. 이를 문경 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이라고 한다. 거기서 1.6km를 가니 길가에 길쭉한 막대 바위가 길가를 향하여 벋어 있다. ‘지름틀바위’였다.
-지름틀바위: ‘지름틀’이란 ‘기름틀’의 경상도 방언이다.참깨 · 들깨 · 콩 등을 볶아서 떡밥을 만들어 보자기에 싸고 이것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짤 때 쓰는 기름틀의 누름틀처럼 생겼다 해서 ‘지름틀바우’라고 하는 것이다.
-원터(院址): 거기서 1.6km 올라 해발 280m 지점에 원터가 보인다. 원(院)이란 고려와 조선조에 공무여행자인 관리나 상인들에게 숙식의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공공여관이다. 서울의 이태원도 옛날의 그 원(院)의 하나였다.조선 후기에는 주막(酒幕) 또는 주점(酒店)이 원(院)를 대신하였다. 옛날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먹으면 음식 값 외에는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대신 침구를 따로 제공하지 않았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아랫목을 차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래서 대문 가까이 있는 널찍한 방에서는 10여 명씩 혼숙하며 갖가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문경 새재 길에는 그런 역(驛)이 5, 주막(酒幕)으로는 초곡 주막, 돌고개주막, 달지주막 등이 고개와 나루 주변에 있었다.
-무주암(無主岩): 누구든지 올라가 쉬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무주암을 지난다. 옛날에 이 무주암 아래에 무인주점(無人酒店)이 있어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어서 길손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의 술값을 알아서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는 운치 있는 바위다. 조령산(1.017m) 입구를 지난다. 여기서 조령산까지는 3km로 1시간 50분의 거리인 모양이다. 교귀정(交龜亭, 해발 318m)이 가까워 오는지 길 양쪽으로 이 길을 지난 시인묵객들의 멋진 한시가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교귀정(交龜亭 해발 318m): 교귀(交龜)란 감사, 병사, 수사가 바뀔 때 부신(符信)을 넘겨주고 받고 하던 곳으로 이곳 교귀정에서는 신구(新舊)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인계인수를 하던 곳이었다.
그 팔작지붕의 건물도 고풍스럽지만 교구정 앞의 소나무가 더 멋있다. 뿌리가 교구정을 향하여 뻗어 있고, 길손이 쉬어 갈 수 있도록 가지를 남쪽 길가를 향하여 늘어뜨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무희가 춤을 추는 듯 하여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다. 아름다움도 친구가 있는가.바로 앞에 용추(龍湫) 계곡과 용담(龍潭)이 있어 계곡을 내려가니 얼음처럼 찬 계곡물이 따가울 정도의 맹하(孟夏)의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데 주위에는 이를 노래한 선인들의 발자취가 비석의 한시로 요란하다. 嶺分南北與東西 영분남북여동서路入靑山縹渺 노입청산표묘 蝽好嶺南歸不得 춘호영남귀부득 鷓鴣碲晝五更風 자고제주오경풍 -踰鳥嶺宿村家(유조령숙촌가)/ 김시습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굽이굽이 청산 길에 고향을 멀리 두고계곡물 우는 소리에 한 밤을 지세네 -조령원에서/ ilman 시조 역
-새우재: 오름길 오른쪽에 바위굴이 있다. 이곳은 옛날에는 새우재라는 고개였다는데 옛 나그네의 낭만어린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옛날 이곳 새우재를 지나다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를 긋기 위해 굴에 들어가 만난 청춘 남녀가 있었다. 둘이는 깊은 인연을 거시기로 맺고 기약 없이 헤어진 후 처녀는 그만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말았다. 항상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으며 자라던 아들이 어머니를 졸라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 한 검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정처 없이 다니던 아들이 산골 어느 주막에 들렀더니 소나기가 갑자기 내리는 것이었다. 그때 함께 유하던 중년의 선비가 하는 말하는 것이었다. “어허, 그 빗줄기가 마치 새우재 소나기 같구나!” 아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자 중년 선비가 어머니에게서 들은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라 마침내 부자지간을 확인하고 함께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 새우재 굴에 함께 들어가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더 깊어져 평생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해로할 수 있다고 한다. -귀틀집 : 귀틀집이란 통나무 귀를 우물 ‘井’ 자 모양으로 층층이 얹고 그 빈틈만 흙으로 메워 지은 집을 말한다.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문화재로 남아 있는 귀틀집이 그 예다. 자연을 소재로 하였기 때문에 보온성, 습기조절, 삼림욕에 좋아서 현대에 와서는 웰빙 주택으로 각광받고 있는 집인데 그 귀틀집이 새재 계곡 바로 옆에 있다. 널찍한 마당, 사립문과 그 울타리 그리고 일자(一字) 집과 장독, 통나무 의자 등이 옛날을 찾아온 듯 한 착각을 일게 한다. -꾸구리바위: 새재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었다. 이 바위에 사람이 앉아 있으면 꾸구리가 바위를 움직인다고 하였다. 그뿐인가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도 하였다고 한다. 꾸구리는 한강 수계의 돌이 많은 여울에 사는 6~10cm의 토종 물고기로 잰 움직임 때문에 생긴 과장된 전설 같다.
-소원성취탑: 옛날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정성껏 한 개의 돌이라도 이곳에 쌓고 가면, 선비는 장원급제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살이 찌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게 소원 성취하여 주는 탑이라 한다.
-산불됴심 표석'(경북문화재자료 제226호): 조령 '산불됴심'이 국문학도인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157cm 크기의 이 표석은 행인의 발길이 잦은 이곳의 길손들에게 산불예방은 물론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이 산불됴심 표석은 그 자체보다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한 순수 한글로 인하여 그 가치가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자 전용 시대에 한글로 쓴 이 한글 표석은 이 고개를 넘던 이들이 선비 같은 양반들보다 서민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준다. 그 옛글자로서 한글비가 쓰인 연대도 유추해 볼 수도 있게 한다.
'됴심→죠심→조심'에서, '됴심→ 죠심'은 18세기 이후에 생긴 구개음화현상이요, '죠심→ 조심'은 19세기 이후에 생긴 단모음화 현상이기 때문에 이 표석은 18세기 이전의 표석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재까지 고어로 된 한글비석은 우리나라에 4점이 전하여 오는데 여기 것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이라서 조령산 ‘산불됴심 표지’석은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옛 비석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조곡폭포(鳥谷瀑布): 산불됴심비에서 200m를 올라가면 45m 높이의 3단 폭포가 있다. 비가 온지 오래서인가 폭포 같지 않은 폭포지만 인공폭포라니 비 오지 않은 날 지나가는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 제2관문(鳥谷關門)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왜군을 조령(鳥嶺)에서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조령(鳥嶺)은 좌(左)로는 조령산(1,017m), 능곡산(572m), 백화산(1,064m) 등과 우(右)로는 마패봉(925m), 부봉(917m), 주흘산(1,106m)으로 이어진 산악지대인데다가 좌우가 다 절벽으로 소수의 병력으로도 대군(大軍)을 막을 수 있는 전략상 천혜의 요충 지대였기 때문이다. 이 조령이 뚫리면 충주부터는 한양으로 통하는 일사천리(一瀉千里)의 뱃길이라 문경새재는 나라의 관문과 같았다. 그런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적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임란 후 조정에서는 왜란 때 공을 세운 충주에 사는 의병대장 신충원을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하여 성을 쌓게 하였으니 그것이 제2관문 조곡관이었다. 그 뒤 문경새재의 세 고개에 관(關)을 지었으니 제3관문 조령관, 응암고개에 제2관문 조곡관, 초곡(草谷)에 제1관문 주흘관을 지은 것으로 사적 제147호로 기념하고 있다. 여기는 제2관문 조곡관(해발 380m)으로 제1관문에서 3km를 온 거리요, 제3관문 조령관까지는 3.5km로 꼭 문경새재의 중간 지점이다. 이제부터는 제3관문 조령관을 향하여 가는 길이다. -부봉(斧峰, 916m): 이 개울을 넘어 2.5km/1시간 20을 가면 부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그 표석 이정표가 나를 유혹한다. 백두대간이 포암산과 하늘재를 지나 문경새재에 접어들면서 주흘산과 부봉의 6개 봉을 만들어 놓고 조령산을 지나 이화령까지 주능선이 이어 진다고-. 그 6개 봉우리 높이가 916m부터 933m가 된다. 그 등산로 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능선과 멀리서 보는 문경새재와 그 계곡을 보지 않고 그냥 가겠느냐고 꼬여 대지만 함께 가는 일행과, 차를 가지고 반대편 관문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는 고마운 H 형이 있으니 이정표로나 챙기며 기약 없는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구나. 제3문 조곡관→ 6봉잘록이(20분)→ 6봉(40분)→ 동화원(40분) →제3문 조곡관 /총 2시간 40분그래서 바로 그 옆에 있는 ‘문경새재 아리랑비’의 아리랑 노래나 부르며 갈 수밖에-. 문경 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넘어를 갈 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문경새재 아리랑비
-이진터(二陳趾,해발 475m): 일제강점기 말기에 에너지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송진을 체취하여 갈 때의 흉하게 상처가 난 소나무 길을 지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난다. '임진왜란 때 실패한 왜놈들이 조선 점령을 드디어 성공한 것이 일제 강점기 36년간이었구나.' 이진터(해발475m, 2陣터)는 제1관문에서부터는 4.4km, 제2관문에서는1.4km 지점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왕은 야인(野人)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신립 장군을 삼도도순변사 (三道 都 巡邊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신립 장군은 농민군 8,000명을 이끌고 문경에 내려와서 제1진을 제1관문에, 제2진을 이곳에 설치하였던 곳이라서 이진터(二陣址)라 하는 곳이다. 왜장 유니나가(小西行長)가 18,0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정탐할 때였다. 함께 조정에서 내려온 김여물과 패전하여 온 이일 장군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천혜의 요충지로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방어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신립 장군은 그의 거친 성격에다가 왕년에 그의 철기(鐵騎)로 야인을 무찌르던 것을 과신하고 그 충언을 듣지 않았다. 농민군은 전투에 경험이 없는 농군이라 여차하면 탈영을 하는 자가 많아서 사지(死地)에 갔다 놔야 결사 항전할 것이라는 것이 신립 장군의 오판(誤判)이었다. 신립장군은 충주 달천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가 중과부적으로 그만 패전하고 부하들과 함께 남한강 달천 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지만, 그의 고집으로 인하여 한양을 빼앗겨 선조는 신의주까지 몽진하여야 했고 죄 없는 수많은 충주 시민도 죽어갔다. 새재에서 퇴진하면서 신립장군은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 달천(탄금대)에 배수진을 쳐 놓았다. 왜군 초병이 정탐하러 와서 보니 조선초병이 지키고 있었는데 아뿔싸!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천혜의 요새를 넘었다는 그 역사적인 비극의 장소가 바로 새재다. 이와 연관된 여자를 유난히 좋아하였다는 신립 장군에게 이런 일화도 전해 온다.새재에 진을 칠까, 아니면 탄천에 배수진을 칠까 망설이던 신립 장군의 꿈에 소싯적 장군을 사모하다가 원한을 품고 자결한 처녀의 원귀기 나타나 권하는 것이었다.“신 장군님, 대명을 받들어 왜적을 격멸하러 오셔서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려 하시나이까. 생각하신 대로 충청도 달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시면 크게 대승리리다.” -책바위 이야기(소원성취탑) -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하늘에 지성을 올려 낳은 늦둥이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자라면서 몸이 너무나 허약하여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 부모가 유명하다는 도사가 문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물었더니 도사가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었다.“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어 그런 것이니 아들을 시켜 그 담을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 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시라.”이후 아들은 자기 집 돌담을 헐어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다 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지고 그로부터 학문도 열심히 닦아 장원급제까지 하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이 소원성취탑의 장소로 알려지면서 이 길을 지나는 많은 과객들이 일부러 찾아와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곳이 되었다. 지금도 입시철이 되면 자녀들의 소원성치를 비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책바위를 보고자 하거든 '낙동강 발원지' 이정표에서 잘 다듬어진 황토흙길을 버리고 오솔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 오솔길도 역시 제3관문으로 가는 길이다. 이 새재 길은 황톳길이라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문경시 당국에서는 그 길이 훼손될 경우 복원을 위해서 곳곳에 흙을 산더미처럼 미리 준비해 둔 곳이 많았다.
-장원급제 길 : 영남 선비들은 물론 전국의 선비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장원급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는 고려 광종(958년)부터 갑오경장(1894년)까지 936년간 벼슬아치를 뽑던 시험이다. 과거에는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잡과란 역과(譯科)(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천문학, 지리학 등) 율과(律科)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문과에는 갑과(甲科) 을과(乙科) 병과(丙科)가 있어 각과에 33명씩을 선발하였다. 장원급제(壯元及第)란 문과의 갑과에 첫째로 뽑힌 급제를 말한다. 급제자가 선발되면 국왕은 문무과의 급제자에게 종이로 만든 꽃인 어사화(御史花)와 왕을 만날 때 쥐는 홀(笏)과 술과 과일을 하사하고 은영연(恩榮宴)이라는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다음 날에는 모든 급제자들이 문과 장원 급제자의 집에 모여 공자를 모신 문묘에 가서 알성례(謁聖禮)를 올렸다. 그 후 삼일유가(三日遊街)라 하여 친지(親知)를 불러 잔치를 하거나 선배(先輩)의 집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거나, 시관(試官)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이라는 축하연을 열기도 하였다. 금의환향(錦衣還鄕) 길에는 악사들이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연주하며 고향을 향하였다. 고향에 도착하면 그곳 수령(首領)과 향리(鄕吏)들의 환영을 받았다. 향교(鄕校)에서 알성례(謁聖禮)를 올리고 나면, 수령이 급제자와 그 부모를 불러 주연을 베푸는 그야말로 장원급제의 찬란한 금의환향 길이었다. 우리가 보통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라 하는 것은 소과(小科)에 합격한 유생으로 대과의 예비시험으로 지방에서도 실시하는 과거의 초시(初試)였다. *. 제3관문 조령/문경새재 드디어 ‘문경3관문’(영남 제3관, 해발 650m)에 이르니 감개가 무량하다. 생각해 보니 제1관문 주흘관이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한 제1관문이라면, 제3관문 조령관은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한 성문이다. 제3관문은 수안보나 충주 방향에서 온 여행객에게 여기가 시발점이라서 문루도 성곽도 그렇지만 주위에 많은 한시와 ‘과거길’, ‘선비상’과 ‘문경새재안내도’와 ‘문경새재 과거 길’이란 표석과 조선 숙종 (1708년) 조령성 구축 시 새재 정상에서 발견 되었다는 ‘백수영천(百壽靈泉)이라는 ’조령약수‘와 ’조국순례자연보도 안내‘ 그림 등등이 카메라의 눈을 활짝 열게 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백두대간 조령 비’요 그 아래 오석에 쓰여 있는 글이 조령(새재)의 유래다. 우리는 과거 길을 떠나는 선비처럼 괴나리보따리 대신 카메라를 메고, 곳곳을 유감없이 카메라에 담다가 드디어 제3관문(조령관)에 도착한 것이다.
*. 조령(鳥嶺, 새재)의 유래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어원은 억새가 우거진 고개 ‘새’(억새) +‘재’(고개)에서 왔다는 설,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재’(고개)에서 유래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른 설로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 + 재(嶺)’라고도 하였다. 또 다른 설로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이화령)보다 ‘새(新)’로 된 +‘재(고개’)라 해서 ‘새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경상도 지방을 영남(嶺南)이라고 하는데 그 '嶺'이 새재를 말하는 것으로 ‘조령(鳥嶺)의 남쪽’ 지방이라 해서 생긴 말이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를 넘었으니 이제는 나도 충주로 해서 서울을 향하여 귀성길을 서둘러야겠다.
청량산(淸凉山, 870.4m) (2006. 6. 1/ 경북봉화 청
*. 청량산 12봉
청량산 육육봉을 아나니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만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 말아 어주자 알까 하노라
퇴계 이황이 노래한 청량산 시조에서 '청량산 육육봉'은 36붕이 아니라 12봉을 말한다.
구구법은 갑오경장 이후 신학문과 함께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 역사가 앞서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으며, 동양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서적에도 구구법을 기재한 것이 보이는데 조선 선조 때를 살던 지성인 퇴계 선생이 설마 99법을 몰랐을까? 그러나 퇴계 선생이 말하는 '청량산 6.6봉'은 육육이 36봉이 아니고 12봉이다.
도산12곡이 자연을 노래한 전6곡과 학문을 노래한 후6곡인 것과 같다. 그 12 기봉(奇峰)이란 장인봉(丈人峰,=의상봉,870.4m), 선학봉(仙鶴峰, 821m), 자란봉(紫鸞峰, 796m) 자소봉(紫宵峰=보살봉, 845m), 탁필봉(卓筆峰, 620m), 연적봉(硯滴峰, 850m), 연화봉(蓮花峰), 향로봉(香爐峰), 경일봉(擎日峰, 750m), 금탑봉(金塔峰, 620m), 축융봉(祝融峰, 845.2m) 12봉우리를 말한다. 이 12 봉이 내 청량사를 빙 둘러 바위로 솟아 둘러싸고 있다. 이 12 봉우리는 하나하나가 연꽃잎이요, 금탑봉 기슭의 청량사 터는 그 연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풍수 지리학상 청량사는 길지(吉地) 중에 길지(吉地)라 한다. 청량산의 최고봉이 870.4m의 의상봉인데 이를 장인봉이라고도 하는 것은 주세붕이 이 봉을 중국 태산의 장악(丈岳)과 비슷하다 하여 의상봉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산악인들의 주장이다. *. 선인 묵객들이 노닐던 청량사 청량산에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야은 길재의 시조대로라면 '의구한 산천'은 청량산일 터인데 '간 데 없다'는 옛 인걸은 누구누구일까? 청량산에 전하는 전설에서만 찾아보아도 신라 시대에 김생, 원효대사, 의상대사, 최치원이 있고, 고려시대에 공민왕, 조선 시대에 주세붕, 퇴계 이황 등이 있다. -그것은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청량사나, 원효가 파서 즐겨 마셨다는 원효정(元曉井), 의상대사가 참선했다는 의상대, 김생이 10년 동안 수도하면서 금자(金字)로 불경을 썼다는 김생굴, 최치원이 바둑을 두었다는 고운대(孤雲臺)와 글공부하다가 마셨다는 총명수(聰明水), 독서를 하였다는 풍혈대(風穴臺), 공민왕이 황건적을 피하여 이곳에 있을 때 쌓았다는 축융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청량산은 돌산으로 청송의 주왕산, 영암의 월출산과 더불어 3대 영남 기악(奇岳)으로 꼽히는 산이다. 청량산에는 6·6봉이라는 12봉과 함께, 12대(臺), 8굴(窟), 4정(井)이 있으며 청량사, 외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정사(吾山堂), 산성, 오마도, 공민왕당 등이 있다. *. 청량산 8 기굴(奇窟)과 4정(四井) 청량산 바위를 유심히 보면 마이산 바위 같이 시멘트에 자갈을 버무려 섞은 듯 한 바위로 굴이 많다. 그 8 기굴(奇窟)로는 김생굴(金生窟, 청량정사 뒤 절벽 중간), 금강굴(金剛窟, 금강대 뒤 절벽), 원효굴(元曉窟, 원효암 뒤), 의상굴(義湘窟, 의상암 뒤), 반야굴(般若窟, 위치 미상), 방장굴(方丈窟, 위치 미상), 고운굴(孤雲窟=풍혈대), 한생굴(한生窟, 산성 건너 편) 등이 있다. 이 산에는 샘도 많아서 청량산 4정(井)이라 하여 총명수(聰明水, 어풍대 상류 요초대), 청량약수(=산성약수, 산성입구), 감로수(=원효정, 응진전 옛 암자 뒤), 김생폭(=김생굴)이라는 샘물이 있다. 그 중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 물을 마시고 정신이 총명하여 졌다고 해서 총명수라 하는 곳이 있는데 오늘날은 세상이 혼탁해 져서인가 총명수는 마실 수 없는 흐린 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인들의 청량산 예찬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의 정토가 동방의 청량산'이라 한 것을 보면, 청량산이란 말은 중국 화엄(華嚴)의 영산(靈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청량산은 낙동정맥(태백산)의 줄기 중앙에 있는 명산으로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小金剛)이라고 부르며 이를 예찬한 시인 묵객들이 많았다. 청량산은 이성(二聖) 사현(四賢)이 노닐다 간 곳이다. 원효 대사와 의상대사가 이성(二聖)이요, 김생, 최치원, 요극일, 영랑이 사현(四賢)이다. -해동 여러 산 중에 웅장하기는 백두산('頭')이 흘러 내려온('流')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 금강산이며, 명승지로서 기이하기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이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여서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산이 바로 청량산이다. - 이 산은 둘레가 백리에 불과하지만,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절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서 그림 같은 풍경이어서 참으로 조물주의 신기를 감탄할 만한 곳이다. 청량산은 단정, 엄숙하고 시원하고 굳세어서 비록 작기는 하지만 업신여기지 못하는 산이다. 산봉우리를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에게 힘이 솟고, 폭포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이 많은 자가 청렴해 질 것이다. -주세붕 '청산산록(淸凉山錄)' -안동 청량산은 태백산맥이 들에 내렸다가 예안(禮安) 강가에서 우뚝하게 맺힌 것이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 멧부리 두어 송이뿐이다. 그러나 강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수 만 길이나 높아서 험하고 기이한 것이 형용할 수가 없다.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도'
-청량산 육육봉을 우리 선조 장구쇠라. 추로지향 명승지에 주부자의 무이(武夷)로다. 일월산이 주산이오 낙동강이 홍대로다. 태백산이 공읍세요 영지산이 안대로다. -작자연대 미상 한글필사본 가사
*. 내 청량사와 외 청량사 산악회를 따라 청량산에 와서 의상봉을 향하는 일행을 따라가지 않고, 그분들의 하산 길인 입석대를 들머리로 하여 외 청량사를 향하여 오르고 있다. 30도를 오르내리는 오뉴월의 더위에 죽을힘을 다해서 따라 가기도 버거운데다가, 그분들은 전문적인 젊은 산꾼들이어서 절보다 산에 더 관심이 많아서 그분들을 따라갔다가는 필경은 청량사를 건성 보고 오거나 아니면 못보고 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6월의 신록으로 가득한 산을 휘파람새 소리 들으며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산을 나 홀로 오르고 있다. 오늘 산행에서의 나의 주목적은 청량산과 청량사에 묻힌 전설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청량산을 다녀가면서 내, 외 청량사라는 말에 외 청량사를 내가 못보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어리둥절하였었다. 청량사는 연화봉(蓮花峰) 기슭의 내 청량사와 금탑봉(金塔峰) 아래의 외 청량사 둘로 나뉜다. 그 둘이 한 울타리에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내, 외로 구분하고 있지만 법당이 있는 내 청량사가 본전(本殿)이고, 응진전(應眞殿)이 있는 외 청량사는 이에 따른 당우(堂宇)라고 보면 된다. *. 동풍석(動風石, 건덜바위) 전설 입석대란 청량산 휴게소를 가기 15분 전 거리에 있는 낙동강 지류의 큼직한 삼각형의 바위로 거기서 입석대까지는 완만한 오름길로 응진전을 1.1km 앞두고 있다. 길은 완만한 오름길로 청량사와 김생굴의 갈림길에 있는 이정표부터는 통나무 계단이 시작되더니 그 계단이 끝나는 곳에 제1전망대가 있어 낙동강서 육각정을 지나 물티재로 향하여 꼬불꼬불 오르는 길이 멋지다. 거기서부터는 금탑봉 중턱의 둘레길로 평탄한 능선길인데 외 청량사라는 응진전(應眞殿)이 보이기 시작한다. 산사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만 한여름의 무성한 초록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는 응진전은, 커다란 절벽 바위를 뒤에 두고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서 축융봉을 바라보고 있는 시원한 전망이라서 마치 관악산 연주암을 예서 다시 보는 듯 한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있다. 그 바로 앞에 있는 샘은 파이프는 대나무로 거기서 흘러내리는 약수가 묻어놓은 항아리로 쏟아지는데 그 물맛 또한 일품이다. 응진전(應眞殿)을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뒤 절벽 바위 위에 부처 같은 바윗돌 하나가 얹혀 있고 거기에 재미있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한 스님이 있어 절터를 찾아 전국을 헤매 다니다가 청량산 금탑봉 중턱의 아래에서 명당의 절터를 발견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의 걱정은 절터 뒤 바위 위에 건들건들 흔들리는 바위가 있어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힘이 세기로 유명한 이 스님이 올라가서 절벽 밑으로 바위를 밀어 굴려 버리고 다음날 절터에 가보았더니 분명 어제 밀어 굴려버린 바위가 제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닌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가마니를 깔고 돌을 끌어올린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도깨비의 짓이라 하였지만 스님은 절을 세우지 말라는 부처님 계시로 생각하고 절을 짓지 않았다. 이곳에 의상대사가 건들바위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지은 절이 응진전(應眞殿)이라는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건들바위 또는 동풍석(動風石) 이라 부르게 되었다. 응진전에서 하나 더 자세히 볼 바위가 있다. 웅진전 좌측에 있는 이 바위는 부처님의 발모양을 닮았다 해서 불족암(佛足岩)이라 한다. *. 공민왕(恭愍王)의 전설 응진(應眞)이란 '아라한(阿羅漢)'이니, 흔히들 줄여서 '나한(羅漢)'이라고 하는 부처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응진전(應眞殿)이란 부처님의 제자를 모신 곳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나한전(羅漢殿)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응진전에는 16나한을 모시고 있는데 이 나한들 하나하나는 노국 공주와 시녀들이 깎았는데 그 중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형상한 상이 있다고도 한다.
출처: ‘청량산 청량사’(김태환 저)
응진전에서 만난 스님께 축융봉(祝融峰)이 어딘가 물었더니 말없이 손으로 가리킨다. 스님의 손끝 따라 눈을 주니 맞은편 산이다. 축융봉은 청량산과 청량사에서 외따로 있는 산이라서 대개는 못가보고 마는 곳이지만 거기에서는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청량산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이는 곳인 청량산 휴게소에서 약 1시간 정도 오르면 우뚝 솟은 봉우리 충융봉(845.2m, 주세붕이 중국의 荊山에서 따온 이름)을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난 와서 은신할 때 쌓았다고 하는 ‘청량산성’이 있고 그 아래 ‘공민왕당’이 있다.
1362년 10월 홍건적이 고려에 두 번째로 침입하자 노국공주와 함께 청량산으로 피신해 갈 때였다. 낙동강 나분들[廣石]이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없었다. 왕은 말을 타고, 노국공주와 시녀들은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의 등을 딛고 건넜다는데 이 일이 '놋다리밟기'라는 민속놀이가 되어 지금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그때 공민왕이 다섯 필의 말을 한꺼번에 몰고 갔다는 산 능선 주위의 40여리 산길이 ‘오마도(五馬道)’요 그 대(臺)가 ‘오마대(五馬臺)’다. 그때 왕이 거처하던 곳이 지금은 조그마한 ‘공민왕당’으로 남아 있는데 영정은 도난당하였지만 공민왕의 신위와 용 그림은 남아 있다. 공민왕은 이 청량산에서 3개월 동안 피해 있었다 한다. *. 사형장 '밀성대(密城臺)' 전설 청량산성은 둘레가 1,350척(16km)이고 안에 우물 7개 소와 시내가 둘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여 없어졌다. 그 남쪽에 궁전 옛터가 있고 그 밑으로는 천인절벽인데 그 절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청량산유록(朴琮1735~1793)에 전하여 온다. -청량산 남쪽 고개에 궁전 옛터가 있고 그 밑은 천 길 절벽으로 고려왕이 피난 왔을 때 죽여야 할 죄인이 있으면 처형하지 않고 이 절벽 아래로 밀었으므로 그 아래에는 백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가, 날씨가 궂은 날이면 귀신의 울음소리가 난다고 한다.. 그 대(臺)의 이름이 밀성대(密城臺, 640m))인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城)'에서 '밀'(密)어서 죽인 '대(臺)'라는 말을 한자를 빌어 밀성대(密城臺)라고 차자(借字) 한 것 같다. *.풍혈대(風穴臺) 응진전을 조금 지나서 요초대 뒤에 ‘풍혈대(風穴臺)’란 이정표가 있어 올라가 보았더니 그 우측에 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수 있는 바위굴의 내리막길이 있고 좌측에는 ‘주일암자(週日庵子)’가 있었다는 평평한 공터가 있다. 사람이 오르내리기 힘든 곳에 뻥 뚫린 커다란 바위 구멍이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을 샘솟듯이 불어준다는 풍혈대(風穴臺)였다. 여기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바둑을 두었다는 곳으로 일명 '독서대(讀書臺)'라고도 하는 곳이다. *. 청량산 12 기대(奇臺) 대(臺)란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흙이나 돌로 높이 쌓은 곳을 말한다. 청량산에는 자연으로 된 대가 12대나 된다. 어풍대(御風臺), 밀성대(密城帶, 축융산성의 공민왕, 일명 사형대), 풍혈대(風穴臺, =최치원의 독서대), 학소대(鶴巢臺, 충융봉 서쪽 낙동강 변), 금강대(金剛臺, 장인봉 서쪽 낙동강 변), 원효대(원효봉 앞), 치원대(致遠臺, 고운대라고도 하며,자소봉이 9층 석탑으로 보이는 곳), 반야대(般若臺, 치원대 옆), 만월대(滿月臺, 자소봉 아래), 자비대(慈悲臺, 안중암 앞), 청풍대(淸風臺, 자소봉 아래, 4~5인이 앉을 만함), 송풍대(松風臺), 의상대(義相臺)가 그것이다, 이 대(臺)들 중에는 우리의 옛 성현과 연관된 대(臺)가 많았다. 최치원의 유적으로 ‘독서대(풍혈대)’, ‘치원대’, ‘난가대’가 있고, 원효의 ‘원효대,’ 공민왕의 ‘밀성대’, 주세붕의 ‘경유대(景遊臺)’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 청량사의 최고의 절승의 전경으로 청량산과 아울러 가장 잘 음미할 수 있는 대(臺) 중의 대(臺)가 ‘어풍대(御風臺)’다. ‘어풍대(御風臺)’에서 바라보면 청량산 12봉은 연꽃잎이요, 청량사는 그 꽃 가운데에 있는 꽃술이다.
그 ‘어풍대’는 크게 말하여 ‘치원대’, ‘자하’대, ‘요초대’, ‘경유대’를 아우르는 곳이니 여기도 아무리 바빠도 서둘러 지나치지 말 일이다. ‘어풍대’는 청량사 가는 길에 있는 ‘총명수’를 조금 지나서 있다. *. 총명수(聰明水) 전설 금탑봉을 멀리서 보면 3층으로 되었는데 그 층마다 소나무로 빙 둘러 있고 그 중턱에 평탄한 환상적인 길이 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그 중 중충(中層)인데 그 요초대 앞에 ‘총명수’가 있다. 거기에 있는 표지가 ‘총명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총명수’는 층암절벽 틈 사이에서 솟아나는 천연수로 큰 가뭄에도 물의 양이 일정하고 청결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말기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청량산에 들러 이 물을 마시면 정신이 더욱 맑아지고 총명이 배가(倍加)하여졌다고 하여 ‘총명수’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과 곳이 다를 수가 있는가. 물 위에는 이물질이 떠 있고, 물은 썩어가는 듯 하여 마시기는 고사하고 손을 담가 보기도 싫은 물이니 설명을 거듭 읽는 내가 오히려 고운선생께 부끄럽기 짝이 없어진다. 총명이란 무슨 뜻인가? 듣고 본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을 총명이라 한다. 그 힘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듣고 본 것을 오래 기억하려는 평소의 노력으로 생기는 것이다. 귀 밝을 ‘총(聰)’, 밝을 ‘명(明)’이라는 한자 그대로 누가 말하거든 건성 듣지 말고, 자세히 듣고 되물어 두 번 말하게 하지 않게 해야 총명한 이로 대접 받을 것이다. *. 경일봉(擎日峰, 750m) 이정표가 0.1km의 김생굴을 갈 것인가? 아니면 0.7km의 경일봉으로 갈 것인가를 묻기에 경일봉(擎日峰)을 향하여 가고 있다. 자소봉(紫宵峰=보살봉, 845m) 서남쪽에 있는 이 봉은 유리보전(琉璃寶殿) 앞 5 층 석탑이 있는 연대(蓮臺)에서 춘분과 추분에 해 뜨는 것을 보면, 경일봉 정상의 한 가운데서 뜨기 때문에 동방에 해가 떠서 빛난다(寅賓旭日)의 뜻을 취하여 떠받들 '경(擎)' 해 '일(日)' ‘경일봉(擎日峰)’이라 한 것이다. 이 산의 봉과 대의 이름을 유교식으로 명명한 주세붕의 생각이었다. 경일봉을 거의 다 왔을 지점에 두 갈래 길이 있다. 급히 매표소에서 구해온 팜플랫을 찾으니 아뿔싸 어디다 떨어뜨리고 왔는지 없다. 게다가 이정표도 없었고 등산 내내 나 홀로라서 물어볼 이도 없다. 산악회에서 나누어 준 지도는 자세하지가 않는데다가 언뜻언뜻 보이는 저 산 넘어 멋진 봉우리는 까마득하다. 나는 경일봉을 지나 자소봉, 보살봉으로 해서 김생굴이 보고 싶은데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한다? 왼쪽은 하산길 같아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간다. 큰 무덤이 나오고, 멋진 2단 층계가 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더니 봉분을 잃어버린 무덤까지 왔다. 길은 평탄한 능선 길로 시간도 넉넉하였지만 저 멋진 봉우리들을 사진에 담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발길을 돌렸다. 단체로 와서 혼자 다른 길을 자청하여 택하고 다니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른 분들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폐가 되는 일이고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아까 갈림길에서 오른 능선을 직진하니 육산 능선에 약간의 평범한 언덕 같은 곳에 정상표지석이 서있다. 그곳이 싱겁게도 경일봉이었다. 그리곤 계속되는 원점회귀 하산길이었다. 아아, 아까워라. 거기에 이정표가 있더라면 평생에 다시 또 올 수 없는 청량산의 탁립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을 1시간 내에 갈 수 있었는데-.
*. 김생굴(金生窟)
김생굴은 경일봉의 중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반월형(半月形)의 자연암굴로서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다. 오늘은 맑은 날씨인데도 바위 위에서 낙숫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폭포가 되어 물이 떨어진다는 ‘김생폭포’였다. 나는 서예에 문외한이라서 역사상 명필가로 알고 있는 분은 몇 분밖에 모른다. 한석봉, 추사 김정희, 이완용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일중 김충현 정도지만, 청량산에 와서 김생을 만났다. 김생(金生)은 통일신라시대를 살다 간 분으로 이름은 김필이요, 자는 지서(知瑞), 별명은 구(玖)다.
-김생은 부모가 한미(寒微)하여 가계를 아어 갈 수가 없었으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 행서, 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금생의 행서와 초서 한 폭을 내보이자 왕희지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
-삼국사기(권48제8김생조)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의 서예가로 평가를 받았으며 이규보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김생이 두타 행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김생사(金生寺)라 이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옛날 신라의 명필 김생이 이 김생굴에서 9년간 글씨 공부를 마치고 하산하려던 어느 날 밤 길쌈을 수련하러 왔다는 젊은 여인을과 굴속에서 불을 끄고 솜씨를 겨루기를 하였다. 겨루기를 마치고 그 여인이 김생의 글씨를 보더니 미흡하다고 힐책한 후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선생이 크게 깨닫고 1년을 더 수련하여 10년을 마친 후 천하명필가가 되었다.
김생의 글씨를 보고 중국 원 나라 조맹부까지 "신라 김생의 글씨는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라고 부러워하던 서도가였다. 고려인들도 김생을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 하였고, 이규보도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 '라 하던 서도가여서 당시에 사신들은 중국에 갈 때는 김생의 글을 보배 같이 여기고 선물로 가지고 갈 정도였다.
*.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드디어 내청량사 경내로 들어섰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2층의 시원한 범종각인데 그 옆에 약수터가 있고 그 밑에 기념품 가게가 있다. 여기서 '청량산 청량사'(김태환 저) 책 한권을 샀다. 나의 '청량산 도립공원' 글을 쓰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 책이다. 한 사람의 노력이 이렇게 산의 이모저모와 절의 구석구석을 찾아 고증하고 정리하여 준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내 청량사(內廳凉寺)란 신라 문무왕 3년에 원효대사가 연화봉 기슭에 창건한 절로, 법당 인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제 47호)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연화봉 기슭에 있다하여 ‘연대사(蓮臺寺)’라 하였는데 번성할 때에는 27개의 절과 암자를 관리하였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 그 이름을 주세붕이 지금의 ‘청량사’라 고친 것이다. 청량산과 청량사는 여느 절과는 달리 불도는 물론 유불선교가 함께 가꾼 절이었다. 내 청량사의 유리보전(琉璃寶殿)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란 뜻이어서 여기에서 병자를 위해서 정성으로 기원하면 병을 치료하고 장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소원성취에 영험이 있다는 유명한 도량이라 한다. 이곳에서 반드시 유념해 보아야 할 것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민왕의 친필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제47호)이라는 현판이고, 또 하나는 유리보전에 모신 지장보살, 약사여래, 문수보살 삼 불상 중에 중앙의 약사여래 금불상이다. 금칠을 해 놓아 금불로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종이를 녹여 만든 귀중한 지불(紙佛)이기 때문이다. *. 삼각우송(三角牛松)의 비밀 유리보전 우측 전방 5층 석탑이 서 있는 연대사(蓮臺寺) 앞에는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는 노송이 운치 있게 세 가지를 늘어뜨리고 옛날의 전설을 말해주고 있다. -명호읍 북골리에 남민(南敏)이라는 농사꾼의 집에 뿔이 셋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크기 시작한 이 송아지는 몇 달 사이에 낙타만큼이나 자랐지만 어찌나 사납고 힘이 세던지 농사일에 부려먹을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을 들은 연대사(蓮臺寺, 후에 청량사) 주지 스님이 찾아와 소를 시주할 것을 청하기에 남씨는 소를 기꺼이 주고 말았다. 스님이 이 소를 몰고 와 암자를 짓게 하였더니 의외로 이 소는 순순히 따르고 힘이 세어서 돌과 재목을 나르며 대역사를 쉽게 끝내게 하더니 절 짓기가 끝나자 소가 죽어 버림에 절 앞에 묻었다. 그 소가 죽은 자리에 신기하게도 소의 뿔처럼 가지 셋인 소나무가 돋아나서 세인들이 그 자리를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하고 그 소나무를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 하였다. *. 이규보와 퇴계 이황의 청량산 사랑 고려 시대 대문장가 이규보는 걸출한 시호(詩豪)로서 그의 호탕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하던 시인이다. 도연명의 영향을 받다가 시, 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자칭하면서 독자적인 시 세계를 이룩한 분이다.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친구도, 가족도 돌아보지 않고 청량산에 들어가 오직 시부(詩賦)를 일삼고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호하며 살았다. 퇴계 선생은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근거로 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노년을 학문 연구에 바친 대학자다. 수시로 청량산으로 들어가서 청량산인이라 일컬어질 만큼 청량산을 사랑하였다. 그는 청량산을 '내 집 같은 산[吾家山]'이라 부를 정도여서, 후인들이 공부하던 곳에 청량정사(淸凉精舍)라는 건물을 지어 주었는데 지금은 '산꾼의 집' 옆에 폐가가 되어 남아 있었다. 그때 퇴계가 지은 청량산에 대한 시편이 51편이요, 여기서 '청량산록발(淸凉山錄跋)'이라는 글도 썼다. 중종, 명종, 선조 역대 왕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는데, 명종은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는 퇴계를 그리워하며 거소인 도산의 경치를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둘러두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의 시조 '청량산가'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학창 시절을 보낸 대한민국 국민들은 청량산을 알고 그리워하며 찾고 있다. 그 시조가 이 글의 모두에서 인용한 시조다.
- 참고 문헌 '청량산 청량사'(김태환 저)
팔공산(八公山, )
대구는 팔공산이 북쪽에서 1,000m 이상의 산들을 거느리고 동으로 길게, 남쪽으로는 철쭉꽃으로 유명한 비슬산(琵瑟山, 1083m)이 많은 군소산을 거느리고 , 동쪽 또한 산지(山地)로 이 모두가 함께 대구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오직 서쪽만이 앞이 탁 트여서 낙동강까지 평야로 이어지는 분지(盆地)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습기를 머금은 남동 계절풍이 산에 막혀서 대구 분지에 들어오지 못하여 전국에서 가장 더운 날씨를 만들고, 겨울이면 대륙에서 불어오는 찬 북서 계절풍이 막힘없는 서쪽을 통하여 불어와서 다른 고장보다 추운 대륙적인 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대구의 봄과 가을이 짧은 것이 그래서였다.
동대구에서 택시를 타고 동화사에 가면서 기사와 대구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기사의 말이 이러하다.
"대구에는 다른 고장 같이 이렇다 할 만한 관광지나 명승지가 없어요. 바다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대구시민에게는 오직 팔공산이 유일한 관광지인 셈입니다.
그 팔공산(八公山)은 크게 세 지구로 나뉜다.
파계사(把溪寺) 지구, 동화사(桐華寺) 지구, 갓바위(冠峰) 지구가 그것이다. 나는 2006년에 팔공산을 파계사(把溪寺)로 갔다가 춘설에 막혀서 수태골로 동봉(東峰)을 다녀왔고, 오늘은 동화사로 해서 동봉(東峰)을 오르고 있다. 물론 갓바위는 여러 번 가본 곳이다.
수도권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팔공산을 당일로 등반하려는 분은 KTX 첫차를 타고 올 것을 권하고 싶다.
나의 경우 그 요금이 43,000 원이 비싸다고 무궁화(경로 할인 14,000원) 7시 경의 차를 타고 왔더니 동대구역에서 급행 1번 버스를 타고 동화사에 부지런히 왔는데도 12시가 넘어서 정상을 오고갈 시간이 못 되었다. 그래서 어제는 동화사를 보고, 잠자리를 찾아 동대구역 근처 허름한 모텔에 가서 1박하고 이른 새벽에 다시 동화사 집단시설로 택시를 타고 와서 등산을 시작하다 보니 돈은 돈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했기에 하는 말이다.
나는 오늘 일정으로 가능하다면 동화사-1.2km-부도암-1.5km-염불암- 3.2km- 동봉-7.3km- 갓바위 로 종주할 계획이다. 지금은 새벽 6시 30분 내가 가는 동화사 코스로 오르는 이는 나 혼자여서 고즈넉하고 휘휘하다.
염불암까지는 산길도 아닌 포장된 콘크리트길인데도 벌써 숨이 이렇게 차니 동봉까지 3.7km를 어떻게 간다?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생로(生老) 다음이 병사(病死)라 하여서
더 늦기 전 서둘러 팔공산(八公山)을 찾아왔더니
이렇게
절도 산도 좋은데몸이 마음에 욕을 하네요.
그래도 원기 왕성한 새벽 등산이라 동화사에서 1.1km 부도암(浮屠庵)에 이르렀다.
암자 이름치고는 특이하여 기대를 갖고 둘러보니 입구에 달랑 부도 하나가 있을 뿐 겉으로는 예사 암자와 다름이 없다.
거기서 얼마를 더 오르니 개울가에 이정표가 "←염불암 1.1km/ 염불암(산길) 1.1km"로, 염불암을 차도로 갈 거냐, 산길로 갈 거냐를 묻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멋없는 콘크리트길에 짜증나던 차라 옳거니 하고 멋진 징검다리를 건너 산길로 들어섰다. 똑 같은 1.1km가 아닌가 하고.
거기서부터는 우측에 동화천(桐華川) 개울을 끼고 낙엽 덮인 길이 계속 되었다. 그 길에는 돌층계도 있고, 오솔길도 있는데 길이 외길이 아니라 다른 길과 합류되는 그런 길이었다. 아마도 수태골 등산로가 여기서 합류되는 길 같다.
그런데 한참을 가도 이정표의 1.1km는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염불암이 안 보인다. 염불암을 지나친 것 같다. 계곡과도 멀리 떨어진 길이었다.
염불암을 가려면 조금 전에 지나쳐 온 잘 생긴 징검다리 돌길로 계곡을 건너야 하는 건데 거기에 이정표가 없어서 그냥 산길을 타다 보니 계곡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저 봐라 이정표에 '←케이블카봉 0.2km"라 쓰여 있지 않은가.
비로소 능선을 만났더니 몸을 가누기 힘든 강풍이 불어오는데 왼쪽 저 멀리 봉우리 위에 커다란 건물이 서 있다. 이정표를 보니 그 봉이 ‘케이블카 봉’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수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가고 있다. 저 케이블카를 동화사 근처에서 타고 올라 0.5km를 능선으로 내려오면 그대로 동봉 가는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능선부터는 우측으로 멋진 층계가 시작되었다. 거기서 동봉은 1.8km 거리였다.
그 층계 따라 1km 거리에 낙타봉(駱駝峰)과 멋진 전망대가 있다.
낙타봉에서부터는 팔공산의 전경이 갈수록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곳이다.
저 멀리 비로봉에 세워 있는 멋진 방송 중계탑도 보이고 그 왼쪽 서봉에서 파계봉으로 이어지는 톱날 능선도 보이기 시작한다. 동쪽으로는 내가 지나쳐 온 염불암(念佛庵)도 굽어 볼 수가 있다.
산에서 굽어보는 절처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자연과 어울린 인공이 정적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는 모습이 동양화의 한 폭이 사뿐히 내려 않아 졸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부터는 팔공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방송국 중계탑인가. 군부대인가로 인하여 팔공산의 정상 비로봉 일대가 출입금지 되었다는 팔공산 정상이 맑은 날씨에 뚜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낙타봉 전망대부터는 그 정상을 보며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등반이었다.
정상이 저렇게 분명하게 보인다는 것은 지금 내가 팔공산의 7부 능선 이상을 걷고 있다는 말도 된다.
드디어 나는 동봉 0.3km를 앞둔 층계 앞에 섰다.
여기서 0.4km의 거리에 팔공산 제3봉인 서봉(西峰)이 있고, 군부대 캠퍼스에 있다는 비로봉은 0.4km에, 동봉은 0.3km 지점에 있다.
거기서 나는 남들 따라 직접 동봉(東峰)을 오르지 않고 왼쪽에 있는 넓은 터에 갔더니 지도에서 보던 커다란 마애불상이 서쪽을 향하여 서 있다. 6m 높이의 거대한 '동봉석조약사여래보살'(東峰石造藥師如來菩薩, 대구 유형문화재 20호)이었다.
팔공산은 오대산이나 덕숭산[수덕산] 같이 불교 성지에 해당하는 산 같다. 그 중 팔공산에는 약사여래 불상이 많아 약사여래 1번지가 되는 산이라고도 한다.
대구에 산다는 부인들이 커피 한 잔 하자고 나를 부른다. 나의 백발을 보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 같은 백발노인은 보이지가 않는다. 커피는 가지고 다닌다고 했더니 예쁘게 하는 핀잔에 함께 했더니 그분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가볼 수 없다고 체념하였던 비로봉이 개방되었다는 것이다.
*. 팔봉산 비로봉
대구 인근 100리 안에서는 가장 높다는 봉이 팔공산 비로봉(1,192m)이다.
이 비로봉 주변에 1960년대 중반 방송 중계탑과 군부대 시설이 들어서면서 비로봉 정상부 주변에 철조망을 설치해 놓고 그동안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여 왔다.
이에 맞서 대구 시민들의 지속적인 개방요구에 의하여 2009년 11월 1일에 드디어 출입금지된 지 45년만에 팔공산 비로봉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데 이를 내가 몰랐던 것이다. 망설임 없이 0.4km에 있다는 비로봉을 향한다.
내가 아는 비로봉으로는 오대산 비로봉(毘盧峰,1,563m), 금강산 비로봉(毘盧峰, 1,639m), 묘향산 비로봉(毘盧峰, 1,909m), 소백산 비로봉(毘盧峰, 1,440m) 등으로 모두 그 산의 정상이다. 그 중 치악산 비로봉(飛蘆峰, 1288m)은 한자가 달라 여기에서 빠진다.
'비로(毘盧)'는 불교의 부처인 '비로자나'의 줄인 말이다.
비로자나(毘盧자那)는 몸의 빛과 지혜의 빛이 법계(法界)에 고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일컫는 말이다. 종파에 따라서 부처를 진언종(眞言宗)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 화엄종(華嚴宗)에서는 석가모니불, 천태종(天台宗)과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법신불(法身佛) 등으로 달리 일컫지만 모두 석가모니 부처를 말한다.
그래서 비로자나는 항상 으뜸으로 치는 부처라서 높은 곳에 거(居)하는 부처라고 불교에서는 '높다'는 뜻으로 산의 정상을 뜻하는 고유명사화 되었다.
팔공산 비로봉은 '동봉석조약사여래보살'에서 0.4km 거리로, 그 이름값을 하려는지 내려갔다 오르는 힘든 발품을 팔게 하였다.
비로봉 가는 길에 '팔공산 제천단'이라는 비석이 이 비로봉을 설명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비로봉은 옛날 조상들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성지이다. 조상들의 얼이 담겨 있는 제천단을 자손만대 길이 보존하기 위해 표석을 세웠다.
그런데 애써 가본 팔공산 비로봉은 달구벌의 우람한 기상도 없이 초라하고 추레한 것이 마치 돈 없이 늙어 구석방에서 셋방살이 하는 신세를 보는 듯 처량한 모습이다.
대구 시민에게, 대구 등산하시는 분들께 묻고 싶다. 주위는 군사시설도 아닌 방송 중계탑 시설인데 이리 방치해도 되는가를. 금수강산 대한민국 어느 산을 가 봐도 정상이 이렇게 푸대접 받는 곳을 보았느냐고. 이렇게 방치할 바에는 무엇하러 되찾았냐고. 되찾은 지 16년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하고.
팔공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동봉에서 시작하는 염불봉, 신령재, 갓바위까지의 왼쪽의 날개 능선과, 오른쪽으로 서봉에서 시작되는 톱날능선으로 해서 파계봉, 파계재로 이어지는 오른쪽 능선을 날개처럼 쫙 피고 있는 거대한 봉황 같다.
나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팔공산 최고봉 비로봉에 서서 호연지기로 외치고 싶다.
'한국의 산하여! 저는 Korea의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다 보니 한국의 아름다움이 산에 있음을 일찍이 발견하고 전국으로 국립공원을 찾아다니며 그동안 '국립공원 산행기'를 출간하였습니다. 그 속편으로 '한국 도립공원 산행기'를 출간하려고 전국을 헤매다가 몸이 마음을 부리는 나이에 어쩌면 산행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팔공산에 왔습니다. 이런 저의 한국산하 사랑이 헛되지 않도록 좋은 글로 좋은 책을 엮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도와주소서!
*. 동봉(東峯) 이야기
목표하던 동봉에 오르니 2시가 넘었다. 동봉은 단체가 올라와도 쉴만한 넉넉한 넓이에다가 돌산이라서 사방 전망을 가리는 잡목이 거의 없어 전망이 무엇보다 좋았다. 게다가 정상석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면 이정표가 나오도록 된 것이 좋았다. 만약 내가 비로봉보다 동봉에 먼저 올랐다면 비로봉으로 해서 서봉까지 갈 수 있는데 서봉 등반은 비로봉으로 대신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제 올 때 계획하였던 갓바위까지의 종주는 생략해야겠다. 준족(駿足)이라도 가기 힘든 바윗길 7.3km의 능선을 욕심낸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 내 몸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밤차로 상경하기 위해 차표를 예매해 놓지 않았는가. 염불봉과 염불암을 들르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갓바위 쪽으로 하산하다 보니 바위 하나하나가 수석 같이 아름다웠다. 이러다가 갓바위 코스로 쭉 빠지는가 염려하다가 보니 염불사 가는 이정표가 '←염불암 0.9km' 를 하산 방향으로 가리키고 있다.
지금은 3시30분경 비로소 준비해온 도시락을 바위 끝에 펼쳐 놓고 점심 식사를 하다 보니 까마귀가 까옥까옥 울고 있다. 놈도 시장하였던지 등산객이 식사 끝마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너도 먹어라 하고 김밥, 고기 등을 바위 끝에 정성껏 놓고 염불사를 향한다. 다람쥐 아니면 까마귀가 포식하겠지- 하면서.
*. 염불암 이야기
염불암은 팔공산 동화사의 부속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암자로 그 창건 역사는 신라 경순왕 2년인 92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고찰이다. 내가 찾았을 때는 부르도자를 써서 하는 큰 공사 중이었다.
층계를 오르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는 극락전
(極樂殿) 앞마당에 유리상자 안에 보관된 특이한 탑이 보인다. 청석탑(靑石塔, 대구 유형문화제 제 19호)이었다. 청석이란 벼루를 만들던 흑색 심판암으로 만든 탑으로 몸돌은 없어지고 10층이 지붕돌인 옥개석 (屋蓋石)만 포개진 채로 남아 있는 탑이다.
이보다 더 특이한 것은 극락전(極樂殿) 우측에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입체 삼각형의 바위 양 면에 '마애불좌상과 보살좌상'
(磨崖佛坐像과 菩薩坐像, 대구무형문화 14호)이었다 .
이에 대하여서는 신비로운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옛적 이 암자에서 수도하고 있던 한 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암자 주변에 신비한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니 7일 동안이나 걷히지 않았다. 스님은 더욱 신심을 내어 발원하였더니 7일째 되는 날에 드디어 안개가 걷히는 것이었다. 스님이 법당문을 열고나서 보니 바위에 자신이 발원했던 불상 둘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스님은 이 일을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했다고 믿었다. 그 후로 이상하게도 염불소리가 바위에서 들려와서 암자 이름도 염불암이라 하게 되었다.
-'문화공간 팔공산과 대구'( 정우락편)
산속의 하루는 일찍 저무는가.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더니 동화사 가까이 오니 준비해간 플래시를 켜야 했다. 원래 아팠던 왼쪽 퍽퍽한 다리를 끌고 염불암서 동화사 집단시설지구까지 2.2km의 시멘트 길을 걷는 것은 고행과 같은 무리였다.
이럴 때 왼쪽 동화천 계곡의 계곡물소리라도 들으면서 하산했으면 작히나 좋으랴, 계곡물 소리를 앗아간 금년의 긴 가뭄이 원망스러웠다.
가지산(加智山, 1,240m )도립공원 / 가지산 *. 영남알프스 가지산 운문산 구간 종주 가지산(加智山) 도립공원이란 가지산(1,240m), 취서산(1,092m) 일원에다가 천성산(812m), 원효산(922m) 등을 더하여 1979년에 도립 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 공원은 국내 도립 공원 중에서 가장 넓은 공원으로 통도사지구. 석남사지구. 내원사지구들과 그 주위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양시 일산에서 가지산까지는 8백리길(327km)로 오고가는 데만도 10여 시간이 걸려서 수도권에서 어제 밤늦게 무박산행을 떠나 현지에 이르러 간단한 조반을 마치고 새벽 5시경 석남터널 등산로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가지산도립공원 중에서 가지산에서 운문산까지 영남알프스를 구간종주하고 있는 것이다. 영남 알프스는 영남 동부지역에 위치한 해발 1,000m 이상의 산악군(山岳群)이다. 가지산(迦智山, 1,240m), 신불산(神佛山, 1,209m), 천황산(天皇山, 1,189m), 운문산(雲門山, 1,188m), 재약산(載藥山, 1,108m), 간월산(看月山, 1,083.1m), 취서산(鷲捿山=영취산, 1,059m), 고헌산(高獻山), 1032.8m) 등 중요한 8봉우리로 경북의 경주, 청도, 울산과 경남의 밀양, 양산의 5개 시군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이를 영남알프스라고 하는 것은 가지산의 능선에 눈이 쌓이면 그 경치가 알프스의 경관을 보는듯하다 해서 생긴 말이라 한다. 알프스산맥은 유럽의 중부에 있는데 동쪽은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시작해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리히텐슈타인과 독일을 거쳐 서쪽의 프랑스에까지 이르는 산맥이다.
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은 몽블랑산(4,810 m)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지대에 있다. *. 가지산(加智山) 이름의 유래 가지산의 원래 이름은 '석남산(石南山)'라 하다가 그 기슭에 있는 석남사(石南寺)가 중건되면서 가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밖에도 이 산이 화산의 분화구 지대라 해서 '천화산(天火山)'이라 하였고, 이 산에 실혜촌 또는 부요(富饒)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실혜산(實惠山', 돌이 어지럽게 많다 해서 '석면산(石眠山')이라고도 하였다.
가지산의 옛 우리말 이름은 ‘까치산’이었다. 그래서 이 산을 한자어로는 작갑산(鵲岬山)이라 한다. 이 ‘작갑산(鵲岬山)’이 가지산(加智山)이라는 지명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이두식 표기에서 왔다고 한다. 이두식 풀이로는 ’가(加)‘는 까치의 ‘까‘, ’지(智)‘는 ’치‘의 음차(音借)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두(吏讀)이란 신라와 고려 시대에 한자의 음(音)과 뜻(訓)으로 우리말의 ‘소리’를 적던 문자이기에 위와 같은 설이 가능한 것이다. 가지산(加智山)의 옛 이름이 ‘가치메’인 것은 까치의 옛말이 「가치」였기 때문이다.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등 참고. 가지산이란 명칭과 연관된 운문사(雲門寺)의 옛 이름인 작갑사(鵲岬寺)의 까치 창건설화를 들어보자. -신라 말 보양 스님이 불법을 전하려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해 용궁에 들어갔다. 용왕이 가사(袈裟) 한 벌과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을 딸려 보내면서 부탁하기를 "작갑(鵲岬)에다 절을 짓고 살라."하였다.
보양이 이 말을 믿고 작갑(鵲岬)이 어딘가를 찾던 중, 한 산등성에서 내려다보니 여러 마리의 가치 떼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鵲(작)’은 까치 ‘작’, ‘岬(갑)’은 산허리 ‘갑’이다.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 태조 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은 그 보답으로 태조 20년(937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과 함께 전답 500결을 하사하였다. 그 후 작갑사(鵲岬寺)는 운문사(雲門寺)로 개칭하였다.
‘삼국유사’의 운문사 창건설화 ‘보양이목조’
- *. 가지산 가는 길 우리는 어둠이 짙은 석남터널 앞을 들머리로 하여 해드 랜턴을 머리에 두르고 산을 오르고 있다. 등산로 안내판을 보니 ‘현 위치(석남터널 입구) → 가지산→ 쌀바위→ 운문재’로. 여기는 운문재에서 올라 성남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코스의 들머리인 모양이다. 안내도를 보고 “가지산 35분→ 쌀바위 30분→귀바위 30분→운문재 40분→ 석남사”는 못 보겠구나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다. 희수(喜壽)가 가까운 나이라 언제 다시 오랴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 능선으로 가다보면 맑은 날이라면 가지산 가는 도중에서 울산 앞바다를 볼 수 있다던데. 부처님의 귀 같다는 '귀바위'를 지나는 코스라던데. 전설 어린 가지산의 명물 쌀봉산 가는 길이라이던데-. 등산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산이 높음을 자랑하듯이 산꾼은 준족(駿足)을 자랑하는 신선 같이 빠른 사람들이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신선은 '뻥-' 하고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다. 한 마디로 발이 빠른 사람이란 말이다. 그에 못 미치는 내가 나이 먹어 욕심만으로 산악회를 따라 나서다 보니 언제나 후미(後尾)다. 후미도 둘째보다 아주 먼 후미가 된다. 그 후미의 기척은 물론 그 모습조차 볼 수 없는 한참의 후미가 된다. 혼자 가면 심심하다고 하지만 나는 하나도 심심하지 않다. 따라갈 걱정으로 오늘도 다른 분의 폐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니 심심할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석남터널에서 정상까지는 3.0km/ 1시간 30분 코스 여서 그동안만 무리를 하면 되지-’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따라왔더니 그게 아니었다. 대뜸 가파른 비탈길이 정상까지 계속된다. ‘여보, 다른 분들에게 부담이 돼요. 이제 등산을 고만 다니세요.’ 하는 아내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처음 만난 이정표가 ‘←배내봉/간월산’ 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배내봉’이 배내똥, 배냇병신처럼 ‘타고난’, ‘갓난아이’를 뜻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마을 계곡 주위에 야생 배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동내 이름을 ‘이천동(李川洞)’이라 하듯이 산과 골짜기 이름을 ‘배내봉’, ‘배내골’이라 부른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 석남터널에서 1km를 기진맥진 올라서니 ‘←능동산 3.5km’ 라는 이정표가 있다. 능동산(982m)은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가지산(1,240m)과 둘째로 높은 신불산(1,209m)을 남북으로 잇는 중간 지점에 서쪽으로 천황산(1,189m)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산이다.
산 이름 중 ‘陵(능)’ 자가 능과 언덕을 뜻하는 말인 것임을 감안해 보면 능봉산은 정상이 둥그스름한 왕릉처럼 생긴 모양 같다. 가지산과 천황산의 중간에 있어 배내봉 능선의 갈림길이어서 영남알프스 종주 길에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거쳐 가는 중요한 산이기도 하다. 가지산을 220m를 남긴 지점에 ‘가지산 석남재대피소 겸 매점’이 시원한 검은콩막걸리(6,000원), 소주(4,000원) 등으로 술꾼인 나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날 새기가 멀어 사면이 칠흑 같은 어둠이라서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간판에 중간점이 있는 것을 보니 종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피소 역할도 하는 모양이다. 사위가 밝기 시작하더니 6시가 가까워지더니 동녘 하늘에 아침노을이 시작되고 있다. 가득이나 더딘 걸음이 동녘하늘을 자꾸 뒤돌아보는 바람에 더욱 느려진다. 나뭇가지가 그 모습을 가려서 겨우 겨우 그 사이로 일출을 보며 사진으로 기록한다. 가지산은 암산이라 일망무제의 정상의 해돋이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내 걸음으로는 1시간은 더 가야 정상일 것 같다. 우리 산악회 선발대는 벌써 정상이 되었을 것이다. 해가 뜨자 산에 불이 난 것 같이 온 천지가 불바다다. ‘희다’라는 말이 ‘해’에서 나온 것 같은데 지금 보니 붉은 해가 온천지를 붉게 물들어 놓았다. 산의 나무가 훨훨 타는 것 같구나. 날이 밝으니 울산시 울주군의 상북면 마을이 보인다.
산에서 굽어보는 세상은 언제나 천국 같다. 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저 큰 산이 능동산 같다. 드디어 가지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세히 보니 우리 회원 사오 명이 그 정상 위에서 서성대고 있다. 나는 30분이나 뒤쳐져 있는 것 같은데 안부에 내려가서도 한동안은 더 올라야 정상 같다. 드디어 정상이 나타나는가 보다 하였더니 커다란 하얀 쥐라기 화강암 바위봉이다.
드디어 드디어 가지산 두 정상석이 ‘加智山, 1240.m'란 명찰을 달고 앞뒤로 서서 물끄러미 나를 굽어 반기고 있다.
하나는 직사각형의 오석이요, 그 위 또 하나는 둥그스레한 자연석인데 그 옆에 ’낙동정맥‘이란 또 하나의 표석이 서있다. ’낙동‘이란 낙동강이란 말이렷다. 이 加智山(가지산)을 등산서적에서 ‘迦智山’이라고 쓴 곳도 있지만 앞서 말한 것 같이 한자를 빌어 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 이두(吏讀式) 표기이니 ‘迦’나 ‘加’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정맥이란 무슨 뜻이지? *.대간(大幹), 정간(正幹)과 정맥(正脈) 이야기 조선 영조 때 신경준이 조선의 산맥 체계를 도표로 정리한 책에 '산경표(山經表'가 있다. 필사본으로 이 분야에서는 일본인들보다 앞선다는 중요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 산을 대간(大幹)과 정맥(正脈)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산(山), 봉(峰), 영(嶺), 치(峙) 등으로 구별하였다. 산경표(山經表)는 대한민국 산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대간(大幹)과 정간(正幹), 정맥(正脈)으로 구분하여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圖表化)한 책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금강산을 거쳐 총연장 1,470km(남한 : 670km)로 동서(東西)를 크게 가르며 지리산으로 이어진다. 이 대간(大幹)에서 뻗어나간 산줄기를 정간ㆍ정맥으로 분류하여 대한민국의 산줄기를 1대간ㆍ1정간ㆍ13정맥으로 체계화하였다. 여기서 다시 갈라져 나간 산ㆍ고개ㆍ일반 지명을 산줄기 별로 분류하여 도표로 족보처럼 체계화한 것이 산경표(山經表)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참조 낙동정맥(洛東正脈)이란 낙동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의 '황지연못'에서 시작하여 동해안을 따라 부산광역시의 '금정산'까지 남쪽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산줄기를 말한다. 그 능선의 직선거리가 약 410㎞이고 실제거리는 약 700㎞나 된다. 그 선상에 가지산이 있다는 것을 가지산 정상석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은 물을 낳고 물은 산을 가르지 않는다[山自分水嶺]는 말에 따라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 정간이라 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각각의 강을 경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하였다. 그래서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갈라진 산줄기는 모든 강의 유역을 경계 지었다. *. 쌀바위 전설 산의 정상에 서면 알게 되는 것이 한국의 아름다움이다. 그중에 가지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1.3km 지점에 북한산 인수봉 같은 하얀 큰 바위산이 있는데 중간 중간 나무가 푸르르다. 쌀바위였다. 그 쌀바위산에는 백양사국립공원의 백학봉 기슭에 있는 영천굴의 샘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 옛날 수도승 한 분이 지금의 쌀바위 밑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불경을 염하며 살았다. 스님은 며칠마다 한 번씩 마을로 내려가서 탁발하여야 하는 고행하는 스님이었다. 하늘이 수도승을 가엾게 여긴 것인지 기적이 일어났다. 스님이 염불을 하다 바위틈을 문득 보니 이게 웬일인가. 쌀이 소복이 쌓여 있지 않은가. 이날부터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이 매일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흐르듯 또닥또닥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 중은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내면 더 많은 쌀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에 그 구멍을 크게 뚫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후로는 쌀은 간곳없고 쌀 대신 물만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사람들은 그 바위를 쌀바위[米岩]라 불렀다.
이런 이야기는 옛말로 ‘메’는 먹이로 쌀을 뜻하는 말이었다. ‘메’는 전라, 충청 사투리에서 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그래서 쌀과 물의 음이 ‘메’와 같아서 우스갯소리로 생긴 이야기라는데 나도 동감한다.
가지산도립공원 / 운문산(雲門山) *. 운문산(雲門山)가는길
산에서 가장 반가운 이정표가 '운문산 5.3km/아랫재 3.8km/석남터널 3.1km'를 가리키고 있다. 운문산을 향하여 막 서남쪽으로 향하려다 보니 가지산 정상 바로 아래 '가지산정상대피소’가 있다. 건물은 가건물인데 자세히 보니 태양열 발전 시설이 되어 있다. 작년에 제주도 최남단 마라도에 가서 보던 것보다는 아주 작은 시설로 대피소 앞의 의자들이 지리산 치발목 산장을 생각게 한다. 내가 망팔(望八)도 훨씬 지난 작년에 지리산, 설악산은 물론 한겨울에 덕유산 종주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대피소 덕분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운문산 2시간 20분/ ←아랫재 1시간 20분’ 대피소 아래 이정표가 운문산 가는 시간을 일러 주고 있다. 헬기장을 지나 아랫재로 가는 길은 내내 평탄한 능선 길이었다. 해발 1,000m 이상의 길에 산죽이 양쪽으로 늘어선 오솔길이었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라더니초가을 서늘한 바람은 고맙게 속삭이며, 전설 속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죽어서도 딸을 사경에서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고 오솔길의 풀을 맺던 결초보은(結草報恩)의 고사(故事)를 생각게 한다. 굽어보는 먼 산은 산 첩첩하였고, 그 산들 사이의 연무는 천국의 세상을 엿보게 하려는 듯 나를 황홀하게 하였다. 길의 좌측인 남쪽은 절벽 구간이었는데 도중도중에 커다란 암봉이 기이한 봉을 이루어서 아름다움을 보태어 주고 있다.
그 능선 끝에 이정표 ‘←아랫재 1.3km. 운문산 2.2km/ ←백운산 1.7km’로 여기가 백운산(白雲山, 885m)과 운문산의 갈림길인 모양이다. 여기서 아랫재까지는 40분 거리였다.
아랫재에도 허름하나마 ‘加雲山房’ 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대피소가 있다. 산속에 있는 집이라는 ‘산방(山房)’에다 구름‘[雲]’을 더하였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지나온 두 산장과 달리 문(門)도 열려 있다. 들어가 보니 통나무를 기둥으로 하고 천막으로 벽과 지붕을 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앉으라고 사방을 긴 의자로 꾸며 놓았다. 그러나 난로는 부서져 뒹굴고 쓰레기가 지저분한데 낙서는 다른 곳과는 격이 다르다. ‘감사히 머물다 갑니다.’,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우리 가족 건강하게’ 거기 서있는 이정표를 보니 가지산에서는 3.9km를 온 것이고, 운문산 정상은 1.5km이나 남았다. 석남터미널에서 가지산 오르는 거리가 3.0km이었으니 여기서는 지친 몸으로 그 절반 정도를 또 올라야 한다. 그 '加雲山房’이 있는 이 안부가 운문사로 가는 갈림길이다. ‘운문사’ 표지에는 거리가 쓰이지 않아서 그렇게 가까운 주변인가 하고 지도를 보니 3시간 30분 이상 더 하산하여야 하는 거리였다. *.운문사(雲門寺) 이야기 운문사를 ‘虎踞山雲門寺(호거산운문사)’라 쓰인 서적이 있다. 호거(虎踞)란 범이 무릎을 세우고 앉은 것을 말함이니 여기서는 돌산 가지산(加智山)의 지세(地勢)가 웅장한 모습을 말함이라.
호거산(虎踞山)이라 함은 이 절의 입구에서부터 운문산 주봉으로 이어진 산줄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산세가 이렇게 장엄하고, 신라의 서울인 경주가 지척이었으니 불교국가인 신라에서 절을 여기에 어찌 세우지 않았겠는가. 운문산 북쪽 기슭의 이 운문사는 진흥왕 때(591)에 신승(神僧)이 창건된 절로 이 절의 경내의 당우(堂宇)로는 우리나라에서 사찰 건물 중에 가장 크다는 만세루(萬歲樓)라는 조선조 초기의 건물이 있고, 그 앞마당에 앞서 말한 작갑전(鵲岬殿)이 있다. 이 절에 있는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보다 내가 이 운문사를 찾아보고 싶은 것을 이 절 주지로서 여기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었다는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김견명(金見明) 스님의 체취를 맞고 싶어서였다. 내가 국문학도이어서 더욱 간절한 것이다. 운문산을 암산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암산(岩山)이 아니라 암산[女山]이다. 그래서인가. 이 일대 절에는 비구니 사찰이 많다. 그래서 운문사에는 전국에서 가장 크다는 비구니의 ‘운문승가학원’이 있다. 1987년에는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어 현재 약 260여 명의 비구니가 승도의 길을 걷고 있다. 운문산 오름길이 오늘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가지산 오를 때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조금 전 내려온 가지산 능선이 1,000m인데 그보다 더 높이 올라야 하는가 하니 다시 또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올라가면서 뒤돌아보면서 능선과 운문산 길의 높이를 비교할 때는 걱정이 되더니, 저 능선을 눈아래 두니 회심의 미소가 입가에 맴돈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기쁨이었다. 산에 힘들여 오르다 정상이 가까워지면 정상 같은 곳이 정상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았다. 운문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얀 거친 바위를 보고 있어야 할 정상석을 찾아보아도 없다. 정상이 아니라 '전망 바위’였던 것이다. 운문산 정상은 또 하나의 봉을 이루어 두고 막 피어난 억새풀 우거진 사이로 놓인 통나무 길이 끝난 곳에, 천국의 계단 같은 나무 층계가 정상을 향하여 오르고 있다. 앞의 가지산 능선이 점점 낮아지더니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나 ilman도 오늘 가지산 정상에 내 키를 더하여 서 있게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너르고 굳고 맑고 올바른 기운을 호연지기(浩然之氣)라 하지 않던가. 갑자기 살아있다는 보람에 시흥(詩興)에 겨워 감격의 노래를 불러 보고 싶다. 친구야! 어느 산에
누구와
다녀왔냐고 물어 주지 않을래?. 몸이 마음을 부리는 나이에마음이 몸을 부리며 산악회 건강한 젊은들 따라 천리 길을 왔지만 온하루가 우리 마누라의 남편과만 함께였다네. 오름길의 거친 숨은 진한 땀이 되고 능선 길은 노래가 되고, 굽어보는 풍류가 되기도 하여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오늘이었다네, 그곳이 오늘은 가(加) 지(智) 산(山) 도립공원이었다네.
*. 하산 길의 억산(億山, 944m) '가지산'이 산림청이 정한 한국 100산 중의 하나인 명산(名山)이라면, '억산(億山)'이란 산이 많다는 뜻일 게다. 수많은 많은 산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산이기에 생긴 말이라는 말이다. 나는 함께 한 산우(山友)들에게 폐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가고 싶은 그 억산(億山)을 생략하고 상운사(上雲寺)로 해서 석골사(石骨寺)로 하산한다. 억산 가는 길은 우리들의 목적지 석골사를 돌아가는 길이요, 상운사 길은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상운사(上雲寺)는 해발 1,000m에 있는 산이니 이름처럼 구름 위에 있는 통도사의 말사로 예로부터 천진보탑으로 이름난 정진 터였다지만, 지금은 암자 같지도 않은 초라한 암자(庵子)로 있다. 6,25 직후 빨치산 소탕 작전의 일환으로 모든 당우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보다 요사체가 네 다섯배는 더 큰 암자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불자가 법당을 찾아오는 것이지 스님이 사는 요사체를 찾아 오겠는가. 주객전도라는 말을 실감하며 나그네의 머리를 젓게 한다. 요사체 앞의 통나무로 엮어 만든 평상이며 태양열발전을 위한 시설은 그렇게도 멋지던데. 이 부근에서 시작되는 물은 상운계곡이 되어 석골사로 향하여 흐르고 있었다. 이 계곡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험한 너덜겅 길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국내외로 등산을 다녀보았지만 이와 같은 돌길은 처음이다. 돌의 나라요, 돌의 세상이었다. 그 돌도 쓸모없는 막돌인데 나의 무릎은 쾅쾅 딛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속도는 불문가지라. 상운계곡 하산길 우측은 층암절벽의 바위산이었고 가는 길엔 돌탑이 많았다. 지도에서 보니 큰 바위로는 전구지바위, 치마바위, 용바위 . 범바위 등도 있었지만 표시가 없어서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있는 '전구지바위'가 있었는데 그것도 바위에 돌로 두드려 쓴 글자로
어느 호사가(好事家)가 자기 이름을 쓴 듯해서 그 바위 이름이라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폭포로 상운암 근처에 선녀폭포, 석골사 근처에 석골폭포가 있었지만 미국의 나이야가라 등을 보고 다닌 나의 눈에는 폭포 같지 않은 폭포였다. 길은 위험한 돌뿐이고 무릎보호대를 하고 겨우 겨우 내려가야 하는 지루한 길이라서 스스로 재미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사진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엮어 보았다. 조릿대가 묻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내가 예쁘니, 내 그림자가 예쁘니?" 작대기도 묻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이렇게 큰 바위를 받치고 있으니 나 힘 세지?"
돌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묻습니다. "내 신과 ilman 선생의 신 중 어느 것이 크지요? " 나무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석골사(石骨寺)도 그랬다. 돌이 얼마나 많으면 절 이름도 석골사石骨寺)라 했겠는가. 거기 가면 멋진 돌이나 안광을 놀라게 하는 멋진 돌로 만든 작품이 있겠거니 하고 별렀더니 막상 가서 보니 이름만 석골사인 평범한 산사(山寺)일뿐이었다.
석골사 가기 전에 억산(億山) 길과 합류되는 길 이정표가 있었으니 억산에 얽힌 돌에 관한 전설이나 들어보자.
- 옛날 억산아래 대비사란 절집에 주지스님과 상좌가 함께 기거하며 수도에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상좌의 몸이 너무나 싸늘한 것이었고, 스님이 잠든 깊은 밤이면 몰래 일어나 어디를 다녀오는 것이었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스님은 어느 날 밤 상좌의 뒤를 밟기 시작했는데 억산 아래 있는 대비못에 이르자 상좌는 옷을 훌훌 벗더니 물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러자 못의 물이 쫙 갈라지더니 상좌가 이무기로 변해서 못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더니 다시 옷을 입고 산을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산 능선을 넘어 운문사 쪽으로 급경사진 곳(속칭 이무기못)에 이르자 상좌는 또다시 웃옷을 벗더니 커다란 빗자루로 돌을 쓸어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신기하게도 상좌의 비질에 크고 작은 돌들이 가랑잎처럼 쓸려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스님은 너무나 놀래서 자기도 모르게 "상좌야 거기서 무얼 하느냐"고 외치듯 묻고 말았답니다. 이에 놀란 상좌가 스님을 발견하고는 탄식하였답니다. "1년만 있으면 천년을 채워 용이 될 수 있는데 저 중 때문에 1,000년을 못 채우는구나, 아, 억울하다." 크게 탄식하더니 갑자기 이무기로 변해 밀양 방면으로 도망가면서 꼬리부분으로 억산 산봉우리를 내리치니 산봉우리가 두 갈래로 갈라졌답니다. 정상부의 거대한 바위가 둘로 쪼개져 있는 것은 그 때문이랍니다.
2010년 9월 30~31일
연화산(蓮花山) 도립공원(道立公園)
앞에 산행 연화사 지도 넣을 것수정요
드디어 나는 몇 해를 벼르고 별러오던 경남 고성의 연화산(蓮花山) 가는 길의 옥천사(玉泉寺) 입구에 도착하였다.
이 먼 길을 팔순의 고령의 나이로 홀로 이렇게 달려 온 것은 나에겐 오래 동안 별러오던 하나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립공원 산행기'에 이어 죽기 전에 전국의 '도립공원(道立公園) 산행기'를 남기고 가겠다는 나의 아름다운 소원이 있어서다.
우리 창녕성씨(昌寧成氏) 종중 따라 성 시조 할아버지께 참배를 하러 경남 창녕(昌寧)에 왔던 길에 경남 가지산에 이어 도립공원으로 선정된 연화산(蓮花山)을 찾아온 것이다. 고성군(固城郡) 읍내 찜질방에서 모기의 먹이 되어 밤을 지새우고 옥천사행(玉泉寺行) 7시 30분 군내 버스 첫차를 타고 홀도 나섰던 것이다.
고성(固城)에는 인구가 5만 6천여 명밖에 안 되어서 25km 가량의 옥천사까지 승객은 일요일인데도 나까지 3명이 오르내릴 뿐인 군내 버스인데 몇 시간 간격이라는 교통편도 일정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도 그 비용은 군의 도움으로 운영 되는 버스 같다.
연화산 산행 들머리인 곳에서 내리니 '공룡발자국화석지(恐龍足跡化石地)' 까지는 1km요, 옥천사까지는 2km를 걸어야 하는 모양이다. 유난히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늦가을이었다.
*.연화산 들머리
연화산 가는 길이 옥천사(玉泉寺) 가는 길인데, 일요일인데도 고즈넉한 길의 등산객은 나 혼자뿐이다.
멀리 보이는 연화산을 향하여 마을 입구 새로 지은 8각정을 지나니 천리길을 벼르고 찾아온 '蓮花山道立公園' 석비가 우뚝 서서 나를 반긴다. 이어서 나타나는 '집단시설지구 주차장'이 바로 버스에서 내려 보던 '공룡발자국화석지(恐龍足跡化石地)'였다. 공룡(恐龍)이란 무엇인가를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에게 물어 보았다.
-공룡(恐龍)이란 중생대(쥐라기 및 백악기)에 걸쳐 번성하다가 지금은 절멸되어 화석(化石)으로나 발견되는 몸 길이 5 ~ 25m의 거대한 길동물(파충류)의 한 무리들이다. 일반적으로 공룡은 긴 목과 큰 꼬리를 가지고 있고, 앞다리는 뒷다리보다 짧으며, 걸어 다니는 데에 주로 뒷다리를 쓴 듯하다. 모양은 악어와 비슷하지만 뼈대의 구조상으로 보면 조류(鳥類)와 비슷한 점이 많다.
경남 고성(固城)은 중생대 시대에 공룡들이 살다간 곳이어서 고성은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고성에는 '세계최대 공룡탑'과 '국내 최초의 공룡박물관'이 있다. 그래서 군내 모든 버스정류소 곳곳은 공룡의 조각품으로 장식한 정류장으로 서 있다. 그 공룡은 해안선이 아닌 읍내에서 30km 이상 떨어진 이 옥천사 부근에도 그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연화산 집단시설지구 주차장 들머리에 서 개울 바위에 찍힌 공룡발자국화석(恐龍足跡化石)을 굽어보며 나무층계를 지나 완만한 산길을 오르고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암벽쉼터'까지는 1.12km지만 잔 돌길이고 오래간만에 하는 등산에다가 무성한 숲으로 전망이 꽉 막힌 오름길이 계속되는 길이라서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렇게 도달한 '암벽쉼터'라는 곳이 암벽은 물론 전망도 없이 단순한 이정표에 평상 하나가 있을 뿐이어서 도립공원이라고 먼 길을 찾아온 사람을 실망케 한다.
거기서부터는 계속 평탄한 내림길이다가 다시 오름길이 시작되고 통나무 층계가 정상이 가까움을 말해주더니 나타나는 불쑥 나타나는 돌무더기를 지나니 '내가 연화제1봉(489m)이요.' 하는 듯이 정상석이 나를 맞는다. 그런데 정상(頂上)이면 꼭 있어야 할 전망이 숲으로 꼭 막혀 있다. 연화산이 아니라 연화산 자연삼림지대라고 이름을 고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느재고개'란 이정표 따라 아주 평탄한 내림길이 시작된다.
0.7 km 아래에 있는 느재고개에 도착하고 보니 안부에 있는 보통 산의 고개가 아니라 아스팔트의 대로 찻길로 먹거리를 팔고 있는 상혼도 있다. 이정표를 보니 느재고개에서 왼쪽 아래 도로로 가면 옥천사 후문이요, 산쪽 도로로 오르면 '적멸보궁'이 1km 거리에 있는 모양이다.
우리들은 적별보궁(寂滅寶宮)이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으로 알고 있다. 신라의 승려 지장(慈藏)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경남 양산 통도사(通度寺),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上院寺), 살악산 봉정암(鳳頂庵), 태백산 정암사(淨巖寺),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法興寺)로 알고 있는데 한국에는 왜 이리 정멸보궁이 많은가. 부처님의 사리와 정골이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 그렇게 많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부산 태종대 절에 가서도 적멸보궁을 보았는데 연화사에도 적멸보궁이 있다니-.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달리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적멸궁(寂滅宮)이 불상을 봉안하지 아니하고 법당만 있는 불전을 뜻하는 말이라거나, 적멸도량(寂滅道場)이 부처가 화엄경을 설법한 보리수 아래를 일컫는 말이라니 말이다. 옥천사가 당(唐) 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라서 이에 연관하여 연화사 적멸보궁이 생긴 것 같다.
*. 옥천사 이야기
느재고개에서 옥천사가 요 아래 가까이 있다 하여 나는 한참 망설였다. 옥천사와 연화산 중 어느 곳을 먼저 가야 하는가 해서였다. 앞서 말한 대로 연화산을 보러 왔으니 옥천사를 먼저 가 봐야 둘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우선 옥천사를 향하기로 하였다.
느재고개에서 가는 옥천사 길은 사천왕문 속으로 내려가는 절 경내의 길이었다.
옥천사(玉泉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가서 지의법사(智儀法師)에게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창건한 절이라 한다.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末寺)에 불과하지만, 창건 당시에는 화엄종찰(華嚴宗刹)로 '화엄 10 사찰'(華嚴十寺刹) 중에 하나였다. 임란과 정유왜란 때에 옥천사는 승병의 군영 (軍營)으로 호국사찰(護國寺刹)이기도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을 '玉泉寺'(옥천사)라 하게 된 것은 대웅전 뒤에 위치한 끊임없이 솟아나는 달고 맛있는 석간수인 옥천(玉泉)에서 유래한다. 이 옥천샘은 위장병,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나 있어 절을 찾는 이마다 옥천각(玉泉閣)을 들러 물을 마시고 간다.
이 절은 임진왜란에 병화를 입어 회진된 것을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서 현재는 대웅전(大雄殿, 유형문화재 132호)을 중심으로 앞에는 자방루(滋芳樓), 왼쪽에 심검당(尋劍堂), 오른쪽에는 적묵당(寂默堂)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대웅전 뒤편에 명부전, 금당, 팔상전, 나한전,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 등이 대웅전을 감싸듯이 둘러 서 있다.
이 절의 문화재로 가장 유명한 것은 보물 제495호인 '임자명 반자(壬子銘飯子)'이다. '임자명 반자'란 금속으로 만든 징 같은 악기로 그 둘레에 '고려23왕환갑지년임자(高麗二十三王還甲之年壬子)'라는 명문(銘文)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반자'란 '금고(金鼓)'라고도 하는 고려와·조선시대에 절에서 사용히단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를 말한다.
이 절에서 그 다음에 유명한 것이 '자방루(滋芳樓,유형문화재 제 53호)'다.
자방루는 대웅전(大雄殿, 유형문화재 제132호) 앞마당을 사이 두고 있는 대웅전보다 더 큰 규모의 건물로 위 설명에 없는 그 안의 멋진 그림이 있으니 이를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후회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자방루 넓은 앞뜰 우측에 근대 불교 정화 운동의 주역이던 청담(靑潭)스님의 화강암의 사리탑이 서 있다.
진주에서 살던 청담스님이 40리 밖에 있는 옥천사에 와 출가하여 석학인 박한영(朴漢永)을 모시고 득도(得度)한 데서 연유된 탑이다.
득도(得度)란 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믿어 부처님의 제도(濟度)를 얻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대웅전 앞마당에 구태어 사리탑을 세워야 하는가 하고 이를 아타까와 하는 이들의 말이 많은 탑이다.
*. 연화산 가는 길
연화산길을 가기 위해서 내려왔던 길인 느재고개로 다시 향하여 오르고 있다. 느재고개에서 연화산을 향하여 들어서려 하니 '연화산 1.0km/ 남산 0.9km/연화1봉 0.8km' 라는 이정표가 있다. 물론 나는 연화산을 향하는데 가는 길이 지금까지보다 더 완만한 오름길이더니
여기서도 통나무 층계가 있어 오르니'연화제1봉'처럼 나무로 만든 널찍한 평상(平床)이 보이더니 드디어 연화산 정상(528m)이 나타난다.
고성은 남해바다의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에위치해 있는 군이다. 나는 전에 고성에 와서 벽방산(碧芳山, 700m)과 거류산(去流山, 570.5m)을 등산하며 정상에서 찬란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본 사람이라 연하산의 전망도 그러리라 기대했더니 도립공원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연화산 정상마져 숲에 가려서 굽어 볼 수 있는 보는 아무런 전망이 전혀 없으니 말이 되는 일인가. 자고로 산고곡심(山高谷深)이라 하여 산이 높아야 골이 깊은 법인데 연화산 정상은 528m로 높이로도, 계곡으로도 자랑할 것이 없다.
기암괴석이 없는 육산(肉山)으로 산세가 웅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기자기한 등산의 멋도 없는 평범한 육산일 뿐이다. 게다가 다른 도립공원에 비해서 등산객을 배려해서 각 정상 이외에는 정성 들여 꾸민 아무런 시설 하나도 없는 도립공원이었다.
그러면서도 경남의 그 숱한 산을 제치고 가지산(迦智山, 1,241m)과 나란이 경남의 도립공원으로 선정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경남에는 연화산보다 더 유명한 산으로 앞에서 말한 고성의 거류산(570.5m)도 있고, 천황산(1,189m), 화왕산(756.2m), 금산(701m)등도 있지 않은가. 유명한 절간'에 해당하는 옥천사가 있어 명산 대열에 들어 경남 도립공원의 하나로 선정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연화산은 옥녀봉, 선도봉, 망선봉의 세 봉우리가 어울린 모습이 연꽃 형상을 닮았다 하여 연화산(蓮花山)이라 이름 하였다는 산이다. 연화산의 북쪽 기슭에 옥천사(玉泉寺)와 그 건너에 백련암(白蓮庵), 청련암(靑蓮庵) , 북의 연대암(蓮臺庵)의 이름 속에 연꽃 '蓮' 자가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연화산(蓮花山)에서 유래한 이름이요, 연화산(蓮花山)은 산 이름처럼 불교와 깊고 밀접한 연관을 가진 산임을 알 수가 있겠다. 연꽃은 부처의 염화시중의 미소(拈華示衆 微笑)와 함께 불교에서는 성화(聖花)라 하여 만다라화(曼陀羅華)라고도 하니,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화산은 경관이 아름답고 오래된 사찰과 문화재가 많아 198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이라 생각 된다. 산림청도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연화산을 선정하였다 한다.
그래서 연화산에 와서는 옥천사의 이모저모를 놓치지 않고 보고 가기를 권하고 싶다.
연화산 정상에서 얼마쯤 하산하니 '운암고개'가 있고 이정표가 나에게 0.22km의 남산을 통하여 0.6km 황새고개를 향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러나 목적지인 연화산을 오른 후라서 갑자기 고성 가는 교통편이 걱정이 된다. 경기도 일산(一山)으로 귀가해야 하는데 고성까지의 대중교통은 한 시간 이상 간격인데다가 그것도 일정하지가 않았다. 옥천사에서 택시를 부르면 3~4 만원 이상의 거금을 주고도 고성에서 오는 택시를 기다려야만 한다니 백수(白首)의 처지로는 무리였다. 다행히 고성에 사는 박오영 사장의 호의로 그 차편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집에 돌아 와서 나의 "국립공원산행기"을 박사장에게 붙여 그 고마움을 표하였다. '도립공원 산행기'를 책으로 내고 싶어도 연화산이 너무 멀어서 걸림돌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렇게 풀었으니 발로 쓴 나의 '도립공원 산행기'도 상재할 날이 이제 멀지 않은 것 같다.
*.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 그림 출처: 서울신문 제주도란 건널 '제(濟)', 고을 '주(州)'이니 바다를 건너 있는 고을이란 말이다. 항해가 어려웠던 시절 바다 건너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런 이름이 생겼겠는가. 그 제주도를 일반적으로 말하여 한자로 쓴다면 '濟州島'일까, '濟州道'일까? 물론 섬으로 말한다면 '濟州島'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쓸 때는 '濟州道'가 맞다. '島'보다 '道'가 상위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제주도에는 유인도(有人島)가 다섯이 있다. 추자도, 우도, 가파도, 비양도, 마라도다. 나는 이번 여행길에 한라산 곳곳을 누비리라 꿈꾸며 왔다가 제주에 막상 와서 보니 '이 나이에 언제 다시 제주도에 오랴 '하는 마음에 제주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터미널에 들려 모슬포(摹瑟浦)를 향하였다. 마라도를 가고 싶어서다. 모슬포 가는 길에는 벚꽃이 한창이었고, 이어서 유채꽃이 가로수와 함께 남국의 정서를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모슬포는 제주도 서남단에 있는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항구다. 이 항구는 암석해안과 암초로 둘러싸여 천연의 방파제가 돼 있는 곳으로 마라도 정기여객선이 출발하는 곳이다. 마라도는 모슬포 항에서 11km/25분 거리에 있는 한국최남단의 섬이다. 섬이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니 섬 전체가 산이나 언덕 하나도 없는 하나의 골프장 같다. 거대한 항공모함과도 같다. 크기가 여의도(7.0㎞²)의 1/23 정도로 작은 0.3㎞²요, 섬 둘레가 4.2km, 동서가 0.5km, 남북이 1.25km밖에 안 되는 고구마 모양의 조그만 섬이다. 여기서 관광수입과 어업으로 생활하는 주민 70여명이 살아가고 있다. 마라도는 원래 무인도였는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20년 전인 1883년(고종 20)부터라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정골에 김씨라는 이가 투전(投錢)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하여 생활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자 그의 친척들이 제주 목사에게 이들이 마라도 섬의 개척을 하게 인가하여 달라고. 청원하여 개간 허가를 얻어 김(金)· 나(羅)· 한(韓)씨 등 영세농어민 4~5세대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마라도는 금섬[禁島]으로 어부들이 접근을 꺼리던 섬이었다. 섬 전체가 울창한 원시림이어서 '남방애'라는 제주 고유의 나무절구를 만들기 위해서 아름드리나무를 구하러 찾던 섬이었다. 그러던 곳을 경작지를 마련하고자 숲을 태워버리는 바람에 오늘날과 같이 나무가 없는 섬이 되고 말았다. 숲을 태우게 된 동기를 다르게 말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향 제주도를 떠나 이 섬에 이주해 온 사람 중에 퉁소를 아주 잘 부는 사람이 있었다. 휘영청 달 밝은 달밤에 퉁소를 불고 있으면 그 소리에 수많은 뱀들이 몰려 왔다고 한다. 이에 놀란 주민들이 숲에 불을 질렀더니 나무는 석 달 열흘 동안이나 타다가 불길이 멈추었다. 이때에 놀란 뱀들이 꼬리를 서로 물고 뭍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래서 마라도에는 뱀과 개구리가 없는 섬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라도에는 인공림을 포함해서도 사람 키 이상 큰 나무가 없는 섬이 되고 말았다. 마라도에 있는 선착장 넷 중 우리는 ‘자리덕선착장’에서 하선한다. '자리덕'이란 이름은 이 선착장 일대가 사시사철 자리돔 낚시의 포인트이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 한다. 하선할 때 유념할 것은 선착장을 기억하고 꼭 그리로 되돌아 와야 하는 것이다. 마라도 행 선박으로는 정기여객선이 있지만 유람선도 있어 승선 위치가 서로 다르고 가는데도 다른데다가 우리는 정기여객선도 왕복표를 끊었기 때문이다. 그 선착장 좌측에 대문바위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개의 입을 벌리고 우리를 맞고 있다. 억겁의 세월동안 검은 현무암 바위가 파도로 깎기우고 뚫린 단애요 해식 동굴이 많았다. 그 해안선과 그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2000년 7월 천연기념물 제423호로 지정 되었다.
우리를 제일 먼저 맞는 것은 선착장에서 층계를 올라서 본 골프장에서 보던 12인승 전동카트였다. 반가와 마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동카트를 타고 가서 자기네 자장면을 먹으라는 것이다. 이런 전동차가 이 섬에 34대나 된다. 나는 이를 타고 원조 자장면 집이라는 곳으로 향하였다. 그곳은 차로 5분도 체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 내부에는 이곳에서 해물자장면을 먹고 남기고 간 사람들의 싸인으로 벽과 온 천장을 꾸미고 있었는데, 제주 소주를 4천원에 팔고 있었다. 종업원에게 왜 '마라도 해물자장'이 유명한가를 물었더니 청정해역의 해물 때문이라고 하지만 TV CF의 어느 핸드폰 광고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는 장면이 방영된 후 유명해 진 것 같다는 것이 정설 같다.그도 그럴 것이 섬 어디나 핸드폰 하나로 배달이 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렇다. 전동차는 2시간에 2만원을 받고 대여도 하여 주는 모양이다. 어느 횟집에서는 3만원만 주고 회를 시키면 무료로 대여하여 주어서 회 준비하는 동안에 섬 일주를 10분 하고 와서 회를 먹는다고도 한다. 자전거 대여소도 있었다. 해물자장을 먹은 후 나는 아까 내린 선착장으로 다시 내려갔다. 마라도 관광을 처음부터 하고 싶어서였다. 마라도는 관광은 중앙에 남북으로 바다 돌을 깎아 만든 신작로를 중심으로 하여 해안선 도로를 따라 다니는 것이다. 천천히 보이는 곳마다 사진을 찍으며 다녔더니 2시가 30분 정도 소요 되었다. *.마라도의 절, 성당과 기독교 교회 주민등록상으로 26가구에 70여 명이 산다는 이 작은 섬에도 교회와 성당과 절이 있다. 이곳이 국토의 최남단으로 전국의 수없는 관광객이 모여 드는 곳이라서 각종 종교들이 포교를 위한 차원에서 다투어 지은 모양이다. 그 중에서 선착장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관음성지 기원정사'였다. 이 절에는 제주를 마주 보고 있는 해수관음보살 입상이 그중 멋있는데 일붕 스님의 동상도 있다. 내가 아는 일붕(一鵬) 서경보스님은 미국 템플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1백26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최다 저서, 최다 통일기원비를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기승(奇僧)이다. 마라도 통일기원비도 그 중에 하나였다. 마라도에 절을 세우게 된 것은 서귀포에서 1914년 출생하고 19세에 남제주군 산방굴사에서 강혜월스님을 은사로 불교계에 입문한 인연 때문인 것 같다. *. 할망당(애기업개당) 이야기 자리덕선착장과 살래덕선착장 사이 해안가에 '처녀당' 또는 '애기업개당' 이름을 가진 '할망당'이 있다. 여기에는 애기업개에 대한 슬픈 전설이 전하여 온다. -마라도가 무인도였던 옛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모슬포에서 잠수(潛水)를 하고 살던 이씨 부인이 물을 길러 바닷가에 갔다가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숲 속에서 태어난 지 3개월도 안 되는 여자 아이를 발견한 것이었다. 이 아이의 부모를 찾던 이씨 부인은 수양딸로 삼아 길렀다. 그 이씨 부인에게도 태기가 있어 첫아들을 낳으니 그 수양딸이 그 아들의 애기업개가 되어 주었다. 당시 마라도는 섬 주변에 각종 어류와 해산물이 풍부했지만 마라도는 금단의 섬이어서 그것들을 잡으면 바다 신이 노해서 거친 바람과 흉작으로 화를 입는다고 하는 금기의 섬이었다. 그래도 매년 봄이 되면 망종(6월 5일 경)으로부터 보름 동안 모슬포 잠녀(潛女)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라도 '섬비물' 해안에 배를 대고 물질을 시작하곤 하였다. 그 무렵은 유난히 날씨도 좋고 소라, 전복 등도 너무 많이 잡히는 바람에 이래를 지내는 동안 가지고간 양식이 다 떨어져서 그만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떠나려면 잔잔하던 바다가 험악하게 거칠어지고, 배에서 내리면 잔잔해 지는 것이었다. "이거 틀림없이 바다 신이 노한 거라. 이제 살앙 돌아가긴 틀린 거 닮수다." 그때 나이 많은 잠수 선주(船主)가 지난 밤 꿈 예기를 했다. "어젯밤 꿈에 신선이 나타나 이르기를 애기업개를 두고 가야지 아니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거랜 합디다. 어멍도 아방도 없는 아이니 두고 가야쿠다." 이씨 부인역시 똑 같은 꿈을 꾸었다. 할 수 없이 일행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아기업개를 두고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고, 얘야. 아기 기저귀를 그냥 두고 왔구나. 저 바위 위에 하얀 걸렁이 보이지? 어른 가서 걷어 오너라." 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배는 도망치듯 마라도를 빠져나가 모슬포를 향하였다. 아기업개는 울며불며 엄마를 불러댔지만 바다는 신기하게도 잔잔하기만 하였다. 3년 후 가 보았더니 모슬포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굶주림에 지쳐 죽은 애기업개의 뼈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정성껏 수습하여 그 자리에 곱게 묻어주고 애기업개를 위해 그 자리에 당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매달 7일과 17일, 27일마다 정성껏 제를 지내고 해상 안전을 기원하니 그 후로 바다에서 사람들이 죽는 일이 드물어졌다고 한다. *. 가파초등학교 마라도 분교 한 학급이 80명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 성인들의 눈에는 시골 학교에 그 큰 건물에 비하여 너무나 적은 학생 수에 신기해 하는 법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학교인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 앞에 섰다. 이 학교는 전교생이 1명이다가 금년에 2명의 신입생이 늘어 3학년 1명, 1학년 2명 전교생 총 3명으로 선생님은 1명이다. 교문을 가로지른 3개의 정랑에 눈길이 가는 것이 그래서다. 제주 옛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정랑이 3개가 걸쳐 있으면 주인 식구가 다 없다는 뜻이고, 2개의 경우는 아이들이 근처에서 놀고 있다는 뜻이요, 하나는 주인이 이웃에 가서 마소 출입을 막기 위함이라지만 그건 원칙일 뿐이고 지금은 출입을 금하는 표시로만 쓰일 뿐이다. 이 마라분교 교문의 정랑 3은 오히려 출입금지를 위한 것이어서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둘러보는 일은 삼가고 지나간다. *. 마라도 정자 정자(亭子)란 산수풍경이 좋은 곳에 사방을 둘러 볼 수 있게 벽 없이 네 기둥만으로 지은 집이다. 그러나 마라도 정자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정자를 짓되 일출과 일몰의 놀을 보기 좋은 곳에 지은 것이다. 그 정자는 산이 없는 마라도나 바다 위 배 위에서 멀리서 보면 가장 눈에 띄는 멋진 풍경 중에 하나가 되었다. 마라도에서는 그보다 높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12월 31일과 1월 1일이 일출 행사로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지는 해와 뜨는 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마라도의 식수 마라도가 120여 년 이전에 무인도였던 것은 무엇보다 식수(食水) 난 때문이었던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하나가 빗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라도를 거닐다 보면 웅덩이가 자주 눈에 띠는데 이는 주민들이 허드레 물을 쓰기 위해서 빗물을 받아 놓기 위한 것이다. 마라도 등대 가는 길에 있는 담수화시설비를 보니 이제는 전기의 힘으로 담수화 하여 식수를 해결하는 모양이다. 그 부근에 있는 원형시설의 태양발전 시설은 30kw급 태양광 발전소로 해수의 담수화는 물론 마라도의 27가구에 전력을 공급하여 전등은 물론 TV 등과 같은 문명시설을 즐기게 하고 있었다. *.마라도 향로표지(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어디에 있을까? 1903년에 건립된 인천 팔미도 등대다. 그러나 이보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마라도 등대다. 마라도 등대는 마라도에서 제일 높은 지대인 해발 39m에 설치된 마라도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다. 1915년에 무인등대로 설치되었다가 1955년부터 유인 등대로 바뀐 것인데 이 등대의 불빛은 한국에서 제일 밝다는 등대로 38km 떨어진 해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7.5㎾급 풍력발전기 2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고 그 아래에는 태양열 발전소가 설치되어 있어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하였다. 그 관리소 앞에는 각국의 유명 등대의 견본들이 설치되어 있어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게다가 제주지방 해양수산청에서는 제 10회 '바다의 날'인 2005년 5월 30일에 타임캡슐을 묻어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10년 뒤에 개봉하기로 한 모양인데 그 10년이 너무 짧은 시대라 아쉬움이 앞선다. *.'대한민국 최남단비를 철거하자.' 마라도에 와서 꼭 사진 한 장만 찍어가라면 '대한민국 최남단비'일 것이다. Korea의 3,400여 개의 섬 중에 최남단 마라도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최남단의 비보다 더 남쪽 아래에 호랑이가 웅크린 모양의 '장군바위'가 전설과 함께 서있다. -하늘에 살고 있는 천신(天神)이 땅에 살고 있는 지신(地神)을 만나기 위해서 내려오는 길목이 있는 바위가 바로 장군 바위다. 주민들이 해신제(海神祭)를 지내는 곳이요, 그래서 누구라도 이 바위에 올라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신성시하는 바위다. 그 바위 옆에 조국순례기념비가 있고 민족의 염원을 이렇게 포효하고 있다. -民族이 念願 하나로 모아/ 南北統一의 발판 삼고 凍土를 解凍시키는 그 날/ 馬羅여! 砲哮하며 五大洋을 向하자 그런데 이 '대한민국최남단'을 없애 버리자는 사람들도 있다. 한 마디로 마라도 149km지점에 암초지대지만 '이어도'가 있고 이어도에다 한국의 '해양과학기지'까지 조성해 놓았는데 여기를 대한민국최남단이라 비석까지 세워 놓는다면 이는 이어도가 우리나라 영토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다. 그렇지 않아도 독도처럼, 중국과 영토분쟁이 있는 지역이라서 이는 국익의 차원에서 심사숙고하여야 할 일이지만 나는 해양법의 문외한이라도 이 비가 오히려 이어도를 기억하는 게기가 되는 듯하여 기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바다에 빠지듯 낮게 낮게 선지평도(地平島) 마라도는 하나의 비행접시(UFO)한 척의 항공모함.국토(國土)의 마침표(.)인가물음표(?)인가오메가(Ω)가 알파(α)에게 내 나라 사랑에 보고 싶어봄이 제일 먼저 노크한다는마라도에서 서서 나는 묻고 또 묻고 있다.
-마라도
성산 일출봉(城山日出峰) 2015. 1. 3퇴고
*. 유네스코 세계7대 자연유산 제주
1960년대만 해도 제주도는 신혼여행으로나 겨우 찾을 수 있던 관광지였다.
그것도 비교적 잘 사는 이가 제주도로, 나 같은 서민들은 온양온천이나 가던 곳에 지금은 좋은 세월을 만나서 드디어 나도 유네스코가 인증한 계7대 자연유산인 성산 일출봉 보러 광광차로 온 것이다.
수도권에서 제주도 관광을 개인적으로 할 경우 차편은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에 승용차를 싣고 오거나(아반데 경우 편도184,330원), 제주시의 공항이나 여객선 터미널에서 렌터카를 이용하거나(아반데 경우24시간 원 보험료 포함, 운전사 5만원 선택), 버스를 이용하는 길이다.
버스를 이용할 때는 15분 거리에 있는 제주시 시외버스 터미널에 가는 편이 좋다.
우리는 큰 딸이 운전하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도 여객터미널에서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저렴한 곳을 고르니 2일 반 동안, 24시간 직접 운전하고 보험 24,000원을 합해서 7만 원가량 든 것 같다. 성산일출봉은 공항이나 여객터미널에서 차로 80분 코스였다.
여객선터미널에는 ‘영주십경(瀛州十景)과 ‘세계 7대 자연유산’이 그림으로 소개 되어 있었다.
-제주도(Korea)/ -테이블 산(남아프리카공화국)/ 이구아스폭포(아르헨티나) /-코모도국립공원(인도네시아)-아마존(부라질) /-하롱베이(베트남)/-푸에르토프린세사 지하강(필리핀 )
제주도와 함께 세계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곳은 남미의 2, 아프리카 1, 아세아 4 곳으로 아세아가 제일 많다.
여행작가라고 떠-억 명함까지 박아가지고 다니는 나는 이중 하롱베이와 성산포밖에 가보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옹색한 변명으로 자위하고 있다.
여행작가(旅行作家)란 여행가(旅行家)처럼 많은 곳을 찾아다닌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여행 가거나, 여행을 다녀와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 성산 일출봉
다음은 성산봉 일언이 세계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어 받은 인증서다.
자연유산으로서 유일하고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어 전 인류의 이익을 위해 보호가 필요한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을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합니다.” -2007. 2 유네스코 사무총장
위 인증서에서처럼 UNESCO에서 제주도를 지정한 세계자연유산 명칭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라는데 3관왕 세계자연유산이란 말은 무슨 말일까.
그 첫째가 한라산 천연보호 구역이요, 둘째가 성산일출봉 응화구, 셋째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거문오름,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를 말하는 것이다.
위 인증서에서 말하는 ‘제주 화산섬’은 한라산· 성산일출봉을 주로 말하는 것이지만, 제주도는 섬 전체가 ‘화산 박물관’이라 말할 만큼 화산 지형이 많다.
한라산을 위시해서 360개의 오름은 독특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용암동굴’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를 말하는 것으로 160여 개의 지하 용암동굴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일등공신은 성산포 일출봉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적지 않은 명승지를 찾아다닌 내 눈에도 성산일출봉 같이 아름다운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 Korea의 국력이 뒷받침한 것으로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늘을 사는 사람으로서 가슴이 뿌듯하다.
*성산 일출봉(제주도 기념물 제36호)의 유래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성산 일출봉(182m)은 가운데가 사발처럼 움푹하게 들어간 분화구 속에 2.64 km² 정도의 넓은 초지(草地)가 형성되어 있다.
그 둘레를 99개 기암의 봉우리들이 왕관처럼 빙 둘러 둘러싸고 있는 것이 마치 성벽(城壁)처럼 보여 옛 사람들은 이 지역을 성산(城山)이라 불렀다.
그 성산은 타원형인 제주도의 동쪽에 돌출한 성산반도 끝머리에 위치한 화산섬이라서 ‘일출봉(日出峰)’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옛날 성산리 주민들은 그 분지에 연료나 초가지붕을 이는 띠의 채초지(採草地)로나, 말의 방목지(放牧地)로 이용하기 위해서 움푹 들어간 분지를 화전민이 불을 지르기도[火入] 하였기 때문에 현재 나무는 거의 없고 억새 띠가 주종을 이룬다. 그 일출봉은 영주십경(瀛州十景) 중에서도 제1경을 뽐낸다.
그런데 어떻게 바닷가에 그처럼 아름다운 분화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일까?
약 오천여 년 전, 바닷물에 잠겨 있던 물을 흠뻑 머금은 두께 120m의 용암이 분출하던 마그마(magma, 바윗물)는 이 물과 반응하여 강력한 수성화산(水性火山) 폭발을 일으키며 응회구(凝灰口)를 만들 수 있었다. 그 곁에 있는 섬 우도(牛島)에서 일출봉을 보면 동쪽 해안의 거대한 고성(高城)처럼 보인다.
그 해안 절벽은 다양한 구조를 보여 주고 있어 세계 수성화산(水性火山)의 분출과 퇴적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다음은 성산일출봉의 지정 현황이다.
∙ -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 420호(2000.7.18)
- 세계자연유산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2007.7.2)
- 세계지질공원(2010. 10. 1)
오천년 전 바닷가에서 화산분출로 만들어 졌을 당시의 일출봉은 하나의 화산섬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세월이 지나는 동안 거센 파도에 그 크기가 작아졌고, 그때 깎여 나간 돌들과 모래 등이 동쪽 연안에 쌓여 육지와 연결되면서 현재와 같은 육지의 일부분인 반도 지형으로 변한 것이다.
해발 182m의 일출봉 오르는 길은 능선 없이 계속되는 층계여서 힘들었지만, 막 지는 해의 노을의 바다와 어울려서 그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등반로 주변에는 뾰족하게 혹은 수직으로 서있는 바위들은 화산활동 후 굳어지지 않은 많은 화산재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면서 침식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기기괴괴한 동경돌 바위, 조개바위, 곰바위, 초관바위, 콧구멍바위 등 이름처럼 모양도 다양하다.
이들 바위들은 솟아난 것이 아니라 침식작용에 의해 깎여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 각각의 바위에 깃든 전설은 형상만큼 다양한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그중 하나에 등경돌(燈檠돌: 장경들) 바위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 바위 앞을 지나는 주민들은 네 번씩 이 바위에 절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첫 번째 하는 두 번의 절은 옛날 제주 섬을 창조한 어질고 아름다운 여신 설문대할망에게 드리는 인사요, 다음 두 번의 절은 고려 말 한(漢) 나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김통정 장군에게 드리는 것이었다.설문대할망은 낮에는 치마폭에 흙을 퍼 날라 성을 만들고, 밤에는 이 바위 위에 등잔을 켜 올려놓고 흙을 나르다 헤어진 치마폭을 바느질했다 한다.
이때 등잔 높이가 낮아서 작은 바위를 하나 더 얹어 현재의 모양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김통정 장군은 성산마을에 성을 쌓아 나라를 지켰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한다.
장군은 동경돌 아래 앉아 바다를 응시하며 기도하며 도를 닦기도 하고, 때로는 바위 위로 뛰어 오르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하는데 바위 의 중간에 큰 발자국 모양이 패인 것도 이 때문이라 한다.
예전에는 마을 주민들이 이 바위 앞에서 재를 지내 마을의 번영과 가족의 안녕을 빌었으며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도 김통정 장군의 정기를 받은 이 바위의 수호로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
등반하는 길에 외국인들이 많은 걸 보니 내가 오르는 성산 일출봉은 세계인이 와보기를 꿈꾸는 국제적인 명승지가 된 것 같다.
가는 길 쓰레기통도 아름답던데 기왕이면 그 층계도 아름다운 무늬 있는 화강암으로 바꾸었으면 오죽 좋으랴 하였다. 백두산을 서파(西坡)로 오르면서 보던 1,300여 계단의 아름다움이 생각이 나서다.
드디어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지름 6백m, 해발 90m라는 8만여 평이나 되는 분화구가 보인다. 옛날에 왔을 때는 그 분화구까지 내려갈 수 있었고, 거기에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는데-.
봄에 왔더라면 그 분화구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그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시들어 가는 억새와 띠밭이라 예보던 푸른 초원이 아닌 곳을 눈으로만 굽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욕망은 꽃 피우나 소유는 시들게 한다.”더니 아름다움 속에 들어가니 아름다움을 잊게 되는 것 같다.
- 2012. 10년 우도, 차귀도 갔다가.
우도(牛島) 해양도립공원 2.15. 1. 3 퇴고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2010년에 출간한 '한국국립공원 산행기'에 이어, '한국 도립공원 산행기'를 출간하겠다고 노래하며 벼르다가 희수(喜壽)를 넘기더니 이제 팔순(八旬)에 이르렀다.
그 도립공원이 전국에 31개가 있는데 제주도에 무려 5개의 도립공원이 있다.
우도, 성산 일출봉, 마라도, 서귀포해양공원, 조각공원, 추자도,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제주도에 도착하여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이 우도해양도립공원이었다.
그 부근에 성산 일출봉이 있어서 함께 보고 싶어서다.
-우도(牛島)의 유래: 우도도 200 만 년 전에 화산 활동으로 이루어진 화산도(火山島)다.
숙종 무렵에는 국유 목장으로 국마(國馬)를 사육 관리하던 곳이다가, 1844년 무렵 김석린 진사 일행이 입도(入島)하여 정착하였다. 이어 향교 훈장 오유학 선생이 입도(入島)하여 연(演坪)평이라 하다가 우도면으로(1986. 4) 승격된 섬으로, 처음에는 해양 군립공원이었다가 2008년부터 해양도립공원이 된 화산도이다.이 섬은 물소가 머리를 내민 모양[牛頭形]이라 하여 섬 이름을 우도(牛島)라 하였다.또한 이 섬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것이, 어찌 보면 두둑과 같다 하여 우도를 '연평(演坪)'이라고도 하였다. ‘연평초증등학’교의 교명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넓이는 여의도보다 약간 작은 섬이지만 제주도의 부속 섬 62 개 중 추자도 다음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우도 행 선박은 성산포에서 주로 출항하는데 성산 포구에서 우도까지는 약 3.8km로 15분 거리를 1시간 간격으로 출항한다.(참고: 편도3,500원' 선료 2,000원, 입도료 1,000원, 터미널 이용료 500원 포함)
왼쪽의 시(詩)는 조선 숙종 때 문신인 우암 남구명(寓菴 南九明)이 제주통판(濟州通判)이란 벼슬을 지낼 때 우도의 경치를 읊은 시다.
그 중 우도를 "많은 일 벌여놓은 하늘의 조화/ 부지런히 뜻을 펴서 기이한 볼거리/ 나열함이 꽃 일렁거림이라" 읊은 것이 특히 인상적이다. 우도의 경치를 한 마디로 시화했기 때문이다.
우도는 섬 중에 섬으로 에메랄드 빛 바다로 자연이 그대로 묻어나는 섬이다.
그 우도를 제대로 보려면 우도 8경을 알아야 한다.
그 8경을 '주야 천지(晝夜天地)/ 전후 동서(前後東西)'로 이 섬은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고 우도 주민들이 입을 모아 그 명칭을 지어놓고 사랑하며 살고 있다.
*. 우도 8경
다음 그림은 제주해양 터미널에 걸려 있는 소개 그림의 자료 들이다.
제1경 주간명월(晝間明月): 이 섬에서 가장 높다는 우도봉(132m) 남쪽 기슭 해식동굴 중에 하나의 이름으로, 주민들은 이를 '달그리안'이라고도 한다. 오전 10시에서 11시경 이 동굴 안에 햇빛이 들어오면 그 햇빛에 반사되어 천장의 동그란 무늬에 햇빛이 합쳐지면 한낮 동굴에 달 모양이 만들어 진다 해서 지은 이름이다.제2경 야항어범(夜航漁帆): 여름이 되어 밤에 어선들이 무리지어 우도의 바다를 불빛으로 밝히면' 온 바다가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현란하다.제3경 경전포망도(前 浦望島): 성산 포구에서 우도를 바라보는 경관을 말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우도는 물소가 물위에 누운 형상 같이 아름답다. 제4경 천진관산(天津觀山): 우도의 관문인 천진항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한라산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제5경 후해석벽(後海石璧): 배를 타고 섬의 남쪽의 높이 20여m, 폭 30m의 우두봉의 기암절벽으로, 선상유람을 해야 볼 수 있는 풍경이다.제6경 지두청사(地頭靑莎): 우두봉을 섬사람들은 섬머리란 뜻으로 '지두(地頭)' 라 부른다. ‘청사(靑莎)’란 푸른 잔디를 말하는 것이다. 우두봉 정상(132m)에서 굽어보는 푸른 빛깔의 푸른 잔디와 푸른 바다와의 조화는 이 섬을 찾는 이에게 잊을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주는 곳이라 해서 생긴 말로 우도(牛島)의 최고의 관광 하이라이트가 되는 곳이다.
제7경 동안경굴(東岸鯨窟): 일명 '콧구멍'이라고도 하는 이 동굴에는 옛날에 커다란 고래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이 굴은 썰물 때에 입구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는 곳으로 길이가 150m요, 넓이가 15m나 된다. 그 부근이 영일동인데 거기 모래가 검은 사장인 검멀레 끝에 '동안경굴'이 있다.제8경 서빈백사(西濱白沙): 우도에는 해수욕장이 2개가 있다. 하나는 하고도해수욕장이요, 또 하나는 우도 서쪽의 홍조단과 서빈해수욕장이다.
서빈백사해수욕장은 산호가 부서져 형성된 산호사(珊瑚沙)의 빛깔로 눈부시게 하얗다. 이 흰색이 푸른 바다와 어울려서 푸른빛마저 감돌게 하여 절경을 이룬다.
제주도는 물론 동양에서도 유일한 산호사(珊瑚沙) 해수욕장으로 주민들이 우도 8경 중에서도 백미라 하여 자랑하는 곳이다.
*. 우도(牛島) 관광우도 관광은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승용차 이용/ 우도 버스 이용/ 우도 관광버스 이용/ 자전거 이용/ 올래길 걷기
-승용차: 승선료( 비수기 20,000원 성수기는 배)-우도순환버스: (우측으로 순환) 30분( 요금 1,000원) 우도항- 영일동- 비양동- 하고수동- 전흘동- 주흥동- 하우목동- 서천진동- 우도항
-관광버스( 2시간소요, 요금 5,000원):지두청사(우도봉)- 검벌레- 동안경굴- 하고수동해수욕장- 우도박물관- 서빈백사
-걷기: 해안 13km, (좌측으로 순환)서빈백사-전흘동 망루- 비양도 등대- 하고수동해수욕장- 검벌레- 동안경굴-우도봉
우도봉: 약 2km/ 1시간 우도봉-등대박물관-지두청사- 천진관산
-자전거: 소요시간 2~3시간 해안도로 13km, (요금 1시간 2,000원, 3시간 5,000원)
그 중에서 권하고 싶은 것이 올레길 걷기가 아니라면 관광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관광버스를 타면 친절한 기사의 안내 설명과 함께 버스로 갈 수 있는 우도 명승지에 가서 20~30분 정도 하차하여 명승지를 둘러보고 사진 찍을 시간까지 배려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차를 가져갔지만 명승지를 몰라 제주도 우도까지 와서 비양도와 우도봉 일부를 겨우 보고 왔을 뿐이다.
그래서 주차비가 없는 주차장에 차를 두고 그 비용으로 관광버스를 이용할 것을 권하고 싶다.
*. 비양도(飛揚島)
제주도에는 비양도가 두 곳에 있다. 제주도 동쪽 끝 우도에 비양도(飛揚島)와 서쪽에 비양도(飛陽島)가 그것이다.
옛 선인들은 제주도를 하나의 새로 보고 동서에 있는 두 섬을 날개로 본 듯하다. 하여 섬 이름에 날 '飛'(비)를 썼는데 '양' 자는 구별을 위함인지 우도 비양도는 날릴 '揚'(양)이요, 서쪽 비양도는 볕 '陽'(양) 이다.
우도 비양도 가는 길은 밀물에는 육지와 연결되었다가도 썰물 때에는 섬이 되는 섬의 섬이다.
비양도에는 등대와 망대가 있다.
망대는 1948년에 있었던 아픈 역사의 제주4. 3 사건 시 우도 사람들이 해안을 관찰하던 일종의 초소였다.
그 해안가에 해녀의 집이 있어 거기서 우리는 한라산 막걸리를 소라 회를 안주하여 먹었다.우도의 특산물로는 활소라, 땅콩, 통마늘, 톳, 날미역이 있는데 우리들은 그 중 소라회를 먹고 있는 것이다.
*. 우도봉 등반
'우도에 가서 여기를 보지 않고 우도에 다녀갔다 말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거기가 어딜까?
우도봉이다. 우도 8경 중 네 곳이 우도봉 주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우도 정상에 화국 최초의 등대 테마공원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와 세계 등대의 작은 모형이 있고 전망대, 산책로는 물론 사진 촬영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우도 정상에서 굽어보는 드넓은 초원이 지두청사요, 그 해안에 있는 것이 동안경굴, 후해석벽, 주간명월이다. 그보다 성벽 같은 성산 일출봉의 위용을 바다를 사이 두고 볼 수도 있기는 곳이기도 하다.
우도봉 가는 길은 층계가 아니라 멋진 나무판자로 만든 길로 등산로라기보다 산책로였다.
그런데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전망대에 바위가 멋지다. ‘사자바위’였다.
그 길을 중간쯤 가다가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제주항에 도착하여 렌터카를 빌리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고, 우도항[천진항] 근처에서 아침과 점심 겸 아점을 먹었고, 비양도에서 술타령을 하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쓴데다가 우리의 다음 일정으로 성산 일출봉 등산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차를 다시 싣고 떠나야 하는 뱃시간에 맞추어야 하여 서운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소띠로 살다가 우도 구경 왔습니다.
'우도 8경' 못 다하고 이리 급히 떠나는 건
우도(牛島)도 그리는 일출봉 찾아 하직인사 드립니다.
추자도(楸子島)
옛날에 인천항에서 유병언이 경영하는 오하마니호(6.835 톤)를 타고 저녁에 떠나서 다음 날 아침 선상에서 보던 추자도(楸子島) 일출의 아름다움에 반해 추자도 여행을 벼르다 왔더니
하늘이 나를 도와서인가 날씨가 맑고 바다는 잔잔하다.
추자도를 가는 방법은 완도(한일 'Red Pearl호)나 목포에서 출발하거나(핑크돌핀호), 제주도 여객터미널에서 떠나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나는 공항을 이용해 왔는지라, 제주도 여객터미널 7 부드에서 떠나는 한일 'Red Pearl호(붉은 진주)'를 타고 추자도를 간다.
'Red Pearl호는 승객 365명 정원에 차량 63대를 실을 수 있는 2,800톤의 대형 선박이이라서 안전하지만 대신 차량을 실을 수 없는 쾌속정 '제주~ 목포' 간의 추자도를 들리는 핑크돌핀호보다 느리다.
추자도가 가까워지니 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추자군도(楸子群島)다.
제일 먼저 보이는 섬이 추자 10경 중 9경인 '곽개창파(곽개蒼波)'라는 관탈섬(冠脫섬)이다.
옛날에 귀양 오는 선비가 관탈도(冠脫島) 해역에 이르러 관복(冠服)을 벗고(脫) 평민으로 돌아가는 의식을 치렀다 하여 관탈섬(冠脫섬)이라고 불리는 섬이다.
이 섬들 주위는 수심이 비교적 깊고 바다 속은 기복이 심한 암초로 되어 있어 풍부한 패류와 각종 물고기의 천국을 이루고 있는 제주 해협의 중간에 외로이 떠 있는 무인도다.
이런 추자군도들 사이를 지나 우리가 탄 'Red Pearl(래드 펄)호'가 드디어 하추자(下楸子)의 신양항에 이르렀다.
신양항 인근은 인가(人家)가 너무 적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의 조그만 항구였다.
하추자도에만 있다는 추자중학교 건물 이외에 신기할 정도로 선착장 주변에는 민박집 몇이 보일뿐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거의 없다.
그래서였을까 택시가 없고 유일의 교통수단으로 버스 2대가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13번을 매 시간 정각에 맞추어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할 수 없이 관광의 기점이라는 상추자도로 가는 버스에 서둘러 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예초리가 하추자도의 중심 마을 같다. 거기에는 슈퍼도 음식점도 한두 군데가 있었다. 버스는 이 섬의 마을 길을 두루 돌아 면소재지가 있다는 상추자도까지 가는데 20분 정도가 걸렸다.
추자도는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로 나뉘는데 넓이로는 상추자도(1.3㎢)가 하추자도(4.15㎢)보다 1/3로 작지만 인구의 대다수는 상추자도에 살고 있었다. 추자도 인구는 2015년 3월 현재 2,050명로 1.143 세대가 살고 있다. 제주도 인구는 48만이라고 하는데-.
*. 추자도의 어원
한반도와 제주도의 중간에 위치한 추자도는 제주도에서 45km, 본토 해남에서는 35km 떨어져 있는 섬으로, 제주도보다는 본토 전라도와 가까와서 그 영향을 받아 생활권이 전라도이고 말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는 섬이다.
이 섬은 상, 하추자도(上下楸子島), 추포도(楸浦島), 횡간도(橫干島) 등 4대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추자도에 마을이 처음 들어선 것은 고려 원종 12년(1271년)부터라 한다.
그 무렵 이 섬의 이름은 후풍도라 하였다. 옛날 선박이 제주도나 완도 등의 뭍을 가기 위해서 바람(바람: 風)을 피해 가기 위해서 기다리는(기다릴 侯) 섬이라 하여 '후풍도(侯風島)'라 불리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추자도로 이름이 바뀌게 된 유래에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1. 이 섬이 전남 영암군(靈岩郡)에 소속될 무렵부터 '추자도(楸子島)'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
2. 조선 태조 5년 이 섬에 추자나무(楸子-) 숲이 무성한 탓에 추자도(楸子島)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추자'란 이름이 나무 이름 치고는 우리들 귀에 너무 생소하여 어떤 나무인가 하고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추자 !. =가래. 2. =호도(胡桃)"라고 나온다. '가래나무'는 더욱 생소한 나무라서 다시 사전에서 찾아 보니
"'가래'는 가래나무의 열매로 호두와 비슷하다.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호두보다 맛이 떫고 나무는 단단하여 여러 가지 가구를 만드는 데 쓴다."로 나온다.
섬 사람들이 그 추자나무가 면사무소 앞에 몇 구루 있다 해서 찾아가 보니 가래 나무였다.
선조들의 후손인 우리가 가래나무를 잘 모른다면 옛 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가래와 비슷한 호도나무라 하면 누구나 이해하고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추나도의 ‘추자'란 '가래'보다 '호두'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학이 있어 학문적으로 추자도의 어원이 호도인 것을 밝혀 주기를 기대하여 본다. 이는 관광 추자도를 국내외로 알리는데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 민박 구하기 추자도는 외딴 섬이라서 1일 2회만 선박을 운영하여 교통이 불편한 것이 무엇보다 추자도의 취약점이다.
그래서 제대로 낚시를 하거나 이 사람처럼 관광으로 올레길을 걸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최소한 1박2일은 계획하여야 하는데 나는 2박 3일을 해야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제주 ⥃목포' 쾌속정 핑크돌핀호가 1주일 간의 수리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숙소로는 식당과 민박을 겸하는 '청정고을 민박식당'(남 010-8668-3789/ 여 010-3694-3789)을 정하였더니 선택이 나를 행복게 하였다.
1층 식당에다 2, 3층은 민박하는 숙소로인데 10여 명이 유할 수 있도록 넓었다. 게다가 3층은 추자항(楸子港) 전체를 굽어 볼 수 있는 전망이 일품이다.
거기에 금상첨화로 남정네는 추자도 명품수산 대표에다 추자도 자치 위원장으로 이 고장 유지여서 2일 동안 아침 저녁은 추자도의 특산물인 조기와 열기, 추자도산 참치 구이에다가 멸치회까지 원없이 포식할 수가 있었다.
*. 상추자도 올래길
아침에 일어나 추자항을 둘러보니 어판장에서 아낙네들이 멸치를 다금고 있다. 밤새 멸치잡이 어선이 만선으로 들어와 부려 놓은 것을 아낙내들이 고르고 다듬어 멸치 액젓을 담으려고 커다간 원형통에 큰 부삽으로 퍼서 넣고 있다. 백령도와 함께 추자도의 토산 명품인 멸치액젓을 만드는 현장이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을까 민박집 아주머니는 오늘 조반에 내 마음을 알아 멸치회에 열기를 구어 추자도를 맛으로 안내하여 주고 있다.
어제는 굴비정식, 오늘은 열기에 명치회 정식이라 오늘 저녁과 내일 조반이 기대 된다.
*. 추자도(楸子島) 10경(十景)
1경 : 소머리 모양의 우두섬(牛頭島)에 해돋이 관경. 2. 추자 서북방 직구섬(直龜島)의 아름다운 저녁노을, 3. 황금어장 신대(神臺)에서 고기떼가 노는 모습, 4. 사자섬(獅子섬) 절벽에서 기러기가 바닷속으로 내 꽂히는 장면. 5.석지머리(石頭)의 청도(靑圖)라는 섬의 푸른 소나무. 6. 신양포구 장작지(長作지)의 자갈 해수욕장 7. 추포도(秋浦島) 멸치잡이 배의 불빛. 8. 횡간도(橫干島)로 돌아오는 고깃배들의 풍경. 9. 관탈섬(冠脫섬)의 무심한 푸른 파도. 10. 고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보름섬(望島)의 고향 그리움
여행에서 모든 곳이 그렇듯이 출발점에는 그 고장의 각종 정보가 모여 있는 곳이다. 다음은 추자 항에서 수집한 자료를 간추린 것이다.
*. 낚시의 천국 추자도 섬, 바다, 사람이 동화되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섬 추자도에는 문화재로 ‘최영장군 사당’, ‘박씨처사각’등 추자 10경이 유명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추자도를 찾고 있다.
특히 추자도는 한국 바다 낚시의 천국이다. 근해 수역이 청정해역에다가 배를 타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이곳이 먼 곳이라 연중 갯바위 낚시가 잘 되어 많은 낚시꾼들에게 추자도는 바다낚시의 천국으로 각광 받고 있다. 감성돔, 황돔, 돌돔 등이 많이 잡히는 청정해역에다가
추자도는 해양성 기후라 가장 추운 때가 1월이지만 평균기온이 3도 밖에 안 된다. 추자도 연근해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해역이라서 추자도 부근은 남해 어장의 중심이 된다.
그 어장은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암반층으로 구성된 청정해역이라서 추자도는 예로부터 고급어종인 참조기, 삼치, 참돔. 방어 등이 회유하는 황금어장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추자도의 특산물인 고급 어종 참조기가 산란, 회유하는 우리나라 참조기의 황금어장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래 그런지 어제밤 추자도 어항 가를 산책하다 보니 가로등도 참조기 모양의 등이 불을 켜고 있었다.
*. 추자도 올레길 제주18-1
제주 XX??? 개 올래길 중 경관이 최고라는 추자도 일주는 제주도 올레길 18-1 춟발점인 상추자항에서부터 시작 된다.
이 길은 제주의 우도(牛島), 가파도(加波島)에 이어 세 번째로 생긴 제주 올래길로 제주 섬 중에서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오르내리는 올레길이라 등산을 겸한 오래길이라고 할 수 있다.
추자도 올레길은 상추자도 추자항에서 시작하여 추자교를 지나 하추자도 예초리 포구를 거쳐 다시 상 추자항으로 원점회귀하는 총 17.7km/도보로 6~8시간 일주 길을 말한다.
원래 '올레'란 말은 제주방언으로 한길에서 돌담을 지나 집으로 들어오는 좁은 골목길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제일 먼저 상 추자항을 굽어보고 있는 '반공탑(反共塔)에서부터 추자도 일주를 시작한다.
*. 반공탑(反共塔)
6.25 사변이 일어나자 추자도에 살던 주민 원완희가 동생과 함께 군에 출정하였는데 고향 집에서는 전쟁 중 형제가 다 전사자로 통보를 받았다. 그 원완희가 죽지 않고 살아서 또한 명의 간첩과 1974년 5월 20일 오후 9시경 고향에 나타난 것이다.
당시 그들은 전쟁 중 월북되어 남파 간첩이 되어 내려왔다. 이를 주민이 당국에 신고하자 간첩 2명은 경찰과 주민 그리고 향토예비군에 맞서 수류탄과 권총으로 주민 4명을 학살하고 자기들도 죽은 사건이다. 이때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네 명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8각정과 반공탑이었다.
반공탑(反共塔)은 전망대이기도 하여 거기에 상추자도를 둘러싸고 있는 추자군도를 굽어 보는 멋이 있다. 그 중 섬 이름을 하나 하나 소개하는 사진이 있어 나의 발걸음을 한참이나 머물게 하였다.
이 섬둘 중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섬이 있다. 상, 하 추자도와 함께 유인도(有人島)인 추포도(楸浦島)와 횡간도(橫干島)다.
추포도(楸浦島)는 추자10경 중 7경으로 특히 멸치잡이의 황금어장이라서 멸치잡이 배의 불빛으로 추포어화(楸浦漁火)라 불라는 곳이다. 여기에는 현재 오직 1 가구 주민이 살고 있다.
횡간도(橫干島)를 추자10경 중 8경에서는 횡간추범(橫干追帆)이라고 한다. 횡간도로 돌아오는 고깃배들의 풍경이라는 뜻으로 이 섬에는 현재 7가구가 살고 있다. 이 섬은 제주도의 가장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다.
이 두 섬은 배로 추자도에서 15분 내외에 있는 섬으로 이 섬의 교통은 행정선(行政船)이 요일을 정하여 왕복하고 있다.
*. 최영장군(崔營將軍) 사당
고려 공민왕 때(1374년) 원(元)의 목호(牧胡)와 석질리(石迭里) 등이 탐라(제주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나라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였다. 장군은 원정 도중 심한 풍랑으로 이곳 점산곶(點山串)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민에게 어망편법(漁網編法)을 가르쳐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생활에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짓고 매년 봄, 가을에 봉향(奉享) 드리고 있다.
올레길을 알려주는 프른색과 노랑색 리본을 따라 가다 보니 추자초등학교 위에 큰 건물이 있다. 추자도 체육관이었다. 이를 옆에 두고 난 고갯길을 따라 오르니 거기가 추자도의 낙조의 포인트라는 ‘봉글레산’ 입구라는 이정표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산행이 시작되는 곳인데 갑짜기 바다 위 수령섬 위에 헬기소리가 요란하다.
면사무소에도, 상하 추자도항에서도 보던 현수막의 내용대로 추자도 ‘돌고래호 낚싯배’ 사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바다에서는 해양경찰순시선이, 공중에서는 헬기가 저렇게 아직도 찾지 못한 시신을 찾기 위해 누비며 수색하p고 있는 소리였다.
낙조 전망대란 이정표 따라 능선 길을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있고 거기 바다를 향한 의자가 있는 곳이 봉글레산 정상이었지만 지금은 노을이 지난 후의 바다만 보일 뿐이다.
島 섬 도자는 글자 자체가 하나의 시(詩)이다. "새 鳥 + 뫼 山 = 섬 島" 이니 말이다. 섬이 있는 곳에 새가 있고 새가 있는 곳에 섬이 있다는 말이다.
초행길에서 만나는 것은 하나 하나가 모두가 다 신비로운 법이다. 지금 절해의 고도(絶海孤島)인 이 산에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뿐이니 더욱 그러하다.
팔순을 코 앞에 둔 백발의 몸으로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묻는 이가 많다.
나이를 묻기도 하고, 누구하고 왔느냐고 묻기도 한다. 내가 홀아비가 아닌가 해서 인가를 묻는 것 같다.
거기서 얼마를 가다보니 화장실이 있고 그 옆에 물끄러미 추자항을 굽어보고 있는 8각정자가 있다.
추자도에는 8각정이 아주 많다. 나중에 추자면 직원에게 물어 보니 도내에 16개의 대,중,소형의 8각정이 있다 한다. 한 마을에 8각정을 세워 줬더니 '우리동네도, 우리동네도~' 해서 할 수 없이 많이 지었다는 후문이다.
그 정자에서 도로까지 내려오다 보니 봉글레산 정상에서 보던 해안가를 향한 올레길이 있다. 이를 따라 가다보니 순효각, 봉글레산, 용듬벙 이정표가 나타난다.
'용듬벙'을 향해 가다 보니 거기가 바로 '나바론/ 용듬벙' 가는 길인데 올레길은 벗어난 것 같다.
포물선을 긋고 있는 멋진 해안에서는 재두루미가 고기를 낚고 있고 몇 사람의 낚시꾼이 갯바위를 찾아 가고 있다.
나는 '용듬벙'의 정상을 구불구불 오르고 있는 나무 층계가 너무 좋아 보여서 거기가 나바론 절벽이려니- 하고 오르다 보니 길은 절벽 옆 네모 전망대에서 뚝 그치고 대신 망원경이 빈 전망대를 지키고 있다.
망원경이 향하는 곳이 나바론 절벽인 모양이다. 후에 들으니 나바론절벽은 선상유람을 통해서나 볼 수 있는 절벽이라 한다.
*. 순효각(純孝閣)과 박처사각(朴處士閣)
다시 면내(面內)로 들어오니 올레 리본은 다시 나타나 순효각(純孝閣)으로 나를 인도한다.
옛날 이 섬에 효성이 지극한 박명래(朴明來)라는 효자가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다 하므로 슬피 울며 하늘에 빌자 하늘의 도움으로 다음날 꿩을 구해 아버지께 드리게 되었다.
그후 어머니도 병이 들어 돌아가시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여 목숨을 연장하니, 목사가 순시하여 이를 포상하고 그 효행을 '속수삼갈록(續修三綱錄')에 기록하여 기리게 했다 한다.
순효각에서 2.7km를 더 간 곳 언덕 위에 박처사각(朴處士珏)이 있다.
박씨 문중의 후손들이 이 추자도에 처음 입도(入島)한 선조 박인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고 매년 추모제를 지내는 곳이다.
처사(處士)란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높여 부르는 말이니, 객관적으로 보면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선조를 이렇게 정성껏 모시는 후손들의 높은 마음을 보면 이 마을이 효의 고장 같다. .
추자도에 대한 지도나 팜풀렛은 제주도나 추자도 선착장에서도 구할 수 없었다. 상점에서는 명승지마다 있는 지도 그린 손수건 하나 준비해 놓지도 않았다. 그래서 현지 자료 하나 없이 다니다 보니 안타깝게도 이 섬에서 가장 중요한 '등대 전망대(燈臺展望臺)'를 지나치고 말았다.
추자면 영흥리 산중턱에 있는 '등대 홍보관' 전망대에 서면 남으로 한라산, 북으로는 한반도 남단 보길도, 청산도 등 다도해가 그림 같이 펼쳐 진다는데-, 42개 추자 군도가 수평선 위에 뛰노는 돌고래처럼 그 모습니 멋지다는데-. 그냥 지나친 곳이다. 아까워라.
추자교(楸子橋)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오른쪽 언덕에 추자면 '충혼묘지(忠魂 墓地)'가 나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576 ㎢에 나라를 지키다 가신 이 고장 49명의 충혼을 모신 충혼 묘지인데 새 하얀 충혼탑과 함께 좌우에 충혼의 넋을 기리는 '진혼가'와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가 이 장병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 추자교
--- 정기운행 버스 운행로/ ---올레코스/....낚시포인트
상 추자도 일주를 마치고 추자교(楸子橋) 앞에 오니 왼쪽에 발전소가 있고, 오른쪽 바닷가에 '6각정 쉼터', 그 옆에 '추자연도교 가설 유래비'가 서 있다. 추자도의 오랜 숙원 사업이던 상추자도와 하추자도와 사이에 놓은 추자교량(楸子橋粱) 가설은 섬과 섬을 잇는 교량으로는 우리나라 전국 최초로 1972년 완공하였으나 골재를 실은 트럭이 통행하다가 다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1995년 다시 신교량 공사로 총 길이 212m, 폭 8.6m로 완공된 다리다.
그런데 한국 최초의 섬을 잇는 다리라서인가 그 단어를 돌에 잘못 새겨 놓고 말았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를 '연육교(連陸橋)'라 하고, 섬과 섬을 잇는 자리를 '연도교(連島橋')라 하는데 그걸 구별하지 못하고 써 놓은 것이다.
그 비석에서 고쳐야 할 것은 4째 줄의 '연륙(連陸)'을 '연도(連島)'로, 맨 아래 '연륙교량(年陸橋粱)'을 '연도교량(連島橋梁)'으로 고쳐야 맞다.
게다가 그 다리를 걸어 넘다 보면 차도와 구별되는 인도나 자전거 길을 배려하여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다리를 넘어서니 왼쪽에 커다란 참조기 조형물이 있고 곳곳에 추자도 특산 어물이라는 '추자도 참굴비' 표지가 요란하다. 어제 밤 추자항으로 산보를 나가 보니 가로등도 참조기였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법성포조기는 잘 잡히지 않은 지 오래 되어 추자도 참조기를 가져다가 법성포에 해풍에 말려서 가공한다고 한다.
추자교를 건너서 추자교 삼거리에 오니 이정표가 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돈대산 길을 향하였더니 그 길은 담수장(淡水場) 앞을 지나는 길이었다.
*. 처녀당(處女堂)
오른쪽 길 1.3km에 있다는 처녀당은 돈대산 산행으로 인하여 생략하였지만 자료에 의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추자도 버스는 마을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버스다. 그 버스를 타고 목리 마을을 향하는 길로 가다가 목리 남쪽 해안가에서 내리면 '당목치'라는 동산에 '처녀당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 일이다. 제주에서 물질하러 추자도로 온 해녀들 중에 어머니를 따라와 아기를 돌봐주던 한 처녀가 있었다. 그 처녀가 어쩌다가 목리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그 날 밤 꿈에 처녀가 나타나 지금의 당(堂)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불쌍이 여긴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 '처녀당'을 세워 모시고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 되면 이곳에서 걸궁[급이 낮은 신=걸립]을 치고 바다에서의 안전과 자녀들이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굿을 하며 기원 해 왔다.
나는 몇 년 전에 제주도 마라도(馬羅島)를 다녀 왔는데 그 선착장 부근에 이와 비슷한 '아기업개' 전설에 얽힌 장소가(위 우상 그림) 있었는데 이와 비슷한 전설 같다.
*.추자도 식수(食水)
추자도를 다니다 보면 고풍스런 멋진 커다란 우물을 만나게 된다. 옛날 이 섬에서는 식수가 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빗물에 의존도가 높았다. 그래서 가뭄에는 아주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2012년 추자 도민들의 숙원이었던 담수화(淡水化) 시설 증설과 고도 정수처리시설이 완공되어 1인 하루 급수량이 383리틀/일 을 달성하여 이 섬 주민들의 물 부족 걱정을 완전히 해소하게 되었다.
그 시설이 담수장(淡水場)이다. 담수(淡水)란 민물을 말하는 것이니 담수장(淡水場)이란 바닷물을 민물로 바꾸는 시설이다.
돈대산 입구 정자에 앉아 잠깐 쉬다가 돈대산을 향하고 있다. 돈대산 정상까지는 2km의 거리였다.
돈대산 가는 길에 우측 담수장 뒤편 쪽을 보니 물을 가두어 둔 댐이 보이는데 주민들의 말에는 담수를 위해 빗물을 모아 둔 댐이라 한다.
*. 돈대산(墩臺山) 이야기
돈대(墩臺)라는 말은 봉화둑으로 봉화를 올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시설을 말한다. 이를 산 이름으로 쓰고 있는 곳이 진도의 관매도(觀梅島)에도 돈대산이 있더니 추자도에도 돈대산(墩臺山)이 있다. 그러니까 돈대산은 옛날 추자도에서 봉화를 올리던 산이었을 것이다.
올레길 표지 리본 따라 돈대산 가는 길은 오솔길이지만 폐타이어나 동아줄로 엮어 바닥을 깐 한 편안한 길인데 서울에선 벌써 그친 쓰르라미가 아직도 울고 있었다.
섬에서의 산행은 난코스가 적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라 힘들 때마다 잠깐씩 뒤돌아 보면 시야에 시원한 바다가 열리는 것이 일품이다.
드디어 돈대산의 정상의 팔각정 정자의 모습은 아취 형의 다리도 그랬지만 전국 어느 팔각정보다 멋있는 것은 그 전망 때문인 것 같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164m의 정상석 옆에는 무료 대형 망원경이 바다를 향해 있다. 굽어 보는 항구는 신양항(하추자도항) 같다.
인적이 없는 정자에다 짐을 풀고 위통을 벗은체 민박식당 집 원 여사가 정성껏 준비해 준 멸치회와 굽어보이는 바다를 안주하여 술 한 잔 기울이다 보니 시흥(詩興)에 겨워진다.
벼르다 벼르다 설레며
찾아온 추자도(楸子島)는 제주 우도(牛島)보다 더 아름다운데도.
도립공원(道立公園)도 군립공원(郡立公園)도 아니더라.
돈대산(墩臺山) 오르는 오솔길은
우러러 보고 있는 섬들 때문일까
민박집 아낙네 든든한 조반의 참굴비 탓이었을까
나이를 벗은 듯 몸도 마음도 가볍다.
그 길엔 서울서 잃고 온 여름이 매미소리로 남아 있었고
하늘을 닮은 정상 8각정에서 굽어보는
코팔트빛보다 더 푸른 바다에 떠 있는아아, 저 섬 섬 섬 들
38개의 유어도(有魚島)가
낚시꾼들의 천국(天國)이라지만
4개의 유인도(有人島)는
이 나그네에겐 관광의 천당(天堂)이어라.
심심할 새 없이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올레길 하나하나는
섬 냄새 가득한 후풍도(候風島) 추자도(楸子島)만의 길이더라.
-2015. 9. 21
돈대산 하산 길에서 올레길 코스 따라 가려면 북쪽' 엄바위 장승' 쪽을 향하여야 할 것이지만 정상에서 만난 추자도가 고향인 청년 말 따라 신양1리 마을 쪽으로 향하였다. 그러다 보니 추자도 지도를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올레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신대산(新大山)을 왼쪽에 두고 큰 신작로를 따라 정처없이 바다로 향하는 길로 향하였더니 그 해안이 '모진이 몽돌해안'으로 몸을 씻을 우물과 화장실이 초라하나마 가추어 있는 '모진이 몽돌해수욕장'이었다.
거기서 길이 끊어지는가 했더니 북으로 해안을 끼고 도는 산책로가 있는데 차량통행을 금하는 곳에 엉성하게나마 이정표가 있다. 내가 찾아가려던 "황경한묘 0.9km" 를 향하는 길이었다. .
*.천주교 순교자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
추자도를 올 때 제주 여객선착장에서였다. 한 천주교 신자를 만났는데 '추자도 천주교 성지'를 가려 하는데 배편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한다고 안타까워'하던 그 성지라는 곳이 '황경한의 묘'였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순교한 황사영 알랙시오와 제주 관노(官奴)로 유배된 그의 아내 정난주 마리아 부부의 아들인 황경한이 묻혀 있는 곳이다.
정난주는 1773년 남인(南人)이요, 천주교 가문인 정약현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세 때에 16세인 황사영과 혼인하여 아들 경한을 낳았다. 신유박해로 1801년 2살의 아들 경한을 가슴에 안고 귀양길에 오른 정난주는 추자도에 이르러 젖먹이 어린 것을 예초리 바닷가 갯바위에 내려놓고 사공에게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말했다. 아들이 평생 죄인으로 살아가야 함을 걱정하여서였다.
천주교를 믿는다는 한 가지 죄 아닌 죄로 남편이 순교를 당한 그 아내인 정난주는 제주에서 관노로 37년간 길고긴 인욕의 세월을 살면서 늘 아들을 그리워 하다가 하늘나라로 소천(素天)하였다.
아들 황경한은 자신의 내력을 알고 난 후,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제주도에서 고깃배가 들어오면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옹른 쪽의 샘물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끊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리는 활경한의 눈물의 샘으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늘 흐르고 있다는 샘이다.
그 바로 근처에 일출전망 포인트가 되는 전망대가 있고 바로 그 옆에 추자10경이 그림과 함께 서있다.
왜 정자가 8각정이 아니고 4각정이었을까?
옛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을 평평하다 하여 천원지평(天圓地平)이라 하였다. 그래서 8각은 하늘을 4각은 땅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4각의 귀퉁이를 잘라 보라, 8각이 되지 않는가.
이곳 4각정은 땅에서 8각의 상징인 하늘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기다리는 일출 전망 포인트라 해서 4각 정자였다고 말할 수가 있겠다.
거기서부터는 계속 내림길로 평지로 내려오니 또 가파른 오름길이다. 아마도 추자 제1경이라는 우두일출(牛頭日出)을 보는 신대산 전망대르 가는 길 같지만 눈으로 보는 고갯길이 너무 가팔라서 피곤에 지친 나의 마음을 거절케 한다.
그래 나는 그 길을 버리고 이정표 따라 예초리 마을길로 들어섰더니 거기가 바로 예초리포구가 있는 곳이었다.
피곤을 핑계하여 1시간에 한번 온다는 버스를 기다리다 보니 예초리 마을 사람들이 저기 보이는 길 모둥이가 '엄바위 장승'이라 하여서 발길을 재촉하였다.
*. 엄바위장승
옛날에 엄바위 근처에 억발장사가 살고 있었다.
엄바위 아래 바닷가에 '장사공돌'이라는 바위 다섯 개가 있었는데 억발장사는 이 바윗돌로 공기놀이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억발장사는 횡간도로 건너뛰다가 미끄러져 그만 넘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부터 예초리와 횡간도 처녀 총각끼리는 결혼하면 청춘과부가 된다는 속설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마을 사람 하나가 엄바위 아래에다가 억발장사를 상징하는 목장승을 깎아 세우고 예초리 마을에서는 해마다 걸궁을 할 때면 이 엄바위 앞에 와서 한마당 놀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그 목장승 대신에 지금은 화강암으로 석장승을 세워 놓았다.
추자도 버스는 마을을 찾아 다니는 코스로 왕복하기 때문에 나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 '추억이 담긴 학교 가는 길' 입구를 지나 돈대산 입구 그리고 오지박전망대를 지나 추자교로 해서 추자항까지 일주를 마쳤다.
6~7시간의 코스를 장장 11시간에 마친 것이다.
종주를 마치고 면사무소에 들렸더니 비로소 거기에 추자도 팜플렛을 구할 수가 있었다. 이 안내도가 있었으면 더 체계 있게, 더 구체적인 추자로의 진면목을 찾아 일주할 수 있었는데 하는 것이 커다란 유감이었다.
그러나 기대를 갖고 와서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여행이(旅行)이요, 여행은 생략의 예술이라 생각하는 사람니 추자도를 욕심내던 어제와 오늘이 그리워진다. - 215.09.19~21
백두산(白頭山)
*. 백두산(白頭山, 2744m) 백두산 가는 길로는 서파(西坡), 북파(北坡), 남파(南坡) 3 코스가 있지만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가 북파(北坡)이고 등산으로 종주를 하고자 하는 이는 서파(西坡)로 가야 한다. '坡(파)'란 언덕이란 뜻이다. 서파와 북파를 가는 분기점이 백두산 바로 아래 해발 1,000m가 넘는 곳에 있는 이도백하(二道白河)란 중국인 마을이다. 여기서 30km 거리에 우리들의 목적지 백두산 입구인 북파산문((北坡山門)이라는데, 반갑지 않은 비가 오고 있다. 백두산 등정 길에 가장 꺼리는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의 봄은 6월부터 시작된다. 그 봄은 여름 없이 가을로 접어들고, 9월부터는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겨울이 9개월이나 계속 된다. 일 년 중 비 오지 않고 맑은 날이 20일뿐이라는 것이 백두산의 기후다. 연평균 안개 낀 날이 242일이라 하며 여름에는 -8급 이상의 큰 바람이 225일을 불면서 맑다가도 갑자기 운무가 끼는 종잡을 수 없는 게 백두산 날씨라 한다. 그래서 백두산을 찾은 관광객이 천지(天池)를 볼 수 있는 확률은 2/10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운무와 안개는 물론이고 비가 차창을 때리고 있다. 하릴없이 우리는 2,000원 하는 우비를 사 입고 등산길에 올랐다. 우스갯소리로 "백두산을 백 번 올라와도 천지를 두 번 이상 보기 어려워서 백두산이라 하였고, 백두산에 와서도 천지를 보지 못한 사람이 천지여서 천지라."고 한단다.그래서였나. 이조 영조 때 산수 갑산으로 귀양 왔다가 1766년에 백두산에 다녀와서 쓴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가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다음과 같은 제문이다.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중국의 곤륜산(崑崙山: 중국의 상상적인 성스러운 산)과 같은데, 만약 해동(海東)의 편협한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 번 백두산에 올라 그 웅대한 경관을 보지 못한다면, 그 한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전하기를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 중에는 풍우(風雨)와 운무(雲霧) 때문에 제대로 경관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곤륜산의 신령이 중국인들에게 그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는데, 어찌 백두산의 신령만이 그러하시겠습니까? 산신(山神)은 우리를 보우하셔서 해와 달이 밝게 비추어서 만상이 밝게 드러나고 산의 풍광을 모두 다 볼 수 있게 하십시오." 북파산문에서는 표를 2장 사야 한다. 하나는 입장료로 버스를 타고 천지길목[倒站口]까지 오르는데 쓰고 또 한 장은 지프차를 타고 20여분 동안 꼬불꼬불한 10.5km의 관광도로를 통해 기상대까지 오르는 표이다. 그런데 젊은 운전사가 차를 너무 심하게 몰아서 커브마다 수없이 좌우로 쏠리는 두려운 길이어서 그 가는 도중에 있다는 고산스키장(高山滑雪場)과 관망대(觀景臺)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이 길을 등산길 삼아 천지까지 소요음영(逍遙吟詠)하면서 흑풍구(黑風區)를 지나 오른다면 그 길은 1시간 코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저 아래 북파산문에서 우리의 소원과 달리 차창을 때리던 비가 수목한계선을 지나 들꽃이 무성한 정상에 가까울수록 그치는 것이 아닌가. 그친 게 아니라 이 백두산 천지 부근에는 아예 비가 오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그렇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들 만세!'였다. 기상대가 보인다. 그 뒤로 왼쪽에 여기서는 가장 높은 해발 26,70mㅔ의 천문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이 천문봉을 향할 때 나는 기상대 쪽을 향하였다. 거기 옛날 서파를 종주할 때에 보던 국경5호선 경계비 같은 것이 서 있어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그냥 네모진 기둥이고 국경6호선 경계비는 거기서 동쪽으로 20분을 더 가야 볼 수 있다 한다. 백두산 천지 쪽 내륜(內輪: 안둘레)은 누구라도 감히 내려갈 엄두를 내릴 수 없는 천 길 낭떠러지라 위험하여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그 오른 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봉이 있어 철벽 봉인가 해서 다른 팀 가이드가 있어 물어보았다. "이 봉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것도 천문봉의 일부라는 싱거운 대답이다. 여기서 천지 수면까지는 467m인데 천문봉 정상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철조망을 돌아 정상에 서야 호수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너무 두려워 생략하고 말았다.
천지로 향한 '천상 은병풍'에는 비취를 박아 놓은 듯이 바위가 드문드문 박혀 있고 수리바위가 그 주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거기서 뒤돌아보니 북저남고(北低南高)라는 만주 벌판이 끝없는 평야를 열고 있다. *. 백두산 서파(西坡) 종주 길 여기서 이야기를 옛날의 나의 '백두산 서파 종주' 이야기로 돌린다. 서파(西坡)의 마지막 버스 주차장까지는 눈이 막혀서 차가 더 이상 오를 수 없어서 우리는 도중에 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곳은 1,700m 이상의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을 넘어선 지점이어서 나무 하나 없는 초원에는 갖가지 들풀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다. 7월인데도 길가에는 10cm 이상 두께의 눈이 쌓여 있었고 초원에는 들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그 들풀, 그 들꽃이 무성한 초원 사이로 난 돌층계를 따라 올라가고 있다. 5호경계비까지 꼬불꼬불 계속 올라가고 그 돌층계도 멋있다. 층계도 가파른 층계가 아니다. 두어 걸음 걷다가 한 계단 오르는 식의 조각까지 해 놓은 여유로운 층계다. 이러한 층계 1,386개를 거의 다 오르는 곳 능선에 감격하며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남한에서 최고로 높다는 1,950m의 한라산보다 40m나 높은 천지를 굽어보는 위치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5호선 국경 비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었다. 단순한 붉은 음각 ‘中國5 1990’, 파란 음각 ”조선5 1990“의 키에도 못 미치는 작은 비이지만 청나라가 완력을 앞세워 휴전선이 한반도를 가르듯이 천지를 갈라놓은 역사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 조선조 숙종 때 청나라와 두만강의 국경을 정할 때였다. 청나라 황제의 특사로 온 총관 목극동에 맞서야 할 중신 접반사(接伴使)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란 작자가 늙은 나이를 핑계하여 목극동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지도 않고 산 아래에 그냥 머물고 있어서, 우리의 국토 두만강 안쪽 700리를 잃게 하였으니 이완용보다 더 나쁜 위인들이다. 자신의 힘든 것을 핑계하다가 국토를 영원히 잃었기 때문이다. 목극동이 제 마음대로 정계비를 세우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소국(小國)에 인물이 없어서 좋은 자기들 땅을 많이 잃었구나.” 이렇게 백두산은 많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뿐인가. 일제시절에 왜놈들은 남만주 철도부설 등의 이권을 얻는 대가로 한국 영토인 간도(間島)를 청나라에게 넘겨주는 협약을 자기들 멋대로 체결하고 말았다. 북한(北韓) 위정자들도 그랬다. 1962년 무렵 6.25의 중공군 참전 대가로, 한민족의 상징인 백두산과 천지의 절반을 중공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알려진 비밀이라니, 오늘날에도 옛날의 그 못난 박선부, 이선부 같은 자가 북한에도 있었던 것 같으니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질 일이다. *. 백두산(白頭山) 명칭 단군신화가 깃들은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요, 조산(祖山)인 백두산(白頭山)은 북한 양강도와 중국 길림성 국경선에 있는 한국에서 2,744m로 제일 높은 산이다. 백두산(白頭山)의 이름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로 불려왔다. 문헌에 나오는 백두산(白頭山)의 최초의 이름은 중국 옛날 작자 미상의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서다. -“넓은 광야 한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不咸)’이라 부르는데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불함산(不咸山)'이란 속뜻은 '자기의 속마음을 감추고 함부로 내 보이지 않는 산'이란 말이다. 최근 중국의 1 인자인 강택민 주석이 두 번이나 찾았으나 천지를 보지 못하고 갔다는 것을 그 예로 들을 수 있다. 불함문화(不咸文化)라는 말도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배달 계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고대 문화를 말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백두산의 이름을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白山), 태백(太白), 장백(長白), 백두(白頭),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 등 8 가지를 들고 있다. 연대별로는 한대(漢代)에는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하다가, 개마산(蓋馬山:남북조 魏), 도태산(徒太山: 魏), 태백산(太白山: 唐)이라 부르다가 금(金)나라 때부터 장백산(長白山: 창파이산) 또는 백산(白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장백산(長白山)이라 할 때 여기서의 장(長)의 뜻은 어른이란 뜻으로 새겨야 한다.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들도 받들어 모시는 산이 백두산이어서 이곳에는 여러 가지의 영웅 탄생 설화가 전하여 온다.
세 자매 선녀들이 천지서 목욕할 때 까치가 붉은 열매를 셋째 선녀 옷에 놓았더래요. 그 열매 먹고 낳은 아들이 청 황제(淸皇帝) 조상이랍니다. -청제(淸帝) 탄생설화: ‘開國芳略’) 백두산서 왕건(王建) 아비 도선(道詵)에게 집터 얻어 아들을 잉태하니 그 왕건 쑥쑥 자라, 궁예를 물리치고서 고려 태조 됐다지요. -왕건 탄생 설화
이렇게 장백산은 신성한 사람들이 태어난 성스러운 곳이라 하여 ‘세상 사람들은 산상(山上)에서 함부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산에서 용변을 보더라도 그릇에 담아갔다.’는 기록이 중국의 역사서 북사(北史)에 전하여 온다. 우리들의 선조들도 예로부터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낸 후에야 백두산에 올랐다. 우리나라 문헌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고조선조(古朝鮮朝)에는 태백산(太伯山)이라 칭하였다”는 말이 나오다가, 고려사(高麗史)에서 비로소 “압록강 밖으로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白頭山) 바깥쪽에서 살게 하였다.” 하여 ‘백두산(白頭山)’이란 명칭이 처음 나온다. 그런데 왜 백두산(白頭山)이라 한 것일까? 어떤 까닭으로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의 이름에 왜 ‘白(백)’자가 들어가는 것일까? 내가 백두산에 오른 것이 7월 1일인데도 백두산 정상 곳곳에는 눈이 가득하였고, 장백폭포 밑 양쪽에는 두께가 8m도 넘게 눈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이산의 산정(山頂)은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눈[雪]과 부석(浮石)으로 인하여 하얗게 보여서 백두산(白頭山)나 장백산(長白山)이라 불렀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다. *. 백두산(白頭山)과 천지(天池) 이야기 오늘은 2005년 7월 1일 11시, 맑은 하늘 아래 천지(天池)를 굽어보면서 우선 나는 큰절을 올렸다. 천지(天池)를 처음 뵙는다는 인사요, 맑은 하늘 아래서 천지(天池)를 굽어볼 수 있는 날씨를 허하여 주시었다는 것에 감사요, 우리 국토에 대한 사랑의 절이었지만, 그보다 분단의 통한을 엎드려 눈물로 하소연 하고도 싶은 마음이기도 하였다. 그런 울부짖는 이 마음을 한 편의 시(詩)에 담는다.
산은 백두산(白頭山)은 열여섯 봉우리로 하늘 아래 병풍처럼 천상의 호수(天上湖水) 천지(天地)를 지켜 서서 풍사(風師)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남으로 백두대간 뻗어 내리고 좌우로 압록강(鴨綠江) 두만강(頭滿江)으로 우리 국토를 이루었거니 어찌하여 백두(白頭), 장백(長白) 둘이 되어 무슨 일로 남한(南韓), 북한(北韓) 둘이 되어
우리의 백두산(白頭山)을 두고도, 장백산(長白山)에 올라 이국(異國)에서 조국(祖國) 땅 바라보며 이렇게 통곡(慟哭)으로 우러러야만 하는가. -천지(天池)에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백두산과 천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백두산은 곧 장백산이다. 산이 모두 삼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리요, 가로는 천리에 뻗혀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 리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이요,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화강과 속평강,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천지에 대한 기록은 영조40년(1764년) 박종(朴琮)의 ‘백두산 유록(白頭山遊錄)’에서다. -석봉(石峰)이 늘어선 것이 병풍을 두른 것 같고, 높이 솟은 것이 군자(君子)와 같은데, 그 복판에 큰 못이 고여 있다. 움푹 꺼져 들어가기를 천 길이나 되며, 물이 독에 있는 것 같아서 엎드려 보면 무서워서 몸이 떨리고, 검푸르게 깊은 것이 잴 수 없으며 땅 구멍에 통할 것만 같다. 얼음이 수면을 덮었는데 열린 곳은 겨우 4분의 1 이며 빛은 푸른 유리와 같고 석문이 영롱하여 사면의 그림자가 비치여 얼음이 엷어서 거울 같다. 백두산의 넓이는 8,000㎢로 우리나라 전라북도(8,052 ㎢)와 비슷하고, 천지의 넓이는 여의도보다 약간 더 넓다. 그 높이나 넓이는 중국과 북한 자료가 서로 차이가 난다. 그것은 한국은 인천 앞 바다를, 북한은 원산을, 중국은 천진을, 일제(日帝)는 동경만 앞바다를 해발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왕이면 우리 동족인 북한의 자료를 주로 따르기로 한다. 백두산의 높이가 2,750m(한국 2,744m, 중국 2.749.6m)인데 천지 수면은 해발 2,190m로 백두산 서파 종주 길에서 500m 정도 아래에 있다. 내가 준비한 카메라는 광각을 겸한 것이련만 한 컷으로는 잡히지 않는 천지 둘레는 14.399km, 평균 수심은 213m이고, 최고 수심은 384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산정(山頂) 호수가 바로 우리 천지다. 저수량은 19억5천500만㎥로, 만약 어느 누가 1초에 1톤씩 퍼낸다면 60년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천지의 물은 어디서 온 물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북쪽 화구벽을 뚫고 저 달문(達門)을 통하여 사시사철 장백폭포(長白瀑 일명 飛龍瀑)를 이루어 떨어지는 물의 양을 생각하면 비와 눈이 녹은 물만이라고는 이해하기가 힘들어진다. 천지의 물 60% 이상이 지하에서 솟아나는 용출수라고 하는데 16봉과 천지 수면의 고도차가 4~5백m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깊은 산 정상에 호수를 이루다니 신비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1931~1932년에 천지를 답사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의 지리학자는 천지의 깊이를 442m 이상으로 보고 천지를 세계 10대 호수 중 하나로 꼽았다. 유명한 곳은 이름 하나로 말할 수 없음인가. 천지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대지(大池)’라 하는 것을 위시해서 '천상의 호수', '대택(大澤)', '용왕담(龍王潭)','용궁지(龍宮池)', '신수분(神水盆)', '천상수(天上水)', '달문지(達門池)' 등이다. 천지 빼놓고 백두산을 말할 수 없듯이, 천지를 말하려면 천지를 병풍처럼 빙 둘러 있는 16봉우리를 말해야 한다. 천지와 16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옛날 옛적 '백두산'을 백두산이라 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이 산 한 마을에 흉년이 들었답니다. 심술궂은 흑룡(黑龍) 한 마리가 있어 불칼(벼락)을 휘두르며 물곬을 막아 놓은 탓이지요.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백(白) 장수와 합심하여 물줄기를 찾아놓았더니, 그 위에다가 백두산 돌을 굴려 돌산을 만들어 버렸답니다. 물론 흑룡의 심술이었지요. 하릴없어 마을 사람이 다 떠난 자리에 앉아 백장사가 탄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리따운 공주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간밤 제 꿈속에서 무지개를 보았어요. 그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신선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백장수와 마을 사람들의 지성에 감천(感天)하여 왔노라. 백 장수에게 옥장천의 샘물을 석 달 열흘 마시게 하여 힘을 길러 흑룡과 싸워 이기게 하라. 이 건 네 나라의 일이니 네가 직접 알려야 하느니라.” 지금의 백운봉 정상에 있는 옥장천을 찾아가서 석 달 열흘 동안 샘물을 마셔 기를 키운 백 장수는 가장 높은 산마루에 올라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 삽이 얼마나 컸던지, 그 기운이 얼마나 세었던지 한 삽을 파내서 던지면 봉우리 하나씩이 생기더랍니다. 백 장수는 이렇게 동서남북을 향하여 16삽을 파 던졌더니 그 흙을 버린 자리에 16봉이 생겨나고 움푹 팬 밑바닥에서 지하수가 강물처럼 솟아나더랍니다. 이때 검은 구름을 타고 달려와서 훼방하는 흑룡을, 흰 구름을 탄 백 장수가 공주와 합심하여 물리치고 나서보니 방금 파놓은 흙구덩이에 물이 지금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백장사와 공주는 흑룡이 다시 또 와서 심술을 부리지 못하게 천지 속에 수정궁(水晶宮)을 지어놓고 둘이 함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전설을 가만히 살펴보니 백장사의 흰 ‘白(백)’과 산머리를 팠다 해서 머리 '頭('두)로 白頭山(백두산)이라 했다고 하는 옛날 사람들의 민간어원설이 그럴 듯하게 여겨지고 천지를 용왕담(龍王潭)이라고 한다는 것에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 전설 따라 어원 따라 가본 16봉들 천지를 둘러싼 2,500m 이상의 높이라는 16봉들의 이름은 중국과 북한이 다르고, 그 이름도 일정하지 않았다. 그 산 높이 역시 북한과 중국이 말하는 것이 서로 달랐다. 우리가 서파 5호 경계비로부터 북파 쪽으로 가면서 볼 수 있다는 산을 차례로 들어보면 2,664m 청석봉(일명 옥주봉), 2,691m 백운봉, 2,603m 녹명봉(일명 지반봉), 2,510m 관일봉, 2,595m 용문봉(일명 차일봉), 2,595m 철벽봉, 2670m 천문봉(일명 백암봉) 2,618m 자하봉, 2,625m 쌍무지개봉으로 9개가 있다. 북한 쪽으로는 2,711m향도봉(일명 삼기봉, 망천후), 2,749.2m 장군봉(일명 병사봉, 중국 백두봉), 2,549m 제비봉, 2,533m 관면봉, 2,566m 와호봉, 2,543m 제운봉, 2,691m 마천우 7봉이 있다. 더 자세히 말해 보면 18봉 중 6개는 북한에, 7개는 중국에 3개는 양국 국경에 걸쳐 있다. 이 16봉은 천지 쪽으로는 거의 90도 경사로 도저히 내려 갈 수 없는 경사로 이를 내륜(內輪: 안둘레)이라고 한다.그 반대쪽에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초원보다 더 아름다운 들꽃이 막 피기 시작한 '천국의 화원' 같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을 외륜(外輪:바깥 둘레)이라고 한다. 서파(西坡) 트레킹에서 온 분들은 5호경계비에서 둘로 나뉜다. 종주에 자신 있는 사람은 청석봉으로 하여 장백폭포가 있는 북파 쪽으로 트레킹을 시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5호경계비에서 천지를 감상→서파 꽃밭 트레킹→금강대협곡 관람→버스로→ 송강역→기차로→이도백하까지→버스로→북파 장백폭포(총 약 5시간) →달문→승하사→천지 물가 트레킹→종주산행팀과 합류 우리들의 서파에서 북파까지의 백두산 외륜(外輪) 종주는 13km로 9시간 정도 걸리는 모양이다. 백두산을 남산북야(南山北野)라 하는 말 그대로 남쪽의 우리 북한 땅은 백두대간으로 수많은 산들이 남을 향하여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이루는데, 장백산은 북으로 한반도의 7배가 넘는 드넓은 만주 평야로 열려있다. 그 중 저 멀리 구름 속에 쌓인 제일 높은 산봉우리 중 젖꼭지처럼 뾰족한 봉이 백두산의 주봉인 2,749.2m 장군봉이다. ‘장군봉’은 일명 ‘병사봉’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백두봉’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김일성 장군의 '장군'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1927년에 육당 최남선 선생이 쓴 '백두산근참기'에도 '장군봉'이라고 나온다니 말이다. 북한에서 장군봉을 오르려면 도로를 통할 수도 있으나 끌차(잉크라인 철도)가 있다 한다. 망원경으로 바라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정상에 높은 안테나와 철조망과 기둥 같은 것을 흉하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북한은 백두산을 명승지 제19호로 지정·보호하고 있으면서 이 산을 '조선 혁명의 성산'이라 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쓴 ‘혁명의 성산 백두산’이라는 총길이 216m의 초대형 ‘향도봉 친필 비’가 거기 호수 바깥쪽에 모자이크로 쓰여 음각되어 있다 한다. 안타깝게도 산이 정치의 광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위해 삼지연군 백두산역에서 향도봉(일명 망천후)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한다. *. 장백폭로(長白瀑布, 창바이푸부) 이야기 이야기를 다시 오늘 백두산 여행으로 돌린다.비 맞고 지프차로 천문봉에 올라 천우신조로 천지를 우러르고 다시 지프차로 천지길목(倒站口)에 내려와서 우리는 다시 장백폭포를 향하고 있다. 장백폭포 가는 길은 멀리서부터 폭포의 모습을 부분에서 전체로, 그 소리를 점점 가까이 하며 향하는 길이다. 그 길에는 안개 같이 뿜어 나오는 온천수가 짙은 유황냄새와 함께 그 멋을 더하고 있는 길이었다. 장백폭포 우측으로 동굴등산로가 길게길게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백두산 돌은 박혀 있지 않고 구르는 돌이 많아서 만들어 놓은 안전 동굴등산로였다. 장백폭포는 천지 북쪽의 천문봉(天文峰, 2,670m)과 용문봉(龍文峰, 2,595m) 사이 달문(達門)에서 흘러내린 물이 1km 정도를 승하사(承擄河-뗏목이 흐르는 강), 우랑도(牛郞渡-견우와 직녀가 건넌 곳)를 거쳐 흐르다가 낙차 68m로 떨어져 장백폭포가 된다. 평균 수량이 초당 2.15톤에 달한다는데 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폭포로 그 소리가 200m 이상의 거리에서도 들린다는 폭포다. 그 흐르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무지개를 타고 오르는 모습이라서 장백폭포는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애칭을 가졌다. 폭포를 보고 매표소를 내려오다 올라갈 때 지나친 1,000원에 2개 하는 온천계란을 먹어보니 그 맛이, 그 고장 특유의 먹거리와 함께 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체득하게 한다. 그 83도 보글보글 용출되는 온천수로 익힌 달걀은 물론 옥수수, 소시지가 유혹하나 저녁 시간이 가까워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일정에 따라 백두산유황온천탕에 들어가서 온천 목욕을 하였다. 단순하고 어두운 시설과 야외 온천은 그 아름다운 백두산 영봉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아깝게도 그 담장이 그 모습을 가리고 있다. 송성만 지배인이 말한다. "온천은 좋은 물이 제일이 아닙니까?" 이 말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발가벗은 몸으로 그의 방에 서 술자리를 벌였다. 여행은 만남이다. 자연을 만나고, 문화를 만나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조선족으로 연변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니 이 얼마나 황홀한 만남의 시간인가. 우리는 한국과 연변 조선족의 명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저께 묵었던 연길의 호텔에 돌아가서 석식 후에 일행과 함께 호텔 옆에 있는 시장 구경을 나갔다. 그렇게 보기 어렵다는 천지를 비옷을 입고 가다가 벗고 보았고, 장백폭포와 백두산이 몸으로 삶은 계란을 먹고 온천 목욕도 하였으니 어찌 그냥 잘 수 있으랴. 우리는 야외 포장마차에서 이화주 1병에 맥주 6병에 꼬치안주를 먹었더니 한국 돈으로 21.000원이었다. 4년 전 왔을 때와 달리 위앤화는 2배나 올라서 10위엔 1,000원이던 것이 2,000원이나 하였다. 오늘 나는 장춘의 새벽에 연변장 터를 1시간 이상이나 구경하였고, 백두산 천지를 마음껏 카메라에 담았으며 여기에 장백폭포까지 더 하였으니 어찌 '부라보'를 연발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부라보!
백두산(白頭山)에 백 번 가서도,
두 번 보기 어려운
천지(天池)를 보았으니 보라보!
우리는 백 번 가도
천지를 보지 못한 사람이 천지라는,
그 천지를 보았으니
또 부라보!
관매도(觀梅島) 다도해 국립공원/
(위 그림은 관매도 8경 중 3경 꽁돌) 30여 년 전 서울 장위동에서 살 때 순댓국 단골집 춘천집에 점심 먹으러 갔다가 관매도가 고향인 곱사등이 청년을 만나서 아름다운 관매도를 소개 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문도 다음 세 번째로 크다는 진도(珍島)에서는 물론, 국립공원 다도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섬 중에 하나가 관매도(觀梅島)라는 것이다.
“홍도(紅島)가 관매도(觀梅島)에 와서 보면 그동안 다도해(多島海)에서 최고의 명승지로 자랑해 오던 얼굴이 부끄러워 스스로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라고 진도의 토박이 노인들이 자랑할 만큼 관매도가 아름답다데 교통 사정으로 십여 년간 벼르기만 하던 관매도를 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남 맨 끝에 있는 진도(珍島)의 팽목항(彭木港)에서도 1시간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데다가, 인구도 640명(1994년) 내외로 이동하는 인원이 적어서 바다에 조금만 바람이 거세어도 배가 출항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몇 번 시도하다가 가고 있는 것이다.
남해고도인 관매도의 절경이 입소문 타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매스컴의 총아 KBS TV에 ‘1박2일’에 소개 되면서부터 전 국민이 가보고 싶은 섬이 되어 격일이었던 출항이 평일에도 3회 이상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섬이 되었다.
*. 관매도(觀梅島) 가는 길
지도를 놓고 보면 한반도의 서남단 끝에 진도(珍島)가 있다.
그 진도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가 목포(木浦)다. 목포는 항구라서 자고로 진도(珍島)에는 항구가 꼭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구(港口) 없는 섬의 신세로 이제까지 지내왔다. 그러다가 1980년에 와서야 자그마한 어촌이었던 서망리와 팽목리에 항구가 생겼다.
그 한적한 팽목항에서도 40km나 떨어진 곳에 관매도가 있다. 그 아래로 더 가면 추자도(楸子島)가 있을 뿐이니 관매도는 남해의 절해고도(絶海孤島)다.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편리하게 관매도를 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 동서울고속버스터미널 진도 행-(5:30) - 진도공용버스터미널 팽목 행-(1:10) - 팽목항 관매도 행 (2:10 )
° 용산역 KTX 목포행-(2:58) - 목포시외터미널 진도행 - 진도공용버스터미널 팽도행 - 팽도항 관매도 행
여행자에게는 시간이 돈이라는 생각에 KTX를 이용하였더니 용산서 목포까지 2시간 28분,/ 진도서 팽목항 1시간 10분/ 진도읍서 팽목항까지 50분/ 팽목항에서 관매도까지 2시간이 걸렸다.
팽목항에 도착하였으나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바다에는 뿌옇게 안개로 흐려 있고, 강풍으로 거센 파도가 일고 있어 출항이 금지 되는 바람에 팽목항에서 1박하여야 했다. 그러나 팽목항의 숙박 시설이 너무나 열악하여 망설였더니, 이런 마음을 눈치 챈 주인이 섭했던지 우리를 강제로 내쫓다시피 한다.
‘나쁜 사람들! 욕이 절로 난다.“100-1=0”도 모르는 장사치들! 백번 잘하다가도 한번만 잘못하면 나무아미타불의 세계가 장사라는 것도 모르는가?’ 하릴없이 없이 우리 부부는 근처의 이 집 저 집을 헤매다가 50분 거리의 진도 읍내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성수기가 아니라서 팽목리의 민박은 거의 다 빈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행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도 오히려 특별한 만남도 있는 것이어서 읍내 가는 버스에서 진도 읍내 수산시장에서 횟집을 경영하는 팽목리에 사는 그곳 주민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상가는 노량시장처럼 아래층 어시장에서 회를 파는 가개로 위층에서 양념을 사 먹는 곳이어서, 주인의 호의로 서울의 반값에 농어를 사고 서비스로 주는 도미로 식도락을 즐길 수 있었다. ‘주인은 돈 먹고 살지? 허나 손님은 서비스를 먹고사는 거야’ 하면서-.여기 오는 길에 오늘은 출항을 할 수 없는 날씨라는 확인을 하고 목포에서 점심을 아점(아침 점심) 겸해서 먹으려고 목포시장에서 전통한정식 집을 찾아 갔었다.
한상에 6만원인데 1만원만 더 보태면 한국산 큰 갈치구이와 세발낚시까지 나온다 하여 난생처음 큰맘 먹고 시켰다. 전라도 특유의 푸짐한 반찬과 안주 그리고 음식 맛을 평소에 신뢰하여 오던 사람이기 때문에 식도락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랬더니 홍어, 묵은김치, 돼지 구이의 3합에다가 전복회, 검붉은 빛이 도는 쇠고기 육회, 새하얀 빛이 감도는 갑오징어 회, 밥 비벼 먹으라는 꽃게장 등에다가 특별 주문한 산 세발낚지와 갈치 토막 등이 우리 부부를 행복하게 하였다.
여행은 잘 보고, 잘 먹고, 잘 자는 3박자가 갖추어야 한다더니 찾아간 모텔도 장급 수준이어서 우리는 행복한 잠을 청할 수 있게 하였다.
여행의 둘째 날 아침, 팽목으로 다시 나오니 전날 항구에 자욱하던 안개는 씻은 듯이 걷혀 있고 약간의 파도가 일고 있을 뿐이었다.
9시 50분에 드디어 배는 16대의 차와 승객을 싣고 팽목항을 떠난다.
배는 관매도로 직항하지 않고 몇 개의 섬을 거쳐 가고 있었지만, 초행길의 나그네에게는 이 섬 저 섬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라던 즐거운 일이다.
조도 어류포항을 지나서 배는 하조도와 상조도를 잇는 조도대교를 밑을 지나고 있다. 조도(鳥島)는 페리를 타고 팽목항에서 4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넓이가 57.1㎢의 섬으로 여의도보다 약간 적은 5.73㎢의 관매도보다 열 배 이상의 큰 섬이다. 섬 이름 ‘鳥島(조도)’는 주변에 작은 섬들이 새때처럼 떠 있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조도는 이 주변 섬들의 어미섬 격으로 면소재지여서 다른 섬에서는 폐교된 초·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가 있어 주변 섬사람들에게는 생활공간이 되는 섬이다.
이곳 관광은 배 시간에 맞추어 기다리고 있는 중형 버스를 타고 구경해 볼 수도 있지만 승용차가 없으면 아주 불편한 모양이다.
외지에서 승용차를 몰고 온 사람들은 이곳에 내려서 하조도 남단의 신전해수욕장이나 하조도의 자랑인 등대를 보고, 환상적인 연도교(連島橋)인 조도대교(鳥島大橋)를 지나 도리산전망대에 올라 아름다운 다도해(多島海)를 구경을 하고 이곳에 차를 세워 두고 관매도로 간다.
관매도는 걸어다는 섬이지 차를 타고 다니는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는 관매도를 구경하고 오는 길에 배에 싣고 가는 것이다.
페리호는 조도에 이어 - 라베도- 관사도 - 소마도- 모도- 대마도를 둘러 관매도로 간다.
*. 관매도 이야기
어디를 가나 그 섬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선착장(船着場)이다.
그러나 오늘은 비수기여서 매물도 매표소는 배 쪽에 그 업무를 모두 맡기고 굳게 닫쳐 있어서 유인물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곳에는 선박 운임표, 자전거의 요금, 관매도 지도, 관매8경 사진 들이 있어 하나하나 빠짐없이 디카에 담았다.
이들은 여행이 끝나고 귀가해서 쓸 여행기의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중 관매도 큰 지도 아래 붉은 보단이 있어 꾸욱- 눌러 보았더니 예쁜 여자의 아나운스멘트가 시작된다.
-관매도란 이름은 옛날에는 '볼매도'라 하던 것을 제주도로 귀양 가던 조(趙) 선비가 이곳에 들려 관매 해변에 매화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고 볼 ‘관(觀)’, 매화 ‘매(梅)’라 하여 관매도(觀梅島)라고 불렸답니다.
관매도에서 지형· 지질의 경관이 우수한 곳을 ‘관매 8경’ 으로 지정하였는데 거기에 독립문바위와 구성바위를 더하여 ‘관매10경’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천연기념물 제212호인 후박나무 2구루와 관호마을에 두레박 우물, 마을 돌담길 등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관매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는데 126갸구가 관매마을(1구), 관호마을(2구), 장산마을(3구)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 마을은 ‘전국 국립공원 최초의 명품마을’로 지정 된 후 그 이전보다 10배의 소득을 롤리고 있습니다.
선착장에 올라서 왼쪽 해변 쪽으로 가면 이 섬에서는 가장 큰 관매마을과 장산편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아기자기한 꽁돌· 돌묘와 하늘다리를 가는 길에 관호마을을 볼 수가 있습니다.
*. 돈대산(墩臺山) 산행 우리 부부는 관매마을에 민박을 정하여 짐을 맡겨 놓고 선착장으로 다시 나와서 ‘돈대산 1.2km’ 의 이정표가 있는 나무 층계를 따라 정상을 향한다.
낯선 고장에 갔을 때 그 고장의 진면목(眞面目)을 가장 잘 보는 길은 그 고장의 산을 오르는 것이다. 그 고장 전체를 굽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섬 여행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아내는 나보다 앞서 산을 잘도 탄다. 정상인보다 체중이 적게 나가서인 것 같은데 몸이 약해서 지구력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 국토 중 서남쪽의 가장 끝 섬 관매도에 아내와 함께 온 것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었지만 며칠 전 일산 삼성생명의 벽에서 본 멋진 글귀 탓이기도 하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자.’
부부는 혼자 가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요, 함께 멀리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높이 오르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 같이 산은 평범한 산이지만, 굽어보는 경치는 오를수록 비범(非凡)을 더해 간다.
그게 아쉬워 뒤돌아보고 카메라에 담기를 탐하다 보니 아내와 자꾸 멀어만 간다.
기록한다는 것은 한번 사는 인생이 아니다. 한번 가본 여행이 아니다. 꼭꼭 숨어버릴 추억의 창을 노크하는 것이 글이요, 그림이기 때문이다. 뒤돌아 보면, 다시 뒤돌아 보면,
관매도 해변을 향하여 몰려오는 저 하얀 파도!
그림 같이 붉고 파란 기와지붕의 관호마을 앞의 호수 같은 바다! 볼 ‘觀(관)’, 호수 ‘湖(호)’ 아, 그래서 관호마을(觀湖村)이었구나! 그 어원도 저절로 깨닫게 한다.
내일 가보려는 꽁돌과 하늘다리가 있는 저 바위, 그 끝에 있는 그림 같은 아름다운 하얀 등대!고개를 돌리면 장산마을 산록의 화려한 노란 유채꽃밭! 그리고 수석 같은 저 섬 섬 섬 들-. 그것들을 모두 카메라에 담아가고 싶은 욕심은 감탄으로 이어지며, 전신의 흐르는 땀이 감동의 눈물 같았다. 이런 순간 나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고 찬란하다.
이러구러 돈대산 정상에 이르렀다.정상에는 정상석 대신 나무 널판에 쓴 ‘돈대산 219 m’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과 삼각점이 전부다.
나는 관매도 도민(島民)에게 몇 가지 묻고 싶다.
3구나 된다는 마을이 이 소중한 산에 정상석 하나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단 말인가? 가난 중에 가난이 마음의 가난이라던데-.
산 이름도 잘못된 것 같다. ‘돈대(墩臺)’라는 낱말은 산 이름으로는 부적격한 단어로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다. 돈대(墩臺)라는 말은 ‘약간 높직하고 평평한 땅(ground; heights.)을 뜻하는 말로 수원성 돈대, 강화 갑곶동대 등이 그 예다. 우리가 지나쳐 온 조도의 도리산의 돈대(통신탑)와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관매산이란 좋은 이름을 제쳐두고 왜 구태어 ‘돈대산’라 이름하였을까?
다음으로 묻고 싶은 것이 돈대산의 높이다. 모든 서적을 조사해 보면 산 높이가 219m로 나오는데 어찌하여 관매도 일대의 마실길 안내도 등 모든 지도에는 330.8m로 표기하고 있는가. 추측컨데 고도계의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는 분의 과신한 착각 같다. 잘못은 빨리 수정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니 조속히 수정할 일이다.
*. 관매제1경 관매도 해변 배를 타고 관매도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우리가 맨 먼저 보게 되는 것이 활처럼 휜 2.2km의 고운 백사장과 숲이다. 이곳이 관매 8경 중 제1경 관매도 해변이다.선착장에서 그 백사장에 이끌려 관매마을 쪽을 행하다 보니 백사장 뒤에 울창한 송림이 멋있다.
- 이곳에 사는 마을 처녀가 모래를 세 말씩이나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람이 대단했던 이 고장에, 300여 년 전 입도(入島)한 함씨(咸氏)가 방풍, 방사림을 목 적으로 식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1,200여m의 해안가 모래사장 뒤에 삼 백년 수령의 3만 구루의 해송(海松)이 폭 200m의 숲을 이루어 넓게 서식하고 있다. 그 소나무를 자세히 보니 풍란(風蘭)이 함께 기생하고 있다.
그 해안가를 거닐다가 숲길에 들어섰더니 짙은 솔향이 몸을 감싸는데 이색적인 이정표가 각종 체험으로 이끈다.
피튼티드길, 습지관찰로, 파도소리길, 한소리 마당길, 장단 맞춤 길 등이어서 한창 촬영에 바쁜데, 어디서인가 대고(大鼓)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운라(雲鑼), 편경(編磬)과 편종(編鐘) 소리가 차례로 들려온다.
앞서간 아내가 장단맞춤 길에서 울려보는 국악기 소리들이었다.
그래서 그 숲길 이름도 ‘장단 맞춤 길’인 모양이다.
아름다움도 동반자가 있는가. 이 숲은 지금은 폐교된 초 중학교 앞에 마을의 성황림인 수령(壽齡) 800년의 온갖 풍상을 겪고 자란 천연기념물 212호 후박나무를 지키고 있다.
이 해송 숲은 2010년 제 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아름다운 생명상’ 을 수상한 곳이다.
100m 이상을 나가도 수심이 1.5m밖에 되지 않는다는 천혜의 해수욕장에 막 해가 지고 있다. 붉은 노을을 이끌고 하루가 지고 있는 것이다.The sun also rise! 태양은 또 다시 뜬다는데 이렇게 나는 늙어만 가는구나!
*. 관호마을의 낭만
여행 와서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남보다 일찍 일어나는 일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남보다 많은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말 같이, 낯선 고장 새벽의 그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싱그럽게 피어나는 하루를 일찍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다녀와서 아점(아침겸 점심)으로 먹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관매도에서는 두 번째로 크다는 관호(觀湖)마을을 향한다.
선착장을 막 지나다 보니 왼쪽 암벽 중간쯤에 커다란 소나무 화석(化石) 하나가 있다. 길이가 2.3m, 폭이 70cm나 되는 목재화석(木材化石)으로 규화목(硅化木)이라 하는 것이다. 1억 5천만년 경에는 이 지역이 호수였다 하는 그 설명의 기록을 보면 그래서 마을 이름도 '관호(觀湖)마을'이라 한 것 같다. 관매마울에서는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톳을 바다에서 건져서 말리는 아낙네가 많았는데 관호마을 해변 도로는 한 마디로 미역 건조장 같았다. 마을 입구에 '바다수산'이라는 간판을 보니 성수기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이곳 특산물인 활어, 멸치, 액젓, 돌미역, 돌톳 등을 판매하는 모양이다. 마을 구경은 돌아올 때 하기로 하고 관매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꽁돌과 돌묘(제3경)를 보러 간다.
이정표를 보니 마실 수 있는 두레박 우물에서 0.15km에 우실이 있는데 '우실'이 뭘까?
바다가 보이는 언덕 마루턱에 양덕기미 쉼터가 있다. 거기에 돌담이 있고 우실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곳은 관호마을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우실’입니다. 재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재냉기라고 하는데 재냉기 바람에 농작물의 피해를 막고자 쌓은 돌담을 우실이라고 합니다.우실은 마을의 경계가 되는 영역이기도 하고, 상여가 나갈 때의 산자와 죽은 자의 마지막 이별 장소이기도 합니다.
관호마을 우실은 쉼터요 전망대이기도 하였다. 운치 있게 만들어 놓은 흔들리는 나무그네, 8각의 가로 원통에 관매 8경 사진을 넣어 아래 위로 돌려가며 보게 한 것도 멋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굽어보는 청정한 해안가의 경관이 절경이다. 그 한 가운데 공처럼 둥근 돌이 바로 꽁돌이었다.
*. 제 3경 꽁돌과 돌묘 이야기
그 꽁돌을 보러 내려가는 나무층계도 멋있지만, 다 내려가서 만나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은 파도가 만들어 놓은 기기괴괴한 모양의 형형색색의 돌 무리들이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일찍이 옛 시인들이 이런 시조를 남겼다. 말이 놀라거늘 혁(革) 잡고 굽어보니금수청산이 물속에 잠겼어라 저 말아 놀라지 마라 이를 보려 하노라 -작자 미상 아내가 놀라거늘 나도 놀라 굽어보니 관매도 꽁돌 바위에 이 내 눈도 황홀하다 아내여 놀라지 말고 이 내 말을 들어 보소 -ilman -이 꽁돌은 하늘나라 옥황상제가 애지중지하던 돌이었데요. 그 꽁돌을 두 왕자가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지상에 떨어뜨렸답니다.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내려온 하늘장사가 꽁돌을 왼손에 받쳐 들고 막 하늘로 오르려는데, 어디서인가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더래요. 그 소리에 혹해 하늘로 올라갈 생각도 잊고 있었지요. 옥황상제는 다시 두 명의 사자를 시켜 하늘장사를 데려오게 했는데, 두 사자도 역시 거문고 소리에 매료되어 하늘 오르기를 잊어 버렸데요. 이에 노한 옥황상제가 돌무덤을 만들어 그 속에 그들을 넣어 버렸답니다. 그 돌무덤이 돌묘이고, 그 위에 있는 하늘장사의 손자국이 찍힌 둥근 바위가 꽁돌이랍니다. 하늘에서 자기들의 실수로 몇 사람이 희생된 것을 알고 괴로워하던 두 왕자도 이곳에 내려 왔다가 역시 거문고 소리에 희롱당하여 넋을 잃게 되자 옥황상제의 노함을 받아 영원히 바닷물 속에 잠기도록 섬으로 만들어 버렸답니다. 그 섬이 바로 우측으로 멀리 보이는 형제섬이랍니다. 꽁돌은 직경이 4~5m 큰 둥근 바위인데 상단부에 움푹 들어간 구멍이 있어 사람들이 조약돌을 던져 넣으며 길흉을 점치는 것 같았다. 아내도 돌을 던져 넣고는 희희낙락한다. 금년에 외손녀 대학시험에 합격해 달라고 빌면서 던진 돌이 단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 제 5경 하늘다리 꽁돌과 돌묘에서 흰 밧줄이 매어진 길을 따라 1km 거리에 ‘하늘다리’가 있다 하여 해안선을 굽어보며 찾아 나섰는데 산 넘어 산이 계속 되는데 아무리 섬 산이라 하여도 오름길이 제법 힘들다. 그러나 그 길에서는 뒤돌아 보는 꽁돌이 아름다움을 더하여 주고 있다. 앞으로 전개 되는 해안선의 절경이 눈을 놀라게 한다. 그 중 저 멀리 바닷가에 다리를 담근 바위 위의 등대는 이국에 온 듯 황홀하다. 그 규모가 작은 것을 보니 무인 등대 같다. 하늘다리는 먼 옛날 동지나해의 거친 파도에 밀려서 50m 절벽이 칼로 자른 듯이 3~4m 폭으로 똑 바르게 갈라져 있는 바위다. '하늘다리'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이 섬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고목을 걸쳐 놓아 다리를 만들었던 것을 지금은 튼튼하고 안전한 다리를 놓으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그 다리 중간에 강화 투명 플라스틱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게 만들었는데 오금이 저려서 차마 그것조차 디디지조차 못할 정도의 천길 낭떨어지였다. 돌을 하나 주워서 바다에 던지니 13초 후에야 흰 포말이 보인다. 이곳은 옛날 이 섬의 동북쪽에 있는 방아섬에서 방아 찧던 선녀들이 날개옷을 벗고 쉬던 곳이라는 관매 5경이다. 하늘다리부터는 더 갈 수가 없어서 원점회귀(原點回歸)해야만 했다. 그런데 올 때는 편한 내리막길이 이제는 힘든 오르막 길이 되어 지치게 한다. ‘하늘다리’ 가는 길엔 오름길이 힘들더니 원점회귀 ‘꽁돌’ 길도 오름길이 대간하다 세상은 내림 길은 잊고 오름 길만 탓하네 -오름 길 *. 관호마을 마실 구경 관호마을에서의 볼거리로는 앞서 말한 톳이나 미역을 해안도로나 담에 말리는 것 이외에도, 돌담길, 벽화길 등이 더 있다.
돌담은 크고 작고, 둥글고 모나고 울퉁불퉁한 제각각 다른 모양의 자연석의 돌로 쌓은 담으로 그래서 더 친근하게 보인다. 해풍과 추위를 막기 위해 쌓은 게 돌담인데 신록의 계절을 맞아 그 위로 뻗어가는 담장이 넝쿨의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들 돌담 동네를 보는 흥겨운 마음이 김영랑의 시를 절로 읊조리게 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그 돌담길을 따라 가다 보면 빨갛고 파란 지붕이 있고, 그런 집 담벼락에는 고운 그림이 그려 있다. 그 그림 중에는 관매도 8경도 있지만 그중 가장 많은 것이 관매도라서인지 매화(梅畵)가 많았다. 그 중 압권은 학교 칠판 그림인데 그 급훈이 멋지다. 칠판 앞에서 사진 찍기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않기 이정표 따라 ‘전통시범 숙소’를 가보고도 싶었지만 이를 보니 갑자기 시장기가 감돈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서 서둘러 1시 10분 배 시간에 맞추어 귀가를 할 예정이다. *. 방아섬(남근바위) 관매도를 제대로 구경하려면 최소한도 '관매8경'은 다 보아야 한다. 그 관매 8경 중에는 도보로 탐방이 가능한 관매 해변(1경), 방아섬(2경), 돌묘와 꽁돌(3경), 하늘다리(5경) 넷이 있다. 선박을 이용하여 섬 일주를 하며야만 볼 수 있는 명승지로는 할미중드랭이굴(4경), 서들바굴폭포(6경), 다리여(7경)와 8경인 하늘담(벼락바위) 넷이 더 있다. 오늘은 선박을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더 없이 잔잔한 바다지만 그 배를 이용하려면 15만원 이상을 투자해야 하고 그것도 성수기라야 가능한 일이다. 여행은 생락의 예술이라서 그냥 떠나려고 하였더니 걸리는 게 있다. 어제 돈대산을 종주하고 관매 8경 중 2경인 방아섬을 찾아 나섰다가 1경인 관매도 해변과 숲을 거니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 아쉬워서다. 민박 주인의 말에 의하면 방아섬까지는 아주 평탄한 길로 넉넉 잡아도 왕복에 2시간 이내 거리라 하여 식사를 마치고 부지런히 방이섬을 찾아 나섰다. 가다가 시간이 부족하면 그냥 돌아오기로 하고, 어제 갔던 천연기념물 212호의 후박나무를 지나 매화초교와 조도중학관매분교 앞을 지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사 1층은 관매초등학교, 2층은 조도중학관매분교였다는데 지금은 폐교가 된 건물이라 썰렁하게 텅 비어 있다. 그러고 보니 학교뿐이 아니라 섬 전체에 어린이는 한 사람도 볼 수 없었고 중년 일부와 노인들만이 모여 사는 섬이 관매도었다. 정자를 지난다. 3개 마을 입구 어디에나 있는 4각정자였다. 아스팔트 길이 끝나고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방아섬까지는 해안을 굽어보고 가는 1.35km 거리의 길이었다. 방아섬 가는 도중 좌측 320m를 내려가면 독립문바위가 있다. 독립문바위란 관매 9경에 해당하는 곳으로 해식동굴의 입구가 독립문 같다하여 이르는 해식을 말하는데 부안의 채석강처럼 단층절리의 해식 절벽이다. 관매도에는 이런 절리가 수없이 많은데 그 한 층을 형성하는데만도 100년이란 세월이 걸리는 모양이다. 방아섬이 가까울수록 그 해식 절경이 나뭇가지 사이에 굽어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문득 나타나는 절경이 있다. 남근바위라는 별명을 가진 방아섬이었다. 방아섬은 밀물 때는 물에 잠겼다가 썰물 때면 뭍에 붙는 그런 섬이었다.'방아섬'이란 말은 이곳에 선녀가 내려와 방아를 찧었다는 전설에서 생긴 말이고, 남근바위라고 하는 것은 섬 꼭대기의 큰 바위 끝이 남자 성기의 귀두(龜頭)를 닮았다 해서 생긴 말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이를 남근(男根)으로 보지 않고 곡식 등을 찧는 디딜방아, 물레방아, 연자방아와 같이 방앗대로 본 모양이다 그래서 다섯 선녀들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곡식 등을 찧던 방아로 미화한 것 같다. 예로부터 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들이 이 바위 앞에서 정성껏 기도하면 아이를 갖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그런 여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곳이 방아섬이라고 한다. 관매도행 배에서 만난 조도에 사는 노인의 말에 의하면 이 섬의 이 바위는 하도 커서 건너편 조도(鳥島)의 신전마을에서도 또렷하게 보인다며 거기 얽힌 전설을 전하여 준다. 신전마을 처녀들이 부엌에서 밥하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방아섬을 보면, 큰 파도 칠 때에는 바위가 흔들 흔들 움직이는 것이 거시기가 머시기 하는 것 같아서 부지깽이를 들고 얼굴을 붉힌다는 남새스런 이야기다. 선녀가 방아 찧었다는 이야기는 선녀들이 옷을 벗고 놀았다는 하늘다리(매화 5경)와 목욕을 하고 즐겼다는 서들바굴폭포나 관매해변 (관매 6경, 1경)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도보로 가능한 관매도의 모든 곳을 구경하였다는 기쁨을 안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나 홀로 왔다면 이런 기회에 진도나 목포의 곳곳을 누비련만 아내의 체력은 지금까지만도 그 도를 넘었는지라 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76년만에 처음 보는 그리던 섬을 찾아
‘내’가 ‘나’를 떠났다가 다시 ‘나’로 돌아갑니다. 바다를 마시다가 굽어보는 산이 되고 화려한 명품마을 길이 되며 아름다움을 마음에 심고 떠나는 것은 관(觀)매(梅) 도(島)가우리를 기다려 준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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