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적봉(露積峰)의 여정
노적봉(露積峯)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 놓아 큰 노적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 오는 해발 60m의 바위산이다. 위 노적봉 사진을 왼쪽으로 돌려 보자.
이마, 코, 입 턱이 사람의 얼굴 같지 않은가. 그래서 이곳 사는 분들은 노적봉을 나다니엘 호돈의 소설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 우측으로 빙 돌아 올라가니 커다란 광장이 나타나고 거기에 멋진 종각(鐘閣)이 서 있다. '시민의 종각(市民鐘閣)'이었다. 새천년인 21세기를 맞아 목포 시민의 소망을 담아 희망과 영광의 새천년을 기리는 종각으로, 그 현판은 이 고장 출신인 목포인이 존경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휘호가 걸려 있다. 그 부근이 옛날 '목포 기상대'가 있던 자리요, 구 MBC 방송국이 있던 자리도 그 근처다.
-80년대 일어난 5. 18 민주항쟁 당시의 시민군과 시위대를 MBC가 폭도(暴徒)로 방송하자 분노한 목포 시민들이 습격하여 방화해 버린 구 MBC 방송국 자리다.
광장을 돌아 큰길로 내려오다 보니 기묘하게 생긴 느티나무가 있어 얼굴을 붉히게 한다.
-이 느티나무는 150년 넘는 어미나무의 뿌리에서 싹이 나와 성장한 나무로 여자 나무(女人木), 다산목(多山木) 등으로 불린다. 인근 주민들에게 이 나무는 다산(多山)을 이루게 한다는 믿음의 대상이다. 그 영향이었는가. 이 인근 지역은 다른 곳보다 유난히 출산율이 높다고 한다.
*. 유달산 이야기
유달산은 해발 228m의 낮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첩첩함으로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이라 한다니 이는 호남의 금강산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오르면 다도해와 목포항의 전경이 한 폭의 동양화로 우리 눈 아래 펼쳐진다.
유달산을 왜 한자로 '儒達山'이라 썼을까?
문헌을 뒤져 보면 유달산 한자는 ''鍮達山', '楡達山', '諭達山' 등으로 그중에 '鍮達山'(유달산)이 제일 많이 쓰였다.
유달산의 '유' 자를 놋쇠 '鍮(유)'자로 쓴 것은 아침 햇살을 받으면 놋쇠가 산에 흐른 것 같아서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오늘의 '유달산(儒達山)'에는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하여 온다.
-구한말 무정 정만조(戊亭 鄭萬朝)란 문신이 경복궁 화재사건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이완용 등 권신들의 모함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었을 때 목포를 자주 찾은 정만조(鄭萬朝)는 이 고장에 유학(儒學)을 진작시켰다.
목포시사(木浦詩社, 지방문화재 21호) 등을 무정(戊亭)의 발의로 짓는 등 이 고장의 문운(文運)을 일으켜 주었는데, 이 무렵 유달산(鍮達山)의‘鍮’ 자를‘儒’ 자로 고친 것 같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유달산의‘鍮’ 자를 구태어 선비 '儒'(유) 자로 바꾸어 쓰게 한 것은 근처 무안읍에서 남쪽으로 10km 지점에 있는 '승달산(僧達山 해발 318m)'의 ‘僧’ 자를 의식하고 배불 승유(排佛僧儒)의 사상으로 인하여 '儒’ 자를 썼을 것이라 유추된다.
*. 이난영(李蘭影의 '목포의 눈물' 이야기
이순신 동상을 지나니 오포대(午砲臺, 지방문화재 제138호)가 나타난다. '午(오)'는 정오(正午)의 준말일 것이니 낮 12시를 알리는 신호로 쏘던 대포다.
내 어려서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정오에 소방소에서 사이렌이 울렸는데 이를 목포에서는 대포로 대신했던 것이다. 그후 사이렌으로 대체하였다지만-.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 드는데
부두에 새아씨 아롱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은 와세다 대학 출신의 무명 시인이었던 문일석이 1935년 '조선일보'가 OK레코드사와 함께 신민요 노랫말 공모에 '목포사랑'이란 제목으로 1등 당선한 가사(歌詞)이다.
이것을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고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입혀 당시 18세의 소녀 이난영(李蘭影)이 불러 대히트한 불후의 대중가요다.
토르토식의 이 노래는 일본식의 엔가풍(演歌風)의 노래여서 일인들도 즐겨 부르던 대중가요였다.
목포시는 작사자와 가창자가 모두 목포 사람이어서 유달산 중턱에 한국 최초의 노래비를 세워 가왕(歌王) 이난영(李蘭影)을 기리고 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비음(鼻音)에다가 노래의 곡이 제목 처럼 서글퍼서인가. 노래처럼 이난영의 일생도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난영(李蘭影)은 22살에 당시 천재적 가수겸 작곡사였던 김해송과 결혼한 후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남편 김해송이 실종되어 홀로 살다가 43세에 동료 가수 남인수와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살았으나 남인수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그후 도미(渡美)하여 딸들인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50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일등봉(一等峰) 가는 길의 정자와 바위들
산악인 김장호(金長好) 시인은 그의 저서 '韓國百名山記'에서 명산(名山)의 조건을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명산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위치, 모양, 품격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한다.
예로부터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을 경승지(景勝地)라고 말하여 왔다.
유달산은 그 한반도 남서쪽에 기기괴괴한 바위들 거느리고 우뚝히 서서 다도해를 굽어 보며 있는 산으로, 228m 산 치고는 그 우람한 모습이나 품격으로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이라 칭하기에 부끄럽이 없는 명산이다. 이런 산을 소유한 목포 사람들은 다른 고장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렇듯 산 좋은 곳이라서인가. 목포에는 정자도 많다.
계곡이 깊지 않아서 물은 없으나 곳곳마다 식수대에서는 수도꼭지만 들어도 물이 콸괄 나온다.
정자(亭子)란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 있어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경치 좋은 곳에 지은 집이다.
그런 정자가 대학루(待鶴樓), 유선각(儒仙閣), 관운각, 달선각, 소요정, 낙조대 등으로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니 어찌 유달산을 명산과 경승지라 아니하겠는가.
그뿐인가 가는 길에 기묘한 바위가 줄을 잇는다.
노적봉, 투구바위, 고래바위, 종바위, 애기바위, 낚시바위, 나막신 바위 입석바위, 마당바위 등등.
나는 오늘 아침 순천만 용산 전망대에 올라 갯벌사이 S자로 흐르는 바닷물과 수많은 원을 만들고 있는 갈대 밭을 굽어보았더니, 오늘 저녁은 목포의 일등바위에 올라 유달산의 진면목을 보고 있으니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헌데 그 바위에 근심 걱정이 가득한 사람 하나 커다란 우산을 들고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어디서 왔냐 물으니 못 알아듣는 말로 어눌하게 더둠 거리더니 신분증을 꺼내 보인다. 신분증은 장애자란 글이 있는 것을 복사한 것이다. 63세의 영등포에서 온 걸인 같았는데 제주도로 가는 길이라 했다.
밥을 못 먹은 것 같아 가방 속 준비해온 간식을 요기하라 꺼내 주니 거침없이 맛있게 받아 먹는 모습이 며칠을 굶은 것 같다. 오늘은 어디서 잘 것이냐고 물었더니 일등바위를 가르킨다.
하산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가 오지 않는데 그가 갖고 있던 우산은 탠트 용으로 쓰고 자는 우산 같았다.
그렇게 어려운 그를 보니 무리해서 내일 가기로 한 추자도를 꼭 가야하는가를 되묻게 된다.
저녁이 벌써 밤으로 향하는 시간이어서 저 멀리 고하도(高下島) 다리가 불을 켜고 밤을 맞고 있다.
고하도(高下島)는 유달산 아래의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라 하는데, 보화도(寶化島), 고하도(高霞島) 또는 칼섬이라고 도 부르는 목포항의 관문이 되는 섬이다.
그 모습이 반달모양으로 목포를 감싸 안은 모습이다.
맨 오른쪽이 용머리요 저 다리가 2012년 국도 제1호선이라는 자동차 전용 다리로 목포 외항과 서해안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목포대교(木浦大橋)렷다.
하산하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순천을 다녀오느라 쓰고 남은 여행 경비는 절대가 부족한데 카드를 쓰게 되면 7월 보내는 것이 난감하다. 그래도 여정(旅情)은 추자도(楸子島)를 강행하고 싶다.
유달산 아래가 바로 목포역이라서 '역에 가서 서울 가는 KTX가 있으면 서울로 향하고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추자도로 향하자 .'하면서 일부러 천천걷는다. 나를 유혹하는 '빛의 거리'를 지나며 -.
여기는 기차가 다시 더 남쪽으로는 갈 수 없이 북으로만 향할 수밖에 없는 국토 종점인 목포역이다.
비싼 차비 들여 목포에 왔으니 KTX가 없을 시간일 것 같으니 하루 저녁 자면서 목포의 오미(五味)라는 세발낙지, 홍탁삼합, 꽃게무침이나 꽃게장, 민어회, 칼치조림을 먹고 가고 싶다.
그런데 그런데 0시 32분에 용산에 도착한다는 차표를 끊을 수 있다 하지 않는가.
내가 내가 묻는다. 너는 어떻게 할레? 추자도 갈 여비는 부족하지만 '목포 5미'를 먹고 갈 여유는 있지 않은가.
여행을 끝내도 남는 아쉬움들
노름처럼 옷깃을 부여잡는 미련아
허기진
저 아름다움에
돌아보는 목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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