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 윤 도균 기자님께
오늘 곤지암 화담숲(화담-)을 가족과 함께 다녀왔어요. 몇 년 전 윤 기자님과 함께 찾았던 화담숲에 깊은 인상을 받아 어버이날 기념으로 자식들과 함께 갔던 거지요. 그리고 낙상(落傷) 사고 후 처음으로 8,000 보를 걸어보았네요. 매표소까지 걸어가서, 모노레일을 타고 분수공원에 내려서 내림 길을-.
내일 떠나는 제1땅굴 여행에서 혹시나 일행에게 폐가 될까 염려해서 시험 삼아 가본 곳이 곤지암 화담숲이었던 거지요.
그런데 지금 ilman의 체력으로는 무리였나 가족에게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했군요.
그래서 이런 상태로 땅굴 여행에 따라 갔다가는 노인 환자의 망녕된 우행으로 함께 간 분들게 커다란 폐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내일 땅굴 탐방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네요.
그래서 오랜 시간 많은 자료 수집을 통하여 ‘제1땅굴 이야기‘를 미리 써 놓고 현지답사 후에 완성하려 하였는데 유감입니다.
다음 글은 현장에 가서 함께 탐방할 수 없어 버스에서 홀로 보낼 경우를 위해서 써 놓은 제 노력의 답사기(踏査記)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여 미안합니다.
-2019년 5월 9일 잠안 오는 밤에 ilman 배
*. DMZ '제1 땅굴' 이야기
내가 땅굴 안보탐방을 한 것은 제2, 제3 땅굴 탐방으로 '제1안보 땅굴' 탑방만 못하였구나 하여 먼동회 회원 따라 제1땅굴 탐방을 나서려다 보니 제4 땅굴이 있는 줄을 처음 알고 무관심은 무식을 낳는구나 한탄하였다.
그래도 배웠다는 사람이 북한은 남침을 위해서 국력을 기울여 Korea를 침략하기 위해 기승을 부리며 몰래몰래 땅굴을 파고 있었는데 제4 땅굴이 발견된 지가 20년인데도 그것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보다 4~5년 전에 발견된 제1땅굴'을 아직 다녀오지 못한 것은 1974년 11월 15일 연천 지역에서 발견된 남침용 땅굴이었지만 민간인 통제구역인 비무장지대에 위치하여 있어 개방할 수 없어서 최근에 가장 가까운 관측소인 상승 OP에다 실제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인 것 같다.
땅굴이란 무언가.
북한이 남한을 적화시키디 위하여 기습작전을 목적으로 휴전협정을 어기고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몰래 굴착한 남침용 군사 통로를 말한다.
1971년 9월 25일에 북한에서 있었던 일이다.
김일성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속전속결 전법을 위해 남한의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 그 일환으로 파놓을 남침용의 갱도(坑道) 하나는 10개의 핵폭탄(核爆彈) 보다 효과적이다”라는 김일성의 '9· 25교시'에 의해 1972년 5월부터 은밀히 땅굴 공사를 시작된 것이다.
이 땅굴 존재가 드러나게 된 것은 1974년 9월. 귀순자 김부성에 의해서 정보를 알고부터였다.
군은 혹시나 하던 중 1974년 11월 15일 육군 25사단 구정섭 하사가 지휘하는 육군 수색조가 수색 임무를 수행하던 중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감지하고 이를 수상이 여겨 파 나가다가 지표에서 약 46㎝ 아래에 터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흙을 파던 중 북한 초소로부터 약 3분간에 걸쳐 300발가량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우리 국군도 이에 응사를 하게 되면서 제1땅굴의 전모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 갱도(坑道)는 어른이 똑바로 설 수도 없는 1.2m의 낮은 형태지만 이를 통하여 1시간에 1,500명이 이동할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전쟁 발발 시 전면적 기습전과 후방 공략을 달성하기 위하영 북한이 남몰래 파 놓은 남침용 땅굴이었다. 이 땅굴은 서울로부터 52km, 개성으로부터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지표에서 2km ~45m 깊이이며 철근이 세 가닥 들어간 조립식 콘크리트를 사다리꼴로 엮어 튼튼하게 만들었다.
땅굴을 판 목적은 남침 1시간 내에 1개 연대 규모를 침투 남파 간첩의 비밀 통로로 이용하여 요인의 납북을 돕는 통로 및 우리 군의 기밀을 탐지해 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 정부는 즉각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북한 측에 땅굴 현장의 공동조사를 제의했으나 북한 측은 이를 조작된 것이라고 억지 선전만 하며 거부했다. 5일 후인 11월 20일 한미 공동조사반이 수색에 나섰다가 북한이 매설한 폭발물에 의해 국군 장교 1명과 미군 장교 1명이 전사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참변을 겪게 되었다.
그중 현재까지 발견된 땅굴로는 경기도 연천의 제1 땅굴을 위시하여 강원도 '철원의 제2땅굴', 경기도' 파주의 제3땅굴', 강원도 '양구의 제4땅굴'로 조사에 의하면 북한이 판 땅굴은 휴전선 일대에 2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1997년 미국 해병대 발간 '북한 핸드북'),
서부전선 지역에 제 1호와 제 3호 땅굴 2개, 중부전선 지역에 제 2호 땅굴 1개, 동부전선 지역에 제 4호 땅굴 1개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를 보면 북한이 휴전선 전 전선지역에서 남한 깊숙히까지 남침용 땅굴을 굴설(掘設) 하였음이 입증되게 되었다.
그 중 1975년에 발견된 제 3호 땅굴은 서울에서 불과 44km거리에 있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구 분 | 제1땅굴 | 제2땅굴 | 제3땅굴 | 제4땅굴 |
---|---|---|---|---|
발견일시 | 1974.11.15 | 1975.3.19 | 1978.10.17 | 1990.3.3 |
위치 | 고랑포 동북방 8km |
철원 북방 13km |
판문점 남방 4km |
양구 북방 26km |
크기 | 높이 1.2m 폭 90cm |
높이 2m 폭 2m |
높이 2m 폭 2m |
높이 1.7m 폭 1.7m |
깊이 | 지하 45m | 지하 50~160m | 지하 73m | 지하 145m |
총길이 | 3,500 m | 3,500m | 1,635m | 2,052m |
침투길이 | 1,000m | 1,100m | 435m | 1,028m |
- [출처] 상승 OP전망대와 제1 땅굴|작성자 seadjk
⑴ 제1땅굴:
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高浪浦) 북동쪽 8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약 1.2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지하 45m 깊이에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전술 능력으로 1시간에 1개 연대의 무장병력(武裝兵力)이 통과할 수 있고, 궤도차(軌道車)를 이용하면 중화기(重火器)와 포신(砲身)도 운반할 수 있다.
⑵ 제2땅굴:
제1땅굴이 발견된 지 4개월 뒤인 1975년 3월 19일 한국군 초병이 경계 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난 후 항공사진 등을 동원한 끈질긴 굴착 끝에 시추탐사에 의해 발견됐다.
1975년 3월 24일 강원도 철원(鐵原) 북쪽 13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의 암석층 아치형 구조물이었다.
전술 능력으로 1시간에 약 3만 명의 병력(兵力)과 야포(野砲) 등 중화기(重火器)는 물론 탱크까지 통과할 수 있는 땅굴로 폭이 2.1m, 높이 2m, 전체 길이 3.5㎞로 군사분계선 남쪽 1.1㎞지점까지 굴착되어 있었다.
⑶ 제3땅굴: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板門店) 남쪽 4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으로 유엔군 전진기지(前進基地)로부터 2㎞ 떨어진 곳으로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지점에 위치에서 1975년 3월 발견되었다. 너비 1.95m, 높이 2.1m, 깊이 지하 73m, 길이 약 1.6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시킬 수 있다.
⑷ 제4땅굴: 백두산부대 전초 수색대에 의해서 양구 동북쪽 26㎞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만인 1990년 3월 3일 발견된 이 제4 땅굴은 군사분계선에서 1.2㎞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하 145m, 깊이에 약 2.1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구조물이다.
땅굴 출입구에는 발견 당시 산화한 군견을 위로하는 충견비가 세워져 있다.
*. 휴전선(休戰線) 이야기
두 교전국(交戰國) 사이에 휴전(休戰) 또는 정전(停戰) 제의되었을 경우 그어지는 군사행동의 경계선을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 또는 '휴전선(休戰線)'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인 경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韓國戰爭)으로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북한군의 불법남침으로부터 만 3년 1개월 2일만에 성립되었다.
한국 정전협정(停戰協定)'에 규정된 휴전의 경계선이 곧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MDL, military demarcation line)이요 휴전선(休戰線)이다. 휴전이 성립된 시점의 전선(戰線)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에 따라서였다.
그 동안 양국이 휴전과 정전에 수반해서 적대행위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서 군사분계선을 따라 병력을 분리시키기 위해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를 군사분계선의 양쪽에 완충지대(buffer zone)로 설치하여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무장을 금지시키고 이행 여부를 국제적인 감시위원회에서 감시하게 하였다.
휴전선은 그 길이가 155 마일(약 250km)로, 서쪽의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喬棟島)에서 시작하여 개성 남방의 판문점(板門店)을 지나 중부의 철원·금화(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高城)의 명호리까지 이른다. 한국 군사분계선은 남북 양쪽 2Km에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사분계선은 200m 간격으로 완충지대(buffer zone)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땅굴은 무엄하게도 이 분계선을 넘어 서 민간인 통지선을 넘어서 남한의 연천, 철원, 화천, 양구에까지 침입하고도 북한군은 자기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땅굴 속에서 발견된 소련제 다이너마이트와 북한제 전화기,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작업 진척 일정을 기록한 흔적 등이 북한에서 파내려 온 땅굴임을 분명히 입증하였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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