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연천 이야기(2) /연천8경(漣川 八景)

ilman 2019. 8. 30. 03:40

*. 연천(漣川) 이야기(2) /연천 8경(漣川 八景) 

 연천(漣川) 여행을 '연천8경'을 중심으로 찾아 다니며 여행하는 방법도 있다.

 연천 8경에는 1경 고대산(高大山, 2경 동막골 유원지, 3경 한탄강(漢灘江) 관광지, 4경 재인 폭포(才人瀑布), 5경 십이(十二) 개울, 6경 임진강(壬辰江), 7경 백학  저수지(白鶴貯水池), 8경 전곡리 선사 유적지(先史遺跡地)가 있다.

이 중 몇 곳을 소개한다
1경: 고대산(高臺山,832.1m) 

 고대산(高臺山) 아래 마을에 사는 노인들은  이 산을 '큰고래'라 부른다.

고래는 바다의 고래가 아니라 방의 구들장 밑의 불길과 연기가 나가는 길의 고래를 말한다. 
옛날이 산은   삼림이 무성하여 숯으로도 유명한 곳이어서 '큰고래'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이 산 기슭에 있는 '철마가 달리고 싶다.'는 경원선 남한의 종단점 '신탄리(新炭里)'의 '탄' 자가  숯 '炭'(탄)자를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산의 정상에 올라 굽어 보면 산은 높고 골이 깊어서 '고래산'이라고 한 것도 같다. 

 속리산 문장대(文藏臺)처럼 높은 곳이라서 높을 ‘高’(고), 정상이 높고 평평한 ‘臺’(대)라서 '고대산(高臺山)'이라 하였을 테고-. 
젊어서 고대산에 가봤더니 그 정상은 헬기장으로 꾸며놓은 평평한 대(臺)였다. 

 고대산 등산의 특별한 매력은 무엇보다도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산이라서 북한 땅을 굽어 보며 등산하는 맛이요, 6.25로 곡창 지대인 철원 평야를 뺏기고 아까워서 김일성이 사흘 간 통곡했다는 광활한 철원 평야(鐵原平野)를 굽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건너 휴전선(休戰線)도 바라보며 국토 분단을 실감해 보게도 하는 곳도 이 산이다.

나는 14년 전인 2005년에 고대산 정상에 올라 이 산을 시조(時調)로 노래한 일이 있다.

 

김일성이 앗기고, 사흘 간 통곡했다는
철원평야 그 건너 휴전선 바라보며
오늘도
분단(分斷)을 우는가
서러운  저 고대산은. 
                         -고대산

 

3경: 한탄강(漢灘江) 관광지

 한탄강 관광지에는 자동차 야영장, 캠핑 트레일러, 통나무 캐빈하우스 카페리아, 체육시설 등 현대적인 레저 편의 시설로 이루어져 ㅇ있다지만 여기서는 한탄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련다.

 나는 한탄강의 한자가 6.25 때 수많은 국군이 치열한 전투에 희생된 한많은 우리 젊은이들의 영령 때문에 '恨歎江'(한탄강)으로 쓰는 줄 알았더니 이번에 와서 보니 그게 아니라' 漢灘江'(한탄강)이었다.
'한탄'이란 이름은 옛 지명인 '대탄(大灘)'에서 유래 된다.
"말홉천(?)은 강화 서북 27이에 있는 양주 '대탄강(大灘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김정호 '대동지지(大東地志)' 강화편)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대탄강(大灘江)의 '大'자가 가 클 '漢'(한)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한강(韓江)도 영향을 미친 것도 같다.

한자에는 각 글자 마다 음(音)과 훈(訓, 뜻)이 있어서 우리

들은 '漢' 자를 보통 '한나라 漢' 또는 '한수 漢' 자로 알고 있지만 '漢'의 훈(뜻)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훈(訓, 뜻)으로 쓰인다. 
1. 한수 '한', 2.은하수 '한', 3. 놈(남자 비칭) '한', 4, 나라 '한',  5. 강이름 '한'이듯이, 클 '한'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漢江(한강)'도 큰 강이라 풀이 될 수 있겠다.

 이 한탄강은 강원도 추가령(楸哥嶺) 동쪽 산지에서 발원하여 북한의 평강군(平康郡)과 철원군(鐵原郡), 연천을 지나 전곡의 임진강에 합류 되어 흐르는 길이 141km(남한 86km,북한 55km)의 강으로 한국에서 7 번째로 긴 강이다. (건설교통부와 수자원공사 집계)

 연천 임진강 하류 일대는 6. 25 전투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화산암(火山巖)이 깊게 패여 절리절벽(節理絶壁)으로 된 기암 괴석의 경치로도  한국에서도 이름난 절경이다.  한탄강에 대한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한탄강 한 가운데에 '삼형제 바위(三兄弟岩) 전설'이다. 

 -삼 형제(-兄弟)가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막내 동생이 물살에 휩쓸려  떠 내려 가고 있었다. 이를 구하려 큰형이 뛰어들었다가 동생과 함께 떠내려 가게 되자, 둘째까지 또 뛰어 들었다가 이 우애 깊은 삼형제는 모두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자식 셋을 잃은 어머니는 날마다 강가에 나와 울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전에 없던 큰 바위 세 개가 강 한가운데 솟아 오르는 것이 아닌가어머니는 자식들을 보는 것 같이 기뻐하며 자식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강가 삼형제 바위를 찾았다. 그후로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를 '삼형제바위'(三兄弟-)라고 하였. 

 4: 재인폭포(才人瀑布)

 한탄강의 줄기로 연천의 제1 명소 중에서도 명소로 재인폭포(才人瀑布)가 있다. 현무암 주상절리(柱狀節理) 절벽으로부터 쏟아지는 이 폭포는 높이가 18m에 달하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폭포 다운 폭포였다. 

  굽어보는 전망대에서 폭포로 내려가 보면 그 폭포 옆의 석간수(石間水)가 나그네의 목을 시원하게 젹셔 준다. 폭포 상류로 올라 가면 용이 승천했다는 청옥색의 선녀탕(仙女湯)도 있다. 
아름다운 곳에 어찌 전설이 없겠는가. 이 재인폭포에도  다음과 같은 여인의 수절(守節) 이야기가 전설로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 어느 원님이 이 마을에 사는 재인(才人) 아내의 미색을 탐하여 이 폭포 절벽에서 재인으로 하여금 광대 줄을 타게 한 뒤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였다. 절개 굳은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짓으로 수청(守廳)을 드는 척하다가 원님의 코를 물어뜯고 자결하였는데, 그 뒤부터 이 마을 이름을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코문리'라 불리게 되었으나, 차츰 어휘가 변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이 중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코문리라 불리게 되었으나 차츰 어휘가 변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 는 전설 이 있다"는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이는 "고를 물었다 하여 고문리라 불리게 되었다."로 고쳐야 맞다.
우리나라 말은 임진왜란 이후에 경음화와 격음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평음(平音) 'ㄱ, ㄷ, ㅂ' 이 경음(硬音)인 'ㄲ, ㄸ, ㅃ"으로 바뀌는 경음화(硬音化) 현상이나, 격음(激音)인 "ㅋ, ㅌ, ㅍ"으로 바뀌는 격음화(激音化) 현상이 일어나 표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코'의 임란 이전의 옛말은 '고' 다. '팔(臂)'의 옛 발음이'발'이었듯이. (要, 고어사전 참고할 것) 필자가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하는 말이다.

5경: 12 개울
 다리가 없었던 옛날에 법수동서 덕둔리로 건너 가려면 열 두 번이나  신을 벗었다 신었다 하며 개울을 건넜다 하여 '열두 개울'이라 하였다는데 그 일원에는 선녀바위, 만장바위, 평바위, 봉바위, 쌍무소, 용수골소 등의 멋진 경치가이 10여리에 걸쳐 계곡 따라 음식점 상혼(商魂)과 함께 펼쳐져 있다.

 

6경:  임진강(臨津江)

 옛날 화산 폭발이 만들어 놓은 주상 절리(柱狀節理)의 수직 절벽으로 이루어진 임진강 계곡 사이에 북한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임진강', 하면 분단의 아픔을 논할 때마다 자주 거론되는 강이다.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흘러 흘러 한강에 합류하는 이 강 하류에 8,118㎢에 달하는 드넓은 비옥한  경기평야가 열려 있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국경으로서 격전지요, 임란 때나 6.25때도 격전지로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피로 물든 한많은 비극의 강이었다.  이 일대가 10m가 넘는 수직 절벽이어서  공세나 수세에서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이었다.

숭의전(崇義殿, 사적 223)

 오늘 우리들의 누리길 걷기는 '임진강 주상절리공원'부터 시작하였지만  그 아래로 조금 내려 가면 고려 종묘(宗廟)에 해당하는 숭의전(崇義殿)이 있다. 그 입구인 홍살문 바로 옆에 어수정이란 약수터가 있다.

 '어수정(御水井)'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궁예의 휘하 장수로 있을 때 개경(開城)에서 태봉국(泰封國)의 도읍지였던 철원(鐵原)을 오갈 때 이곳에 들러서 자주 마셨다는 약수다.

 

'숭의전(崇義殿)'절벽 위에 서 있는 서울의 조선조 종묘처럼 역대 고려 왕과 충신들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이지만, 왕 중에 고려를 빛낸 네 분의 왕(태조 왕건, 헌종, 문종, 원종)과 고려 충신 16 명(복지겸홍유신승겸유금필배현경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 김취려조충김방겸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신 사당으로 550년이나 되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추레하게 덧없이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다음은 숭모전에 얽힌 일화(逸話)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 왕씨들 중에 
뜻 있는 왕씨 몇 사람들이 모여 태조 왕건의 신위(神位)를 안전하게 보호하고자 돌로 배를 만들어 싣고 예성강 입구에서 바다로 띄워 보냈다.

바다로 나간 돌배는 임진강을 거슬러 황해도 안악까지 올라 갔다가 다시 강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동아리의 한 절벽에 이르자 이 배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추었는데 왕씨 후손들은 잃어버린 돌배를 애타게 찾으며 강을 따라 내려오다가 누에 머리 절벽(蠶頭峰) 아래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 돌배를 발견하였다. 이는 하늘의 뜻이라 여긴 왕씨 후손들은 그 절벽 위에 사당을 짓고 왕건 태조의 신위를 모신 후 숭의전(崇義殿)이라 이름하였다. 지금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가라 않은 돌배가 물속에 비쳐 보인다고 한다. 


8
경: 전곡리 선사유적지(先史遺跡地) 

 이번 여행에서 '전곡리선사유적지'(사적 268)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선사유적지 박물관 자료에서 우리 배달민족의  조상이 지금으로부터 20만년 전 아프리카대륙에서 다른 인류와 함께 유럽과 아시아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선사 이전에 인간은 집이 아닌 나무 위에서 살아서 꼬리가 있었다는 것(?), 유인원(類人猿)처럼 네 발로 걷다가 육식에서 농사를 지을 무렵부터  채식을 하면서 네발 아닌 두 발로 직립 보행(直立步行)을 하는 바람에 꼬리가 퇴화되었다는 것, 두 발로 하는 직립 보행으로 인하여 인간은 옛날에 없던 치질과 무릎 관절과 척주질병, 빈혈 같은 병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여성들은 직립보행으로 자궁이 압박을 받아 지구 상의 어떤 다른 동물보다 출산이 어려워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것.  인류가 직립보행으로 손의 자유가 생겨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처음 사용하는 도구가 집승의 뼈였다가 돌도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돌도끼가 아세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전곡 한탄강 강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었다.

▶미군이 우연히 발견한 '주먹도끼' 이야기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을 대표하는 주먹도끼의 발견은 한국 고고학(考古學)의 세계를 향한 쾌거였다.

구석기 시대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먹도끼가 유명한 것은 주먹도끼는 당시로는 맥가이버 칼처럼 만능 기구였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인들은 수렵생활로 육식을 하였는데 그 수렵 도구로는 짐승의 뼈나 주먹도끼로 짐승을 잡아 수렵생활을 하였으며 '긁개'나 '밀개'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이런 주먹도끼는 미국에서 고고학(考古學)을 전공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한국에 파견된 미 공군 상병 보웬(Greg L. Bowen)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분이 아니었더면 농토 개발로 영원히 묻혀 버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세계적 유산이었을  것이다.

 1978년  4월 보웬(Bowen)이 한국 연인 이상미 양과 함깨 한탄강 가를 거닐다가 발견한  돌석기 4점은 아세아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었다. 

보웬은 이를 자기의 스승에게 연락하였더니 스승은 자기의 지인인 김원용 서울대 교수에게 연락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다음해인 1979년부터 시작된 발굴이 17 차례 진행하는 동안 양면 핵석기, 외날찍개, 쌍날찍개, 쯔르개, 굵개, 새김돌, 망치, 석핵, 나무껍질, 화분, 목탄 등 8,500여점을 발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이를 국가사적 제268'로 지정하고 이를 모아 '전곡 선사박물'(2011년)을 짓고 보관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초청을 받아 2005년 27년만에 아내와 함께 한국을 찾은 보웰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선물 2가지를 한국에서 받았습니다. 하나는 전곡(全谷)에서 발견한 구석기 유적이며, 다른 하나는 나의 한국인 아내입니다."

 선사박물관에 가면 구석기인들의 기나긴 여정과 그 흔적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우리 선조들이 아프리카에서 머나먼 Koea의 전곡까지 이르게 된 흔적을 이해하게 되고, 그때 우리들의 조상은 어떻게 사셨을까 하는 그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당포성 동벽(唐浦城 東壁), 사적 제468호)

연천의 당포 성은 연천 지방의 호로고루, 대리성과 함께 고구려의 3 대 성(城)이다.

 임진강한탄강이 지류인 샛강을 만나 형성된 뾰족한 삼각형의 대지 위에 조성된 성이다. 당포성 동벽이라고 한 것은 동쪽을 제외한 곳은 임진강이 만든 절리 절벽이 높이 20m의 자연 성벽을 이루어서 동쪽 벽만 삼국시대에 쌓은 국경지역에 있었던 성이다.

그런데 적군울 막기 위해 쌓은 성이 왜 이리도 아름다운가.  전망대 옆의 나무 한 구루 나무는 이를 지키고 있는 듯한 한 편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것이 성벽 같지가 않다. 성벽의 훼손이나 붕괴를 막기 위해서 흙을 덮고 잔디를 식재하여 그런가.

오늘은 연천을  만나고 간다. 한탄강과 임진강을 만나 그 강이 유유히 흐르며 말하는 전설 만나고 간다. 연천에서 사시던 구석기시대의 우리들의 조상을 만나고, 고구려를 만나고 집을 향하는 복된 하루다.

 

                                                                                                   -2019. 08. 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