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춘천 기행(2)

ilman 2019. 9. 25. 12:19

*. 춘천(春川) 기행 

  "여보, 춘천에 놀러 가지 않을래?"
'치과에 다니느라고 그 좋아하는 술도 못 마시고 무료하게 지내는 판에 이 웬 떡이냐.'
그래서 주인을 잘못 만나서 만 4년이 넘어서도 1만 3천 km밖에 달리지 못한 나의 애마(愛馬)를 몰고 춘천을 향하여 나섰다.
새로  생긴 외각도로를 이용하여 춘천을 향하디 보니 교통체증이 그렇게 심하던 옛길이 아니다.

새로 생긴 경춘고속도로로는 서울에서 춘천까지 40분이면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춘천길의 멋은 무엇보다 소양강을 끼고 가는 환상적인 경춘가도다. 그중 가장 백미는 소양강 강가에 있는 강촌역 주변의 절경이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강촌역(江村驛)으로 해서 구곡폭포(九曲瀑布)를 향한다.

*. 구곡폭포
  서울에서 춘천을 기차로 오려면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1시간 간격의 경춘선열차(1:30분 소요)를 이용할 것이요, 버스로는 동서울 구의동에서 있지만, 승용차로는 경춘가도(국도46번)를 이용할 일이다.

  춘천 비경 8선 으로는 1경 삼악산(654m,) 2 경 구곡폭포, 3경 의암호, 4경 봉의산(301.5m), 5경 오봉산(779.1m) 청평사 , 6경 용화산(878.4m), 7경 남이섬, 8경 소양댐, 소양호다.

그중 삼악산, 구곡폭포, 의암호가 강촌역 부근에 있어 강촌역의 그 멋을 더해 주고 있다. 강촌 관광은 자전거 하이킹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자전거 대여소도 그렇지만 국내 최대 자전거 하이킹 파크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촌역 앞 구곡교에서 구곡폭포 주차장까지 1.8km는 물론, 춘청 방향(1.0km), 등선폭포의 등선교(2.3km)까지 강변을 끼고 달려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구곡폭포를 오려면 1 시간 간격의 기차 시간에 맞추어 강촌역에서 하차하여, 위에서 소개한 자전거로나 아니면 춘천에서 오는 시내버스 50번. 50-1번 버스를 이용할 것이다.
폭포 가는 도중 '문배마을 입구'라는 이정표가 나를 유혹하지만 그냥 지나친다. 춘천에 가서 찾아볼 곳이 많아서 여기서 시간을 더 허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배마을 가는 길에 '깔딱 고개'라 불리는 재를 넘어 40 분 정도를 오르면 산 정상처럼 보이는 2만여 평의 분지마을이라는 문배마을이 있어 거기서 산채비빔밥과 토속주를 즐길 수 도 있다 한다.
이 문배마을은 두메산골이어서 한국전쟁인 6. 25 때 인민군들도 모르고 지나쳤다는 오지다.
  매표소에서 구곡폭포까지는 0.9km로 15분의 완만한 등산길이었다.
구곡폭포는 이름 그대로 봉화산(487m)의 아홉 굽이를 굽이굽이 거대한 바위벽을 타고 시원하게 부채살 같이 흩어져 50m 높이에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 폭포로, 1981년 2월 13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폭포다.
폭포 위의 봉화산(486m)은 조선시대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곳으로 그 정상까지는 편도로 1시간 40분 거리다.
이 구곡폭포에 겨울이 오면 빙벽등반 훈련을 하고자 몰려 드는 산악인들에게 서울근교의 유명한 폭포가 되기도 하다.
구곡폭포를 오가는 도중에도 토종음식이 나를 유혹하지만 그냥 춘천을 향한다. 춘천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막국수와 닭갈비를 점심으로 먹기 위해서였다.

*. 의암호 이야기
    옛날의 춘천은 북쪽의 춘천호와 동북쪽의 소양호에서 흘러내린 물이 북한강을 이루면서 춘천 서쪽을 감싸고 흐르던 곳이다.
그러던 것을 춘천호와 소양강이 합류하는 신현강 협곡을 1967년 12월에 댐으로 막는 바람에 생긴 호수가 바로 의암댐이요 댐 아래부터가 북한강이 되었다.
의암호는 한자로 '衣岩湖'라 쓴다. 왜 하필 옷 '衣'(의)자를 썼을까?
그 이야기를 위해서는 삼악산에 있는 절 흥국사(興國寺)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이 고장 사람들은 삼악산의 흥국사 근처를 '대궐 터'라고 한다. 옛날 왕건에게 쫓긴 궁예가 삼악산에 은거하면서 부처의 원력으로 나라를 재건하려고 하여 세운 절이 속칭 큰절이라 부르는 흥국사(興國寺)이기 때문이다. 지금 부르고 있는 ‘작은 초원’, ‘큰 초원’은 당시 군마를 매어 두었던 곳이라 하여 ‘말골’이라 하는 곳이고, 등선폭포 근처의 아랫마을은 당시 궁예의 군사들이 옷을 말리던 곳이라 하여 ‘옷 바위’(衣岩)라 하였다. 의암호(衣岩湖)의 ‘의암’은 여기서 따온 이름 같다.

  의암호는 너비 5km, 길이 8km의 타원형 호수로 이 호수로 인하여 소양호와 춘천호와 함께 춘천은 호반(湖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의암댐은 다목적(多目的) Dam으로 낙차가 15.7m라서 4만 5천KW 용량의 수력발전을 한다지만 그보다 낚시군에게는 잉어 붕어 등으로 더 유명해진 호수다.
*. 장절공 신숭겸(申崇謙) 묘역

  장절공묘소를 가려면 의암교를 건너 춘천 쪽으로 향지 말고 좌측으로 삼악산(654m)을 끼고 의암호를 상류를 따라 가야 한다.
그 길로 가다 보면 등산하는 사람들이 강촌역 부근에서 출발하여 등선봉(632.3m)을 지나 등선폭포(登仙瀑布)를 둘러보고 삼악산(654m)을 넘어서 상원사로 하산하는 매표소 입구를 지나게 된다.
의암 호숫가를 달리다가 '붕어섬'을 지나면 호수 한 가운데에 3개의 섬이 보인다.
'하중도'와 '상중도'와 고슴도치 섬이라는 '위도'다.
그중 하중도와 상중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던 것을 1971년 춘성군 서면과 춘천시를 잇는 뱃길을 내기 위해서 중간에 운하를 파서 두 개의 섬이 된 것인데 지금은 둘 다 호수관광 코스의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섬들은 의암댐이 생긴 뒤로 해마다 땅 넓이가 줄어들어 고민이다. 물가의 흙이 물속으로 떨어져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主乙完乎白乎                   임을 완전하게 하신
心聞際天乙及昆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고
魂是去賜矣中                   넋은 갔지만
三烏賜敎職麻又欲             내려 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하구나.
望彌阿里刺                      바라다보면 알 것이다
及彼可二功臣良                그 때의 두 공신(功臣)이여!
久乃直隱                         이미 오래 되었으나
跡烏隱現乎賜丁                  그 자취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悼二將歌(도이장가)/고려 예종

  위 노래는 고려가요 '정과정(鄭瓜亭)'과 함께 향가계 가요로 유명한 고려 예종이 팔관회(八關會)에서서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다. 여기에 나오는 두 공신(將軍)은 견훤(甄萱)과 천하를 다둘 때에 고려 왕건(王建)을 대신해서 죽은 신숭겸(申崇兼)과 김락(金樂) 장군이다.
다음은 그 충렬사(忠烈祠) 사당에서 만난 한기덕 문화해설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글이다.
  
-신숭겸은 원래 이름이 능산(能山)이었지요.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나서 춘천에서 자랐습니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술이 뛰어나 왕건과 함께 궁예를 받들었는데, 궁예가 말년에 폭정을 일삼자 이에 분개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한 개국공신이었습니다.
  당시 견훤이 신라 경주에 쳐들어 가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정예 5,000명을 거느리고 대구 팔공산에 가서 싸우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불행하게도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신(申) 장군이 말했답니다.
"소장이 죽는다면 충신이라도 되겠지만, 폐하가 승하하시면 고려가 망합니다. 황송하오나 제가 대왕의 복장을 하고 견훤과 일전을 벌이겠습니다. 그동안 폐하는 몸을 피하소서."
태조를 수풀 속에 숨게 한 신(申) 장군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여 목이 잘린 시신으로 왕건에게 돌아왔습니다.
왕건은 이를 슬퍼하며 황금으로 그 머리를 만들어 고이 장사를 지내 주었지요. 왕은 신(申) 장군이 전사한 대구 팔공산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일찍이 풍수지리학의 대가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왕건을 위해서 명당 하나를 잡아 주면서 '광해주(지금의 춘천) 서쪽에 명당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천하명당을 왕건은 자기를 위해서 죽은 신숭겸에게 주고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습니다.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라는 분이 바로 장절공 신숭겸(壯節公 申崇謙)입니다.
가서 보신 바와 같이 무덤이 1기 3묘인 것은 후세에 도굴을 피하기 위해서 2개의 가묘(假墓)를 더 만들어 놓았던 것이지요.


*. 춘천의 명물 막국수와 닭갈비 이야기
 장절공 신숭겸 묘역을 둘러보고 나니 시장기가 감돈다.
그러다 보니 관광책자에서 보던 글이 생각난다.
'춘천에 와서 닭갈비와 막국수를 먹어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눈 감고 춘천을 다닌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다."'
하여 춘천 사람들에게 춘천에서 유명한 닭갈비집, 막국수집을 물어보니 닭갈비는 명동닭갈비골목, 온의동 닭갈비거리, 강원대 후문 먹자골,  소양강댐 아래라 한다.
시청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겨울연가' 촬영지로도 유명한 명동거리를 밟고 명동닭갈비 뒷골목에 가서 닭갈비를 먹고, 막국수는 공지천에서 먹었는데 닭갈비보다는 막국수가 맛이 더 좋았다.

  그 '막국수'란 무슨 뜻일까?
순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를 뽑아서 면을 금방 삶아낸다. 그 면을 김치나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거나, 야채와 양념으로 버무려서 식초, 겨자, 육수를 곁들여서 시원한 육수와 함께 먹는 자고로 춘천지방의 대표 음식이 막국수다.  그 이름이 막걸리의 '막'처럼, 막국수의 '막'이 풍기는 뉘앙스가 아주 서민적이다.
막국수를 파는 사람들에게 막국수가 무슨 뜻인가 물어 보았더니 막국수의 어원을 '막 비벼 먹는다.'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보다는 원료인 메밀을 껍질까지 막 갈아서 면을 낸 메밀국수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한 마디로 옛날 춘천 지방 사람들이 복잡한 조리 과정이나 별다른 양념 없이도 별미로 간단히 해 먹으면서 손님 대접을 하던 것을, 6.25 직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막국수를 시장에 들고 나와 만들어 장사하던 것이 대중화가 되었다는 말이 정석인 것 같다.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봉평이 춘천 부근인 것을 보아도 이 고장은 메밀이 많은 고장이었다.

  1960년 대 춘천은 군인 도시요 강원대 학생이 주로 사는 빈약한 일선지구였다.
군부대가 있는 고장은 저렴한 막국수 같은 푸짐한 먹거리나 선술집에 쌈직한 술안주가 주종을 이루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1960년 당시 춘천지방에는 양축업이 성하여 1960연 대에는 닭갈비를 100원씩 팔았다. 
따라서 닭갈비가 제일 저렴하여서 휴가 나온 군인들이나 대학생들에게 '서민갈비', '대학생 갈비'로 불리던 닭갈비가 가장 인기가 높았다. 그것이 막국수와 어울려 춘천지방의 대표음식이 된 것이다.
닭갈비는 토막 낸 닭을 도톰하게 펴서 갖은 양념에 재웠다가 커다란 검고 둥근 철판에 양배추에 곁들여서 떡볶이와 함께 버무려 먹는 것이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법이다. 당시 군인과 학생이었던 이들도 자라 어른이 되어 춘천을 찾아 막국수와 닭갈비를 찾는 바람에 막국수와 닭갈비는 춘천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 된 것이다.

*. 공지천 전설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은 생후 7 개월만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다. 이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처럼 퇴계의 어머니도 자모(慈母)요 현부(賢婦)였다.
그래서 퇴계는 춘천 박씨 어머님의 훈도(訓導)로 훌륭하게 자랄 수 있었다. 퇴계는 춘천박씨의 외손인지라 춘천을 자주 찾았다.
  그분이 춘천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지금의 공지천 가에서 퇴계가 짚을 썰어서 강에 내던졌더니 짚부스러기가 진어(眞漁)인 공지 곧 공미리라는 고기로 ('공지어'라고도 함) 변하였다. 그래서 그후 이곳을 공지천이라 하였다.
' 공미리'란 학꽁치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바닷고기라. 그와 모양이 비슷한 고기라 하여서 생긴 말이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옛날 이곳에서 도를 닦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살생의 계를 어기고 이 강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속이 뒤틀려 토하게 되었는데, 한 사람의 목에 산 채로 고기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면서 나와 도(道)를 통하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꼬리가 없는 죽은 고기를 토해 내는 바람에 도(道)를 통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이 강을 '꽁지천'이라 부르다가 그것이 '공지천'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공지천은 요즈음과는 달리 겨울에는 얼음이 두껍게 어는 빙질이 좋은 곳이라서 해마다 전국빙상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의암교를 막 지난 곳이 공지천이어서 오늘날의 공지천은 춘천의 중요한 관광지가 되었다.
6.25 때 참전국이었던 이디오피아 참전 기념관(參戰記念館)이나 거기서 마시는 이디오피아 커피, 보트장, 조각공원, 물 시계관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니 그냥 지나치지 말 일이다.

*. 춘천의 진산 봉의산(鳳儀山)
  춘천 시내 한 가운데인 소양동에 우뚝이 솟아 있는 산이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301.5m)이다.
멀리서 보면 그 모양이 양 날개를 떠억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봉황(鳳凰) 모양 같이 보인다 하여 봉의산(鳳儀山)이라 하였다.
산 밑에 죽림동(竹林洞)도 봉의산과 관계가 있는 동명이다.
봉황새는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한 상상적인 새로 다섯 가지의 소리를 내는 상서로운 새다. 오동나무나 대숲(竹林)에 깃들어 살면서 대나무 열매만 먹고 산다 하여 동내 이름을 죽림동(竹林洞)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봉의산을 달리 보면 산의 모습이 삼태기를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춘천시에 사는 사람은 돈을 벌어도 삼태기가 넘치면 쏟아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돈을 번 사람들은 춘천을 떠난다는 고약한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아마도 춘천에 경춘선이 생겨 교통이 편해지면서 살만하면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생긴 전설 같다.

*. 소양강처녀 
   승용차를 가지고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갈 수도 있고, 가다가 명승지를 만나면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차를 세워 둘러볼 있기 때문이다. 공지천 천변으로 막국수를 먹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것이 의암호수 가에 있는 '소양강 처녀상'이었다.
'알면 보이고 그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옛사람의 말도 있지만, 기대하지도 않다가 만나게 되는 것은 그 기쁨과 즐거움을 배가 시키는 법이다.
'소양강처녀' 노래비 앞에 서니 보단이 있다. 눌러보니 강가에 '소양강처녀'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
 열여덟 딸기 같은 어린 네 순정
 너마저 몰라주면 나는 나는 어쩌나
  아~~ 그리워서 애만 태우는 소양강 처녀 ♩♫ ♬~


 그 아래 호숫가에 소양강처녀의 동상이 멋있어 카메라의 눈을 열었더니 동상의 나이가 노랫말처럼 '열여덟 딸기 같은 소녀'가 아니라, 30대 후반의 얼굴이다. 아쉬워하면서 노랫말을 살펴보니 '외로운 갈대밭에 슬피 우는 두견새야'가 마음에 또 걸린다.
우리말로 접동새라고 하는 두견새는 동남아에서 5월에 왔다가 9월에 날아가는 철새다. 이 새는 산중턱 나뭇가지에서 주로 사는 54~74g의 새로 갈대밭에 사는 새가 아니다. 갈대밭에 사는 새는 두견이가 아니라 노고지리일 뿐이다.
두견이는 '슬피 우는 두견새야'라는 노랫말처럼 자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정서의 '정과정(鄭瓜亭)'이나 이조년의 시조 '다정가(多情歌)'에서처럼 한(恨)과 어울린 정서를 표현하는데 자주 등장하는 새다.
그 두견새의 한은 소양강처녀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노래는 반야월 선생 작사, 이호 선생 작곡으로 완성된 노래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소녀는 당시에 만 18실이었던 윤기순 양이다.
어려서부터 가수를 꿈꾸던 윤 양은 반야월 선생이 ‘가요 작가동 지회’ 부회장으로 있던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노래를 배우던 고향이 춘천인 처녀였다.
이를 고마워하던 6.25 때 다리 장애로 소양강 어부(漁夫)였던 그의 부모가 춘천 고향으로 가요 작가회 동지회 식구들을 초대하였을 때 지금의 의암호를 보며 반야월 선생은 시상을 메모하여 두었다가 이호 작곡으로 김태희가 불러 히트한 노래다.
그 후 '소양강처녀' 노래의 모델이었다는 후광을 얻어 윤기순 양은 야간업소 등지에서 가수로 일하다가 내가 갔을 무렵에는 그의 고향 춘천에서 민박집과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56세의 노처녀다. 가난한 가정에 맏딸로 태어나서 부모 대신 뒷바라지를 하느라 결혼도 뒤로 미루었던 모양이지만 '소양강 처녀' 노랫말 만년 소양강 처녀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의 고장을 널리 알게 하여 주는 것이 그 고장에서 탄생한 위인(偉人)이지만, 그보다 한 편의 노래는 그보다 몇 배나 더 고장을 빛내는 법이다.
'칠갑산' 노래가 그러하였고, 하춘하의 '월출산' 노래도 그렇지 않던가,
 푸짐한 닭갈비 앞에 앉으니 도도하게 흥이 일지만 차를 몰고 온 사람이라 흥을 달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이빨 치료로 병원을 다니는 신세이다 보니 언감 생심(焉敢生心) 어찌 술을 논하랴.

   한 번 더 시간을 내어 호반의 도시 춘천에 오고 싶다. 가서 호수 투어도 해 보고, 숨어 있는 춘천의 각 곳을 찾고도 싶지만, 그보다 춘천이 고향인 문우(文友)들을 불러 함께 어울려 요번 이 여행에서 못다 푼 한(恨)을 닭갈비 막국수와 함께 술 한 잔 걸치며 풀고 싶어서다. 어디서 자냐고? 찜질방이 나를 위해 곳곳에 열려 있다는데 무슨 걱정을 할꼬?  게다가 나는 백수(白鬚)라 시간 부자(富者), 아니 시간 갑부(甲富)가 아닌가.  

                                                             -2010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