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풍속

3. 1 절/ 나의 마음 속에 다시 쓰는 일본

ilman 2019. 3. 2. 08:16

3.1 일절/ 나의 마음속에 다시 쓰는 일본

 오늘은 국경일 3. 1절로 1919년 당시 200만여 우리 민족이 일제 강압에 맞서 민족의 자주 독립을 외치던 3.1운동 이후 꼭 `100주년이 되는 독립만세 기념일이다.
 하여 신문이나 방송도 3. 1절 특집으로 일색이다. 그런데도 한심하게 우리들의 아파트엔 태극기를 걸어 놓은 곳이 왜 이렇게도 없는가.
한 나라가 이웃 나라에게 36년 동안이나 주권을  빼앗기고 이를 기념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축하에 앞서 창피한 일이다. 일본은 왜구(倭寇)로 역사 이래 우리 조선을 약탈(掠奪)해 가더니, 임진왜란으로 전국토를 불바다로 만들고 얼마 지나서 아예 우리나라를 저들의 식민자(植民地)로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영국이 식민지로 인도(印度)가 필요한 것은 자국의 경제적인 번영을 위하여서였는데 반해서, 일본(日本)은 우리 나라 국토를 일본 땅으로, 우리 배달민족을 일본 신민(日本臣民)으로 영구히 만들려는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써왔던 점에서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과 그 류가 다르고  악랄하였다.
  만약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다면 우리의 현재는 어떨까 하는 생각은 우리를 몸서리 치게 한다.
 몇 년 전 3.1절 아침에 일어나 조간신문(조선일보)을 보니 일부 일본인들의 혐한(嫌韓) 증오(憎惡)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모양이다.
"한국인(韓國人)을 추방하자!", "반일(反日) 국가 한국과 단교하라." 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朝鮮人)을 죽이자", "바다에 던져야 한다"는 극단적인구호도 서슴없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의 해외여행 중에는 일본을 제외하였었다. 
그런 철천지 원수의 나라에 내가 찾아 왜 그 귀한 외화(外貨)를 한 푼이라도 떨어뜨리고 와야 하나 해서였다.
일본 강점기를 살아 본 나의 기억에는 일본이 우리에게 너무 섭섭하고 아픈 차별 대우를 한 것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일본 지식인 중에는 일본 국민의 영웅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우리의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우리보다 더 잘 모시고 있는 지식층을 허(許)하는 나라가 선진국 일본이요, 일본에서는 일본인이면서 "독도(獨島)는 한국 땅"이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독일 나치에게 피해(被害)를 본 서방국처럼 "과거를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일본과 일본인을 새롭게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제 또다시 새로운 눈으로 일본인들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십여젼 전에 일본에 가서 본 "나의 일본 이야기와 시(詩) 2편"을 오는 3. 1절을 맞아 다시 소개 한다.
*.마음 속에 다시 쓰는 일본: ' 07년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나의  '일본 속의 한국사 ' 는 당시 여행 시에 조선일보사에서 준 책의 일본문화연구소 조양옥 소장의 글 '오늘의 일본, 그 빛과 그림자' 에 대한 독후감으로 시작된다.
조양옥 소장은 일본어를 전공하고 조선, 국민일보 도쿄 특파원을 거치면서 평생을 두고 일본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남긴 분으로 우리들의 간산주마격(走馬看山格)인 일본 여행을 위해서 심도 깊은 글을 '나누어준 책'에 실어 준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의 생각을 두고 일본에 문외한인 내가 무슨 췌언(贅言)을 덧붙이랴.

*.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일본 정신
   화혼양재(和魂洋才)란  1868년 明治維新(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정신+서양기술=和魂洋才'가 일본의 슬로건이었다.
 이렇듯 서양문물을 일찍 받아들여 일본을 살지우던 그 황금같이 그 귀중한 시기에, 우리의 대원군은 우리나라를 서구문명으로부터 꼭꼭 닫아 놓은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조선과 통상하러 온 미 군함정과 일전(一戰)을 벌이며 망국(亡國)의 길로 허송세월 할 때,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 나날이 국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렇게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민족의 장래와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일본(Japan)과 쿠바(Cuba) 두 나라는 둘 다 비슷한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져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쿠바(Cuba)의 건너편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렇다 할 고대 문명이 없었던 반면, 일본의 건너편인 한반도와 중국에는 뛰어난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곶감을 빼어먹듯이 그 알자배기만 쏙쏙 뽑아 가면 되었다.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  서문 일본 경제기웍청 장관 사카이야 다이치

이런 시각의 생각이 주일미국대사를 지낸 미국의 에드윈 라이샤워의 글에도 나타난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서 자가(自家)의 약탕기에 넣고 달여 스승을 능가하는 문화 꽃을 피웠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서 배운 문물에다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루면서, 서구(西歐)로 눈길을 돌려 서구 문물이 거세게 밀려올 때 실기(失機)하지 않고, 미국과 유럽에 108명의 사단 등을 파견하며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배워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일본으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해군은 영국군인, 육군은 독일군인에게 교육을 맡기고, 신식 교육은 미국식을 채택하였다.
일본의 인구가 3,500만 명 시에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각국에서 전문가 1만 명을 불러들여다가 조선이 영원히 따라올 수 없는 일본의 국력을 키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길준(兪吉濬)이 그 서구를 다녀와서 서구의 문물을 소개한 서유견문(西遊見聞, 1895년)이 나온 때가 갑오경장(甲午更張) 무렵이었다.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을 배우되 거기에 창의를 더하여 새로운 일본 것을 만들어 내는 훌륭한 민족이기도 하였다.  그때 벌써 일본은 배움의 경지를 넘어서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껏 여름철이면 누구나가 찾는 쥘부채(摺扇)는 한반도를 통해 건너간 둥근부채를 발전시켜 접는 부채로 개발하여 합죽선(合竹扇)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메이지유신 10년이 지난 후 일본인들은 비누를 사용하고, 시계를 찼으며, '영국신사의 심벌'이라는 양산을 쓰기 시작했다. 그 양산을 꺾이고 접히는 간편 휴대품으로 환골탈태( 換骨奪胎)하여 수출품으로 둔갑하여 유럽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본의 화가이며 사상가인 와타나베 가잔(度邊華山)의 '상인(商人) 정신' 또한 일본 정신의 치밀함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글이다. 이 글은 구구 모든 분야에서 한국인도 배워서 지켜야 할 법도였다. 

 첫째, 종업원보다 일찍 일어날 것.
 둘째, 열 냥짜리 손님보다 백 푼짜리 손님을 더 소중히 대할 것.
 셋째, 사 간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러 온 손님은 사갈 때보다 더 정중히 대할 것.
 넷째, 사업이 번창할수록 절약할 것.
 다섯째, 한 푼이라도 지출이 있을 때에는 꼭 장부에 기입할 것.
 여섯째, 항상 창업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지닐 것.
 일곱째, 동일 업종의 가게가 근처에 문을 열어도 당당하게 선의의 경쟁을 할 것.
 여덟째 종업원이 독립하면 3년 동안 자금 지원을 해줄 것.

*. 일본의 교육
  -'모든 마을에 불학(不學)의 가정이 없고, 모든 가정에 불학(不學)의 인간이 없도록 한다.'고 일본 정부가 선언한 때가 1872년으로 한국에서는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쇄국정치 시절이었다. 
일본은 태평양 패전 후 반 세기만에 유카와 히테키(湯川秀樹)가 물리학상을 받은 이래 12개의 노벨상을 받았다.
21세기 일본 정부는 '향후 50년 동안 3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고 야무진 꿈을 밝히고 있다.
그런 일본의 저력은  현재 170여 개의 국공립대학, 500개에 육박하는 사립대학과 그와 비슷한 수의 2년제 단기 대학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거기 비해 한국은 김정일을 만났다고 해서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平和賞) 하나가 고작이었다. 일본을 시찰한 중국인들도 말하고 있었다.
 
  -중국과학원 연구팀이 발표한 '중국 현대화 보고 2005'에는 중국이 일본과 2001년을 기준으로 50년의 차이가 난다.

그걸 조 소장은 재일 작가 김소운(金素雲)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 하나를 언제까지나 버리지 못하는 그런 옹졸한 백성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알고도 너그러이 잊어버리는 것과, 흐지부지 소가지(心性) 없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치 뜻이 다르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조상 신라, 백제의 얼이, 일본에 속에 있다고  이번 우리들의 여행 같이  여러 곳을 다니며 흥분해 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의 컴풀렉스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자랑해온 새마을 운동, 향토예비군, 유신(維新) 등 우리 생활에서 일본의 영향은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
그래서 일본을 볼 때는 과거를 통하여 침략의 역사를 보되. 현재를 통하여서는  우리들이 도달하여야 할, 앞서간 선진국의 경지를 보고 배워야 한다는데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용서(容恕)할 수 없는 것을
용서(容恕)하는 것이 용서(容恕)라지만
강한 자는 용서(容恕)를 빌지 않고도 잘 사는 법이다.
그 옛날 구한 말 대원군 시절
이 나라가 한창 배워야 할 시의 허송세월 때문에
얼마나 큰 서러운 고개를 울며 살아온 민족이던가 .
역경과 가난의 고개도 넘으면 재산이러니
슬픈 과거는 잊지도,
탓하지도 말자.

과거(過去)는 지나간 현재러니
다가올 현재를 아름답게 열어
찬란한 오늘을 살고 있는 일본인들도 부러워 하게.
Japan이
용서(容恕)를 빌지 않더라도
용서(容恕)를 용서(容恕)하는 Korea가 되자.
부끄러운 어제 위에 우뚝 서서
영광스런 현재를  가꾸어 가면서-.
                 -귀국길 '후지마루' 선상에서


. 오사카를 떠나며 

 엘리베이터에 말없이 서면,
영락없는 우리들인데-,
입을 열면 깊게 나뉘는 
Korea와 Japan !
Korean은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로 돌아가
임진록(壬辰錄)을 읽게 하지만,
일본 속의 한국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더니
Japan 속에 깊이 숨쉬는 백제의 얼들이  
닫친 마음 열게 하는 이웃이더라.

오사카에서 
쿠르즈 '후지마루호'로 귀국할 때 
눈물을 어리게 하던
일인(日人)이 부라스벤드와 
소방정(消防艇)의 분수로 흔드는 손길의 '사욘 나라!'
거기엔 
임진왜란(壬辰倭亂)도 
정유재란(丁酉再亂)도 없는
친절한 이웃나라
일본(日本)이 살아 있더라.
 
이 글에 하나 더 붙여야겠다.
 "그런데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