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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松江) 정철(鄭澈) 이야기

ilman 2019. 1. 17. 08:31

송강(松江) 정철(鄭澈) 이야기

 

 .*. 송강의 행복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의 하나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송강의 일생은 역경도 많았지만 그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 첫째요, 훌륭한 스승과 문우들과 교유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그 둘째다.

정철은 중종 31년에 서울 장의동 영일 정씨 가문에서 돈녕부판관 정유침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두 누님은 당대 여인들의 가장 큰 선망의 대상인 왕비(王妃)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인종의 귀인(貴人)인 큰 누님과, 계림군 유[桂林君 瑠]의 부인인 작은 누님으로 인연하여 정철은 어려서부터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어,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명종)과 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철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10살 때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연하여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 되었을 무렵이었다.
매형 계림군(桂林君)이 을사사화에 연유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처가인 정철의 집안도 이와 연루되어 큰형은 곤장을 맞고 경흥(慶興)으로 귀양 가던 도중 그 장독(杖毒)으로 죽었고, 정철은 아버지 따라 5년간이나 관북 지방 곳곳으로 귀양 다니다가 16세 나이가 되어서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아버지는 그 후 벼슬길을 멀리하고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전남 창평(昌平)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창평으로의 이주(移住)는 송강에게는 새옹지마(塞翁之馬)요,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되는 일이었다.
거기서 오늘날 그를 국문학의 태두(泰斗)가 되게 한 스승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창평에서 임억령에게 시(詩)를, 김인후, 송순, 기대승에게 학문(學文)을 배우는 것도 그러 하였지만, 성산 앞을 흐르는 죽계천의 아름다운 고장에서 이이 ․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와 공부하거나 교유하게 된 것이 또한 그러하였다.
송강(松江)이란 그의 아호도 담양군 봉산면 그 성산 앞을 흐르는 죽계천의 다른 이름인 송강(松江)에서 따온 호(號)였다

거기서 17세 나던 해에 문화 유씨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김윤제가 환벽당(環碧堂)에서 낮잠을 자다가 그 아래 조대(釣臺) 앞 물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급히 조대로 내려 가 보니 한 소년이 미역을 감고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외손녀를 그 소년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소년이 바로 정철이었다.

환벽당(環碧堂)은 나주목사를 지낸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가 세운 정자로 '푸름(碧)으로 사방을 둘렀다(環).' 하여 지은 이름이다.
그 조대(釣臺) 앞에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명으로 한 시비가 서 있다.
그 강이 죽림천[송강]이요, 그 하류를 막은 곳이 지금은 광주시민의 식수원이 된 광주호(光州湖)다.

 

*. 식영정(息影亭, 전남기념물 제1호) 이야기

환벽당에서 다리를 건너면 가사문학관이 있고, 거기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광주호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식영정(息影亭)이 있다.

남극 노인성(老人星)이 식영정에 비최여
창해상전(滄海桑田)이 슬카장 뒤눕도록
가디록 새 비츨 내여 그믈뉘를 모른다 
             - 정철

  영정은 조선 명종 때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어준 정자인데 직역으로 하면 '그림자도 쉰다.'는 뜻이지만, '숲에서는 그림자가 없다.'는 뜻이라니, 그 숲이 자연이라면 그림자는 번뇌의 속세일 것일 것이니, 그 이름만 보고도 선인들의 자연을 보는 마음이 부럽기 그지없다.

식영정(息影亭)을 오르다 보니 그 아래 부용당(芙容堂)과 함께 서하당(捿霞堂) 정자가 있어 시대를 넘어 김성원이 노닐던 그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 식영정을 지은 서하당 김성원은 정철보다 11살 위지만 환벽당에서 동문수학하던 사이였다.
이 고장에는 '식영정 4선(息影亭四仙)'이란 말이 있다.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보 고경명이 그 사선이다. 이 네 사람이 한 사람이 20수씩 80수의 '식영정 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는데 이것이 송강의 성산별곡의 바탕이 되었다. 그 글이 다음에 가보려는 가사문학관(歌辭文學觀)에 전시 되어 있었다.
옛날 식영정 앞길은 오솔길이어서 소를 몰고 피리 부는 소년들이 지나 다니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지방도로가 되어 옛 운치를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가사문학관 연못 앞에는 금빛 소를 탄 피리 부는 소년의 동상이 있다.

담양에 내려와서 당대에 가장 고명하신 스승들과 그 밑에 유명한 문우(文友)들과 어울려서 정철은 10년이 되는 26세에 진사시(進士試)에 1등, 이듬해 별시(別試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어렸을 때 함께 놀던 명종 가까이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정철의 출세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다.
45세가 되던 해에 외직인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 되었다. 당시 외직에 나가는 관리에게는 그 품계를 조상까지 소급해 주기 때문에, 송강은 기꺼이 부임길에 올라서 그 유명한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과 강원도 백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쓴 연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남기게 되었다.

 

* 송강 정철의 시조(時調)
 조선 3대 시조작가로 송강 정철(107수), 노계 박인로(68수), 윤선도(75수)를 든다. 그중 송강이 제일 많은 시조를 썼다. 그의 시조는 훈민가(訓民歌)처럼 교훈적인 것, 음풍농월도 있지만 장진주사(將進酒辭)와 같은 술 노래가 그 중 많다.

남산(南山)뫼 어디쯤 고학사(高學士) 추당(草堂) 지어
꽃 두고 달 두고 바위 두고 물 두나니
술조차 둔 양하여 날을 오라 하거니

술을 마시면 주사(酒邪)도 심하여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어느 술좌석에서는 동인의 얼굴에 술을 끼얹는가 하면 만년에 강화(江華)에서 술로 인하여 객사(客死)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함께 벼슬길에 나섰던 동갑의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게 절주의 충고를 듣기도 하고 나라님으로부터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고 논척 받을 지경이었다.

그 주색(酒色) 중 색(色)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정철의 시 중에 그의 로맨스를 다룬 시로 강계 기녀 진옥(眞玉)과의 화답 시조를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

 

옥(玉)이 옥(玉)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하다
                                        내게 살 송곳 있으니 뚫어 볼가 하노라                                         
-정철(鄭澈)   * 인공으로 만든 옥

철(鐵)이 철(鐵)이커날 *섭철(鐵)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더니 녹여 볼까 하노라
              - 진옥(眞玉)

*섭찰: 순수하지 못한 쇠 *정철: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쇠(정철)

*. 가사문학(歌辭文學)에 대하여

 가사(歌辭)란 한 마디로 시조의 중장을 길게 쓴 3, 4, 3 4조의 1행 4음보를 기본 율격으로 하는 운문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종장 형식 3, 5, 4 ,3을 지키는 정격가사(正格歌辭)이다가 임란 후에는 종장(終章) 첫구 등을 안 지키는 변격가사(變格歌辭) 형식이 된다.  가사의 효시를 고려 말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서왕가(西往歌)로도 보지만 성종 때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이 쓴 상춘곡(賞春曲)을 최초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초기의 가사는 강호생활이나 명승지의 유람, 유배 또는 유교적인 이념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는데 송순, 정철 등은 면앙정가, 성산별곡, 관동병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으로 사대부가사의 절정을 구가한 작가들이다.
 조선 중기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한 것이 시조(時調)요, 가사(歌辭)였다. 이서의 낙지가(樂志歌), 송순의 면앙정가(면仰亭歌),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으로 가사문학이 만발한 곳이 담양(潭陽)이요 그래서 담양은 가사문학의 산실이요 고향이었다.
이에 뜻있는 보성인들이 '가사문학관'을 짓기로 하고 1995년부터 시작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기까지 5,017평에 총사업비 83억을 들여 6년간의 공사 끝에 가사문학관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곳에는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및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가사(歌辭)는 조선 성종 조 정극인의 상춘곡으로부터 시작된 국문학 장르지만, 고려 말 우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시조(時調)다.
가사(歌辭)는 개화기(開化期歌辭)를 끝으로 없어졌지만, 시조(時調)는 700년 동안 연연히 이어서 현대시조로 이어져온 한국의 고유의 정형시다.  그 시조도 문학관이 없는데 가사문학관을 이 담양에 세웠다는 것은 경하할 일에 앞서 시조시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 송강정(松江亭) 이야기

 승용차 없이 유적지 관람을 하는 일에는 애로가 많았다. 택시는 불러야 오기 때문에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고심하고 있는데, 내 마음을 헤아려 도와주겠다는 고마운 담양 분이 있다. 
송강정(松江亭)은 가사문학관에서도 승용차로 이삼십 분 거리에 있었다.
송강정은 동방의 이소(東方離騷)라는 송강 가사 중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의 산실이다.
정철이 동인의 탄핵으로 대사헌에서 물러나 50세에 하향하여 4년 동안 머물며 이 송강정을 맴돌며 노닐던 정자다. 그래서 정자 옆에 선 '송강 정철 선생 비'의 비명에 '사미인곡'이 음각되어 있다.
여기서 전후미인곡의 '미인'은 나라님이요, 여기서 임을 그리는 정은 우국충정을 상징하는 연군지정(戀君之情)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돌길 층계를 따라 오르니 '竹林亭'(죽림정)이란 현판이 보인다. 당시 이곳에는 노송과 대나무가 무성하여 죽림정이라 부르던 것을 후손들이 1770년 증축하면서 조상의 아호를 따서 '松江亭(송강정)'이라 명명한 것이다.
일동3승(一洞三勝)이란 말이 있다. 한 동내에 세 가지 경승지가 있으니 환벽당, 식영정, 송강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 면앙정(면앙정, 전남기념물 제6호) 이야기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망정마을 뒷산에 있는 정자다. 중종 28년에 면앙정 송순이 41세에 지었다는 정자이지만 임란 때 파괴된 것을 후손들이 효종 때 중건한 건물이다.
기대승이 쓴 '면앙정기'에 이런 말이 있다 한다.

 송순이 32세 되던 해에 이곳에 정자를 지으려고 면앙정 터를 샀더니 이 터를 판 곽씨라는 이가 축하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한다.

"제가 꿈을 꾸었더니, 금과 옥으로 만든 어대를 두른 선비들이 모여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이근배 저 '시가 있는 국토기행' 참고

 

그래서였을까. 이 정자에 출입하던 인물로는 당대에 유명한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이황, 양산보 등이었다.

 *. 회방제(回榜際)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타는 호기를 아는 재상이었다.
그는 성수침, 이황 등과 교우하면서 정철, 임제, 고경명, 기대승, 김인후 같은 제자를 문하에 둔 행복한 스승이기도 했다.
면앙정 선생의 과거급제 60년을 기리는 회방연(回榜宴)에서 정철, 김인후, 기대승, 임제, 고경명 등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스승 송순을 가마 남여(藍輿)에 태우고 스승을 축하해 드릴 때, 송순은 얼마나 행복하였을까? 이를 이근배 시조시인은 이렇게 감탄해 한다.

 

  "아아, 이 나라 어느 시인이 이렇듯 위대한 시인들의 머리 위에 앉을 수 있으랴. 구름같이 모여든 강호의 선비들이 눈부시게 바라볼 뿐이었다. 선조 15년 90수를 다하고 송순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생애를 마친다. 정철은 제문에서 '조정에 나아가 60년 큰 길을 걸으시면서 크게 너머지지 않은 이는 상공(相公)을 볼 뿐입니다.'고 그의 인품과 덕망을 흠모하였다."

 

별러오던 우리들의 시조시인의 대선배들의 유적 탐사를 마치려니 시흥이 도도한데, 이를 면앙정 송순이 대신하였으니 이를 시조로 의역하여 보면서 나의 남도의 탐사를 마치련다.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하늘과 땅인데
그 가운 데 면앙정에서 호연지기와 더불어
풍월에
명아주 짚고
산천에 읍하는 나의 한 평생

                            -ilman 시조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