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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 선생 묘 문학기행

ilman 2018. 2. 20. 04:30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 선생 묘 문학기행
*문학(文學)의 힘
시조(時調)는 한국 고유시의 정형시다.
국민들이 애송하는 그 대표적인 시조(時調)는 무엇일까?
그중에 하나가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와 함께,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의 권농가(勸農歌)일 것이다.
남구만 선생은 호가 약천(藥泉)으로 의령 남씨(宜寧南氏)다. 23세에 사마 시(司馬試)를 거쳐서 관찰사, 어사, 형조,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까지 출세 가도를 달리며 인조 때 나서 숙종 무렵을 살다 가신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러나 약천 선생이 가신 지 300년 후를 사는 우리들의 기억에는 그분의 성공적인 삶보다 ‘동창이 밝았느냐~’란 단 한 수의 시조로 인하여 남구만 선생을 기억할 뿐이다.
유명한 분의 작품이어서 유명해 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조 한 수 때문에 후세에 길이 기억하게 된 분이시다. 
그래서 ‘생전부귀(生前富貴)요, 사후문장(死後文章)’이란 말이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생긴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문장의 힘인 것이다.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東方明否 鸕鴣已明(동방명부 로고이명)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飯牛兒胡爲眠在房(반우호위면재방)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山外有田壟畝闊今猶不起何時耕(산외유전롱무활 
                                                             금유불기하시 경)

*.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묘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속칭 거북이 마을)에서 공(公)께서 태어날 때였다.
거북이마을 뒷산 보개산 상봉인 감투봉에 원인 모를 불이 났다. 그 불길이 나무꾼이 다니는 오솔길 따라 남일성(南一星) 현감댁 뒤꼍에 이르자 스스로 꺼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가 자라서 세종 때의 명재상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영의정에 오른 약천 남구만선생이었다.

  용인(龍仁)에 있다는 약천 남구만(南九萬) 묘 가는 길에 나는 슈퍼에 들러서 막걸리와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였다.
어르신을 처음 뵈오려 가는 길에 어찌 빈손으로 갈까 해서였다.
내비게이션에 그 묘 주소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산 1-5’ 를 찍고 그 안내 따라 ‘남구만 선생 묘 600m’ 란 이정표에 이르니 그 아래서 반가운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시조문학동인회 회원인 송귀영 용인 공원 부사장이었다.
고맙게도 정몽주 선생묘를 안내는 물론 점식 식사까지 대접 받고 그분의 직장인 용인공원묘를 들러 박목월(朴木月) 묘소를 참배하게 해준 고마운 분이다.
 차가 교행이 어려운 좁은 길을 지나니 약천 남구만 선생 신도비와 동창이 밝았느냐 시가 비(詩歌碑)가 나타난다. 고색창연하지 않은 것을 보니 최근에 세운 비 같다.
용인에 남구만의 산소가 있는 이유를 거기 서있는 오석의 비명이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 산소는 여기서 300보 위쪽에 계신다.
이 자리는 당시의 고승이신 일우(一愚) 스님이 남구만 생전 시에 동에는 청련사(靑蓮寺), 서에는 용연(龍淵)이 있는 명당이라고 천거한 곳이다.
이곳에 공보다 먼저 간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모셨다.
1711년 공의 나이 82세에 하세(下世)하자 처음에는 양주(楊洲)에 모셨다가 10년 후 이곳에 이장하였다.
이장할 때 나라에서 세워준 석물은 그곳에 그대로 둔 채 이곳에는 장남의 간략한 친필 묘갈(墓碣)만을 세워 놓았다. 청렴 검소하신 뜻을 따른 것이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후손들이 1991년 이 묘가 용인 향토유적 53호로 지정된 데에 맞추어 성금을 모아 지금의 신도비와 유허비를 올린다. 
                                                                                    -‘1991(신묘)년 칠대손 정열(廷烈) 근기’ 참고

*. ‘동창이 밝았느냐’ 이야기
 
묘 아래 신도비를 세웠는데 그 좌측에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가 비가 서있다.
그런데 ‘동창이 밝았느냐’ 의 시조 배경은 어딜까? 이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가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사화(史禍)와 연관 되는 이야기다.  
 
 
 
  인현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장씨가 왕자 균(均)을 낳았다. 숙종은 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균(均)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그 어미 장 숙원을 희빈(禧嬪)으로 삼아 버렸다. 주지하는 대로 이를 결사반대하던 송시열(宋時烈)은 제주도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아 죽고 남인(南人) 세상이 되었다. 서인(西人) 정객들은 줄줄이 벼슬에서 파직되는가 하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서인의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도 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빗겨 갈 수 없어 강릉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연유되어 강릉으로 가던 약천은 도중 심일(沈逸) 마을에 이르러 자연 경관과 그곳에 자기의 호(號)와 같은 이름의 약천샘에 그만 매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심일서당(沈逸書堂) 을 짓고 후진을 교육시키며 1년 반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는 이렇게 생겨났다. 그해가 1689년 봄이었다.
그 마을에는 재 너머와 사래긴 밭이 ‘발락재와 장밭(長田) 표지석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지금은 담배 밭으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중부대 신웅순 교수 글에서

동해안을 차로 달리다 보면 동해 망상 휴게소 한 모통이에 남구만의 시조비가 서 있으니 보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공의 출생지며 치사(致仕)하고 말년을 머물면서 초당을 짓고 낚시와 집필로 평생을 보내던 홍성군 구항면 거북이 마을이 ‘동창이 밝았느냐’ 이 시조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충청일보 기사에 의하면 홍성군은 남구만 생가를 중심으로 도비(道費)와 군비(郡費) 10억을 들여 남산~보개산~구항면 거북이마을에 이르는 5.8km 구간에 '재 너머 숲길'(보개산 솔바람길)이란 이름의 둘레길을 조성해 놓은 모양이다.


진위야 어떻든 간에 지방자치 단체들이 우리 고장과 인연 있는 위인을 서로 모시려는 뜻은 갸륵하다 할 것이다.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묘도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처럼 드넓은 묘역에다 잔디로 가꾼 비스듬히 오르는 구릉 위에 커다란 봉분에 모셔져 있다. 부인 동래정씨와 합장한 묘였다.
그 왼쪽에 그보다는 작은 묘가 있어 보니 26세에 요절한 약천 선생의 장남 부부의 묘로 열녀비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며느리가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모신 열녀(烈女)였던 모양이다. 
 
*.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 이야기
  용인(龍仁)을 왜 ‘용인(龍仁)’이라 하였을까?
용인은 고대에는 ‘거서현’이라 하던 것을 고려 때 ‘용구현’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태종 13년 무렵 이 지역은 '용구현'과 '처인현'이었는데 이를 합칠 때 ‘龍(용)’과 ‘仁(인)’ 자를 각각 따서 ‘용인현(龍仁縣)'이라 한데서 '용인(龍仁)'이란 이름은 유래된다
  얼마 전 그 용인시 기흥구에다 경기문화재단이 ‘백남준 미술관’을 지으려고 공사를 하다 보니 이 일대가 3~4 세기 백제인들의 공동묘지 터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발굴된 묘만도 25기나 되었다. 이를 보니 용인은 삼국시대부터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던 모양이다.
현재 용인시에는 공동묘지가 26곳(77만9591㎡)이나 된다. 이는 용인시 면적(592.05㎢)의 7.6%인데 여기에 내가 용인을 다녀 오가며 본 용인공원묘, 용인 백암공원, 용인천주교묘, 용인수목장 등등을 합하면 용인은 묘(墓)의 시(市)요, 묘(墓)의 나라다.
이렇게 공동묘지가 많은 것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서 가장 길하다는 400m 내외의 나지막한 산과 산간계곡의 작은 하천이 발달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고장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 그런가 이 고장은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문헌을 찾아보면 이에 관한 흥미 있는 이야기 몇 가지가 전하여 오고 있다.

-전설1: 용인의 중남부에 위치한 이동면 묘봉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어 온다.
이 마을에 마음 착한 젊은이가 산등성이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산꼭대기로부터 굴러 내려온 수천 근의 바위에 깔려 그만 즉사하고 말았다.
이 청년이 저승의 염라대왕에게 갔더니 아직 천수(天壽)가 남았다고 이승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혼령은 이승으로 되돌아 왔으나 시신이 바위에 깔려 있어서 접신(接身)할 수 없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충북 진천의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부잣집 외아들의 몸으로 혼령이 들어 가 접신하게 되었다.
그 후 용인 묘봉리와 진천의 두 아내와 함께 살며 각각 세 아들씩을 두고 천수(天壽)를 누리다가 죽게 되었다.
그러자 용인과 진천의 두 집 아들 사이에 서로 제사를 자기들이 지내겠다는 혼백 다툼으로 송사(訟事)를 하게 되었다.
원님은 “그가 살아서는 진천에 있었으니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려 결국 용인의 아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전설2: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곤히 잠들었다가 애절한 통곡 소리에 잠을 깼더니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이 우는 소리였다.
하두 이상해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물어 보아도 목 놓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일어나 자세히 보니 죽어 누워 있는 자기 몸이 있지 않은가.
얼마 후 저승사자들을 따라 명부전(冥府殿) 앞에 엎드렸더니 어디서 온 누구냐고 염라대왕이 묻는다.
“예, 소인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입니다.”
염라대왕은 대경실색하였다. 용인의 추천석을 불러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이름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던 것이다. 환생한 진천의 추천석은 걸음아 살려라 하고 단숨에 이승의 자기 집으로 내려왔더니 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벌써 자기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상청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접신(接身)을 할 수 없는 추천석은 육신을 가지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영혼만 떠도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염라대왕에게 불려 갔을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혼이 떠난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은 다행히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어 나 몰라라 하고 그 몸에 접신을 하였다.
용인 땅 추천석의 가족들은 몸을 뒤틀며 일어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기뻐 날뛰었다.
마음 착한 진천의 추천석은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 환생한 것을 실토하였으나 모두들 죽음에서 깨어나서 하는 헛소리로만 여겼다.
진천 고향집으로 단걸음에 달려온 추천석은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반갑게 반갑게 눈물로 말하였으나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하다가 결국은 관가로 끌려오고 말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진천 원님은 그의 한 맺힌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저승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을 인정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이 그의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생거진천(生居鎭川)하였으니 사거용인(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그래서 진천 땅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그 사내는 생전에는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천수(天壽)를 누리고 살다가,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의 제사 봉양을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

-전설3: 용인에 사는 형과 충북 진천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둘 다 어찌나 효성스러웠던지 서로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다투다가 결국 송사를 걸게 되었다. 그러자 진천 원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받았다.
"부모를 모시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살아생전 모시는 것과 돌아가신 후 제사로 모시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 살아서는 지금처럼 진천의 아우가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시거든 묘를 용인에 두고 형이 제사로 모시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래서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늘 나는 포은(圃隱)과 약천(藥泉) 그리고 박목월(朴木月) 묘를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간다. 
가면서 가만히 그분들을 생각하며 나를 돌이켜 보니 초라하기 그지없다. 전공분야가 달라 과거와 같은 고시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남보다 좋은 학벌을 가지고도 출세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에 오르면 만나는 사람들이 다른 법인데 말이다.
그때 만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삶 속에 그들이 이룩한 많은 귀한 체험으로 자기를 세운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폭이나 학문적인 깊이를 더 깊고 더 넓게 하는 것인데, 나는 70평생이 지나도록 나 같은 서민(庶民)이나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살았을 뿐이다.
출세 못한 나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이 내게는 더 편하여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출세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만남이 있었다. 그것은 시조(時調)와 수필(隨筆)과의 만남이요 자연(自然)과의 만남이다.
 여행 작가(旅行作家)는 가공의 진실(架空眞實)을 쓰는 소설가가 아니다.
월척을 꿈꾸는 낚시꾼 같이 남이 모르는 곳에 숨어 잠자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며 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한 때 발견의 기쁨이나 행복을 어느 누가 나만큼 알겠는가.  망팔(望八)의 나이에 단독으로 지리산 등의 종주와 해외 단독 배낭 여행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어찌 경험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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