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河廻) 마을(하)
*. 하회(河廻) 마을 어원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고 한 것은 낙동강 지류인 화천강(花川江)이 'S' 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도시 사람들이 하회마을을 '물돌이동(-洞)'이라고도 하였다.
동쪽에 화회 마을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 327m)이나 서쪽의 부용대(莩蓉臺)에서 하회마을을 굽어 보면 마을 모습이 태극기 모양과도 같고,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모습과도 같고, 한 척의 돛 단 배가 떠 가는 형국(形局)이다.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서 말하는 '산태극 수태극(山太極 水太極)' 모양으로 태극형(太極形)으로 행주형(行舟形)이요, 연화 부수형(蓮花浮水形)인데 이는 하회 마을이 연화(蓮花) 같다 해서 생긴 말이다
그래서인가. 이곳은 6.25의 참화가 미치지 않은 길지(吉地)였다.
오늘 나는 창녕 성씨 종친회(昌寧姓氏宗親會) 모임을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을 들려 온 몸이라서 우리들에게 하회마을 관광은 2시간 30분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옛날에 가본 마을 구경 대신에 나룻배를 타고 마을 서쪽의 기암절벽의 부용대(莩蓉臺)에 올라 하회 마을을 굽어 보기로 했다.
우리는 하회 16경 중에 하나인 '도두황주(渡頭橫舟)'라는 옥영정 앞 강나루에 매어둔 배를 타고 운치 있게 화천을 건너간다. 뱃 삯은 왕복 요금에 3,000원을 받고 있었다. 강물은 깊이 5m 내외의 백사장 위를 흐르는 물이라서 몸을 담그고 맨발로 걸어 건너고 싶은 맑은 강물이었다.
갑자기 옛날 내가 애송하던 두보의 시 '강촌(江村)'이 생각난다.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맑은 강 한 구비가 마을을 안고 흐르나니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긴 여름날 강촌에 일마다 유심하도다.
自去自來梁上燕(자거자래양상연) 절로 가며 절로 오는 것은 집 위엣 제요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서로 친하여 서로 가까운 것은 물 가운데 갈매기로다.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늙은 아내는 종이에 장기판을 만들거늘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젊은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고기 낚을 낚싯바늘을 만드는구나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많은 병에 얻고자 하는 바는 오직 약물뿐이니
微軀此身更何求(미구차신갱하구) 조그만 몸이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그러다 보니 나도 시흥(詩興)이 감돌아 49세에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쓴 7언율시의 한시 '강촌'을 두보의 마음이 되어 하회마을을 읊조려 보게 한다.
하회 마을 굽이도는 맑은 화천강(花川江)에
백로(白露) 지나 배 띄우니 제비도 절로 강남 갔구나.
바다가 멀어 갈매기도 날지 않는
고희(古稀)와 불혹(不惑) 지난 처자(妻子)와 함께인데
시절 탓인가,
내 복(福)인가
부모덕(德)인가.
부용대(芙蓉臺) 행 나룻배의 늙은 나는
약물(藥物) 없이도 건강(健康)은 아직도 안녕하구나.
-하회마을 화천강에서
강을 넘어 백사장을 걸어 추월암(秋月岩)과 옥연암(玉淵) 제자(題字)를 절벽에서 찾으며 오르기 잠깐인데 '옥연 정사(玉淵精舍, 민속자료 88호)'가 문을 활짝 열고 우릴 반긴다.
이곳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임란에 대해 기록한 '징비록(懲秘錄, 국보 제132호)'을 쓴 장소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이곳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 고택 체험객과 함께 이곳 주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화산 서원(花川書院)을 지난다.
이 길엔 특히 '地山樓(지산루)'란 문루(門樓)가 유난히 멋지다. 여기에 오르면 드넓은 백사장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화천이 한눈에 들어온다는데 앞서가는 일행으로 이를 뒤로 미룬다. 뒤로 미루어서 사진을 남긴다는 것은 돌아올 때는 거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화산서원(花川書院)은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諡號 文敬公 1539-1601년) 선생의 학덕(學德)을 흠모한 유림(儒林)들이 정조10년(1786년) 때 윤안(金允安) 선생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선생을 종향(從享)했는데, 두 분 모두는 사승(師承) 관계에 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춘추로 향사해오다 고종 5년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
그 후,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이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여러 건물을 복원 1996년 서원을 완성하고 복설고유(復設告由)를 올렸다.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興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그곳을 지나니 마당이 나오고 유성룡의 한시 등의 석물이 있다.
북쪽산 아래 흙을 파서 서쪽 바위 모퉁이에 소나무 심었네. 흙은 삼태기에 차지 않고 나무 크기 한 자가 되지 않네. 흔들어 돌 틈에 옮겼으니 뿌리도 마디마다 상했으리라. 땅은 높아 시원하여도 가꾸기엔 물이 적을 듯한데 비 이슬 젖기엔 더디면서 서리 바람맞기엔 빠르겠구나. 늙은이 일 좋아 억지 부려 보는 이 속으로 어리석다 웃을 테지. 어찌하여 늙은이 나이 들어 자라기 힘든 솔을 심었을까 비롯 그늘 보지 못해도 뉘라서 흙 옮겨 심은 뜻은 알겠지. 천년 지나 하늘 높이 솟으면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조선 조사 37년 1604년 2월 29일 14대손 端夏 근역
그 옆에 있는 이정표를 보니 부용대까지는 250m 산길이 시작이다.
*. 부용대(莩蓉臺)에서
드디어 부용대(莩蓉臺)다.
연꽃 '부(芙)', 연꽃 '용(蓉)' 연꽃의 또 다른 이름이 부용(莩蓉)이로구나 하는 것을 하회마을 부용대 와서야 분명히 알았다.
이렇듯 건성 지나치면 모르게 되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아내와 아들이 무엄하게도 그 안내판에 걸터앉았다가 일어서는데 그 모습이 하두 좋아 다시 앉아 보게 하였다. 하회마을도 아름답지만 모자간의 다정한 모습은 그에 못지않구나 생각해서다.
보라, 하회마을을. 아름다운 한 송이 연꽃 같지 않은가. 다음은 하회 마을이 풍산 류 씨의 집성촌이 된 유래다.
-풍산 류 씨(豊算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다. 그 7세 류종혜 공이 하회터가 너무 좋아 진산인 화산에 올라서 살피다가 지금 같이 하회에 풍산 류 씨가 세거(世居)하게 될 터를 잡았다. 그 이전에 이곳에는 허 씨(許氏)와 안 씨(安氏)가 먼저 세거하고 있었다.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것이 그 증거의 일부다. 이후 풍산 류 씨들이 입촌하여 살다가 입암 류중영(1515~1573)이 중종 무렵 과거 급제하여 관찰사에 이른 이후 그의 두 아들 겸암 류운룡과 특히 서애 류성룡이 영의정까지 올라 찬란한 풍산 류 씨의 시대를 열자 차즘 허 씨와 안 씨가 떠나서 오늘날 같은 풍산 류시의 집성촌이 된 것이다
.위 하회마을 안내도를 보며 굽어 보는 몇 개나마 말해 보자.
우리가 있는 곳은 지도의 우상단 강건너 절벽지대다.
거기서 강건너 마주 보이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만송정(萬松亭,천연기념물 제473호)이다.
위에서 말한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바위 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이곳을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그 좌측 이 마을 중심부에 '삼신당 신목(수령 600년 보호수 느티나무)'이 있다.
'삼신'이란 아이를 점지해 주고 해산을 맡은 신목(神木)으로 이곳이 하회 탈출의 중요한 무대가 되는 곳으로 여기 있는 한옥들이나 초가집들은 남향을 하지 않고 강을 향하여 문을 내고 있는 특이한 구조물이다.
간 고등어에 안동 소주 한 잔 기울일 시간을 남기느라 시간에 쫓겨 서둘다 보니 아차! '겸암정사(謙菴精舍, 중요 민속자료 제89호)'를 잊었구나. 다시 또 오기 힘든 나이인데.
겸암정사(謙菴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는 하회 마을을 가장 잘 굽어 볼 수 있는 곳이라는데. 거기 쓰여 있는 현판 글씨가 스승 퇴계 이황(李滉)으로 받은 글씨라는데. 다시 또 올 수 없는 곳을 지나친 아쉬움은 깊어 가기만 한다.
강을 건너 운치 있게 간고등어 집을 향하고 있는데 먹거리 장터 부근에 있는 '하회 세계 탈박물관'이 옷깃을 잡는다.
간고등어와 안동소주 대신에 탈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자 스커트나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는데 어찌 내가 여기서 장황한 이야기를 하랴. 하여 일화 한 토막인 처용 이야기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마누라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아아, 이를 빼앗겼으니 어찌할까?"
하는 노래를 부르며 처용(處容)은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한 놈은 병을 옮겨주는 역신(疫神)이었다.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움에 감격하여 다시는 처용이 나타나는 곳에는 가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병든 자 있을 때 처용이 나타나면 병을 옮겨 주은 역신이 도망가는 바람에 당시 사람들은 병이 낫곤 했다. 처용이 죽자 처용의 탈을 쓴 '처용무(處容舞)'가 생겨나고 그래서 병이 든 것을 우리들은 '탈 났다고' 한다. '탈을 써야 할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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