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 선생 묘/‘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219’
작약 꽃 필 무렵 내가 오랫동안 활동한 (사) 시조문학진흥회 따라 문학기행으로 용인에 있다는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선생묘소를 참배하러 간다. 5월의 무성한 신록 속에 뜸뿍이가 우는 청명한 아침이었다.
가던 김에 그 부근에 ‘동창이 밝았느냐~’의 시조작가 약천 남구만(南九萬)의 묘소와 용인공원 묘지 내에 박목월(朴木月)의 묘소를 찾는 것이 우리들 오늘의 일정이다.
*. 포은 정몽주 묘(圃隱鄭夢周)
중고등학교 시절에 우리들은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를 배웠다.
이 삼은(三隱) 세 분은 같은 시대를 살던 분들로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스승이 목은 이색(李穡)이요, 길재(吉再)의 스승이 야은(冶隱)과 포은(圃隱)으로 격동기 시대를 살다간 고려 말 충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그분들이 남긴 다음과 같은 시조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서 이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이색: 회고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정몽주: 단심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길재: 회고가)
그런데 우리들의 의문은 개경(開城)의 선죽교에서 돌아가신 분의 무덤이 왜 개성에 있지 않고 용인(龍仁)에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누구나 살아서는 좋은 환경을 갖춘 집 자리에서 살기를 원하였듯이 죽어서도 땅의 기운(地氣)을 받아 후손에게 좋은 일이 생기게 한다는 명당(明堂)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 그래서 생긴 학문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인데 그 풍수지리설이 역사상 가장 왕성한 시절이 바로 조선 건국 무렵이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생거진천 사후용인(生居鎭 死後龍仁)'이라고 구전해 오던 말을 믿고 이곳에 묘소를 정한 것 같다.
정몽주는 물론 역사적 인물인 채제공, 조광조 등의 묘도 그렇지만, 현대의 김수환 전 추기경, 김대중 전대통령의 부모 묘나 많은 재벌들을 용인에 모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선죽교(善竹橋)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몽주의 시신은 당시에는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406년 (태종 6년) 3월에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개경(開城) 풍덕(豊德)에 초장(初葬)되었다.
그것을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遷墓)하러 가던 중 앞에 세운 영정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이 모현면 능원리였다. 여기에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여 모시게 된 것이다.
이 마을 이름은 그 이전에는 '쇄포면'이라 하던 것을 포은 선생을 이장한 이후 충현(忠賢)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묘현촌면(慕賢村面)이라 개칭하게 된 것이다.
*. 포은 정몽주 이야기
네비게이션이 있어 주소만 정확히 입력하면 전국 어디고 명승지를 찾아 다닐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우리들은 살고 있다.
포은 정몽주 묘소 주소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219'’ 으로 국도(國道)를 따라 용인시를 향하여 가다가 보면 ‘정몽주대로’가 나온다. 그 대로 ‘포은교’ 옆에 자연석으로 된 포은 선생의 그 유명한 ‘단심가 비’가 개울가에 나타나면 그 근처가 바로 모현면 능허리다.
모현면의 ‘慕賢’(모현)이 현인을 그리워 한다는 뜻이니 그 ‘현(賢)’ 자가 포은 선생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묘역에 들어서니 향수산 기슭 중턱에 저 멀리 두 묘가 신라의 왕릉처럼 보이는데 왼쪽 것이 포은 선생묘요, 오른 쪽 것이 세종시대의 명재상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하여진 연안 이씨 이석영의 묘 같다.
작약 꽃 필 무렵 내가 오랫동안 활동한 (사) 시조문학진흥회 따라 문학기행으로 용인에 있다는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선생묘소를 참배하러 간다. 5월의 무성한 신록 속에 뜸뿍이가 우는 청명한 아침이었다.
가던 김에 그 부근에 ‘동창이 밝았느냐~’의 시조작가 약천 남구만(南九萬)의 묘소와 용인공원 묘지 내에 박목월(朴木月)의 묘소를 찾는 것이 우리들 오늘의 일정이다.
*. 포은 정몽주 묘(圃隱鄭夢周)
중고등학교 시절에 우리들은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목은 이색(李穡),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를 배웠다.
이 삼은(三隱) 세 분은 같은 시대를 살던 분들로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스승이 목은 이색(李穡)이요, 길재(吉再)의 스승이 야은(冶隱)과 포은(圃隱)으로 격동기 시대를 살다간 고려 말 충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그분들이 남긴 다음과 같은 시조가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서 이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이색: 회고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정몽주: 단심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길재: 회고가)
그런데 우리들의 의문은 개경(開城)의 선죽교에서 돌아가신 분의 무덤이 왜 개성에 있지 않고 용인(龍仁)에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누구나 살아서는 좋은 환경을 갖춘 집 자리에서 살기를 원하였듯이 죽어서도 땅의 기운(地氣)을 받아 후손에게 좋은 일이 생기게 한다는 명당(明堂)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 그래서 생긴 학문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인데 그 풍수지리설이 역사상 가장 왕성한 시절이 바로 조선 건국 무렵이었다.
그래서 옛날부터 '생거진천 사후용인(生居鎭 死後龍仁)'이라고 구전해 오던 말을 믿고 이곳에 묘소를 정한 것 같다.
정몽주는 물론 역사적 인물인 채제공, 조광조 등의 묘도 그렇지만, 현대의 김수환 전 추기경, 김대중 전대통령의 부모 묘나 많은 재벌들을 용인에 모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선죽교(善竹橋)에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후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몽주의 시신은 당시에는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406년 (태종 6년) 3월에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개경(開城) 풍덕(豊德)에 초장(初葬)되었다.
그것을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묘(遷墓)하러 가던 중 앞에 세운 영정이 바람에 날려 떨어진 곳이 모현면 능원리였다. 여기에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여 모시게 된 것이다.
이 마을 이름은 그 이전에는 '쇄포면'이라 하던 것을 포은 선생을 이장한 이후 충현(忠賢)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묘현촌면(慕賢村面)이라 개칭하게 된 것이다.
*. 포은 정몽주 이야기
네비게이션이 있어 주소만 정확히 입력하면 전국 어디고 명승지를 찾아 다닐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우리들은 살고 있다.
포은 정몽주 묘소 주소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219'’ 으로 국도(國道)를 따라 용인시를 향하여 가다가 보면 ‘정몽주대로’가 나온다. 그 대로 ‘포은교’ 옆에 자연석으로 된 포은 선생의 그 유명한 ‘단심가 비’가 개울가에 나타나면 그 근처가 바로 모현면 능허리다.
모현면의 ‘慕賢’(모현)이 현인을 그리워 한다는 뜻이니 그 ‘현(賢)’ 자가 포은 선생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묘역에 들어서니 향수산 기슭 중턱에 저 멀리 두 묘가 신라의 왕릉처럼 보이는데 왼쪽 것이 포은 선생묘요, 오른 쪽 것이 세종시대의 명재상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하여진 연안 이씨 이석영의 묘 같다.
우리를 제일 처음 맞는 것이 1696년에 세웠다는 포은 선생의 신도비와 함께 한 세 비였다.
신도비(神道碑)란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에 세우던 비석으로 묘 주인의 살아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비다.
홍살문을 지난다. 붉은 색깔의 둥근 기둥 2개에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 중간에 태극 문양이 있는 나무문으로 궁전, 능 묘 정문 앞에 세워 놓아 참배객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는 문이다.
여행에서 찾아간 곳에 도착하여 그 명승지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다닌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곳의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카메라에 기록한다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이다.
신도비(神道碑)란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이 있는 근처의 길가에 세우던 비석으로 묘 주인의 살아 생전의 업적을 기록한 비다.
홍살문을 지난다. 붉은 색깔의 둥근 기둥 2개에 지붕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 중간에 태극 문양이 있는 나무문으로 궁전, 능 묘 정문 앞에 세워 놓아 참배객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하는 문이다.
여행에서 찾아간 곳에 도착하여 그 명승지의 이모저모를 살피며 다닌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곳의 하나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카메라에 기록한다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이다.
정몽주(鄭夢周)는 여말(麗末) 문신으로 본(本)은 영일(迎日)로 경상도 영천 우항리가 출생지다. 그래서 경북 영천시에는 정몽주 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이 있고 지금은 그곳도 성역화되어 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 난초꽃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태몽에 놀라 깨어나 낳았다 하여 초명(初名)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아홉 살 때였다. 어머니가 동산의 배나무에로 올라가는 흑룡(黑龍)의 꿈에 놀라 깨어보니 아들 몽란이 배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
그 후 그의 아버지 정운관(鄭云瓘)이 책을 보다 잠들었는데 “나는 중국의 주공(朱公)인데 천제(天帝)의 명으로 너희 집에서 태어나기로 하였다” 하는 꿈을 꾼 후 어른 되는 예식인 관례(冠禮) 때에 몽주(夢周)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자고로 성인의 이름자를 쓰는 것이 아니어서 한자 ‘朱(주)’ 자를 ‘周(주) 자’로 고쳐 썼던 것 같다.
스승 이색이 정몽주를 '성리학의 창시자로 극찬한 것'과 중국의 주희(朱熹)와 연관된 설화와는 신통하게 일치 된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 난초꽃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태몽에 놀라 깨어나 낳았다 하여 초명(初名)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아홉 살 때였다. 어머니가 동산의 배나무에로 올라가는 흑룡(黑龍)의 꿈에 놀라 깨어보니 아들 몽란이 배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
그 후 그의 아버지 정운관(鄭云瓘)이 책을 보다 잠들었는데 “나는 중국의 주공(朱公)인데 천제(天帝)의 명으로 너희 집에서 태어나기로 하였다” 하는 꿈을 꾼 후 어른 되는 예식인 관례(冠禮) 때에 몽주(夢周)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자고로 성인의 이름자를 쓰는 것이 아니어서 한자 ‘朱(주)’ 자를 ‘周(주) 자’로 고쳐 썼던 것 같다.
스승 이색이 정몽주를 '성리학의 창시자로 극찬한 것'과 중국의 주희(朱熹)와 연관된 설화와는 신통하게 일치 된다.
옆으로 경모당(敬慕堂)과 모현당(慕賢堂)을 지나니 공터가 나타나고 '묘역안내도'와 함께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와 백로가(白鷺歌)가 검은 오석의 비에 음각되어 서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의 어머니 이씨가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주의하라고 아들 포은에게일러준 시조였다.
까마귀는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뜻하는 말이요, 백로는 포은 정몽주를 상징하는 것은 알려진 대로다. 다음은 정몽주가 피살될 무렵에 얽힌 설화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상에 있어 포은은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하여가’ 시조를 통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나라를 건국하려는 뜻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해서 떠보았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의 어머니 이씨가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주의하라고 아들 포은에게일러준 시조였다.
까마귀는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를 뜻하는 말이요, 백로는 포은 정몽주를 상징하는 것은 알려진 대로다. 다음은 정몽주가 피살될 무렵에 얽힌 설화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상에 있어 포은은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하여가’ 시조를 통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나라를 건국하려는 뜻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회유하기 위해서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포은은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 ‘단심가’로 변함없는 충정을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러나 한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포은(圃隱)의 충성심도 커다란 역사적인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정몽주 선생은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나누어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고 가게 하였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귀한 몸을 맑은 정신으로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귀가 길에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죽음을 당하였을 때 그의 나이 겨우 56세였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를 역적으로 몰아 효수하고, 정몽주 일파를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공이 피살된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새 나라를 열었다.
그러나 정몽주 자손은 멸족하지 아니하였다. 13년 후 이방원(태종)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교를 숭상하는 새나라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학자들의 견해다.
-그가 죽은 석교(石橋)인 선죽교의 처음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다. 포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다리 주위에 옛날에 없던 대나무가 돋아났다 해서 선죽교(善竹橋)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선죽교에는 포은 선생의 영원이 지워지지 않는 혈흔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단심가(丹心歌)에 얽힌 포은 선생의 충절의 시다.
이 시조는 국민의 시조가 되어 시조 형식의 틀을 만들어 준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포은은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 ‘단심가’로 변함없는 충정을 답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러나 한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포은(圃隱)의 충성심도 커다란 역사적인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정몽주 선생은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나누어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고 가게 하였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귀한 몸을 맑은 정신으로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귀가 길에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죽음을 당하였을 때 그의 나이 겨우 56세였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를 역적으로 몰아 효수하고, 정몽주 일파를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공이 피살된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새 나라를 열었다.
그러나 정몽주 자손은 멸족하지 아니하였다. 13년 후 이방원(태종)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교를 숭상하는 새나라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학자들의 견해다.
-그가 죽은 석교(石橋)인 선죽교의 처음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다. 포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다리 주위에 옛날에 없던 대나무가 돋아났다 해서 선죽교(善竹橋)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선죽교에는 포은 선생의 영원이 지워지지 않는 혈흔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단심가(丹心歌)에 얽힌 포은 선생의 충절의 시다.
이 시조는 국민의 시조가 되어 시조 형식의 틀을 만들어 준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포은 선생의 묘 앞에 서니 생전부귀(生前富貴)요, 사후문장(死後文章)이란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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