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부산 해운대(海雲臺)에 도착하여서 늦었지만 어둑어둑한 땅거미 무렵 '동백섬'을 찾았다.
동백섬은 해운대 해수욕장 오른편 끝 조선 비치호텔 뒤편에 있는 섬이다.
옛날에는 섬이었던 곳에 세월이 흐르면서 쌓인 모래로 유계도(有界島)가 된 섬이다.
동백섬은 예로부터 경관이 빼어나 유명한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이 즐겨 찾던 곳으로 특히 신라 때 고운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발자취가 남이 있는 곳이다.
동백섬은 해안선을 끼고 돌며 바다를 굽어보며 도는 산책로가 일품이라지만 나는 그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보고 싶어 우선 정상에 오르니 최치원 선생의 동상과 비가 천리길을 달려온 나를 반긴다.
고운 선생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 가서 7년만인 18세에 빈공과(賓貢科) 과거 시험에 합격한 재원이다. 25세 때인 황소(黃巢)의 난 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중원(中原)에 문명을 떨친 분이다.
28세에 신라에 돌아왔으나 당시는 신라말이라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구할 길 없어 방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갓과 신발만 남긴 채 신선처럼 사라진 분으로 해동유학(海東儒學)의 시조(始祖)로 추앙되는 분이다.
그 가운데 부분이 우아한 현수교(懸垂橋) 구간인데 그 양쪽으로 이어져 있는 구간이 트러스교(truss bridge, 결구교)다.
지금 같은 밤에는 현수교 케이블과 트러스교 구간에 발광 다이오드와 투광 등을 설치하여 시간대별, 계절별로 다양한 빛을 연출하여 부산의 광안대교 야경을 부산의 명물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 광안대교는 진도 6의 지진과 초속 45m~72m의 초대형 태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하여 시공한 다리다.
해운대에서 일박한 우리들은 조반 후 거기서 얼마 안 가 있는 부산 기장읍(機張邑)의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를 찾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절[寺刹]'- 하면 산사(山寺)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 절은 파도치는 동해안 해안가 갯바위에 세운 절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2번째의 대도시인 부산 외각에 있는 절이라서 그런지 범어사(梵魚寺)처럼 그 절의 규모나 꾸밈이 예사롭지 않다. 이 절은 산사(山寺)처럼 올라가는 절이 아니고 바다로 향하여 108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우리가 용궁(龍宮)을 향하는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한다.
일주문 두 기둥도 절 이름처럼 용이 승천하는 문양(紋樣)이었다. 거기서부터 좌우에 12지(十二支) 동물 석물상이 자기의 띠를 찾아 사진을 찍지 않겠느냐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입구에서 조금 내려온 층계 우측의 달마대사(達磨大師)는 득남 불(得男佛)이라 써 있어서 그런가. 불뚝한 배는 선남선녀가 하두 많이 만져서 손때에 까맣게 반질반질하다.
바로 그 아래 좌측에 동해의 갓바위라고 하는 약사불(藥師佛)이 조그만 약탕(藥湯)을 들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 '日出'(일출)이라 써 있는 곳을 지나니 바닷가 갯바위로 통하는데 깃발이 나붓기는 곳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앉아 있고, 고기를 방생(放生)하며 지내는 '祭龍壇'(제용단)이란 입석이 용궁사(龍宮寺)의 이름을 생각하게 한다.
대웅전을 향해 올라가는 입구에 커다란 두 마리 황금 돼지상도 여기를 찾아오는 선남선녀에게 재복(財福)을 받으라 빌며 웃고 있다.
이 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약 10m 높이의 해수관음대불(海水觀音大佛)로 석재(石材)로는 한국 최대의 석상이라 한다.
이 불상으로 '양양 낙산사(洛山寺'), 남해 '금산사의 보리암(菩提庵)'과 더불어 용궁사(龍宮寺)를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로 손꼽히게 하였다.
대웅전 옆에 멋진 탑이 있다.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불사리 7과를 봉안하였다는 탑이다.
해동 용왕사는 고려 우왕 때(1376년)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懶翁, 일명 惠勤)이 창건하였다는 절이다.
그러던 이 절이 임진왜란 때와 6.25사변 때 병화로 소실된 되어 버렸다.
그후 정암(晸菴) 스님이 백일기도를 드리다가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 . 그후 절 이름을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로 바꾼 후 기도를 드리니 신기하게도 즉시 영험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빌면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는 절로도 해동용궁사는 유명해졌다.
그래서인가 입구 달마대사는 득남을 도와 주고, 약사불은 병(病)을 고쳐주고, 황금돼지는 재복(財福)을 주며 대웅전 밑의 지하 생수는 건강을 마시게 하는 절로 구체적인 복을 기원하는 절로 알려지게 되었다.
*. 구룡포 과메기
우리는 오늘 바다를 끼고 해안도로를 따라 백암 온천(白岩溫泉)까지 간다.
호미곶 가는 길에 가다가 제일 먼저 만난 곳이 문무왕 수중릉(文武王水中陵, 사적 158호)이었다.
해안에서 200m 되는 수중 가운데에 길이 3.6m, 너비2.9m, 두께 0.9m의 화강암이 놓여 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나는 동해의 호국룡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하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모신 것이다.
이를 카메라로 당겨 보니 그 바위 중간에 비석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생전에는 삼국을 통일하였고, 죽은 후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대왕의 능은 오늘날도 나라의 미래보다 자기 편 정권 창출을 위해서 이전투구(泥田鬪狗)하고 있는 우리들의 정치인을 뒤돌아 보게 한다.
다음 휴게실에 들렸더니 거기가 바로 과메기로 유명하다는 구룡포(九龍浦)였다.
광장 전체가 탠트촌이요, 멋진 과메기 시식센터요, 과메기 판매소였다. 구룡포는 포항시 남구에 있는 읍으로 다음은 그 지명 유래담이다.
신라 진흥왕 때 장기 현감이 각 고을을 순찰하던 중이었다. 용주리(龍珠里, 현 구룡포 6리)를 지나가는데 바다에서 용 열마리가 승천하는 것이었다. 아홉 마리의 용은 승천하였는데 그 중 한 마리는 떨어져 죽었다. 그후로부터 구룡포(九龍浦)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구룡포하면 과메기요, 과메기 하면 포항 구룡포를 생각하게 하지만-. 옛날에는 이곳 앞바다에서 청어(靑魚)가 많이 잡혔다. 그 청어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다가 청어가 귀하여 지자, 꽁치로 대신하여 과메기를 만들어 먹었다.
'과메기'란 이름은 청어의 눈[目]을 지푸라기에 꿰어[貫] 말려서 만들었다 해서 '관목어(貫目魚)'이라 하였는데 포항사람들은 '목(目)"을 '메기'라 사투리로 발음하여 '관메기 하던 것이 'ㄴ'이 탈락되어 '과메기'로 변했다 한다.
이 과메기를 만드는 과정은 갓잡은 청어나 꽁치를 영하 10도의 냉동 상태로 보관해 둔다. 12월이 되면 해풍에 꾸득꾸득 말리는데 밤에는 냉동, 낮에는 해동을 거듭하다가 40%정도의 수분 함류량이 될 때 과메기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과메기를 먹을 때는 배추, 생미역이나 실파, 마늘 등을 곁들여 먹는다.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서인데 이를 더 확실히 하려면 김에 싸서 먹으면 더욱 좋다
구룡포 주차장에서는 그 값이 1만원, 1만5천원 한다. 나는 살 마음이 없는데 어찌 공짜로 시식하겠는가 하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 보니 먹으라고 부르는 이가 있다. 내 성격을 알고 미역에 싼 과멕이를 젓가락에 들고 나를 찾았다는 아내다. 아아, 고마운 아내여!.
*. 호미곶 이야기
일설에 의하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기 위해서 영일만을 일곱번이나 답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동쪽이 호미곶인 것을 확인하였다 한다. 16세기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南師古)도 이곳이 천하명당으로 지형상 호랑이[虎] 꼬리[尾]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육당 최남선도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일출 제일 명소로 조선 12경의 하나로 꼽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왜놈들은 호랑이가 아니라 토끼 모양이라고 우리 국토를 비하(卑下)하였다.
그 무렵 초등교육을 받은 나도 '토끼곶'인 줄 알고 있어서 호미곶 오기까지는 호미란 김매는 농기구로만 생각하고 의아해 하다가 알고서야 얼굴을 붉혔다. 다음은 영일만이 꼬리 모양이 되게 된 흥미로운 전설이다.
그 소원을 빈 날이 9일이라 하여 구룡포라 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제일 처음 마주치는 것이 국내 유일의 국립 등대 박물관(國立燈臺博物館)이었다.
박물관에는 항로표지용품 및 해양관련 자료 320종/3,000점 중 진귀한 자료 500점이 전시되고 있어 그것을 거의 모두 디카에 담아왔다.
그중에 가장 귀한 사진으로는 몇년 전 세계 최초의 등대가 있다 해서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를 찾아가서도 구할 수 없었던 '파로스 등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온 것이다.
호미곶등대(지방기념물 39호)는 조선 고종 7년(1903)에 건립된 등대로 높이 26.4m 인데 옛날이라 철근 하나 없이 연와(煉瓦) 벽돌을 그대로 쌓아 올린 당시 일인(日人)의 기술이 엿보인다.
둘레는 밑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의 등대다.
겉모양은 8각형의 근대식 건축양식이지만 내부는 6층이다. 각 층 천장에는 조선왕실의 상징 무늬인 배꽃모양(梨花紋樣)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다. 다음은 이 둥대 건축에 얽힌 비화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였다. 일본의 수산실업전문학교 실습선이 교사와 생도 30여명을 태우고 한국 연안의 여러가지 조사 등을 목적으로 동해안을 항행하다가 장기곶 앞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혀 30여명 전원이 익사하고 말았다.
이를 해운 시설의 미비로 인하여 발생한 사건이라고 힘으로 밀어붙이며 이 조난 사고의 책임을 한국정부에 뒤집어 씌워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생트집을 부렸다. 조선정부는 부득이 우리의 돈으로 일본에 청부(請負)하여 1902년에 12월에 이 등대(燈臺)를 준공하게 된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동상이 어디 있는가 찾았더니 그것은 여기가 아니라 포항공항 해병대 부대 안 일월지(日月池)에 있다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설화로, 바닷다에 나갔다가 갯바위가 움직이는 바람에 그걸타고 일본 땅에 도착하여 왕과 왕비가 되었다는 전설로 해와 달과 관계 있는 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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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영덕을 지나 백암온천으로 간다. 거기서 일박하며 목욕재계하고 후포 바닷가에 가서 일출을 보러 갔더니, 눈 오고 태풍 부는 날씨로 속절없이 해맞이를 포기하고 안동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에리자베스 여왕이 들렸다는 봉정사(鳳停寺)와 하회마을을 보고 귀가한다.
여행은 이렇게 생략의 예술이다. 아쉬움을 가지고 다음에 또 오지 하는 기약없는 약속으로 또 다른 곳을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인가 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새해 맞이는 어제(12월 31일) 아침 조반을 먹으며 용궁사 근처에서 본 일출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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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말일 저자 주: 미안합니다. 이 글은 원래 Photo 에세이인데 사이트가 없어져서 옮겨 다니다 보니 사진이 이렇게 없어졌네요. 아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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