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공원과 몽천 토성(夢村土城)
서울에서 올림픽공원을 가려면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올림픽역 3번 출구, 몽촌토성(夢村土城)은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로 나오는 것이 정식 코스이지만, 우리들은 잠실역(蠶室驛)에서 만나 한국에서 제일 높다는 롯데타워(123층)를 휘돌아 잠실 올림픽공원 정문을 통하여 간다. 올림픽공원과 몽촌토성을 아울러 보고자 함이다.
잠실 올림픽공원은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대회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6년에 조성된 약 145만 ㎡의 부지에 세워진 당시 체육관 시설들로 우리들은 이를 바라보며 그 중심부에 있는 백제 유적인 몽촌토성을 향하고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은 한성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지금의 송파구 올림픽로 자리에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길이 2,383m, 높이 6~40m를 진흙으로 성벽을 쌓아 만든 것이다. 그 북벽에는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그 앞에 성내천을 이용해 해자(垓子)를 만들어 외부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성 밖의 동부 쪽 구릉에는 270m의 목책 보루(木柵堡壘)가 있다.
여기가 바로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 대왕의 첫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역사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곳이다. '몽촌(夢村)'이란 우리의 옛말인 '곰말'로 '꿈의 마을'이란 뜻이다.
백제는 마한(馬韓) 54 개국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이 커진 나라이다.
그런데 '백제'란 국호(國號)에는 어떤 유래가 있을까? 백제(百濟)란 많은 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의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왔다는 설과, 또 다른 설로는 백성들이 즐거이 온조대왕을 따라왔다는 '백성 낙종(百姓樂從)'에서 왔다고도 하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십제(十濟)'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온조(溫祚)가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열(十) 사람의 신하의 도움(濟)을 받아 나라를 세워서 나라 이름을 처음에는 '십제(十濟)'라 하다가, 그 후 비류(沸流)의 신하까지 합쳐서 백(百) 명 신하의 도움을 받아 세운 나라라 해서 '백제(百濟)'라 했다는 것이 더 실감 나는 이야기이다.
올림픽공원에서 처음 만난 구조물인 '세계평화의 문'은 그냥 지나치지 말 일이다. 김중업 건축가가 설계한 이 문은 한민족의 우수성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처마에 그려진 사진도(四神圖) 등은 고구려 장군총(將軍塚) 벽화에서와 같이 국토수호의 의지를 담고 있다기에 하는 말이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니 '서울의 만남'이란 조형물이 있다.
중앙의 본체는 동서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요, 둥근 5개는 세계 오대주를 뜻하는 오륜(五輪)이다. 좌우 바닥을 자세히 보면 수북이 쌓인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88 올림픽에 참가한 세계 각국의 선수단 및 주요 방송인들이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돌들을 한데 모아 우리 민족이 성황당(城隍堂)에 돌을 쌓듯이 동서화합을 위해 싸은 돌들이다.
국기의 광장을 지난다.
광장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한 나라의 160여 개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88 올림픽 이후 소련의 붕괴로 옛날에는 없었던 많은 분리 독립국가가 새로 생겨 났고, 독일이 통일로 동독이 없어져 한 나라가 되는 등 여기에 휘날리는 160여 개의 국기 중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당시의 참가 국기를 이렇게 게양하여 놓고 이를 본다는 것은 이 국기 광장을 역사적 가치를 있게 한 광장이 되게 한다.
우리들의 올림픽공원 관광 코스로는
'세계평화의 문- 성화- 평화의 광장- 서울의 만남 조형물- 국기의 광장- 곰말다리(夢村橋)- 성내천을 이용한 해자(孩字)- 나 홀로 나무- 530년 은행나무- 몽천 역사관- 대화 야외 조각-한성백제박물관' 등이었지만
올림픽공원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관광코스는 우리와는 달라서 이를 소개한다.
*. 올림픽공원 9경
1경, 세계평화의 문 → 3경, 몽촌해자 음악분수 → 4경, 대화(조각) → 5경, 몽촌토성 산책로 → 6경, 나 홀로 나무 → 7경, 88 호수 → 8경, 들꽃마루 → 9경, 장미광장 → 2경, 엄지손가락(조각)
백제의 서울 안 한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은 그 이름이 한성(漢城)으로 바뀐다. 그 한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구별되는데 북성(北城)이 지금의 '풍납 토성(風納土城)'이요, 남성(南城)은 지금의 '몽촌토성(夢村土城)'이다.
풍납토성(風納土城)은 1925년 대홍수 때 강바닥이 뒤집히며 나온 백제의 유물인 중국제 청동 자루 솥이나 거울, 귀걸이, 구슬 등이 발견되고, 지금까지 수 만점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잠들어 있던 백제 왕도(王都)가 깨어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공원 내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에 있다. (참고. 한성백제 박물관 가이드북)
발굴 현장을 지나서 백제역사관(百濟歷史館)에 들어가 보면 당시 백제인들의 삶을 엿볼 수가 있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한 493년 간은 21명의 왕이 즉위하여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로 중국과 일본 등과 교류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성(漢城)은 지금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로 남쪽 성인 몽촌토성과 북성인 풍납토성 안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서민들이 살던 곳이었고, 한성 남쪽 석촌동과 가락동 일대에는 귀족의 무덤은 물론 일반 서민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었다.
백제 국민들의 주거생활로는 농사를 짓고 살면서, 궁궐이나
관청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고, 당시 상류층은 6 각형 집에서, 백성들은 움막에서 살면서 토기를 만들어 썼다.
백제인의 식생활로는 귀족들은 쌀밥과 국, 반찬으로 식사를 하였고 백성들은 곡식을 끓인 죽과 된장을 기본으로 먹고살았는데 도토리가 주식이기도 하였다.
사냥을 위해 활과 화살을 사용하여 멧돼지와, 토끼, 꿩을 사냥하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하였다.
놀이로는 투호(投壺), 위기(圍碁, 바둑), 약삭[雙六]놀이를 하였다.
출토된 우물 유적을 보면 항아리의 주둥이를 묶어 두레박으로 사용한 것도 보인다.
화장실을 별도로 만들어 쓰면서 뒤처리용 막대인 '측주'를 화장실에 두고 변을 닦는데 쓰기도 하였다.
백제의 옷으로 남정네는 저고리와 바지,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는데 신분에 따라서 옷 색깔이 달랐다.
-2018.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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