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
'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는 충북 일원의 사찰을 관활하고 있는 제5교구 본산이다.
절 이름을 법주사(法住寺)라 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 조사가 천축국(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고 돌아와 서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을 지을 자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귀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니 소가 제 자리를 맴도는 것이었다.
의신 조사가 이에 느낀 바 있어 이곳에 절을 지으니 오늘날의 법주사다.
-동국여지승람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는 어느 날 밤에 ‘구봉산[속리산]으로 가 미륵불을 세워라.’라는 계시를 받았다.
구봉산으로 가는 도중 회인에서 쉬고 있는데 수레를 끌고 오는 황소가 진표를 보자 그 앞에 멈추더니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진표율사는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소 주인이 그 말을 듣고 낫을 들어 스스로 자기 머리를 자르고 대사(大師)의 계를 받았다.
율사는 속리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이 절터임을 깨닫고 거기에 표시를 해둔 후 금강산에 들어갔다. 금강산에 도를 닦으러 온 제자 영심, 유종, 불타 등에게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게 하였다. 이렇게 세워진 절이 길상사(吉祥寺) 요 지금의 법주사(法住寺)였다. - 삼국유사
이와 관련된 듯한 그림이 속리산 마애석불 중 아래쪽에 있다. 짐을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앉은 소를 새겨 놓은 암각화가 그것이다.
법주사는 미륵도량이어서 경내에는 거대한 미륵입상이 있는데 이 미륵 입상에는 사연(事緣)도 많다.
-신라 때 진표율사가 금동 미륵대불을 조성하여 놓은 불상을, 대원군이 강제로 몰수해 가 버렸다. 경복궁 축조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백 화폐를 주조하는데 구리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후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1964년에 시멘트 미륵불이 만들어졌으나 세월과 더불어 붕괴 직전에 있었다.
이것을 청동미륵보살(靑銅彌勒菩薩)로 모셨다가 거기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하여 2002년에 신라 때 본래의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동원한 인원만도 5,500여 명이요, 소요된 금만도 80kg나 되었다. 이 모두가 불자들의 보시(報施)로 이룩된 것이다.
이렇게 법주사는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살아 있는 문화재의 박물관 같은 절집이다.
법주사에서 최소한 놓치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은 국보 3점과 보물 12점이다.
그 중 팔상전(捌相殿, 국보55호)은 법주사를 대표하는 민족유산으로 통일신라 시절에 제작되었다는 현존하는 유일의 5층 목탑(木塔)이다.
두 마리 사자가 8각 석등을 떠받치고 있는 8세기 신라 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도 있다.
두 앞발로 석등을 받치고 있는데 머리의 갈기는 물론 몸과 다리의 근육까지 섬세하게 표현한 신라 석등 중의 걸작이다.
사자(獅子)와 불교(佛敎)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사자는 왕을 상징한다. 가비라성의 왕자였던 석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사자의 강력한 이미지는 불교 수호신과도 연관되기 때문에 불교에서 사자가 자주 등장한다.
이 석등과 동시대 작품으로 알려진 석련지(石蓮池 국보 64호)는 시대를 넘어 선 신품(神品)이다.
이 석연지는 이름처럼 돌로 만든 못으로 옛날에는 여기에 물을 담아 연꽃을 키우던 것이다.
그 모양도 그렇지만 그 연잎에 조각된 천인상(天人像)과 보상화문(寶相華紋) 무늬가 화려하다.
매표소에서 이정표를 보니 ‘문장대 6.7km/ 천황봉 6.6km’이다.
길은 1시간 10여분이나 오르는 아스팔트길인데, 옛날에는 상수도 보호지역이라고 길과 계곡 사이에 높게 쳐놓은 철조망이 보기 싫더니 오늘 와서 보니 그걸 다 치워버리고 산뜻하게 로프 울타리로 교체되어 있다.
세조와의 전설이 어린 목욕소(沐浴沼)를 지난다.
-세조가 나라의 번창을 기원하는 법주사 대법회에 왔다가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한 미소년이 나타나 대왕의 피부병이 곧 완쾌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목욕을 마치고 보니 소년 말대로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없어졌다. 그 소년이 약사여래의 명을 받고 온 월광 태자(月光太子)였다 한다.
세심정(洗心亭)은 갈림길이다. 오른쪽 산길을 따라 가면 ‘비로산장 0.6km/ 상고암 2.4km/ 신선대 2.7km/ 천봉. 1km’를 가는 길이다.
좌측 길로 들어선다. 0.5km에 있다는 복천암(福泉庵)과 중사자암(中獅子庵)과 문장대(文藏臺)를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복천암 막 못 미쳐 다리 하나가 있다. ‘이 뭣고 다리(是心?橋)’ 다리였다.
한자를 순서대로 읽으면 이(是), 마음(心), 무엇(?), 다리(橋)다.
다리 이름을 장난삼아 지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불자들이 말하는 선문답의 화두(話頭)로 지은 이름이리라.
↑갔다가 ↓오고
→로 갔다 ←로 가고
?하다가 !하고
!하다가 ?하더라.
이 뭣고
묻는 이들아
뭣고가 뭣고지 뭣고
-이 뭣고
옛날에 복천암을 찾았을 때는 정진 중이라고 출입금지더니 오늘은 출입이 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3,000원씩이나 받으면서 법주사 암자 중 가장 큰 암자의 출입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복천암(福泉庵)은 그 위치가 속리산의 배꼽에 해당하는 곳에 있는 성덕왕 때에 창건된 세조의 전설이 어린 암자다.
-세조는 이 암자에서 신미(信眉)와 학조(學祖) 두 고승과 함께 약수를 마시면서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계곡 아래에 있는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였더니 피부병이 다 나았다.
고질병을 고친 세조는 이는 불은(佛恩)이라 하고 이 암자를 중수하여 주고, 만년보력(萬年寶歷)이라고 쓴 사각 옥판(四角玉板)을 하사하였다.
경내에서 볼거리로는 샘과 함께 위 두 대사의 부도(충북 유형문화재 제12호, 제13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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