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내소사(來蘇寺)

ilman 2017. 11. 5. 13:11

내소사(來蘇寺)

 

오늘의 내소사(來蘇寺) 탐방은 일주문과 천왕문 중간쯤 되는 전나무 숲 터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600m에 150년 나이를 자랑하는 500여 구루의 전나무 숲 터널은 삼림욕이란 설명을 구태여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부터 속세의 티끌을 벗어버리고 떠나온 듯한 착각을 갖게 한다.
  고려 시대에 변산은 국중지재부(國中之材府)라 불렸다. 숲이 깊고 산은 낮아서 궁실(宮室)을 짓거나 배를 만들 때 건축재와 주선지재(舟船之材)로 이곳 나무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변재(邊材)라고 하는 이 유명한 나무로 몽고가 고려를 침입한 뒤 일본 정벌을 위해서 전함을 만든 것도 이 고장의 변재(邊材)였다.
이렇게 유명한 변산의 삼림이 6.25 동란 당시 공비소탕 작전으로 그 아깝게도 전부 불태워 버렸다니 골육상쟁의 6.25의 비극은 죄 없는 삼림까지 망쳐 놓고 만 모양이다.

내소사는 선운사(禪雲寺)의 말사로 633년(선덕여왕 2) 혜구(惠丘) 스님이 창건하여 소래사(蘇來寺)라고 한 절이다.  

원래는 대 소래사(大蘇來寺)와 소소래사(小蘇來寺) 둘이었는데 대소래 사는 임란 때 불타버리고 지금의 내소사인 소소래사(小蘇來寺)만 남았다.
 그런데 임란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나당연합군 합동 작전 때 부안 앞바다 석포리에 상륙하였을 때 이 절에 찾아와서 시주하였기 때문에 사액(寺額)을 내소사(來蘇寺)라 바꾸었다 하지만 이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일환으로 한 말이니 취할 바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면 '소래사(蘇來寺)'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살아날 '소(蘇)', 올 '내(來)'로 '태어나 찾아온다.'는 윤회사상에서 말하는 뜻이지만, 혜구 스님의 뜻은 '여기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다 소생하게 하여 주십시오.' 란다. 

  이 절이 자랑하고 있는 보물로는 고려동종(보물 제277호)과 법화경발본사경( 보물  제278호)이 있다. 
고려 동종(보물 제277호)은 종신에 삼존상(三尊像)이 양각(陽刻)되어 있는 뛰어난 작품이지만 그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봉래루(蓬萊樓)'다.
절의 경내로 들어가는 문루에 해당하는 것이 내소사의 봉래루(蓬萊樓)인데 그 중 1층에 해당하는 기둥을 받친 자연석 그대로의 주춧돌이 멋지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도 고풍스러운 맛을 더하여 주거니와, 생긴 그대로의 자연 주춧돌이 반듯하게 깎은 주춧돌보다 오히려 더욱 신선한 멋을 풍기고 있다. 
봉래루를 지나 내소사 경내에 들어 두 번째 계단 위 좌측에 수령 1천 년이 넘는 나무는 '입암마을의 할머니 당산나무'다.
  호남, 영남에서는 마을 입구에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가 있다.

사당이 없는 곳에서는 한 쌍의 장승을 세우고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데 그것을 한 쌍의 고목으로 대신하는 곳도 있다.
 내소사 할아버지 당산 목은 매표소 입구 오른 쪽에 새끼를 두르고 있는 느티나무 고목이 그것이다.

법화경발본사경( 法華經拔本寫經,보물 제278)은 이 절을 찾는 부인네들은 꼭 보고 갈 일이다.

-조선조 태종 15년(1415)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필사하여 7권 7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씨 부인(夫人)이란 분이 있어 죽은 남편 유근(柳謹)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 많은 글자의 불경을 한 글자(一字)를 쓰고 한 번씩 절(一拜)하며 지극정성을 다하여 쓴 필사본이기에 하는 말이다.

 

나는 이씨 부인의 남편이 살던 남성공화국의 조선 시대의 남정네들을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그때 모든 것을 지금은 여성들에게 빼앗기고 거기에 잔소리까지를 더하여 들어가며 여성공화국을 사는 남정네이기 때문이다.

*. 내소사 대웅전의 전설
 지금의 내소사 대웅보전(보물291호)은 조선조 때 세워진 것으로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서로 교합(交合)하여 만든 것이다. 그런데 대웅전 천정에 그 교합이 어긋난 곳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신기하 전설이 전하여 온다.  

 
-청민선사가 이 대웅전을 중건할 때였다. 목수는 3년 동안 말없이 나무만 깎고 있었다. 사미승(沙彌僧)이 있어 장난끼로 그중 하나를 몰래 숨겨 놓았다. 목침을 다 깎은 목수는 깎은 목침 수가 부족한 것을 알고 이는 자기의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 하며 절을 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청민스님은 그 목침 한 토막은 이 절과 인연이 없는 것이라 하며 강행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우측 5출목 한 부분이 지금도 비어 있다.

그 미완성 공사는 대웅전 내부 중앙의 벽화에도 있다.

  -그렇게 지은 대웅보전 내부를 단청할 때였다.
화공이 법당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단청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100일 동안은 아무도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라고 당부를 했다. 인기척도 없이 먹을 것도 들이지 않고 계속되는 공사가 선우스님에게는 너무나 궁금하여서 99일이 되던 남몰래 살짝 문을 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 안에는 화공은 없고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하늘로 날아가더니 능가산 중턱에 앉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노스님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 스님을 관음조(觀音鳥)의 화신이라 하였다.
이후에 그 암자 터는 복원되어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님을 봉안하여 관음기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래서 대웅보전 안에 한 쌍을 그려져야 할 그림이 좌측 방향 위는 바탕면만 그려져 있다.
이 새가 관음조(觀音鳥)요, 목수가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지금도 새벽녘마다 울고 간다 하였다.

 대웅보전 안의 후불 벽화 백의관음보살좌상(白衣觀音菩薩坐像)은 국내에서 제일로 크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정면 8짝의 연꽃과 국화로 화사한 꽃밭을 생각나게 하는 창살의 사방연속무늬다. 이를 보고 있노라면 영원히 지지 않고 피어있는 하나의 꽃대궐의 문살은 문살을 넘어선 예술의 세계를 엿보는 것 같다. 이를 법당 안에서 보면 단정한 마름모꼴 살 그림자만 비치는 것이 학이 날개를 펴는 듯하다 한다.
이 대웅전은 화려하지만 시끄럽지 않고, 장중함보다는 다정함을 느끼게 하는 건물로 뒤로 관음봉(觀音峯)이 병풍처럼 둘러있다. 이 밖에도 ·내소사에는 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24), 내소사 선실당과 요사(지방유형문화재 125) 등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