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추월산 보리암(菩提庵)

ilman 2017. 11. 15. 12:50

추월산 보리암(菩提庵)
  드디어 아래에서 올려다 보이던 추월산 바위산 능선 길에 들어서서 굽어 보니 일망무제로 탁 트인 담양호와 그 너머 금성산이 보인다.
돌아오는 길에 14km 떨어진 담양읍 죽녹원에서 보던 스님이 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 형국의 추월산 위를 나는 지금 거닐고 있는 것이다.
 
  보리봉(691m)에서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멀리 보이는 추월산 정상(731m)까지 갈까 말까 해서다. 능선길로 1.2km/30분 거리이니 1시간이면 오가는 거리지만 내가 밟고 선 보리봉이 추월산 정상보다

너무나 아름다와서 높이로만 따지지 않는다면 이 보리봉이 정상인 것 같아서다.
 그 중간 거리를 우리 일행이 가고 있는데 그들을  기를 쓰고 따라가는 것은 오히려 폐가 되는 것이어서 그 시간에 500m 아래에 있는 보리암 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느긋한 산행을 즐기고  싶었다.
그동안 젊고 건장한 산악회 사람들을 따라 다니다 보면 너무 느려서 점심을 생략한 경우가 많아서였다. 
발길을 보리암으로 돌리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추월산 정상 아래에 있는 약수터를 가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높은 추월산 정상 아래 샘터(쌍대리약수터)가 있어 아무리 가문 날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보리암에 행실이 좋지 않은 사승(寺僧)이 있어 이 샘가에서 닭을 잡아먹은 일이 있었다.

그후 석 달 동안이나 샘물이 끊기는 바람에 보리암 스님들은 아랫마을까지 내려가서 힘들게 물을 길어다가 먹을 수밖에 없었다. 

*. 보리암(菩提庵)의 전설 
  보리암을 빼놓고 추월산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보리암은 유명한 암자였지만 듣던 대로 바위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관악산 연주암 같이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등산로가 없이, 등산길에서 아래로 100m 내려 가야 만나볼 수 있는 백양사 부속 암자였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구경(九境)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어서 수도(修道)에 적당한 곳을 찾아 헤매다가 이곳에 보리암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보리암 창사 설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지리산 무주암(無住庵)에서 있을 때였다. 하루는 나무로 매[鷹]를 만들어 하늘에 날려 보냈더니 그 매가 날아가다가 추월산 정상 부근에 앉아 불좌복전(佛座復田)으로 점지해 준 곳이 지금의 보리암 자리다. 
  절 이름의 보리(菩提)란 영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거나, 그러한 지혜로 불과(佛果)에 도달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 득도한 곳이 보리수(菩提樹)로 변함없는 진리를 깨달아 불도(佛道)를 이루었다는 나무가 보리수(菩提樹)다. 
보리암의 대웅전 마당이 끝나는 곳의 절벽을 쇠 난간 대신에 대나무로 울타리를 하여 놓은 것이 이색적인데 대웅전 앞에 3층탑보다 탑 옆에 녹슨 쇠솥 하나가 유난스레 눈에 띈다. 거기에 대한 전설이 전하여 온다. 
- 순창에 불심이 깊은 기생이 있어서 이 보리암에 솥을 시주하고 싶었다. 하여 지름 1.2m 깊이 0.7m의 솥을 만들어 절 아래까지 운반은 하여 왔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도저히 해발 600m 위에 있는 보리암까지 운반할 수가 없었다. 낙심하며 밤새 걱정걱정하다가 다음날 가보니 신기하게도 보리암에 올라있지 않은가. 불력(佛力)이 빚은 이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산악인도 수많은 쇠 층계를 밟고 겨우 오르내릴 수 있는 곳에 어떻게 이런 암자를 지을 자재를 구할 수 있었을까 하였는데 거기서 한참 내려와 있는 굴 앞의 '보리암중창건공덕비'에다가 위에서 말한 창건설화와 함께 비명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보리암은 고려 신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리산 무주암에 오르시어 나무로 매(鷹)를 만들어 날려 보내서 매가 앉은 자리에 터를 잡고 은거 수행하셨던 청정무구한 신령스런 만년 불좌의 대복전(大福田)으로, 수많은 이적과 영험이 나타났던 기도의 도량이다. 그후 대공덕주의 시주에다가 광주 사태 시 국군공수여단의 협력과 미 공군 헬기의 지원을 받아 목재, 자재를 운반하고 등산객들이 모래를 나르는 등 군관민이 협조 하에 세운 암자이다. 

등산로에서 보리암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비석이 있다. 큰 비석 하나, 작은 비석 둘.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시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임진왜란 때였다. 의병대장 김덕령의 부인 홍양 이씨가 겁탈하려는 왜적을 만나자 크게 꾸짖고 암자 앞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니 그와 함께
있던 창녕 성씨, 제주 양씨, 광산 김씨 세 부인도 함께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이 추월산은 김덕령 의병대장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어서 보리암 오르는 길가 바위에 '夫人興陽李氏殉節之處  倭賊'(*참고, 興陽=고흥) 등의 음각한 글씨가 있다는데 찾지 못하고 내려오고 말았다. 월계리 들머리에 커다란 순절비(殉節碑)는 여기 있는 창녕성씨의 순절비를 후손의 효성으로 여기보다 크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