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 동굴(光明 洞窟)(1) 이야기
우리 한국수필작가회 8월 번개 미팅은 광명동굴(光明洞窟)행이라고 철산(鐵山)역에서 모인다 하여 가는 길이다. 철산역에 내려서 광명동굴 종점까지 가는 17번 버스를 타고 광명동굴을 향하다 보니 광명시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국내 최대 가구회사 Akia나 롯데 아울렛, Cosco를 지나 30여 분이나 더 걸렸다.
광명시는 북쪽과 동쪽이 서울의 구로구, 금천구와 서쪽이 부천시와 남쪽이 안양시에 접해 있는 서울의 위성도시라서 350,326명(2014년)에 12만 7,461 가구가 모여와 살게 된 것 같다.
광명시내 중심가를 경부철도나 전철이 관통하고 있고, 인천고속도로와 안양시내 버스가 광명시까지 다니는 교통의 편리한 서울 생활권 위치해 있는데다가 서울보다 비교적 집값이 싼 광명시에 인구가 몰린 것 같다.
그래서 KTX열차가 용산을 떠나 영등포를 제치고 처음으로 머무는 곳이 광명역(光明驛)이었구나 하였다.
게다가 남(南) 경기도지사가 말한 “광명시흥 지역은 국내 교통의 허브이자 대중국 전략 특구로 지리적 위치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오랜 규제와 국책사업 취소로 지역침체가 지속됐다. 이제 이 지역은 양질의 일자리가 넘쳐 청년들이 모여드는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으로 거듭나 경기도 리빌딩의 새로운 축이 될 것”이라는 발표에 인구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축구장 300개 크기의 땅에 부민이 함께 살 수 있는 태크노로지를 2022년까지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광명동굴(光明洞窟)은 금 은 동의 광산이다. "광명동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03년 5월 2일 가학리에 '시흥광산'이 설립되었다는 기록이다.
이 광산을 일본은 구한말 고종을 핍박하여 1912년 이이다 큐이치로라는 일본인의 이름으로 광산이 설립되었다.
당시 광부들은 대부분 징용과 생계를 위해 온 농민 출신 광부들이었다. 광명 광산의 전성기 때에는 500여 명의 광부가 근무하였다 한다. 여기서 채굴된 광물은 물론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군자금이 되었다.
석탄 공사에 의하면 1955년부터 1972년 폐광될 때까지 52kg의 황금을 캐냈다 하는데 광산채광을 시작한 1912년부터 1954년까지는 수백kg 이상의 황금이 채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다.
1972년에 큰 홍수 재해로 인하여 환경오염과 보상 문제로 폐광된 이후 6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81년까지 광명시에서 1978년부터는 인근의 소래포구의 새우젓을 숙성하는 창고로 쓰이다가 2011년 광명시가 이를 매입하여 지금과 같이 역사·문화·관광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이 광명 동굴은 한국 관광명소 100위 내로 선정되어 2015년 유료화 개장 이후 불과 10개월 만에 관광객 100만 명이 넘어서고, 그 수입이 40억 원, 일자리 200여 개를 창출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대한민국 창조경제의 모델로 우뚝 서서 게 되었다니 이 얼마나 경하로운 일인가.
광명동굴은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결합되어 세계가 부러워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동굴 테마파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상 자료는 광명시 홈페이지 네이버 지식 구글을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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