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유적을 찾아서/2. 부여(扶餘)
갑사(甲寺)를 둘러보고 우리는 백제의 옛 도읍지 부여(扶餘)로 향한다. 백제는 온조(溫祖)에 의하여 하남 위래성(慰禮城)에서 태어나서, 고구려의 침공으로 공주(公州)로 천도하였다가, 의자왕 때 부여(扶餘)에서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다. 백제 660년 중 부여에서만 6대 123년 동안은 가장 찬란한 번성기의 역사를 이룩한 때였다. 지금은 3만여 명밖에 살지 않는 부여에 그때 사비(扶餘)의 인구가 가구 수만도 13만 호에 이르렀다니 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만 배워온 역사의 현장에 와서 하나하나를 의문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름대로 역사 속에 빠져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부여와 백제 지명 유래 백제는 건국 설화와 함께 태어났다가 전설 속으로 사라져간 나라다. 그것이 지명으로 국명으로 이렇게 나타난다. 부여(扶餘)라는 지명이 그런 것 같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 동부여에서 태어나서, 금와왕의 7 왕자의 시기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 그 아들 온조가 원자 유리 태자로 인하여 부여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하남 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다. 그래서 부여(扶餘)란 지명이 생긴 것 같다. 백제는 건국 당시에는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온조왕이 함께 남하한 열(十) 사람의 신하의 도움(濟)을 받아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미추홀에서 건국에 실패한 형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百姓)들이 모두 즐겨 그를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백사람의 신하가 세운 나라란 뜻이다.
*부여국립박물관 서울에 살다가 여행지에 가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작은 서울뿐이다. 선진국에 해외여행 가서 보게 되는 것은 큰 서울인 것 같이. 그때 그 고장을 제대로 보게 되는 곳이 그 고장의 산을 올라 조망해 보는 것이다. 그 고장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그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곳이 박물관이다. 그래서 우리가 1,500년 세월을 뛰어넘어 백제를 만나러 찾아간 곳이 부소산 근처 금성산 기슭에 있는 부여 국립 박관이다. 그중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환상적인 출토품인 왕비의 귀 장식(국보 157호), 왕의 금제관식(국보 154호)와 금동대향로(국보 287호)가 발길을 잡는다.
금동 대향로(金銅大香爐)는 금동 무령왕릉의 발굴 이후 최대의 성과라고 하는 것으로 부여인의 긍지요, 백제 문화의 정수(精髓)라 한다. 향로 몸체는 용과 함께 많은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뚜껑 부분은 산봉우리들에 30여 마리 동물이 악사의 노래를 들으며 있는데, 꼭지가 되는 곳에 봉황 한 마리가 여의주를 목에 두르고 막 하늘을 날으려 하고 있다. 높이 64cm의 이 금동대향로는 1993년 12월 능산리 건물지에서 발견되어 백제의 옛 도읍 부여의 상징물이 되어 있었다. 그 실물 크기의 모조품이 1백7십만 원이라 하지만 주머니 사정도 사정이지만, 버려야 하는 나이를 탓하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궁남지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 密只 嫁良 置古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薯童房乙 맛둥 도련님을 夜矣 卯乙 抱遺 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간다. 한국 최초의 향가 '서동요'의 설화에는 끔찍하고도 멋진 이야기가 나온다. 서동의 엄마가 으스름달밤에 못에서 나온 용과 정사를 하고 서동을 낳았다는 것이 그 하나요, 일 개 천민인 서동이 노래 하나로 그것도 이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이야기 그대로보다는 왕(龍)이 나들이 나갔다가 미천한 여인(서동 엄마)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설화 하는 과정에서 과장되었으리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그 전설에 얽힌 못이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1km 남짓쯤 떨어진 위치에 있는 '궁성지(宮城池)'다. 백제 무왕이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다. 백제성이 있었다는 금성산의 영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평야 가운데에 못을 파고 20리 밖에서 물을 끌어와, 물의 양에 따라 그 모양이 바뀌도록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3만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연못 한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 섬을 만들고 거기까지 나무로 만든 긴 구름다리로 건너가면, 포룡정(抱龍亭)을 만날 수 있다.
*부소산을 향하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탑인 정암 사지 백제 5층 석탑(l국보 9호)과 고려석불좌상(보물 108호)을 둘러보고 부소산을 향하다 보니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흘러 버린 옛날이 그리웁고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에서 울어나 보자 ♩♬♭♪~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여행 내내 우리를 유익하고 즐겁게 해주던 선배 이상익 서울대 교수(11회)였다. ㅑ부소산(扶蘇山)은 106m의 부여의 진산(鎭山)으로, 평화로울 때에는 궁중 후원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북쪽에 백마강으로 면한 단애(斷崖)로 하여 천연의 요새가 되어 여기에 부소 산성(扶蘇山城)을 쌓고 백제 123년 동안 사비(扶餘)를 지키는 중심 거점이 되어 주었다. 부소산을 향하면서 느껴지는 것은 백제인의 망국의 한이었다. 사비문을 들어서 제일 먼저 외삼문과 내삼문을 거쳐 '삼충사'에 들려 참배하였다. 가정이 어려우면 효자 열녀가 탄생하듯이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생긴다는 말처럼, 백제 패망의 역사에서 빛나던 성충· 흥수· 계백 장군 세 충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곳이다.
*. 낙화암(落花巖) 낙화암 가는 길은 황혼의 낙조보다 더 붉고 노랗게 물들은 낙엽을 떨구며 가을이 한창 가고 있었다. 전리품 중에 하나가 여인이 되던 시절, 이국 군대에게서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백마강에 몸을 던져 장열히 꽃처럼 산화해간 궁녀를 삼킨 백마강이 낙화암 너머 저 멀리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는"落花岩" 세 글자가 궁녀들의 흘린 피 때문이라는 불그스레한 바위 암벽에 음각으로 망국의 슬픔이 어떠했나를 말해 주고 있다. 낙화암이라 하기 전에는 이 바위를 떨어질 墜(추), 죽을 死(사) '추사암(墜死岩)'이라 하였다는 바위다. 내 보기에는 이 낙화암의 넓이는 수 천명이나 수 백 명이 함께 설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백제 패망의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 충절의 넋을 기리기 위해, 과장한 것이겠지만, 3,000이란 궁녀의 수를 넘어서 숫자로는 말할 수 없는 한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그 궁녀가 떨어진 백마강은 따로 있는 강이 아니다. 공주의 금강 하류이지만 부여에서 별칭으로 부르는 강 이름이다. 고란사(皐蘭寺) 선착장 비로 위에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釣龍臺)가 있어 백마강(白馬江)이라 이름 한 그 유래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당 연합군이 처들어와 백마강 도하작전 때 백제 수호 용 한 마리 안개로 막을 때 소정방 백마의 머리로 용을 낚아 백마강이라네 낙화암 높은 바위 위에 '백화정(百花亭)'이란 정자가 있다. 삼천궁녀의 고귀한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부안시의 시 모임에서 세운 것이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내에는 사비성이 함락되던 무렵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3천 궁녀를 위로하고 후세에 널리 기리기 위하여 1965년에 세운 '궁녀사(宮女祠)'라는 사당도 있다. 일찌기 춘원 이광수가 찾아와 이런 글을 남기고 갔다
사자수(백마강) 내린물이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 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아, 낙화암아 왜 말이 없느냐? *고란사(皐蘭寺)' 낙화암에서 돌길을 따라 내려가면 고란사(皐蘭寺)라는 유서 깊은 절을 만나게 된다.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고려시대에 건립된 이 절 뒤 절벽에는 어정(御井)이 있다. 백제왕실의 식수 어용수(御用水)였다. 백제 왕들은 이 물을 떠오게 하고 그 물이 틀림없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고란사 뒤 바위틈에만 있는 고란초를 한 잎씩 물동이에 띄워 오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백제왕들의 위장병을 막고 원기를 찾았다 하여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까지 낳게 하였다. 이 고란사는 그때에는 없었고 3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뒤에 생긴 절이니 어느 게 진짜인가.
양지도 그늘도 나는 싫어서 낙화암 바위 틈에 끼어 살지요. 고란사 종소리가 나를 달래고 넓은 땅 마다 하고 숨어 있어도 못잊어 찾아 주는 고란이라오. -고란초 독백/임현상 고란사 바로 밑에는 고란사 선착장이 있다. 이 유람선에 배를 타고 구드레 나루터(부여 선착장)를 거쳐 강에서 우러러 낙화암과 고란사를 바라보며 백마강 선상 유람을 할 수 있지만 이제 우리의 일정울 마치고 서들러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다. *자온대(自溫臺) 서울 가는 길에 둘려본 '수북정'은 광해군 때 양주 부사를 지낸 김응국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던 정자다.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한 것이다. 그 앞에 백제 멸망을 자초하였다는 '자온대'(自溫臺)가 있다. 옛날 의자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왔다가 이 바위에서 놀다 가곤 했다. 그때마다 간신들이 먼저 와서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 놓고, 이는 하늘이 대왕의 선정에 감동하여 바위가 스스로(自) 따뜻해(溫) 진다 하며 의자왕의 방탕을 부추켰다는 바위가 바로 자온대(自溫臺)다. 부여8경으로 백제탑 석조(夕照), 고란사의 새벽 종소리, 낙화암 숙견(宿鵑), 수북정의 청람(靑嵐), 구룔평 낙안(落雁), 백마강 침월(沈月), 부소산 모우(暮雨), 규암진 귀범(歸帆)을 말하는데 우리는 한 나절도 안되어 거의 둘러보고 간다.
*백제 후예의 천추의 한 백제가 멸망하자 의자왕과 그의 신하들은 당나라에 잡혀가서 죽었다면 백제인의 한은 오죽했을까.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과 맞서 결사대 5천으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계백장군의 시신을 백제 유민이 은밀한 곳에 묻었다가 고려에 가서야 충곡서원(논산시)을 세워 그 충절을 기리게 된 것만 보아도 망국의 한을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은가. 경상도에서 일어난 신라가 호남의 백제를 패망시켰으니,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경상도 사람들에게 백제인들이 오죽 괄시를 받고 천대를 받았으랴. 그것이 호남인들에게는 계속 한으로 남아 동학란으로, 광주학생 사건으로, 5.18 광주 의거로 표현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에는 이 한이 특정 정치인을 향해 똘똘 뭉쳐 선거에서 몰표를 던져 그 한을 풀으려 한 것이 바로 '백제의 한'이었던 것을 아시는가? 이 천추의 한을 이 고장 출신 신동엽 시인은 장편시 '금강'에서 피를 토하듯 백제의 한을 토해내고 있다.
-2002년 11월 9일 부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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