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온양온천

ilman 2017. 8. 6. 18:15

온양온천
 

 
 
 
 
 
   
 
 친구들과 함께 1호선 전철을 타고 영등포에서 아산(牙山)을 향하고 있다.
아산에 가서 온천욕도 하고 벗들과 신년 축하 모임을 가지며 한 잔 하기 위해서다.
그보다 작년인 2008년 12월 15일 처음으로 개통되었다는 온양 온천행 전철을 타고 가면서 주변의 정보를 얻으며 새로운 곳의 탐방의 즐거움을 만끽해 보자는 것이 더 솔직한 고백이다.
 그동안 천안까지만 개통되었던 전철이 천안에서 온양온천, 신창역까지 총 21.65km를 국고 5천967억 원을 투입하여 만든 것이니 방문에 앞서 아산 시민의 숙원사업이 이룩된 것을 축하할 일이다.
  수도권 전철역이 서울에서 경기도를 세로 질러 충남 장항선으로 연결된 것이니, 이는 아산 발전은 물론 그 주변 도시까지 파급 효과가 미칠 것이라 천지개벽할 일이다.
 서울역에서 온양온천역 다음 신창역까지의 거리는 116km로 그 소요시간은 2시간 16분이 걸린다.  아산 시민도 이제는 서울권으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수도 서울의 위성도시의 시민이 된 것이다.
 전철의 운행 간격은 평일 출·퇴근 시간대에는 20분 간격으로, 그 이외에는 30~40분 간격으로 청량리역, 구로역, 병점역 등 3곳에서 출발을 한다.
 그중 가장 먼 청량리역에서 종착역 신창역까지의 요금이 3,100원이라 한다.
그러나 나 같이 지공나이(하철 짜나이 65세)를 넘은 사람들은 무임승차 우대권으로 공짜로 오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온양온천욕(溫陽溫泉驛)에 내리니 수많은 상인들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온천과 먹거리처를 홍보하고 있다.
 오늘날의 아산시(牙山市)는 옛날에는 온양군, 아산현, 신창현 셋으로 나누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5년 1월1일 아산시(牙山市)란 이름으로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어 1읍 10면 6동이 되었다.
 
 
 
 
 
   온양온천 이름은 백제 때에는 탕정군(湯井郡), 통일신라시대에는 탕정주(湯井州), 고려 때에는 온수군(溫水郡)이라 하다가 세종대왕 무렵부터 온양군(溫陽郡)이라 하게 되었다.
그 지명에 끓일' 湯(탕)', 따뜻할 '溫(온)' 자를 쓴 것을 보면, 예로부터 이 고장이 온천지대인 것과, 이곳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지역인 것을 알 수가 있다.
10여군데에서 양질의 온천수가 나와서 아산에는 온천특구로 지정된 곳이 세 군데나 있다.
전통의 왕실온천인 '온양 온천', 보양형(補陽形)의 동양 4대 유황온천인 '도고 온천(道高溫泉)', 동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인을 위한 레저용 물놀이 테마파크 '아산 온천(牙山溫泉)'이 그것이다.
온양 온천역에서 내려서 걸어서 10분 내에 있는 곳이 온양 온천이요, 역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도고 온천,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것이 아산 온천이니  아산시는 국내 최고의 온천휴양과 관광도시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온양관광호텔의 온양온천으로 향한다.
온천 중에 아산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온천입구에 이런 소개의 글이 있다.
 
-이곳 온양관광호텔은 곧 "온양 행궁"의 터다.
조선 시대 최초의 온궁(溫宮)으로 태조 대왕을 비롯한 세종, 세조, 성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등 나라님들이 머물면서 집무와 휴양을 하시던 곳이다. 그 유적으로 호텔 구역 내에 영괴대(靈槐臺) 및 영괴대비가 문화재 자료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세종대왕의 안질(眼疾)이 온천욕으로 치유되어 그 포상으로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온천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하여 오고 있다.
 
- 옛날에 한 노파의 아들이 있었는데, 절름발이에다 가난이 겹쳐서 혼기를 놓친 3대 독자 아들이었다. 결혼시키지 못하여 애를 태우다가 백일기도를 드렸더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현몽하는 것이었다.
  "내일 마을 앞 들판에 나타난 절름발이 학의 거동을 살펴보라."
다음날 가보니 과연 학이 다리를 절며 한 자리에 사흘을 머물다가 완치되어 날아가는 것이었다. 노파가 가 보니 학이 있던 자리에 펄펄 끓는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노파의 아들도 학처럼 쩔뚝거리는 다리를 그 물에 넣기를 계속하였더니 다리가 씻은 듯 낫는 것이 아닌가.
그 뒤 아들은 양가 규수를 만나 혼인을 하여 노파의 간절한 소원을 풀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전국에서 병을 고치겠다고 모여드는 명소가 되었다.
 
                                                                                                      -온양 아산 마을 사 편집 
 이 온양 온천 물은 지하 150m에서 분출하는 58℃의 알칼리성 단순 온천수로, 그 용출량은 하루에 2만 1,000 t이나 된다. 이 온천수는 마니타온을 함유한 라듐온천수로 조선시대 세종을 비롯한 나라님들이 온양행궁을 짓고 휴양하면서 국정을 살피던 왕실온천이다.
예로부터 피부병, 신경통, 요통, 부인병, 위장병, 빈혈 등에 뛰어나고 신진 대사를 왕성하게 해 준다고 소문 난 곳이다.
 
 
 
 요금은 대인 5,500원. 소인 3,000원인데 65세 이상의 노인은 3,800원이었다.
전철역 개통으로 사람이 너무 많아 그보다는 조금 비싼 다른 탕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목욕을 끝내고 후문 주차장 쪽으로 가다보니 고색창연한 나무들과 함께 대(臺)와 비석각(碑石閣)이 있다.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대왕의 효심 어린 영괴대(靈槐臺)였다.

-영괴대(靈槐臺, 문화재자료 제228호): 영조가 이 온천에 행차하였을 때 따라온 장헌세자(후에 사도세자)가 무술을 연마하며 활을 쏘았던 곳이다.
왕이 온양군수 유염에게 명하여 태자를 위하여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3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게 하였다.
장헌세자의 아들 정조 때에 그 부근에 대(臺)를 만들었고, 대 옆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면서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하도록 한 것이 '영괴대비(靈槐臺碑)'다. 이는 옛날 중국 주(周)나라 때 뜰에 3그루의 홰[槐]나무를 심은 고사에서 인용한 말이다. '靈槐臺'란 글씨는 정조의 어필(御筆)이니 무심코 그냥 지나치지 말 것이다.

 옛날 왕들은 피부병을 많이 앓았다. 그때마다 온천을 찾았고, 온천 중에는 한양에서 가까운 황해도 평산이나 경기도 이천온천도 있었지만 그 길은 험하여 온양온천을 찾는 경우가 많아서 온양에 온궁(溫宮)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기록이 '영괴대기'란 책 속에 그림과 함께 전하여 온다.
그런데 당시에는 왕실과 사대부 까지는 온천을 이용할 수 있었는데 이 온천이 우리네 같은 서민에게도 두루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이곳에 장항선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푼 이러한 사랑은
이 고장을 빛낸 많은 사람들을 역사에 남게 하였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이곳에서 자라서 혼인하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한 곳이 바로 아산이다.
고려말 최영 장군의 손녀 사위이며 세종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이 어린 시절을 살던 곳도 설화산 아래 이곳 아산이었다. 조선 세종조의 과학자며 서민의 영웅이었던 장영실도, 갑신정변의 풍운아 김옥균이나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 윤보선 대통령의 고향도 바로 아산이었다.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의 위대한 족적을 역사에 남기는 법이다. 그 유산(遺産)들 하나하나가 오늘을 살고 있는 아산 시민의 자존심과 자랑이 되어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현충사가 그렇고, 맹사성의 고택, 윤보선의 생가 등등이 그렇다. 
 옛날 내가 젊었을 무렵에는 잘 사는 사람은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갔고, 그렇지 못한 나같은 사람들은 온양온천 일원이나 지금의 온양 관광호텔로 갔다. 그래서 나도 신혼여행을 이곳 온양 관광호텔로 와서인지, 백발이 되어 다시와서 그런가 남보다 더 감개가 무량하다.
아내와 함께 신나는 첫날밤을 이 온양관광호텔에서 보내고, 다음 날은 수덕사(修德寺)로 갔다. 나의 젊고 가난한 시절의 추억이었다.
다음 기회에는 90이 되신 우리 장모님과 그분의 딸을 모시고 온양관광 대온천장과 아산시 도고온천에 다시 오고 싶구나.
                                                                                   -2009년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