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경주 양동(良洞)민속촌마을 /유네스코 지정

ilman 2017. 7. 25. 18:40



지난 주 ‘H2O 품앗이운동본부’ 따라 ‘원자력 안전체험학습’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대전의 ‘원자력 안전기술원’에서의 ‘원자력 관련 특강’에 이어 경주 월성 원자력발전소 견학‘ 차 경주 가는 길에 경주 '양동민속한옥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냥 보면 단순한 한옥마을이지만 알고 보면 단순한 관광과 또 다른 세계가 있는 법이다.
민속마을이나 민속촌(民俗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옛 민속을 보존하여 고유한 생활 풍습을 보여주는 마을로 나라에서 지정하여 보호하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민속마을로는 '낙안읍성민속마을'(순천시), '성읍민속마을'(제주시), '양동민속마을'(경주시), '외암민속마을'(아산시), '토성민속마을'(철원군) 6곳이 있다.

*. 양동(良洞)마을

 

양동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나라가 지정한 민속마을이다.
양동마을(중요문화재 제189호)은 조선 초기에 입향(入鄕)한 경주 손씨(孫氏)와 여주 이씨(麗州 李氏)들이 세거(世居)하여온 씨족 마을이다.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여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孫昭)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 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손소는 문과 급제 후 이시애 난 평정에 공신으로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한 분이다.
여주 이씨는 창성공 이번(李蕃)이 손소(孫昭)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일이 많았다.
그 동안 두 집안에서는 양가 집안끼리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며 서로 협동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양동마을은 네 개의 산줄기 능선과 그 골짜기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다.
기와집 주변에는 초가집들이 많은데 이는 옛날 기와집에 살았던 양반들이 거느린 노비들이나 소작농이 살았던 집이다.
집들은 대개 ‘ㅁ’ 자 모양인데 이는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였다.

-양동마을은 낙안읍성(순천시)이나 외암민속마을처럼 평지가 아닌 비탈진 산 길에 형성된 마을이다.
주산(主山)인 설창산 문장봉에서 네 줄기로 뻗어나간 능선과 골짜기 모양이 ‘勿’ 자 모양이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勿’자와 관계있는 기찻길과 초등학교 건물 이야기도 있다.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는 일인(日人)들이 이 고장에 철길을 만들 때 ‘勿’(양동마을) + ‘一’(철로) = 血 이라 불길하다 하여 . 만약의 사고를 염려하여 철길을 우회하여 만들었다 한다.
양동초등학교의 남향 건물도 같은 이유 때문에 동향(東向) 건물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은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의 고깃배들이 이곳까지 내왕하며 교통도 지금보다 더 편했던 모양이다.
양동마을은 ‘외손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540여년 전 청송에서 살던 양민공(襄敏公) 손소(孫召)가 갑부인 류복하의 무남독녀 류씨와 결혼한 후 양동에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양동에서 살았다는 것이 그 예다.
여강 이씨(驪江/驪州 李氏)들도 그랬다.
성균관 생원이었던 영일(迎日)에 살던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孫昭)의 큰딸과 결혼하여 양동에 옮겨와서 살면서 맏아들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을 낳았는데 그가 이씨 가문을 일으킨 문원공 회재 선생이다.

*. 서백당(書百堂) 이야기

 
마을에 들어서니 집들은 길의 좌우 능선 따라 산 비탈에 있는데 갈림길마다 청동판으로 된 멋진 안내판이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임란 이전(16세기)에 지었다 하여 보물로 지정된 3채의 한옥(무첨당 제411호, 관가정 제442호, 향단 제412호)과 서백당(書百堂, 15세기 창건)이다.
나는 그중 이 마을에서 가장 볼거리라는 서백당을 향한다.
서백당(書百堂)은 경주손씨 종택(宗宅)으로 이 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손소가 지은 것이다.
그 사랑채 현판의 이름을 따서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고택(古宅)이기 때문이다.

-이 집은 경주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소가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상속자가 되어 25세에 지었다는 유서 깊은 집이다.
지관(地官)이 이곳을 ‘三賢先生之地’(삼현선생지지)라 했다. 이 집 터에서 3명의 현인(賢人)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 예언대로 손소의 아들 우재 손중돈(도승지를 3번이나 역임, 문묘배향)과 외손자 희재 이언적(東國18賢,문묘배향)이 사랑방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린 ‘書百堂’(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 ‘忍’(인) 자 백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양동마을은 낙안읍성마을과 달리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라서 관광객을 위해 집을 개방하지 않는지 내가 갔을 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서 영남지방의 특색이라는 'ㅁ' 자형의 본체와 전후로 나란하다는 사랑채는 물론 사랑채 뒤에 있다는 사당도, 마당에 있다는 500년 묵은 향나무도 못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관가정(보물 제442호)을 거쳐 가는 하산길이었다. 
觀嫁亭(관가정)은 ‘곡식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널찍한 누마루에서 들판의 자라는 벼를 바라보는 기쁨을 보는 정자란 말이다.
관가정의 마당의 향나무도 역사를 말하고 있는가.
수백년 나이를 짐작하게 하는 낙낙장향목(落落長香木)이었다.
양동마을을 둘러보고 우리는 경주를 향한다. 오늘 저녁은 안압지의 야경을 구경할 모양이다.

 

 

 

 

 

 

 

경주 양동(良洞) 민속촌 마을 기행

지난 주 ‘H2O 품앗이운동본부’ 따라 ‘원자력 안전체험학습’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대전의 ‘원자력 안전기술원’에서의 ‘원자력 관련 특강’에 이어 경주 월성 원자력발전소 견학‘ 차 경주 가는 길에 경주 '양동 민속 한옥마을'(유네스코 지정)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냥 보면 단순한 한옥마을이지만 알고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민속마을이나 민속촌(民俗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옛 민속을 보존하여 고유한 생활 풍습을 보여주는 마을로 나라에서 지정하여 보호하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민속마을로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순천시), '성읍 민속마을'(제주시), '양동 민속마을'(경주시), '외암 민속마을'(아산시), '토성민속마을'(철원군) 6곳이 있다.

*. 양동(良洞)마을

 양동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나라가 지정한 민속마을이다. 양동마을(중요문화재 제189호)은 조선 초기에 입향(入鄕)한 경주 손 씨(孫氏)와 여주 이 씨(麗州 李氏)들이 세거(世居)하여온 씨족 마을이다.

-이 마을은 경주 손 씨와 여주 이 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여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孫昭)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이 계기로 경주 손 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손소는 문과 급제 후 이시애 난 평정에 공신으로 안동부사와 진주목사를 역임한 분이다.
여주 이 씨는 창성공 이번(李蕃)이 손소(孫昭)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일이 많았다.
그동안 두 집안에서는 양가 집안끼리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며 서로 협동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양동마을은 네 개의 산줄기 능선과 그 골짜기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다. 기와집 주변에는 초가집들이 많은데 이는 옛날 기와집에 살았던 양반들이 거느린 노비들이나 소작농이 살았던 집이다.
집들은 대개 ‘’ 자 모양인데 이는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였다.

-양동마을은 낙안읍성(순천시)이나 외암 민속마을처럼 평지가 아닌 비탈진 산 길에 형성된 마을이다. 주산(主山)인 설창산 문장봉에서 네 줄기로 뻗어나간 능선과 골짜기 모양이 ‘勿’ 자 모양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勿’ 자와 관계있는 기찻길과 초등학교 건물 이야기도 있다.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는 일인(日人)들이 이 고장에 철길을 만들 때
‘勿’(양동마을) + ‘一’(철로) = 血이라 불길하다 하여 만약의 사고를 염려하여 철길을 우회하여 만들었다 한다. 양동초등학교의 남향 건물도 같은 이유 때문에 동향(東向) 건물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형산강(兄山江)은 옛날에는 수량도 많고 바닥도 깊어서 포항의 고깃배들이 이곳까지 내왕하며 교통도 지금보다 더 편했던 모양이다.
양동마을은 ‘외손 마을’이라고도 불렀다. 540여 년 전 청송에서 살던 양민공(襄敏公) 손소(孫召)가 갑부인 류복하의 무남독녀 류 씨와 결혼한 후 양동에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양동에서 살았다는 것이 그 예다.
여강 이 씨(驪江/驪州 李氏)들도 그랬다.
성균관 생원이었던 영일(迎日)에 살던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孫昭)의 큰딸과 결혼하여 양동에 옮겨와서 살면서 맏아들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을 낳았는데 그가 이 씨 가문을 일으킨 문원공 회재 선생이다. 이언적은 추사 김정희 제자로 역관으로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귀한 책을 제주도에 귀양 가 있는 스승 추사에게 주었더니 그 감사로 세한도(歲寒圖)를 선사받은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 서백당(書百堂) 이야기

  마을에 들어서니 집들은 길의 좌우 능선 따라 산비탈에 있는데 갈림길마다 청동판으로 된 멋진 안내판이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임란 이전(16세기)에 지었다 하여 보물로 지정된 3채의 한옥(무첨당 제411호, 관가정 제442호, 향단 제412호)과 서백당(書百堂, 15세기 창건)이다.
나는 그중 이 마을에서 가장 볼거리라는 서백당을 향한다.
서백당(書百堂)은 경주 손씨 종택(宗宅)으로 이 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손소가 지은 것이다. 그 사랑채 현판의 이름을 따서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簷)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고택(古宅)이기 때문이다.

-이 집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소가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상속자가 되어 25세에 지었다는 유서 깊은 집이다.
지관(地官)이 이곳을 ‘三賢先生之地’(삼현 선생 지지)라 했다. 이 집 터에서 3명의 현인(賢人)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 예언대로 손소의 아들 우재 손중돈(도승지를 3번이나 역임, 문묘배향)과 외손자 희재 이언적(東國18賢, 문묘배향)이 사랑방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린 ‘書百堂’(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 ‘忍’(인) 자 백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양동마을은 낙안읍성마을과 달리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라서 관광객을 위해 집을 개방하지 않는지 내가 갔을 때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서 영남지방의 특색이라는 '' 자형의 본체와 전후로 나란하다는 사랑채는 물론 사랑채 뒤에 있다는 사당도, 마당에 있다는 500년 묵은 향나무도 못 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관가정(보물 제442호)을 거쳐 가는 하산길이었다. 
觀嫁亭(관가정)은 ‘곡식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널찍한 누마루에서 들판의 자라는 벼를 바라보는 기쁨을 보는 정자란 말이다.
관가정의 마당의 향나무도 역사를 말하고 있는가. 수백 년 나이를 짐작하게 하는 낙낙장향목(落落長香木)이었다.
양동마을을 둘러보고 우리는 경주를 향한다. 오늘 저녁은 안압지의 야경을 구경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