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노동당사, 연천 급수탑, 재인폭포/DMZ 탐방(3)

ilman 2017. 7. 24. 21:06

  DMZ  탐방(3)/ 노동당사, 연천 급수탑, 재인폭포

 

*. 노동당사(勞動黨舍) 

 

  옛날에는 그냥 버스 타고 지나치기만 하던 그래서 꼭 한 번 와보고 싶던 勞動黨舍(등록문화재 제22호,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를 드디어 찾아왔다.
이 노동 당사는 수복(收復)되기 전 공산당 치하 시절에 주민을 강제 동원하고 모금해서 지은 러시아식 건물이다.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로 연 건평 580평 건물로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지만 2,  3층은 허물어져서 골조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북한이 공산독재 정권 하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여 6.25 전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악명 높던 곳이다. 8·15 광복 후부터 6.25까지 공산 치하에서 반공 활동을 하던 수많은 양민들이 무자비한 학살을 당한 현주소였기 때문이다. 
그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 줄 등이 발견되었다 하니, 몇 년 전 다녀온 독일인이 유태인을 학살한 폴란드의  아우스 비치가 생각나지만 설마 우리 동족끼리 그렇게는 하였겠는가.

*. 도쿄 저수지의 철새 탐조 

  우리들의 저녁은 양지리의 환상적인 대득봉에서 식도락을 즐기고,  저녁에는 양지리 마을 유지들이 마련한 조촐한 간담회를 가졌다.

철원발전을 위한 홍보 모임이었다.

1박 2일이었지만 분명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라고 우리는 호기 있게 룸메이트와 하룻밤의 만리장성을 쌓는데 열심하였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우리는  양지리 마을 인근에 위치한 철원 8경 중 6 경이라는 토교저수지로 철새 탐조(探鳥)를 왔다.
철원평야의 농업용수를 위하여 양지리 마을 일원의 농경지에 관수(灌水)를 담당하고 있는 철원의 젖줄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일명 전천후보(全天候洑)로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철원 제2땅굴 진입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은 물론 낚시도 금하는 곳이어서 겨울철에게는 안심이 되는 월동 먹이와  잠자리가 되기도 하는 철새도래지다. 
겨울철 새벽 6~7시경이 되면 일제히 하늘로 비상하는 쇠기러기떼의 군무 광경으로 인하여 사진사들은 물론 탐조(探鳥)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곳이라 하여 잠도 거르고 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새들은 계속 주무시며 떼 지어 날 기색도  보이지 않아서 일정상 하릴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어제 해설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평야가 적은 북한 땅에 38선 이북에는 철원 평야만 한 곡창지대가 없어서 이 철원평야를 6.25 때 우리에게 빼앗긴 김일성이 3일 동안 울다가 그 분풀이로 이 철원평야에 물을 대주던 봉래호(蓬來湖)의 물길을 끊어 황해도 방면으로 돌여 놓고 말았다 한다. 그래서 철원 주민들이 한동안 고생하다가 우리 정부가 만든 9개 저수지 중에서도 가장 큰 저수지의 하나로 만든 것이  토교 저수지라 한다.

*. 연천역(漣川驛)의 급수탑(汲水塔) 
나는 연천(漣川)에 처음 왔다.
전곡(全谷)은 왔어도 고대산(高臺山 832m)에도 산행을 하였지만 그곳이 연천군(漣川郡)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 연천의 북쪽 경계가 되는 지점이 비극의 군사분계선이고 남방한계선(南方限界線)인데;도 말이다.
漣川(연천)의 '漣'(연) 자가 물놀이 연 자인 것을 보면 연천은 강의 경치가 그중 아름다운 고장이란 말 같다.

그 연천군 군내를 동서로 흐르는 강이  임진강(臨津江)이요 그 아래가 한탄강(漢灘江)인데 그 한탄강 한가운데에 삼 형제 바위(三兄弟岩)가 있다.

 -삼 형제가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막내 동생이 물살에 휩쓸려  떠 내려가고 있었다. 이를 구하려 큰형이 뛰어들었다가 동생과 함께 떠내려 가게 되자, 둘째까지 뛰어들었다가 이 우애(友愛) 깊은 삼 형제는 모두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한순간에 자식 셋을 잃은 어머니는 날마다 강가에 나와 울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전에 없던 큰 바위 세 개가 강 한가운데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자식들을 보는 것 같이 기뻐하며 자식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강가 삼 형제 바위를 찾았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를 '삼 형제바위'(三兄弟-)라고 하였다.  

 연천역 구내에 있는 급수탑(給水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45호)은 경원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급수탑이었다. 여기에 남아 있는 급수탑은 상자형과 원통형 2기가 있다.
 증기기관차(蒸氣機關車)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기 전에 있었던 기관차로 하얀 연기를 뿜으며 '백-- 칙칙 폭포 칙칙 폭포'하며 달리던 기차다.
나는 지금 연천에 와서 신기한 듯이 급수탑을 보고 있지만 알고 보니 연산역, 정읍역, 도계역, 안동역 등 전국에 13개 이상이나 더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쳤을 뿐이다.
그래서 어느 옛 조상이 말했다지 않던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고 그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니라.

*. 재인폭포(才人瀑布)의 전설  

 재인폭포는 연천(漣川)의 7경 중 하나의 폭포로 현무암의 주상절리와 어울린   8.5m의 높이의 폭포다. 주상절리(柱狀節理)란 금강산의 총석정(叢石亭)이나 제주도에 있는 것처럼 기둥모양으로 된 바위의 결을 말한다.

모든 폭포는 산을 올라가야만 만날 수 있는 폭포인데 재인폭포는 평지를 가다가 굽어보는 폭포다. 이 일대가 철원평야처럼 화산재로 덮여 형성된 데다가 한탄강이 오랜 세월을 두고 현무암(玄武岩)이 물에 깎여 협곡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여름 큰비에는 강화유리로 바닥을 깐 전망대 밑까지 물이 찬다고 한다.  폭포 위에는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龍沼)가 있어 경치를  돕는다는데 그 상류지역은 민간인 출입 급지 지역인 모양이다. 

그래서 재인폭포는 굽어보는 폭포요,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 층계 따라 내려가서는 우러러볼 수 있기도 한 폭포다.

그 아래에 연천댐을 막고 있었는데 댐이 완성되어도 재인폭포는 건재한다니 다행이다.

그 재인폭포에는 절개를 지키다 자결한 한국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설로 전하여 온다.

가마골 입구에 있는 18.5m 높이의 이 폭포는 고을 원의 탐욕으로 인한 재인(才人)의 죽음과 그 아내의 강한 정절이 얽힌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문헌에는 전설과는 상반된 기록으로도 전해온다. 다음은 재인폭포 안내판에서 본 전설이다.


-옛날 어느 원님이 이 마을에 사는 재인(才人) 아내의 미색을 탐하여 이 폭포 절벽에서 재인으로 하여금 광대줄을 타게한 뒤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절개 굳은 재인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짓으로 수청을 들며 원님의 코를 물어 뜯고 자결하였는데, 그 뒤부터 이 마을을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코문리'라 불리게 되었으나, 차츰 어휘가 변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반면, 옛날에 한 재인(才人)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과 이 폭포 아래에서 즐겁게 놀게 되었으나, 자기 재주를 믿고 흑심을 품은 재인은 그 자리에서 장담하며 약속하기를, '이 절벽 양쪽에 외줄을 걸고 내가 능히 지나갈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 하자, 마을 사람은 재인의 재주를 믿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 아내를 내기에 걸게 되었다.잠시 후 재인은 벼랑 사이에 놓여 있는 외줄을 타기 시작하는데, 춤과 기교를 부리며 지나가는 모습이 평지를 걸어가듯 하자 이에 다급해진 마을 사람은, 재인이 줄을 반쯤 지났을 때 줄을 끊었고 재인은 수십 길 아래 구렁으로 떨어져 죽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이 폭포를 재인폭포로 부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상반되는 전설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중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코문리라 불리게 되었으나 차츰 어휘가 변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 는 전설 이 있다"는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우리나라 말은 임진왜란 이후에 경음화, 격음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평음(平音)인 'ㄱ, ㄷ, ㅂ' 이 경음(硬音)인 'ㄲ, ㄸ, ㅃ"으로 바뀌는 경음화(硬音化) 현상이나, 격음(激音) 인 "ㅋ, ㅌ, ㅍ"으로 바뀌는 격음화(激音化) 현상이 일어난다.지금의 '코'의 임란 이전의 옛말은 '고' 다. '팔(臂)'의 옛발음이 '발'이었듯이. (要, 고어사전 참고할 것)그러므로 "재인의 아내가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하여 고문리(古文里)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에서 '코'의 옛말은 '고'였기 때문이다."로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하는 말이다. 뒤 이야기에 '흑심을 품은 재인은'이란 말도 앞뒤 말과 호응에 어긋나 있는 말이다. 하나 더 고칠 것이 있다."재인폭로 안내판"과 "연천군 홈페이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이다.  "문헌에는 전설과는 상반된 기록으로도 전해 내려온다."라는 기록이 어색하다. 왜냐 하면  그 두 이야기가 상반되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재인폭포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인가를 생각에서다. '상반'이란 말은 위 문장에 걸맞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전자는 "아내의 정절"로 한국 여성의 지조를 기리고 있는 전설이요, 다음 하나는 "자기 아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비겁하게 약속을 어기고 자행하는 살인 사건으로 미풍양속에 해(害)가 되는 이야기다. 아무리 문헌에 나온 이야기라 하더라도 자기 고장의 소개로 적당하지 않은 것은 생략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전자의 이야기를 국문학에서는 민간어원설이라 한다.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이란 낱말의 유래를 밝힘에 있어서 언어학적 방법이나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음(音)이 비슷하거나 자기가 잘 알고 있는 말 따위와 결부 시켜서 해석하는 어원설을 말한다. 
필자가 전국을 다니며 오랫동안 전설을 찾다 보니 거의 절반 이상이 민간어원설이었다. 재인폭포 전설도 전반부 이야기 소개로 끝맺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 참고:

옛발음이 '발'(표기는 'ㅂ+. +ㄹ')이라 쓴 것은 인터넷에서 '아래 아'의 활자를 지원하지 않아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