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기

두물머리 세미원(洗美苑) 이야기

ilman 2017. 7. 22. 00:19

두물머리 세미원(洗美苑) 이야기

 

우리나라 전국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유람하다 보면 방방곡곡 어디나 예보던 산하(山河)가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지방자치단체들이 정성을 다해 다투어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Korea를 찾아온 세계 관광객들의 볼거리가 무궁무진해진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에 2004년 5월부터 현재까지 군(郡)이 가꾸어 놓은 세미원(洗美苑)도 그랬다. 

 10 여년 전만 해도 이 일대는 한강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오물로 가득하던 곳이었는데 이를 경기도가 103억. 양평군이 9억 총 112억을 들여 7년만에 '천국의 정원'같이 가꾸어 놓은 것이 세미원(洗美苑)이다. 그 크기만도 6만 2천 평이나 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치는 두물머리에다 '기적의 정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양평군은 수도권 시민의 식수원(食水源)이기도 한 한강 정화를 위해서 수질과 토양 정화 능력이 탁월한 연꽃과 수련·창포 등을 심어 한강물을 끌어들여 6개의 연못을 통하여 물을 순환하여 들어오고 나가게 하여 이런 수생식물(水生植物)을 통하여 중금속과 부유물이 거의 제거되어 팔당댐으로 흘러 들어가게 함으로써 수질정화를 시키는 자연정화공원  세미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세미원(洗美苑)'이란 이름은 '觀水心(관수세심)하고, 觀花心(관화미심)하라'는 옛 성현의 말씀에 유래 말이라 한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라는 뜻이다. 

 양평(楊平)에는 부용산(芙蓉山, 365.9m)이 있다.
부용(芙蓉)이란 연꽃의 또 다른 명칭이다. 세미원을 '물과 꽃들이 어우러진 정원'이라고도 하는데 꽃 중에서도 부용[연꽃]이 이 세미원의 주종이 되는 꽃으로 한 것은 그만한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불교와 인연이 깊은 활짝 핀 부용(芙蓉) 꽃을 촬영하기 위해서 우리 영상(映像) KCCA 동인들이 세미정을 7월 27일을 Happy day 장소로 정한 것 같다.

나는 일산(一山)에서 3호선 전철을 타고 오다 대곡역(大谷驛)에서 중앙선(中央線)을 갈아타고 양수역(兩水驛)에서 내려 세미원에 왔다. 입장료는 4천원, 노약자나 학생 등은 2천 원으로 할인해 주고 있었다.

나는 제2의 매표소인 이름도 멋진 배다리를 통하여 '세미원(洗美苑)에 든다. 

 

배다리란 낡은 배 조각이나 널조각을 걸쳐 놓아 건너가게 한 다리로 효심이 깊은 정조대왕이 화성(華城)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장조]를 모신 융건능(隆健陵, 사적 206호)에 행차할 때 놓았던 열주 주교(列柱舟橋)를 형상화하여 2012년 개통하여 놓은 다리다.

 다리를 넘으니 세한정(歲寒庭)이 우릴 맞는다.

물론 세한정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대형 모형이 걸려 있다.

 

*. 세한도(歲寒圖)

 

한국 사람 중에 세한도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세한도(歲寒圖)는 서예의 대가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가 조선 헌종 10년(1844년)에 그린 국보 180호로 지정된 한국의 대표적인 문인화(文人畵)이기 때문이요,  이 작품 속에는 제자 이상적(李尙迪)과 사제 간에 얽힌 끈끈한 정이 흐르는 발문(跋文)이 있고 이에 얽힌 일화(逸話)가 전해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한도의 그림 자체만으로는 소박하기 그지 없는 작품이다.  한 채의 집과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어 겨울의 썰렁한 분위기가 겨울을 말하고 있는 묵화 작품이지만, 왼쪽에 한문으로 쓴 꼬리말이 이 작품을 그리게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어 세한도의 진가와 명성을 드높여 주고 있다.

헌종 10년(1844) 추사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역관(譯官)인 제자 이언적(李彦迪)이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제주까지 찾아와 준 제자에게 사제지정(師弟之情)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며 감사의 답례로 그려 준 작품이다

   이런 글을 사의라고 하는데 사의(寫意)란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거기에 담겨 있는 뜻이 드러나게 그리는 그림이다.   

세한도(歲寒圖)란 제목은  논어 자한편(論語 子罕篇)에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에서 따온 제목으로 추워진 연후에라야 소나무 잣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한도의 집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추사 자신을, 송백(松柏)은 제자 이언적의 고고한 의리를 상징한 것이다.

다음은 이  세한도가 오늘날 국립박물관의 소장되기까지의 일화다.

- 세한도를 아낌없이 내 준 일 학자 후지쓰카

 추사 김정희가 그린 불후의 명작 세한도(歲寒圖)는 1944년 서예가 손재영씨가 일본 학자 후지쓰카(1897~1948녀)에게서 되찾아 온 작품이다. 세한도는 후지쓰카가 정식으로 구입한 작품이었다. 손재형과 추사 연구 일인자인 후지쓰카는 서로 친한  사이였다. 손재형은 3,000엔을 들고 연합군 폭격이 속의 도쿄로 건너 갔다. 그때 후지쓰카가 말했다. "내 모든 소장품을 내놔도 이 세한도(歲寒圖)만은 안되오." 하고 그 아들 아키나오를 부르는 것이었다. "내가 죽거들랑 손재형 선생에게 세한도를 내드려라." 손재형이 간곡히 말했다. "훗날을 기약하지 마시라고-."
며칠 후 후지쓰카가 손재형을 불러 가 보니 세한도를 건내 주며 3,000엔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돈을 받고 세한도를 내 놓는다면 지하의 완당 선생이 나를 뭘로 치부하겠소?"

그후 62년 뒤인 2006년 아들 아키나오는 선친의 추사 관련 유물 2,200 여점을 가지고 와 대항민국 과천시에 기증했다. 그때도 아무 조건도 없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출처: 조선일보 기사에서

내가 보성고등학교에서 재직할 때 간송미술박물관에서 추사 김정희 님이 서화 작품에다가 찍던 낙관(落款) 25 개를 본 일이 있다. 그중 세한도에 찍던 도장도 있었다.

*. 애국심으로 가득한 세미원

세미원을 둘러보면 이 정원을 꾸민이들의 애국 애족심이 연못마다 가득함을 읽게 된다.
불이문(不二門)의 태극기에 쓰인 글이 그렇고, 징검다리 길을 '우리 내'라 한 것이나,  옹기들로 구성된 장독대나, 그 옹기 분수를 통하여 힘차게 뿜어 내고 있는 한강물 등이 그러하다.

그곳에 쓰인 글 몇 개를 소개한다.

 

 

   

불이문(不二門);  겨레여 우리에건 조국이 있다.

                           내 사랑 바칠 곳은 오직 여기뿐

                           심장의 더운 피가 식을 때까지

                           즐거이 이 江山을 노래 부르자.   -노산 이은상

 

 

 

                

  백두산과 한반도 연못

 

 

 

 

 

 

우리내와 징검다리

 

 

 

 
 

 

 

한창일 때가 아니었는데 금년 연꽃은 어떠려나 다가오는 모임 7월 27일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