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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태봉국 궁예, 월정리역, 도피안사/DMZ 전설 따라 탐방(2)

ilman 2017. 7. 24. 20:10

 DMZ   전설 따라 탐방(2)/ 철원, 태봉국 궁예, 월정리역, 도피안사

  제2땅굴 탐방을 마치고 철원 평야 전망대 전망대로 가니 모노레일(monorail)이 운치 있게 우리를 평화 전망대로 안내한다.

중부전선 최북단의 위치에 지은 이 철원평화전망대는 남으로 25만 평 규모의 동승저수지(강산저수지)가 있고, 북으로는 비무장지대와 북한의 평강고원과 선전마을 등을 육안이나 초정밀 망원경으로 굽어 살필 수 있는  지하 1층 지상3층의 건물이다.
  1층에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서린 6.25 영상물과 철원 전적 기념물(戰績記念物)을 전시하고 있고,  2층에는 300석 규모의 영상 관람실(映像觀覽室)과 야외 전망대도 있지만  2층 실내 지형축소 모형이 있어 분단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궁예(弓裔) 전설 

그러나 나는 그보다 DMZ로 인하여 남북으로 둘로 나누어진 궁예의 옛 태봉국이 특히 인상 깊었다.

궁예의 한이 어려 있다는 한탄강의 전설이나, 궁예가 904년  철원에  태봉국(泰封國)을 세우고  고구려의  후예임을 내세워 28년간 통치하다가 부하인 왕건에 쫓기어 명성산(鳴聲山923m)에서 피살될 무렵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새(鳥)도, 말(馬)도, 신하들도, 이 산도 따라 울었다고 하는 명성산(鳴聲山, 울음산) 전설 때문인 것 같다. 

그보다 고모부를 죽인 북한의 김정은의 모습이 궁예 말년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서인 것과도 같아서다.

궁예의 전설은 춘천 호반 흥국사의 의암 땜에도 그 흔적이 보인다. 

 -궁예가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재건하겠다고 세운 절이 속칭 큰절이라 부르는 흥국사(興國寺)여서 이 근처를 ‘대궐 터’라고 하였답니다.
‘작은 초원’, ‘큰 초원’은 당시 군마를 매어 두었던 곳이라 하여 ‘말골’이라 하고, 등선폭포 근처의 아랫마을은 군사들이 옷을 말리던 곳이라 하여 ‘의암(衣岩, 옷 바위)이라 한답니다.

의암호(衣岩湖)의 ‘의암’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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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고구려를 건국한 궁예(弓裔)의 성은 김 씨로 아버지는 신라 47대 헌안왕과 궁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음력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낳고 보니 아기는 이빨이 다 나 있었다. 
일관(日官)이 이를 나라에 불길한 것이라고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주청 했다. 왕명에 따라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 내시)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아래로 던져 버렸다. 누대 아래서 유모가 궁예를 받을 때 유모의 손가락이 궁예의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눈이 되었다. 궁예가 10여 세 되던 무렵 유모에게 자기 출생의 비밀을 듣고 몸을 피해 세달사(世達寺)에 출가하여 스스로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어느 날 재(齋)에 나갔더니 까마귀 한 마리가 그의 바리때(중의 밥그릇)에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가는 것을 보고 궁예는 왕권(王權)에 대한 야심을 품게 되었다. 

 

당시 신라는 진성여왕 무렵으로 흉년으로 세금을 높이 매기고 탐관오리와 도둑이 발호할 때였다.

궁예는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가 지금의 강원도 일대 전역을 장악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금상첨화로 송악(松嶽, 개성)의 왕건(王建) 부자의 투항을 계기로 드디어 철원을 도읍으로 하여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 세상인 태봉국(泰封國)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태봉(泰封)이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의미요, 봉(封)은 봉토, 곧 땅이라는 뜻이다. 대동방국(大東方國) 건설을 꿈꾸는 궁예왕의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태봉국 건설
이후에 궁예는 교만하여 지고  소위 관심법(觀心法)이라 하여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스스로를 미륵(彌勒)이라고 불렀다. 
그의 포악함을 왕후 강(康)씨가 간하자, 이를 간통으로 몰아서 쇠꼬챙이로 왕후의 음부(陰部)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그의 신하와 여러 장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이에
왕건을 모신 신하들의 반기에 궁예의 큰 뜻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각종 문헌에 의하면 궁예의 죽음은 전쟁에 패하여 산골짜기로 도망가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먹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하는가 하면,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자살바위에서 자결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비극의 왕이기도 하였다.

 

*. 월정리역(月井里驛) 이야기

경원선은 1914년 8월 일인(日人)에 의해서 서울 원산 간 227km를 연결하는 산업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을 수송하는 간선 철도였다.

대합실은 사무 기구 하나 없는 텅빈 건물로 철로 옆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과 함께 6.25 동란 당시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 화물 열차가 허무한 골격만 드러낸 채 누워 있다. 

  평화전망대 동쪽의 '두루미관'을 지난 곳에 월정역(月井驛)이 있다.  
해방 무렵에는 경원선 철마가 잠시 쉬어 가던 곳으로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경원선 최북단 역이 월정리역이다. 
그 곳을 가는 도중에 월정리(月井里)  지명에 얽힌 처녀 동상이 우뚝 서 우리를 맞고 있다.  

 - 먼 옛날 이 고장에 이름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와 이를 봉양하는 딸이 살고 있었다. 그 딸은 아버지의 병환을 낳게 해달라고 달님께 밤마다 빌었다.

어느 날 달님께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달의 화신이 나타나 하는 말이었다.
 “너의 정성이 지극하여 이르노니 네 집 옆 바위에 가보면 물이 고여 있을 것이다. 그 물을 달이 지기 전에 너의 손으로 아버지가 천 모금 마시도록 길어다가 드리면 아버지의 병환이 나을 것이다.” 하는 것이었다. 
처녀는 허둥지둥 꿈에 일러 준 곳을 찾아가서 물을 길어다 아버님 입에 다 넣기를 기백 번하는데 달은 벌써 서편으로 기우는 것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딸은 바위에 부딛쳐서 피가 흘러내려도 계속하여 드디어 천 번째 물 긷기를 마치자 서편의 달은 졌고 아버지의 병환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러나 그 딸은 너무 지쳐서 영영 회생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물이 고였던 자리를 달의 우물[月井]이라 불렀다. 마을 이름을 월정리(月井里)라 부르게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 월정역 내에는 인경(人定)이 있다. 그 인경에 양각해 놓은 비명은 무심히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전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간절한 메시지가 발길을 머물게 한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여 주서서~
                          -성 크란지스코

                                                                                                  
 *. 도피안사(到彼岸寺) 전설
 

도피안사는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관우리(觀雨里) 화개산(花開山) 기슭에 있는 신라 경문왕 5( 865)년에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는 비보사찰이다. 비보사찰(裨補寺刹)이란 이름난 산천(山川)에 절을 세우면 국운(國運)을 돕는다는 불교신앙에서 생긴 말이다.

 -당시 도선 국사(道詵國師)는 철제 비로자나불 좌상(鐵造毘盧蔗那佛坐像)을 철원읍  율리리에 있는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불상을 암소 등에 싣고   제자 향도(香徒, 상여꾼) 1,000명을 거느리고 고갯마루(지금의 암소 고개)에 이르러 쉬다가 다시 떠나려 하였더니 불상이 없어져 버렸다. 
도선 대사와 제자들은 사방을 찾아 헤매다 보니 현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부처님 뜻이라 생각한 도선국사는 이곳에 암자(庵子)를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니 그곳이 바로 도피안사(到彼岸寺)였다.
 
  다음은 이 절의 당우가 불타고 재건되다가 다시 6.25 동란에 불탄 절을 1959년 제15 사단장 이명재(李明載) 소장이 꿈의 계시를 받고 중건할 때의 이야기다.

 

-전방 시찰을 나가던 중  갑자기 갈증을 느낀 장군이 민가에 들렸더니 그 집 안 주인이 어젯밤 꿈속에서 본  보살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꿈에서 본 절을 생각하고  "혹시나 근처에 여하 여차한 절이 있는가?"라고 물어 그 대답을 듣고 그 절을 찾아서 4일 동안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절을 지을 때. 그동안 사라졌던 철제 비로자나 좌불이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불상이 발견된 자리에 삼각 돌을 그 표시로 세워 두었다 하니 도피안사에 가거든 이를 확인할 일이다.

  이때 지은 대웅전은 안양사(安養寺)의 칠성각(七聖閣)을 그대로 이건(移建)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 그런가. 내가 도피안사를 찾았을 때는 새 대웅전 건축이 한창이었다.  그 후 부임한 사단장 정명환 준장도 독실한  불신도(佛信徒)였다. 도피안사에서 100일 기도를 드리고 법당 문을 막 나오다가 제2땅굴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는 필시 이 절  비로자나불 좌상의 가호(加護) 때문이라고 생각한 정 준장은 1973년 11월 14일 법당 앞 좌우에 석등(石燈)을 세우고 이름을 '필승등(必勝燈)'이라 명명하였다.  

'도피안(到彼岸)'에서 '到(도)'란 이르렀다는 뜻이요, '彼岸(피안)'이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사바세계를 떠난 열반상락(涅槃常樂)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니, 도피안사(到彼岸寺)란 한 마디로 '극락세계에 이르는 절'이란 뜻이다.

 도피안사가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 절이 민통선 북방에 있어서 그동안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군승(軍僧)인 군법사(軍法師)가 관리하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민간 주지에게 넘겨 주어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절이 있는 화개산(花開山)은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국으로 산세가 연약(軟弱)한 모습이다.

그래서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山勢)의 약점을 보완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