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사의 아침 예불
“스님 저는 '도립공원 산행' 책자를 내기 위해 조계산 장군봉(將軍峰)을 넘어온 사람입니다. 오늘 밤 송광사에서 일박을 할 수 있을까요? ”
송광사 스님께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하였더니 쾌히 허락하고 담당 스님께 안내하면서 공양은 하였는지부터 걱정해 준다.
조계산 장군봉을 넘으며 '보리밥집'에서 먹은 밥이 오늘의 나의 점심겸 저녁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구례 화엄사(華嚴寺), 월정사의 상원사(上元寺), 무등산 규봉암(圭峰庵)에 이어 송광사(松廣寺)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마음 속에 소중하게 새기게 되었다.
숙소 ‘지혜실’에다 여장을 풀고 함께 유하기로 한 곳에서 만난 청년은 승가사 스님들의 다비식(茶毘式)에 쓰일 납골 자기(瓷器)를 미리 만들기 위해 일하러 온 45세의 총각이었다. 그의 안내로 먼저 욕탕에 가서 샤워를 했다.
스님의 마음처럼 따뜻한 방에 누우니 잠이 스르르 엄습해 온다. 절에서는 9시가 되면 소등해야 하는 모양이다.
은은한 목탁소리에 잠을 깨니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 20분 예불 참여를 알리기 위해서 치는 목탁 소리였다. 부지런히 옷을 입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기 위해서 대웅전을 찾았다.
송광사 대웅보전에는 삼세불(三世佛)을 모셨다.
왼쪽으로부터 석가모니의 미래를 예언하였다는 연등불(練燈佛, 과거불),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현세불), 미륵불(彌勒佛, 미래불) 그리고 그 세 부처를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네 분의 협시보살이 모시고 서 있다.
예불에 참가한 스님들은 60여 명에, 불자가 10 여 명인데, 그 중 한 여성 불자가 ‘松廣寺讀誦要輯’(송광사독송요집)과 방석을 친절히 가져다준다. 그분 보기에도 내가 불자가 아닌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불자(佛者)가 아닌 내가 먼 고장 송광사(松廣寺)에 와서 피곤을 무릅쓰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은 산사(山寺)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불심(佛心)에 한껏 젖어 보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한국 3대사찰의 하나인 송광사의 불상(佛像)과 그 내부를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송광사 법당(法堂)에 앉아 ‘지옥의 중생을 위해 울리는 범종(梵鐘) 소리. 지상의 축생(畜生)을 향한 북소리(弘鼓音)와, 하늘의 날짐승을 향한 운판(雲版)과 수중의 어류를 위로하는 목어(木魚) 등의 사물(四物)의 범종루(梵鐘樓)의 불음(佛音)’을 들으면서 나도 명상에 잠겨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예불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해야 하는 건데 무릎을 꿇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저께 새벽에는 여수 돌산의 향일암(向日庵)에서 일출을 보고 금오산(金鰲山)에 올랐었고, 어제는 선암사를 둘러보고 조계산(曹溪山)을 종주하였으니 어찌 노독이 풀렸겠는가.
그래서 절을 하지 않을 때는 부처님께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는 대신 양반다리 하고 편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 소중한 경험인 아침예불의 전 과정은 녹음할 수가 있었지만, '가능하다면 아침 예불' 사진을 한 장만이라도 찍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런 마음을 부처님께서 헤아리셨는지 모든 스님이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한다. 위 사진은 '이때다! '하고 찍은 ilman의 회심의 역작이다.
*.산사(山寺)의 아침
날이 밝으니 아침공양을 하는데 공양간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바라보아도 예사롭지가 않다.
지금까지 나의 식사는 아내 고마운 줄로만 여기고 먹던 밥이었는데 이제부터 더 깊이 생각하며 들어야겠다.
스님들도 공양이 끝나셨는가. 모든 스님이 대비를 들고 온 마당을 쓸고 있다. 그 넓은 산사의 곳곳이 단장한 여인의 머리 같이 곱고 깨끗하고 신선하다.
산사의 아침이라서인가. 뽀얀 안개가 절의 각 전각을 휩싸 감돌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황홀한 작업인가.
*. 송광사의 전설
“스님 저는 '도립공원 산행' 책자를 내기 위해 조계산 장군봉(將軍峰)을 넘어온 사람입니다. 오늘 밤 송광사에서 일박을 할 수 있을까요? ”
송광사 스님께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하였더니 쾌히 허락하고 담당 스님께 안내하면서 공양은 하였는지부터 걱정해 준다.
조계산 장군봉을 넘으며 '보리밥집'에서 먹은 밥이 오늘의 나의 점심겸 저녁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구례 화엄사(華嚴寺), 월정사의 상원사(上元寺), 무등산 규봉암(圭峰庵)에 이어 송광사(松廣寺)에서의 꿈같은 하룻밤을 마음 속에 소중하게 새기게 되었다.
숙소 ‘지혜실’에다 여장을 풀고 함께 유하기로 한 곳에서 만난 청년은 승가사 스님들의 다비식(茶毘式)에 쓰일 납골 자기(瓷器)를 미리 만들기 위해 일하러 온 45세의 총각이었다. 그의 안내로 먼저 욕탕에 가서 샤워를 했다.
스님의 마음처럼 따뜻한 방에 누우니 잠이 스르르 엄습해 온다. 절에서는 9시가 되면 소등해야 하는 모양이다.
은은한 목탁소리에 잠을 깨니 새벽 3시였다. 새벽 3시 20분 예불 참여를 알리기 위해서 치는 목탁 소리였다. 부지런히 옷을 입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기 위해서 대웅전을 찾았다.
송광사 대웅보전에는 삼세불(三世佛)을 모셨다.
왼쪽으로부터 석가모니의 미래를 예언하였다는 연등불(練燈佛, 과거불),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현세불), 미륵불(彌勒佛, 미래불) 그리고 그 세 부처를 좌우로 지장보살(地藏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네 분의 협시보살이 모시고 서 있다.
예불에 참가한 스님들은 60여 명에, 불자가 10 여 명인데, 그 중 한 여성 불자가 ‘松廣寺讀誦要輯’(송광사독송요집)과 방석을 친절히 가져다준다. 그분 보기에도 내가 불자가 아닌 것을 아는 것 같았다.
불자(佛者)가 아닌 내가 먼 고장 송광사(松廣寺)에 와서 피곤을 무릅쓰고 아침예불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은 산사(山寺)의 고즈넉한 분위기의 불심(佛心)에 한껏 젖어 보고 싶어서였다.
게다가 한국 3대사찰의 하나인 송광사의 불상(佛像)과 그 내부를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송광사 법당(法堂)에 앉아 ‘지옥의 중생을 위해 울리는 범종(梵鐘) 소리. 지상의 축생(畜生)을 향한 북소리(弘鼓音)와, 하늘의 날짐승을 향한 운판(雲版)과 수중의 어류를 위로하는 목어(木魚) 등의 사물(四物)의 범종루(梵鐘樓)의 불음(佛音)’을 들으면서 나도 명상에 잠겨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가장 괴로웠던 것은 예불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일어나서 절을 해야 하는 건데 무릎을 꿇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저께 새벽에는 여수 돌산의 향일암(向日庵)에서 일출을 보고 금오산(金鰲山)에 올랐었고, 어제는 선암사를 둘러보고 조계산(曹溪山)을 종주하였으니 어찌 노독이 풀렸겠는가.
그래서 절을 하지 않을 때는 부처님께 용서를 빌며 무릎을 꿇는 대신 양반다리 하고 편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 소중한 경험인 아침예불의 전 과정은 녹음할 수가 있었지만, '가능하다면 아침 예불' 사진을 한 장만이라도 찍어 볼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런 마음을 부처님께서 헤아리셨는지 모든 스님이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게 한다. 위 사진은 '이때다! '하고 찍은 ilman의 회심의 역작이다.
*.산사(山寺)의 아침
날이 밝으니 아침공양을 하는데 공양간에 쓰인 글을 보고 또 바라보아도 예사롭지가 않다.
지금까지 나의 식사는 아내 고마운 줄로만 여기고 먹던 밥이었는데 이제부터 더 깊이 생각하며 들어야겠다.
스님들도 공양이 끝나셨는가. 모든 스님이 대비를 들고 온 마당을 쓸고 있다. 그 넓은 산사의 곳곳이 단장한 여인의 머리 같이 곱고 깨끗하고 신선하다.
산사의 아침이라서인가. 뽀얀 안개가 절의 각 전각을 휩싸 감돌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기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황홀한 작업인가.
*. 송광사의 전설
송광사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 조계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이다.
신라 말 혜린선사(惠璘禪師)가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가 수선사(修禪寺), 송광사(松廣寺)로 개명한 사찰이다.
신라 말 혜린선사(惠璘禪師)가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가 수선사(修禪寺), 송광사(松廣寺)로 개명한 사찰이다.
송광사는 조계산의 옛 이름 송광산에서 따온 것인데 그 '송광'이란 말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하여 온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수선사 절터를 옮기실 때 모후산(母后山, 918.8m)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國師殿)에 앉아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지금도 그 곳 이름을 솔개가 떨어진 곳이라 하여 '치락대'라 한다.
솔개의 전남 사투리가 솔갱이여서 '솔갱이 절'이 '송광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송광(松廣)'이란 이름은 이 산에 솔나무가 많아서 이 산을 '솔메'라 불렀는데 거기서 '송광사'란 이름이 생겼다.
- 지눌 이후 큰 스님 18명의 큰스님이 나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 해서 송광사라 하였다.
'松' 자를 파자해보면 '十 + 八+ 公' 이니 18(木) 분의 큰 스님(公)이 불법을 널리(廣) 펼 뜻이라는 것이다. -이상 '송광사(대?출판사 29쪽)
어제 다녀온 선암사의 최고 명승지가 승선대(昇仙橋)였다면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홍골에서 흐르던 물을 거너는 홍교(弘橋) 다리와 그 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우화각(羽化閣)이다.
거기에 멋을 더해 주는 것은 두 석주(石柱)에 기둥을 얹고 있는 삼청각(三淸閣)과의 어울림이다.
그 홍교(弘橋, 무지개다리)를 넘으면 불교의 수호신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天王門)이 나타나고, 거기서 다시 종고루(鐘敲樓)를 지나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좌우에 승보전(僧寶殿)과 지장전(地藏殿)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송광사에는 대웅전 앞에는 탑이 없다.
*.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
세상 사람들이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은보화 등이겠지만 불가에서는 그 보물을 삼보(三寶)라 한다.
불보(佛寶)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가 그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바라는 꿈은 삼보(三寶)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니 삼보란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이다.
삼보사찰(三寶寺刹)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양산의 통도사(通道寺)가 불보사찰(佛寶寺刹)이요, 8만대장경을 모신 합천의 해인사(海印寺)가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순천의 송광사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렷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께서 수선사 절터를 옮기실 때 모후산(母后山, 918.8m)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國師殿)에 앉아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지금도 그 곳 이름을 솔개가 떨어진 곳이라 하여 '치락대'라 한다.
솔개의 전남 사투리가 솔갱이여서 '솔갱이 절'이 '송광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송광(松廣)'이란 이름은 이 산에 솔나무가 많아서 이 산을 '솔메'라 불렀는데 거기서 '송광사'란 이름이 생겼다.
- 지눌 이후 큰 스님 18명의 큰스님이 나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 해서 송광사라 하였다.
'松' 자를 파자해보면 '十 + 八+ 公' 이니 18(木) 분의 큰 스님(公)이 불법을 널리(廣) 펼 뜻이라는 것이다. -이상 '송광사(대?출판사 29쪽)
어제 다녀온 선암사의 최고 명승지가 승선대(昇仙橋)였다면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홍골에서 흐르던 물을 거너는 홍교(弘橋) 다리와 그 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우화각(羽化閣)이다.
거기에 멋을 더해 주는 것은 두 석주(石柱)에 기둥을 얹고 있는 삼청각(三淸閣)과의 어울림이다.
그 홍교(弘橋, 무지개다리)를 넘으면 불교의 수호신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天王門)이 나타나고, 거기서 다시 종고루(鐘敲樓)를 지나면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좌우에 승보전(僧寶殿)과 지장전(地藏殿)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송광사에는 대웅전 앞에는 탑이 없다.
*.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
세상 사람들이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은 금은보화 등이겠지만 불가에서는 그 보물을 삼보(三寶)라 한다.
불보(佛寶)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가 그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바라는 꿈은 삼보(三寶)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니 삼보란 귀의불(歸依佛), 귀의법(歸依法), 귀의승(歸依僧)이다.
삼보사찰(三寶寺刹)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양산의 통도사(通道寺)가 불보사찰(佛寶寺刹)이요, 8만대장경을 모신 합천의 해인사(海印寺)가 법보사찰(法寶寺刹), 그리고 순천의 송광사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렷다.
승보사찰인 송광사를 상징하는 승보전(僧寶殿)에는 부처님께서 당시에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여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 등 10대 제자와 16나한을 비롯한 1,250명의 스님을 모셨다.
이 승보전은 한국전쟁(6.25) 당시 대웅전으로 사용 되었던 전각이었는데,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전각이니 송광사 사찰 관람 시에는 특히 유념하고 볼 일이다.
그 건넌 편에 지장전(地臧殿)은 원래 명부전(冥府殿)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이 승보전은 한국전쟁(6.25) 당시 대웅전으로 사용 되었던 전각이었는데, 현재의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긴 전각이니 송광사 사찰 관람 시에는 특히 유념하고 볼 일이다.
그 건넌 편에 지장전(地臧殿)은 원래 명부전(冥府殿)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地藏普薩)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성불도 하지 않겠다는 커다란 원을 세운 보살로 삭발한 모습이다. 그 좌우에 두 보살과 함께 시왕(十王)을 모셨다.
시왕(十王)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 지은 죄의 경중을 가려 준다는 저승에 있다는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분의 대왕을 가리킨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후에는 100일, 1년(小祥), 2년(大祥) 때까지 차례로 각 왕에게 가서 생전에 지은 선악업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 송광사 3가지 명물
'송광사의 3 가지 명물(名物)에는 성보박물관의 능견난사(能見難思), 천자암의 쌍향수(雙香樹), 대웅전 옆의 비사리구시가 있다.
가던 날이 장날이란 말처럼 월요일이라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 쉬는 날이라 '능견난사'는 볼 수가 없었다.
능견난사(能見難思)란 잘 보고도 보통의 이치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르는 일이라지만, 불교에서는 송광사에 있는 쇠로 만든 그릇을 뜻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원(元)나라에서 보조국사 지눌(知訥))에게 내렸다는 대웅전에서 불상에 올리는 제구(祭具)를 말한다.
쌍향수(雙香樹)는 앞서 '조계산 산행'에서 말한 대로 천자암 암자 뒤쪽에 있는 두 그루 나무가 엿가락처럼 꼬인 모양새의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 고목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와 그의 제자 담당국사(湛堂國師, 왕자)가 중국에서 돌아 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로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바사리구시'는 큰 싸리 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 밥통을 말한다.
비사리는 싸리나무의 껍질을 말하는 것이고, 구시란 구유의 전남, 경북, 제주도의 사투리다.
'1972년 전라도 남원 동동면 세전골에 있던 커다란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졌다. 이를 가공하여 만든 것이 비사리구시로 조선 영조 이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하던 밥통으로 쓰이던 일종의 구유다. 여기에는 약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었다 한다.
그 비사리 크기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재미난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승주 땅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내외, 손자들과 함께 화목하게 사는 노파가 있었다.
할머니는 불심이 깊어 반나절 거리에 있는 송광사를 자주 찾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어 저승에 갔더니 염라대왕이 묻는 것이었다.
"송광사에 가본 적이 있느냐? 거기서 비사리구시를 보았느냐? 그 크기가 얼마나 되더냐?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 세상에 보내 다시 살게 하여 주겠다."
할머니는 송광사를 자주 갔던 일과 지눌대사의 기일에도 빠짐없이 갔지만 비사리구시의 크기는 잘 모르겠노라 했다.
이를 갸륵하게 생각한 염라대왕은 노파를 인간 세상에 다시 보내 주었다. 다시 살아난 노파는 아들과 함께 송광사에 가서 자로 재보다가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실로 폭과 길이와 높이를 재어서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은 노인들은 송광사에 와서 그 크기를 노파처럼 실로 재어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습이 생겼다 한다.
*. 보조대사 지눌 이야기
송광사의 세 가지 명물들도 모두 보광국사 지눌(知訥)과 관련된 물건들이었다.
그 유명한 보조국사 지눌의 영정이 국사전에 16명의 대사와 함께 모셔져 있는데 그 중 보조국사 영정 앞에는 촛대가 놓여 있다.
승보 사찰인 송광사 16분 대사 중에 그 제1세 대사가 바로 보조국사 지눌(知訥)이기 때문이다.
시왕(十王)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 지은 죄의 경중을 가려 준다는 저승에 있다는 염라대왕을 포함한 열 분의 대왕을 가리킨다.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후에는 100일, 1년(小祥), 2년(大祥) 때까지 차례로 각 왕에게 가서 생전에 지은 선악업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 송광사 3가지 명물
'송광사의 3 가지 명물(名物)에는 성보박물관의 능견난사(能見難思), 천자암의 쌍향수(雙香樹), 대웅전 옆의 비사리구시가 있다.
가던 날이 장날이란 말처럼 월요일이라서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이 쉬는 날이라 '능견난사'는 볼 수가 없었다.
능견난사(能見難思)란 잘 보고도 보통의 이치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르는 일이라지만, 불교에서는 송광사에 있는 쇠로 만든 그릇을 뜻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원(元)나라에서 보조국사 지눌(知訥))에게 내렸다는 대웅전에서 불상에 올리는 제구(祭具)를 말한다.
쌍향수(雙香樹)는 앞서 '조계산 산행'에서 말한 대로 천자암 암자 뒤쪽에 있는 두 그루 나무가 엿가락처럼 꼬인 모양새의 800년 묵었다는 향나무 고목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와 그의 제자 담당국사(湛堂國師, 왕자)가 중국에서 돌아 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로 이곳에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가 내리고 가지와 잎이 나서 자랐다고 한다.
'바사리구시'는 큰 싸리 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 밥통을 말한다.
비사리는 싸리나무의 껍질을 말하는 것이고, 구시란 구유의 전남, 경북, 제주도의 사투리다.
'1972년 전라도 남원 동동면 세전골에 있던 커다란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졌다. 이를 가공하여 만든 것이 비사리구시로 조선 영조 이후에 나라에서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하던 밥통으로 쓰이던 일종의 구유다. 여기에는 약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었다 한다.
그 비사리 크기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재미난 전설이 전하여 온다.
-옛날 승주 땅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내외, 손자들과 함께 화목하게 사는 노파가 있었다.
할머니는 불심이 깊어 반나절 거리에 있는 송광사를 자주 찾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다. 죽어 저승에 갔더니 염라대왕이 묻는 것이었다.
"송광사에 가본 적이 있느냐? 거기서 비사리구시를 보았느냐? 그 크기가 얼마나 되더냐? 그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 세상에 보내 다시 살게 하여 주겠다."
할머니는 송광사를 자주 갔던 일과 지눌대사의 기일에도 빠짐없이 갔지만 비사리구시의 크기는 잘 모르겠노라 했다.
이를 갸륵하게 생각한 염라대왕은 노파를 인간 세상에 다시 보내 주었다. 다시 살아난 노파는 아들과 함께 송광사에 가서 자로 재보다가 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실로 폭과 길이와 높이를 재어서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서 오래 살고 싶은 노인들은 송광사에 와서 그 크기를 노파처럼 실로 재어 빨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풍습이 생겼다 한다.
*. 보조대사 지눌 이야기
송광사의 세 가지 명물들도 모두 보광국사 지눌(知訥)과 관련된 물건들이었다.
그 유명한 보조국사 지눌의 영정이 국사전에 16명의 대사와 함께 모셔져 있는데 그 중 보조국사 영정 앞에는 촛대가 놓여 있다.
승보 사찰인 송광사 16분 대사 중에 그 제1세 대사가 바로 보조국사 지눌(知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도둑이 들어 16분 대사 중 13분의 영정을 도둑 맞은 모양이다.
송광사 건물 중 가장 뒤쪽에 있는 관음전 뒤에 층계가 있는데 그리로 오르면 고색창연한 보조국사 사리탑과 비가 있다. 그 비명이 '佛日普照國師甘露塔'(불일보조국사감로탑)이다.
지눌 스님은 고려 중기의 고승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로 속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시다.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그의 아버지 정광우는 '병만 낳게 하여 주신다면 자식을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후 병이 나았으므로 8세 때 승려가 되었다. 지눌이 25살 되던 고려 명종 때는 당시로는 큰 출세길인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스님은 평생 동안 당(唐)나라 선종(禪宗)의 6대 조인 육조 혜능(六祖慧能)을 사모한 나머지 송광산 길상사를 중창한 뒤 혜능 육조대사가 머물었던 조계 보림사(曺溪 寶林寺)의 조계(曺溪)를 따서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산 이름을 고쳤다.
말년에 송광사에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선서(善逝)하는 날 큰 북을 쳐 대중을 법당에 모아놓고 대중들과 불법을 논하다가 한 제자가 " 스님의 병환이 저 유마 거사의 병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묻자 들고 있는 육환장으로 법상을 두어번 치고 "일체의 모든 진리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법상에 앉은 체로 입적하였으니 그 때가 1197년 3월 27(음)일이었다.
현대 송광사를 빛낸 큰 스님 효봉(曉峰) 스님은 지눌 스님을 흠모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스스로 호를 '지눌을 배우고 싶다 ' 하여 '學訥(학눌)'이라고 할 정도로 지눌(知訥)은 한국 최고의 스님인 것이다.'
*. 송광사 '심우도(尋牛圖)'
송광사 건물 중 가장 뒤쪽에 있는 관음전 뒤에 층계가 있는데 그리로 오르면 고색창연한 보조국사 사리탑과 비가 있다. 그 비명이 '佛日普照國師甘露塔'(불일보조국사감로탑)이다.
지눌 스님은 고려 중기의 고승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로 속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시다.
스님은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그의 아버지 정광우는 '병만 낳게 하여 주신다면 자식을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하였다.
그후 병이 나았으므로 8세 때 승려가 되었다. 지눌이 25살 되던 고려 명종 때는 당시로는 큰 출세길인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스님은 평생 동안 당(唐)나라 선종(禪宗)의 6대 조인 육조 혜능(六祖慧能)을 사모한 나머지 송광산 길상사를 중창한 뒤 혜능 육조대사가 머물었던 조계 보림사(曺溪 寶林寺)의 조계(曺溪)를 따서 송광산을 조계산으로 산 이름을 고쳤다.
말년에 송광사에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선서(善逝)하는 날 큰 북을 쳐 대중을 법당에 모아놓고 대중들과 불법을 논하다가 한 제자가 " 스님의 병환이 저 유마 거사의 병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묻자 들고 있는 육환장으로 법상을 두어번 치고 "일체의 모든 진리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기고 법상에 앉은 체로 입적하였으니 그 때가 1197년 3월 27(음)일이었다.
현대 송광사를 빛낸 큰 스님 효봉(曉峰) 스님은 지눌 스님을 흠모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스스로 호를 '지눌을 배우고 싶다 ' 하여 '學訥(학눌)'이라고 할 정도로 지눌(知訥)은 한국 최고의 스님인 것이다.'
*. 송광사 '심우도(尋牛圖)'
나의 송광사에서의 제일 큰 기쁨 중이 하나는 송광사 대웅보전을 빙둘러 벽을 장식하고 있는 '송광사 심우도(尋牛圖)' 벽화를 카메라에 담아 온 것이다.
심우도(尋牛圖)란 찾을 '尋'(심), 소 '牛'(우)란 뜻처럼 불교 선종(禪宗)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선화(禪畵)로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송광사 심우도에는 그림 밑에 곽암사원(郭庵師遠) 스님이 쓴 한시와 그 해설이 일품이다.
*. 귀가 길
송광사를 뒤로 하고 귀가 길에 낙안읍성을 둘러 보고 순천만의 갈대를 보러 가는 길에 버스 기사 아저씨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잘 가는 단골 술집 자랑에 귀가 번쩍 뜨인다.
막걸리 한 병 주문에 족발을 푸짐하게 서비스한다는 술집이 있다 해서 순천만 가는 마음을 접고 그 술집 앞에서 내렸다.
거기서 만난 어부와 마지막 술 한잔을 기울이며 나의 2박 3일의 여정을 접기로 했다.
낯선 고장에 와서 거기가 고향인 사람과 정담을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정성껏 안주를 준비해 주는 그 포도식당 여 사장이 고마워 시 한 수를 주기로 했다.
여행이란 이사(移徙).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옮아 다니는
나는 한 마리 나그네 새.
하루가 끝나면
다시 시작되는 이사(移徙).
그 길에서 만난 사람이
순천 송광사 갔던 길에 만난
포도식당 조덕심 여사장이었네.
-여행
심우도(尋牛圖)란 찾을 '尋'(심), 소 '牛'(우)란 뜻처럼 불교 선종(禪宗)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선화(禪畵)로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송광사 심우도에는 그림 밑에 곽암사원(郭庵師遠) 스님이 쓴 한시와 그 해설이 일품이다.
*. 귀가 길
송광사를 뒤로 하고 귀가 길에 낙안읍성을 둘러 보고 순천만의 갈대를 보러 가는 길에 버스 기사 아저씨와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잘 가는 단골 술집 자랑에 귀가 번쩍 뜨인다.
막걸리 한 병 주문에 족발을 푸짐하게 서비스한다는 술집이 있다 해서 순천만 가는 마음을 접고 그 술집 앞에서 내렸다.
거기서 만난 어부와 마지막 술 한잔을 기울이며 나의 2박 3일의 여정을 접기로 했다.
낯선 고장에 와서 거기가 고향인 사람과 정담을 나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정성껏 안주를 준비해 주는 그 포도식당 여 사장이 고마워 시 한 수를 주기로 했다.
여행이란 이사(移徙).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 옮아 다니는
나는 한 마리 나그네 새.
하루가 끝나면
다시 시작되는 이사(移徙).
그 길에서 만난 사람이
순천 송광사 갔던 길에 만난
포도식당 조덕심 여사장이었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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