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德山) 도립공원(2-1)/ 수덕사(修德寺)
오늘은 내 평생 처음으로 우리 가족 삼대(三代)가 함께 산행을 하는 날입니다. 우리 아들(성낙준)과 손자(성진모)와 함께 충남 덕산 도립공원에 온 것입니다.
덕산 도립공원(德山道立公園)은 두 지구로 나뉩니다. 가야산(伽倻山) 지구와 덕숭산(悳崇山) 지구입니다.
그중 우리는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德崇山)을 오르기 위해 고양시 일산(一山)에서 146km를 달려 3시간만에 수덕사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덕숭산은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20km에 있는 산으로 1973년에 도립공원(道立公園)으로 지정된 산입니다.
덕숭산 등반은 크게 3가지 코스가 있다지만 우리는 수덕사 절구경을 하고 그 경내를 통과하여 1080 돌계단 오르는 길로 가려합니다. 정상(頂上)에서는 원점회귀(原點回歸)를 하지 않고 둔리 1구 8 각정으로 빠질 계획입니다.
*. 수덕사 이야기
수덕사 입구에는 이응로(李應魯) 화백이 거처하였다는 구 수덕여관과 그의 예술 세계의 편모의 집과 암각화 등이 있지만 수덕사와 직접 크게 관계없는 것이라서 여기서는 생략하렵니다.
덕숭산은 도립공원이고 문화재 구역이라서 입장료를 받습니다. 성인인 아들은 3,000원, 어린이 손자는 초등학생이라서 1,000원을 내지만 저는 만 65세 이상이라서 무료입니다. 경로 우대이기도 하지만 죽을 날이 가까운 사람이라 무료인 것 같습니다.
매표소를 막 지나 우측 돌층계를 올랐더니 부도군이 있습니다. 수덕사에서 열반하신 스님들의 부도입니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탑으로 우리가 집을 아름답게 짓듯이 그 탑을 예술적으로 돌로 꾸며 놓은 탑이 부도입니다. 부도는 원래는 부처의 Buddha(붓다)라는 원음을 음차(音借) 한 것인데 이를 '스님의 묘탑(墓塔)'으로 쓰고 있는 것은 스님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는 마음에서 부도라고 했답니다.
이 부도 중에는 '원담(圓潭) 부도'가 가장 멋집니다. 원담(圓潭) 스님은 덕숭총림 3대 방장이셨습니다. 둥글 '원(圓)' 자를 시각적으로 'o'으로 표기 한 것이나 원형 돌을 상단에 얹은 것이 멋집니다. '방장(方丈)'은 주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절의 첫번째 문인 일주문(一柱門)을 지납니다.
네 기둥이 아닌 두 기둥의 문은 그 모양이 한자로 '一' 자 모양이라서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씻고 부처의 경지를 향하라는 뜻이랍니다.
그 일주문에 '德崇山 修德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다음은 수덕사와 덕숭산의 사찰 이름의 유래 대한 전설입니다. 수덕사 대웅전(大雄殿) 뒤에 있는 관음바위에 있는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백제 시대에 강건하였던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퇴락하여 대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서 공양주를 자청하는 것이었다. 이 여인이 절세미인인지라 '수덕 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자자하게 퍼지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게 되었다.
그중에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총각이 청혼을 하였다.
이에 수덕각시가 말하기를 '이 불사가 원만히 성취되면 청혼을 받들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청년은 가산을 기울여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하게 되었다. 대 공덕주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 각시에게 함께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 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후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붙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바위 속으로 사라져서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 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 모양의 버선 꽃이 지금까지 피고 지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修德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定慧寺)라 하였다고 한다. - 수덕사 주지 김법장
이 전설을 살펴 보면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蕙寺)의 지명 전설이지만, 이와 약간 다른 전설에서는 그 도령 이름이 덕숭(德崇)이고, 각시 이름이 수덕(修德)이어서 절 이름은 수덕사(修德寺)라 하였고 산 이름은 총각 이름을 따서 덕숭산(德崇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 수덕사의 역사
어느 절에나 일주문 근처에는 절에 대한 유래나 안내도가 있는 법이니 그냥 지나치면 후회하게 되는 곳이지요.
수덕사(修德寺) 창건에는 다른 설화도 있지만, 그중에 하나로, 이 절은 백제 29대 법왕 원년(599년)에 지명 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하고 백제가 망할 때까지 혜현(惠顯) 스님이 이 절에서 법화경을 강론하던 사찰로, 신라 때는 원효대사가, 고려 때는 나옹화상, 근세에는 경허(鏡虛)와 그의 제자 만공(滿空) 대사가 거(居)하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친 백제의 고찰이랍니다.
부도 군을 거쳐서 불교의 수호신인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모신 금강문(金剛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니 황하정루(黃河精樓)가 있습니다. 황하정루는 2층에서는 이 사찰의 여러 의식을 행하는 장소이고, 그 우측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 성보관(槿域聖寶館)이 있네요.
이 박물관에는 수덕사와 그 말사(末寺)에서 수집한 소장품을 각 분야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중 볼거리로는 이 수덕사에서 가장 중요한 경허선사
(鏡虛禪師)와 그의 제자 만공 대사(滿空大師) 등 고승의 유물들을 전시하여 놓은 것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저는 몰카로 몇 가지 자료를 얻어 가지고 황하정루의 누하 진입문(樓下進入門)을 거쳐서 드디어 대웅전 마당에 올랐습니다.
황하정루를 오르면 바로 앞에 있는 9.5m의 석탑이 금강보탑(金剛寶塔)으로 2,000년 7월 세웠다 합니다. 수덕사 중창불사를 하던 중 조인 정사(精舍)를 해체하는 과정에 옛탑의 좌대(座臺)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세운 탑이랍니다. 기단부에 문수, 보현, 관음보살과 부조 모서리에 사자상을 세웠답니다.
이 탑에는 덕승총림 방장이신 원담(圓潭)대선사께서 스리랑카(rilanka)를 예방하였을 때 스리랑카 종정 스님으로부터 증정 받은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를 본 탑에 봉안하여 2000년 7월에 세운 탑입니다.
대웅전 바로 아래 좌우 당우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寮舍)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입니다. 거기 이르기 전에 범종각(梵鐘閣)과 법고각(法鼓閣)이 따로 있었습니다.
수덕사 범종(梵鐘)은 높이 5.5m, 둘레 4.5m, 무개가 6,500 근의 대종으로 에밀레종 등 신라종들 참조하여 1973년에 조성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절에 가면 어느 절에나 있는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범종(梵鍾)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를 사물(四物)이라 하는데 상징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법고(法鼓)의 북소리는 축생들을, 운판(雲版)의 소리는 날짐승을, 목어(木魚)는 수중 생물을, 대종(大鐘)은 일체 살아 있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소리를 낸다고 하니까요.
*. 수덕사의 대웅전(大雄殿, 국보49 호)
수덕사 대웅전 건물은 고려 충렬왕 34년에 조성한 백제 양식의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연대가 확실히 알려진 오직 하나의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국보 49호입니다.
중국 사서(史書)인 '북사(北史)' 등에 "백제에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僧尼寺塔甚多)"라고 하며, 백제 사찰로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사찰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 중 수덕사만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이 대웅전에는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 문헌이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에 들어서면 마치 왕대밭에 들어선 듯 청신한 기운이 가득하다. 들보나 연목 어느 하나 주춤거림 없이 죽죽 벋어나 상쾌하게 서로를 가르고 나왔기 때문이다. 일체의 장식이 배제 되어 있는데도 극도의 장려(壯麗)한 센련미를 느낄 수 있으니 과연 무기교의 기교가 최상의 기교임을 실감하겠다.
불단에 모신 삼존불은 법당 크기에 비해 조금 왜소해 보이는데, 이는 1938년 무인에 만공 대선사가 전북 남원군 산동면 귀정사(歸政寺)에서 이안(移安)해 온 석가(釋迦), 약사(藥師) ,미타(彌陀) 삼여래상(三如來像)이기 때문이다.
-'명찰순례(민속학자 최상수) -'명찰순례(민속학자 최상수)
대웅전 오기 전 금강문 왼쪽에 있던 환희대 경내에 원통보전이 있던데 대웅전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대웅전(大雄殿)의 '雄(웅)' 자는 영웅 '雄' 자로 석가모니( 본명 싯다르타)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각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주불로 모셨을 때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통(圓通)'이란 관세음보살을 뜻하는 말로 이르지 않는 곳 없이 두루 통달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을 왼쪽에서 모시고 있는 보살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정성껏 외면 여러 가지 형태로 화신(化身)하여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하여 주는 보살이 관세음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천수관음(千手觀音) 또는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백의관음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돕는 보살입니다.
수덕사 대웅전 왼쪽 뒤로 가면 큰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초록색 관세음보살입상이 있는데 그 보살이 바로 앞서 말한 수덕각시로 나타나 절을 짓게 하여준 전설의 관세음보살입니다.
*. 김일엽(金一葉) 스님 이야기
이 원통보전은 하엽(荷葉 1898~1971)스님이 입적한 곳입니다.
제가 33살 때 우연히 수덕사에 갔다가 다비식(茶毘式)을 구경할 때만 해도 우리들은 수덕사를 이광수와 로멘스가 있었다는 김일엽(金一葉) 스님과 연관하여 수덕사를 기억하였고, 그래서 수덕사를 비구니(比丘尼)의 사찰로까지 오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일엽 스님이 불교에 귀의하여 받은 법명이 하엽(荷葉 )입니다.
하엽스님은 1898년 평남 용강의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김원주였구요.
1910년 한일합방 2년 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과 이화여자전문학교를 거쳐서 일본 닛산(日新)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활약하던 당시에는 조선 최고의 인텔리 신여성이었습니다.
필명 일엽(一葉)은 일본 유학 시절 문인으로 데뷔하였을 때 만난 춘원 이광수가 당시 일본의 최고 인기 여성작가 라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것이랍니다.
춘원과의 로멘스는 와전된 것이었구요. 2014년 신문을 보니 김일엽과 일인 오오타 세이지로(大田淸藏) 사이에서 난 아들인 화가며 스님인 일당 김태신(金泰伸)씨가 93살의 나이로 열반하였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일엽 스님은 2번 결혼하고 이혼한 시인이며 스님인 신여성이셨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신여성을 간행하고 동아일보, '불교' 기관지에 기자로 활동하다가 20대까지 다니던 교회를 버리고 31세에 금강산 표훈사에서 스님의 길을 가게 되었답니다.
대표작은 그의 자서전적 수필 ‘청춘을 불사르고’(1962)는 당시의 베스츠쎌러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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