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해남 두륜산(頭輪山) 대흥사

ilman 2017. 5. 2. 14:11
 

해남 두륜산(頭輪山)  대흥사


*. 해남 가는 길

 대흥사(大興寺) 행 버스를 타려면 전국 어디서나 해남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해남(海南)에서 12Km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대흥사는 터미널서 ‘해남~대흥사’행 군내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나는 일산(一山)에서 출발하여 대전 창녕성씨 종친회 모임에 가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홀로 구름 따라 물 따라 운수 행각(雲水行脚)으로 광주를 거쳐서 해남(海南)에 도착하니 오후 8시 경이다.
 서울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간다면, 해남행 직행 버스로는 5시간 30분 거리였다.
열차 편으로는 광주(光州)나 나주행(羅州行) 열차를 이용해야 한다.
-서울역 ⇒ 광주행 열차. 광주역 ⇒ 광주 버스터미널(택시 기본요금) ⇒ 해남행 버스
- 울역 ⇒ 목포행 열차. 나주역 ⇒ 영산포 터미널(택시 기본요금) ⇒ 해남행 버스(권장)
  해남은 전라남도 남서(南西)에 돌출하여 완도(莞島)를 남동쪽에, 진도(珍島)를 서쪽에 끼고 있는 반도다.
그 바다 연안은 리아스식 해안이라서 굴곡이 심하다. 해안선 길이가 520km, 도서(島嶼) 수는 105여 개로 국립해상공원 다도해(多島海)를 형성하고 있다.
해남군은 전남 시(市)와 군(郡) 중에서 가장 넓은 곳이다. 그 넓이가 광주시의 4배로 전남 땅의 7% 정도나 큰 군郡)이라서 어느 군보다 농토가 넓고 따라서 부유하다.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가 1,000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2,000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 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 문답’)
해남은 소도시라서 일찍 가게 문을 닫는 데다가, 늦은 시간에 먹을 수 있는 음식 값이 서울의 두 배 이상이다.
친구가 소개해준 ‘해남 식당’을 찾아가자니 모든 식당이 해남 식당인 데다가 초행길이라서 택시를 타야 하고, 그것도 2인분 이상이어야 하는 데다가 유명하다는 한식은 요금도 2만 원 이상인 모양이다.
그래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버스터미널 근처 찜질방에서 1박을 하였다.

*. 대흥사(大興寺) 가는 길








 

 

 

 

 

 

다음날 아침 6시 50분에 대흥사 행 군내 버스(20분/약 1시간 간격) 첫차를 타고 대흥사를 향한다.
대흥사는 아도화상(阿道和尙)이 544년에  진흥왕 어머니 소지 부인을 위하여 창건하였다는(?) 절로,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의 사찰이요, 다성(茶聖) 초의 대사가(草衣大師)가 기거하던 차문화(茶文化)의 성지(聖地)다.
산이나 명승지의 주차장이나 매표소 근처는 어디나 그 지역 정보의 광장이다.
이곳에도 해남과 두류산 산행 지도를 구할 수 있는 두륜산 도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고 이 고장 출신인 심호 이동주 (李東柱)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강강술래야'가 음각되어 있다.
대학 시절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강강수월래)로 풀이하는 것을 배운 생각난다. 강한 오랑캐(왜구)가 물을 건너 노략질하러 왔다는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려면 좌측 유스호텔 쪽 언덕길로 안내판 따라 올라야 한다.
케이블카는 9시부터 운행하는데 하나의 케이블카에 50명이 탈 수 있다. 전망대인 고계봉(高?峰, 638m)까지는 8분간 오른다. 길이는 1,600m로 한국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다.
전망대에 오르면 국립공원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맑은 날이면 제주도까지 볼 수 있는 곳이다.
케이블카로 등산을 겸하려면 종점에서 오심재(悟心재) 차도까지 내려가서 1시간여 거리의 노승봉(능허대, 685m)- 가련봉(703m)- 만일재- 구름다리로 유명한 '두륜봉(630m)'을 향할 일이다.
버스주차장은  '두륜산 대흥사 관광시설지역'으로 매표소와 상가가 즐비한 곳에 멋진 나무 데크가 시작된다. 거기가 '추억의 거리'인 모양이다.

집단시설지구에서 사찰까지의 아침 길에는 사람 하나 없는 2Km의 고즈넉한 거리였다. 한반도 남쪽 끝이라선지 단풍이 선혈처럼 붉은 단풍이 가을이 깊었건만 아직도 여전하다.
굽이굽이 우측의 커다란 내를 따라가다 보나 구곡 유수(九曲流水)로 옥구슬을 굴리는 듯한 물소리가 일품인데 대흥사까지 아홉 구비마다 9개의 멋진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 초입에 우람한 일주문이 나타나는데 이상하다. 일주문은 기둥 2개가 ‘一’(한 일자)라 一柱門(일주문)이라 하는 것인데 기둥이 4개다. 그래서 이 문은 산문(山門)이라고 한다. 

게다가 현판이 ‘頭崙山大芚寺’ 로 우리가 알고 있는 ‘頭輪山大興寺‘가 아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그 현판 아래에  대흥사 옛 이름 대둔사‘란 친절한 설명 현판이 있다.

-두륜(頭輪山)이란 뜻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해서 '두륜' 또는 '둥근 머리산'이라는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 두륜산은 예로부터 큰 언덕(산)이란 뜻으로 ‘대듬’ 또는 ‘한듬’으로 불렀다. 그래서 대흥사를 옛날에는 ‘한듬 절’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을 한자화하여 대둔사(大芚寺’)라 한 것이다.
'대둔 산지(大芚山誌)'에 의하면 ‘頭崙山’(두류산)이란 명칭은 白頭山(백두산)의 ‘頭’(두)와 중국 전설 속의 산인 崑崙山(곤륜산)의 ‘崙’(륜)에서 따 온 이름이라 한다.
그 산 이름의 ‘崙’(윤) 자 대신 이 산의 모습이 수레바퀴 같다 하여 우리가 더 많이 쓰는 輪( 수레 윤) 자로 바뀐 모양이다.
그 ‘대둔사’ ‘대흥사(大興寺)’로 바뀐 것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13 대종사와 13 대강사가 이 절에서 배출되어 불법을 크게(大) 일으켜(興) 세웠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대흥사 일원을 오르내리다 보면 곳에 따라 대흥사(大興寺)와 두륜사(頭崙寺) 등으로 나오는데 한자마저 ‘頭崙寺/ 頭輪寺’로 서로 다르다. 해남에는 식자(識者)가 없는가. 이를 하나로 통일함은 간과할 일도 망설일 일도 아닌 시급한 일인데-.
대흥사 뒤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금당천을 끼고 오르는 길에는 매표소서부터 대흥사 주차장까지 1.23km의 숲 속 산책로도 도 있다.

 이곳이 도립공원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절 바로 몇 m 앞에 식당이 있는가 하면 민박집이 있다. 개울가 민박집, 유선관이 그것이다.
알고 보니 그중 ‘유선관(遊仙館)’은 1914년에 지어 대흥사를 찾는 손님들이나 판소리의 가객들이 묵던 12칸짜리 전통한옥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취화선’, ‘서편제’ 등의 촬영 장소 요, 5.18 의거자들이 모이던 중요한 곳으로 한국 최초의 여관이기도 하다.

*. 대흥사(大興寺) 이야기 
 대흥사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우측으로 왕벚나무 자생지 가 있다. 거기 천연기념물 173호 왕벚나무가 2 구루가 있는 모양이다. 

이 왕벚나무가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국화(國花) 같은 대우를 받는 사꾸라가 되었다는 귀한 것이다. 
피안교(彼岸橋)를 건너다보니 나도 이제는 이승을 벗어나는 것 같아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비로소 일주문(一柱門) 나타난다.
이어서 길가에 커다란 부도밭(浮屠殿)이 있다. 여기에는 50 여 기의 부도와 14개의 비석이 두어 줄로 도열하여 있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넣는 탑으로 이곳에는 서산대사와 그의 문도,  법승 13 대종사와 13 대강사를 모셨다.
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海脫門(해탈문)이 있고, 사천왕들이 있을 자리 양쪽에 나무 동자상이 있다.
대흥사도 순천의 선암사와 같이 사천왕이 없어도 절을 지켜줄 지형인가 보다.
대흥사의 당우(堂宇)의 배열은 금당천(金塘川)을 중심으로 크게 둘로 나뉜다.
대웅전 일원의 북원(北元)과 천불전, 표충사를 중심으로 한 남원(南院)이다..
그 나뉨 길 광장에 서산대사의 ‘삼몽시(三夢詩)’가 눈길을 끈다.

  主人夢說客(주인몽설객)   주인이 나그네에게 꿈 이야기하네
  客夢說主人(객몽설주인)   나그네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하네
  今說二夢客(금설이몽객)   지금 꿈 이야기하는 두 사람 다
  亦是夢中人(역시몽중인)   역시 꿈속의 사람이네
                                                     -서산대사

. 이 글을 보고 있는 이 사람 ilman도 꿈속 사람이네.

대웅보전 가는 길에 오랜만에 사랑의 나무라는 ‘연리목(連理木)’을 만났다.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 합니다.
뿌리가 서로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 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릅니다. 연리(連理)란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부모의 사랑, 화목한 부부,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라고 합니다.
대흥사 연리목은 천년 된 느티나무로 왼쪽 나무는 음(陰)의 형태, 오른쪽은 양(陽)의 형태로 나무도 남녀가 천년 동안 사랑을 하고 있는 모양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연리 나무를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吉兆)로 여겼습니다.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진실한 마음을 기원하고 108개의 등에 불을 밝혀 소중한 인연과 아름다운 사랑을 기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는 바람에 꺼지지 않게 옹기로 만든 많은 촛대가 있었다. 

*. 대흥사의 현판(懸板) 이야기

대흥사 대웅전을 가려면 금당천의 멋진 무지개다리 일심교(一心橋)를 건너 누하 진입문인(樓下進入門)인 침계루(沈溪樓)를 지나야 한다.

'沈溪樓'(침계루) 편액은 서예가 원교 이광사(李匡師)가 쓴 글씨이다.
그 '沈溪樓'(침계루) 편액처럼 대흥사의 각 전각들의 현판 글씨는 크고 장엄한 것이 범상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해남은 역대로 제주도로 귀양 가는 대 선비가 귀양 와 머물거나 거쳐 가던 곳이어서 그분들의 필적이 많이 남아서 그런 것 같다.
다음은 제주로 귀양 가던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조선 후기 서화가 이광사(李匡師)에 얽힌 일화다.

- 1840년(헌종 6)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다.
거기서 이광사가 썼다는 '大雄寶殿' 현판을 보고 조선의 필체를 망가뜨리는 글씨라며 직접 자신이 대웅보전의 현판을 써주고 갔다.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가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걸리지 않고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전날 자신의 부끄러운 아집(我執)에 사과를 하며 다시 내다 걸게 하였다.
이를 사과한다는 뜻으로 써 주고 간 것이 백설당의 ‘無量壽閣(무량수각)’ 이란 현판이다.

원교 이광사(李匡師)는 영조 때 소론 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진도에 귀양 와서 거기서 생을 마친 명필가다.
대흥사에는 그 이광사가 쓴 현판에 외에도 해탈문, 침계루, 천불전 등이 더 있다.
천불전에 들어가려면 U자 모양의 문지방이 있는' ?虛樓'(가허루)의 편액은 명필 이삼만(李三晩, 호 蒼巖)의 글씨다.

-그는 어린 시절 대흥사 ‘대웅보전’을 쓴 이광사(李匡師)에게 글씨를 배웠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글씨에만 몰두하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사람이다.
병중에도 하루 1,000자씩 글씨를 쓰는 서예가로, 평생에 벼루 3개를 먹을 가느라고 구멍을 냈다는 명필이다. 그는 특히 초서를 잘 썼다.


그래 그런가. '?虛樓'(가허루)란 편액 글씨를 보면 기러기처럼 날아갈 듯한 필체가 힘찬 것이 기세가 등등하다. 
대흥사 대웅전 계단 오르는 양 쪽에 두 눈을 부릅뜬 한쌍의 사자 머리 조각의 석상이 있고 그 양 옆에 괘불을 거는 나지막한 당간지주가 있다.
대흥사 대웅전 축댓돌에는 이상하게 음각한 글씨가 있어 자세히 보니 ‘대웅보전 기단 축석 중수기’로 시주자 명단이었다.
대흥사 와서의 유감은 너무 시주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중요한 전각 앞마다 다른 절에서는 보지 못한 촛불 밝히는 수십 개의 옹기로 만든 조형물 설치도 그렇지만 각종 현수막이나 기와 시주, 윤장대는 물론 심지어 연리목까지 돈타령인 것 같아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개화 불사의 의미: 기와 한 장을 시주한 공덕은 집 없는 업보를 면하게 하고
무진겁래로 지은 업장을 소멸하여 세세생생토록 불자님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 공명이 충만하여 모든 소원이 성취됩니다.                -기와 시주 접수처
                                                                                                                              
이런 똑같은 글이 한 곳에 2개씩이나 걸려 있는 것도 그랬다.

*. 천불전(千佛殿) 이야기
 

  -천불전으로 들어서는 가허루(?虛樓) 문지방은 U형으로 마치 소의 멍에와 같이 생겼다.
이는 천불전 앞산의 ‘오도재(悟道재) 능선‘과 천불전 뒷산의 ‘오심재(悟心재) 능선’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허공 가운데 다리를 의미한다. 이 다리는 인간세상인 차 안(此岸)에서 부처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연결시키는 교량 역할을 이른다는 뜻이다.
20여 년 전에 왔을 때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낡은 옛 문지방을 새로 바꿔놓았다.

-천불(千佛)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서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들로 극락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천불전(千佛殿)에는 맨 앞의 석가모니를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에서 모시고 서있다.
그 뒤로는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대흥사의 10여 명 스님들이 6년 동안 완성하였다는 1,000불을 모셨는데 그 형태가 각각 다르다.
  그 천불을 이곳에 모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영험한 전설이 전하여 온다.

   - 고려 순조 무렵 경주에서 조성된 1,000 개의 불(佛)을 2척의 배에 싣고 오다가 울산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768여 구의 옥돌을 실은 배 1척이 일본 천불 대도포에 정박하게 되었다.
일인들은 기쁜 마음에 좋아라 절을 지어 봉안하려 하였더니, 일본 현감의 꿈에 조선사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불상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현몽하는 것이었다. 이를 확인해 본 일인들은 옥불을 그냥 돌려보내기가 아쉬워 불상 밑면에 ‘日’ 자를 새겨 둔 후 보냈다.
                                                                                                                                                    -
*. 표충사(表忠嗣)

표충사(表忠嗣)는 서산대사의 위국 충절의 애국심을 기리고 선풍(禪風)을 뿌리내리게 한 대사를 추모하고 재를 올리기 위해서 1669년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서산대사가 열반 시에 남긴 유언에 따라 선조가 내린 교지(敎旨)와 의발(衣鉢, 가사와 스님의 밥그릇) 등을 모신 곳(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서산대사 좌우에 사명(四溟), 처영(處英), 영정을 모신 곳이다.

 表忠嗣(표충사)란 편액은 정조가 내린 친필이다.
숭유척불(崇儒斥佛)의 조선 시대에 유교적인 충의를 강조한 사당이라 그런지 유생들의 횡포를 막을 수가 있어 인근의 송광사, 선암사와 어깨를 나란히 발전할 수가 있었다는 대흥사였다.

그러나 당시의 두륜산과 대흥사는 국토의 맨 끝인 귀퉁이에 치우쳐 있는 뛰어난 명산도 유명한 절도 아니었다.
그러던 것을 지금 같이 빛내 준 분이 오로지 서산대사였다.
서산대사 덕분에 대흥사는 조선 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 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이 대흥사 일원을 ‘문화재 자료 제78호’로 지정되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 서산대사 이야기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호는 청허(淸虛)요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호를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하게 된 것은 대사가 주로 주석한 묘향산(妙香山)에서 연유한 것이다.
예로부터 한국 4대 명산의 하나인 묘향산은 수이장(秀而壯)이라 하여 동쪽의 금강산(東金剛)에 비하여 묘향산을 서금강(西金剛)이라 하여 서산대사(西山大師)라 하게 된 것이다.

  -대사가 출생하기 전 어머니 김(金)씨가 어느 날 밤 한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주는 태몽을 꾼 이듬해 봄에 아들을 낳았다. 3세 되던 해 사월 초파일에 그의 아비가 연등불 아래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 스님을 뵈러 왔다.”하고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아이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사의 아명(兒名)은 '운학(雲鶴)'이라 하였다.

9세에 조실부모하고 출가하여서 30세에 당시로는 불교계에서는 출세 길인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대사는 묘향산에 주로 기거하다가 임란 때는 선조의 명을 받아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평양 탈환 등에 혁혁한 공을 세워 8도 16종 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의 직분을 받았다..
다음은 묘향산에서 입적(入寂)할 때의 이야기다.

  -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 오게 하였다.
 八十年前渠是我    팔십 전저거시아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아시거      80년 후는 내가 너로구나!

, 하는 시를 자기의 영정 뒷면에 써서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처영에 주라 하고,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전 서산대사는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여 재(齋)를 받게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두륜산은 국토의 귀퉁이에 있어 명산은 아니다. 왕의 교화가 제대로 미치기 힘든 먼 곳이지만, 어리석고 아둔한 풍속을 깨우칠 수 있으며 처영 등 여러 제자들이 남방에 있으므로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은 바로 대흥사라고 하였다.
서산대사는 두륜산 대흥사 일대를 萬古不破之地 三災不入之地(만고불파지지 삼재불입지지)라 하였다.

삼재(三災)에는 전란. 질병. 기근의 소삼재(小三災)와 화재. 수재, 풍재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 그래 그런가, 두륜산 대흥사는  임란과 6.25의 전화를 입지 않았다는 명당자리였다.

 

*. 동다실(東茶室) 이야기

   '이제는 두륜산 등산을 시작해야지- '하고 나서다 보니 연못이 있다. 무염지(無染池)였다.
그 못 위에 지팡이를 부여잡은 스님 동상이 있다. '누구일까?'하고 가보니 대흥사 13대 종사 초의선사였다.
 
초의선사(草衣禪師)의 속명은 장의순, 호는 초의(草衣) , 당호는 일지암(一枝庵)으로 무안 출신이다. 
15살에 강변에서 놀다가 탁류에 휩쓸려  죽을 고비에 어느 승려가 구해 주어 그 인연으로 16세에 출가한 고승이다.
불교, 유교, 도교에 통달하여 당시의 대 선비 정약용, 김정희 등과 교유가 깊었다. 스님은 선사상(禪思想)과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특히 한국 다도(茶道)의 정립자로 다성(茶星)이라 추앙을 받는다.

초의선사는 항상 제법 불이(諸法不二)를 부르짖었다.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 했다.


그렇다면 '차(茶)와 등산도 둘이 아닌데' 어찌 그냥 갈 수 있을까 해서 그 앞 동다실(東茶室)에서 우전차를 낭만 속에 마셨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차 한 잔에 5,000원씩이나 주고 마신 것은 난생처음으로 오로지 초의선사(草衣禪師) 덕이었다.